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84화 (84/116)

늑대처럼 굶주린 (5)

19. 늑대처럼 굶주린 Hungry Like The Wolf (5)

투슈판 북쪽 벌판과 숲 사이에서 여름날 하루 내내 벌어진 격전 아닌 격전은 신대륙 연합과 원주민의 승리로 끝났다.

자신만만하게 북쪽 숲으로 달려간 저들의 동포들이 포로로 잡힌 것을 발견한 명나라 군사들은 하나같이 창날을 아래로 내렸다. 잉글랜드건 와스테카건 모두 오랑캐에 불과하였은즉, 털 붉은 오랑캐紅毛를 위해 저들 같은 화인華人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의리는 없었던 것이다.

열사병으로 쓰러졌다가 겨우 회복한 유럽 용병들 또한 잃어버린 전의를 도로 북돋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악마와 결탁한 마녀의 불가항력에 쓰러졌을 뿐 결코 저들의 용맹이 부족해서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쪽이 피차 편했던 것이다.

“이... 너 바빌론의 탕녀야!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게냐!”

제단 위에서 싸움을 구경하던 이 사태의 원흉, 팔켄부르크의 요한만 손가락질하며, 시그리드 귀에 들릴 리 없는 저주를 퍼부을 뿐.

“이럴 때가 아닙니다, 신부님. 당장 피신하셔야 합니다!”

정화가 손수 백기 흔드는 틈을 타 빠져나온 위트레흐트의 지몬에게서는 다급함이 절로 느껴졌다.

“뭐라고?”

“타이간 경이 항복 교섭을 하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대로 야만인들에게 붙잡히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아시잖습니까!”

정화의 지시에 따라, 그들이 타고 온 맨오브워 선단은 부둣가가 아닌 그 맞은편 강가로 피신해 있었다.

“아직 나룻배 몇 척은 남아 있을 겁니다. 그걸 타고 배로 돌아가야 합니다!”

요한은 광신자일지언정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시그리드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으면서도 제단의 가파른 계단을 후다닥 뛰쳐내려갔다. 무릎이 나갈 듯 아팠으나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저쪽이다! 놈들이 저쪽에 있다!”

“빠져나가게 두지 마라!”

“붙잡으십시오! 붙잡되 해치지는 마십시오! 오직 정의로운 심판으로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정복자들 중 그 누구도 딱히 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 도시에 남은 민중. 사제 올라카틀이 이끄는 투슈판 사람들이 거리를 틀어막고서 뿔뿔이 도망치는 유럽인들을 붙잡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그럭저럭 잉글랜드 말과 뜻이 통하는 공용어로 ‘공정한 재판을 보장할 것이니 도망치지 말고 항복하라’하고 떠들고 있었다.

세상의 파멸을 외치는 간악한 이교도가 정의로운 심판을 운운하는 것을 본 팔켄부르크의 요한은, 근근이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툭 놓치고야 말았다.

요한이 노발대발하며 고래고래 저주를 퍼부었으므로, 그 요란한 소리 들은 올라카틀과 투슈판 사람들은 금방 요한을 발견하고 붙잡을 수 있었다. 어떻게 말려보려다가 나몰라라 하고 도망치던 지몬도 그리 머지 않은 곳에서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이미 도시 곳곳에 투슈판 군사들이 들어와 있었고, 부두 쪽은 있는 힘 모두 쥐어짜 속보로 달려간 테노치티틀란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으니, 설령 도시를 무사히 빠져나갔다 한들 별반 다를 것은 없었으리라.

정화가 항복 협상을 하는 사이 도망쳐야 한다는 지몬의 상황 판단은 나름 적절하고도 재빨랐다.

그저 백기 든 정화에게 달려간 시그리드가, 그 자리에서 도저히 정화가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내밀며 저의 뜻을 관철시킬 것이라는 예상을 못 했을 뿐.

