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멈출 수는 없다네 (2)
18. 음악을 멈출 수는 없다네 Can’t Stop the Music (2)
“요즘 좋은희망에 유행하는 인사법이 있더라고요. 보헤미아 편이냐, 독일 편이냐. 그렇게 묻는다지요?”
신대륙 연합 임시의회의 대표라야 아직 오십 명이 채 안 되고, 그마저도 인구비례를 주먹구구로 계산하다 보니 정원마저 확실치 않았다.
더구나 좋은희망 인구도 암만 독일인들이 이주해오고 니놀리노 사람들 – 그리고 심지어 바다 건너 동포들이 마을에 정착해 잘 먹고 잘 산다는 풍문을 들은 툴레 사람들 몇몇까지도 – 이 정착하였다지만 아직 이천은커녕 천 명을 살짝 넘긴 정도.
그러니 오스트리아 사람 중매쟁이 아돌프의 NSDAP가 일으킨 작은 파장은 금방 좋은희망의 좁은 목책 안쪽 곳곳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이런 갈등은 발생하겠지요.”
시그리드가 신대륙 연합의 명실상부한 전제군주가 되기를 포기하고, 수많은 민족들 사이에 그보다 많은 이견이 병립할 수 있도록 한 이상, 한정된 재원의 배분을 둘러싼 다툼은 계속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농지나 목초지를 두고 독일인과 보헤미아인이 멱살잡이를 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저 먹고사는 데만 집중한다면, 각기 다른 민족이 저들끼리만 모여 살면서 서로 소통하지 않아도 하등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미래를 생각하게 되면 얘기가 달라졌다.
아무리 신대륙과 유럽 사이의 교역이 엄청난 수익을 내고 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교역량은 충분치 않았고 그 수익 역시 무한하지 않았다.
따뜻한희망에 긴요한 농마農馬를 데려오게 되면, 그만큼 푸른들판의 목장에서 키울 양과 소는 덜 데려올 수밖에 없다².
보헤미아 장인들을 데려오기 위해 흩뿌린 금으로는, 유럽에서 더 많은 것을 사올 수 있을 터. 장인 한 사람 몸값이면 이민자 가족 한둘을 족히 데려올 수 있을 것이요, 아니면 저의 고향 근처에서 마음 맞는 이들을 더 모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충관계가 있었으므로, 지난 이삼 년 전부터 민족들 간에 슬슬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죽 이어질 것이고.
“그렇다면 차라리 이 기회에 세금을 걷고, 우리 대표들과 지도부의 논의를 거쳐서 그나마 공론 모이는 쪽으로 쓰는 게 나을 거에요.”
물론 절충안이야 있었다. 증기기관 대신 ‘대단한 강’ 오갈 때 쓸 증기선에만 투자를 하고, 왁샤칵 금광에 보낼 광부는 따로 모으지 않고 아나왁 남쪽 바닷가에 조선소와 항구 지을 만큼의 투자만 하는 것이라던가.
그러나 이미 감정의 골이 패이기 시작한 이상, 그런 절충안은 양쪽 모두 불만을 품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차라리 세금을 걷고, 그렇게 충당된 재원으로 두 가지 안을 모두 추진하는 쪽이 훨씬 나으리라고 시그리드는 믿었다.
시그리드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발언한 것은 – 다들 예상했듯 – 플레톤이었다.
“세금을 걷겠다는 그 말이 밖에 퍼져나가게 되면, 확실히 갈등은 잦아들겠군. 대신 시그리드 자네와 우리 ‘안쪽 사람들’을 보헤미아인이고 독일인이고 가릴 것 없이 일심동체로 헐뜯겠지.”
이 세상에 민족과 종교를 초월하는 이상이 있으니, 자유도 평등도 아니요 바로 ‘세금 내기 싫다’였다.
플라톤에 심취한 게미스토스 플레톤이 바로 그 산증인이었다. 일찌감치 헌법 초안을 들고 돌아다닐 적에 많은 사람들이 그 정직한 내용에 충격을 받곤 하였던 것이다.
