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71화 (71/116)

밤의 열기 (1)

17. 밤의 열기 Night Fever (1) - 비 지스 (1977)

1416년 겨울부터 1417년 봄 사이, 저들끼리 의기투합하여 ‘순백의 기사단’을 꾸린 귀족 자제들은 하나둘씩 서쪽으로 탐험대를 이끌고 떠나갔다. (순백의 기사단에서 ‘순백’이 누굴 뜻하는지는 굳이 물을 것도 없었지만, 시그리드는 그냥 눈을 감아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사이 탐험 목표에서 제외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얼떨결에 해결되어버린 좋은거래와 우애의 도시 사이의 수로 개척 사업이었다. 탐험을 준비하기도 전에 우애의 도시 쪽에 살던 레나피 사람들이 담배를 팔러 좋은거래까지 북상해버린 것이다.

때마침 겨울이 따뜻했기에 한겨울에도 수로를 오갈 수 있는 상황.

따뜻한환영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시그리드는, 콘스탄티노스 황자도 간만에 볼 겸, 곧 중요한 교역로가 될 수로를 현장답사도 할 겸, 직접 그 수로를 따라 우애로 향했다.

그리고 그 다음 목적지는 바로 여름항구. 작년에 막 개척된 어항漁港이었다. 하도 떠벌거릴 게 많다 보니 미국의 중소 도시 하나하나까지 다 짚어줄 여유는 없던 욘이 설명을 생략한 탓에, 여름항구가 오지 않을 미래에 프로비던스Providence라 불릴 것임은 시그리드 포함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왜 여름항구인가요?”

“그야 저희들 기준으론 사시사철 여름이니까 그렇지요. 아씨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동네 계절이라는 게, 우리 칼라알릿 기준으로 치면 조금 선선한 여름과 매우 따뜻한 여름, 딱 둘 밖에 없으니까요.”

시그리드는 마침 이곳 원주민들이 비료로 쓰는 잡어雜魚를 처분키 위해 우애에 머물고 있던 이갈리코를 만나, 그 배를 얻어타고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칼라알릿 사람 이갈리코는 기사 디폴트에게 두들겨맞은지 채 십 년이 안 되어 어선 두세 척 거느린 선장이 되어 있었는데, 그 사연은 이러하였다.

바스크 어부들이 일가친척까지 거느리고 본격적으로 넘어오기 시작하면서, 개척만은 사실상 제2의 비스카야(비스케이) 만이 되어버렸다. 개척만에서 고기를 잡을 때야 서로 부딪힐 일이 없었지만, 중간중간 다른 어항에 머물 때면 거친 뱃사람끼리 싸움도 종종 벌어지곤 했다.

그러다 언제 한 번, 사람이 다치는 일까지 벌어지자, 미콜라스 같은 바스크인 중진들이 팔 걷고 나섰다. 넓고 넓은 바다의 풍족하디 풍족한 어장을 내버려두고 개척만 한 곳에서 아옹다옹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바스크 사람들끼리 각출하여 다른 곳에 터 잡으라고 지원해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갈리코가 저와 마음 맞는 사람 몇몇을 데리고 따뜻한환영에서 그리 머지않은 여름항구를 세우게 된 것은 그 덕이었다.

“여름항구에 내리셔서 그대로 강을 따라 북상하시면 한 스무 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 나옵니다. 보헤미아 어느 마을에서 단체로 우르르 몰려와서, 그대로 모여 살고 있지요. 거기서 따뜻한환영까지는 점점이 마을이 흩어져 있으니 육로로 가시기에 어려움이 없을 겝니다.”

“위험하진 않을까요?”

“하하, 이 땅의 그 누가 아씨를 함부로 건드리겠습니까?”

유럽만큼 전쟁이 잦지는 않지만, 이곳의 원주민들이라고 서로 다투고 빼앗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숲속에 덩그러니 멋모르는 이민자 이십 호 정도가 모여 사는데 아무도 쳐들어오지 않는 까닭은, 주변 왐파노악 사람들이 그저 선량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과 귀, 머리가 엄연히 있는 왐파노악 부족민들은, 이 이방인들이 누구와 교류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토록 강력하다는 서쪽의 이로쿼이 사람들이 이방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있었고, 또 이방인들이 이로쿼이와 싸운다고 좋아했던 것이 무색하게 둘이 조금 투닥거리다가 금방 화해해버렸으므로, 왐파노악 사람들도 어지간해서는 이방인 이주민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자칫하면 이로쿼이와 이방인들이 손을 잡고 이쪽 땅을 빼앗으러 온다는 최악의 결과가 벌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더구나 이곳 부족민들 중 적잖은 수는 이미 보헤미아인들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함부로 건드렸다가 다른 와바나키 사람들의 원망을 듣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요.”

