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83화 (83/116)

늑대처럼 굶주린 (4)

19. 늑대처럼 굶주린 Hungry Like The Wolf (4)

1406년의 그린란드에서 열사병이라는 개념을 상상할 수 있던 사람은 이방인 욘과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 이렇게 단 둘뿐이었다.

시그리드가 그린란드에서 열사병을 겪을 일이 있겠냐고 묻자, 욘 답하길,

‘방독면에 화생방보호의까지 모두 차려입고서 한 30분만 구보를 하면, 북극권에서도 충분히 열사병을 경험할 수 있단다.’

라고 하였으니, 실제로 1979년 여름에 툴레 기지 소속 부사관 몇몇이 방사능 오염 현장에서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¹.

아무튼 그 가르침을 인상 깊게 들은 시그리드가 배움을 적극적으로 실천한바, 명-잉글랜드-제노아 연합군 전체 전력 중 사분의 일이 싸움다운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열사병으로 쓰러지기에 이르렀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고작 저런 술수에 넘어간다는 말인가?”

“북적北狄이든 서융西戎이든 오랑캐의 어리석음은 매한가지로구나!”

이곳과 그나마 여름 날씨가 비슷한 복건·절강 바닷가에서 태어나 무더위에 익숙했던 군사들은 혀를 끌끌 찼다. 그냥 땡볕을 못 이겨 쓰러지는 이들과 땀으로도 몸이 식지 않아 쓰러지는 이들 사이의 차이를 모르고서 무작정 미지근한 물만 먹이고 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으랴².

“아무리 어리석다 한들, 저들은 본관을 통해 황상의 은덕을 입은 무리다. 너희가 저들을 구제할 방도를 알고 있다면 즉시 고할지어다.”

아랫사람들 흉보는 소리를 들은 정화가 즉시 명을 내렸다. ‘어리석은 서융 오랑캐’ 중에 저들의 상관인 정화도 들어간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뱃사람 출신 병사들은, 그제야 입단속을 하면서 방책을 고해바쳤다.

“각하,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정화와 함께 본진에 남은 덕에 무사했던 위트레흐트의 지몬이 조급하게 물었다.

여전히 저들은 수가 많았고, 반면 이쪽은 쓰러진 이들과 졸지에 그들을 간호하게 된 이들까지 모두 전력에서 이탈하며 큰 공백이 생겨버렸던 것이다.

개중 조금 소문에 밝던 자들은, 벌써부터 ‘하얀 마녀의 사악한 주술’이 저들을 덮쳤다며 수군대곤 했는데, 아는 게 병이라면 그런 수군거림은 역병이었다.

허나 그렇게 전의가 떨어지든 말든, 정화는 냉정하게 지시했다.

“갑옷을 벗고, 이곳 본진을 굳게 지켜라. 또한 우리 군사들 중 저와 같은 서병暑病³에 밝은 이들 몇몇을 내줄 테니, 그 처방으로 쓰러진 이들을 보살피도록.”

“예? 하면 저희 배들은...”

“부두의 배들에는 이미 지시를 내렸다. 모두 포구에서 일 리쯤 떨어진 곳에 새로이 닻을 내리도록 하였으니, 저들이 하늘을 날지 않고서야 우리 배에 불을 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언뜻 들으면 파부침주破釜沈舟의 계책으로 들릴 법도 했지만, 정화의 부하들은 바다를 고향으로 삼다시피 한 무리들이라, 설령 배가 일 리가 아니라 십 리쯤 떨어진 곳에 정박한다 한들 자맥질로 그곳까지 닿을 수 있었다.

잉글랜드나 제노아 사람들 중에는 그만큼 수영에 능통치 못한 자도 많겠지만, 오랑캐 사정 따위를 그만큼 깊게 헤아려줄 것까지야 있겠는가.

배를 지키던 선원들도, 동포를 아끼는 마음보다 야만인들이 저들 배에 올라타거나 불을 지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훨씬 강했기에 순순히 정화의 지시를 따랐다.

“너희 장졸들이 애써 움직인 덕에, 적의 허점 또한 알게 되었다. 천병天兵을 움직여 싸움의 판세를 뒤엎을 터이니, 경거망동치 말고 이곳을 지키도록.”

