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82화 (82/116)

늑대처럼 굶주린 (3)

19. 늑대처럼 굶주린 Hungry Like The Wolf (3)

그제 저녁에 투슈판에서 하루 거리에 있는 북쪽 해변에 상륙한 신대륙 연합군은, 어제 근처에서 기다리던 네사왈코요틀과 콰우테목의 원주민 군대와 합류했다.

투슈판 시내에 주둔 중이던 점령군도 곧 이쪽의 움직임을 감지했고, 그리하여 투슈판이 멀리 보이는, 숲이 끝나고 범람원이 펼쳐지는 지점에서 두 진영이 대치하게 되었다.

저쪽에는 조정의 수군이지만 사실상 정화의 사병인 명군, 잉글랜드, 제노아 용병들.

이쪽에는 보헤미아, 그린란드, 독일, 프랑스 (자크 다르크가 자원하여 따라왔다), 지난번에 한 번 와봤다는 이유로 또 한 번 파견된 전쟁추장 아욘와에스와 카니엔케하카 전사들, 저들도 질 수 없다며 따라나온 와바나키 장정들, 거기에 테노치티틀란과 테츠코코, 투슈판 군대까지...

대체 이곳 벌판에 얼마나 많은 민족들이 모여 있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찔해지는 조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얀 지슈카는 그런 생각은 관두고, 대신 출발 직전에 겨우 완성된 시제품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폈다. 신기한 기물이긴 했지만, 지슈카의 관심사는 이 망원경의 원리가 아니라 망원경 렌즈 너머로 보이는 적진에만 있었다.

막 양군이 대치를 시작하자마자, 저쪽 진영에서 사내 몇몇이 백기를 흔들며 나타났고, 시그리드는 그에 응해 저쪽과 담판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은 싸움이 벌어지지 않을 테니, 이 망원경으로 적의 동태를 살피기에는 딱 좋은 때였다.

뭔가 막 얘기를 주고받는 타이간과 시그리드 뒤편에는, 일천 명쯤 될 적이, (아마도) 소속에 따라 대열을 나누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펼쳐진 투슈판 시의 모습. 몇 차례 우기가 지나가면서 핏빛이 많이 사라진 투슈판의 제단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에 흐르는 강물. 그리고 도시 동쪽 강 하구에 세워져 있는 항구. 그 항구에 가득 정박한, 거대한 범선 열댓 척.

“뭐 좀 보이시오?”

프라하 공방전에 이어 실로 간만에 함께 전장에 서게 된 스베인이 그새를 못참고 끼어들었다.

“적진이 잘 보이는군.”

“해볼 만하겠소?”

보헤미아 사람에게도 무더운 이곳 여름날씨에, 스베인은 벌써 땀이 흥건하였다.

“‘그렇다’라고 답하고 싶지만... 쉽지 않을 것 같네.”

엄연히 제노아와 잉글랜드의 후원을 받는 투슈판 점령군. 이들을 완전히 격멸하면 유럽 국가들과의 다툼으로 번질 것이요, 제대로 제압치 못하고 질질 끌게 되면 와스테카와 그 너머 아나왁 땅까지 신대륙 연합과의 교역에 대한 의구심이 번질 것이다.

일전에 로마인 테오도로스에게 들었던 ‘딜레마’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상황이라고 얀 지슈카는 잠시 생각했다.

허나 그 생각은 적의 면모를 확인한 순간 사라졌다.

“그래도 속은 편하지 않소? 저렇게 놈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싸우러 나온 이상, 어떻게 저놈들을 이길지만 고민하면 되니까.”

콜그림이나 다른 그린란드 사람과는 달리 이번이 초행길이었던 스베인이 이마를 연신 훔치며 물었다. 차라리 얼른 싸우고 투슈판 바로 남쪽을 흐르는 저 시원한 강물에 뛰어들고 싶었던 것이다.

“정면 승부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자네 말이 맞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양쪽 모두 기병이나 중장보병이 없다는 점뿐.

“자네도 용병 노릇할 때 주워들은 소문이 있겠지. 창병 중에서는 스위스 용병이, 장궁수 중에서는 잉글랜드 용병이, 석궁수 중에서는 제노아 용병이 최고라는 것 말일세. 그중 둘이 저쪽에 있네.”

