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72화 (72/116)

밤의 열기 (2)

17. 밤의 열기 Night Fever (2)

숲이 모두 벌채되어 장작을 구하기 어려울 때는 석탄을 쓰면 좋다.

이미 숲이 거의 사라져 있던 잉글랜드와 저지대에서 통용되는 소소한 삶의 지혜였다.

그러니 석탄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숯 대신 쓰자고 철공소 주인 야네크를 설득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숯을 갈음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의 석탄을 어디 산속에 있을 석탄 산지에서 옮겨오는 일이야말로 관건이리라.

적어도 그게, 한 번 맛이라도 보라는 얀 지슈카와 양조장 주인의 강권에 못 이겨 들고 온 맥주잔을 홀짝이며 검은 책을 뒤지던 시그리드가 맨 처음 생각했던 바였다.

“저기, 혹시 석탄이라는 것 알고 계신가요? 이 근방에 없을 수도 있고, 어쩌면 저 멀리 산속에 가야 조금 보일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이튿날 아침, 주변에 수소문하자마자 시그리드는 곧 알게 되었다.

어떻게 욘의 세상에서 미국이 굳이 식민지니 뭐니 차지하지 않고서도 세계 최대의 경제를 지닐 수 있게 되었는지를¹.

“우물을 파다가 석탄을 발견하긴 했습죠. 괜히 물맛만 버렸지 뭡니까.”

“석탄 말씀이십니까? 저희 농장 헛간에 많이 쌓여 있는데...”

허무할 만큼 주변에는 석탄이 넘쳐났던 것이다².

농지와 목초지 개간을 위해 숲을 밀어낸 정도로도 아직은 장작이 넘쳐났기에, 대개는 석탄을 돌 보듯 하곤 했다.

그나마 후스파 보헤미아인들을 따라 따뜻한환영 근처에 정착한 잉글랜드인들은 보헤미아 사람들에 비해 석탄에 익숙했기에, 여차하면 장작 대용품으로 쓸 심산으로 땅 파다 나온 석탄을 모아놓기도 했다.

그 덕에 시그리드는 금방 석탄을 구할 수 있었다.

“이게 그 석탄이란 겁니까? 오묘한 색깔이로군요.”

아나왁에서 자주 보았던 흑요석과는 또 다른, 그린란드의 겨울 밤하늘 같은 칠흑 빛깔의 돌을 구경하며 콜그림이 물었다.

“네, 맞아요. 이렇게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거 의외로 쉽게 끝나겠는 걸요?”

시그리드는 지슈카의 도움을 받아 짐말과 수레를 빌리곤, 주변을 돌아다니며 그렇게 사람들이 모아둔 석탄을 모았다.

“이거 더 실었다간 짐말한테 한 소리 듣겠는뎁쇼.”

“조금은 더 실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뭐. 어차피 돌아가는 길이었으니까요.”

동네 사람들을 불러모은 뒤, 함께 근처에 쌓아둔 석탄을 날라오던 브리스톨 출신 과부 마사가 석탄 한 보따리를 또 가져와 수레에 털썩 올렸다.

(짐말이 푸르릉 투레질을 했는데, 어째 욕설처럼 들렸다.)

“마님, 이게 전부입니다.”

“고맙습니다, 마사 아주머니.”

“아이고, 별 말씀을. 틀림없이 좋은 일에 쓰실 텐데 당연히 도와드려야 합지요.”

이 마을의 사실상 촌장 노릇을 하는 과부 마사는 어지간한 장정보다도 힘이 셌는데, 억센 만큼이나 대단한 오지랖으로 인해 주변 보헤미아인 사이에서도 그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헌데 그 석탄을 어디 쓰시려고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네, 물론이지요.”

상냥한 성품과 떠벌이 기질 – 선천적으로 획득되고 후천적으로 강화된 – 탓에, 시그리드는 이 석탄으로 숯을 대체하고자 하는 까닭을 발설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웬걸, 마사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다.