정화는 잠시 서녘 하늘을 고쳐보았다. 남쪽 땅일수록 여름 해는 길어지기 마련. 유시酉時(17:30~19:30)가 다 지날 때까지도 해는 하늘에 걸려 있을 것이다.

고개를 다시 북쪽 숲으로 돌리니, 대신 보이는 것은 의심하는 지몬의 눈빛.

남은 한두 시진 내에 결착을 보려면, 알량한 신의나마 조금은 더 이어가야 했다. 정화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저의 계책을 설명했다.

”화이華夷를 막론하고 모든 군대는 한 번 회전會戰으로 승패 겨루기를 원하지, 저 야인들처럼 까마귀 날듯 우르르 오가며 상대의 기운 다하기를 기다리지는 않는다.“

정화가 적의 움직임을 예측하지 못한 까닭은, 그것이 실로 기상천외한 전법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제정신 박힌 군대라면 그런 전법을 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찌 그러한가? 무릇 싸움이란 상대보다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어 위압함에 뜻이 있지, 다 죽여 없애는 데 뜻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지금 적들이 드러내보인 저러한 방식으로 승리한다면, 설령 이길지라도 이긴 것이 아니요, 승리의 영예는커녕 망신과 더 큰 의심만을 사게 될 터.

스스로 정화의 군대를 정공법으로 이길 길 없음을, 새로이 바다 건너온 무리가 앞서 건너온 무리보다 훨씬 강성함을 이곳 야인들 앞에서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지금 적의 용병은 기책에 의존할 뿐이니, 정병正兵으로 싸우면 곧장 무너진다는 것을 적장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환을 감수하고 고육지책을 베푼 것이리라.”

운남의 토병土兵부터 막북의 몽골까지, 남해의 마자파힛과 미스르의 맘루크까지, 지금껏 정화가 본 모든 군대는 다 그러했다. 맞서 싸우는 것을 명예롭게 여기며, 도망쳐 성에 숨거나 질질 싸움을 끄는 것을 비겁하다 말했다.

지금 저들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오가는 도중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 쇠뇌와 화살에 맞아 죽는 이들이 꾸준히 나왔고, 신호를 받고 물러날 때도 엉거주춤 뒷걸음질하곤 하였으니, 이 땅에서도 저러한 방식의 싸움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정正이 부실하여 기奇에만 의지하는 군세는,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시늉만으로도 능히 궤주시킬 수 있느니.”

거짓 패주는 조금만 계책이 어긋나면 진짜 패주로 변하기 마련.

그 약점을 노린다면, 전세를 만회하는 것은 충분히 가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저들의 허를 찌르는 것이다.”

적의 본진이 있을 북쪽 숲을 노려보는 중년 환관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투슈판 북쪽의 밀림에는 언제고 낙뢰로 불이 크게 나서 생긴 공터가 하나 있었다. 빠르게 그 세력을 되찾는 숲으로 인해 매년 좁아지는 공터였지만, 신대륙 연합군의 임시 지휘소로 삼기에는 아직 충분히 넓었다.

“테노치티틀란과 테츠코코 군사들은 아직 잘 버티고 있소. 이대로 한두 번 더 움직이면 우리도 지치겠지만.”

저격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말을 타는 대신 직접 두 발로 뛰었던 네사왈코요틀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우리는 아직 멀었소. 우리가 평생 살았던 땅을 밟으며 우리가 평생 머물던 도시를 탈환하려 싸우는데, 이 정도야. 다만 볼멘소리가 조금 나오곤 있는데, 그 정도야 싸움 끝난 뒤에 고민할 일이라 하겠소.”

여차하면 도시 안쪽까지 파고들 작정으로 서쪽을 오가던 투슈판의 틀라토아니 콰우테목이 말했다. 네사왈코요틀보다 나이는 두 배 이상 많았지만, 평생 이 무더운 바닷가에 살았기에 오히려 숨은 멀쩡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지슈카는, 투슈판 토박이들의 도움을 받아 급조한 야전 지도를 바라보았다. 형편없는 지도였지만, 그 옛날 숲의 도적 무리들의 어설픈 뜬소문만 가지고도 귀족들의 성을 몇 차례나 함락시켰던 지슈카에게는 마치 전장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과 같이 보였다.