“포로들에게 무기를 돌려주도록 하지요. 태감 수하에 남아 있는 명나라 사람들의 무기도 빼앗지 않겠습니다.”

정화도 눈앞의 여인, 하얀 머리를 제하면 서시西施에 견줄 만한 서씨²가 자신과 뭔가 담판을 지으려 할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의 위신을 깎아먹는 고육지책을 펼치면서까지 승리를 이끌어냈으니, 어떻게든 그 위엄을 되찾을 필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장 지금에야, 승리의 기쁨을 함께하며 날뛰는 소위 신대륙 연합과 이 땅의 원주민들이지만, 그 흥분이 가라앉게 되는 즉시 의심이 싹트기 시작할 터.

이런 비루한 술수로 겨우 꺾은 적이, 다시 한 번 쳐들어오면 그때는 어찌할 것인지, 과연 신대륙 연합이라는 동아줄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이 마땅한지 재차삼차 고민하게 되리라.

“대신 다른 유럽 용병들을 붙잡고 무기와 갑옷을 몰수하는 데는 협조해주셔야 하겠습니다.”

“뭐라고?”

“들으신 대로에요. 오랑캐들을 위해 대명Daming의 사람이 희생되는 것은 바라지 않으시겠지요?”

지금 중국의 왕조가 ‘밍’이라 불린다는 것을 아는 시그리드는, 앞서 정화가 한어로 말할 때 ‘따밍大明’이라 언급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태감 정화조차도, 세 바다를 건너 도착한 땅에서 그 대명 천조라는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므로, 놀라움에 절로 마음이 흔들렸다.

“그, 그야...”

비단 천조 대명이라는 구절뿐 아니라, 중화 사람들의 마음속을 꿰뚫어본 듯한 언사까지 나왔으므로, 경악한 정화는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시그리드가 이 무렵의 중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농민 반란군의 지도자가 몽골을 몰아내고 밍을 세웠다는 것, 그리고 어찌어찌 하다가 만추Manchu 사람들에게 멸망한다는 것,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저들이 천하의 중심이라 여긴다는 것이 전부였다.

허나 그것만 해도 지구의 서반구에서 가장 중국에 대해 박식하다 할 수 있으리라.

머리 흔들어 놀라움을 흩어낸 정화는, 시그리드의 제안이 자신에게도 최선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점을 눈앞의 시그리드 또한 여실히 알고 있으리라는 점을 깨달았다.

담판을 짓기 위해서는 각자 손에 쥔 패가 있어야 하는데, 정화가 내밀 수 있는 패는 거의 다 떨어졌다.

저쪽에서 명나라 군사들에게 무기를 돌려줄 테니 대가를 내놓으라 한다면, 중화의 사람인 정화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하찮은 오랑캐의 목숨뿐.

이 땅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인 범선의 선원들은 이미 정화가 약속한 보화에 홀딱 넘어갔으니, 어떻게든 용병들을 팔아치우고 활로를 마련하면 그만일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북평, 아니, 북경으로 돌아가 내세울 만한 ‘불로불사 처방’ 하나쯤은 구해야 하겠지만.

“좋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허나 그것으로 끝은 아닐 터.”

“네. 맞아요. 뒷수습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도록 하지요.”

한 번 결심이 내려지자 그다음 동작은 피차 신속했다.

허탈함에 물들어 방심하고 있던 유럽 용병들은 금방 제압당했고, 명나라 군사들은 저들 동포들이 돌아왔다는 데만 집중할 뿐 방금 전까지 함께 싸우던 용병들이 어떤 신세에 처하건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종일 전장을 동서로 분주히 뛰어다녔던 원주민 군사들도, 마지막 전력을 쥐어짜 각각 투슈판 시와 부두를 향해 달려나갔다.

위트레흐트의 지몬과 팔켄부르크의 요한은, 저들의 것이 아닌 힘을 빌려 한바탕 피바람을 불게 한 대가로, 저들이 빌린 바로 그 힘에게 배신당하게 되었다.