석궁이라면 신대륙 연합 쪽에도 있었다. 허나 부족한 머스킷 화력을 메꾸기 위해, 보헤미아 용병 출신들끼리 총을 쓰기 전에 다루던 석궁을 떠올리며 급조한 것에 불과했다¹.

갑옷은커녕 방패조차 변변치 못한 이쪽 연합군이 어쭙잖게 원거리 교전을 시도했다가는, 어어 하는 사이에 다들 고슴도치 신세로 전락하리라.

“그리고 저 카타이... 밍Ming(明)이라는 나라에서 왔다고 하던가. 저 부대도 경무장하긴 했지만, 다들 싸움에 능해 보이네.”

시그리드의 추측대로라면, 카타이의 타이간은 최소 수천에 달하는 자신의 일행 중 배 위에서의 싸움에 익숙한 무리만을 추려 이곳까지 데려왔을 테다. 짧은 창(삭槊)과 칼, 가벼운 방패 정도로만 무장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근접전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충분할 것이다.

“잠깐, 저놈들 저거 대포 아니오?”

“어디... 흠, 그렇군. 불행은 외롭지 않다더니(=설상가상), 딱 그 말이 맞군그래.”

카타이 사람 여럿이 낑낑대며 대포를 옮겨오더니, 받침대를 놓고 그 위에 포신을 올렸다².

이쪽에도 물론 그 옛날 프라하 전투 시절 만들었던 작은 대포가 있기는 했지만, 총열 소모를 감당치 못해 머스킷조차 마음대로 못 쓰는 판에 대포라고 마음껏 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포병에서도 열세. 근접전에서도 열세. 원거리에서도 열세.”

이쪽 진영에서 가장 정예한 신대륙 연합군조차 저들 상대로 질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다른 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머릿수는 이쪽이 더 많지 않소.”

“딱 그것 하나만 우리가 유리하다는 게 문제지.”

그 머릿수조차 사실 엄청나게 우세하지는 않았다. 오지 않을 미래의 아스테카와 달리, 조금 강력하고 부유한 도시일 뿐인 테노치티틀란과 테츠코코는 다 합쳐 일천이 채 안 되는 병력을 이곳 와스테카까지 보내는 게 최선이었다.

거기에 콰우테목의 직속 부대, 근처 도시에 의탁하고 있던 투슈판의 귀족들과 그들이 거느리고 있던 약간의 군사까지 합쳐봐야 기백. 신대륙 연합군까지 다 합쳐봐야, 저쪽의 두 배를 겨우 넘기는 규모였다.

“그 병력 우위를 살려서 저들을 물리치는 건 십분 가능하겠지만...”

“우리 시그리드가 그걸 허락할 리 없겠지. 그렇지 않소?”

“잘 짚었네.”

꼭 시그리드가 착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머릿수로 밀어붙인다는 것은 곧 그만큼 많은 피해를 감수한다는 뜻이요, 신대륙 연합이든 다른 원주민 군대든, 피가 흐르면 흐를수록 뒷감당도 어려워지는 처지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선은 시그리드 각하와 논의를 해보는 수밖에 없겠네. 그 다음에 대책을 마련하는 수밖에.”

용렬함과는 거리가 먼 지슈카조차 이런 답을 내놓았으니, 스베인도 딱히 뭐라 토를 더 달지 못했다.

그사이 시그리드와 저 ‘카타이의 타이간’ 사이 담판이 언제 시작하였냐는 듯 금방 파하였으므로,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게 되었다는 점이 그나마 소소한 위안이었다.

시그리드가 중국에 대해 조금이나마 들어 알게 된 데는, 오지 않을 먼 미래의 사람 헨리 키신저의 공이 컸다.

존 윌슨 중령이 – 당시는 대위 - 막 베트남에서 돌아왔을 무렵 시작된 핑퐁 외교 때문에 미군 내에서도 중국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그 덕에 윌슨도 겉핥기로나마 중국사를 접했던 것이다.

