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87화 (87/116)

빈손에서 빈손만큼 (3)

20. 빈손에서 빈손만큼 Nothing From Nothing (3)

잉글랜드 특사 존 올드캐슬을 태우고 대서양을 건넌 맨오브워는, 그가 전달하기로 되어 있던 프랑 은화와 함께 그대로 런던에 돌아왔다.

잉글랜드 국왕 헨리의 구미에 맞는 계획과 함께.

“그 지슈카라는 자, 역시 야망이 있었군. 하긴, 젊은 처녀가 군주 노릇하는 것을 가만 두고 보아서야 어디 사내라 할 수 있겠나!”

잉글랜드의 학자들을 모아, 이른바 선거라는 것을 한답시고 거들먹거리는 어리석은 개척민들을 계도하고, 그들로 하여금 얀 지슈카를 국왕으로 뽑도록 만든다. (신대륙 연합의 국가원수 칭호가 국왕이 아니라는 사실은 헨리에게 그리 중요치 않았다.)

헨리가 알기로 신대륙의 미약한 군사력은 모두 지슈카 한 사람의 손에 있었으니, 민중의 지지만 있다면 지슈카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지슈카가 국왕으로 선출된 뒤에 열릴 지몬과 요한의 재판에서, 가재당을 응원한다는 명목으로 찾아간 학자들은 그대로 잉글랜드와 지몬의 입장을 옹호하는 변호사로, 또 그들의 주장을 곧이 받아들이는 판관으로 변모할 것이다.

“가재당이라는 당파는, 저들의 그 조그만 정착촌 바깥의 일에 관여치 않는 것을 제 대의로 삼았다 하였지. 우리가 그 당파를 지원한다면, 그린란드 마녀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고서도 저 이단자들의 간섭 없이 신대륙의 황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멋진 신세계』 출판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이래 – 저작권법이 없었으므로 먼저 찍어내 싸게 파는 쪽이 임자였다 – 신대륙 소식이 돈이 된다는 것은 유럽의 신생 출판시장에서 널리 통용되는 진실이었다.

그러므로 비단 헨리뿐 아니라 신대륙에 조그만 관심이라도 지닌 이들이라면 소위 가재당과 백송고리당의 분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거기에 제멋대로 저들의 편견과 선입견을 덕지덕지 덧붙였기에, 얕은 이해가 더 큰 오해를 유발하곤 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선거가 올해 가을이라 하였으니, 시일이 촉박하다. 지슈카의 계획이 실기하지 않고 실행될 수 있도록, 모든 이들이 기민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즉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 사람을 보내라!”

그렇게, 가난한 학자들이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은화를 들고서 국왕의 하수인들이 대학 도시들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부르고뉴파 폭도들에게 장악당하고, 그 부르고뉴파가 다시 잉글랜드와 덴마크에게 배신당하면서 고스란히 남의 나라에 넘어간 파리.

그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파리 대학은 예로부터 철학자의 도성을 자처하곤 했다. 한때 거의 잊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재발견한 것도, 그것을 가장 먼저 학부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모두 파리 대학 인문학부였다¹.

허나 그것도 벌써 일백오십여 년 전의 일. 파리 대학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는 다름 아닌 신학자 장 제르송이었으며, 그 제르송마저도 파리가 함락된 후에는 센 강의 강물에 발 한 번 못 담그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실적이 없다고 해서 자존심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 전해진 수상쩍은 구인 광고의 소문을 들은 파리 대학의 법학자들은 의기가 절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먼저 코펜하겐으로 간 우리 동료들의 작업을 이어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공의회에서 인정받은 신대륙의 정당한 군주가 어리석은 민중의 손에 폐위되는 것은 막아야 할 것이야!”

덴마크의 체급으로 정복하고 유지할 수 있는 영토에 한계가 있었고, 귀족 때려잡기와 선전선동으로 평민들의 불만을 억누르는 데도 한계가 있었기에, 일찌감치 덴마크 왕 에릭은 시그리드의 전례를 본떠 각지에 학교를 세우고 신문을 발행한 바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기에, 국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쳐야 하는 이유를 입증하고 역설할 학자들을 널리 구하고 있었는데,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이치에 따라 잉글랜드가 미웠던 프랑스인들이 에릭의 초빙에 가장 적극적으로 임했던 것이다².

