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멈출 수는 없다네 (3)
18. 음악을 멈출 수는 없다네 Can’t Stop the Music (3)
사람이 있는 이상 갈등은 있을 수밖에 없고, 특히나 그 사람들 사이에 말과 풍습, 종교의 차이가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처럼 갈등 자체는 막을 수 없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싸우느냐는 사람의 노력으로 한정할 수 있는 법.
“하지만 고작 이런 전례로 보헤미아인들과 독일인들 사이 다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애초에 동쪽 땅에서도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이 나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한창 시그리드의 ‘음험한 계책’ 설명을 듣던 틀라카엘렐이 팝콘 하나를 입에 집어넣으며 – 품위 있는 아스테카 사람으로서 다른 야만인들처럼 휙휙 입안에 던져넣을 수는 없었다 – 물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민족을 내세울 때만 해당하는 얘기지요. 이제부터는 민족들간의 질투나 불신을 부추길 것 없이, 정정당당하게 너희들 세금을 우리 맘대로 쓰겠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렇게 설득하게 될 테고요.”
모두가 걷은 세금이 보헤미아인이든 독일인이든 어느 한 이민자 집단만의 이익을 위해 쓰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테다. 하지만 공공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세금을 거두게 된 이상, 그런 전용轉用 시도에는 마땅한 정치적 명분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명분이란 암중모략이나 저열한 음모로는 얻을 수 없는 것. 결국 무엇이 더 옳은지에 관한 논의와 토론으로써, 그저 나와 같은 족속들의 이익을 위한다는 날것 그대로의 욕망 위에 허울 좋은 위선을 덧씌워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 허울 씌워진 욕심을 내세우며 다투다 보면, 언제부턴가 어디부터가 원래 욕심이었고 어디서부터가 나중에 씌운 겉치레였는지 분간할 수 없게 되리라.
“정말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실로 무시무시한 계책입니다.”
고귀하게 태어나 평생 평민들 위에서 살아온 틀라카엘렐은, 정치적 사유가 귀족과 사제들만의 전유물을 넘어 모든 평민들 사이에 스며들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본능적으로 깨달으며 오싹함을 느꼈다.
반전시위대를 진압하려 달려들던 군대 앞에 뭉게뭉게 피어나던 최루가스 연기, 자랑스럽게 대열 선두에 나섰다가 평민들 앞에서 볼썽사납게 땅바닥을 뒹굴던 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틀라카엘렐은 몸서리를 쳤다.
“제가 한 일이라곤 그냥 아는 것을 응용한 것뿐이랍니다.”
정말로 자신이 뭔가 대단한 일을 했다 여기지는 않는 시그리드는 그저 어깨 으쓱하며 겸양할 뿐이었지만.
메이플 시럽 바른 팝콘이 왠지 씁쓸하게 느껴진 틀라카엘렐이 그릇에서 손을 거두자, 시그리드는 눈치 없이 손 뻗어 팝콘을 한움큼 제 입에 던져넣었다.
그 무렵 스노리 노인 주재 하에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던 임시의회가, 점차 시그리드의 예상을 넘어 엄청난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미처 몰랐기에, 아직까지는 그 팝콘이 제법 달콤하게 느껴졌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어째 실컷 이용당한 것 같다고 느끼는 임시의회 대표는 한둘이 아니었다. 대체 누가, 무슨 의도로 저들을 이용했는지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지만.
물론 거기서 조금 더 깊게 파고들어봤자, 원흉(?) 시그리드가 딱히 엄청난 악의를 품었다기보다는, 평소처럼 엉뚱한 생각을 실현코자 술수를 부렸다는 것만 깨닫게 될 터였다.
허나 대표들은 당장 그렇게 깊게 파고들 겨를이 없었으니, 한 박자 쉬고 생각해본즉 당장의 급선무는 다른 데 있던 것이다.
