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70화 (70/116)

무엇이든 밤을 견디게끔 해 준다면 (4)

16. 무엇이든 밤을 견디게끔 해 준다면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 (4)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기나긴 전쟁은 마침내 끝났다.

어딘가에서 놀라운 군재를 지닌 장수가 나타나 평화조약을 파기하고 새 조약을 강요할 만큼의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이상에야, 이 전쟁은 이제 ‘팔십년 전쟁’으로 불릴 것이었다. 이변이 없는 한,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름난 덴마크 보병대의 힘을 빌린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북프랑스 전역을 석권하고 마침내 해협 양쪽 땅의 왕위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고 기록하리라.

평화조약에 따라,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하였으며, 프랑스의 왕위계승자이자 정신병으로 인해 정상적인 통치가 불가능한 샤를 6세의 섭정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했다.

물론 여기에는 걸림돌이 있었으니, 바로 왕자 샤를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점이었다. 후계자로 책봉받지도 못한 채 덴마크군에게 사로잡혀 버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치광이 왕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프랑스 왕자 샤를은 지금 유럽의 모든 왕가를 통틀어 가장 목숨이 간당간당한 사람이라 해도 무방하였다.

“호의에 재차 감사드립니다, 폐하.”

그런 샤를을 거두어 보호해주고 있는 이는, 놀랍게도 덴마크 국왕이자 – 시그리드를 군주로 치지 않는다면 - 오늘날 유럽에서 가장 많은 화제를 몰고 다니는 군주인 에릭이었다.

“마땅히 감사해야지. 그대가 감히 나를 따르는 도시에 밀정을 심어 그런 수작질을 부렸는데도, 나는 그대를 받아들였으니.”

“어차피 제가 더 심한 모략을 부렸다 한들 저를 보호하려 하셨을 것 아닙니까?”

유년의 밝은 눈빛은 이미 모두 잃고, 대신 잔혹한 세태를 뚫고 살아가야 하는 왕가의 사람다운 비정함을 두 눈에 담은 열네 살 샤를 왕자가, 아무 감정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비꼬아 답했다.

“설마 잉글랜드의 헨리 폐하가 책 한 권만을 보고 신대륙 식민지 개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샤를이 손을 쓴 가짜 『멋진 신세계』와, 정말로 함부르크와 코펜하겐에 하역된 테소소목의 황금.

그러나 그 전부터 이미 덴마크가 신대륙에서 올리기 시작한 수익을 질투한 다른 세력들은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황금의 소문이 퍼지고, 그 소문이 진실로 밝혀진 뒤로 달라진 점은, 드러내놓고 신대륙 개척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하나뿐이었다.

영원한 동맹은 없는 법. 지금의 유럽에서 신대륙 개척에 가장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잉글랜드의 헨리는, 곧 덴마크의 듬직한 아군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돌아서리라.

그리고 그날에 대비하는 데 있어 프랑스 왕자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만한 견제책도 없었다.

“그래, 그대의 말이 맞다.”

에릭의 대답은, 멀리서 그를 알아본 스웨덴 사람들의 환호에 묻혀 중간에 끊어져 버렸다.

에릭이 이곳 배스트만란드Västmanland의 제철소와 철공소를 시찰코자 찾아왔다는 소문에 몰려나온 광부와 장인들, 그리고 그 가족들이 환호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내게 그대가 필요한 것 이상으로 그대에겐 내가 필요하다. 그대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도, 우리 둘 중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에릭 폐하 만세’, ‘삼국 동맹 만세’ 등등. 국왕의 행차를 구경하러 나온 군중의 목소리가 조금씩 또렷하게 들려왔다.

“신민들의 사랑을 받고 계시는군요.”

“그들 또한 알게 된 것이지.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저들의 국왕뿐임을.”

에릭은 답을 알고 있었다. 인쇄술과 머스킷이라는 신기술을 그저 신기술로 보지 않고, 어떤 정답을 가리키는 단서로 해석하였으므로.

총칼로 귀족들을 몰아내고 그 권리를 상인들에게 넘겨주었으며, 인쇄술을 이용해 이 사실을 최대한 비틀어 전국에 알린 에릭이었다. 그러므로 얻은 것이라곤 곧 다시 늘어날 세금뿐인 백성들도, 잘은 모르지만 그들을 위해 뭔가 위업을 이루었다고들 하는 저들의 국왕에게 환호하고 있었다.