“제가 쇠 다루는 법을 잘 알진 못하지만... 어째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요.”

“네?”

“쇠는 몰라도 석탄은 종종 때봐서 잘 알고 있는데요, 이런 무연탄culm은 불도 잘 안 붙고, 숯만큼 뜨겁게 타지도 않는답니다. 그러니 겨울철 땔감으로야 최고지만, 쇠를 녹이는 건 또 다른 얘기일 텐데요.”

이탄, 토탄, 역청탄, 무연탄 등등, 온갖 종류의 석탄은 다 때곤 하는 잉글랜드 사람의 말이라면 가볍게 흘려들을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 번 부딪혀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철공소의 장인 분들은 유럽에서 가장 솜씨 좋은 분들이세요. 그분들이 세운 철공소라면 얘기가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마님. 제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네요.”

“아녜요. 석탄을 모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걸요.”

부디 마사가 틀렸기를 바라면서, 시그리드는 마사와 마을 사람들에게 사례하곤 그대로 야네크네 철공소로 향했다.

딱 해가 질 무렵 도착한 철공소는 꽤 한산했다. 이미 시그리드의 중재로 잠시 다툼을 멈추기로 하였기에, 왐파노악 사람들 태반은 저들의 겨울철 생업인 사냥을 하러 마을로 돌아갔고, 타토손과 몇몇 젊은이들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원주민들을 노려보며, 허튼짓 못하도록 감시하는 보헤미아 철공조합원들이 있었으니, 한산하다기보다는 썰렁하다는 것이 조금 더 맞는 표현일 터였다.

“자, 여기 석탄이에요.”

“석탄? 설마 이것으로 숯을 갈음하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잔뼈 굵은 조합장 야네크는 금방 시그리드의 의도를 간파했다.

“석탄은 이미 우리 사람들이 정착한 주변에서 나오고, 숲을 훼손할 우려도 별로 없어요. 더구나 틈틈이 지슈카 선생님께서 길을 정비하신 덕에 수레가 오가기도 편하고요.”

훌륭한 의도로 시작한 일이 훌륭한 결과로만 이어진다면, 이 세상 어디에 불의와 가난이 있겠는가.

허나 야네크는 시그리드에게 핀잔을 줄 만큼 강단이 있지는 않았고, 더구나 지금 상황에서는 밑져야 본전이기도 했기에, 한 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용광로를 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로 숯처럼 쓸 수 있는지 확인을 해보아야겠지요.”

철공소 가운데에는 큼직하고도 높다란 용광로 하나가 있었는데, 수차와 연결된 풀무로 계속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반면 곁에는 훨씬 조그만 용광로도 하나 있었는데, 대부분의 유럽인들에게 더 익숙한, 사람이 직접 풀무를 놀려 바람을 불어넣는 형태였다.

“근처에서 나오는 광석이랑 소철 중에는 도저히 못 쓸 만큼 불순물이 들어 있는 것도 간혹 있습니다. 이 작은 용광로는 바로 그런 광석을 분별하기 위한 녀석이지요.”

검증되지 않은 원광을 써야 하는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시설이었다.

시그리드가 도착한 것을 본 타토손네 패거리도 야네크네 철공조합 사람들을 따라 근처에 빙 둘러섰다.

“흠흠, 풀무는 우리가 맡겠습니다.”

“네놈들 도움 따윈 필요 없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정말로 이 사람들 도움 없이 철공소를 운영할 생각은 아니시잖아요.”

시그리드 설득에, 일시의 노여움으로 틱틱대었던 야네크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풀무 곁을 지키던 조합원에게 손짓을 했다.

사다리 타고 용광로 위로 올라간 철공이, 도르래로 소철 원광을 끌어올려 용광로 안쪽에 부어넣었다.

이어서 이곳에서 석회석 대신 융제flux³로 쓰는 반려암 돌멩이가 부어지고, 숯을 대신하게 된 석탄이 다음 순서로 부어졌다.

