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처럼 굶주린 (2)
19. 늑대처럼 굶주린 Hungry Like The Wolf (2)
투슈판을 거치는 무역 대부분은 투슈판 사람들이 아니라 테노치티틀란에서 찾아온 아스테카 상인들 손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운데서 이익이 떨어지지 않을 수 없을만큼 이 교역은 수익이 짭짤했고, 그저 항구와 시장을 빌려주는 것만으로도 투슈판은 크게 번영할 수 있었다.
본디 주변 와스테카 도시들보다 두드러지게 강성하지는 않았던 투슈판은, 비록 몇몇 고위 전사들에게 한정되긴 했지만 어쨌든 철기로 무장한 부대까지 거느린 강력한 도시로 거듭났고, 그 상승세는 앞으로도 죽 이어질 것만 같았다.
허나 그 모든 것이 무색하게도, 투슈판은 팔켄부르크의 요한이라는 길잡이를 얻은 잉글랜드-제노아-명 연합군 앞에 허무하게 점령당하고야 말았다.
대개 용병이란 엄정한 군기와는 거리가 멀기 마련이었지만, 잉글랜드 용병들과 제노아 쪽에서 고용한 용병들은 황금이라는 대의 앞에서 똘똘 뭉쳐 있었고, 정화의 원정대 소속 군사들 역시 마자파힛과 실론 섬 등지에서 비슷한 짓을 많이 하였기에 이런 일에는 도가 터 있었다¹,
“하하! 역시 정의는 승리하는군! 주님의 군대 앞에 어찌 이교도들이 대항할 수 있겠소?”
그 이교도와 결탁한 군대에게 튜튼 기사단이 몰락한 것이 ‘그린란드의 마녀’ 소동의 시작점이라는 사실을 편리하게 망각하면서, 팔켄부르크의 요한은 득의양양한 폭소를 터뜨렸다.
투슈판이 빠르게 함락된 것이, 바로 이미 한 번 이방인 군대에게 무서운 맛을 본 바 있던 틀라토아니와 귀족들이 재빨리 저들의 친위대와 함께 도망쳤기 때문임을 눈치 챈 정화와 위트레흐트의 지몬은 요한만큼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자, 이제 이 도시의 이교도들을 모두 붙잡고, 선택토록 합시다! 화형이냐, 세례냐!”
그러나 요한이 사고를 치면서 얼떨결에 이 무리에 함께하게 된 다른 유럽인들을 모두 합해도 이천 명이 안 되는 인원으로 투슈판 전체를 에워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².
도망칠 사람들은 모두 도망쳤고, 남은 이들은 도망치는 즉시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평민들과, 그들을 이끄는 몇몇 틀라콰나틀록 사제들.
허나 이건 너무한 것 아니냐고 항변하려던 다른 선교사들과, 제발 남은 원주민들 중 누군가 공개적으로 제게 반대하여 본보기가 되어주기를 바랐던 요한 모두 금방 허탈해지고야 말았으니, 다른 이들과 함께 도시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포로로 잡힌 올라카틀이 순순히 세례에 응하였던 것이다.
“일단 개종합시다. 나중에 회개하고.”
“오오, 역시 현명하십니다!”
어차피 신들은 관대하였으며, 자신들이 이런 수난을 겪게 된 것도 절반쯤은 신들 잘못이었다. 그러니 잠깐 이쪽 신들 욕을 좀 하고 저쪽 신 찬양을 한다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더구나 세례라는 영험한 주술도 공짜로 베풀어준다지 않던가?³
그렇게 이교도들은 좋다고 세례를 받고, 선교사들은 떨떠름해 하면서도 세례성사를 집전하고, 팔켄부르크의 요한은 제발 누구 하나 불태울 빌미 생기기만을 바라며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이미 이 고을은 점령하였고, 금은보화는 모두 차지하였다. 그러나 복속을 청하는 오랑캐는 찾아오지 않고, 우리 군세는 이 넓은 땅 전체를 아우르기엔 턱없이 부족하며, 이 소읍小邑은 성벽조차 없어 지키기에 지극히 불리하다. 이제 어찌할 심산인가?”
투슈판 함락 후 사흘이 지날 무렵, 참다 못한 정화는 요한과 지몬을 불러들였다.