“세금을 걷어야만 저 재수없는 독일 놈들에게 굴복하는 전례를 남기지 않을 수 있다... 이게 지금은 먹히지만 당장 내년부턴 바로 우리에게 원망이 돌아올 겁니다.”
“그래서 어쩔 텐가? 스노리 노인에게 돌아가서 방금 우리가 한 합의를 번복하겠다고 선언할 텐가?”
“그건 아니지만...”
돌아가서 몰매 맞기는 싫었던 대표들은, 뭔가 그럴듯한 떡밥을 들고 돌아가야만 불만 토로하려는 이들의 입을 봉합할 수 있을 것임을 깨달았다.
결국 궁색하게 쥐어짜낸 생각 한두 방울이 모이고 모여 제법 그럴듯한 생각의 흐름을 이루고, 마침내 얀 후스가 그런 흐름을 종합하여 플레톤 앞에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선거에 참여할 권한을 납세자들에게만 주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여, 우리 보헤미아 사람들끼리 중지를 모으게 되었지요.
내일 모임에서 이 안건을 발의코자 하니, 플레톤 선생께서는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시그리드에게도 얼른 얘기해주러 가야겠군요.”
증기기관 대 아나왁 투자라는 뜻밖의 의제에 보헤미아인 대 독일인이라는 자존심 싸움이 겹치는 바람에 다들 잠시 잊었지만, 본디 이번 회기에 논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안건은 따로 있었다.
바로 내후년 선거를 어떻게 할지. 아직 그 선거를 어떻게 진행할지는커녕, 그 선거로 뽑힐 – 아마도 시그리드가 되겠지만 – 사람의 공식 직함을 무어라 정할지도 정해지지 않은 판이었다.
“그게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후스의 일방적인 통보에 놀란 플레톤이 되물었다.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다한 자라면 그 공동체에 대한 권리도 행사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은총을 받아 소득을 거둔 자라면 그 소득이 올바르게 쓰일 수 있도록 감독하고 관리할 권리도 있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¹.”
“아니, 그러면 세운 공이라곤 밭에서 옥수수 좀 많이 거둔 게 전부인 일자무식 농민에게도 우리 연합의 대소사를 좌지우지할 권한을 주잔 말이오?”
신대륙 연합에 어쩔 수 없이 민주적 요소를 도입해야 하는 상황에 개탄하며, 가급적 그런 요소를 줄이기를 바랐던 플레톤은 질색하였다. 그에게 민주정이란 연합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잠시 따라야 할 무언가였지, 그 이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일자무식 농민이 없어지도록 학교를 세우겠다는 것 아닙니까. 적어도 기초적인 논리학과 수사학, 그리고 철학의 기본 요소 정도는 익힐 수 있게끔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왕 세금 걷는 길에 학교 예산도 그것으로 충당하면 되겠군요.”
아직 교과과정을 마련하고 교사 노릇 할 만한 이들을 모으는 데만 주력하고 있던 후스가 거론된 지 고작 하루 된 예산안에 슬쩍 손을 대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플레톤도,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후스의 손을 잡았다.
“좋소! 좋아. 그렇게 하십시다.”
세금 내기 싫다는 것이 만국 공통이라면, 그 세금 낸 만큼 뭔가 권리를 누리고 싶다는 것도 공통의 욕구일 터. 따라서 언제부턴가 신대륙 연합의 거의 모두를 공평하게 야만인으로 취급하는 플레톤을 저들 영수격으로 떠받들게 된 독일인들 또한 이 제안을 달갑게 여길 것이다.
“이왕 하는 것, 아예 선거를 여럿으로 가르고, 각각의 선출직에도 임기 제한을 확실하게 걸어둡시다. 선거를 많이 할수록 세금 내는 사람들도 더욱 기꺼이 저들의 세금을 내지 않겠소이까.”
세금을 걷기 위해 선거를 치른다는, 석탄을 때기 위해 증기기관 만드는 소리를 태연하게 내놓는 플레톤이었다.