용광로 아래쪽에서도 불을 붙이고, 숯 대신 석탄을 삽으로 퍼넣었다. 쭈뼛쭈뼛 다가온 왐파노악 청년들은 풀무를 맡아, 야네크가 손짓하자 금방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용광로가 달궈지기 전 후다닥 철공들은 내려오고, 맡은 일이 없는 사람들은 야네크와 시그리드, 타토손과 함께 옹기종기 모여 붉은 불빛이 어느새 내린 땅거미를 뚫고 주변을 밝히는 것을 감상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야네크 노인이 갑자기 용광로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더니, 곧 혀를 끌끌 차는 것이었다.

“엥이, 글렀군. 글렀어.”

“그걸 어떻게 아시나요?”

“원래는 여기까지 열기가 전해져야 하는데, 기껏해야 미지근하지 않습니까. 저 석탄이라는 것, 다른 데는 쓸모가 있을지 몰라도 철을 녹이는 데는 한참 모자란 듯합니다.”

온도계라는 물건은 발명되지 않았건만, 이미 먼 옛날부터 대장장이들은 피부로 전해지는 열기만으로 대략 온도를 가늠하는 재주를 체득하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철공들도 야네크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네크가 다시금 손짓을 하니, 열심히 풀무질을 하던 왐파노악 사람들도, 삽질을 하던 보헤미아 사람들도 작업을 멈췄다. 곧 불이 꺼지고, 벽돌로 쌓은 용광로 외벽에 열기가 가시자마자 사다리 걸치고 올라간 철공들이 등불을 들고 안쪽을 살폈다.

“어르신 말씀대로입니다. 전혀 녹지 않았습니다.”

“부어 넣은 석탄도 그대로입니다.”

그렇게 산림자원 보호와 노사갈등의 완만한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시그리드의 첫 번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고작 한두 번 실패로 포기할 시그리드는 아니었다. 만약 그런 성격이었다면 애초에 이곳 바다 너머까지 오지도 못했으리라.

허나 암만 그래도 사람인 이상, 포기 앞에서 아무런 동요 없이 무덤덤하긴 어려운 법.

다음날, 다른 종류의 석탄을 어떻게든 찾아보고자 이런 쪽 일에 밝은 잉글랜드인 마을로 향하던 시그리드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물론 발걸음 무겁다는 건 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이었다. 짐말이 끄는 마차에 타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과부 마사가 사는 소박한 마을에 닿아, 통나무집 앞에 말을 세우고 수레에서 내렸다.

그러자마자 떡하니 그 앞에 접시를 내미는 손길이 있었다.

“고구마네요?”

진짜 고구마였다.

“어제는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오셔서 뭐 대접도 제대로 못해드렸잖아요. 그게 아쉬워서, 언제고 또 찾아오실 때면 이거라도 드리려고 마음을 먹었지.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지만요.”

시그리드 일행이 먼 남쪽 투슈판에서 가져온 고구마는, 좋은희망이나 푸른들판 쪽에서는 도저히 키울 수가 없었다. (애초에 열대 작물을 냉대 기후에서 키우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짓 아니겠는가.)

허나 따뜻한환영은 이름처럼 좋은희망보다 따뜻하였고, 지슈카와 보헤미아 사람들이 투슈판에서 가져온 고구마는 나와틀 말에서 따와 카모티Camoti라 이름이 붙은 채 이곳에서 재배되고 있었다⁴.

성의가 성의인 만큼, 시그리드는 살짝 목이 메이는 것을 감수하며 정성스레 구운 고구마를 씹어 삼켰다. (문득, 욘이 말하던 콜라나 사이다soda를 구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도 잠깐의 목멤을 감수하니 달달함이 입안에 퍼지며, 마냥 처져 있던 입가도 슬쩍 올라가게 되었다.

“어제 석탄을 가지고 가셨던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지요?”

“아, 네. 말씀하셨던 대로, 철을 녹이기엔 부족하더라고요.”

“그렇대도요. 집에서 쓰기엔 무연탄이 좋지만, 순간 화르륵 불타는 건 역청탄이 최고지요. 사실 숯을 쓰는 게 더 좋긴 하지만요.”