‘대단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수로는 아직 완전히 탐험되지 않았기에, 신대륙 연합에서 남쪽 아나왁을 오가는 교역로는 아직까지는 악어늪지 반도를 경유하는 해로 하나뿐이었다.

거리로 따지면 대략 우애의 도시에서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 사이만큼 먼 바닷길이었기에, 한 번 그 항로를 완주하면 다음 항해에 앞서 반드시 배의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한 물자를 보충해야만 했다.

그리 크지 않은 투슈판의 항구에, 제노아-잉글랜드 소유 맨오브워와 그린란드 회사 소속 노블이 나란히 정박하여 참으로 어색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교활한 놈들 같으니.”

전투도 끝났겠다, 도로 시그리드 곁에서 붙박이 노릇하게 된 스베인이 부둣가 궤짝에 앉아 툴툴거렸다.

본디 강 맞은편에 있어야 할 맨오브워인데, 개중 몇 척은 은근슬쩍 강 북쪽 부둣가로 옮겨와 물자를 싣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부둣가 한편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은, 무기를 돌려받은 명나라 군사들.

잔뜩 줄어든 저 정도 숫자로는 투슈판 재점령은 언감생심이었으나, 애초에 저들의 목적은 그런 눈먼 욕심을 부리는 데 있지 않았다.

정화와 그 수하 명군은, 여차하면 시간을 적당히 끌다가 등 뒤의 배로 달아나 바다 건너로 도망칠 작정이었다. 그 의도를 전혀 숨기지 않고 저처럼 진을 치고 있었으니, 스베인이 툴툴거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정 태감 입장이었더라도 저렇게 했을 것 같긴 한데요.”

스베인 옆 궤짝에 걸터앉아 리프랑 손장난을 하며 시간을 때우던 시그리드가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덜 얄미운 건 아니잖냐.”

요한과 지몬, 그리고 그 외 용병들은 도시 반대쪽에 연금되어 있었다. 그들에게서 압수한 무기와 갑옷은 그 자체로 귀중한 쇠붙이라, 모조리 처분해 투슈판 재건과 포로 식비 충당에 쓸 예정이었다.

“그리고 하필 우리 노블 옆에 저놈들 배를 세워둘 건 또 뭐란 말이냐. 비교되게시리.”

“그것도 아마 일부러 한 것이겠지요.”

고작 이삼 년 동안에 투슈판 사람들은 바다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범선이라는 개념에 익숙해졌다.

허나 설령 난생 처음 범선을 본 사람이라 할지라도, 맨오브워와 노블의 크기 차이를 놓치지는 않을 듯했다.

“저들 힘이 우리 빈란드 사람들보다 강력하다. 이번 한 번은 거하게 말아먹었지만, 다음에는 더욱 힘을 모아 다시 올 것이니 처세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게 떠드는 것과 다름없지 않으냐. 재수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원래의 역사보다 사백오십 년쯤 이르게, 신대륙 최초의 반중감정을 토로하는 스베인이었다.

“마저 담판을 짓기 전에 저렇게 압박하는 것쯤이야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옛날에 마리엔부르크에서 기사단 사람들이 허세 부리던 것 생각해보세요.”

밑천 다 동나고 수도 마리엔부르크까지 함락된 이후에도, 튜튼 기사단원들이 리보니아에 남은 군대를 데려오면 계속 싸울 수 있다면서 폴란드 왕 요가일라에게 허세를 부리던 것을 떠올린 스베인은 금방 이해했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눈 좋은 리프가 푸드득 날아올르더니 시그리드 어깨에 앉았다.

“엇, 오고 있나봐요.”

“누구? 아! 지슈카 대장이 오고 있단 말이로군. 언제 오나 했네.”

스베인이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부두 한편에 있는 정화의 진영에 찾아갈 때가 온 것이다.