‘농사짓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토지를 경작할 권리가 보장된다네! 군인과 공무원들이 저들의 재주로써 공동체에 봉사하듯, 농민들에게는 농사짓는 것이 공동체를 위한 것이니 당연한 이치지.’
‘참으로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나도 잘 알고 있네. 공공선을 위해 소출의 3분의 1만 내면 된다니, 이 얼마나 공정하면서도 깔끔한가?¹’
‘네? 잘 못 들었습니다? 농담이시죠? 농담이라고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런 반응에 내내 시달린 플레톤은 결국 세율 내용을, ‘통치자들이 공공선을 위해 적절하다고 결정하는 만큼’의 세금이라는 지극히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갈음할 수밖에 없었다.
“시그리드야, 플레톤 선생 말씀이 옳다. 그린란드에는 딱히 세금이랄 게 없었으니 잘 체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유럽 본토에서는 세금 하면 질색하는 것이 정상이란다.”
동녘정착지에 머물던 시절을 잘 기억하는 후스가 (실로 간만에) 플레톤의 말을 거들어주었다.
“아니, 이미 다들 마을 단위로 알음알음 걷고 있을 거 아녜요? 세금이라는 말만 안 할 뿐이고요.”
이미 잘 자리를 잡은 마을이라면 대개 공동의 재정을 마련하고 있었다. 마을 목책이나 우물, 강가 부두 같은 공동 시설 관리를 위한 것이었는데, 무엇으로 재정을 모으는지, 누가 관리하는지, 세율이 얼마인지 등등은 모두 중구난방이었다.
“물론 네 말마따나, 마을마다 공동으로 재물이나 곡식 따위를 모으곤 하지만, 그건 연합 전체를 위해 쓰고자 모은 재산은 아니잖으냐. 더구나 네 말대로 재원을 충당한다면, 필연적으로 재정 부담이 생길 테고.”
“그러면 재정 부담을 지는 대신 마음의 부담을 던다고 하면 어떨까요?”
시그리드는 지금 좋은희망에 머물고 있는 임시의회 대표들의 머릿수를 빠르게 암산하곤 말했다.
“마음의 부담을 던다니?”
“한 번 들어보세요. 장담컨대 후스와 플레톤 두 분 선생님 모두 만족하실 거에요.”
“간혹 보면, 시그리드는 진짜 마녀 같기도 하단 말이지.”
좋은희망이 점점 넓어지면서, 임시의회도 옛날처럼 냄새나고 퀴퀴한 헤니히네 창고에 모이는 대신 스노리 노인의 상공회의소 건물을 빌리고 있었다.
“농담이 과하십니다.”
잘 다져진 흙길 따라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던 중 플레톤이 툭 던진 말에 후스가 정색했다.
“댁들한테나 마녀가 과한 농담이지, 우리 헬라스 전통대로라면 꼭 그런 것도 아니오.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나, 테살로니카의 아글라오니케Aglaonice라던가. 다들 당대에는 마녀 소리 들었던 위인들이지.
아무튼 시그리드를 볼작시면, 꼭 이렇게 궁할 때마다 묘안을 내놓곤 한단 말이오. 처음엔 뭔 헛소리인가 싶다가도 듣다 보면 또 그럴듯하게 들리게 되고.”
“그건 시그리드보다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말미암은 현상이겠지요.”
“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시그리드가 바라는 자유로운 신대륙 연합의 이상이 무엇인지는, 사실 다른 이들은 물론이요 시그리드도 잘 알지 못했다.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한 바 없던 것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면 그자야말로 진짜 마녀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시그리드는 자신이 무엇을 피하고 싶어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오지 않을 미래의 사람들이 걸어갔던 근대로의 길.
‘안쪽 사람들’에 속하는 플레톤과 후스 역시 시그리드의 검은 책에 적힌 근대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중세라 불릴 이 시대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았으나, 동시에 그 시대의 일원이기도 했던 두 사람에게, 자신들이 속한 세상을 부정하고 초극한 끝에 나타난다는 근대의 이야기는 분명 달갑지 않았다.
그러므로 갈등의 싹수가 다시금 고개를 내민 지금, 아예 그 갈등으로 하여금 영영 이어지되 선은 넘지 않도록 잘 길들이자는 주장에는 두 사람 마음에 맞는 면이 있었다.