“실은, 그래서 찾아온 건데... 혹시 다른 종류의 석탄은 주변에 없나요? 말씀하신 역청탄 같은 것이 근처에 있으면 좋겠는데요.”

막연한 기대를 담아 던진 물음. 그러나 마사는 잠깐 고개 들어 먼 숲을 보며 골똘히 생각하더니,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합니다, 마님. 적어도 이 주변 마을에서는 그런 얘길 못 들어본 것 같네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제 시그리드가 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모았던 석탄이 마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와 다름없었다. 색으로 보나 질감으로 보나, 하나같이 비슷했으니까.

결국 시그리드는 아무 성과 없이 따뜻한환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허나 아예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하다면서, 마사가 남은 고구마를 싸준 것이다.

여관의 벽난로에 구운 고구마를 여관 주인과 콜그림에게 나누어주고, 제 몫을 챙긴 시그리드는 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이곳 신대륙에는 검은 책을 노릴 사람도 없었고, 그 내용이 궁금하다면 언제든 시그리드에게 물어보면 된다는 것을 의회 사람들 또한 알았기에, 시그리드는 딱히 책을 감추지도 않고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시그리드는 어제 모습 그대로 책상 위를 지키고 있는 책을 다시 펼쳤다.

존 윌슨 중령은 공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특기로 보나, 평소 관심사로 보나, 행정직이 딱 적성에 맞는 인재.

그로 인해 시그리드의 검은 책은 ‘역사’ 항목 내용이 풍부했지만, 다른 분야는 내용이 다종다양할지언정 그리 깊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역사도 결국은 다른 분야랑 맞닿아 있단 말이지.”

새장에 들어가 있는 리프가 알아듣지 못할 혼잣말을 하는 시그리드였다. 어미 목소리 들은 리프가 홰를 쳤다.

“군주든 장군이든, 대장장이든 시인이든,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게 역사니까.”

눈가리개를 치워주자 보이는 것은, 영문 모르는 백송고리의 천진한 눈빛. 군고구마를 한 줌 뜯어 건네주었더니, 잠깐 쪼아먹고는 입에 안 맞는지 금방 옆으로 치웠다.

허나 이미 생각에 깊게 잠긴 시그리드는, 리프가 질색하든 팔색하든 그냥 기계적으로 계속 고구마를 뜯어 모이로 줄 뿐.

시그리드는 오지 않을 미래의 미국을 떠올렸다.

원주민들과 종주국 영국을 모두 몰아내고 저들만의 나라를 세운 미국인들.

분명 그들도 언젠가는 지금의 시그리드와 비슷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숲이 저들 사냥터라며 벌목을 못마땅해 하는 원주민들은 역병과 총칼로 밀어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숲이 무한하게 땔감을 내어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종국에는 기술이 답을 제공해주었다. 지금쯤 시그리드가 파견한 탐험대가 도달했을 오대호 연안과 오하이오 강 일대의 노천 광산. 언덕 전체가 철광석과 석탄으로 되어 있었다는 그 땅.

그곳에 철도가 놓이면서, 마침내 세계 최대의 공장지대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허나 분명 그전에도 미국에는 제철소가 있었을 것이다. 석탄이 풍부한 내륙에 제철소를 세우자니, 그 공장에서 나온 상품을 운송할 수단이 마땅치 않고, 인구가 많은 해안지대에 제철소를 세우자니, 근처의 목재가 부족하여 숯을 마련할 수 없었을 상황.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곳의 무연탄으로 철을 녹여낼 생각을 했을 것이요, 철 부족으로 주저앉기는커녕 무서운 속도로 뻗어나갔던 19세기 초 미국의 역사를 고려하면 반드시 그러한 노력은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었다.

“그래, 무연탄으로도 잘만 하면 숯을 대체할 수 있을 거야.”

