무엇이든 밤을 견디게끔 해 준다면 (3)
16. 무엇이든 밤을 견디게끔 해 준다면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 (3)
“시그리드 공,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전하, 우리의 명예를 짓밟은 데 대해 마땅한 보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술집 주인 헤니히의 정직하고도 살벌한 협박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귀족들은, 저들이 갇혀 있던 창고에 디폴트와 함께 시그리드가 나타나자마자 ‘이제 살았다’ 안도하면서도 시끄럽게 아우성을 쳤다.
시그리드의 애매모호한 지위와 그 이름 위에 덧붙은 온갖 칭호 탓에, 부르는 예법이 제각각으로 꼬인 것은 덤이었다.
“듣자하니 그쪽에서 먼저 잘못을 저질렀다던데요.”
적반하장으로 떠드는 모양새에, 살짝 짜증이 난 시그리드가 꼬집었다.
“그, 술기운에 잠깐 부적절한 말을 했을 뿐입니다. 어떤 악의를 품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한 번 더 반복해도 큰 탈은 없겠네요. 어디, 들려주시지요.”
그제야 귀족들은 깨달았다. 이 순진해 보이는 여인이 튜튼 기사단을 때려잡고 황제 지기스문트를 인질로 잡았던 그룬발트의 마녀임을.
그들이 심취해 있던 기사도 문학에는 편력기사에게 시련을 주는 귀부인 얘기는 있었지만, 그 시련이 이런 방식으로 찾아오리라는 언급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다들 들을 준비가 되신 듯하군요.”
듣기 좋은 침묵이 답변을 갈음했다.
“먼저 한 가지 큰 오해들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우리 솔직히 말해보기로 해요. 다들 저랑 결혼해서 이 땅의 부를 손에 넣으려고 찾아오신 것 맞지요?”
얀 지슈카 말마따나, 진실은 승리하는 법.
다들 차마 입 꾹 닫고 말은 못 하면서도, 눈치 보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 명의로 된 재산이라 해봤자, 저기 동녘정착지에 있는 집 한 채가 전부랍니다.”
그마저도 지금은 파울이 대신 관리하면서, 가르다르에 찾아오는 칼라알릿 사람들 머무는 숙소로 삼고 있었다.
‘대탕녀 바빌론’이 실제로는 어지간한 유럽의 성직자보다 청빈하다는 충격적 사실에, 당황하는 눈빛이 여기저기 오갔다.
“그러면 이곳 신대륙에 우리가 일궈놓은 기반은 누구의 것이냐고요?”
다들 이쯤에서 품었을 법한 의문을 먼저 꺼내주는 시그리드였다. 실제로는 신대륙의 정착지 따위는 아무도 관심이 없고 그저 신대륙의 황금이 누구의 것인지, 그것 하나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그야 모두의 것이지요. 물론 그 기반을 관리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통치의 권한이 몇몇 사람들의 손에 쥐어지긴 해야 하겠지만요.
유럽의 영주들도 다들 그런 말을 하면서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곤 하지요. 하지만 신대륙 연합의 수장 자리는 - 아직 정식 명칭은 정해지지 않았지만요 – 선출직이랍니다. 제 마음을 사려고 노력해봤자, 다음 선거에서 다른 사람이 뽑히면 모두 허사가 된다는 뜻이지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나온 아돌프가 물었다.
“선거라니, 이 신대륙에 선제후를 두어 정착지들을 봉지로 나누어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저의 눈앞에 있는 시그리드도 허울뿐이지만 데스포이나라는 작위를 지니고 있고, 남쪽 우애의 도시에는 콘스탄티노스 황자도 있으니, 봉신을 거느리겠노라 선언해도 딱히 흠은 없었다. 영주는 자신의 영지 내에서는 황제와 다름없었으니.
“우리 그린란드에는 모든 자유민들이 모인 팅에서 공동체의 일을 함께 논의하는 미풍양속이 있었답니다. 그리고 이곳 신대륙의 모든 사람들은 자유민이고요.”
그제야 귀족들 사이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났다.