철공소 안쪽에는, 기계에 밝지 못한 샤를의 눈에도 들여온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기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땅에 풍부한 철광은, 우리의 자랑인 화포를 만들어내는 원료가 되어준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화포는 우리의 군대를 무장하는 데 쓰이고, 남는 만큼은 저 한자 동맹 도시들 중 우리 덴마크를 따르는 이들에게 수출하고 있지.

그러한 방식으로 이 땅의 강철은 바다 맞은편 유럽 본토로 건너가, 황금으로 바뀌어 돌아오곤 하지.”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의 힘으로 쇠를 두들기는 기계들 또한, 한자 동맹의 금으로 사들인 것일 테다. 용병이나 근처 영주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도 저들만의 군대를 저렴하게 꾸릴 수 있다는 것은 도시들 입장에서도 거부하기 어려운 제안이었으니까.

“황금으로 변하는 강철이라...”

“기사가 귀하고 귀족들은 씨가 마른 우리 북방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아마 그대가 살던 프랑스 땅에서 무지렁이 평민들을 조련해서 군대로 육성한다고 하면 볼멘소리 하는 작자들이 적지 않았을 테지.”

사회의 밑바닥을 긁어 만들어낸 덴마크 보병대는 그 가혹한 규율로 악명이 높았다. 애초에 그런 규율로 다스려도 탈이 안 날 만한 자들, 신대륙으로 가는 배를 찾아 무작정 고향을 떠났다가 배편을 찾지 못하고 항구를 떠도는 이들, 도망쳐나온 농노들, 경범죄자들 등등을 모아놓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에릭과 샤를의 발걸음은 그 곁에 새로 차려진 화포 공방으로 향했다.

이미 많은 실전을 통해 검증된 머스킷 외에도, 프라하에서 시그리드와 지슈카가 선보였던 소형 화포들, 심지어 한 번 만들고 말았던 플린트락 피스톨까지, 미래를 만드는 힘을 얻고자 시그리드의 뒤를 쫓는 에릭의 집착이 낳은 수많은 산물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이 강철을 더 이상 황금으로 바꾸지 못하게 되는 순간 이 모든 게 스스로 무게를 감당치 못하고 무너지겠지요.”

한편으로는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이 극히 불안정한 상태임을 깨달은 샤를이 말했다.

언론의 힘과 화약의 힘, 그리고 의술의 힘으로 에릭은 지난 사백 년 사이 그 어떤 덴마크의 군주도 이루지 못한 성대한 위세를 이룩했다. 플랑드르의 도시들은 황금 가득한 궤짝을 코펜하겐으로 보내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조리 에릭을 추종하게 된 바닷가의 한자 도시들은 선뜻 북방의 상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플랑드르는 덴마크의 체급으로는 도저히 삼킬 수 없는 고기요, 한자 동맹의 상인들은 결국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 한여름 밤의 꿈은 언제고 끝나야 하는 운명이었으며, 이 북쪽 추운 땅의 여름은 특히 더더욱 짧았다.

“뭐, 그렇기는 하지. 허나 모험 없이 무슨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겠나?”

덴마크 보병대가 명성을 떨칠 수 있던 이유는 단 하나, 다른 이들보다 한 발 앞서 정답을 베껴냈기 때문.

이미 독일과 프랑스 각지에서 보병대가 활약한 것을 본 다른 국가들도, 서서히 덴마크군과 프라하 민병대가 쓰던 무기와 전술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물론 개혁에 저항하는 이들, 예컨대 화기를 쓰게 되면 귀족들을 포로로 잡을 수 없다면서 반대하는 이탈리아의 용병들 같은 경우도 있었지만, 시일이 흐를수록 그런 목소리는 잦아들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에릭은 그 짧은 기회의 창이 닫히기 전 최대한의 성과를 올리려 노력했다.

“한자 동맹의 도시들에는, 고작해야 현상유지만을 떠드는 지도층에게 질려 내가 그리는 구상, 상인들의 금고가 기사들의 갑주보다 더 큰 힘을 지니게 되는 세상에 열광하는 자들이 있지.

그리고 보다시피, 우리 세 나라의 국민들 또한 코펜하겐에서 찍혀 나오는 위대한 북방의 이상에 감탄하며 기꺼이 나를 따르고 있고.”