그런 해답이 미래에 존재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마치 어두운 밤길 멀리에 등불 하나 밝혀져 있는 것처럼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해답이 존재했다는 가정을 세우고, 거기서 하나씩 되짚어나간다.

역청탄에 비해 훨씬 오래, 안정적으로 타지만 그만큼 화력이 부족하고 자연발화도 잘 되지 않는 무연탄.

어떻게 하면 야네크네 철공소에 있는 용광로에 이 무연탄을 부어넣어, 충분한 온도가 꾸준히 유지되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질문이 조금씩 명료해지고, 깊이는 없지만 그 너비는 지금의 세계에서 가장 넓다 해도 무방할 검은 책의 과학 지식이 시그리드의 사고를 뒷받침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한 발짝씩, 검은 책의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시그리드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반드시 찾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답을 향해 나아갔다.

해가 바뀌어 1417년이 되자, 겨울은 마치 그간의 직무유기를 반성하겠다는 양 거세게 밀어닥쳤다.

달달한 고구마 맛을 즐기던 보헤미아와 잉글랜드 이주민들은, 갑자기 닥쳐온 추위에 고구마가 모조리 상해버려 울상을 지었고, 그나마 멀쩡히 남은 고구마를 사들인 몇몇 약삭빠른 사람들은 교회 앞에서 고구마를 구워 팔곤 했다. (이 정도의 소액 거래에는 왐품을 쓰는 것이 일상으로 굳어졌다.)

그 추위를 뚫고 철공소로 돌아온 시그리드가, 뾰족한 해법 대신 뾰족한지 뭉툭한지 감도 안 잡히는 기묘한 제안을 해 왔다.

평생 쇠를 만지는 일을 해 왔던 야네크조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기법.

그러나 거절하자니 다른 마땅한 대안도 없는 터라, 야네크는 일단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귀를 열었다.

처음 나온 것은 제철의 기본도 모르는 처자답게 엉성하기 그지없는 발상. 그러나 그 속에 몇 가지 취할 만한 게 있었기에, 그 자리에서 비웃는 대신 야네크는 왜 시그리드의 제안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지를 차근차근 짚어주었다.

그러자 시그리드는 숫제 철공소로 짐을 옮겨오고는, 몇날 며칠을 야네크를 붙잡고 문답을 이어갔다.

스승의 기술을 어깨 너머로 배우고, 그 다음으로는 손으로 익혔을 뿐. 필요에 따라 임기응변을 할 뿐 스스로 뭔가 더 나은 기술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딱히 해본 적 없던 야네크는 이 신선한 경험에 은근한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어디 가서 인정할 일은 없겠지만.)

그리고 마침내 오늘에 이르렀다.

“이게 정말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막상 준비가 끝나니 더욱 자신감이 사라지는군요.”

“되면 좋고, 안 되면 더 좋은 수가 나올 때까지 더욱 고민하고. 그렇게 하면 될 일이지요.”

몇 주 전, 처음으로 무연탄을 써서 제철을 시도했다가 처참한 실패만 기록했던 실험용 용광로.

그 용광로는 그간의 공사로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내화 벽돌로 쌓아올린 용광로 외벽 주변에 벽돌로 두른 벽 한 겹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존의 외벽과 새로 쌓은 외벽 사이에는 그저 텅 빈 공간만이 있을 뿐.

허나 그 공간에도 나름의 목적이 있었으니, 바로 오지 않을 미래에서는 산림자원과 역청탄 부족이 문제로 떠오른 수백 년 뒤에나, 필요에 이끌려 발명되었을 공정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 해보자고요!”

“에잇, 그래. 해보십시다.”

“우리도 잘 해보자!”

마찬가지로 밑져야 본전이라는 핑계를 내세워 다시 사람들을 모아 철공소로 온 타토손도 따라서 외쳤다. 제철에 있어서는 시그리드보다도 무지한 타토손이었지만, 그간 야네크와 시그리드 두 사람이 머리 맞대던 것을 멀리서 보았던 사람으로서 은근한 기대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왐파노악 출신 인부들은 각각 풀무와 도르래를 맡아 자리를 잡았고, 지난날 시그리드가 모아왔다가 창고로 직행했던 무연탄이 다시금 밖으로 나왔다.

