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73화 (73/116)

밤의 열기 (3)

17. 밤의 열기 Night Fever (3)

남쪽 따뜻한희망에서 시그리드가 또 뭔가 기묘하면서도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소식이 슬슬 좋은희망에 전해질 무렵.

손녀딸 가족과 함께 바다를 건너온 스노리 노인은, 생각만큼 안락한 은퇴 생활이 제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겠나. 평생 버릇이 이렇게 든 것을.”

“암만 그래도 그렇지, 어르신도 참 대단하십니다.”

따뜻한 겨울 사이에 또 잔뜩 모피가 모인지라, 교역철이 아님에도 좋은희망에 찾아온 스베인이 가볍게 감탄했다.

항상 정직하게 일하면서 살아왔던 스노리 노인이었다. 허나 모든 것이 풍요로운 이 땅에서는 굳이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떠밀려온 나무조각을 모을 필요도 없었고, 허리 굽은 노인까지 생업에 나서야만 할 이유도 없었다.

한가로이 소일하는 게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던 스노리 노인의 눈에, 절반쯤 버려져 있던 좋은희망의 학교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그 옛날 개척만 주변의 원주민들과 합의하면서 시그리드가 내걸었던 두 번째 조건. 즉 공용어와 기본적인 산수, 그리고 주변의 지리 등을 각각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세우겠노라는 공약이 유명무실해진 것은 시그리드나 개척민들이 약속 이행에 소홀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원주민들이 너무 적극적으로 응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들과 교역하면 쇠붙이 – 원주민들은 맨 처음 그들과 접촉했던 그린란드 회사 사람들의 말에서 따와 ‘아욘’이나 ‘야론’ 등으로 부르곤 했다 – 를 얻을 수 있고, 쇠붙이 도구를 쓰면 그간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었으니, 공용어를 배우지 않는 쪽이 어리석었던 것이다.

하물며 이방인들을 가까이 했다가 뜬금없이 병에 걸려 죽거나,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 숲의 정령 따윈 없으니 대신 저들의 ‘큰 정령’을 믿으라 강요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니, 경계할 것이 무에 있을까.

“몸이야 안 따라주지만 아직 세 치 혀는 말짱하니까, 이런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공용어 배울 사람은 다 배우고, 개척민들도 주변 지리에 그럭저럭 익숙해지는 바람에 쓸모가 없어져, 훗날 이곳에서 어린아이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냥 창고로 쓰자고들 합의한 건물.

혹독한 겨울과 ‘검은 죽음’이 유럽을 휩쓸기 전, 레이캬비크에 상인들 머무는 곳으로 암묵적으로 정해진 여관이 있었음을 기억하던 스노리 노인은, 이곳을 빌려 상관 내지는 상공회의소 비슷한 것을 열었다.

“말이 거창하지, 실지로는 그냥 상인들 오갈 때 잠깐 들리는 곳일세. 헤니히 그 친구 벌이를 빼앗을 수는 없지.”

“술도 안 마시고 잠도 안 잔다면, 상인들이 여기 들려서 뭘 한단 말입니까?”

“할 얘기야 많지. 거래 얘기도 해야 하고, 어디 멀리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다더라 정보도 나누고, 그리고 상관 지키는 이 늙은이한테 어느어느 부족 아무개가 찾아오면 꼭 이 말 전해달라 하는 부탁도 하고.”

어느새 주변 부족들 사이에서 좋은희망은, 만남의 장소 비슷한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저 서쪽 세줄기불꽃 의회 사람들이 모이는 큰거북섬(매키낙Mackinac 섬)이나 긴집사람들이 수도 비슷한 것으로 삼고 있는 평화의 나무가 그러하듯, 이방인들이 당도하기 전까지는 따로 떨어져 살던 동쪽 해안가 사람들은 이곳 좋은희망을 중심지로 삼았다¹.

“내 보기에는, 꼭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조만간 비슷한 발상을 누군가 했을 게야. 자네야말로 체감하고 있지 않은가? 이곳 원주민들의 삶이 바뀌고 있다는 걸 말일세.”

“예?”

평범한 촌로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사치품인 백송고리 길들여 파는 일을 천직으로 삼았기에 이재에 은근히 밝던 스노리 노인과 달리, 스베인은 생긴 것 그대로 천성 싸움꾼이자 농장 주인. 그러니 멍하게 반문하는 것 외에 다른 대꾸가 나오지 못했다.