아군이라는 자들 절반은 – 저들도 오랑캐인 것은 똑같건만 – 이곳 오랑캐들을 죽일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다른 절반은 막대한 황금을 얻어 희희낙락하며 소일하고 있었으며, 정작 근처 그 어느 도시에서도 사절이라 할 만한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주군 영락제가 기의起義하였을 적에, 북평北平과 보정保定을 굳건이 지키며 수만 군사를 막아낸 바 있던 정화는, 무장의 본능으로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허나 지몬도 믿는 바는 있었다.
“제가 듣기로, 이 땅의 이교도들은 일찍이 이삼백에 불과한 마녀의 군세에 굴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그 군세에 합류하여 함께 황금이 넘쳐나는 내륙으로 진군했고, 그곳에서 더 강력하고 부유한 이교도들을 정복하고 막대한 황금을 챙겼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갑절이 넘고, 훨씬 정예하지요. 이곳에 좀 더 머물면서, 우리의 길잡이가 될 현지 야만인들을 모으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 여기서 고작 보름 거리에 있다는 부유한 도시들을 차례로 정복하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항복하는 이들에게는 개종을 요구하고, 같은 기독교인하고만 교역하겠다는 맹세를 받아내는 것입니다. 거부하는 자들은 그대로 약탈하고요.”
원 역사에서 이 지몬과 비슷한 마음가짐 품은 콩키스타도르들이 대략 이런 어처구니없는 계획으로 어마어마한 땅을 정복했고, 심지어 저들 주제를 모르고 천조 대명을 정복할 작정까지 한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정화는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우리가 이곳을 들이칠 적, 항구에 머물던 저 파비륜국婆妃倫國(바빌로니아) 배가 북쪽으로 도망친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들이 원군을 데려오면 어찌할 작정인가? 내 듣기로, 그 파비륜국 장수 중에 독안룡獨眼龍과 같은 효웅이 하나 있다던데.”
데스포이나 시그리드는 왕후 서씨王后西氏로 동쪽에 알려졌고, 북경 곳곳에서는 그것이 한 번 와전되어 서왕모西王母라고도 불리고 있었다. (주로 환관의 전횡을 통탄하는 유학자들이 비꼬며 입에 담곤 했다.)
정화는 그 서씨가 세웠다는 나라를, 왕후 서씨가 노파를 닮았다는 풍문에 입각하여 파비륜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파비륜국으로 향했다는 쟁쟁한 사람들 중 유독 잘 알려진 사람이 있으니 바로 독안룡 안지숙顔之叔, 얀 지슈카였다.
빈란디아행 배편을 기다리며 몇 년간 용병업에 복귀해 있던 지슈카는 잉글랜드-덴마크 연합군에 가담하면서 꽤 큰 명성을 얻었다. 이제 황제가 된 ‘관용왕’ 지기스문트 역시 열심히 지슈카를 띄워주었는데, 그래야만 자신이 프라하에서 겪은 굴욕을 변명할 수 있던 것이다.
“바빌로니아의 인구는 아직 이만이 채 안 됩니다. 군사를 내봤자 고작 오백 명도 못 모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작’ 오백 명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대군인 줄은 미처 몰랐군.”
정화는 한 차례 더 냉소하곤, 미리 준비한 올가미를 내밀었다.
“우선은 그대의 계책을 따르도록 하겠다. 단, 그대의 예상이 조금이라도 빗나가는 즉시 그대들은 본관의 명을 따라야만 한다.”
천명을 걸고 오십만 대군과 십이만 대군이 벌인 삼 년의 혈전. 그 전장에서 승자의 편에 우뚝 섰던 정화는, 무장의 눈으로 지몬을 응시하였다.
“이미 싸움이 붙었으니, 지금 이곳은 군문軍門 안과 같다. 군중무희언軍中無戱言인즉 그대의 신 앞에 맹세하여라.”
“주님께 맹세코 그리하겠습니다, 타이간 각하.”
투슈판이 함락당할 무렵, 테츠코코의 틀라토아니 네사왈코요틀은 와스테카 땅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토미 인들의 도시 메츠티틀란Metztitlan – 오토미 말로는 은지바타라 부르는 – 을 방문하고 있었다.
투슈판과 테노치티틀란 사이의 교역로를 차지하고 있는 오토미 인들은, 이 교역이 엄청난 이익을 남긴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길을 틀어막고 공물을 요구하려던 차였다.