“시작하겠습니다!”

시그리드와 야네크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지난 번 실패의 까닭은, 역청탄이나 숯보다 훨씬 높은 온도에서 발화하는 무연탄의 성질에 있다고.

그렇다면 그 높은 온도를 유지시켜주면 그만일 텐데, 안타깝게도 풀무를 통해 외부의 공기는 계속 유입되기 마련이었다. 그로 인한 냉각효과를 견뎌낼 만큼 단열이 잘 되는 용광로는 지금의 기술력으로는 도저히 만들 길이 없었다.

하면, 풀무가 불어넣는 공기 자체를 데워버리면 그만 아닐까? 시그리드가 낸 아이디어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불 붙었다!”

풀무에 달라붙은 왐파노악 사내들도 저들 말로 떠들면서 풀무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겨울의 차가운 공기는 막 달아오르던 용광로 안쪽의 철광석과 무연탄을 식히는 대신, 새로 추가된 외벽 안쪽의 공간으로 밀려들어가 거기서 미리 가열될 것이었다.

역청탄에 비해 순간화력은 부족하지만 대신 꾸준하게 오래 타는 무연탄의 장점이 발휘되고 있었다.

그렇게 가열된 공기는 겸사겸사 용광로 내벽을 달구어 철광석의 온도를 높여주기도 했으며, 바깥에서 들어오는 공기에 밀려 안쪽으로 들어간 뒤에는 골고루 주변을 가열해주곤 용광로 위쪽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녹는다!”

열기를 무릅쓰고 용광로 위에 올라가 슬쩍 안쪽을 살핀 장인이 외쳤다.

용광로 내부의 온도가 역청탄에 비해 훨씬 높은 무연탄의 자연발화점에 도달하게 되자, 마침내 철광석과 반려암과 함께 용광로 안쪽에 부어졌던 무연탄도 연소되기 시작했다⁵.

“녹았다!”

한참 뒤, 흘러나오는 뜨거운 쇳물을 본 야네크 노인이 주먹 불끈 쥐고 외쳤다.

그렇게, 보잘것없어 보이는 철공소 한쪽의 더욱 보잘것없어 보이는 용광로 주변에서, 한참 시대를 앞선 기술혁신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혁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 이 땅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등등. 생각하려면 더 생각할 거리가 많았지만, 시그리드는 지금 이 순간만은 다른 이들과 함께 기뻐하기로 작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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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DP 개념이 등장하기 전 과거의 경제 규모를 정확하게 추산하는 것은 어렵지만, 적어도 미국이 필리핀과 하와이를 식민지로 삼기 전에 이미 청과 영국의 GDP를 추월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미국, 특히 미 동부는 풍부하다고 말하기에도 부족할 만큼 넘쳐나는 석탄과 철광,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을 수 있는 오대호와 미시시피강의 수운 덕택에 산업혁명에 극히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요.

2. 여름항구(프로비던스)와 따뜻한환영(보스턴) 사이에는 실제로 무연탄 광맥이 여럿 존재합니다. 워낙 석탄이 넘쳐나는 미국인지라 상업성은 없어서 19세기 이후로 대부분 채굴이 중단되었지만요.

애팔래치아 산맥 동서의 탄전은, 지하에도 많이 매장되어 있지만 침식을 거치며 지상에 드러난 노천광도 많이 있습니다. 개척 초창기에는 굳이 장작 대신 석탄을 땔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잘 개발되지 않았지만, 이미 당시에도 석탄이 넘쳐났다는 것을 방증하는 여러 일화가 존재합니다. 우물을 팔 때 석탄층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던가, 숲에서 야영을 할 때 모닥불 불똥이 노천광 위로 튀어서 불이 날 뻔했다던가, 독립전쟁 당시 지나가는 영국군이 길거리에서 석탄을 주워다 따뜻하게 잘 지냈다던가 하는 – 천연자원 부족한 한국 입장에선 참 생경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요.

