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79화 (79/116)

음악을 멈출 수는 없다네 (4)

18. 음악을 멈출 수는 없다네 Can’t Stop the Music (4)

신대륙으로 넘어온 그린란드인들과 아이슬란드인들 모두가 푸른들판과 좋은희망 근처에 정착한 것은 아니었다. 몇몇은 좋은희망보다 더 북쪽으로 올라가 ‘남녘정착지’를 세웠는데, 신대륙 연합 최북단 개척지 – 동녘정착지는 엄밀히 따지면 아직 연합 소속은 아니었다 – 로는 매우 역설적인 이름이었다.

위도로 따지면 잉글랜드의 리버풀에서 이탈리아의 로마에 해당하는 넓은 구간에 걸쳐 남북으로 흩어진 정착촌. 그 덕에 한 가지 소소한 장점이 생겼으니, 연락선과 소매상을 겸하며 곳곳의 정착촌과 원주민 마을을 오가는 어선들을 통해 각지의 특색 있는 음식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따뜻한환영 남쪽 여름항구의 터줏대감(3년차) 이갈리코가, 환영 읍내의 한 주점에서 시원하게 벌꿀술 들이킬 수 있는 것도 그 덕이었다.

“어, 시원타.”

“댁도 종종 좋은희망 오간다고 들었는데, 갈 때마다 벌꿀술 구할 수 있으면 구해 주시오. 값은 후하게, 곡식 따위 말고 왐품으로 제대로 드리리다.”

술집 겸 여관 주인이 이갈리코에게 솔깃한 제안을 건넸다.

“아니면 꼭 벌꿀술 아니라도 상관은 없소. 요새는 술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니까.”

“어째 그렇소?”

“무엇 때문이겠소? 당연히 얀 지슈카 그분 덕이지.”

과연 주변을 둘러보니, 암만 농번기 직전 마지막 한가할 때라지만 지나치게 사람이 왁자한 듯하기도 했다.

“... 아니,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고. 보헤미아 사람 태반이 장인 노릇으로 먹고사는데.”

“자네, 산수부터 다시 배우고 오게. 한 열에 한둘이나 될까, 무슨 태반이야, 태반은. 보헤미아 사람 절다 대수는 땅 파먹고 사는데.”

“‘절다 대수’가 아니라 ‘절대 다수’일세. 무식한 사람 같으니.”

“뭐, 뜻만 통하면 되었지.”

플레톤이 헌법 초안을 들고서 신대륙 정착지 곳곳을 돌아다닌 이래로, 꼭 학식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주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얼추 1419년 선거의 구도를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선거가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지는 몰라도, 누가 무엇을 두고 대립할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슈카가 출마를 선언하면서 갑자기 모든 것이 복잡해졌다.

“아, 선거 말씀이시로군요. 그쪽 일이라면 저도 좀 견문이 있지요.”

결국 입이 근질근질해진 이갈리코도 주인장 대신 취객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여름항구 촌장 이갈리코가 뱃사람이라는 점 – 그리고 그 직업 특성상 마당발일 수밖에 없다는 점 – 을 잘 아는 취객들도 금방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씨족들끼리 모여 사냥한 고래를 분배하는 것이 정치적 경험의 전부였던 이갈리코였기에, 도리어 귀를 활짝 열고 모든 소문을 머릿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유식한 사람이 듣는다면 아마 빈 석판Tabula rasa의 비유를 떠올릴 것이었다.

물론 중앙집권이니, 지방분권이니 하는 생소한 단어들은 해설 없이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 우애든 환영이든, 그런 것 해설해주려고 입이 근질근질한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보헤미아인들도 프라하에서의 경험으로 정치 하면 다들 한두 마디씩은 하곤 했으니까. (당장 이 술집에 모여든, 딱히 배움과 연 없는 사람들도 그러하고 있지 않던가.)

“비단 이곳 환영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신생 연합 전체에 크나큰 변화가 찾아오게 되었지요. 후스 대 플레톤, 보헤미아 대 독일, 자치 대 연합. 이러한 구도가 크게 뒤흔들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 옛날 공용어를 정하자고 했을 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대립 구도였다.