“분명 이곳 사람들에게 교역의 계절은 가을이라 하였지 않나. 그런데 지금은 봄이고, 자네는 모피 잔뜩 싸들고서 이곳까지 왔지.”

“그야, 지난 겨울이 따뜻해서 그런 거였지요.”

“그래, 겨울이 따뜻하니 추위 걱정 없이 잔뜩 가죽을 모아들였겠지. 허나 모피를 살 사람도, 그것을 팔아 사들일 물건도 없었다면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었겠나? 그냥 날 따뜻하니 좋다고 생각하고 말았겠지.”

“아.”

바닷조개 껍데기를 연마해 만드는 왐품은 신대륙 연합과 그 너머의 화폐 비슷한 것으로 자리잡았다. 유럽인들의 철제 도구를 이용하면, 숫돌에 애써 갈 것도 없이 대량으로 왐품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때맞추어, 그 왐품으로 사들일 만한, 바다 건너온 값진 물건들이 나타났다.

이 땅의 부족들 모두가 모여 따로 합의한 바 없음에도, 다들 남의 부족에 쳐들어가 사람과 식량, 농지와 사냥터를 빼앗는 대신, 교역으로서 부족한 식량을 충당할 궁리를 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세상에 바뀌지 않는 건 없다네. 변함없던 계절조차 그토록 쉽사리 변하고, 일천 명쯤 너끈히 살던 정착지가 갑자기 망해버리고, 그러다가 또 갑자기 다시 사람이 살게 되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이방인이 느닷없이 설원 한가운데 떨어지고, 고아 소녀가 그 이방인을 스승 겸 양부로 삼았다가 세상을 뒤흔들게 되고...

세상 이치가 이러한데, 이곳 원주민들이라고 변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나?”

스노리 노인은 나름 긴 삶을 거치며 체득한 지혜를 풀어놓는데, 스베인은 도통 알아듣지 못해 머리를 긁적일 뿐.

다행히 때맞춰 이곳 상공회의소에 손님이 찾아와, 스베인을 어색함으로부터 구해주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어르신?”

“오, 먼길 다녀오느라 고생하였네.”

공용어 유창한 미크막 상인이 스노리 노인에게 아는 체를 했다. 스노리 노인이 이곳에 문을 연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을 고려하면, 살짝 아첨을 곁들인 인사였다.

“아, 인사하게. 여기 개척만 건너편에 사는 미크막 상인 케벡Kebbek²일세.”

고기를 잡으러 배 타고 강을 오르내리던 아버지가 강어귀에 이르러 탄생 소식을 들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케벡은, 대를 이어 뱃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다만 조그만 민물고기를 잡는 대신 바다 건너온 사람들이 제공하는 새로운 기회를 잽싸게 붙들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

“덩치가 장사신 것을 보니 스베인 선생님이시겠군요! 반갑습니다. 소소하게 교역으로 먹고사는 케벡이라고 합니다. 우리 사이에선 ‘왐품의 집’이라 부르는 이곳에선 나름 단골이지요.”

케벡이 넉살 좋게 스베인에게도 손을 건네었다.

개척만 남쪽에 흩어져 살던 미크막 사람들은, 여름에는 씨족 단위로 흩어져 살다가 가을에는 부족 단위로 뭉쳐 월동을 하곤 했다.

그러나 유럽인들과 그들의 철기가 도입된 이후부터는, 아예 여름에도 그대로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되었으니, 바로 왐품 때문이었다.

개척만 남쪽의 해안은 북쪽과 달리 모래사장이 펼처진 곳이 꽤 있었고, 이곳에 거주하는 미크막인들은 철제 도구를 이용해 엄청나게 많은 양의 왐품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화폐가 복사가 되는 이 상황은, 결국 긴집사람들 대표들과 세줄기불꽃 의회를 대변하는 오다와 사람들까지 좋은희망에 찾아와, 보안관 디폴트의 중재 하에서 며칠간 논쟁을 벌인 끝에 겨우 안정되었으니, 거래에 쓰는 왐품에는 반드시 희귀한 보라색 조개를 끼워넣기로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신대륙 최초의 통화정책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불과 일 년 전의 일. 그러니까 시그리드가 저 남쪽에서 공권력을 상대로 열심히 최루가스 뿌리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미크막 사람들이 떼돈 – 혹은 ‘떼조개’ - 벌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이삼 년간 바짝 모은 재산은 적지 않았으니, 이들이 새벽땅사람, 즉 와바나키 모임을 결성할 수 있던 밑천 또한 이렇게 모은 것이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모으고 모아서, 아예 조그만 배 한 척을 마련했습죠. 행여 바닷가 부족들에게 뭐 팔 거리가 있다면 언제든 연락주십시오.”