물론 검은 책에 등장하는 중국 이야기보다 시그리드 머릿속에 더 깊숙이 남은 것은, 욘의 어설픈 브루스 리 흉내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욘도 퍽 나잇값 못하는 사람이었다).

밍Ming의 환관이 이끌었다는 보물선 항해Treasure Voyage는 검은 책에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선 건장한 장년 사내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의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어딘가 그 모습이 노파와 같아 자신이 환관임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었고.

“무릇 황상의 큰 덕은 사해四海를 모두 아우르니, 어찌 하찮은 몸으로 그 위엄을 빌렸을 뿐인 본관이 인명 상하는 것을 기껍게 여기랴?”

간단한 통성명이 끝나고, 타이간, 아니, 태감 정화는 말했다. 그의 관화官話(만다린)는 하산을 거쳐 아랍어가 되었고, 베네치아 통역관을 거쳐 독일어로 바뀌었다.

“본관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이미 천조의 황은을 입었으며 장차 입조하기로 한 번국들이 이 땅에서 통상의 이윤을 취하는 것이다.”

사실 제노아도, 잉글랜드도 입조는커녕 대명에 대해 어떤 공식 입장도 밝히지 않았으나, 정화는 이 오랑캐들이 천조의 무한한 물산에 목마른 채 대명의 바닷가에 닿을 날이 올 것임을 굳게 믿었다.

그러니 마침내 만난 – 시그리드와 마찬가지로, 정화도 한눈에 상대의 정체를 파악했다 – 시그리드 앞에서 기정사실을 살짝 부풀려 말하는 것 정도는 조금도 양심에 걸리지 않았다.

“왕후여, 그대 또한 여인의 몸으로 전장에서 이름을 떨쳤다 들었다. 그러니 능히 짐작하였을 것이다. 그대의 군세가 본관의 천병天兵과 저 번국 장병들을 당해낼 도리는 없다.

설령 싸워 이길지라도, 그 대가는 왕후 그대의 작은 나라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값질 것이다. 이제 본관의 뜻을 그대 또한 명백히 알게 되었으니, 군사를 물리는 것이야말로 그 미약한 위엄을 지킬 계책임을 또한 깨달았을 터.”

서로 신의가 없으며 오직 이익만을 탐할 뿐인 오랑캐 부족들. 그러한 무리를 나누어 다스리는 법도는 비단 대명뿐 아니라 그 전의 달자韃子(몽골) 또한 잘 아는 도리였다.

북평(북경)에서 익힌 그 법도로써 정화는 능숙하게 판을 뒤바꿔놓았다.

이미 일대의 원주민들은, 동쪽 대양 너머에 신대륙 연합보다도 훨씬 강성한 세력이 있으며, 그 세력이 마침내 손을 뻗어 이쪽 해안에 닿았음을 알게 되었다.

신대륙 연합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결국 원주민들 또한 어느 쪽이 강성하고 어느 쪽이 미약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싸우지 않고 물러난다면, 확실히 인명도 아낄 수 있겠지요. 우리 연합이 아직 별 볼 일 없는, 유럽에 발 붙이지 못한 사람들끼리 얼기설기 이룬 정착지 몇 곳에 불과하다는 것도 드러나지 않을 테고요.”

이미 시그리드도 정화가 연합 내부의 사정에 밝다는 것은 눈치챘다. 정보가 새어나갈 길은 많았으니, 그중 일부가 잉글랜드나 제노아를 거쳐 정화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리라.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 그 심연에 삼켜지는 법. 허나 아직 니체는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신대륙의 동정을 값진 정보랍시고 바다 너머 주인들에게 고해바치는 수족들은 저들이 주변에 떠벌리는 신대륙 사정이 곧 어떤 파란을 몰고 올지 전혀 짐작치 못했다.)

“실로 그러하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이라면, 역으로 싸우지 않고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현명한 방책 아니겠는가?”

이제 정화는 거의 모든 것을 이루었다. 투슈판에서 평화롭게 물러나고, 대신 통상의 권리를 인정받으며, 그러한 조항 모두를 글로 남긴 뒤 ‘영락 16년, 흠차欽差 하서양下西洋한 태감 정화가 이를 보증하다’라는 문구만 남기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대충 불로장생의 처방이라 둘러대기 족한 무언가를 눈앞의 선녀인지 노파인지 싶은 여인에게 받아내면 그만이리라.