유럽 종교개혁을 위한 전초기지로서 신대륙을 바라보던 후스에게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끼리 뭉칠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하는 법제가 더 입맛에 맞았고, 반면 이상국가 건설을 원하였던 플레톤에게는 하나의 강력한 정부 아래 다양한 민족들이 통일된 법도를 따르는 것이 지향점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민족감정이 끼어들면서 대립구도는 더욱 굳어졌다. 수적으로 우세한 보헤미아인들은 다른 개척지 사람들이 저들 일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반대로 그 머릿수를 경계한 다른 민족들은 보헤미아인들과 자신들이 동일한 원칙을 따르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제 지슈카 대장이 출마를 선언했지요. 굳이 남쪽이니 유럽이니 교역한다고 세금 걷어 밑천 마련하느니 차라리 조금 걷어 조금 쓰고, 각 정착지끼리 알아서 잘 살다가 정말 큰일 날 때만 힘을 합하고, 그런 방식으로 이 땅을 이끌어가길 바란다면서 말입니다.”

“그게 어째서 구도를 뒤바꿀 만한 일이오? 우리 보헤미아 사람들 사이에서 편이 갈리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야, 이제 보헤미아인이냐 독일인이냐가 아니라, 정말로 무엇이 제게 더 유리하거나 마음에 드는지를 일일이 따져야 하게 되었으니 그렇지요.”

지슈카는 그저 보헤미아인에게만 유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 몫의 농지와 목초지에서 정직한 노동으로 먹고살기만을 바라는 이들이 그리는 소박한 이상. 그 이상은 보헤미아인들뿐 아니라 유럽의 모든 농민들이 바라마지않는 것이었다.

반면 상공업을 천직으로 삼는 보헤미아인들에게는, 지슈카의 주장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간 같은 보헤미아인이라는 이유로 후스를 지지할 때는 미처 놓쳤던 사실. 그들의 사업이 번창하기 위해서는 함부르크부터 테노치티틀란까지 이어지는 교역로가 강력한 중앙정부의 개입 하에 꾸준히 유지되고 확장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명백해졌다.

민족이라는 애매한 피아식별 하에서는 묻혔을 모순과 논쟁들이 밖으로 드러났고, 계층과 출신, 직업과 성향에 따라 뜻이 갈리기에 이르렀다.

“지슈카 대장이 꾸리는 파벌은, 비단 이곳 환영뿐 아니라 저기 우애, 어쩌면 북쪽의 ‘희망’ 일대까지 세력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이곳 환영 사람들 중에 지슈카 대장에게 실망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요.

마찬가지로 시그리드 각하와 플레톤 선생을 따르던 파벌도, 그저 이곳 보헤미아 사람들을 경계해서 뭉치는 것을 넘어서 저들 나름의 욕심과 뜻에 따라 모여들게 될 겁니다.”

광대한 무역로를 개척하고, 그 무역로에서 교역할 상품들을 신대륙 연합에서 생산하여 유럽과 신대륙 양쪽에 수출함으로써 온 연합이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한다는 시그리드의 구상은 이미 좋은희망에서의 의견충돌을 통해 잘 알려진 바 있었다.

지금껏 보헤미아 사람들이 시그리드의 증기기관 제안에 찬동하고 나섰던 것도, 남쪽 금광에 투자한다면 꼴보기 싫은 티롤과 오스트리아의 독일계 광부들이 발을 붙일 것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했지만, 증기기관으로 이익을 보게 될 장인들 대부분이 보헤미아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면 어느 쪽 머릿수가 더 우세한 게요?”

자신이 시그리드 쪽이든, 지슈카 쪽이든, 공통적으로 품을 수밖에 없는 의문을 누군가 던지자, 이갈리코는 또 신나게 저의 아는 바에 아는 체 그럴듯하게 붙여가며 떠들었다.

제멋에 겨워, 또 벌꿀술 다 떨어진 다음부터 들이킨 맥주에 취해 떠드느라, 미처 떠올리지 못한 사실도 여럿 있었다.

예컨대, 민족이라는 확 드러나는 구분 대신 훨씬 복잡한 정치적 이상을 두고 대립하게 된다면, 결국 모든 사람이 이렇게 자문하게 되리라는 사실.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나는 무엇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가?’

그 전에 누군가 물었다면, 깊게 생각하기는커녕 두려워하며 ‘쇤네가 어찌 감히...’ 정도로 말꼬리 흐렸을 질문.

또한, 몇몇 사람들의 선창에 이끌려, ‘우리’라는 애매한 단어에 함몰된 채로 군중의 일부로서 아우성칠 적에는 도저히 떠올리지 못했을 질문.