물론 그 논리대로라면 이미 프랑스의 섭정이며 곧 국왕이 될 앙글테르의 앙리(잉글랜드의 헨리)에게도 충성을 바쳐야 하겠지만, 이는 어떻게든 잉글랜드인들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고자 하는 프랑스 학자들로서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모순이었다.

“마침 그 보헤미아인 얀 지슈카라는 자가 우리 쪽 사람들도 몇몇 초대했더군. 잉글랜드 잡것들 불러 모으는 데 쓴 예산에 비하면 쥐꼬리에 불과하지만.”

“흥, 잉글랜드인들만 모으면 눈치가 보일 테니, 구색 갖추려고 하는 짓이구만.”

“그 음모를 우리가 그대로 되돌려 주세나!”

박사 한 명 초빙할 예산을 쪼개면, 거의 무급에 가까운 조건이긴 해도 네다섯 명쯤은 족히 배편을 마련할 수 있었다.

빵을 먹어도 배가 부르고, 잉글랜드 놈들을 욕보여도 배가 부르기 마련이니, 그만하면 괜찮은 조건 아니겠는가?

그렇게 서유럽 대학가가 시끌벅적해지는 동안, 시그리드는 포로들, 즉 정화와 요한, 지몬 등등을 데리고서 좋은희망에 돌아왔다.

여기서 배 한 척만 얻어타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요한과 지몬은 제법 엄중한 감시에 처해졌다. 급양형제단에서 해적 노릇하던 시절, 지몬이 때려잡았다고 주장하는 해적 두목 ‘말술’ 클라우스와 교분을 가졌던 여관 주인 헤니히가 간수를 자처했다.

반면, 정화는 훨씬 신변의 제약이 적었다. 어차피 아카풀코의 조선소가 완공되고 거기서 태평양을 횡단할 수 있는 배가 진수되기 전까지는 어디 도망칠 곳도 없었다.

“정말... 검소하군.”

왕후 서씨의 왕부王府, 그러니까 콘스탄티노스 황자네 ‘저택’보다도 남루한 통나무집을 본 정화의 감상이었다. 암만 보아도 신비로운 외모며, 그 ‘우주友州’(우애) 고을에서 본 증기기관이며, 그간 여러 계기로 꾸준히 쌓여왔던 시그리드에 대한 환상이 일거에 와장창 무너지는 듯했다.

시그리드가 어째 흔쾌히 저의 집을 내어주겠노라 했더라니, 무슨 귀빈 대접이 아니라 정말로 내줄 수 있는 게 이곳뿐이었던 것이다.

“거실에서 주무시면 돼요. 여기 벽난로도 있겠다, 조금 치우면 지내시기에 불편함은 없을 거예요.”

거실과 부엌, 침실 하나로 이루어진 ‘왕부’. 그마저도 집주인이 자주 자리 비우기에 한 주에 한두 번 식모 – 헤니히와 눈 맞은 과부 이름가르트의 소소한 부업이었다 – 가 찾아와 청소하는 게 관리의 전부였다.

“지금은 바쁘니까, 나가서 동네 구경이라도 하시는 게 어떻겠어요? 보시다시피 지금은 좀 바빠서요.”

이미 유럽 언어들을 귀동냥으로 알음알음 익힌 덕에 수월하게 공용어를 익힌 역관 하산이 제 귀를 의심하면서도 곧이곧대로 통역을 해주었다.

허나 시그리드로서는 정화를 배려해주고 싶어도 딱히 수가 없었는데, 이만하면 좋은희망에서는 꽤 괜찮은 숙소 축에 들기도 했거니와, 정말로 바쁘기도 했던 것이다.

정 정화가 억울하다면, 이렇게 보잘것없는 개척자 무리한테 패배하여 끌려온 신세가 된 자기 자신이나 탓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정화는 자리를 비우고, 백송고리당 참모로서 시그리드 따라온 플레톤이 용건을 꺼냈다.