조금 물정 밝은 이들은, 유럽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몇몇 땅, 예컨대 알프스 산속이나 독일 저지대의 습지¹에는 아직도 그런 식으로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무리가 있음을 상기했다. (물론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같은 사례도 있기는 했지만, 이 누추한 정착지를 피렌체나 베네치아에 비유하는 표현을 입 밖에 낸다면 가문의 돈줄이 끊기고도 남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 신대륙은 그런 곳들과는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우리는 이곳 빈란디아 개척을 시그리드 공이 홀로 주도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대체 왜 그런 질서를 이곳에 세우신 겁니까?”
“그야 제 마음이죠, 뭐. 우리 연합 표어가 괜히 ‘우리 자신의 뜻대로Nostra Sponte’겠어요?”
‘우리 자신의 뜻대로’라는 말은 조금 경박하게 되풀이하면 ‘제멋대로’라는 뜻. 여전히 심통이 나 있던 시그리드가 시큰둥하게 반박이 불가한 논리를 내세우니, 잠깐 열렸던 귀족 자제들의 입은 도로 닫혔다.
“마저 들어보세요. 만약 여러분이 이곳 신대륙의 정착지들에 정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으시다면, 훨씬 쉬운 방법이 있답니다.
바로 여러분의 영지로 돌아가서, 이주민들을 모아서 이곳 신대륙으로 보내는 거지요.”
선거철에 저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을 데리고 상경해 선거에 개입하는 술책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열혈 추종자들과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넌 이래 실전된 고대인의 지혜였다.
“이주민? 그러니까 우리 영지의 사람들을 보내라는 말씀이십니까?”
“꼭 여러분 영지에서만 부담할 필요는 없지요. 여럿이 힘을 합쳐도 되고, 아니면 다른 곳에서 모집해도 되고요.”
독자적으로 신대륙을 개척할 만한 여력이 되는 이들이라면 굳이 시그리드와 혼인을 모색할 필요도 없었다. 직접 함대를 꾸리고 개척자를 모아서, 황금이 나는 땅 근처에 새로 저들의 말만 듣는 식민지를 꾸리는 쪽이 훨씬 나았으니까.
반면 이곳에 찾아온 귀족들은, 도저히 저들 힘만으로는 신대륙을 개척할 수 없는 고만고만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나마 합스부르크 가문이 세력 좀 있는 축에 들었는데, 그마저도 신성로마제국 내에서나 명문으로 꼽힐 뿐이요, 바다 구경이라도 해볼작시면 베네치아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허나 세력이 없다고 해서 욕심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시그리드가 이루어놓은 기반을 혼인을 통해 날로 먹을 심정으로 찾아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².
“그렇게 사람들을 모으다 보면,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주군 되는 이들이 이곳 신대륙 연합의 수장으로 뽑히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겠어요?”
따지고 보면 아직 선거에 관한 법은커녕 헌법조차 제정되지 않았으니, 유럽의 군소 영주가 신대륙의 영도자/대통령/총통 등등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시그리드의 말은 분명 참말이었다.
“설령 독자적으로 과반을 이루진 못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합을 맞추어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처음에는 마치 보헤미아 평민이 온 독일의 주인이 된다는 뜬금없는 소리처럼 시그리드의 얘기를 듣던 귀족 자제들은, 조금씩 그 언변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정부情婦 하나 함부로 못 둘 만큼 드센 마녀를 아내로 둔다는 것부터가 께름칙하고 무서운 일이긴 했다. 튜튼 기사단장 융잉엔의 울리히도 쏴 죽인 시그리드가 남편이라고 못 죽이겠는가 (폴란드 국왕 요가일라의 노력이 무색하게, 시그리드의 악명이 워낙 높다 보니 이런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원하기만 한다면, 마치 취미로 포도주 모으듯 남편을 모을 수도 있으리라.
“정말로 모든 사람이 국왕 선거에 나설 수 있도록 하실 생각이십니까? 갓 넘어온 이민자도요?”
“물론 어느 정도의 분별은 두어야 하겠지만, 어차피 다들 넘어온 지 얼마 안 된 처지에 누가 먼저 왔니 늦게 왔니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니겠어요?”