“하지만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여태껏 말씀하신 것이 요구사항의 전부라면, 지금으로선 저 또한 더 할 말은 없네요. 전장에서 뵙겠습니다.”

“왕후여, 정녕 일시의 굴욕을 참지 못하여 대계를 그르칠 작정인가? 한 번 군령이 떨어지고 장졸이 함께 죽음을 무릅쓰게 되면, 그만큼 화평을 흥정하기도 어려워진다는 것을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굴욕은 참을 수 있어요. 저는 위엄 같은 것을 따지는 사람도, 무슨 대단한 군주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태감, 그리고 태감의 권세를 빌어 이 땅을 짓밟은 사람들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이 땅을 떠나는 것은, 저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배신하는 짓일 거에요.”

정의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살아남은 자, 승리한 자뿐이다.

따라서, 신대륙 연합의 수장으로서, 자유를 외치며 수많은 이들을 이 땅으로 몰고 온 시그리드에게는 승리하지 않을 자유가 없었다.

정화와 헤어져, 저를 기다리던 얀 지슈카와 스베인에게 돌아온 시그리드는 말했다.

“어떤 치사한 수를 써도 좋아요. 저들을 이기기만 하면 됩니다.”

정면승부로 통쾌하게 적을 완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땅 사람들이 보아도 망신스럽고 치졸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 대가를 시그리드가 어떻게 감당할지, 그것은 얀 지슈카가 걱정할 영역이 아니었다.

“그리 하겠소. 호국경 각하.”

얀 지슈카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그리드는 콜그림에게 맡겨두었던 저의 궁니르를 집어들었다.

이미 두 사람은 따뜻한환영에서 함께 궁리하면서 준비한 바가 있던 것이다.

이 땅에서 벌어진 전투 중, 아마 가장 치사하고 비겁한 방식으로 거두는 승리가 되리라.

마지막 담판은 결렬되었으니, 이제 협상장은 숲과 도시 사이 벌판 전체요, 협상의 언어는 강철과 흑요석, 화살과 화약이 될 것이었다.

“저 왕후 서씨가 그토록 호언장담을 하였은즉, 필시 일전에 응할 것이다.”

정화의 결론에 위트레흐트의 지몬 또한 동의하였다.

지휘관과 장교 몇몇이 겨우 말이 통할 뿐, 지휘계통도, 싸우는 방식도 제각각 다른 명과 잉글랜드, 제노아 용병들은, 각각 자리를 잡고 달려오는 야만인 전사들을 저승으로 송별할 준비를 하였다.

“멀리서는 우리 천병의 총통으로 뒤흔들고, 더 가까이서는 그대들의 궁노弓弩로 살상하며, 그보다 더 가까이서는 다시 천병의 삭槊과 그대들의 단병短兵으로 무찌른다. 이 지남指南(지침)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승리는 마땅히 우리의 것이 되리라.”

멀리 숲속에서, 족히 수효 이천은 될 적이 제각각 함성을 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유럽인들의 눈에는, 그중 중앙에 위치한 신대륙 연합군만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카니엔케하카든 투슈판이든 절반쯤 헐벗은 것은 매한가지요, 이 땅의 장교와 귀족들이 차려입은 화려한 복식은 기독교인 눈에는 불경하고도 유치한 겉치장일 뿐.

“양익으로 퍼진다! 경계하라!”

그러나 아직 군령 전하는 말투는 그리 다급하지 않았다.

저쪽이 암만 수가 많다 한들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대열 가운데 맴돌았다.

이중 지기스문트의 십자군에 종군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기에, 그린란드 연대를 이끄는 얀 지슈카의 지략, 그리고 마녀 시그리드의 무시무시한 주술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진지하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예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이들의 장궁과 석궁은 각각 유럽 제일이요, 맹렬히 타오르는 태양은 다행히 그들의 등 뒤인 남쪽에서 내리쬐고 있었으니, 누비갑옷과 그 위 받쳐입은 갑주를 데우기는 할지언정 적을 겨냥하는 시야를 가로막지는 못했다.