3. 융제는 용광로에서 광물 원광을 융해시킬 때, 원광에 존재하는 불순물 – 철의 경우는 주로 산소 – 을 제거하기 위해 투입되는 화학물질의 통칭입니다. 유럽에서는 주로 석회석을 이용해 산화철을 환원시키곤 했는데, 보스턴 주변에는 석회석이 없었기에 초창기 개척민들은 잠시나마 제철에 곤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부단한 노력 끝에, 개척자들은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반려암gabbro도 융제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지요.

4. 중앙아메리카의 열대우림이 원산지인 고구마는 마야 문명을 통해 지금의 멕시코 동해안부터 카리브해 일대까지 많은 지역에서 재배되었습니다. 지금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고구마를 카모테camote라 부르는데, 이는 나와틀어 카모틀리camohtli에서 기원한 표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스턴 일대의 무상일수는 대략 한반도 중부지방과 비슷한 180일 정도로, 고구마 생육의 북방한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습니다.

여담으로 ‘포테이토’의 어원인 바타타batata는 카리브해 원주민 타이노Taino 족의 언어에서 유래했고, 많은 유럽 언어에서도 이를 고구마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고 있습니다. 원 역사에서 유럽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출항해 카리브해에 먼저 닿았던 것과 달리, 작중에서는 뉴잉글랜드에서 출발해 해안선을 따라 남하했기에 발생한 언어의 차이라 하겠습니다.

5. 19세기 후반 미국의 산업 수요를 감당한 것은 피츠버그 주변에 넘쳐나는 역청탄이었지만, 사실 19세기 초반만 해도 산업에 더 많이 쓰였던 것은 펜실베이니아와 매사추세츠 등 애팔래치아 산맥 동쪽에서 발견되는 무연탄이었습니다.

이는 – 작중의 시그리드가 추리한 것처럼 - 당장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개척 초기만 해도 풍족했던 뉴잉글랜드의 산림자원은 인구가 증가하고 산업이 발전하면서 고갈되어버렸고, 따라서 당시 산업기반 대부분이 몰려 있던 동부 해안 주변에서 쓸 만한 대체 연료를 찾을 필요가 제기되었습니다. 좀 더 내륙에 있는 역청탄을 해안으로 가져오자니 차라리 영국산 석탄을 들여오는 게 나을 지경이었기에, 제철에 부적합한 것으로 간주되던 무연탄을 어떻게든 써볼 궁리를 하게 된 것이지요.

무연탄은 역청탄보다 순도가 높아 화력이 강하고 오래 지속되지만, 대신 그 구조상 순간적인 화력이 역청탄보다 부족하고 코크스cokes로 가공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기술이, 바로 작중에서는 시그리드가 보헤미아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구현하였고 원 역사에서는 역청탄이 부족해진 영국 몇몇 지역과 역시 역청탄 수급에 어려움을 겪던 미국에서 거의 동시에 발명된 무연탄 선철Anthracite pig iron 공정이었습니다.

이 공정의 핵심은 바로 무연탄 발화점 이상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미리 가열된 공기를 계속 불어넣는 것이었지요. 작중에서 쓰이는 방식, 즉 용광로 외벽에서 직접 공기를 가열하는 방식은 기술의 부족으로 뜨거운 공기를 파이프를 통해 주입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없던 19세기 초에 잠깐 쓰였다가 사라진 원시적 방법이었습니다.

이후 증기선과 철도의 발명으로 육상교통의 효율성이 획기적으로 증가하면서, 미국 제철의 중심지는 오대호 근처로 옮겨가게 됩니다. 무한정에 가까운 역청탄과 철광석을 사용한 제철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무연탄 선철 공정은 도태되게 되지요. 그러나 그런 기술발전 과도기에 미국 산업을 지탱한 것이 바로 무연탄 선철 공정음을 감안하면 그 역사적 의의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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