나이 먹을수록 도리어 명민해지는 저의 머리로 생각컨대, 이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민주정이라는 필요악을 빠르게 극복하고 철인통치 하의 이상국가를 설립하는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결국 어떤 시점부터는 차라리 세금을 덜 걷고 선거를 줄이자는 주장이 나올 것이다. 굳이 선거 같은 것을 할 필요 없이, 현명한 통치자 하나가 적당히 민의에 따른 자문을 받아가며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임을 다들 깨닫게 될 테니.
“그들이 눈치챌 리 없지. 납세자들에게만 선거권을 주자는 것이 결국 이 플레톤의 웅장한 대계를 실현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기, 플레톤 선생. 방금 그 말씀은 머릿속으로만 하셨어야 했을 것 같습니다.”
“뭐, 별 상관이야 없지 않겠소. 이제 와서 저들 입으로 낸 말을 도로 물릴 것도 아니고. 흠흠.”
플레톤을 따르던 독일계 주민 대표들, 특히 지난 한 해 사이에 새로 유입된 독일 이민자들의 ‘대표’들은 금방 이 제안에 호응하였다.
애초에 납세자에게 선거권을 준다는 말을, 그저 저들 마을에서 세금을 모으는 만큼 저들을 이곳에 보낸 영주의 발언권이 세진다는 정도로만 해석하였던 것이다.
몇몇은 벌써부터, 어찌하면 등 뒤에 쇠스랑 박히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세금을 뜯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여자들까지 제 이름으로 세금을 내게끔 한다면, 선거권이 두 배가 되는 것 아닌가?’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으니, 플레톤의 말실수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세금 얘기가 선거 얘기까지 뻗어나가던 차, 플레톤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물음이 있었다.
“그나저나, 그 세금은 어떻게 걷어야 하겠소? 과세 기준을 정하는 것은 고사하고, 당장 누가 세금을 걷어서 어떻게 관리할지도 죄다 새로 정해야 할 판인데.”
“그야... 시그리드가 알아서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선생께서는 헌법 일로 바쁘시고, 소생은 학교 세우는 일로 바쁜데, 우리들의 선량한 수장께서 설마 두 늙은이에게 지금보다 막중한 책무를 던지시진 않겠지요.”
후스와 플레톤의 예상과 달리, 시그리드는 세금 제도를 마련하는 일을 두 사람에게 맡기려 하고 있었다.
‘고작 세금 걷는 일이 뭐 그렇게 어렵겠어요?’
그러나 후스가 담담하게 저의 바쁜 사정을 설명하고, 플레톤이 대놓고 집 나간 시그리드의 양심을 찾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겠노라 협박하자, 시그리드도 사태의 엄중함을 깨닫고 제 몫의 일을 맡기로 하였다.
몇 주 뒤, 따뜻한환영의 여관 객실에서 시그리드 골머리 앓는 소리가 스며나온 것은 그 결과였다.
“에고야...”
시그리드는 책상에 가득 쌓인 장부에 이마를 푹 박았다.
활짝 열린 창문을 드나드는 리프가 부러워지긴 참 오랜만이었다.
“누가 한겨울에 이리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나 싶어 들어와 봤는데, 시그리드 너였구나.”
딱히 선거는 거치지 않았으나 누구도 그 자격을 의심치 않는 환영의 시장 얀 지슈카가 객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문은 들었다. 뭐가 잘 안 맞아떨어져서 그리 고생이 심하다면서.”
지슈카가 방 구석에서 의자 하나를 가져와 걸터앉았다. 목공들이 공방을 차리고, 철공소에서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 못으로 가구를 만들고 있었기에, 환영 어디를 가든 새로 만들어진 가구들과 그 전에 쓰던 엉성한 가구들이 넘쳐났다.
“아, 네... 생각보다 이 세금이라는 게, 정립하기 어려운 제도더라고요.”