“방포하라!”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헐벗은 야인 쪽으로 명군의 호준포가 불을 뿜었다.

운 없는 야만인 하나가 그대로 절명하고, 놀란 이들은 그대로 등 돌려 숲으로 도망쳤다.

“하하하! 꼴 좋다!”

“어디... 나도 한 번 해 봐야겠군. 너희는 아직 사격하지 마라!”

잉글랜드의 부사관 하나가 저의 센 장궁을 들곤, 곧장 시위를 당겼다.

팔구백 피트쯤 날아간 화살이 헐벗은 야만인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유럽에서라면 먼 거리 날아가며 힘을 잃어, 누비갑옷에도 허무하게 막혔을 화살이건만, 저 어리석은 이교도들은 갑옷이라는 것을 모르는지, 아예 윗통을 헐벗고 있거나 고작해야 천쪼가리 걸친 것이 전부였다.

이쪽 활의 사거리에 놀란 야만인들이 무어라 소리를 지르더니, 이쪽으로 다가오는 대신 옆으로 달려나갔다.

“멍청한 놈들. 그래봤자 대포밥이지.”

카타이 포수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저들 말로 시끄럽게 떠들며 대포의 위치를 옮겼다.

“아직 긴장을 놓지 마라! 그린란드 연대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저 숲 가장자리에서, 프라하 삼부작을 통해 널리 알려진 그린란드 연대의 깃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다!”

병사들이라면 모를까, 용병 장교들은 저 깃발 아래 누가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방포하라!”

쉬익- 소리 내며 날아간 대포알은, 연대기에서 일백 보쯤 못 미친 곳에 떨어졌다.

이쪽의 사거리만 알려준 셈이었으나, 다음 번에 맞추면 그만이라 여겼기에 누구 하나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엇, 몇 놈 앞으로 떨어져 나왔습니다!”

눈 좋은 몇몇이, 그 대포알 날아온 곳 근처를 지나 산개한 채 다가오는 그린란드 연대원들을 발견했다.

두셋씩 나뉘어 몸 숙인 채 다가오는 것은 다 합쳐봐야 스무남짓한 수의 적 보병.

그러나 그중 하나는 아주 눈에 잘 띄었다.

“흰머리 계집! 마녀다! 마녀가 저기 있다!”

“뭣? 어디?”

앞서 저의 장궁 솜씨를 뽐냈던 부사관이, 이번에야말로 평생 놀고먹을 상급을 타내겠노라며 활을 겨누었다. 시그리드 리프트라사의 목숨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기에 부사관의 세계는 너무 좁고 얕았다.

그저 적의 수괴, 악명 높은 마녀, 교회에서 바빌론의 탕녀라 부른다고만 알고 넘어갈 뿐.

“바빌론의 탕녀고 뭣이고, 머리가 저리 하얘서야 과녁이나 되기 딱 좋지 뭐.”

숨을 훅 들이마시고-

화살 날아가는 쌕- 소리 대신, 탕-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가래 끓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목덜미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부사관.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산개하여 다가온 그린란드 연대원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궁니르’를 들고 있는 시그리드 하나를 제하면 나머지는 모두 일반 머스킷이었기에, 사거리 한참 바깥에서 쏘는 탄환에 재수없게 얼굴이나 다른 급소를 맞은 이 한둘을 제하면 피해가 없었다.

“타이간 경! 대포는 뒀다 뭐 합니까!”

정화가 알아들을 리 없음을 알건만, 저들 근처까지 탄환이 날아온다는 데 놀란 유럽 용병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외쳤다.

그러나 포가도 없이 그저 땅 위에 받침대 세워둔 게 전부인 호준포가, 적 대열이라면 모를까 점점이 산개하여 총을 쏴대는 적을 명중시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정화가 방포를 금했을 때는, 이미 총열의 한계까지 사격을 마친 그린란드 연대원들이 도로 숲속으로 돌아간 뒤였다.

“빌어먹을...”

“저놈들 저거, 머릿수도 얼마 안 될 텐데 그냥 우리가 공격하면 안 됩니까? 저 숲이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유럽의 전투에서, 먼저 앞으로 달려나온 궁수들이 기선 제압을 위해 몇 발씩 쏘고 저들 진형에 복귀하는 것은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종종 있는 일이었다.