보헤미아인들이 그러고 있다는 것처럼, 바덴 사람이나 헤센 사람, 슈바벤 사람들끼리 파벌을 꾸리고, 그 머릿수에서 나오는 영향력을 바탕으로 신대륙 개척에 지분을 얻는다.
시그리드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보다야 훨씬 타당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바다가 잔잔해지고 다음 배편이 도착할 때까지는 이곳에 머무셔도 좋습니다. 그 이후로도 정당한 대가를 치른다면 이곳에 남아계셔도 좋고요. 돌아가시는 대로 제 제안을 주변에 널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제야 창고 안에 갇혀 있던 귀족들은, 저들의 생사여탈권이 저들을 내려다 보는 은발 여인에게 있음을 깨달았다. 이목이 많고 유럽과 계속 교역하는 좋은희망에서야 당연히 유럽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겠지만, 돌아가는 길 먼바다에서 불행한 해난사고가 발생하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을 테니까.
“그, 흠흠, 사과하겠습니다. 제가 일시의 취기로 함부로 귀한 분을 모욕...”
“사과는 저 말고 다른 분들에게 하세요. 그간 행패를 많이 부리셨다고 하던데.”
찔리는 구석 많은 이들부터 사과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한 귀로 흘리며 돌아서는 시그리드였다.
신대륙 연합 사람들 중 1419년에 시그리드가 신대륙 연합의 수장 자리에서 내려올 가능성을 가설로나마 고려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권교체에 익숙한 로마인들이나, 국왕을 인질로 잡아본 경험이 있는 보헤미아인들, 팅의 사정에 밝은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사람들을 모두 수소문해야 겨우 몇 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농민이 영주를 선출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해본 기사단국 출신 독일 농민들이나, 숲과 설원의 척박한 환경 탓에 씨족 단위 생활이 정치적 경험의 전부였던 칼라알릿이나 니놀리노 사람들은 애초에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또한 시그리드의 속마음과 그 머릿속 미래 지식의 존재를 잘 아는 연합의 지도층 역시 당연히 시그리드가 1419년 이후에도 연합의 수장으로 재직하리라 내심 여기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시그리드만큼 이 연합을 이루는 천차만별 사람들과 골고루 엮여 있는 이가 없었다. 그나마 시그리드 다음으로 지명도가 있는 사람들은 언제 죽어도 이상치 않은 나이(마흔 살 이상)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스와 플레톤 등 임시의회의 굵직한 사람들은, 1419년 선거를 나름 진심으로 준비하며, 슬슬 저들의 이 불안정한 공동체를 어떻게 꾸려나갈지 법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배운 사람이 외려 더 어리석을 때도 있다는데, 딱 그 말이 맞는 듯합니다.”
시그리드가 디폴트와 함께 귀족들 만나러 떠난 뒤, 자리에 남은 후스가 가볍게 자책했다.
“사실 시그리드가 지적한 점을 우리가 진작에 먼저 깨닫고 조언을 해 주었어야 했었는데 말입니다.”
뭐라 핀잔을 주려던 플레톤은, 후스의 자책에서 자신도 자유롭지 못함을 깨닫고 딴소리를 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었겠소.”
시그리드가 1419년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 신대륙 연합을 이끌 예정이기는 했지만, 그 연합의 모습이 어떠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후스와 플레톤 두 사람을 포함해 신대륙 연합의 몇 안 되는 식자들이 천착하고 있던 부분도 여기에 있었다.
오지 않을 미래의 표현을 빌리면, 초대 대선 결과가 정해졌다고 해서 의회의 의석 수까지 정해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신대륙 연합에서, 사람들 간의 의견이 갈리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고, 이미 지난날 보헤미아인들과 반보헤미아인 파벌의 논쟁으로 그 조짐이 드러난 바 있었다.
그리고 시그리드 역시 딱히 그 대립을 문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연하고 심지어 바람직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 생각에만 매달리다 보니, 구혼자들이 신대륙 전체가 시그리드의 영지인 양 착각하며 바다를 건너왔을 때도 대처가 늦었다.