그 답이 얼마나 어설프든, 논리적 비약과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든, 그 답을 찾은 뒤의 자신은 질문조차 스스로 던지지 못할 적의 자신과는 많은 면에서 달라져 있으리라.

또한 이갈리코가 알아채지 못한 사실 중 하나는, 그가 이렇게 신나게 정치 얘기를 떠들던 술집 겸 여관 2층에는 시그리드가 묵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온지라 슬쩍 흰머리 두건으로 감추고 내려와 훔쳐듣던 시그리드가 미소지으며 조용히 윗층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갈리코뿐 아니라 그 누구도 – 오늘의 소득에 기뻐하는 술집 주인조차 – 알아보지 못하였다.

작년, ‘백송고리 기사단’을 자처했다가 그린란드 사람들과 전직 백송고리 용병단원들에게 표절의 부도덕성에 대해 협박성 설교를 듣고 감화된 뜨내기 귀족들은 훨씬 심심한 ‘탐험기사단’을 자처하게 되었다.

여하튼 이 탐험기사단은 고작 활동 한 해만에 꽤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환영과 우애 사이 육로를 탐험한 끝에, 강과 호수를 피해 내륙으로 빙 우회하느니 그냥 해안 따라 오가는 쪽이 가장 속 편하리라는 결론을 내린 것도 그중 하나였다.

이미 그전부터 여름항구의 예를 따라 우애-환영 사이 바닷가 곳곳의 강어귀에는 조그만 정착촌이 생겨나고 있었다. (1417년 회의에서 와바나키 연맹이 문제를 제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벌써 몇몇 약삭빠른 사람들은 우애-환영 사이 육로를 개척해 이런 마을을 오가는 행상 노릇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은 마차를 끌 짐말의 값이 너무 비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여하튼 이렇게 육로가 개척된 덕에, 우애와 환영이라는 두 앙숙 마을 사이를 오가기는 훨씬 편해졌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늙은이를 맘대로 오라가라 하다니... 도덕이 땅에 떨어졌구만.”

마차라는, 아직은 드문 호사를 누리면서 오기는 했지만, 편도로 오가는 데만 족히 대엿새는 걸리는 거리. 플레톤이 궁시렁대는 대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신대륙 유일의 인쇄소가 여기 환영에 있는데 별수가 있어야지요.”

사과하면서도 변명 붙이기는 잊지 않는 시그리드였다.

“인쇄소? 지슈카 그놈한테 한소리 해달라고 부른 줄 알았는데. 우애까지 벌써 소문이 쫙 퍼졌단다. 내가 그놈 그렇게 안 봤는데, 엥이, 쯧쯧...”

“그거... 제가 꼬드긴 건데요.”

“뭐라고? 아니, 대체 왜?”

“좋은희망에서 증기기관이랑 남부 투자를 두고 의견 갈렸을 적에 제가 한 얘기랑 똑같은 이치지요.

계속 갈등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면, 그걸 틀어막을 게 아니라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고, 멱살도 잡고 그래야 진짜로 도끼나 총이 나올 일은 없을 테니까요. 협력해야 할 때는 같이 협력도 하게 될 테고요.”

“수호자들끼리 내분이 벌어져서 좋은 건 없는데...”

“그 내분을 막으려고 하는 일이랍니다.”

시그리드로서는, 그 옛날 비스툴라 강가의 진지에서부터 생사고락 함께했던 지슈카만큼 믿음직한 정적 후보도 없었다.

권력을 위해 원수와 야합하지도, 우군을 배신하지도 않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 역시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내.

“그러다가 진짜로 낙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그러면 다음 선거를 노리면 그만이지요. 저 아직 젊은데요, 뭐.”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랬다. 플레톤에게는 손녀뻘, 지슈카에게는 딸뻘 되는 시그리드였으니까.

“사실은 지슈카 선생님이 혼자 마음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그런 것도 있었고요.”

시그리드가 부추기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기 전까지는 입을 꾹 닫고 있었을 지슈카였다.

“이왕 하는 것, 번듯하게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선생님까지 여기 초대하게 되었어요.”

“번듯하게 제대로?”

“네. 정치적 대립이라는 게 존재하려면, 비등한 상대뿐 아니라, 구경꾼도, 훈수 두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이왕 정적을 만드는 것, 제대로 판을 깔아볼 작정이었다.