물론 궁수가 대부분인 저들 대신, 창과 칼로 무장한 저 카타이 군사가 앞서 돌격할 것을 알기에 더욱 맘 편히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기다려라. 우리 대장이라고 그런 생각을 못 할 리 없으니까. 타이간 경은 말할 것도 없고.”

“앗? 저기, 동쪽을 보십시오!”

“어엇?”

그린란드 연대가 (가용한 모든 총병을 긁어모아) 시선을 끄는 사이, 대포 몇 발 얻어맞고 도망치는 줄 알았던 원주민 부대가 어느새 전장 옆으로 새나가고 있었다.

투슈판 북쪽의 들판에서 동쪽으로 빠져나간다면, 나오는 것은...

“배! 우리들 배가 위험하다!”

“젠장! 잉글랜드군! 전원 행군 준비!”

정화의 지시를 기다릴 겨를도 없이, 신속하게 명령이 내려졌다.

이제라도 빠르게 달려간다면, 저들이 부두에 닿기 전 먼저 도착해 대열을 갖출 수 있을 것이었다.

“서쪽! 서쪽으로도 간다!”

반면 서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 또한 문제였다. 서쪽의 텅 빈 들판을 우회하여 도시로 들어간다면, 성벽 없는 도시가 빈집털이 당하는 것은 뻔한 수순이었으므로.

다행히 정화는 그들 모두의 생각보다 노련한 지휘관이었다.

병력은 금방 셋으로 나뉘었고, 잉글랜드와 제노아 용병은 각각 도시와 부두 쪽으로 향했으며, 명군 역시 소부대로 나뉘어 그들 뒤에 따라붙었다.

정석에 가까운 지휘였으나, 뜻밖의 상황에서 정석대로 군을 운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

하지만 정화가 예상하지 못한 일, 그리고 시그리드의 미래 지식과 원주민들과의 동맹, 얀 지슈카의 탁월한 지휘력이 하나로 합쳐질 때 비로소 벌어질 수 있는 일이 그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헉, 헉!”

“도착했다! 모두 전, 전열을 갖춰라!”

“빌어먹을! 저놈들 사거리 안에 들어왔잖아! 다들 장전! 석궁 장전!”

부둣가에 도착한 잉글랜드군, 그리고 투슈판의 서쪽 경계에 도착한 제노아군이 달려드는 투슈판과 테노치티틀란, 테츠코코 군대를 요격하려던 차.

멀리 북쪽 숲속에서, 유럽인들에게는 낯선 카니엔케하카 사람들의 새된 함성이 들려왔다.

“뭐야?”

“야만인 놈들이 도망친다!”

“우리가 이긴 건가?”

그러나 그들이 방금 전까지 머물던 도시 북쪽에서도 곧 소집을 지시하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할! 그놈들, 다시 북쪽 들판으로 갔구나!”

군을 셋으로 나누면 그만큼 각개격파의 위험도 늘어난다는 것은, 꼭 군사교육을 받지 않았더라도 칼밥 좀 먹은 용병이라면 다들 알고 있었다.

궁시렁대면서도 다시금 속보로 이동할 준비를 하는 수밖에. 북쪽의 본대가 궤멸하여 대포를 모조리 잃는 사태는 막아야 했으니.

그렇게 북쪽으로 돌아간 용병들은, 원주민들이 북쪽을 공격하는 시늉만 했다가 도로 숲속으로 돌아가버렸음을 알고 허탈함에 주저앉았다.

“앗? 또 온다!”

“아니, 대체 저놈들은 명예고 뭐고 모르는 건가! 뭔 전쟁을 이 따위로 해!”

괴성을 지르며 돌격하는 원주민들. 그러나 장궁은커녕 대포 사거리에 닿기도 전에 이번에도 어김없이 각각 동서로 나뉘어 달려나갔다.

참다 못한 기사 하나가, 얼마 없는 말 위에 올라 돌격을 시도했다가 그대로 멀리서 날아온 탄환에 명을 달리하였다.