“어쨌든 시그리드 말마따나, 우리 작은 공동체 안의 갈등이 불거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 아니겠습니까. 갈등을 피할 수 없다면, 규칙을 만들고 그 안에서 스스로 관리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 대화를 오래 끌 만큼 좋은희망이 넓은 것은 아니었다. 언덕길은 금방 끝나고, 아담한 회의소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 되셨소, 후스 선생?”
“아아, 물론이지요, 플레톤 선생. 잘 해보십시다.”
후스는 숨 크게 들이마시며 문을 열었다.
좋은희망이 아직 그리 크지 않다 보니 대표들 중 누가 마을에 머물고 있고 누가 떠났거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얼추 보아도 올 가을 회기에 모일 사람 중 절반 남짓이 모여 있었다.
곧 시그리드와 디폴트를 필두로 나머지 사람들도 모여들고, 잡인 왕래 막는다는 명목으로 아랫사람 몇 명 데리고 온 민병대 부관 한스와 그냥 시그리드 따라다니는 콜그림, 귀빈 자격으로 참석한 틀라카엘렐까지, 올 사람들은 죄다 도착했다.
상공회의소 주인이자, 오늘은 푸른들판의 그린란드 사람들 대표로서도 참석한 스노리 노인이, 마음 한구석에서 그 옛날 팅을 주재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개회를 알렸다.
그리고 그러기 무섭게 후스가 손을 들었다.
“발언을 요청합니다.”
“보헤미아의 얀 후스 선생께 발언을 허용하겠소.”
“내후년에 열릴 선거의 대강을 마련하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급선무가 있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 계신 시그리드 각하, 그리고 저 먼 남쪽에서 온 틀라카엘렐 경께서 각각 제의하신 투자 계획 중 어느 쪽에 예산을 투입할지 결정하는 일이지요.
그리고 알고 계신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올해 그린란드 회사의 수익은 두 계획 모두를 추진할 만큼 넉넉하지 않습니다.
허나 오늘 저는 이 논의를 하기에 앞서, 몇 가지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공동체의 이익과 그 안의 소집단의 이익이 상충할 때, 무엇이 앞서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지요.
이는 길게 보면 올해와 내년 중에 반드시 거쳐가야 할, 헌법에 대한 논의와도 맞닿는 것이므로, 다소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꼭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인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후스가 저들 편을 들어, 저 음험한 독일 놈들의 음모를 분쇄하리라 기대하는 보헤미아 사람들의 눈치. 그러다 보니, 평소에는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강론을 하는 후스가 이렇게 평소답지 않게 서두를 떼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반대편 사람들, 꼭 합스부르크의 아돌프가 떠드는 소리에 동조하진 않더라도, 시그리드의 증기기관 계획이 성공하기 어렵거나 보헤미아인들의 이익에만 부합한다 여기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후스와 앙숙으로 알려진 플레톤에게 눈길을 보냈다.
“이른바 증기기관은 현재로서는 분명 한계가 있지만, 장차 큰 효용을 지니게 될 기술입니다. 명백히 공익에도 부합하며, 무엇보다 따뜻한환영의 보헤미아계 주민들과 왐파노악 원주민들 사이의 충돌을 막고 둘 사이의 원활한 협력과 공존을 도모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라 할 수 있지요.
우리가 신대륙에 건너온 것은 작게는 개인, 크게는 그런 개인들이 모여서 이루는 집단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백 번 양보하여 증기기관 개발보다 아스테카 사람들이 제안한 남방 투자가 더 큰 이익을 연합 전체에 약속한다 한들, 그것이 보헤미아인들의 보다 시급한 필요를 무시한 채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말씀 잘 하셨습니다!”
“옳소! 옳소!”
“진실은 승리한다!”
스무 명남짓 되는 보헤미아 대표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그러자 플레톤이 벌떡 일어났다. 스노리 노인은 제지하기는커녕 고개 끄덕이며 그의 발언을 허락했는데, 사실 플레톤이 뭔가 말을 하려고 하면 가로막기 어렵다는 것은 상식이었으므로 누구도 스노리 노인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공동선과 사적 이익의 충돌이 거론된 이상, 내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군.