“이미 선생님께서 헌법 초안을 들고 이곳저곳 다니셨기에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부족하지요.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의견이 갈렸는지, 그리고 내년 선거에서 정확히 무엇이 쟁점이 될지, 주변에 알리고, 또 주변과 소통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제야 플레톤도 시그리드의 얘기가 향하는 곳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 뭐냐. 프라하 삼부작 같은 여론 놀음을 또 해보겠다는 게로구나.”

“여론 놀음이 아니라 언론이에요, 언론.”

후스와 롤라드파 학자들의 숙원이었던 인쇄소는 개척 초기에 바로 장인들을 모집하고 활자, 인쇄기까지 완비하여 이곳 따뜻한환영 한쪽에 자리를 잡았으나, 정작 제지소가 세워지지 않아 그간 연중 유휴 상태로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작년에 제지소가 세워졌고, 인쇄소 역시 설립 삼 년만에 처음으로 출간할 원고를 넘겨받게 되었다. 그간 후스가 다른 사람들과 절치부심하며 마련한 교과서였다. 강이 녹아 제지소의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게 된다면 – 올 겨울은 지난해와 달리 꽤 쌀쌀했다 – 바로 작업이 시작되리라.

공용어, 기초적인 사칙연산, 그리고 신대륙과 유럽의 기본적 지리 정도가 그 내용의 전부였고, 그마저도 모든 학생들에게 보급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라 교사 일인당 한두 권씩 배부되는 게 전부일 테지만.

“교과서 찍어낸 다음에는 또 한동안 뭔가 인쇄할 일이 없을 텐데, 그렇다고 마냥 놀리기엔 아깝지 않겠어요? 그래서 신문이라는 생각을 해냈지요.”

얼마 전 시그리드가 이갈리코 떠드는 것을 듣고 깨달은 것처럼, 이미 사람들 사이에 정치라는 것에 대한 관심은 충분히 고양되어 있었다.

그러나 높아진 관심에 비해, 신빙성 있는 정보를 얻을 방법은 한정되어 있었고, 특히나 남북으로 길게 흩어져 있는 정착촌들의 지리적 입지 탓에 입소문을 통한 소통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의회나 선거 이야기뿐 아니라, 다들 알아야 할 소식들까지 싣는 거지요. 물론 맨앞에는 정치 얘기가 실리겠지만, 어떤 지역에 새 정착촌이 생겼다, 어느어느 동네에 이런 경사가 있었다, 그런 소소한 이야기도 뒤에 싣는 거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지만.

“그리고 신문 판매 대금으로 세수를 충당하고요.”

직접세만으로 세금을 충당하려니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던 차에, 이런 묘안이 – 시그리드 딴에는 – 떠올랐던 것이다.

감춤 없이 나오는 순진한 장삿속에, 플레톤은 그만 실소하고야 말았다.

“결국 그것 때문이었구나.”

“세금 걷으려고 선거도 하는데, 세금 걷으려고 정쟁 벌이는 정도는 충분히 합리적인 것 아닐까요?”

한참 껄껄 웃던 플레톤이 갑자기 표정을 진지하게 고친 것은 그때였다.

“그래서, 후스와 지슈카 두 사람은 언제 찾아올 예정이냐?”

“후스 선생님도 소식 듣고 찾아오셔서는, 지슈카 선생님과 며칠째 논쟁을 벌이고 계세요.”

“하기야, 농사와 교역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그것 하나만 놓고 본다면 오히려 후스가 네 생각에 가깝고 내가 지슈카 그이에게 더 가까우니.”

“그렇기는 하지만, 후스 선생님을 따라 이곳까지 온 보헤미아 사람들도 태반이 농부들인걸요. 장인들은 자발적으로 따라온 이들보다, 그린란드 회사의 모집에 응모해서 온 사람들이 더 많고요.”

“후스가 그쪽의 사상가 노릇을 하게 된다면, 나는 네 편을 들어야 하겠지.”

“그렇지요?”

플레톤은 지성인답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도 언제든 감수할 수 있었다. 어리석은 자들이야 줏대가 없네, 현실과 타협했네 떠들겠지만, 궁극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잠시 현실론에 기울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내 한 가지만 물어보마.

민주정은 항상 중우정치로 타락할 위험이 있기 마련이다. 만약 네가 이리도 좋아하는 선거가 다수의 횡포로 이어져, 지금껏 네가 원해왔고 또 이루고자 노력해온 모든 것들을 뒤엎는 쪽으로 가게 된다면 어찌할 테냐?