허나 후스와 플레톤의 자책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유럽 귀족들이 연금되어 있던 창고에 갔던 시그리드가, 밝은 표정을 한 채 금방 돌아왔던 것이다.
“저 무뢰한들이 순순히 얘기를 들어주었나 보구나.”
“네. 다행히도요. 돌아갈 때까지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그간 잘못한 것을 모두 뉘우치고 사과도 하겠다고 맹세한 사람들만 풀어주라고 지시를 해두었어요.”
그 말인즉슨, 결혼으로 신대륙에 대한 권리를 얻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저버리고 정정당당하게 머릿수 싸움으로 권리를 쟁취하라는 시그리드의 제안이 잘 전달되었다는 뜻.
“허.”
“저들에게는 그쪽이 더 솔깃할 터. 순순히 받아들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영지에 남는 것은 사람뿐인 영주들이 적지 않았다. 그나마 풍요로운 보헤미아에 독일인들이 계속 몰려들던 까닭을 잘 알고 있던 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칫 그런 이들의 원한을 살 뻔한 것을, 오히려 이민자를 끌어들이는 계기로 삼았으니, 어떻게 잘 풀릴 기미가 보인다고 단평해도 괜찮을 것이었다.
“그런데 저들이 제안을 너무 잘 받아들여도 그것 나름대로 문제 아니오? 지금도 이토록 갈등의 조짐이 있는데, 독일 각지에서 이주민들이 더 넘어온다면 그때는 곤란해지지 않겠소? 뭐, 보헤미아인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면 우리 나머지 사람들이야 조금 유리해지긴 하겠지만.”
후스가 뭐라 하면 어느새 타박부터 놓고 보는 게 일상이 된 플레톤이 딴죽을 걸었다. 그 옛날 – 이라 해봤자 몇 년 안 되었지만 - 동녘정착지에서 신대륙 공용어를 논의할 때부터 굳어진 버릇이었다.
허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금도 시그리드에게 가장 덜 호의적인 이들이 바로 기사단국 출신 독일인들이었는데, 보안관 디폴트라는 사실상 대표가 있어 묵묵히 시그리드와 임시의회의 결정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시그리드와 아무런 연이 없다가 갑자기 ‘너, 우리 영주님의 개척단에 들어와라’ 하는 높으신 분들 말씀에 끌려 신대륙으로 넘어오게 된 독일인들은 더욱 모난 돌이 될 것이었다.
“꼭 독일인들이 아니라도, 앞으로 넘어올 이민자들은 다 그럴 거에요. 그러니까 더더욱 그 사람들이 잘 적응할 수 있게, 그리고 다른 이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도와줘야 하지 않겠어요?”
“영주들이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
“어차피 바다 건너에 있잖아요. 신대륙으로 넘어온 이들이 옛 대륙의 지배자들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야 한다고 여긴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 아닐까요?”
지금쯤 저들의 임시 감옥을 벗어나 있을 귀족 자제들이 들으면 역시 그린란드의 마녀다운 음험함이라고, 주변에 귀가 없는가 서너 번쯤 살핀 뒤 속삭이며 험담할 만한 생각이었다.
신대륙에 저들의 지지자들을 보내 의사결정에 지분을 얻으라고 꼬드겨놓고, 그 지지자들이 신대륙에 도착하는 즉시 교육을 명분삼아 헛바람 불어넣을 작정을 하고 있으니, 바빌론의 대탕녀가 범하는 죄악을 고발하는 성직자들의 말에 틀린 것 하나 없다고.
그러나 그들은 지금 디폴트 앞에서 저들의 잘못을 고해바치며 당분간 행실에 주의하겠노라 맹세하는 데 바빴다.
더구나 시그리드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었다.
“몇 달 전까지 농노로 지내던 사람에게 ‘이제부터 당신은 자유입니다’ 해준다고 해서 진짜 자유민이 탄생하는 건 아니잖아요. 최소한 이 땅에 우리가 어떤 규칙을 세우려고 하는지, 그리고 어떤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지는 알려주어야지, 그러지 않고 치르는 선거가 의미가 있을까요?.