그러니까 내가 1394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을 때의 일이오. 그때 막 고대 현인들의 저작을 정리하던 중에 마누일 폐하께서 나를 부르셨소. 부르사에 머무시던 시절, 몇몇 어리석은 투르크인들이 먼 옛날 스토아주의 철학과 저들의 모하메드가 설파한 바 사이에 관련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었다 하셨는데, 그 터무니없는 소리에 분개한 나는...”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서두가 두서없이 이어지니, 플레톤을 응원하던 눈빛은 잦아들고 대신 당혹감이 감돌았다.
“결국 헌법의 문제와 직결되는 사안이로군요.”
“거기에는 나 역시 동의하는 바요. 보헤미아계 주민이라는 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는 위해서는 증기기관 개발이 최선이겠지만, 나머지 지역은 아직 그 혜택을 입을 만큼 이렇다할 공방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소이까.”
“우리 연합이 연합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냐, 아니면 정착촌 각각의 집합이냐, 이것을 먼저 규정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아예 스노리 노인에게 발언을 요청하지도 않고 저들끼리 주고받는 문답이, 쉴 새 없이 나오는 장광설의 불꽃에 풀무질을 하는 듯했다.
“말씀 잘 하셨소. 그리고 다양한 민족이 하나로 어우러져 살아간 것은 첫 번째 로마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지만, 사실 그 공존이라는 것도 도리아인과 아티카인 등 온갖 민족이 하나로 어우러져 온 지중해에 문명을 퍼뜨렸던 시절부터 찾아볼 수 있는 미덕이올시다.
페르시아의 침공에 맞서 단결했던 헬라스인들이 왜 그 직후 분열하였는가를 보게 되면, 결국 라케다이몬인들(스파르타)의 부상이 아테네인들을 위협했다는 데서 근원을 찾을 수 있으니, 헬라스인들의 동맹이 특정한 집단에게 더욱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 원인이었던 셈이오.”
“비록 저는 프라하 대학의 저명한 동료 교수들과 달리 로마법 전통에는 밝지 않지만, 적어도 초기 교부들이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인류 전체가 참여하는 신앙공동체를 꿈꾸셨다는 점은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역사와 철학이 한참 논의되고, 다른 대표들이 지금껏 한두 번 들어본 옛 현인들의 이름과 금시초문인 이름이 여기저기서 울뚝불뚝 튀어나오고, 왜 후스든 플레톤이든 그 사상만으로 박해받을 만큼 악명이 높았는지를 온몸으로 깨닫게 되는 사이.
마침내 스노리 노인이 카랑카랑 목소리를 높였다.
“본 회의는 우리 연합의 중대사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지, 학술토론을 위한 자리가 아니오. 토론은 나중에 사석에서 하시오들.”
민족을 초월한 격한 공감의 눈길이, 마치 그 옛날 아르키메데스가 태양광선을 오목거울로 모아 로마군 갤리선을 불태웠을 때마냥 스노리 노인 한 사람에게 쏠렸다.
“이 정도면 표결에 부쳐도 무방할 듯하오.”
“그리하시지요.”
“이 사람 또한 불만 없소.”
그리고 금일 참석한 오십일 명 대표들의 표결 결과는, 정확하게 증기기관 찬성 스물다섯과 남방 투자 찬성 스물다섯, 기권 하나로 동률.
“저런! 아직도 이성의 빛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 이리도 많다니!”
플레톤의 거짓 한탄에, 낙담하는 소리가 잇따랐다. 그것이 결과에 대한 실망인지, 아니면 지금껏 거친 과정이 반복되리라는 데 절망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원주민 부족들과의 가을철 정기회의는 심심하게 끝났다.
의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맨 처음 회의가 열린 이래로, 간만에 굵직한 의제들이 나온 회의였다.
와바나키 연맹이 처음으로 단합된 교섭단체로서 회의장에 나타났고, 이들은 할 말이 아주 많았다. ‘타는돌’, 즉 석탄 채굴부터 시작해 야네크네 철공소에서 벌어졌던 파업 사태의 사후처리, 끝을 모르고 밀려들어오는 이민자들의 개척촌 부지 선정 문제 등등 할 말이 아주 많았다.