예컨대, 저 지슈카의 무리가 승승장구한 끝에, 정직한 농부와 일꾼의 자리를 위협하는 증기기관을 모두 때려부수고 다시는 거론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발의한다면, 그때는 어찌할 것이냐?”

플레톤의 진중한 물음이 끝나자, 한참 정적이 흘렀다.

후스와 지슈카는 여전히 나타날 기미가 없고, 사람 없는 인쇄소에는 잔뜩 무거워진 정적만이 흘렀다.

한참 생각한 끝에 시그리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막아야겠지요.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 없던 질서를 새롭게 세우고 있잖아요. 어떻게든 그런 일을 막을 수 있도록 제도를 세우고, 법을 만들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마음 다른 사람들 모두를 아울러야겠지요.”

미래의 지식을 지니고 있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몇 차례나 거듭 증명된 것처럼, 미래의 지식은 결코 만능이 아니었고, 불완전했으며, 그것을 현실에 구현할 시그리드와 벗들 역시 결코 완벽하지 못했다.

“물론 모든 오류를 미리 막을 수는 없을 거에요. 결국 현실 앞에서 타협해야 할 때도 생길 테고,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리라 자위하면서 비열한 술수에 호소해야 할 날도 언젠가는 닥쳐오겠지요.

하지만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어떻게든 더 나은 길을 찾아보겠다고 발버둥친 끝에 저는 사람들과 함께 여기까지 닿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고 싶어요.”

모두에게 더 나은 세상은 스스로 열리지 않는다. 모두가 만족하는 세상, 모두가 저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고, 어쩌면 앞으로도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그리드는 어떻게든 그 이상에 닿고 싶었다. 이룰 수 없다면, 가장 근접한 곳까지라도.

그 옛날,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서쪽의 머나먼 바다로, 동쪽의 끝없는 숲으로 나아갔던 조상들의 피는, 여전히 시그리드의 살갗 아래 살아 흐르고 있었으니까.

“쳇, 이상국가를 떠드는 사람으로선 마냥 냉소할 수도 없고. 하여간 사람 곤란하게 하는 데 의외로 재주가 있다니까.”

역시 한참을 사색한 끝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성격 고약한 노인네다운 답을 꺼내는 플레톤이었다.

그 뒤로 실없는 농담따먹기나 하면서 한 반 시간쯤 기다렸을까. 마침내 지슈카와 후스가 나타났다.

“할 일이 많은데 왜들 이리 늦게 오셨소.”

“바로 그 할 일 때문이었지요. 신문 얘기는 들으셨으리라 믿습니다. 거기에 우리 파벌의 정견을 실으려면, 미리 말을 맞춰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지 않소?”

“중요한 문제라니요?”

“이왕 파벌을 나눌 것, 그럴듯한 당 이름을 지어야지. 내 여기까지 오던 중 생각한 것이 있었소.”

플레톤은 당연히 플라톤의 『국가Politeia』에서 당의 이름을 따오길 바랐지만, 이미 라틴어와 로마어에서 많은 단어를 빌려온 공용어로 ‘정치Politics’라는 말이 존재하여 걸림돌이 되었다. 그의 뜻대로 당의 이름을 ‘Political Party’라고 했다가는, 정당 이름이 ‘정당’이라는 괴상한 작명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안은, 그나마 서방 야만인 언어 중에선 고상한 라틴어 낱말이었다.

“Politeia의 라틴어 이름인 De Republica에서 따와 ‘공화당Republican Party’으로 당명을 삼으면 어떨까 싶소. 그대들은 머릿수를 믿고서 민중 편에 서자고 하니, 민주당Democrats 저도면 딱 좋겠군. 마침 그게 오지 않을 미래에 이 땅에 생길 정파 이름이기도 했다지?”

틈틈이 시그리드에게 미래 지식 이야기를 전해듣곤 했던 후스도 은근히 그 말에 끌림을 느꼈다.

“공화당 당수 시그리드 리프트라사, 민주당 당수 얀 지슈카... 흠. 어째 묘한 울림이 있군요.”

그러나 지슈카 본인의 현실적인 지적 앞에서 금방 이 안은 폐기되고야 말았다.

“공화와 민주의 차이가 뭡니까?”

“그야, 엄청난 차이가 있지...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우리 일상에서 쓰이는 단어로만, 두 문장 내로 축약해서 설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더 중요한 문제들이 많았기에, 결국 당명 문제는 뒤로 미루어지고야 말았다.