좋은희망 의회의 유럽인 대표들이 저들끼리 임시의회를 꾸렸다는 것을 알게 된 개척만 남쪽의 미크막 사람들은, 그들 역시 저들만의 모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와바나키Wabanaki¹, 즉 ‘새벽땅 사람들’ 구상은 금방 다른 부족들의 호응을 얻었는데, 벌써 이곳 왐파노악 사람들까지 동참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와바나키는 유럽인들에게 저항하기 위한 모임은 아니었다. 그럴 만한 원한이 있지도 않았거니와, 다들 이방인들과의 교역으로 풍족한 삶을 살게 된 데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매년 가을 모임이 열리기 전, 이방인들이 그러하듯 저들 역시 미리 입을 맞춰둬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여, 자주 선물을 주고받으며 서로 연락하는 게 전부인 느슨한 모임을 꾸렸을 뿐.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러했다.

“잠깐만요. 그런데 여기 부족들까지 벌써 그 와바나키 모임에 들어갔다고요?”

“여름항구에 잡어랑 물고기 뼈 사러 오는 사람들 말로는 그렇다던데요.”

야네크네 철공소는 보스턴, 아니, 따뜻한환영 북쪽에 있었고, 여름항구는 남쪽에 있었다.

와바나키 모임의 발상지인 미크막 사람들 땅은 그보다도 훨씬 북쪽, 개척만 가장자리에 있었으니, 다시 말해 철공소에서 문제에 휘말린 이들 또한 와바나키에 발 걸친 부족들의 일원일 공산이 컸다.

“이거, 잘못하면 문제가 커질 수도 있겠는데...”

“네?”

“아, 혼잣말이었어요.”

시그리드는 마치 아무 일 아니라는 양 손사래를 쳤다.

따뜻한환영에 들려 하룻밤 묵은 시그리드는, 이튿날 야네크네 철공소로 향했다.

딱히 일이 없을 때는이곳의 사실상 촌장 겸 보안관 겸 공사 감독을 맡기로 한 얀 지슈카와 함께 길을 떠났는데, 틈틈이 주변 마을과 따뜻한환영 사이의 길을 다듬어놨기에 금방 철공소에 닿을 수 있었다.

야네크네 철공소를 운영하는 것은 광산이 많은 카를로비 바리Karlovy Vary 지방에서 모여든 장인들의 조합이었다.

그러나 카를로비 바리 일대의 다른 장인들을 설득해 이 조합을 설립한 사람이 바로 시그리드 눈앞에서 하소연하고 있는 조합장, 청맹과니 야네크였기에 - 녹은 쇳물을 너무 오래 봐서 한쪽 눈이 거의 멀었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 – 다들 야네크를 철공소 주인으로 부르곤 했다.

“아이고, 각하! 잘 오셨습니다. 저기 저 놈팽이들이 건수 하나 잡았다고 아예 일을 안 하겠다고 드러누웠지 뭡니까!

거기다가 다른 사람들 데려오지도 못하게 저렇게 길도 막고 있고, 심지어 장작 패서 숯 굽지도 못하게 가마까지 틀어막았습니다. 얼른 저놈들 좀 혼을 내 주십시오!”

후다닥 달려나온 야네크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자, 자. 진정하시고요. 우선 양쪽 사정을 다 들어봐야 할 테니, 자초지종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얀 후스를 따라 보헤미아에서 빈란디아로 이주한 이들 대부분은 도시 빈민과 농민들이었고, 그 빈민들도 대개는 몰락한 농민 출신이었다.