네사왈코요틀은 이를 막기 위해 찾아왔다는 명분을 내세우고는, 뒤로는 은밀한 공작을 펼쳤으니, 바로 상인으로 변장하고 오토미 귀족들을 찾아가 ‘무시무시한 음모’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저 아스테카인들에게 막대한 공물을 뜯어낼 묘책이 있습니다. 그것도 한두 번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다섯 번째 태양이 죽어 사라지기 전까지 꾸준히 공물을 뜯어낼 방법이요.’
‘그것이 무엇인가?’
솔깃해 하는 귀족들에게, 투슈판에 머물던 시절 익힌 와스테카 말투를 능숙히 구사하며 네사왈코요틀은 제의했다.
‘오가는 아스테카 놈들 하나하나에게 공물을 받는 겁니다.’
‘하지만 그놈들도 바보가 아니야. 우리가 공물을 받으려 하면 다른 길목으로 가버릴 텐데.’
‘그러면 이곳의 길을 오가기 편하게 정비하면 그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통쾌한 일입니까? 우리 길로 오가기 싫으면 다른 데로 가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스테카 놈들은 다른 길이 죄다 험함을 알기에 분노와 굴욕을 삼키면서 나리들께 매번 공물을 바칠 것입니다!’
‘아아, 그렇군!’
‘참으로 교묘한 계책이야!’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이것이 사실 무슨 거창한 계략이 아니라 구대륙에 흔한 유료도로라는 개념임을 아는 것은 구대륙 사정에 비교적 밝은 네사왈코요틀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간다며, 겉으로는 쩔쩔매는 척을 하며 속으로는 웃음짓던 네사왈코요틀이었지만, 이 조숙한 지략가조차 오토미 땅에서 피난해온 투슈판의 틀라토아니 콰우테목을 만나는 상황은 예상치 못하였다.
“아니, 이 무슨 일이오?”
이제는 동등한 틀라토아니로서 조부뻘인 콰우테목을 평대하는 네사왈코요틀이었다.
콰우테목은 투슈판의 함락에 대한 이야기를 – 자신과 귀족들이 ‘크나큰 용기와 지혜를 내어’ 도망쳤다는 내용을 곁들여 – 늘어놓았다.
“... 함께 도시를 빠져나온 귀족들과 그 직속 부대들은 저들의 친족이 있는 도시에 의탁하고 있소이다. 허나 그들만으로는 저 이방인들의 매서운 무기를 당해낼 수 없소. 하여, 때를 기다리며 우군을 모으고자 하고 있소.
이미 다 함께 이방인들과의 교역에 나선 마당에, 와스테카니 오토미니 따질 것도 없지 않겠소? 하여, 다른 도시들의 협력을 구하고 나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소. 여기서 그대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주변 도시들 중 그 어디서도 원군 요청에 응하지 않은 것은 아니오?”
네사왈코요틀의 날카로운 지적에, 콰우테목은 와스테카 말로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는 싫다’며 궁시렁댈 뿐이었다. (네사왈코요틀은 그 말을 곧이 알아들었지만, 딱히 내색하진 않았다.)
와스테카의 도시들은 탈출한 타이노인 노예의 증언을 통해, 저 새로운 이방인들은 결코 북쪽에서 오는 이방인들과 같지 않으며, 오만함과 악의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와스테카 모두가 단합해야 할 만한 이유는 되지 못했다.
투슈판은 삼각동맹 소속은 아니었지만, 동맹의 암묵적인 보호를 받는 도시였다. 투슈판은 물론이고 주변의 다른 도시들 또한 그렇게 여겼으며, 이는 사실과 그리 동떨어진 생각도 아니었다.
그러니 굳이 다른 도시들이 군사를 낼 것도 없지 않겠는가? 어차피 저 동맹 중 누군가가 나서서 이방인들을 막을 테니, 저들은 그때까지 굳게 저들 도시 주변을 지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대의 생각만큼 상황이 나쁘진 않은 듯하구려.”
“어찌 그렇소?”
“그 어떤 도시도 투슈판을 위해 원군을 내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 어디서도 저 사악한 이방인들에게 협력하자며 사절을 보내지도 않았잖소이까.”
새삼스럽게 왜 시그리드가 이 땅의 전쟁을 멈추고자 하였는지 떠올리게 되는 네사왈코요틀이었다.
만약 이 땅에 어느 하나의 제국만이 존재하였다면, 지금쯤 그 제국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부나방처럼 투슈판에 눌러앉은 이방인들에게 몰려들고 있었을 테니까.