저도 모르고 있던 상업적 재능을 발견한 케벡은, 제 누이와 눈 맞은 아이슬란드 항해사와 함께 소소한 사업을 시작했다. 아예 정기적으로 좋은희망과 우애를 오가는 연락선 운행을 시작한 것이다.

중간중간 원주민들 사는 강가에도 머물곤 했으므로, 주로 개척민들보다는 원주민 상인들이 애용하곤 했다.

“어떻게 내가 연락을... 아.”

“그렇지. 그러라고 이 늙은이가 여기 머무는 거라네.

아, 케벡, 그러고 보니 니놀리노 사람 애덤이 내게 남기고 간 얘기가 있었다네. 환영 쪽으로 갈 일이 있으면 꼭 그쪽 맥주를 사와 달라더군.”

딱히 헤니히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지만, 긴 겨울과 변변찮은 여름을 뚫고 근근이 자라는 밀을 수확한 푸른들판 농민들은 남는 보리와 목초지 근처에서 재배한 홉을 꼭 헤니히에게 넘기곤 했다.

독일계 농민들의 생각으로는, 시그리드가 여왕이라면 헤니히는 대충 궁정백Pfalzgraf쯤은 되었던 것이다. 헤니히도 굳이 그 오해를 고쳐줄 이유는 없었고, 또 그럴 언변도 없었기에, 종종 찾아오는 농민들에게 맥주를 싸게 파는 것 외에 딱히 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에고. 한 보름만 일찍 들었더라면 오는 길에 챙겨서 왔을 텐데요. 막 남쪽에서 돌아온 터라.”

“남쪽? 환영 쪽에서 오셨소?”

남쪽 하니까 그쪽에 가 있는 시그리드가 떠오른 스베인이 물었다.

“네, 바로 맞추셨습니다.”

시그리드가 어딘가 먼 곳을 갔다면, 이는 곧 그곳에 문제가 일어났거나 아니면 문제를 일으키러 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는 비단 스베인뿐 아니라 이 땅에 비교적 오래 뿌리 내리고 산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그러므로 케벡도 눈치껏 환영에서, 보다 정확히는 야네크네 철공소에서 벌어진 일의 전말에 대해 상세히 털어놓았다.

“... 그렇게 해서 그 ‘밤의 돌’, 아, 공용어로는 석탄이라 하던가요, 하여튼 그걸로 쇠를 만들어냈답니다. 벌써 우리 새벽땅사람들과 함께하기로 한 부족들은 가는 곳마다 그 얘기로 시끌시끌합디다.”

“새벽땅사람? 그 사람들이 왜 시끄럽단 말이오?”

“왐파노악 사람들도 그 일원이니까요.”

“아니, 그러니까, 그쪽 사람들 바라는 대로 다른 부족 숲 안 건드리고 쇠를 만들 길이 열렸는데, 뭐 더 떠들 게 남아있다고?”

그 옛날 그린란드에서 합심한 이래, 시그리드에 대한 공격을 저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게 된 스베인의 언성이 슬쩍 올라갔다.

“저도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네 모임이 아직 그렇게 대소사를 모두 터놓고 말할 만큼 짜임새가 있진 않아서요. 그렇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분들은 많이 계시지만요.”

“얼추 무슨 생각들인지 알 것도 같구나.”

가만 듣던 스노리 노인이 끼어들었다.

“허나 그들이 무슨 고민을 하든, 시그리드가 못 헤아릴 만한 걸 고민하고 있지는 않을 게다. 딱히 호들갑 떨지 않아도 잘 해결할 게야.”

스노리 노인의 말은 절반만 맞았다. 한참 남쪽에 있는 시그리드가 석탄의 개발이 가져올 갈등을 예방할 방법을 구상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 해법이라는 건 족히 호들갑 떨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으니까.

연장은 주인을 가리지 않는다. 연장을 손에 쥔 자는 그 연장을 통해 정의되기 마련이니까.

그러므로 쇠를 다루는 자는 누구든 철공이라 불리고, 무기를 다루는 자는 누구든 전사라 불린다.