“지슈카 선생님과 네사왈코요틀 전하, 그리고 그 외 우리 편 모두겠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정화가 저의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알량한 위세를 부리고자 한다면, 시그리드도 똑같이 돌려주면 그만이었다.

이번 싸움 및 그 싸움의 원인이 된 투슈판 약탈의 책임을 논하고 사후처리를 하기 위한 담판. 그 담판에서 시그리드쪽 위세를 세워주기 위해, 신대륙 연합군과 두 동맹시 군사들, 그리고 투슈판 시민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다.

팔켄부르크의 요한과 위트레흐트의 지몬도 저 가운데 있을 것이다. 날아드는 돌과 오물에서 보호받기 위해, 보헤미아 군사들 사이에 쏙 숨은 채 끌려오고 있으리라.

“그 담판, 오래 끌 것 같으냐?”

“아뇨, 제 생각대로라면 금방 끝날 거에요.”

거의 일방적인 통보에 가깝게 끝나지 않을까. 시그리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엊그제 연합의 요인들과 함께 논의한 방안대로라면, 보나마나 정화와 지몬, 요한 등 모두의 허를 찌를 것이었으므로.

엊그제의 위풍당당했던 모습이 무색하게, 부두 한편에 쪼그라져 겨우 버티고 있는 명군.

반면 그때 그들의 모습만큼이나 당당하게, 저 고을의 대로를 거쳐 이쪽으로 향해 오는 야인 무리.

저의 부하들 사이에 긴장과 두려움이 젖어들고 있건만, 정화는 흔들림 없이 야인 행렬을 응시하였다.

‘실추된 위신을 되찾으려면, 왕후 서씨는 반드시 오랑캐 수괴 두 사람과 그 무리를 극형에 처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니 오랑캐 수괴들이 극형에 처해지도록 그들 모두를 넘겨주고, 제노아 선인들과 함께 바다 너머로 돌아간다.’

정화가 알기로, 형벌로써 위신을 세우는 것은 중화와 오랑캐를 막론하고 모든 나라에서 통용되는 방편이었다. 죄목이야 가져다 붙이기 나름이요, 핑계가 무엇이든 잔혹한 형벌을 가하기만 하면 족하였다.

그의 주군 또한, 그 이치를 알았기에 방효유方孝孺의 구족을 멸하였다³.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요, 일개 필부가 황제를 능멸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황제의 위신을 실추시키기 때문이었다.

허나 저들이 잉글랜드와 제노아 사람들, 그리고 팔켄부르크의 요한이라는 승려를 극형에 처하기에는 넘어야 할 걸림돌이 있었다.

이 땅의 역량으로든, 저 파비륜국 – 신대륙 연합 – 의 역량으로든, 구라파 나라 중 어느 하나가 작정하고 손을 뻗기 시작하면 감당치 못할 것이었다.

자신들이 사실 바닷가 작은 마을 몇 곳에 자리잡은 난민 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춰야만 하는데, 막상 그것을 감추고 저들의 허장성세를 유지하려니 그 대가가 또한 과중하였다.

‘그러므로 저들에게는 우리 중화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부외자이면서, 동시에 저 구라파의 군주들에게도 그나마 신뢰를 받을 만한 이들이므로.’

몇 년이나마 불가피한 일을 늦추기 위해서라도, 저 왕후 서씨, 시그리드에게는 정화와 명나라 사람들의 증언, 즉 지몬과 요한은 정말로 죽을죄를 지어 벌을 받았을 뿐이라고 둘러대는 그 증언이 필요했다.

그렇게 자신하며, 정화는 조그만 진영의 앞으로 나아가 행렬 선두의 시그리드와 얀 지슈카, 그리고 끌려나온 요한과 지몬을 맞이했다.

허나 인삿말이 막 오가려던 차, 시그리드가 바로 정화의 말꼬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저는 이 사태에 관련된 모든 이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기를 원합니다.”