“만약 저 이방인들이 그대의 말처럼 어리석고 탐욕스럽다면, 곧 다른 와스테카 도시들도 새 이방인들의 위협을 깨닫고 원군 요청에 뒤늦게 응하게 될 것이오.”
황금에 눈이 먼 이방인들이라면, 곧 저들의 힘을 믿고 다른 도시까지 정복하겠다며 날뛰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결국 와스테카 도시들도 저 이방인들이 이 땅의 공적임을 깨닫고 연대하게 되리라.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장담컨대, 그리 될 것이오. 북쪽의 신대륙 연합에서도 곧 지원군이 올 테고.
우선 테노치티틀란과 테츠코코에 사람을 보내겠소. 거리가 거리인 이상, 그리 많은 병력을 낼 수는 없겠지만, 그대의 도시를 되찾기 위한 싸움이라면 우리 삼각동맹 모두가 참여해야 마땅할 터.”
네사왈코요틀은 금방 계산을 마쳤다.
지금은 에카코아틀Ecacoatl(허리케인)이 불지 않아, 한창 무역선이 투슈판과 신대륙 연합을 오가는 계절.
그렇다면 무역선 한두 척쯤은, 아직 사정을 모르고 남쪽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일단은 그대의 군사 일부를 내어주어야 하겠소. 투슈판으로 오기 전에 미리 연기 신호라도 보내서 저쪽에 우리 사정을 전해야지. 그때까지 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알게 된 모든 것을 이방인들과 우리에게 전해주도록 하시오.”
다른 방법이 없던 콰우테목도 순순히 동의하였다.
네사왈코요틀의 기지 덕분에, 대선이고 뭣이고 잠시 내려놓고 투슈판 원정을 준비하느라 바쁘던 시그리드와 얀 지슈카는 귀중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잉글랜드-제노아-명 연합군이 패악질을 부릴수록 와스테카 도시들의 원군도 모일 것이라는 네사왈코요틀의 예상이 빗나갔다는 사실도.
예상과 달리 그 어떤 도시에서도 함께 다른 도시들을 치자는 협력 요청이 들어오지 않자, 정화는 이를 빌미삼아 원정대 전체의 지휘권을 빼앗았다.
정화의 측근 하산은 베네치아인 통역관과 함께 움직이며, 잉글랜드와 제노아 용병들에게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고, 카타이 황제의 부유함을 이미 소문으로 들어 알던 용병들은 다들 거기에 넘어갔다.
이를 뒤늦게 눈치챈 지몬은, 자신이 맹세한 대로 순순히 지휘권을 양도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맹세라는 것은 필요하거나 강요당했을 때만 지켜지기 마련이었다.)
“먼저 우리의 목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대들은 이 땅에서 황금을 얻기를 바라고 있고, 나는 그대들의 나라가 뜻을 이루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그대들이 금상 폐하의 은덕을 입어 이 땅에 닿았음을 구라파의 다른 오랑캐 나라들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필시 주변의 오랑캐들은 우리의 위세에 놀라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강력한 적이 나타나 그들에게 굴복했는데, 이제 그보다도 훨씬 무서운 세력이 나타났으니 아마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터.”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간단하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 파비륜국의 군세가 닿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성읍에 사절을 보내, 이렇게 고하도록 하여라.”
정화의 노림수가 무엇인지는 금방 드러났다. 비단 와스테카 도시들뿐 아니라, 막 테츠코코로 돌아가 원정을 준비하던 네사왈코요틀에게도 그 뜻은 분명했다.
‘우리는 신대륙 연합보다도 강력한 땅에서 찾아왔다. 그러므로 너희는 장차 신대륙 연합과의 관계를 끊고, 우리와 교역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그래야만 하는 까닭을 곧 드러내보일 것이니, 너희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사세를 관망하여라.’
즉 투슈판을 공격한 것은 어디까지나 삼각동맹의 구성원인 신대륙 연합과의 대립 때문이었으니, 주변 도시들은 굳이 개입할 것 없이 더 강력하고 부유한 쪽과 관계를 맺으면 그만이라는 뜻이었다.
유럽의 속사정을 모르는 와스테카 도시들 입장에서는 이 또한 받아들임 직한 이야기였다.
따뜻한환영에서 소식을 접한 시그리드와 얀 지슈카 입장에서는, 가장 골치아픈 전략이기도 했다.