“이제 한두 번만 더 움직이면 될 것이오.”

중화사상에 대해 알고 있던 시그리드가 준비한 계획의 원안은, 유럽 용병들을 먼저 지쳐 쓰러지게 만든 뒤, 남은 명군과 쓰러져서 이탈한 유럽 군대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었다.

저들이 오랑캐라고 멸시하는 유럽 용병들은 편하게 드러누워 있는데, ‘하늘의 나라Celestial Kingdom, 天朝’에서 온 저들 홀로 야만인들에 맞서야 한다고 하면, 차라리 이쪽 야만인들을 저쪽 야만인들에게 팔아넘기고 저들은 멀쩡히 빠져나가는 쪽을 선택할 공산이 높았으니까.

그린란드 연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지휘관이 아닌 지슈카의 부하로서 싸우던 시그리드가 임시 지휘소로 쓰이고 있는 숲속의 작은 공터로 달려온 것은 그때였다.

“배가 항구를 떠나 강 반대편에 정박했어요. 쓰러진 용병들은 모두 도시 안쪽으로 옮겨지고 있고요, 부두에 있던 수레와 나무 궤짝도 모두 도시 안쪽으로 옮기고 있어요.”

전투 초장에 라이플 저격으로 적의 시선을 끄는 임무를 맡았던 시그리드는, 들고 온 라이플이 모두 망가지자 숲의 가장자리에 있는 나무 위에 올라가 지슈카의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피고 있었다.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잉글랜드와 제노아 용병들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도 시그리드였다.

그 덕에 정화의 대응 또한 놓치지 않고 빠르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신속하면서도 적절한 대응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타이간이라고 했던가. 제법 대단한 장군이로군. 이렇게 빠르게 대응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지난번에 수레를 만들지 말 걸 그랬소.”

저들이 도시로 들어가는 길목을 막기 위해 쓰고 있는 것은, 지난날 ‘꽃의 전쟁’을 위해 최루가스를 만들던 시절, 최대한 빨리 고추와 술을 모으기 위해 만들었던 수레였다.

잠깐 딴얘기로 새는가 싶더니, 금방 본론으로 돌아온 지슈카가 묵직한 결론을 내렸다.

“적이 곧 이 숲으로 돌격해올 것이오.”

폭탄과 같은 결론에 좌중의 분위기는 심각해졌다.

“우리의 계책에 그토록 빠르게 대응할 만큼 뛰어난 장군이라면, 이 숲속으로 아무런 대책 없이 돌격을 지시하지는 않겠지요.”

“그 대책이 무엇이든, 우리가 대응할 수는 없을 것 같소만.”

지슈카가 생각에 빠진 사이, 몇 번이고 날아드는 화살을 보며 저 이방인들의 강력함을 체감한 네사왈코요틀과 콰우테목이 한 마디씩 했다.

그들이 이 숲을 본진으로 삼은 것은, 저들이 짐짓 두려워하며 함부로 발을 들이지 않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적이 피해를 감수하고 숲으로 돌격해온다면, 콰우테목 말마따나 강 대 강으로 부딪히는 것 외에 대응할 방법이 없는 듯했다.

유럽 용병들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갑옷을 차려입었고, 누산타라(現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일대)를 누비며 열대의 밀림에서 싸우는 데도 도가 튼 명의 정예 수군.

꼭 맞붙어보지 않더라도, 그들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외눈을 번뜩 뜬 지슈카가 나지막하게 지시를 내렸다.

“다시 한 번 숲에서 빠져나가, 도시의 양옆을 위협하는 시늉을 하시오.”

“하지만 별 효험이 없을 텐데...”

“그렇소. 도시 서쪽은 막혀있을 테요, 동쪽의 배들은 이미 항구를 떠나 있겠지. 그러나 저들은 우리가 망원경으로 그것을 눈치챘다는 것을 모르지 않소이까.