그사이 허무하게 문제가 해결되어 버릴 줄 누가 알았을까.

맨 처음 지슈카가 용병 노릇을 시작할 때부터 그를 따랐던 도적 출신 부하 몇몇이, 지슈카의 집안 문장을 떠올리곤 붉은 가재 문양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린란드 연대기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반대편인 시그리드네 당의 문양이 무엇일지도 연상할 수 있었다.

“가재당 대 백송고리당이라니, 이것 참...”

벌써부터 어떤 사람들은, 가재는 개울가에 사니 평범한 사람들의 편에서 현실을 말하는 당이요, 백송고리는 하늘 높이 나니 더 나은 미래와 거창한 이상을 논하는 당이라고 끼워맞추고 있었다. 리프가 시그리드 옆에 있으니 그냥 애완동물로 보이지, 유럽 본토에서는 귀족들이나 겨우 사냥매로 다루는 맹금임을 감안하면 딱히 틀린 해석도 아니었다.

오지 않을 미래, 잉글랜드에 생길 휘그Whig와 토리Tory에 비하면 그나마 고상한 명칭이라는 게 소소한 위안이랄까¹.

1418년 봄, 『소식The News²』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이름을 달고서 나온 신문이 온 연합에 퍼지게 되었다.

내년 가을로 다가온 선거가, 단순히 대표를 뽑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새 보금자리로 삼은 땅의 앞날을 결정하는 첫 수순이 될 것임을 알리는 글.

신대륙 연합은 마치 하나의 나라처럼, 각각의 민족들과 그 정착촌을 일개 지방으로 거느린 강력한 정부를 두어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백송고리당에 한 표를.

신대륙 연합을 이루는 각각의 민족들이 하나의 나라 비슷한 공동체를 이루어, 바다 건너의 일과 같은 중대한 사안을 제외하면 각각 자치를 보장받도록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가재당에 한 표를.

신대륙 연합의 앞날은 통합된 정부 하에 교역로를 확장하고 온갖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대표 혹은 그 후보에게 시그리드를 지지하라고 말 한 마디를.

신대륙 연합이 구대륙보다 더 나은, 진실로 새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농사짓는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최우선으로 하고 바다 너머의 일에는 최소한으로만, 딱 필요한 만큼만 관여해야 한다고 본다면, 얀 지슈카와 가재당에게 그대의 지지를.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까?”

“시그리드 각하의 백송고리단이요.”

이토록 모두가 정치에 골몰하게 되었은즉, 이러한 동문서답이 곧 북위 52도의 남녘정착지부터 북위 40도의 우애의 도시까지 퍼져나갔다³.

마침내 배편을 구한 태감 정화가 탄 제노아 배가, 좋은희망이나 우애의 도시 대신, 엉뚱한 투슈판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에 비하면 덜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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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의 휘그당과 토리당은 최초의 근대적 정당, 즉 분명한 정강과 공약을 지닌 정당으로 꼽힙니다. 그 이름은 각각 서로 비난하던 멸칭에서 유래했는데 (휘그 – 스코틀랜드 방언 Whiggamore, ‘암말이나 몰고 다니는 촌놈’/ 토리 – 게일어 Toraidhe, ‘도둑놈’), 이런 괴상한 이름이 전통이라고 19세기까지 이어졌다는 점을 보면 확실히 어딘가 영국스럽다 하겠습니다.

2. 뉴스News가 오늘날의 뜻, 즉 새로운 소식이라는 뜻으로 굳어진 것은 14세기 말의 일로, 비단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 등 다른 유럽 언어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즉 ‘뉴스’는 이 무렵에는 나름 ‘핫’한 신조어인 셈이지요.

3. 작중 가재당과 백송고리당의 대립은, 원 역사 미국이 독립 직후 겪었던 연방주의 대 공화주의의 갈등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갈등의 최대 쟁점은, ‘United States’에서 방점이 ‘United’에 찍혀 있는지, 아니면 개별 주 ‘States’에 찍혀 있는지에 있었지요.

그러나 쟁점이 그것뿐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토머스 제퍼슨이 이끌었던 공화주의는 단순한 반연방주의가 아니었고, 연방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패와 권력 남용을 비판하고, 부유한 상인들이 국가권력을 사유화하며 새롭게 귀족으로 부상하는 현상을 경계하는 데 방점이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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