그렇게 타는돌은 채굴하기로 하고, 파업을 하려면 꼭 미리 알려주고서 하고, 앞으로도 계속 밀려들 독일계 이민자들은 따뜻한환영 말고 옥수수 강 이남에 정착하게끔 만들기로 – 그쪽에 사는 레나피 부족 중에는 아직 와바나키에 참여치 않은 부족이 더 많았다 –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많은 사람들이 좋은희망에 남아 있었는데, 인근에서 가장 큰 마을인 좋은희망에 머무는 동안 머나먼 땅의 흥미로운 소문들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방인들이 긴집사람들과 협상해서 큰언덕 호수에서 대단한 강까지 가는 육로를 개척하려 한다더군.’
‘대단한 강? 그 끝없이 이어진다는 강 말인가³?’
‘그 강을 타고 저 아나왁인가, 남쪽 땅까지 가겠다더군,’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탐사인지 뭔질 한다고 서쪽으로 향했던 좀 더 이상한 이방인들이 눈 닿는 곳까지 펼쳐진 타는돌 들판을 보고 경악했다던데⁴.’
하지만 올 가을에 사람들이 남아있는 이유로는 또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세금을 내기 싫어한다는 것 이상으로 더 널리 통용되는, 인류 보편의 진리.
남들 싸움하는 것 구경만큼 재밌는 게 없다는 점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래서 누가 이길 것 같나?”
“엊그제도 또 숫자가 똑같아서 결론이 안 났다더군.”
“그 플레톤이라는 노인은 수다스러움의 정령과 친척뻘쯤 되는 것 같지 않나?.”
“에이, 그런 정령이 어디 있어.”
“원래 이방인들이 어려운 말 장황하게 하는 걸 좋아하지 않나. 바다 건너에는 있을지도 모르지.”
긴집사람들 토속음식인, ‘펑 터질 때까지 데운 옥수수’에 메이플 시럽 뿌려먹으며 원주민 구경꾼들은 떠들곤 했다⁵.
졸지에 구경꾼 대열에 합류하게 된 틀라카엘렐은, 고상한 음식 겸 장식품인 모모치틀리Momochitli를 모독하는 그 행태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물론 눈으로만 그렇게 한심하게 바라볼 뿐, 정직한 손과 혀는 그들 따라서 시럽을 바른 팝콘을 열심히 입에 집어넣었지만.
“팝콘이 맛있긴 하지요? 소금이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시그리드가 불쑥 나타난 바람에 깜짝 놀란 틀라카엘렐은, 황급히 팝콘 그릇을 숨기려다 금방 단념했다.
“재밌는 일을 벌이고 계시더군요.”
“그렇게 훤히 들여다보였나요?”
“테노치티틀란의 틀라토아니도 일단은 민의에 의해 뽑히는 자리입니다. 이토록 자그만 마을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이면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아스테카의 피필틴(귀족)을 자처해서도 안 될 터.”
그러나 그것은 아스테카 사람들 중에도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식견도 꽤 높던 틀라카엘렐의 이야기지, 잘 해봐야 마을 유지가 경력의 전부인 자가 대다수였던 임시의회 사람들은 사정이 달랐다.
“일부러 시일을 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각하께서 원하시지만, 차마 먼저 제의할 수는 없는 일을 저들이 스스로 발의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시그리드네 사람들’, 다른 표현으로는 헤니히 주점 오목 클럽 사람들 중에는 플레톤이나 후스, 그리고 멀리 동녘정착지의 파울처럼 자의로든 타의로든 각각 하나의 무리를 이끄는 입장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스베인이 비요른이 조금 자라면 다시 시그리드 곁에 합류할 생각으로 좋은거래 대표 자리를 고사하면서 그 대신 대표 자격으로 오게 된 브라타흘리드 사람 군나르라든가, 스노리 노인이라든가.
수로 따지면 대여섯에 불과했지만, 딱 지금 상황에서는 한둘이 이쪽, 두셋은 저쪽, 또 한둘은 기권하는 식으로 동률을 만들기에 족한 정도.