“공정한 재판?”

이 무슨 막북에서 포청천 찾는 소리란 말인가.

“승자만이 정의를 말할 수 있다면, 우리가 승리하였을 때만이라도 정의를 추구해야 할 테니까요.”

정화의 말문이 막힌 틈을 타 시그리드는 저의 주장을 이어갔고, 역관들은 그저 기계적으로 통역할 뿐이었다.

“이제 곧 폭풍이 불어오는 계절이지요. 맨오브워 세 척의 출항을 허용하겠습니다. 그 배편으로, 요한과 지몬에게 가담한 투슈판의 유럽인들, 그리고 포로들 중 위중한 이들을 추방하고, 또한 제 명의로 이 친서 한 편을 보낼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팔켄부르크의 요한과 위트레흐트의 지몬에게도 통보하는 바이니, 귀담아 듣기 바랍니다.”

시그리드는 종이 한 장을 펼쳐보였다.

“신대륙 연합의 임시 호국경이자 빈란디아의 데스포이나로서, 나, 시그리드 리프트라사는, 신대륙 연합과 그 벗들을 대표하여 잉글랜드 국왕 헨리 튜더에게 고하오.”

그리고 정적이 내린 부두에 울리는 또랑또랑한 목소리.

정화에게는 아무런 울림이 없었으나, 지몬과 요한의 눈은 그 움푹 들어간 눈두덩을 거의 가릴 만큼 크게 뜨였다.

“이곳 투슈판, 그리고 더 동쪽의 여러 섬에서 벌어진 참극의 책임이 헨리 본인에게 있는지, 아니면 그 이름을 빌린 위트레흐트의 지몬과 그를 부추긴 팔켄부르크의 요한에게 있는지 확실하게 밝혀야 할 것이오.

만약 전자라면, 이 땅에 특사를 보내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시오. 후자라면, 지몬이 공정한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재판관을 보내시오.

어느 쪽도 택하지 않는다면, 혹은 1419년의 첫 배가 도착할 때까지 좋은희망에 아무련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우리 신대륙 연합과 두 동맹국, 나아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 앞에 주어진 증거만으로 판단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이상입니다.”

정의만큼 오용되기 쉬운 덕목은 없다.

그러나 신대륙 연합의 전초기지나 다름없는 투슈판이 짓밟힌 데 대한 울분으로 유럽인들을 극형에 처하는 것과, 당당한 변론 끝에 그 죄를 밝히고 그에 따라 처벌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고작 도의를 바로 세우는 것으로 이 야인들을 계속 그대 편으로 묶어둘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인가?”

시그리드의 속셈을 빠르게 파악한 정화가 탄식하였다.

시그리드의 신대륙 연합이 투슈판 약탈과 그 탈환 과정에서 동원한 치졸한 전법으로 인해 실추된 위신을 되찾고자 타협에 응할 것이라는 가정 자체가 엇나가고야 말았던 것이다.

또 한 번 시그리드는 정화의 예상을 벗어났다. 지난 전투에서 신대륙 연합의 전법이 정화의 예상을 벗어났던 것처럼.

정의를 내세우게 된다면, 지몬이 이곳 투슈판에 당도하여 통상을 요구한 행위 자체는 처벌할 수 없게 된다.

지금껏 신대륙 연합이 독점해 왔던 이곳, 황금 가득하다는 아나왁 땅과의 교역에 다른 국가들이 나서는 것도, 투슈판이 교역의 이익을 홀로 누리는 것을 질투하는 다른 도시들이 새 이방인들과 교역하는 것도 막지 못하게 되리라.

“계속 우리들 편으로 묶어둘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찾아 이 대륙으로 건너왔듯, 다른 이들도 오직 그들의 뜻에 따르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러나 시그리드는 믿었다. 신대륙 연합은 곧 이 대륙에 손을 뻗쳐올 유럽의 국가들은커녕, 이 땅의 토착 세력들보다도 월등히 강하다 장담할 수 없는 약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대륙 연합에는 그 어떤 세력에도 없는 것이 있었다.