당분간은 적의 예상대로 움직여줘야 할 것이오.”

유럽의 그 어떤 국가에도 비할 바 없이 미약한 신대륙 연합. 그러나 그런 연합은, 시그리드 덕에 바다 건너의 그 어떤 군주도 지니지 못한 강점을 지니게 되었다.

지슈카의 몫은 그렇게 얻은 강점을 어찌하면 전장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다룰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적장이 비로소 그 예상이 빗나갔음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발을 뺄 수 없게 된 지 오래일 것이오.”

밀림 사이로 파고들어오는 오후의 태양은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

“태감의 명이시다. 야인들을 쫓아 숲으로 들어간다.”

무더위에 익숙하여 아직껏 멀쩡하던 정화의 원정대 병사들은, 마침내 군공을 세울 기회가 찾아왔다는 데 열광했다.

“마침내!”

“가서 다 쓸어버립시다! 저깟 야인 따위야.”

“그 서씨라는 선녀를 붙잡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번 항해의 목적은 바로 불로불사의 선약仙藥을 얻어 황상 폐하께 바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이번 항해에서 공을 세운다면 제후의 봉작을 받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리라. 태감 정화는 결코 부하들의 공을 빼앗거나 감추는 상관은 아니었다.

“아니, 숲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적의 본진을 압박하기 위함이다.”

얀 지슈카의 명성을 들어 알던 정화는, 지슈카가 설령 허점을 찔린다 할지라도 가만 당하고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허나 연약한 군사로 강한 군사를 대적하려면,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물러나면서 시간을 끄는 수밖에 없을 터.

그동안 제대로 지휘를 할 수 없을 테니, 멋모르고 좌우익으로 뻗어나온 원주민 부대를 패주시키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과하게 들어갔다가는 도리어 복병에 당할 수 있으니, 너희는 반드시 한 치 어김이 없이 군령에 따라야 할 것이다.”

살짝 김이 빠진 병사들. 그러나 선녀를 붙잡지 못할지라도 수급은 거둘 수 있을 것이요, 그만하면 상급은 따놓은 것과 진배없었다.

“온다!”

북쪽 숲의 양옆 가장자리에서, 다시 한 번 야인 무리가 우르르 몰려나왔다.

“하, 태감의 뜻대로 이루어지는구나! 우리도 가자!”

병사들도 금방 기세를 되찾고는, 누가 따로 지시하지도 않았건만 일전에 그러했듯 밀림에 들어갈 때 취하는 산개 진형을 갖추었다.

지금 열심히 동서 양쪽으로 뻗어나가는 야인들은, 곧 그들이 위협할 배들은 강 건너편으로 자리를 고쳐잡았고, 고을로 들어가는 골목들은 죄다 틀어막힌 채 기진맥진했지만 아직 병기는 날카로운 오랑캐 군사들에게 방비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리라.

그리고 어찌하면 좋을지 숲속의 중군中軍에 연통을 보내본들, 돌아오는 소식은 없을 것이요, 마침내 저들이 패배했노라 지레짐작하곤 그대로 궤주할 것이었다.

“앞서 보았던 그 총통을 쏘며 항거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 수효가 많지 않으니, 당황하지 말고 계속 나아가라!”

“예, 나리!”

“잊지 마라. 적도 그리 많지 않으나, 우리 또한 한줌에 불과하다. 이 드넓은 숲에서 진형이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게 되니, 반드시 하나로써 움직여야 한다!”

대열은 숲의 가장자리. 앞서 그 ‘선녀’가 이끄는 몇몇 포수가 나타나 시선을 끌었던 곳에 닿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그저 나무와 나무, 그리고 그사이 수풀이 전부였다.

“도망친 건가?”

“총통이 다 망가졌거나, 화약이 다 떨어진 것일지도.”

“중하지 않다! 잡담은 관두고, 이대로 들어간다!”

이 땅의 야인들은 실로 어리석어, 쇠는커녕 구리조차 다루지 못한다고 하였다.