영혼의 구원보다도 더욱 달콤하게 들리는, 저들의 이름으로 소유하고 저들의 보습으로 경작할 수 있는 무한한 농지의 약속. 그런 약속이 있었기에 시그리드 리프트라사가 지나간 뒤 몇 년이 지나도록 신대륙 이주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고 저들 차례를 기다렸다가 넘어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후스를 따랐든 그 이후 황금에 이끌려 넘어왔든, 따뜻한환영과 그 주변에 점점이 생겨난 보헤미아인 정착촌에 자리를 잡은 장인들은,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다.

도제도, 막일꾼도 없이 혼자서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담배가 보헤미아인들 입에 달라붙게 되어, 후스와 성직자들의 골칫거리로 떠오르고 있었다.) 점점 유럽 기술로 만든 공예품에 대한 시장이 개척되면서, 보헤미아인 솜씨로 만든 공예품이 저 멀리 오대호까지 퍼져나가는 판이었으니, 장인들로서는 괴로운 상황.

더구나 철공소는 사정이 더욱 심각했다. 기계를 다루는 일이야 (정의상) 노동력 수요가 크지 않았지만, 용광로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 숯을 마련하는 일에는 정말 많은 손이 필요했다.

그러니 주변의 왐파노악 부족들 사이에서 일꾼을 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진 좋았습죠. 허나 저 이교도 야만인들이 순순히 일꾼 노릇을 하겠다고 나설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습니다.”

“그, 죄송한데 다른 사람들이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말은 쓰지 않아주셨으면 좋겠네요.”

“앗, 미안합니다.”

시그리드를 따라온 콜그림을 비롯해 적잖은 그린란드인들도 ‘이교도 야만인’ 범주에 든다는 점, 그리고 조금 더 중요하게는, 그 야만인에 해당하는 일꾼 대표들이 바로 옆에서 듣고 있다는 점을 뒤늦게 떠올린 야네크가 사과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왐파노악 사람 타토손Tatoson이 끼어들었다. 살짝 어색한 공용어였지만, 남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게 익숙한 사람인지, 이해에는 하등 어려움이 없었다.

“우리 사람들은 원래 아낙이 농사를 짓고 사내가 사냥과 고기잡이를 맡습니다.

우리가 고기를 잡는 것보다 바다 너머에서 온 사람들이 큰 배로 고기 잡는 게 더 솜씨가 좋기 때문에, 우리 사내들은 바다 너머 사람들을 도와주고 대신 그들이 잡은 고기를 받습니다².

하지만 이방인 돕다 보면 사냥할 시간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곳 철공소는 나무를 많이 태웁니다. 숲에서 나무를 베면 사냥감이 달아납니다.”

“전에는 잘만 벌목을 해 오지 않았나! 시키는 대로 장작도 패고, 숯도 만들고, 꼬박꼬박 일을 잘 하지 않았느냔 말이야. 우리가 뭐 자네들을 노예처럼 부려먹기를 했나, 급료로 그놈의 생선을 안 주기를 했나,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이었던 게야?”

“야네크 노인은 겨울에는 일하러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래서 겨울에 사냥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올 겨울이 이토록 따뜻하지 않은가! 우리가 쇠붙이를 만들어내면 그게 다 우리와 자네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데, 왜 안 하겠다는 건가!”

“우리는 야네크 노인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일을 도우러 왔을 뿐입니다. 대체 무슨 권리로 우리에게 지시를 한다는 말입니까?”

두 사람 사이의 언쟁이 격화될 조짐이 보이자 시그리드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진정들 하세요. 큰 목소리 낸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러고서는, 야네크 노인을 진정시키는 일을 지슈카에게 부탁하곤 타토손을 따로 불러내었다.

“단순히 일을 하기 싫어서 이러시는 건 아닐 것 같고... 뭔가 다른 사정이 있으신가 보군요.”

잠깐 고민하던 타토손은 실토하기로 마음을 정한 듯했다.

이윽고 나오는 큰 한숨이, 시그리드의 추측이 맞아떨어졌음을 방증하였다.

“우리가 야네크 노인의 아랫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 기회에 보여주려고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야네크 아저씨에게 싫은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그냥 작업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만이었겠지요. 굳이 이렇게 쳐들어와서, 다른 일꾼들을 들여오지 못하게 막을 필요는 없었잖아요.”

“역시 소문대로 현명하십니다.”

왐파노악 쪽 사정은 이러하였다.