당연히 후스와 플레톤도 항의하는 시늉은 했지만, 시그리드의 답변은 뻔했다.
“아마 이랬겠지요? ‘제안을 한 당사자로서 한쪽 편을 들 수는 없다’, ‘하지만 자꾸 시비를 건다면 반대편에 몰표를 주겠다.’ 이런 식으로요.”
“그렇게 거칠게 답변하진 않았지만... 얼추 맞추셨어요.
그리고... 아마 지금쯤이면 그 다음 단계까지 진행되고 있을 테고요.”
표결로 승부를 보자니 번번이 무승부요, 임시의회가 모여 있을 때 논쟁으로 해결을 보자니 또 그놈의 장광설이 발목을 잡았다.
후스와 플레톤은 아예 이 기회에 진심으로 헌법에 관해 끝장을 볼 작정으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심지어 회의가 끝난 뒤에도 토론이 이어지곤 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두 사람의 진의를 의심하지 못했다.
허나 진의고 뭣이고, 귀가 아프고 몸이 지치는 것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보헤미아 사람과 반反 보헤미아 파벌 사람들이 각각 후스와 플레톤을 붙잡고 사정하기에 이르렀다.
허나 후스의 답변은 이러하였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우리가 이깁니다. 저들에게 우리가 굴복한 전례를 남기고 싶으신가요? 여기서 양보하게 되면 헌법을 정할 때도 우리가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제가 그토록 열심히 설명했건만, 아무래도 아직 부족했던 듯하군요.
자, 들어보십시오. 그러니까 자유의 원칙이란 기본적으로...”
또한 플레톤은 이렇게 역으로 몰아붙이곤 했다.
“잊지 마시오. 화해를 권하는 자가 배신자요.”
“하지만 어르신, 저는 화해가 아니라 그냥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이봐, 솔직히 말하게. 지슈카 그 애꾸가 왐품을 몇 다발이나 주던가?”
연합의 훗날을 좌우하는 선례가 될 지도 모르는 사안이자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비화된 논쟁. 그 논쟁에서 순순히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차, 슬슬 때가 무르익었다 판단한 임시의회의 사실상 의장 스노리 노인은 두 파벌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시그리드가 말한 계획의 후반부를 실행할 때였다.
“무승부로 하지 않겠소?”
“무승부라니, 터무니없는 말씀이시오!”
짐짓 놀란 체하는 플레톤이었다.
“두 안을 모두 따르기에는 재정이 부족하다는 것을 노인께서도 익히 알고 계실 텐데요.”
그린란드에 세금이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정확히는 국왕의 배가 북해 바다에 가라앉은 이래, 세금이든 연공이든 도저히 바칠 길이 없어진 것이었지만.
그 사실을 역으로 이용해, 스노리 노인은 짐짓 순진한 촌로 시늉을 하며 제안했다.
“그러니 세금을 걷는 것이오. 내 잘 모르지만, 원래 세금이라는 것이 스스로 하기엔 아깝고 남을 시키자니 미덥잖은 것을 나라더러 대신 해 달라며 모으는 것 아니겠소?”
맨바닥에서 꺼냈더라면 냉담한 반응 이상을 기대할 수 없었을 제안.
그러나 이미 지치고 지친 양쪽 사람들 귀에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하기야... 저 독일 놈들에게 굽히고 들어가느니 저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보헤미아 놈들에게 굴복하는 것보다야, 세금 걷는 데 동의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세금은 싫었지만 자존심을 버리는 것보다는 – 그리고 더 나쁜 경우의 수로, 지옥의 장광설을 계속 듣는 것보다 - 나았다.
더구나 이번에만 동의하고 다음에는 일치단결하여 감세를 외치는 방법도 있지 않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는 옳지 않은 일...”
플레톤이 목청을 높이려 하자마자, 주변에서 아우성이 몰아쳤다.
“... 이기는 하지만 사세를 감안하여 이번에는 현실과 타협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플레톤 선생님?”
“제발 그렇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 헌법 초안에도 세금을 걷어야 한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사정을 얼추 전해들은 틀라카엘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술책입니다. 정정당당한 수법을 쓰는 대신 그렇게 사람들을 농락하다니.”