투슈판이라는 야인 고을을 토벌할 때 보았던 화살 또한 흑요석 촉을 달았을 뿐이요, 활 또한 고작해야 천옷이나 가죽옷을 뚫기 위한 것이라 그리 세지 않았다. 그러니 저 숲에서 적을 마주친다 한들, 그 적들이 어찌 그들의 갑옷을 뚫을 수 있겠는가?

그때, 새 우짖는 소리 같은 무언가가 울려왔다.

“적이다!”

“쳐라!”

허나 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대신 날아드는 것은 화살.

“하하! 역시 갑옷을 못 뚫는군!”

“저기 있다!”

풀숲이 들썩이더니, 이 땅의 야인들보다도 더 헐벗은 듯한 야인 몇몇이 놀라, 뭐라 새되게 소리지르며 도망쳤다.

“쫓아라!”

일단 적의 본진 근처까지는 뚫고 들어가야 할 것이요, 솔직히 저들 또한 군공이 탐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명군 군교들 또한 조금은 더 추격해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침 알맞게 서쪽으로 기운 태양은, 나무 사이 곳곳을 붉게 밝혔고, 삼삼오오 흩어져 있던 야인들은 발각될 때마다 약한 활로 화살이나 몇 발 날리곤 도망치는 게 전부였다.

허나 암만 약하다 한들 화살은 화살이라, 조금씩 다치는 이들도 나오곤 했다. 사람 죽이기는 한참 모자라고, 도리어 짜증과 노여움만 북돋았지만.

“쳐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저기 있다! 저기 또 있어!”

“쏴라! 우리 활은 뒀다 뭐 하나!”

언제부턴가 그들 주변에는, 사람 소리 같지도 않은, 말 그대로 금수같은 우짖는 소리가 가득 찼다. 방위도, 수효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그러나 잘 들어보면, 그중 유난히 시끄럽거나 더 새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이 있었다.

“으억!”

“나리! 나리!”

“저쪽이다!”

“빌어먹을! 놈들 중에 쇠뇌 쏘는 놈이 섞여 있다!”

큰 나무둥치를 돌자마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적을 마주친 누군가가 외쳤다.

그리고는-

“커헉!”

야인들은 쇠붙이 따위 모르는 무지한 족속이어야 할 텐데.

간혹 조금 더 나은 야인 무리가, 구라파 땅에서 건너갔다는 족속이 한 줌 있을 뿐일 텐데.

쇠뇌를 든 보헤미아인과, 하루 사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이 숲에 익숙해진 카니엔케하카 전사들.

한쪽이 눈과 귀가 되고, 다른 한쪽은 무기를 든 손이 되어 움직이는 이 조합은, 정화뿐 아니라 투슈판을 점령한 이들 중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으리라.

“이런 얘기는 없었는데-”

따뜻한환영에서 급조한 쇠뇌. 비록 사거리와 위력은 신통찮지만 밀림에서 벌어지는 근거리 교전에서는 족히 갑옷을 뚫을 수 있는 그 쇠뇌에 뱃가죽 뚫려 쓰러지는 병사. 만리타향에서 고혼이 되어가는 이들은 그저 억울할 따름이었다.

“놈들이 군교 나리들을 노리고 있다!”

“젠장! 어디 있는 거냐!”

어느 군대를 가든 지휘관은 드러나기 마련인데, 목숨이 귀한 만큼 비싸고 좋은 갑옷을 차려입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지위를 드러낼 방편이 장신구와 옷차림 외에 별로 없던 카니엔케하카 사냥꾼들의 매서운 안목에, 명군 군교들은 너무나 잘 드러나는 사냥감이었다.

“자라랑 붙어먹을 놈들 같으니! 당장 모습 드러내지 못할까!”

통하지도 않을 관화로 외쳐대는 군교를 발견한 전사가 저와 함께 다니는 보헤미아 용병의 어깨를 툭툭 때리며 말했다.

“저쪽! 5시 방향, 시끄러운 놈, 적 장교!”

“알겠소!”

‘시계’가 뭔지는 모르지만 얼추 12시로 방향 표시하는 법은 체득한 카니엔케하카 전사들의 지시에, 빠르게 쇠뇌 쓰는 법을 다시 익힌 보헤미아 용병들의 손길이 뒤따랐다.