이미 어지간한 마을마다 공동의 재정을 마련하는 관행이 있었으니, 딱 거기에 약간만 보태어 일정 부분만큼 연합 전체 차원에서 쓸 수 있도록 관리하면 그만이지 않을까. 그것이 시그리드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관리하는 것부터가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당장 어떤 마을은 옥수수로, 어떤 마을은 유제품으로, 어떤 마을은 왐품으로 재정을 마련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 그 어떤 것도 바다 건너편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기껏 세금을 수취해봤자 그 자체로는 도저히 쓸 수가 없는 판이었으니, 어떻게든 세금을 모피나 담배, 황금 등으로 바꿀 방도를 강구해야 했다.
그런 방도를 마련한다고 스스로 이루어질 리는 없으니 결국 사람을 뽑아 맡겨야 하고, 아무 사람이나 쓸 수는 없으니 재주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세금 관리를 전담케 해야 하고, 그들에게 전업으로 세무를 맡는 대가로 당연히 봉급을 주어야 하고...
“결국 그것도 다 돈이지요. 세금을 걷기 위해 따로 세금을 걷어야 할 판이랍니다.”
괜히 오지 않을 미래에 세금을 걷다가 절로 근대국가가 탄생해버린 게 아니었다. 전쟁을 하려면 상비군이 필요하고, 상비군을 유지하려면 세금이 필요하고, 세금을 걷으려면 관료제가 필요하고. 관료제와 상비군이 완비되면 더 많은 세금을 걷기 위해 다시 전쟁을 치르게 되고.
(물론 이런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세금을 걷음으로써 미국이라는 국가 하나를 만들어버린 영국의 사례도 있기는 했다. 과연 산업혁명의 나라가 아닐 수 없었다.)
“얘기는 들었다. 내년 선거에 참여할 사람을 그 세금을 기준으로 나눌 것이라면서?”
“네, 맞아요.”
1417년 가을이 겨울로 접어들 무렵, 1419년 선거의 대강이 얼추 완성되었다.
모든 것을 밑바탕부터 구상해야 했다면 모르겠으되, 참고할 만한 미래의 지식이 있는 상황에서는 무엇이 지금의 실정에 맞고 그들의 이상에 더 부합하는지만 따지면 되었던 것이다.
연임 가능한 4년 임기 – 플레톤은 아예 옛 로마 전통대로 임기를 1년으로 정하자고 주장했으나, 결국 후스의 초안이었던 5년 임기에서 1년을 깎는 데 그쳤다 – 의 국가원수 선출을 위한 선거가 하나.
국가원수의 명칭은 온갖 논의 끝에 호국경Lord Protector으로 정해지고, 시그리드의 데스포이나 작위는 콘스탄티노스 황자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작위로 남겨놓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임시대표들을 연임케 하든, 아예 새로 뽑든 할 의원 선거가 또 하나.
다들 호국경은 시그리드가 맡게 되리라 예상했으므로,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의원 선거였다.
그사이 해가 바뀌어 이제는 1418년.
“모든 게 빠르게 변하고 있구나. 언제 이 늪과 숲만 가득한 땅을 보금자리로 삼을 수 있을까 살짝 회의 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정착 육 년 차에 접어들어, 번화한 마을의 중심가만 보면 보헤미아 한복판의 소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게 발전한 환영 시의 모습이, 온갖 고생을 하였건만 동년배 여인들과 달리 여전히 소녀 시절 앳된 모습을 간직한 시그리드의 얼굴과 대비를 이루었다.
활짝 열린 창밖으로 펼쳐진 마을 풍경을 보며 지슈카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사람들의 생각도 빠르게 변하고 있고.”
한창 전장을 누빌 때에 비해 흰머리가 조금 늘어나고 주름도 역시 더 졌지만, 여전히 강철 같이 번뜩이며 시그리드를 응시하는 외눈은 지슈카가 비록 우직할지언정 단순무식한 사내는 결코 아님을 입증하고 있었다.
“우애 쪽에서 벌어지는 소동 말씀이신가요?”