모든 사람의 꿈이 어우러진다는 그 이상.

생존을 위해서든, 번영을 위해서든 공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

실력으로써 이 땅 원주민들과의 교역을 독점할 수 없다면, 대신 그들이 스스로 이끌려 신대륙 연합과의 교역을 원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시그리드는, 몇 년 전과 달리 이상과 현실을 모두 보게 되었다. 세상에 닳았다면 닳은 것이겠지만, 시그리드는 그런 마모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몬과 요한을 재판을 통해 처벌하겠다는 것이, 암묵적으로 유럽 국가들 모두에게, 언제든 아나왁의 황금을 노리고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시그리드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시그리드와 함께 대책을 논의했던 네사왈코요틀과 얀 지슈카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모두 시그리드의 제안에 동의한 이유는, 그것이 그저 마음에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하, 아나왁의 황금이라!”

얼떨떨하게 시그리드의 통보를 받아들인 정화, 그리고 넋이 나간 채 그들 뒤를 따라 저들이 연금된 창고로 돌아가는 포로들을 뒤로 하고 투슈판으로 돌아가는 길.

그때의 논의를 떠올린 네사왈코요틀이 깔깔 웃었다. 이제야 겨우 ‘어리다’가 아닌 ‘젊다’라는 말이 어울리게 된 네사왈코요틀이 간만에 내는 소년스러운 소리였다.

아나왁의 금광은, 대개 바닷가가 아닌 한참 내륙, 이미 틀라카엘렐이 손을 뻗친 와샤칵 땅이나 북서쪽 푸레페차 땅에나 있었다.

그간 채굴되어 귀족의 장신구로 쓰이던 황금은, 이미 태반이 신대륙 연합의 손을 거쳐, 알뜰살뜰 장인들과 이주민, 기계들을 들여오는 데 쓰였고.

그러므로 황금을 탐내며 열심히 배를 만들고 바다를 건너온 유럽 사람들은, 허탈함 외에 다른 것을 얻기가 어려울 것이다.

“물론 황금 말고도 이 땅에서 나는 물산 중 유럽에 수출할 만한 것들이 분명 있을 거에요.”

아프리카산 상아는 베네치아가 독점하고 있고, 그 베네치아는 지중해 무역에만 목숨을 걸고 있으니 적어도 당분간은 이 땅에서 그린란드 상아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 외 나머지 교역품이야, 약간의 경쟁은 감수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조금만 세월이 지나, 미시시피 강 수운이 완성되고, 증기기관이 본격적으로 공산품을 뽑아내기 시작하면 다시 신대륙 연합이 아나왁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들이 아나왁의 황금을 허둥대며 움켜쥐는 사이, 남쪽 바다 너머의 땅에서 얻는 황금은 오직 우리만의 것이 되겠지.”

“그렇게 만들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거기서 굳이 멈출 것도 없지 않은가?

시그리드의 마음은 어느새 태평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그리드의 예상대로 담판보다는 통보에 가깝게 끝난 협상.

그 이튿날, 시그리드는 다시 한 번 정화의 진영에 찾아갔다.

저의 계획, 즉 명나라 사람들에게 투슈판 약탈에 가담한 죄를 물으면서 신대륙 모두의 공익을 위할 수 있는 방안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그 설명이 두 번의 통역을 거쳐 좌중에 전해지자, 시그리드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얼떨떨한 반응이 돌아왔다.

“항구를 짓고 거기서 배를 새로 건조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오랑캐 여인이 태감 정화와 대등하게 얘기 나누던 것을 뒤늦게 깨달은 정화의 아랫사람들은, 머리로 받아들인 결론을 가슴으로는 못 받아들였는지, 그 말투에 공손함과 불손함이 수시로 교차하곤 했다.