“아악!”

“저쪽이다! 저쪽이야!”

어지러이 외치는 소리. 그러나 숙련된 길잡이이기도 한 카니엔케하카 사냥꾼과, 그 길잡이 덕을 보는 석궁수를 따라잡기는 난망할 것이었다.

“뒤로 빠진다! 나 따라오시오!”

하지만 명군 또한 만만치는 않았다.

“당황하지 마라! 하나로 뭉쳐라!”

“방패 들어!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잖으냐!”

군교가 몇 명 죽고, 병사들 또한 십수 명이 죽고 다쳤으나, 그뿐.

“이대로 적을 추격한다! 적 본진을 쳐서 무너뜨리면 그만이다!”

“놈들은 그저 우리 발목을 붙잡으려 할 뿐이야! 놀아나지 마라!”

군교가 죽으면 수적 노릇 오래하며 경험을 쌓은 노병이 그 자리를 갈음하고, 동무가 죽으면 두려워하는 대신 원수 갚겠노라며 마음가짐을 고쳤다.

“야인들이 북쪽으로 도망치고 있다! 그쪽에 중군이 있는 것이다!”

“가자! 먼저 간 형제들 원수를 갚자!”

야인들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하지만, 그들이 도망친 길을 추격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시종일관 치사한 수를 쓰면서 이쪽에 피해를 강요하는 야인들. 그들이 딴에는 치졸하나마 치열한 저항을 하면서 그들 발목을 잡는 것처럼 여겨졌으므로, 누구 하나 이것이 유인책이라 짐작하지는 못했다.

“찾았다!”

마침내 명군의 눈에, 끝없을 것만 같던 밀림 한가운데의 공터가 들어왔다.

이 울창한 숲속에 진영을 차려야 한다면, 이곳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살아남은 군교 중 가장 고참인 자에게 명군 모두의 눈길이 쏠렸다.

분명 이들의 목적은 적을 궤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후방에 남은 본진 군사들이 적을 패주시킬 수 있도록 적 중군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야 황급히 도망칠 채비를 하는 듯한 적의 모습은, 저들이 압박을 받기는커녕, 숲에서 벌이던 그 치사한 짓거리가 천병의 앞길을 막을 수 있으리라 여기면서 자신만만하게 버티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그간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내세울 수급도, 전공도 없이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지금 저 허둥대는 모습이 우리를 유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 야인들이 아무리 숲의 지리에 밝다 한들 야인일 뿐입니다. 때와 장소를 이토록 정확하게 맞출 수 있을 리가요.”

“소관 생각건대, 무슨 천책상장天策上將이 아니고서야 서로 말이 다르고 습속이 다른 야인 부족들끼리 이처럼 합을 맞추도록 계략을 마련할 길은 없을 것입니다.”

본인이 확고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변 다른 군교들의 의중을 물었을 때부터, 답은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좋다! 쳐라! 빠르게 들이쳐라!”

“가자! 이대로 놈들을 몰아낸다!”

공터 양옆으로 이미 일찌감치 도망쳐와 기다리고 있던 카니엔케하카 전사들.

그리고 공터 중앙에서 허둥대는 시늉을 하면서, 적을 노리고 있는 호우프니처 화포를 감추고 있던 신대륙 연합 사람들.

이번에야말로 싸움을 끝내겠다며 공터로 돌격하는 명군은, 정말로 이번 싸움을 단번에 끝내버리게 되었다.

지난번처럼 똑같이 한 무리는 도시 서쪽으로, 다른 무리는 도시 동쪽 포구로 향하던 야인 무리는,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무작정 정화가 이끄는 본진 근처까지 달려왔다.

종일토록 쏘다닌 탓에 지친 기색 역력하여 정화의 눈에까지 선명히 보였다.

더구나 저들끼리도 보조가 맞지 않았으니, 동쪽에서 먼저 한 무리가 나타나고, 한참 뒤에야 서쪽에서 다른 무리가 우르르 몰려왔던 것이다.