우애의 도시 남쪽에 정착한 독일인들의 마을, 대개는 신대륙에 날로 지분을 차지할 심산으로 군소 영주들이 모아서 보낸 농민들의 정착촌에서 벌어진 소요 소식은 시그리드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세금을 걷는 문제 때문에 그런 마을들도 직접 방문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그리드가 찾아가는 마을마다, 세금 대신 엉뚱한 것을 묻는 농민들의 질문 공세가 환영사를 대신하곤 했다.
‘정말로 우리 마음대로 영주님을 뽑을 수 있는 겁니까요?’
‘어허, 영주님은 바다 건너편에 계신다니까. 귀하신 분 앞에서 경거망동하지 마라.’
아마 고향 땅에서 영주가 미리 정해 보내주었을 법한 현지 대표는 이렇게 가로막고,
‘그러면 우리가 뽑는 건 누굽니까?’
‘영주님은 없고 대신 의회인지 민회인지를 꾸린다는 것 아니었던가? 거기에 우리 마을 촌장을 뽑아서 보낸다는 거였고.’
‘하하, 죄송합니다, 각하. 이 사람들이 좀 모자라서요... 이봐, 너희들은 누구를 뽑는 게 아니다. 너희 몫의 판단까지 우리 대표들이 대신 해주는 것이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세금 덕에 이곳 연합의 운영에 영주님 지분도 생기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영주님도 우리에게 당연히 뭔가를 줘야 하겠지요. 그게 우리의 ‘궐리’입니다.’
‘뭐라고?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나?’
‘저 학교 세운다고 ‘살사’하러 찾아온 보헤미아 사람이 그럽디다.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우리 모두는 다 같은 ‘궐리’를 누려야 마땅하다고.’
권리라는 말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였다고 해서 그 개념마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시그리드 앞에서 이런 논쟁이 벌어지는 것조차 다반사였으니, 시그리드 등 뒤에서 벌어지는 다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대표가 눈치가 있어서, 적당히 농민들 의견도 받아들여주고, 자신이 연합과 영주, 그리고 개척자 농민 사이에서 중재자가 되어주겠노라 자처하는 등 민심을 신경쓴 쪽은 조용히 넘어가곤 했다.
그러나 그런 눈치도 없는 이들이 대표랍시고 있는 곳에서는, 은근한 알력이나 당당한 폭력이 벌어지곤 했다.
농민들이 재빠르게 선거에 반응하여 뭔가를 요구하리라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 없던 대표들은, 생각보다 농민들의 의지가 굳다는 것을 깨닫고서 뒤늦게 당황하였다.
‘저기... 솔직히 말해서... 그래도 아직 댁들에게 자치는 무리라고 생각하오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대표님.’
‘헛소리하실 거면 그냥 돌아가십시오. 영주님 위하는 일이든 우리 자신 위하는 일이든, 우리끼리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농민들의 어리석으면서도 우직한 세계관은, 오직 전통과 관습이라는 두 축 위에 서 있기 마련.
세금은 그저 세금이기 때문에 내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와 귀족들이 한입으로 세금을 내는 것이 올바르다 말했고, 그 세금을 내지 않는 자들을 벌주고 죽이는 것이 올바르다 말했으며, 교회와 귀족이 실제로 그리할 수 있는 힘과 의지를 지닌 채 수백 년을 내리 지배해왔기에 관습으로 굳어진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신대륙에 발을 디딘 지금, 그 전통과 관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장 완고하고 어리석은 농민들조차 뭔가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틈을 머릿속 한 구석에 허락하고 있었다.
당연히 교회에는 십일조를 바쳐야 하고, 영주에게는 토지세든 인두세든 바쳐야 한다 여겼건만, 이곳 땅에는 정해진 주인이 없었고, 영주는 바다 건너에 있었으며, 교회는 세워지지도 않아 성직자 하나가 마을을 순회하며 겨우 성사를 치르는 마당이었던 것이다.