그렇다면, 지금껏 철공소를 위해 숲을 벌채하고 숯을 굽던 이들이 석탄을 때게 된다면, 그때부터 그들은 뭐라 불리게 될까.

자신이 유럽에 풀었던 때 이른 지식과 기술이, 훗날 중세라 불릴 시대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것을 잘 알기에, 시그리드는 결코 기술이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없이 주인의 손에 들어가 묵묵히 저의 소임만을 다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려워요.”

그사이 키가 부쩍 크고 그만큼 여드름도 난, 그러나 벌써부터 조금씩 늠름함이 느껴지는 콘스탄티노스 황자가 칭얼거렸다. 지금 나이는 딱 그럴 때, 어른과 아이 사이를 오가면서 무엇을 하든 나이에 걸맞지 않게 보일 무렵.

얼마 전 환영 쪽으로 가는 길에 시그리드가 들리자 곧장 찾아와 청혼을 했는데, 시그리드가 당분간 결혼 생각이 없다고 밝히는 바람에 콘스탄티노스는 금방 삐져버렸다.

그러나 시그리드가 환영 쪽에서 돌아오자, 언제 자신이 그랬냐는 듯 이렇게 찰싹 붙어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사실 저도 금방 그 자리에서 이런 걱정을 하게 된 건 아녔답니다. 그날 밤 쇳물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고, 타토손과 야네크 씨 둘이서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해나갈지 논의하는 걸 듣다가 떠올렸지요.

그렇지만 미리 고민할 필요가 있는 일이에요.”

나무를 베는 것과 그 나무를 때어 숯으로 만드는 것은 모두 왐파노악 원주민들이 본래 하던 일이었다.

또한 이 땅을 가득 뒤엎고 있던 숲과 들, 늪에 이름을 부여하고, 필요에 따라 구획을 나누는 일 역시 원주민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석탄은 그렇지 않다.

석탄을 쓰는 것은 오로지 이방인들뿐. 석탄이 어디 묻혀 있는지, 어떻게 캐야 하는지 말하는 것도 오로지 이방인들의 몫.

원주민과 이방인 모두의 것인 숲을 두고 논쟁을 벌일 때는, 원주민들이 목소리를 낼 틈이 있었고, 또 이방인들이 그것을 들어야 할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석탄은 그렇지 않았다. 이곳에서 파내라 하면 따라야 하고, 저쪽으로 옮기라 하면 그 역시 무조건 따라야 했다.

지금껏 이방인들과 교역하며 항상 자유를 누려왔던 원주민들은, 이 변화에 은근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 간파한 사람은 드물었지만.

“반면에 우리쪽 사람들도 할 말은 많이 있지요. 당장 환영 주변의 주민들이 캐낸 석탄이 다 떨어지는 순간부터 주변을 채굴해서 석탄 수요를 감당해야 할 텐데, 야네크 씨부터 시작해서 다른 보헤미아 장인분들도 이를 갈고 있더라고요.”

감정의 골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양쪽의 요구사항이 모두 만족된 형세가 갖추어졌기에 다소 잠잠해지긴 했지만, 상처에 비유하면 이제야 막 실밥으로 꿰멘 정도. 완전히 아물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이제 숲을 보호하니, 저쪽 숲부터는 어느어느 부족의 사냥터니 하고서 트집을 잡을 명분도 사라졌겠다, 왐파노악 일꾼들이 석탄을 채굴할 때도 이번처럼 드러눕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보헤미아 사람들은 단단히 작정을 하고 있었다.

허나 왐파노악 일꾼들이 그나마 익숙한 벌목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단순노동인 채광을 하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사고는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안전사고든, 아니면 또 다른 노사갈등이든.

“암만 그래도, 너무 멀리까지 걱정하는 것 같은데...”

함께 우애 시의 거리를 걷던 황자가, 살짝 돋아나는 저의 수염이 문득 간지러워 얼굴을 북북 긁었다.

궁중 예법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던 황자의 언행에는 기품이 거의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에 돌아갔다가는 엄청난 탄식과 고뇌를 자아낼 만큼 – 그리고 궁중 예법에 질릴 대로 질린 모이시스 1세에게서는 은밀한 동정의 눈길을 살 만큼 – 자유분방한 모습.

“그렇지만 언제고 벌어질 일이긴 하지요. 그래서 멀리 바라보고 해결하려고요.”