북쪽의 춥고 척박한 숲속에 사는 이웃들과 달리, 비교적 날씨가 온난하고 땅이 비옥한 이곳의 왐파노악 사람들은 토지에 경계가 있다는 개념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농지는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고, 숲은 부족의 소유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조상의 조상 시절부터 그렇게, 숲과 땅에 경계를 긋고 서로 평화를 지켜왔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가 나타났고요.”

“예. 지금까지는 기꺼이 숲을 양보했고, 땅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이익이 되었고, 이 넓고 넓은 땅에는 아직 주인 없는 농지와 숲이 많았으니까요.”

당장 이곳 철공소만 하더라도, 일부러 근처에 마을이 없는 곳을 골라 자리를 잡았더랬다.

“그렇지만 이방인들은 너무나 빠르게 넘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주인 없는 땅과 숲은 벌써 동나고 있습니다. 이미 마을을 짓고, 큰 집들을 만들기 위해 숲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이대로라면 결국 어느 한 부족이 사냥터로 삼고 있는 숲까지 닿을 겁니다.”

철공소에서 어떻게 소철을 쓸모 있는 쇠붙이로 벼려내는지 잘 모르는 시그리드도, 그 작업을 위해 엄청난 양의 숯이 필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아이슬란드에서 본 대장간들도, 거의 숲이 사라진 아이슬란드 땅에서 땔감을 마련하느라 온갖 고역을 겪지 않았던가.

이곳의 왐파노악 사람들 또한 이 점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지금 미리 선을 그어두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의 숲은 끝없이 밀려날 것이요, 어느 한 부족이 다른 부족보다 많은 피해를 보는 상황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야네크 노인이 앞으로 이 철공소를 운영할 때 우리 일꾼들의 뜻을 경청하기를 바랍니다. 이미 몇 번이나, 지금 숯을 만들 때 벌목하는 숲만 해도 부족 소유의 숲과 거의 맞닿아 있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시그리드가 종종 이쪽 철공소에서 자질구레한 말썽이 벌어진다고 들었던 것도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화적 차이 때문에 별일 아니리라 단정하고 지나가게 되었을 뿐.

“하지만 야네크 노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래 했던 약속을 마음대로 어기고, 이렇게 우리를 한겨울에 불러내려 하기까지 했지요.”

욘이 이야기해준 원래의 역사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땅과 숲의 소유권을 주장하기에는 이미 천연두와 홍역 같은 질병으로 원주민 인구가 크게 줄어 있었고, 남은 이들이 겨우 기운을 차려 유럽인들에게 항의할 무렵에는 이미 개척자들이 깊게 뿌리를 내린 뒤였을 테니까³.

그렇게 시그리드도, 시그리드의 미래 지식을 공유하는 다른 의회 사람들도 예견할 수 없던 갈등이 누적되던 중, 마침내 겨울철에 일하러 나오라고 야네크가 별 생각 없이 내린 지시가 폭발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리라.

“저희도 그래서, 이제는 참으면 안 된다, 이제라도 야네크 노인과 다른 이방인들이 깨닫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 뜻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입니다. 부디 지혜롭게 헤아려주십시오.”

차라리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면서 억지를 부리면 모르겠으나, 이렇게 먼저 저들의 본뜻을 실토하고 나서니 시그리드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결국 해결은 보지 못하고, 왐파노악 인부들은 작업장에서 철수하고 야네크는 농한기를 틈타 다른 농민들을 데려오지 않기로 약조하는 임시 타협만 성사시키고서 따뜻한환영으로 돌아가는 시그리드였다.

“언젠가는 터졌을 일이었네요. 그 언젠가가 이렇게 빨리 다가오리라곤 예상치 못했지만요.”

울창한 숲 사이로, 살짝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겨울 태양의 누런 빛이 새어들어왔다.

그 너머로, 최근에 벌목된 흔적 역력한 나무 밑동이 우르르 모습을 드러내고, 그 뒤로는 벌써부터 그럴듯한 구색을 갖춘 농장들이 모습을 보였다.

“내가 함부로 끼어들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언뜻 들어도 양쪽 입장을 모두 만족시키기는 어려울 듯하더구나.”

왐파노악 사람들의 요구사항은 이러했다.