“개중 아예 정착촌에서 쫓겨난 몇몇이 여기서 새 일자리를 찾고 있지 뭐냐. 작센이나 바이에른 사람들 중에는 보헤미아 하급귀족들과 종종 연이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
“어째 요새 디폴트 경 앞으로 관료 자리 청탁하는 편지가 온다더니, 그 때문이었군요.”
“그래,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정말로 연합 정부의 관료로 취직하게 되겠지. 저들 영주들이 뽑아서 보낼 만큼 일머리는 있는 자들일 테니까.”
“그건 그렇지요.”
지금 신대륙 연합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고, 사칙연산이라도 할 줄 아는 인재들은 적지 않았으나 수요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들이 자리를 잡게 되면, 우리 연합은 점점 하나의 국가로서 틀을 갖춰나가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냐? 네 그 원대한 계획. 유럽부터 저 남쪽 아나왁까지 이어지는 교역으로 번영하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지슈카의 요약에 틀린 말은 없었으므로, 시그리드는 조금씩 심각해지는 그 어조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대륙의 황금을 이용해, 유럽의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고 이 땅에 건너온 모두가 그들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든다는 것이 시그리드의 이상이었으니까.
“허나 시그리드야, 부디 들어다오. 나는 네게 반대한다.”
“네?”
“네가 말한 목표. 이 땅에 관용과 자유의 질서를 새로 세우겠다는 그 이야기에는 지금도 깊게 공감하고 있다. 당장 이곳 환영만 하더라도, 보헤미아인과 잉글랜드인들이 어울리며 보다 올바른 신앙을 함께 찾아가고 있지 않더냐.
저 북쪽이든, 저 남쪽이든, 전혀 어울릴 일 없던 사람들이 이리저리 부딪히면서도 어쨌든 그럭저럭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고.
그러나 나는, 시그리드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도리어 이 대의를 무너뜨리지 않을까 두렵다.”
시그리드는 말했다. 지금껏 지슈카가 자신과 주변 세상이 불행한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한 유대인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그렇다면 대체 그 많은 고리대금업자들은, 그리고 그들의 피해자들은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왜 지슈카 그가 만난 유대인들은 하나같이 죽어 마땅한 것처럼 보였는가?
황금 때문이리라. 그것이 지슈카가 홀로 찾아낸 답이었다.
황금은 교회를 부패시키고, 가장 고결한 귀족들을 타락시켰으며, 자의든 타의든 그것과 가장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던 유대인들을 그토록 추하고 죄악스럽게 만들었다.
“시그리드야, 나는 그간 저 좋은희망에서 벌어지는 다툼에 대해 계속 듣고 있었다. 그리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결국 황금으로 돌아가는 질서가 이름만 바꾼 채, 새 단장을 하고 이 땅에 나타나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두렵다.
더 많은 세금을 위해 더 많은 상인들을 만들고, 고리대금업을 도입하고, 세금을 더 많이 내는 상인들에게 더 많은 특혜를 주고, 작위를 내리고, 귀족을 만들어내지는 않을까, 그것이 두렵다.”
물론 시그리드의 계획에 나름의 근거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뒤에 있는 미래 지식. 후스도, 플레톤도 부정하지 않는 그 지식의 힘이라면, 이 땅에 강력한 나라, 유럽의 그 어떤 나라보다 더 먼저, 더 멀리 나아가는 나라를 만들어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굳이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 더 많은 황금, 더 많은 부를 모아야만 할까?
“두서없는 이야기로 괜히 네 마음만 어지럽게 하진 않았나 두렵구나.”
한참을 고민한 뒤에 마침내 나오는 이야기. 그러나 지슈카는 낯선 생각을 입 밖에 내느라, 시그리드의 반응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잘 되었네요.”
“그러니 부디... 뭐라고?”
“선거가 자리를 잡으려면 원래 후보가 많아야 하는 법 아니겠어요? 이왕 이렇게 된 것, 한 번 선생님께서도 선거에 나가보시는 건 어떨까요?”
1419년 신대륙 최초의 호국경 선거에 얀 지슈카가 출마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