미리 호준포를 옮겨두었던 정화가, 총통 사격을 필두로 돌격을 지시하여 각개격파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딱히 제대로 붙어보지도 않았건만, 화포 몇 번 쏘고 몇 남지 않은 장궁수와 석궁수들이 화살 조금 날리자마자 소리지르며 도망쳤으니, 실로 대승이 눈앞에 있는 듯하였다.

“필시 중군을 노리며 숲으로 향한 군세가 그 뜻한 바를 이룬 것이리라.”

숲속에서 계속 지시가 내려졌다면, 적어도 이렇게 형편없이 패주하는 일은 없었으리라.

“숲으로 들어간 유군遊軍으로 하여금 본진으로 돌아오도록 하라.”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정화는 지시를 내렸다. 곧 우는살이 시위에 매겨지고, 하늘을 갈랐다.

그러나 한참 지나도록 돌아오는 이는 없었다.

마침내 해가 서쪽으로 완연히 기울어, 땅거미가 내릴 즈음 숲속에서 인영이 나타났건만.

숲속에서 모습 드러내는 것은, 아침에 보았을 때와 그 수효가 별반 다르지 않은 적군.

그리고 수가 절반으로 줄어든 채, 포로로 잡혀 나온 명나라 군사들.

“백기를 올려라.”

정화는 자신에게 다른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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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생방보호의는 외부 오염원으로부터 작전요원을 보호하기 위해 비투과성 재질로 제작되기 마련입니다. 원가 절감을 위해서는 고급 소재를 쓰기보다는 그냥 두꺼운 누비옷으로 만드는 쪽이 더 경제적이기에, 착용하는 입장에서는 영 불편하고 더울 수밖에 없지요.

툴레 기지 근처의 방사능 오염 현장이란, 1968년 B-52 추락사건으로 발생한 방사능 오염지대를 말합니다. 1968년, 핵무기를 싣고 일상적인 초계임무 – 당시 미 공군 작전개념으로는 이게 평시 태세였습니다 – 를 수행하던 B-52 폭격기가 기내화재로 인해 툴레 기지에서 약 12km 떨어진 빙상에 추락했는데, 이 폭격기에는 1.1메가톤급 B28 수소폭탄 4기가 실려 있었지요. 폭격기가 화재로 폭발하면서 폭탄 일부도 함께 파열되었고(다행히 기폭되진 않았습니다) 주변 빙상에 광범위한 방사능 오염지대를 형성했습니다. 또한 열기로 빙상이 녹으면서, 미처 파열되지 않은 폭탄(들)은 북극해로 가라앉았다고 추정됩니다.

1995년 덴마크 정부의 진상규명 노력에 의해, 당시 제독작업에 투입된 덴마크 인부 1천 5백명 중 최소 410명이 암으로 사망했음이 드러났는데, 당시에 얼마나 광범위하고 심각한 방사능 오염이 발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군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었기에 – 다만 1968년 당시에는 덴마크 정부에 통보하는 것을 ‘깜빡했을’ 뿐이었지요 – 사고 이후로 주기적으로 현장에 인력을 파견해 방사능 오염 현황을 확인하는 작업을 수행했는데, 1979년에도 그러한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화생방보호의 열피로로 인한 열사병 관련 내용은 작중 창작이지만요.

2. 일사병과 열사병은 이름도, 발생 기전도 비슷하기 때문에 종종 혼동되곤 합니다. 하지만 일사병은 단순히 장기간 고온에 노출되어 발생하는 더위먹음인 반면, 열사병은 땀을 통해 열을 배출하는 과정 자체에 문제가 생겨 체내에 열이 누적되면서 발생하는 훨씬 위험한 온열질환이지요. 이전 화에 서술되었던 것처럼, 여름이 건조하여 땀이 나는 즉시 증발하는 서유럽 기후에서는 열사병은 영 낯선 질환이었을 것입니다.

3. 동아시아 전통 의학에서 서병은 열사병, 일사병 등 온열질환의 통칭입니다. 햇볕만 피하고 수분 섭취만 하면 쉽게 온열질환을 예방할 수 있는 유럽과 달리, 무더위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동아시아 기후 특성상 온열질환에 대해 일찌감치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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