사람 죽은 것이야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그 잠깐 동안 숨을 돌릴 수 있었으니 다행이지 않을까. 무거워지는 몸을 일으키며 용병들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들 물 마시는 걸 잊지 마라. 날씨가 왜 이 모양인지, 참.”

“예, 예. 물론입죠.”

“어이, 피에트로. 일어나라.”

“아, 알겠습니다... 어어. 어?”

어느새 때는 해가 슬슬 기울기 시작했지만 그만큼 매서운 지열이 올라오는 오후 네 시.

“피에트로! 정신 차려라! 피에트로!”

유럽의 건조한 여름과 달리, 동아시아와 같이 습윤한 무더위. 익숙하지 않은 더위에, 경무장이라 해도 다들 누비갑옷씩은 차려입고 있던 용병들은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물! 입 열고 물을 부어라! 얼른!”

유럽의 여름에 흔한, 탈수로 발생하는 일사병을 생각한 노병과 지휘관들은 저들의 상식 선에서는 합당한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탈수가 아닌, 열배출 자체의 문제로 발생하는 열사병은 사람과 함께 덩달아 뜨거워진 물을 부어넣는 정도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이 지역에서 평생을 살아왔던 투슈판 군사들, 그리고 이곳 해안보다야 훨씬 서늘하지만, 그 대신 평생을 두 발로 걷는 것 외에 다른 운송수단을 알지 못하며 살아왔던 억센 아스테카와 테츠코코 사람들.

다른 동물들보다 지구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두꺼운 가죽과 털을 포기하고 맨몸으로 서서 걸었던 조상들의 지혜를 멀리하고, 금속과 천으로 된 껍질을 다시금 두른 어리석은 후손들은, 지구력으로 상대해선 안 될 적과 상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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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 역사의 콩키스타도르들도 비슷한 난관을 겪었습니다. 작중보다 한 세기 뒤에 도착한 콩키스타도르들 역시 총열 마모와 화약 소모를 감당하지 못했고, 화약무기의 부족을 석궁으로 벌충하였지요. 물론 레콩키스타를 통해 다져진 군사전통과 탄탄한 부사관 계층이 존재했고, 철제 갑옷과 도검, 말 덕에 누릴 수 있던 근접전에서의 압도적 우위 등이 있었기에 – 즉, 굳이 원거리에서 화약무기를 쓰지 않더라도 원주민 보조병만 있으면 충분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기에 - 이러한 문제는 신대륙 연합에 비해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았습니다.

2. 양각대를 놓고 쏘는 호준포虎蹲砲는 포르투갈에서 노획한 불랑기포가 더 널리 쓰이기 전까지 명이 주력으로 사용하던 지상 화포였습니다. 받침대를 놓고 그 위에 포신을 올린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웅크린 모습과 같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지요.

정화의 함대가 정확히 어떻게 무장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수준 높은 화약무기를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적극적으로 사용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전투를 벌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들이 나름대로 화약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3. 1971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를 계기로 미중 양국이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핑퐁 외교’는, 1972년 닉슨의 방중과 중국의 대소련 봉쇄 동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는 한국과 일본, 대만 등에도 엄청난 파급효과를 몰고 오게 되지요. 거의 같은 시기, 브루스 리, 즉 이소룡 또한 짧지만 굵은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정무문, 맹룡과강 등 그의 대표작들은 모두 이 시기에 개봉하여 큰 인기를 얻었지요.

4. 원 역사에서 콩키스타도르들이 주로 전투를 벌였던 곳은, 멕시코 분지와 안데스 산맥 등 비교적 고산지대에 위치하여 기후가 그나마 온대에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예컨대 코르테스의 경우, 멕시코 분지 바깥에서 싸웠던 것은 그를 추격해온 같은 유럽인 군대와 전투를 벌였을 때뿐이었지요.

현대 기준으로, 멕시코 시티(테노치티틀란 일대)의 6월 평균 최고기온은 26도지만, 작중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 근처인 베라크루스의 6월 – 우기가 시작하는 달 – 평균 최고기온은 32도로 서울보다 높습니다. 대략 이런 무더위가 9~10월까지 이어진다고 보면 됩니다. (참고로 서울의 7~8월 평균 최고기온은 28~29도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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