“네. 다들 해보셨을 것 아녜요?”

정화가 데려온 모든 사람들이 무관이나 병사는 아니었다. 개중에는 선공船工도 있었고, 그런 선공들을 부려 배를 건조하거나 보수하는 임무를 맡은 관리도 있었다.

오랑캐 선박 중에 간혹 그 제도를 본받을 만한 것이 있음을 알던 정화는, 이미 지중해로 건너올 때부터 선공들을 대동하여 그 모습을 기록케 한 바 있었다.

“만약 혼자서는 어렵겠다 싶다면, 언제든 이쪽에서 사람을 붙여드릴게요. 마침 좋은희망쪽 조선소 공사도 거의 끝나가겠다, 장인들을 파견할 여력은 있답니다.”

물론 그런 이가 하나도 없다 한들 시그리드의 계획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장인이야 황금으로 구할 수 있었고, 배의 설계야 노블을 조금 더 키우거나 맨오브워 한두 척을 강탈해 뜯어보면 금방 익힐 수 있었다. 오히려 타지에서 믿음직한 인부를 구하는 쪽이 더 어려웠던 것이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항해해 나가면 온 세상을 한 바퀴 돌 수 있답니다. 이미 지구를 반 바퀴 넘게 돌아온 마당에, 굳이 온 길 돌아갈 것도 없이 지구를 마저 일주하는 쪽이 더 편하지 않겠어요?”

정화와 그 수하들과 달리, 시그리드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가설이 아닌 진실로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나왁 남쪽, 본디 남미(남빈란디아?)와 교역하기 위해 세우려던 항구 자리에서 꼭 안데스 산맥으로 향하는 배만 오가라는 법도 없었다.

시그리드는 정화 일행으로 하여금 오지 않을 미래에 스페인 사람들이 향료를 찾아 개척했던 그 항로. 마닐라 갈레온Manila Galleon이 오갈 항로를 개척케 할 작정이었다⁴.

정화 일행은 중간에 들릴 수밖에 없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 앞으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겠지만 – 사정에도 밝을 뿐더러, 어떻게든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렬한 목표의식까지 가지고 있었으니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황명皇明의 신민인 중화 사람들을 멋대로 부려먹는 게 문제다, 그 말씀이시지요? 그러면 억울해서라도 얼른 바다 건너로 돌아가서 황상께 고해야 하겠네요.”

“항병降兵을 이리 다루는 법도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진나라 군사 이십만을 땅에 묻은 서초패왕의 전례에서도 볼 수 있듯, 사실 중원에서 항병을 다루는 법도라고 딱히 개명된 것은 아니었지만, 당장 항의하는 입장에서 그리 중한 사실은 아니었다.

시그리드 역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그런 생각은 기꺼이 유럽 오랑캐들을 팔아넘기기 전에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제노아랑 잉글랜드 사람들을 죄다 팔아먹고서 보르도로 돌아가면 퍽이나 환영을 받겠네요.

뭐, 어떻게 이곳 땅에서 새출발 하고 싶으시다면야 말리지는 않을게요. 그렇지만 고국 땅을 다시 밟고 싶으시다면 우리 사람들을 따라 아카풀코로 가셔야 할 겁니다.”

네사왈코요틀과 틀라카엘렐이 왁샤칵 남쪽 해안에서 찾은 천혜의 항구 부지를 거론하는 시그리드였다.

그렇게 정화는 참고인 겸 피고로서 좋은희망으로 불려가고, 나머지 명나라 사람들은 ‘자발적인’ 노역으로써 저들이 이 땅 사람들에게 행한 패악질의 죗값을 갚게 되었으니, 사백 하고도 오십 년쯤 이르게 신대륙에 쿨리Coolie들이 닿은 셈이 되었다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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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항해시대 초반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유럽 세력과 조우한 동아시아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유럽인들의 신체적 특징은 바로 그 머리카락과 체모의 색깔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홍모인紅毛人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지요. 작중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한 세기쯤 이르게 쓰이고 있습니다.