앞으로는 함부로 숲을 벌목하지 않으며, 벌목해야 할 때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아직 남아 있는 공유림을 이용할 것. 또한 이 모든 과정에서 반드시 자신들의 의사를 존중할 것.

당연히 야네크와 철공 조합 쪽에서는 노발대발할 일이었다.

아무런 기술도 없고, 심지어 말도 처음에는 잘 안 통하던 ‘이교도 야만인’들을 겨우 가르쳐 한 사람 몫을 하게 만들었는데, 그리고 남는 이윤 대부분을 – 아직 화폐랄 만한 게 제대로 정착을 못 했기에 정확한 추산은 어렵지만 – 생선을 매입해 노임으로 지급하는 데 썼는데, 이런 요구사항을 받아들게 되니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나마 저렴하게 숯을 만들려면 근처의 숲을 베어내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고, 먼 곳에서 벌목을 하게 되면 그만큼 인력이 많이 들어가는데 그만큼 삯을 더 쳐주기는 곤란하고...”

“당장 우리는 쇠붙이가 필요한데 말이지요.”

시그리드의 계획대로라면 앞으로도 더 많은 철공소를 세워야 할 것이었다. 인구가 형편없이 부족한 신대륙 연합이 빠르게 스스로 지탱하고 지킬 만한 힘을 얻으려면, 미래식 표현으로 수출 주도 경제만이 답이었다.

그리고 빈란디아 어디를 가든 가장 잘 팔릴 상품이자, 신대륙 연합 자체로도 절실히 요구될 상품이 바로 철이었다. 그런데 그 첫 단추부터 이렇게 삐걱대고 있으니, 꽤 심각한 문제였다.

발굽에 편자 박힌 채로 바다를 건너왔기에, 저들 등 위에 태운 인간들이 무슨 고심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는 말들은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제법 잘 다져진 흙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울창한 나무의 숲과 밑동만 남은 과거의 숲은 모두 등 뒤로 사라지고, 죽 뻗은 농지와 그 너머의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기후로 인해 몇 번이나 실패를 겪었지만, 결국 따뜻한환영은 작년부터 자급자족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딱 자급자족에 그쳐서,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근처 원주민들과 교역해야 했지만.

유별나게 따뜻한 겨울 탓에, 드넓은 농지와 목초지가 저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대서양 건너편으로 끌려와 고생하며 자라는 겨울밀 낱알이 잠자고 있을 밭. 그 주변에는 내년에 원주민들에게 배운 방법대로 옥수수를 키울 부지가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바닷가에 번듯하니 우뚝 솟은 마을이 바로 따뜻한환영. 근래에는 우애의 도시가 그냥 ‘우애’로 불리듯 ‘환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 마을.

장인들의 공방과 제법 번듯한 항구, 조그맣지만 활기 넘치는 시장이 있는 인구 일천오백의 마을이었다.

“여관이 제법 그럴듯하게 잘 지어졌단다. 며칠 머물기에는 하등 불편함이 없을 게다. 만약 조금이라도 불편한 게 있다면 알려주고. 크게 보면 우리 보헤미아인들의 자존심하고도 관련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

마을 한가운데 들어선 지슈카가 말했다.

“그리고 너무 고민은 하지 말고. 뭔가 좋은 수가 나오지 않겠느냐?”

“그랬으면 좋겠네요. 숯이 없이 철을 뽑아낼 방법이 있으면 좋겠지만...”

숯을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필요하고, 또 많은 양의 목재가 필요했다.

그런데 노동력이 부족하여 어떻게든 원주민들을 끌어들여야 했고, 그 원주민들은 정작 숲을 함부로 벌목하지 말라고 하고 있으니, 딜레마라는 게 이런 것이리라.

“메이플 차라도 있으면 좋겠는데요.”

“메이플 차? 아, 좋은희망에 가면 꼭 맛을 보라고들 하더구나. 벌써 지역 특산품이라는 게 생겼다니 신기한 일이지.

여긴 메이플 차는 없지만, 대신 맥주가 있단다. 헤니히 그이는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여기 맥주가 더 맛있거든.”

지슈카는 슬쩍 사심을 발휘해, 테소소목의 황금으로 보헤미아의 장인들을 데려올 때 부데요비체에서 양조업자 길드의 도제 몇몇을 꼬드겨 달라는 청탁을 했다.