지상의 그 어떤 권력으로도, 없는 것을 절로 생기게끔 만들 수는 없는 법.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 세 나라를 합쳐본들 잉글랜드는커녕 플랑드르조차 제대로 유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아, 아무것도 없는 허상에도 기꺼이 저들의 재산과 목숨을 바치곤 했다. 흑사병과 기근, 전쟁에 시달린 지난 수십 년간 숱하게 나타난 이단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그들에게 열렬히 동조하며 저들의 재산과 목숨을 바쳤던 이 땅의 사람들이 여실히 증명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 자칫하면 광기어린 열병으로 도질 수 있는 그 힘을 에릭은 기꺼이 휘두르고 있었다.

천 길 낭떠러지 곁의 위태로운 벼랑길에서 즐겁게 날뛰면서, 자신이 지핀 겁화에 던져넣을 장작이 떨어질 그날이 오지 않으리라, 바다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정답을 손에 넣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굳게 믿으면서.

“그래, 그대 말대로 위태로운 길, 언제든 파멸로 치달을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일생 최대의 모험. 내가 노리는 최대의 목표. 그것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무릅쓸 수 있는 위험이지.”

남들이라면, 그것이 신대륙의 부일 것이라고, 덴마크의 도움을 받았을 뿐 아직 덴마크의 속령은 아닌 저 신대륙을 복속시키고 유지하는 것이 에릭의 목표라고 단정하겠지만, 덴마크와 잉글랜드의 속사정에 조금 더 밝은 샤를은 그렇지 않았다.

필리파를 비참하게 쫓아낸 뒤, 그 어떤 정부도 들이지 않고, 심지어 그 어떤 여인의 초상화도 궁정에 들이지 않은 에릭의 마음이 어디에 향해 있는지.

그저 조심스러운 풍문으로만 돌던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을 줄은 미처 몰랐지만.

‘당신이 이 정도로 신대륙의 여주인에게 미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이 그저 단순한 연정이었다면, 그토록 많은 어중이떠중이들이 헛바람 가득 찬 채로 구혼자 행렬을 이루는 것을 용인치 않았을 것이다.

필시 저 바다 너머의 주인, 황금의 땅으로 가는 길목을 독점한 여인에 대해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고 그 여인이 무언가 답을 가지고 있으리라 믿기에 이토록 세 나라의 미래를 걸고 거대한 도박을 벌이는 것이리라.

동심이라는 사치는 이미 진작에 포기해야 했던 어린 늙은이 샤를은 그런 말을 속으로 삼키고 대신 딴소리를 했다.

“최대의 목표라면, 신대륙의 황금 말씀이십니까? 확실히, 제가 일으킨 소문이 얼떨결에 맞아떨어지긴 했지만... 그만한 부라면 폐하께서 만들어낸 이 위세를 지탱할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고 해 두지.”

“그러나 결국 얘기가 원점으로 돌아오는 셈입니다. 고작 이만이 안 되는 빈란디아의 이단과 이교도들이, 유럽의 군주가 진심으로 그 부를 빼앗고자 달려드는 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날을 위하여 이 모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잉글랜드든 신성로마제국이든, 카스티야든 베네치아든. 그 어떤 세력이 신대륙에 손을 뻗치든, 에릭이 제멋대로 저의 마음을 빼앗아갔다 여기고 있는 여인, 시그리드가 도움을 청하는 순간, 시그리드가 그리는 미래를 대가로 받아가며 신대륙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기다림이 굶주림으로 바뀔 때까지 소식이 없다면, 직접 나아가 답을 얻을 수 있도록.

1416년 가을 좋은희망을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던 구혼 소동은 얼추 조용히 끝나가는 듯했다.

한미한 집안 출신의 젊은 귀족들 중 기왕 이곳까지 온 김에 뭐라도 건져서 돌아갈 작정을 한 이들, 그리고 아직도 시그리드에게 미련을 못 버리고 뭔가 공을 세워 그 눈에 들 궁리를 하는 이들은 각기 저들 할 일을 찾아갔다. 신대륙은 넓고 사람이 필요한 곳은 많았으니까.

겨울을 지내면서 시그리드가 한 번도 옆구리 시리다는 느낌을 못 받은 이유도 그와 관련이 있었는데, 탐사대를 꾸려 서쪽으로 보내느라 딱히 외롭다 느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근처에 사는 긴집사람들 연맹 소속 부족의 이름을 따와 ‘큰언덕 호수(온타리오 호)’라 불리는 거대한 호수. 그 호수 너머로 가는 수로는 ‘천둥 폭포(나이아가라 폭포)’로 가로막혀 있었다.