이 무렵의 공화정이라는 것은, 대개 정쟁이 일어나면 정직하게 선동과 날조, 매수로 승부를 보기 마련이었다.
그런 길이 모두 막혀버리자 어떻게든 저들 뜻을 관철시키고자 정치인들끼리 머리를 굴려 만들어낸 것이 보다 현대적인 민주주의였다.
“악랄한 게 아니라 교묘한 거지요.”
그러니 시그리드의 계책이란 것은 남들 보기엔 굉장히 얄미우면서도 딱히 욕할 수가 없는 협잡질이었다.
“아무튼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 아니겠어요?”
물론 ‘현대적’ 관점에서도, 의정 역사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필리버스터, 그것도 쌍방 필리버스터라는 괴상한 짓을 벌이는 임시의회는 영 이상한 게 맞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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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플레톤의 저작은 당대의 탄압과 그 후의 시대적 혼란 탓에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남아있는 몇몇 단편만으로도 그가 플라톤의 국가관을 현실에 적용할 방안을 모색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토지공개념과 경자유전 원칙, 그리고 3분의 1 세율은 모두 플레톤이 실제로 1418년 마누일 2세와 그 아들 테오도로스 앞으로 올린 시무책에 언급되는 내용입니다. 플레톤의 개혁안은 본디 토지공개념에 입각해 일체의 지주제를 폐지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었지만, 지주-소작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신대륙 실정에서는 그냥 세금 많이 걷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겠지요.
2. 농사에 주로 소를 동원한 동아시아~동남아시아와 달리, 유럽에서 농경은 주로 말의 몫이었습니다. 대충 제주도 조랑말의 크기와 어깨 너비를 두 배로 늘리고, 거기에 근육이 덕지덕지 붙었다고 상상하면 얼추 유럽의 농마 모습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는 곡식 생산량에 한계가 있어 목축을 병행할 수밖에 없던 유럽의 기후 특성상, 소는 농사보다는 고기와 우유 생산 쪽에 더 유용한 가축이었고, 품종개량 역시 그런 쪽으로 이루어졌습니다.
3. 작중에서 ‘대단한 강’으로 지칭되고 있는 강은 사실 미시시피 강 본류가 아니라, 펜실베이니아 동부에서 발원해 남동쪽으로 흘러가 세인트루이스(카호키아) 남쪽에서 본류에 합류하는 오하이오 강입니다. 하지만 오지브웨어 ‘거대한 강Misi ziibi’에서 기원한 ‘미시시피’나, 이로쿼이계 언어인 세네카어 ‘위대한 강Ohiyoh’에서 기원한 ‘오하이오’나 뜻은 매한가지지요.
4. 피츠버그 탄전Pittsburgh Coal Seam은 미 동부 최대의 역청탄 탄전 지대로, 조산작용과 침식의 영향으로 지면에 노출되었거나 지면 가까이 위치하게 된 석탄층이 드넓게 분포하고 있습니다. 그 면적은 대략 경상남북도를 합한 정도(약 28,500km²)에 달하지요. (참고로, 정선~삼척 사이에 위치한 한반도의 삼척탄전 면적이 대략 310km²쯤 됩니다.)
이처럼 석탄이 터무니없이 흔했기에 18세기 말 이 지역에 도달한 개척자들은 거의 즉시 석탄을 채굴하여 난방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1809년 피츠버그 물가 기준으로, 장작 1달러어치 땔감에 해당하는 양의 석탄 가격은 3센트에 불과했습니다.
5. 17세기 뉴잉글랜드 개척자들에게 원주민들이 옥수수를 소개해주면서 팝콘도 함께 전해졌다는 통설은 20세기의 창작입니다. 당시 개척자들이 원주민들에게 전수받은 옥수수 품종으로는 팝콘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조금 더 삶에 여유가 있던 내륙의 이로쿼이 연맹에서는 옥수수 낱알 위에 뜨겁게 달군 모래를 부어 팝콘을 만드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미 한참 전부터 모모치틀리라는 이름으로 팝콘을 만들어 간식부터 장식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하던 메소아메리카야말로 팝콘의 원조라 할 수 있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