“카타이의 타이간이라... 만만한 상대는 아니로구나.”
차라리 저들이 막무가내로 주변을 약탈했더라면, 유럽인들의 탐욕에 분노한 원주민들은 금방 단합하여 떨쳐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정화는 이 대립의 본질이, 같은 이방인인 신대륙 연합과 자신들 사이에서 아나왁 땅과의 교역을 두고 벌이는 갈등이라 정의해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압도적인 힘으로 저들을 제압해야만 하게 되었다. 곤란하게 되었구나.”
군략에 있어서는 정화보다 뛰어난 지슈카답게, 금방 그 저의를 꿰뚫어볼 수 있었다.
이미 신대륙 연합의 무역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대선단의 위용으로써, 이 신대륙에 관심을 가진 것은 비단 북쪽의 이방인들만이 아님을 강렬하게 드러낸 잉글랜드-제노아 선단이었다.
만약 신대륙 연합이 투슈판을 탈환하지 않는다면, 혹은 탈환하더라도 압도적인 승리 대신 질질 끄는 힘싸움과 협상 끝에 저들을 밀어내는 데 그친다면, 신대륙 연합이 아나왁에서 꾸린 삼각동맹 역시 위신에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테노치티틀란과 테츠코코가 손잡은 이방인들보다 바다의 다른 방면에서 넘어오는 이방인들이 더 강력하다면, 그들과 새로 연을 맺고 더 많은 부와 군사력을 얻는 게 낫지 않겠는가?
시그리드가 한바탕 쓸고 지나간 아나왁 땅에는 확실한 패자도, 구심점도 없었다. 그렇기에 오지 않을 미래의 코르테스 앞에서 아스테카의 패권이 허망하게 무너진 것과 달리, 투슈판 한곳이 함락되었다고 해서 온 아나왁 땅의 절반이 새 이방인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로, 신대륙 연합과의 교역으로 이익을 취한 아나왁의 도시들로서는 - 삼각동맹 소속 두 도시를 제외하면 – 굳이 신대륙 연합하고만 교역해야 할 의리도, 의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저들을 가만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요.”
“그것도 그렇지. 허나 우리 사정이 녹록지 않다는 것은 너도 잘 알지 않니.”
하필이면 딱 올해 쳐들어올 것은 무어란 말인가.
한두 해만 더 늦게 왔더라면, 이 땅에서 무기와 갑옷, 그리고 기술적 한계로 인해 아직은 소모품에 불과한 머스킷 총열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을 때 왔더라면, 그때는 그린란드 연대가 장기로 삼는 소총 사격으로써 능수능란하게 경쟁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을 텐데.
병력 또한 문제였다. 신대륙 인구가 이제 이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본토 방위를 위해서라면 족히 일이천쯤은 모을 수 있을 것이요, 그린란드 연대 출신만 모아도 원정군 오백은 족히 꾸릴 수 있을 것이었다. 동맹까진 아니지만, 이익될 것이 분명하다면 몇백 명 병력쯤은 모아서 보내줄 수 있는 긴집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엄청나게 무리를 하여 그 모든 병력을 투슈판 앞에 내려놓을 수 있다 한들, 정화의 대선단이 내려놓은 병력을 압도할 만큼의 수는 되지 못했다. 그나마 부족한 수는, 삼각동맹을 이루는 나머지 두 도시의 원군과 투슈판에서 도망쳐나온 군사들을 규합한다면 어느 정도 메꿀 수 있겠지만.
“더구나 정말로 저들을 압도적으로 물리칠 수 있다면 그 또한 문제일 테고.”
압도적인 승리에는 압도적인 사상자가 따른다.
카타이의 타이간이야 그렇다 쳐도, 그 휘하에 들어갔다고 의심되는 유럽인들은 또 다른 문제였다.
신대륙에서 유럽인들끼리 전쟁이 벌어져 한쪽이 궤멸당한다면, 그것도 같은 교회 사람도 아니요 보헤미아 이단들과 원주민 이교도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그린란드의 마녀 손에 잉글랜드와 제노아 사람들이 도륙당한다면, 그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파급을 일으킬 터.
“그래도, 방금 말한 것처럼 이대로 저들을 물리치지 않고 수수방관할 수는 없잖아요.”