독일인 이상으로 맥주에 진심인 보헤미아인들이라, 겨울밀 농사는 포기해도 보리와 홉은 포기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정착 둘째 해부터 맥주를 담그기 시작했는데, 그 기반 위에 부데요비체 양조업자들이 들어오니 벼락같이 품질이 올라간 것이다.

“차가 없으면 맥주를 마시면 그만 아니겠느냐.”

“그렇지요... 엥?”

차가 없으면 맥주를 마시면 그만.

그렇다면 숯에 있어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맥주는 못 마시겠네요. 오늘 밤에 공부를 좀 해야겠어요.”

숯이 없으면 석탄을 쓰면 그만 아니겠는가?

기나긴 여행과 정착지 내의 갈등이 살짝 지긋지긋해지려던 차.

‘공순이’ 시그리드로 돌아갈 때였다.

--- *** ---

1. 원 역사의 와바나키 연맹은 한참 뒤인 17세기 후반에 설립됩니다. 뉴잉글랜드에 영국 식민지가 늘어나고 이로쿼이 연맹의 동진이 가시화되면서, 공동의 위협에 맞서고자 한 퀘벡과 뉴잉글랜드 북부의 알공킨계 부족들끼리 군사동맹을 맺게 된 것이지요. 이들은 뉴잉글랜드 북부의 영국인 개척민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떠올랐고, 심지어 1678년 카스코 조약으로 자신들의 영역에 정착한 잉글랜드인들에게 연공을 받아낼 권리를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평화조약은 실제로는 이행되지 않았고, 결국 와바나키 연맹은 프랑스 편에 서서 영국과 적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모두 강제이주를 당하게 되었지요.

2. 뉴잉글랜드 지역의 알공킨계 부족들은 대체로 모계중심 사회를 이루고 있었고, 작중 서술된 것처럼 성에 따라 다른 생업에 종사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정치적 권리는 남성이, 경제적 권리는 여성이 전유하는 문화도 존재했지요. 지금의 매서추세츠와 로드아일랜드 일대에 거주하던 왐파노악 또한 여기에 속했습니다.

유럽인들이 모피 교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확실한 영역 경계가 거의 없던 북쪽의 부족들과 달리, 농경의 비중이 훨씬 높아 인구밀도 역시 높았던 뉴잉글랜드의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는 명확히 구분되는 세력 간의 경계, 그리고 토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존재했습니다.

3. 이전에 언급된 것처럼, 작중 등장하는 따뜻한환영(보스턴) 근처의 야네크 철공소는 원 역사의 소거스Saugus 철공소에 해당합니다. 주변의 풍부한 수자원과 소철, 그리고 용광로 공정에 필요한 융제flux의 존재 등 삼박자가 갖추어진 덕에, 소거스 철공소 – 당시에는 해머스미스Hammersmith 철공소로 불렸습니다 – 는 1646년 운영을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하루 주철 생산량이 1톤을 돌파하게 되었지요.

소빙기로 인해 종종 강이 얼어붙어, 기계에 동력을 공급할 수 있는 시기가 한 해에 30주 미만이었다는 점 하나를 빼면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의 문제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종교적 신념이 아닌 높은 보수에 이끌려 모집된 장인과 기술자들은 주변의 청교도들과 자주 충돌했고, 결국 철공소 쪽에서는 비숙련 노동자 수요 감당을 위해 당장 농사짓기 바쁜 청교도 개척자들 대신 계약직 하인indentured servant들을 고용해야 했습니다. 결국 소거스 철공소는 가격경쟁력을 잃었고, 적자 경영을 이어가다가 1670년경 폐업하게 됩니다. 이후 18세기 초, 보다 발달한 기술과 (원주민을 몰아낸 덕에 개선된) 천연자원 접근성, 그리고 인구 증가에 따른 수요 증대로 성장이 재개되기 전까지 뉴잉글랜드 제철업은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지요.

한편, 소거스 철공소가 세워지기 한 세대 전인 1619년에도 철공소 건설이 시도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오기도 전, 불과 삼 년만에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불타버렸지요. 초기 개척민들에게 대체로 우호적이었던 원주민들이 철공소에 대해서는 유독 적대적이었던 까닭은, 작중 서술된 것처럼 벌목에 대한 거부감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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