긴집사람들과 싸우랴, 협상하랴, 남쪽 아나왁에서 황금을 가져오랴... 그로 인해 한동안은 더 서쪽에 무엇이 있는지 탐사할 엄두도 못 내었지만, 이제는 여유도 있고 함부로 굴려도 괜찮은 사람들 – 귀족 자제들 – 이 나타났기에 사정이 달라졌다.

그 외에도 따뜻한환영(보스턴)과 우애의 도시 사이의 육로를 개척하는 일, 개척지 근처에 쓸 만한 천연자원이 있는지 확인하는 일 등등.

귀족 자제들은 그 자체론 별 재주가 없었지만, 적어도 사람들 위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데는 익숙했기에 탐사대를 이끌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인재들이었다.

검은 책에 수록된 지도는 맨 앞의 세계지도가 전부였기에, 시그리드는 이전의 탐사대들이 작성한 기록을 바탕으로 대충 이쯤이 피츠버그고 저쯤이 디트로이트이리라 추정하면서 탐험 목표를 지정해줄 뿐이었다.

허나 어디 네바다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이미 말이 거의 통하게 된 긴집사람들과 세줄기불꽃 영역을 지나는 것이었으므로 이 정도로도 충분할 터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할 일은 많이 있었다.

“많이 바빠 보이는구나.”

스노리 노인은 올 늦가을 마지막 배편을 타고 손녀딸 일가와 함께 푸른들판으로 넘어왔다. 여생을 좀 따뜻한 곳에서 지내고 싶다는 게 핑계였는데, 실제로는 아마 손녀딸과 증손주를 위하는 마음이 더 컸을 것이었다.

그사이 노쇠하여 더 이상 생업에 종사하진 못하게 되었지만, 그 대신 이렇게 어선 얻어타고 좋은희망으로 넘어와 시그리드 안부를 물을 여유는 생겼다.

그런 스노리 노인이 몇 년만에 건넨 인삿말 서두가 이러하였으니, 지금의 시그리드가 얼마나 바쁜지 족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하, 그러게요.”

올 겨울은 유독 따뜻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시그리드 마음속에 한 가지 욕심이 솟구쳤던 것이다.

“얼었던 땅이 살짝 녹아서, 원래 올봄에 하려고 했던 공사를 당겨서 하고 있거든요. 여기저기서 인부를 모으고, 자재도 옮기고,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더라고요.”

“얘기는 들었다. 저기서 쇠붙이를 만들 거라면서? 헌데 내가 소싯적에 레이캬비크에서 보았던 대장간이랑은 좀 많이 다르게 생겼구나.”

“네, 아이슬란드는 물론이고 아마 노르웨이에도 아직 없을 최신 기술이래요. 용광로blasting furnace²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건, 물의 힘으로 용광로에서 얻은 철을 두드리는 기계라고 하고요³.”

좋은희망에서 한 오륙 마일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는 꽤 큰 강 하나가 흐르고 있었다. 온난한 겨울 덕에 강물은 얼음 한 점 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그 힘을 받아 물레방아는 돌아가고 있었다. 아직 기계가 완비되지 않아, 딱히 하는 일 없이 공회전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보헤미아에서 건너온 사람들 중에 이런 쪽 일을 하는 장인들이 많았거든요. 정확히는 작정하고서 그런 사람들을 모은 것이지만요.”

슬쩍 신이 난 시그리드의 설명이 조금씩 빨라졌다.

따뜻한환영 근처의 야네크네 철공소 - 이런저런 말썽을 겪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대체로 원활히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 에 이어 신대륙에서 두 번째로 문을 열게 된 이곳 르제호르시Rehor 철공소.

야네크네 철공소 혼자서 이 땅의 모든 철 수요를 감당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더구나 이곳 좋은희망의 조선소에서도 적잖은 쇠붙이를 필요로 하는지라, 때마침 철공소 한 곳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많이 모인 철공들을 이쪽으로도 모셔오게 되었다.

암묵적으로 철공소 대표로 대접받는 르제호르시는 그들 중 최고참 장인으로, 딱히 후스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쇠와 관련된 모든 일에 집요한 욕심과 고집을 지닌 초로의 사내였다.