“맞는 말이다. 빈말로도 지금 상황이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지금껏 내세워온 깃발의 무게와 이 두 어깨 위에 실린 책임의 무게를 이대로 저버릴 수는 없지.”
심경을 정리한 지슈카가, 크게 한숨을 내쉬곤 외눈으로 시그리드를 응시했다.
“이 얀 지슈카, 신대륙 연합의 수장인 시그리드 리프트라사 각하의 명을 받들겠소.”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남쪽 투슈판을 오가고 있을 신대륙 연합 소속 무역선들은, 화물 대신 사람과 군마를 태울 준비를 하였다.
좋은거래 정착지의 스베인은 카나스탓시와 오치콰리에게 입맞춤하곤 도끼와 총을 챙겨 옥수수 강으로 향했고, 다른 그린란드 연대 출신들도 마찬가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저들 기다리는 배에 올라탔다.
긴집사람들에게도 파병 요청이 들어갔고, 탐험기사단 단원들은 이번에야말로 무공을 세워 시그리드의 마음을 사든 의원직에 출마하든 하겠노라며 자원하고 나섰다.
그렇게 착착 원정 준비가 이루어지고, 시그리드와 지슈카는 열악한 여건 속에서 어떻게 투슈판을 차선의 방식으로 탈환할지 계속 고민을 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없는 머스킷이나 전마가 갑자기 생겨나고, 만들어진 적 없는 미래 병기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마침내 1418년 여름, 첫 번째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에 신대륙 연합 원정대는 투슈판 북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로 따지면 잉글랜드-제노아-명 연합군보다 딱히 우위를 점하지 못했고, 그중 절반 가까이가 경무장한 원주민들이었으니 질로도 썩 대단하다고는 못할 상황.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정화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나타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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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화의 대원정은 콜럼버스나 콩키스타도르들의 원정과 달리 현지인들과의 평화와 공존에 힘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후대의 과장과 왜곡된 해석의 산물입니다. 물론 콜럼버스나 피사로에 비하면 정화의 원정이 훨씬 평화롭게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복이 아닌 세력 과시가 목적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이전에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정화의 원정대도 현지 개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언제든 무력에 호소하곤 했습니다.
특히 명의 대외교역과 직접적 관련이 있던 동남아시아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정화는 인도와 중국 사이 교역로에 친명 세력을 세우고자 했고, 이를 위해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에 있던 친명 무슬림/중국계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일대의 강자였던 마자파힛 제국을 견제했습니다. 결국 말라카와 수마트라 북부, 심지어 자바 섬까지 친명 무슬림 및 화교 세력이 침투하면서 마자파힛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지요.
2. 많은 경우 메소아메리카의 도시들은 성벽을 따로 두르지 않았고, 방어시설로 방벽을 세우더라도 몇몇 중요한 거점과 신전 주변에만 세우곤 했습니다. 이는 기술의 부족보다는, 메소아메리카 전쟁의 성격과 더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인력을 통한 육상수송이 사실상 유일한 보급 수단이던 메소아메리카에서는, 막대한 물자가 소요되는 공성전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굳이 도시 전체를 에워싸는 성벽을 세울 것도 없이, 약탈로부터 주요 시설을 보호하고 유사시 잠깐 피난처로 쓸 수 있는 정도의 방벽만 세워도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3. 메소아메리카의 종교와 가톨릭 사이에 교리 측면에서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기에 개종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일찍이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는 인신공양이 빠르게 영성체로 대체될 수 있게 해준 희생제의 교리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지요. 영성체만큼이나 아즈텍인들이 열광한 가톨릭 제례는 바로 세례였습니다. 선교 초기 메소아메리카인들은 세례가 몸과 영혼의 질병을 정화해주는 영험한 주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지요.
유료도로를 만들고 통행료를 징수한다는 개념은, 도로를 정비하고 통행자의 안전을 보장할 강력한 공권력이 부재하던 중세 유럽 전체에 널리 존재했습니다. 이렇게 걷은 통행료는 강력한 공권력이나 체계적인 조세제도가 부재하던 중세 유럽에서 육상 교통로가 비교적 잘 유지될 수 있게끔 하는 재원이 되었습니다.
4. ‘독안룡’은 흔히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하후돈이나,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다테 마사무네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신오대사』에서 후당後唐을 건국한 이존욱의 아버지인 투르크계 장수 이극용을 당대에 ‘독안룡’이라 불렀다고 기록한 것이 그 출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