우애의 도시는 신대륙에서 유일하게 저 자신을 도시로 자칭하는 곳.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부터 따라온 기술자들이 처음에는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았던 탓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지금은 가능한 여건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마을 전체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물론 기술자들의 욕심대로 길에 포석을 깔거나, 상하수도 시설을 완비하거나 하진 못했지만, 같은 통나무집이라도 경험에 의존해 세운 집과, 대충이나마 설계 과정을 거쳐 세운 집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허나 옥수수 강 교역로의 종착점이자 주변의 인구 많은 레나피 부족들에게는 교역의 중심지인 이곳 우애의 도시가 자랑하는 번듯한 모습은, 이미 몇 번 들렸던 시그리드에게는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처음 이 땅을 자유의 나라로 만들고자 했을 때부터 갈 수밖에 없던 길이었어요.”

그리고 욘의 세상에서는, 누구도 앞날을 미리 알 수 없었기에 도저히 갈 수 없던 길이기도 했다.

“여전히 잘 모르겠는데...”

도시에 머무는 임시의회 대표들을 통해, 그리고 나중에는 시그리드 본인의 고백을 통해, 시그리드 머릿속에 이 시대에 원래 있을 수 없는 지식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콘스탄티노스였다.

그러나 그 지식이 정확히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상황이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은 시그리드가, 좋은희망에 머무를 때 틈틈이 검은 책을 필사하고 거기에 주해를 달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완성이 요원했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에요. 결국 이 모든 건 신대륙에 아직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아마 빈란디아 북쪽 전체를 다 합쳐도, 그 인구는 농경이 발달한 아나왁 땅의 절반도 채 미치지 못할 것이었다³. 이대로 계속 신대륙 연합에 이주민들이 유입된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세줄기불꽃과 긴집사람들의 인구를 신대륙 연합이 추월하게 될 것이다.

지금쯤 유럽의 어지간한 국가들이 인구 수백만을 자랑하고, 심지어 프랑스는 이미 천만을 넘긴 지 오래라는 것을 고려하면 압도적인 차이였다.

따라서 이곳 땅에서는 일손 하나하나가 귀할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노동자들에게 사용자들이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오지 않을 미래에 공장주들이 휘두르던 전가의 보도, ‘너 말고도 일할 놈 많다’가 이곳에선 통용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일꾼들의 의사를 존중할 수밖에 없고, 그들의 처우 역시 항상 신경써야 하지요. 그러지 않는다면 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요.”

“그러면 좋은 거 아녜요?”

“좋은 일이지요. 모든 사람들의 뜻을 반영했다가는 공방이든 철공소든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요.

무작정 대우를 좋게 해줬다가, 바다 너머에서 물건을 들여오는 게 더 저렴할 지경이 된다면, 그때는 이 땅의 장인들 모두가 폐업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인구의 한계 때문에 욘의 세상에서 스페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강철과 화약으로 원주민의 금은을 빼앗을 수도, 자급자족만으로 스스로 자유를 지킬 만한 세력을 일굴 수도 없는 이상, 신대륙 연합은 어떻게든 교역에 힘써야만 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노예를 데려와야 할까요? 이교도 나라들 중에는 작도에 사는 흑인들을 붙잡아다 노예로 부리는 곳도 있다고 하던데요.”

“작도가 아니라 적도에요. 그리고 노예를 들여오는 건 도저히 못할 짓이고요.”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윤리적인 것이었고, 이 신대륙 연합의 이념 – 아직 헌법이란 형태로 구체화되진 않았지만 – 또한 중요한 걸림돌이었다. 아직 이 땅에 없는 것으로 보아 서아프리카 노예들을 통해 유입된 게 틀림없을 열대성 역병 또한 문제였고.

“사람을 부리는 품이 너무 많이 든다면, 같은 노력으로 더 많은 일을 해내면 될 일이지요. 그러면 더 들어간 품삯 이상으로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을 테니까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런 걸 하려고 지금 테오도로스 선생님을 찾아가고 있답니다.”

플레톤을 뒷방 늙은이로 만들기 위한 동방정교회 성직자들의 교묘한 술책 덕에, 이 땅으로 넘어온 로마인 이백 명은 하나같이 소수정예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인재들뿐이었다.