2. 명대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한 대중문학은, 당대인들의 진솔한 욕망과 사고방식 등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좋은 사료가 됩니다. 이러한 대중소설에 나타나는 미인관을 바탕으로 판단하면, 당시 서유럽의 미인상은 대체로 명나라의 미인상과 맞아떨어졌을 것입니다. (딱 하나, 전족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요.)

서시는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전설적인 미인으로, 경국지색, 빈축과 같은 유명한 고사성어의 소재가 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같은 경국지색으로 꼽히는 달기, 포사 등과 달리 대중적으로도 인식이 좋았는지, 중국사의 유명한 미인 중 몇 안 되는 ‘해피엔딩’ 설화가 전하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물론 근거는 희박하지만요.).

3. 이전에 몇 번 언급된 것처럼, 본디 영락제는 연왕燕王일뿐이었고, 홍무제 주원장 사후 제위는 주원장의 장손인 건문제에게 넘어갔습니다. 건문제가 강력한 힘을 지닌 숙부들에게 위협을 느끼고 숙청을 시작하자, 그중 가장 강성한 세력을 거느렸던 영락제는 반란을 일으켜, 결국 삼 년에 걸친 내전(정난의 변) 끝에 남경을 정복하고 제위에 오르게 됩니다.

당시의 이름난 선비 방효유는 끝까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영락제가 자신을 불러 즉위조서를 쓰도록 강요하자 ‘연나라 도적이 제위를 찬탈하였다燕賊纂位’라는 돌직구 문장 한 줄만을 제출했다고 합니다. 분노한 영락제는 방효유를 책형에 처했는데, 야사에 따르면 영락제가 방효유의 구족을 멸하겠다고 협박하자 방효유는 저의 십족을 멸해도 괜찮다 하였고, 영락제는 그 말대로 십족을 멸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후대(즉, 명나라 황제를 대상으로 할 때 한정으로 언론자유가 보장된 청나라 시기)의 윤색일 뿐이고, 실제로는 남자 직계 후손들만이 사형에 처해졌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물론 살아남은 친척들도 모두 연좌의 적용을 받았을 테니 사회적으로는 사형에 처해진 것과 마찬가지였겠지만요.

4. 원 역사에서도 스페인은 멕시코 서해안의 아카풀코(나와틀어로는 아카폴코)에 항구를 지어 페루 부왕령과의 교역 및 소통 창구로 쓴 바 있습니다. 안데스 산맥의 풍요로운 광물 자원은 그렇게 헐값으로 스페인 손으로 들어갔고, 그중 상당 부분은 스페인의 막대한 부채를 갚는 데 쓰였지요. 이렇게 유럽에 풀리게 된 안데스의 금은은 유럽 전체에 가격혁명을 불러왔고, 유럽이 근대로 나아가는 한 가지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안데스의 은이 모두 유럽으로만 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포르투갈이 독점하던 향료 무역에 한 발 걸쳐보려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스페인 국왕 카를 5세의 야심은 태평양을 향했고, 그 결과 태평양을 횡단하여 향신료의 원산지인 인도네시아 동부 해역에 닿고자 하는 탐험이 시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노력 대부분은 좌절되었지만, 엉뚱하게도 필리핀이 스페인 손에 들어가는 결과를 낳았고, 필리핀에 스페인이 확보한 마닐라는 스페인이 명, 일본 등과 교역하는 창구가 됩니다. 16세기 후반부터 스페인이 멕시코를 상실하는 19세기 초까지 죽 이어진, 마닐라-아카풀코를 잇는 태평양 횡단 항로 및 이 항로를 오가던 배를 마닐라 갈레온이라 부르곤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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