만약 영주가 정말로 영지 사람들을 잘 대해주었다면, 그 영지 출신 개척민들이 고작 교육 조금 받는다고 마음을 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지도 않고서 변함없는 충성을 바란다면 그것이야말로 도둑놈 심보 아니겠는가?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군. 그나저나 교육이라...”
“검은 책에도 그런 얘기가 있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의무교육이라고.”
검은 책의 내용을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대충 어떻게 짜여 있는지, 무슨 내용이 들어가 있는지 정도는 술술 꿰고 있는 후스와 플레톤이었다. 책이 귀한 세상에서 학문을 하려면 암기력은 필수였으니까.
“네, 맞아요. 그런데 그 이상의 내용은 딱히 없답니다.”
“저런.”
“그러면 무엇으로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인가?”
“글쎄요? 그건 선생님들께서 해주셔야지요?”
시그리드가 당연한 얘기라는 양 되물으며, 두 저명한 학자에게 순진한 눈빛을 보냈다.
플레톤이 고개를 끄덕이며 뻔뻔하게 대꾸했다..
“아마 그건 프라하 대학의 저명한 학자로 온 유럽에 명성 자자한 얀 후스 선생께서 잘 해주실 것일세.”
“아니, 분명 며칠 전에는 우리 서방 학자들의 학문에 근본이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근본이 없는데도 거기까지 성취를 이룬 건 대단한 일이지. 암, 그렇고말고.”
“솔직히 말하면, 플레톤 선생님보다는 후스 선생님께서 유럽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에 조금 더 가깝긴 하시지요.”
시그리드가 저를 대놓고 괴짜 취급한다는 것쯤은 관대하게 용인하기로 마음 먹은 플레톤이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플레톤 선생님께서도 후스 선생님께서 홀로 고생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으실 거라고 믿어요.”
“그렇기야 하겠지만, 나 같은 괴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 연합의 정체政體에 대한 얘기가 나온 김에 아예 확실하게 못을 박고 가는 게 어떨까요? 당장 제가 다른 이들의 평가를 받겠다고 한 것 외에는 딱히 우리가 무슨 근거로 선거를 하는지도 불분명하잖아요.
이미 두 분이서 종종 이런 쪽으로 얘기를 나누시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기회에 확실하게 법안을 만드는 거에요. 앞으로 우리 연합이 다른 법들을 만들 때 기준이 될 수 있는 그런 법을요.”
“그 일에 있어서는, 이교도 현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정통하였으며, 서방의 모든 학자들을 다 합한 것보다도 지식과 지혜가 뛰어난 자타공인의 석학 게미스토스 플레톤 선생이 최고의 적임자일 듯하구나.”
후스가 썩 어른답다고만은 못할 미소를 지으며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플레톤은 반박은 못하고 째려볼 뿐.
그렇게 프랑스 왕자 샤를의 소소한 음모는 신대륙에서 헌법 초안이 마련되고 기초교육 시행이 준비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유럽의 영주들이 제 손으로 농노들을 우리에게 바치게 만들었다는 것 아니냐? 대단한데.”
올 교역철(가을)에 모아들인 모피를 가지고 좋은희망에 찾아온 스베인은 소문을 듣자마자 감탄했다.
유럽의 신세 처량한 이들에게 새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는 일은 바이킹 선조들 또한 업으로 삼았던 바 있었으나, 도끼를 들고서 ‘자발적’ 결단을 일일이 촉구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시그리드가 이번에 부린 술책은 실로 온고지신의 사례라 할 만했다.
“거기서나 농노지, 여기서는 아닐 거에요. 그리고 저쪽에서 바치는 게 아니라, 자원자들을 모으는 거고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어째 후스랑 플레톤 두 사람이 저들 아랫사람들 부려먹으며 함께 밤을 지새고 있더라니.”
등불을 켤 고래기름이야 좋은희망에는 넘쳐나고, 원기를 북돋을 만한 음료로는 – 코코아는 진작에 다 떨어졌지만 - 메이플 차가 있었다.