“하여튼 저게 완공되면, 이 근처 호수 곳곳에서 모은 소철을 이용해서 온갖 쇠붙이를 조달할 수 있을 거에요. 농기구, 말 편자, 바늘, 배 만들 때 쓰는 쇠못, 그리고 - 쓸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 총까지도요.”

하지만 그린란드의 팅을 수십 년간 주재해온 경험이 있는 스노리 노인에게 먼저 보이는 것은 기계가 아닌 사람들이었다.

한참 이어지던 시그리드의 설명을 빙긋 웃으며 듣던 스노리 노인이 잠깐 틈이 생기자 물었다.

“인부들 태반이 이곳 사람들인 것 같구나. 칼라알릿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긴 걸 보니.”

‘도깨비Skraeling’라는 말은 그린란드에서도 이제는 쓰이지 않았다. 낮잡아 보는 표현이기도 하거니와, 점점 원주민들과 접촉이 늘어나면서 니놀리노 사람과 카니엔케하카 사람, 칼라알릿 사람을 싸잡아 부르는 것의 불합리함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네, 맞아요. 원래 이 주변에 살던 니놀리노 사람들인데, 겨울에 식량을 찾아 숲을 헤메는 것보다 이쪽에 머물면서 일을 돕는 게 더 낫다 보니까 자주 이렇게 찾아오곤 한답니다. 저 사람들 중 공용어를 아는 몇몇은 철공소가 완공되면 아예 이곳에 터를 잡고 일하게 될 거고요.”

“나머지 사람들도 그 보헤미아라는 곳 사람들만은 아닌 것 같은데.”

“네. 저 중에는 잉글랜드 장인들도 있고요, 아이슬란드에서 온 아르니라는 분도 있어요. 옛날에 제가 스칼홀트에 있을 때 대장간 빌려주셨던 분인데, 그 대장간 주인은 아니고 주인댁 사위였거든요. 그래서 나침반 소동 때 아이슬란드 총독인 비그푸스 아저씨랑 연이 닿았는데, 그러다가 ...”

소철의 성질은 일반 철광과 달랐다. 소철을 다루어본 적 있는 잉글랜드와 아이슬란드 장인들이 한둘씩 끼어서 일을 거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이 역시 스노리 노인이 알 필요 없는 사정이요, 간만에 열심히 떠들 상대를 얻어 쉴새없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시그리드를 보며 할아비 미소를 짓고 있는 까닭 또한 그와 거리가 멀었다.

“다행이로구나.”

“그래서 파울 주교님을 만나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는데, 그때 하필이면 배를 놓쳐서... 예? 뭐가요?”

“원래는 안부도 묻고, 네 백송고리도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도 하려고 왔단다. 원래 사냥매는 몇 년 지나면 야생으로 돌려보내야 하는데, 네 백송고리는 좀 특별하잖니.”

스노리 노인이 근처 나뭇가지에 올라앉아 홰를 치는 리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옛날 버려진 농가에서 주워졌을 때를 기억하는 것인지, 아니면 스노리 노인의 백발을 보고서 저의 ‘어미’와 깃털 색 같은 동류同類라 여기고 안심하는 것인지, 리프 또한 딱히 경계하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포구에서 스베인 그 녀석을 마주쳤다. 네 걱정을 하더구나.”

“아. 그 얘기 들으셨군요.”

“그래, 시그리드 네가 그 구혼 소동을 겪고 나서 조금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고 했는데, 막상 네 얼굴을 보니 아주 표정이 밝더구나.”

“그런가요?”

설마 이게 그 욘이 말하던 ‘일 중독’인가 뭔가 하는 그것은 아닐까, 살짝 걱정하게 되는 시그리드였다. 손바닥에 눈이 달려 있을 리 없는데도 제 올라간 입꼬리와 광대뼈를 슬쩍 만져보는 건 덤이었다.

“콜그림 그 허풍선이가 네게 리프트라사라는 별명을 만들어 주었다더구나. 녀석이 딱히 거기까지 생각하고 지어준 별명은 아니겠지만, 따지고 보면 네 사랑은 이 땅의 사람들, 이곳의 생명 모두를 향한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그 별명이 딱 어울린다 하겠다.”

그 마음을 사로잡을 남정네 하나 안 나온다고 딱히 조바심 낼 것도 없고, 설령 아예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신대륙 연합의 모두가 시그리드가 이룬 가정의 일원 아니겠는가.