개중에는 『멋진 신세계』의 삽화를 맡았던 화공 디미트리오스처럼, 정착지 개척에는 큰 도움이 안 되는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로 국운이 나날이 기울어가는 저의 고국에서는 도저히 재주를 펼칠 수 없었기에 오히려 이곳에서 펄펄 날아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테오도로스. 도시 하나만 남은 제국에서는 쓸 곳이 없거나, 가용한 예산이 없거나, 둘 중 하나에 해당하는 기계들의 도안을 머릿속에 담고서 평생을 살아온 장인이었다.

아마 게미스토스 플레톤과 사제 겸 황자 가정교사인 니케포로스 다음으로 연장자일 테오도로스는, 이미 항구에서 쓸 기중기를 비롯해 많은 기계를 만든 바 있었다.

대개는 현실과 타협하여, 딱 보았을 때 조잡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기가 어려운 기계들이었으나, 그 기계를 만드는 데 얼마나 적은 노력이 들어갔는지, 지금의 정착지 형편에 얼마나 최적화된 기계인지 알게 된다면 또 한 번 놀랄 만한 그런 기계들이었다.

“그러지 말고 좀 알려줘요. 명색이 저도 이곳의 공동 통치자인데.”

어지간해선 잘 꺼내지 않는 저의 지위 얘기를 하는 걸 보면, 정말로 궁금한 모양이었다.

테오도로스의 집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리고서 답이 있기를 기다리던 차, 시그리드는 황자에게 살짝 귀띔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석탄 채굴 때문에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걸 막으려면, 그 석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늘려버리면 그만이랍니다. 그렇게 하면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인부들 처우를 잘 하면서도 사업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요.”

“석탄으로 난방이라도 하게요?”

시그리드가 답하려던 차, 안쪽에서 ‘지금 나가겠소’ 하고 외치는 초로의 사내 목소리가 나는 바람에, 황자가 답을 듣는 것은 조금 뒤로 늦춰지고야 말았다.

증기기관을 만들겠다는 시그리드의 계획을 몇 분 일찍 들었다 한들, ‘그게 되나?’ 하는 반응을 보이는 건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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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휴런 호와 미시간 호 가운데에 위치한 매키낙 섬은 세줄기불꽃 의회의 사실상 수도 겸 교역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이는 오대호 주변에 퍼져 살던 알공킨계 부족들이 모이기에 딱 좋은 지리적 여건과 더불어, 섬이 제공하는 안전함 덕분이었지요. 훗날 프랑스인들 또한 이곳에 요새를 세워 원주민과의 교역 거점으로 요긴하게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몰랐던 영국은 7년전쟁 당시 그저 프랑스 요새라고만 여기고 막무가내로 매키낙 섬을 점령했는데, 그로 인해 폰티악 전쟁Pontiac’s War이라 불리는 대규모 원주민 반란 – 앙숙이던 이로쿼이계 부족과 알공킨계 부족이 유럽인들에 대항해 뭉친 첫 번째 사례였습니다 - 에 직면하게 되었지요.

마찬가지로 이로쿼이 연맹도 다섯 부족 중 지리적으로 딱 가운데에 거주하고 있으며 인구도 가장 많았던 오논다가족의 영역에 수도를 정했습니다. 구전에 따르면 서기 1142년에 ‘위대한 중재자’가 다섯 부족을 처음 한곳에 모아 연맹을 창설하고 ‘평화의 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지지요.

이러한 전례를 고려했을 때, 북미 동부해안 원주민들이 - 딱히 유럽인들과 상의하지 않고 – 좋은희망을 교역의 중심지 겸 만남의 장소로 쓰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 미크막어로 강어귀 혹은 강이 좁아지는 구간을 뜻하는 케벡은 원 역사 퀘벡Quebec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퀘벡 시가 세인트로렌스 강이 좁아지는 곳에 위치해 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지요.

3. 유럽인들 – 그리고 유럽발 질병- 이 도착하기 전 아메리카 대륙의 인구를 정확히 추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15세기 말 기준으로 대략 남북아메리카를 합쳐 5천만에서 6천만 사이였을 것이라는 추산치가 대략 중간값에 해당하지만, 이마저도 확실치 않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농경이 발달한 메소아메리카나 안데스 산맥과 달리 북미의 인구는 항상 희박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비교적 널리 통용되는 데네반(1992)의 추정치에 따르면, 콜롬버스 도착 시점에서 중남미 전역의 인구가 약 2천 4백만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지금의 미국과 캐나다는 다 합쳐도 4백만이 되지 않아, 카리브해의 크고 작은 섬들을 합한 것보다 약간 많은 정도에 불과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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