슬슬 1419년 이후의 질서를 고민하던 두 지식인에게, 저들의 머릿속 구상을 펼쳐보일 기회를 주었으니, 서로 눈치가 보여서라도 쉽게 물러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물며 제멋대로 헌법 초안을 만드는 플레톤에게 시그리드가 다가가, 그러지 말고 후스네 보헤미아 사람들도 만족할 만한 다른 안도 하나쯤, 기초만이라도 잡아달라 부탁하였으니, 학자의 자존심이 있는 한 도저히 거절하거나 도중에 포기할 수 없는 노릇.
“원래 고생은 다 같이 하는 거지. 나는 좋은거래에서 고생했고, 너는 저 남쪽에서 고생했으니, 이제 어르신들도 고생할 때가 된 것 아니겠냐.
그나저나 내 아들 얘기나 마저 들어봐라. 아, 글쎄, 녀석이 엄마 닮아서 얼마나 영특하냐면...”
인구가 이백 명까지 불어난 좋은거래 정착지의 가장 어린 주민은 바로 스베인의 아들 비요른, 혹은 카나스탓시의 아들 오치콰리Ochquari로 불리는 갓난아기였다. (두 이름 다 곰이라는 뜻으로, 스베인의 체구를 물려받은 아이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비요른/오치콰리의 이름은 교역의 강을 따라 널리 퍼져 있었으니, 올 교역철(가을)에 모아들인 모피를 가지고 좋은희망에 찾아온 스베인이 가는 곳마다 저의 아들 자랑을 늘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아들녀석한테 바다 구경도 시켜주고 너랑 리프한테도 보여줄 겸 데려오려고 했는데, 카나스탓시가 안 된다고 하더라. 참 아까운 일이지. 아무튼 나중에 말비욤 맞히러 올 테니 그때 녀석이 얼마나 영특한지 보여주도록 하마.”
니놀리노 부족민들 사이에 한 번 천연두가 돌았는데, 큰 피해 없이 우두 말비욤 – 원래는 백신으로 불렸을 - 접종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그간 푸른들판의 목장에 있는 모든 소를 하나씩 감염시켜가며 겨우 우두 바이러스의 명맥을 유지한 보람이 있었다.
허나 아들 자랑을 막 이어가려던 스베인은, 그제야 시그리드 표정이 썩 밝진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차, 미안하다. 내가 입이 방정맞았다.”
“괜찮아요. 어차피 몰려온 구혼자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도 없었던 걸요, 뭐.”
우애의 도시가 어설프게나마 도시 꼴을 갖추게 되면서, 콘스탄티노스 황자도 남쪽의 동포들 곁으로 가고, 스베인은 좋은거래에, 파울은 동녘정착지에 있었으니, 일이 일단락된 지금 시그리드가 문득 외로움을 느끼는 것도 인지상정이었다.
저들의 목적은 달성치 못하고 엉뚱한 계획에 어영부영 동참하게 된 채 고향 돌아갈 배편만 기다리던 귀족 자제들은, 제각각 다양한 방식으로 소일을 하고 있었다.
영지의 인구가 신대륙 연합과 비등비등한 한미한 집안 젊은이 몇몇은 아예 디폴트처럼 이곳에 눌러앉아 보안관 노릇을 하겠다고 설쳐댔다. 불량배 한스가 선수를 쳐서 디폴트의 부관이 되었다는 사실과, 그 한스가 그린란드 연대에서 후임들에게 꽤 악명 높았다는 사실을 들은 뒤에는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지만.
또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아돌프는 - 누가 합스부르크 사람 아니랄까봐 - 벌써부터 오스트리아의 고아 소녀들을 모아 이곳 신대륙으로 보낼 계획을 꾸리고 있었다. 이곳 신대륙 개척민들의 거의 대부분이 시커먼 남정네들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³. 그나마 일가족들이 넘어오기 시작하고, 아예 이곳 원주민 처녀들과 눈이 맞기도 하면서 작년부터는 사정이 나아졌지만.
“그거 아느냐? 우리 황자님이 아 글쎄, 옥수수 강 거슬러 올라가는 배에 몰래 타려다가 붙잡혔다지 뭐냐.”