“네가 그 옛날 헤르욜프스네스를 떠난 이후로 벌써 10년이 지났다. 그간 네가 구해낸 사람들이 몇 명이더냐. 그리고 앞으로도 네가 계속 구할 사람들, 구하지 않고서는 직성이 안 풀릴 사람들은 또 몇이겠느냐.

젊은 처자의 마음을 다 늙어 죽기만 기다리는 노인네가 어찌 함부로 말하겠냐만, 이미 이 땅에 만들어나가려 하는 세상 그 자체를 사랑하고 그 세상에 살아갈 사람들 모두를 사랑한다면, 굳이 외로워할 것도, 쓸쓸하다 여길 겨를도 없을 듯하더구나.”

그 옛날 가르다르에서 밤하늘 바라보던 소녀. 교회 앞 들판에서 벼락을 불러내곤 그것으로 나침반을 만든다며 좋아하던 소녀. 아직도 변함 없는 그 모습에 다시금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스노리 노인은 말을 끊었다.

“그저, 네가 저 철공소 바라보며 웃는 걸 보니 떠오른 생각이었다.”

시그리드도 그 말 속에 담긴 마음을 다는 헤아리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웃었다.

같은 시각, 저 남쪽 따뜻한환영의 야네크 철공소에서, 인종갈등을 살짝 곁들인 신대륙 최초의 노사분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함부로 짓지 않았을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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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칸디나비아의 풍부한 금속자원은 이미 중세부터 널리 개발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스웨덴산 철은 품질 좋기로 유명했고, 원시적인 형태의 용광로를 사용해 제련한 오스문드osmund라는 철괴의 형태로 중유럽과 동유럽, 러시아 등지에 널리 수출되었습니다. 배스트만란드는 그러한 제철업의 중심지 중 하나였지요.

중세 스칸디나비아의 철광석 채굴과 제련은 스웨덴인들의 손으로 이루어지곤 했지만, 그 유통은 한자 동맹이 거의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원 역사의 에릭이 한자 동맹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광업과 제철업은 큰 타격을 입었고, 에릭의 몰락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엥엘브레크트 엥엘브렉트손의 광부 반란 역시 배스트만란드 지방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비단 에릭뿐 아니라 스웨덴 귀족들도 광산업과 제철업의 발전에 큰 관심이 없었고, 결국 자본과 기술의 부족으로 스웨덴 제철업은 한동안 경쟁력을 잃게 됩니다. 17세기에 명군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치하에서 네덜란드 자본을 유치해 부흥하기 전까지 스웨덴 철강업은, 원재료에 가까운 철을 헐값에 한자 도시에 판매하는 수준으로 퇴보하게 됩니다.

2. 고로高爐라고도 불리는 용광로는 중국과 아랍 세계를 거쳐 유럽에 유입되었거나, 중세를 거치며 유럽에서 독자적으로 발명되었다고 추정됩니다. 15세기를 거치면서 잉글랜드와 북프랑스, 플랑드르 등지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점차 기술의 발달이 누적되었고, 마침내 보다 현대의 형태에 가까운 용광로가 중세 말엽에 형태를 갖추게 되지요. 시토회Cistercian 수도사들이 직접 광산업과 제철업에 종사할 만큼 광업이 발달한 보헤미아에서도, 만약 후스 전쟁으로 인해 전 보헤미아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더라면 아마 비슷한 발전이 나타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3. 동아시아에 비하면 비교적 수량 변동폭이 적은 유럽의 하천 환경 덕에, 중세 유럽인들은 수력을 요긴한 동력원으로 이용하곤 했습니다. 흔히 우리가 중세 하면 물레방아가 도는 방앗간을 떠올리곤 하는 것도, 장마철에 마을 전체가 떠내려갈 걱정 없이 개울가에 건물을 세울 수 있는 유럽의 기후 여건 덕이 크지요.

중세를 거치면서 수력을 이용하는 방식 또한 발전을 거듭했고, 처음에는 제분 목적으로 주로 쓰였던 물레방아도 점차 개량되어 직조업이나 피혁 가공업 등에도 쓰이게 됩니다. 14세기 후반에는 용광로에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를 가동하거나, 그렇게 만들어진 선철을 두드려 가공하는 데도 수력이 널리 쓰이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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