영 울적해 보이는 시그리드를 의식하며, 스베인이 화제를 돌렸다.
“정말요?”
“그래. 왜, 그 놈팽이들 중에 몇몇이 우애 쪽에 들렸다가 이쪽으로 왔지 않았더냐. 그치들이 떠드는 소리를 엿들었던 게지.
그래서, 만약 시그리드 네가 정 누군가와 결혼해야 한다면 자기만큼 고귀한 피의 사람이 없을 거라면서 뛰쳐나왔다지 뭐냐. 포구까지 가지도 못하고 교사 노릇하는 이에게 붙잡혔다지만.”
그 모습이 눈앞에 선하여, 시그리드는 배시시 웃었다.
스쳐 지나가듯 잠깐 에릭에게 느꼈던 그런 호감과는 다른, 뭔가 따뜻한 감정.
먼 땅에서 찾아온 이방인 처녀에게 기꺼이 저들의 운명을 맡긴 수많은 이들. 저를 믿고 프라하와 피사, 콘스탄티노폴리스, 그리고 아스카포찰코와 테노치티틀란을 누볐던 이들.
비단 콘스탄티노스 황자뿐 아니라, 저를 믿고 따라온 사람들 모두를 떠올리며, 시그리드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요는, 그러니까 다들 너를 이렇게 생각해주고 있다는 게다. 콘스탄티노스 황자든, 나든, 우리 안사람이든, 후스 선생이나 파울 그 샌님이든. 가족이 이미 있는데 꼭 서둘러서 누굴 찾을 필요도 없지 않겠느냐?”
“그것도 그렇네요.”
“만약 나중에라도 마음에 드는 사람 생기면 꼭 얘기해다오. 내가 납치라도 해 올 테니까.”
“하하, 마음만 받을게요.”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리프가 맞장구치듯 까르륵대며 우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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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 저지대 습지의 공화정’이란 엘베 강 하구의 늪지대에서 13세기경부터 존재했던 농민들의 자치공동체 디트마르셴Dithmarschen을 말합니다. 본디 교통이 불편하고 썩 수익성 높은 영지가 아니었던 늪지대였기에, 이 일대의 마을들은 12세기를 거치면서 엉겁결에 자치를 획득한 상태였지요. 이후 15세기를 거치면서 자치를 누리는 느슨한 마을 연합은 보다 짜임새 있는 농민 공화국으로 발전해나갔고, 1559년 덴마크의 침공으로 붕괴되기까지 몇 번이나 주변 영주들의 침공을 막아내며 존속했습니다.
2. 몇몇 제국주의 열강이 세계를 나누어 먹다시피 했던 근대의 기준에서는 언뜻 숭어 뛰니 망둥이도 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17세기 중반만 해도 유럽의 어지간한 세력들은 식민지 개척의 유혹에 이끌리곤 했습니다. 스코틀랜드나 쿠를란트(라트비아 일대) 같은 중소국들도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세우려 노력한 바 있고, 특히 쿠를란트는 잠시나마 카리브해에 식민지를 확보하기도 했지요.
이런 이력을 고려하면, 도저히 체급이 안 되는 군소 영주들이 신대륙에 숟가락 얹으려 나서는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3. 고아 소녀들을 모아 식민지로 보내는 것은 식민지 개척 초창기에 많은 유럽 국가들이 취했던 정책이었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유럽 국가들이 세운 초창기 식민지 개척민들은 절대 다수가 남성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본국의 고아 소녀들을 모아 개척자들의 배필이 되도록 하는, (당시 기준) 사회복지 겸 식민지 확장 목적의 정책이 시행되기도 했지요. 포르투갈의 주앙 3세는 16세기 중반 인도의 고아Goa 식민지와 말라카 등지에 고아들을 보내기 시작했고, 그 뒤의 합스부르크(압스부르고) 통치자들도 이러한 관행을 이어갔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 역시 누벨프랑스(퀘벡 일대) 식민지의 사회 안정 및 인구 증가를 위해 ‘왕의 여식들filles du roi’이라 불린 여성들을 보낸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