“곧 있으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소위 ‘학자’들이 바다를 건너오고 있겠지.”

“그렇지요.”

“그 작자들이 도착하는 대로, 각지 선거구에 보내서 선거운동을 하게 될 테고.”

“네, 지금 계획대로는 그렇지요.”

“그리고 개중에는 아무래도 지슈카 그이를 지지하라는 지시를 받고서 온 놈들이 더 많겠지?”

“그야 당연히 그럴 테지만...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지금 우리 당 지지율이, 남의 선거운동 생각해줄 만큼 여유롭지 않다는 게 문제일세.”

졸지에 두 당의 참모를 맡게 된 후스와 플레톤이 합의한 이번 선거의 규칙은 이러하였다.

호국경 선거와 의원 선거 – 임시의회가 ‘임시’ 딱지를 떼면서 그 구성원들의 칭호도 바뀔 예정이었다 – 를 동시에 개별적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촌장 뽑듯 마을 사람들 다 모아놓고서 선출하는 주먹구구 방식으로도 선출할 수 있는 의원과 달리, 온 연합 사람들의 총의를 모아야 하는 호국경 선거는 훨씬 까다로웠다.

“호국경 선거야, 각 마을에서 의원 뽑을 때 선거인들을 따로 뽑기로 했고, 그 선거인단 안에서 선출하기로 했으니 딱히 걱정할 게 없지. 양식 있는 사람들이야, 지슈카 본인부터가 딱히 시그리드 너를 끌어내리려고 입후보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적어도 아직까지는 시그리드만큼 연합의 모든 민족들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우애와 환영의 인구가 좋은희망을 한참 추월하였지만, 의회가 좋은희망에 모이는 것을 누구 하나 문제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런데 의원 선거는, 나도 후스 그 작자와 격론 주고받으면서 선거구를 짜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조금 얘기가 달라.”

빈란디아 북동부 해안에 점점이 흩어져, 서서히 뿌리 내리면서 넓어지고 있는 정착촌 대부분은 아직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너무 인구가 적은 마을 몇몇을 하나로 묶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또한 정착촌 하나가 너무 커서 그 안에서 대표 여럿을 뽑아야 하는 경우, 예컨대 좋은희망이나 환영 읍내 같은 경우는 반대로 선거구를 나눠야 했다.

바다 건너편 헨리가 국제재판 소리를 듣자마자 사법부 매수를 떠올렸듯, 플레톤도 선거구 분할 개념이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개리맨더링이라는 개념을 창안해 냈는데, 개리맨더링을 하려면 먼저 지역별로 백송고리당과 가재당의 지지율이 얼추 어떻게 나오는지 알아야만 했던 것이다.

“주먹구구로 추산한 것이긴 하지만, 이대로는 순 농사꾼으로만 의회가 가득 차게 생겼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뭐.”

“사람이 왜 그리 권력의지가 없는가? 다시 생각해보게. 자네가 우리 연합의 앞날을 위해 마련한 원대한 구상이 무식쟁이들에게 매번 가로막힌다면 어떻겠는가?”

“그때는 설득을 하면 그만이지요.”

“그 설득이 안 먹힐 수도 있단 말일세.”

시그리드의 이상주의에 현실의 때를 묻히는 못된 늙은이 플레톤이었다. 그러나 시그리드도 사람이요, 아예 욕심이 없지는 않았을 뿐더러 플레톤 언변이 언변인지라, 결국 그 말에 살짝 넘어가고야 말았다.

“좋아요. 그러면 유럽에서 학자들이 도착하면 우리도 사람들을 모아 선거운동을 하기로 하지요. 그 정도라면 지슈카 아저씨도 받아들일 수 있을 테고요.”

정착지의 열악한 여건을 고려하면, 고작해야 마을마다 사람 한둘씩 돌아다니면서 지지 연설을 하고, 신문에 일말의 논리나마 갖춘 칼럼을 싣는 정도가 선거운동의 전부일 것이었다.

더구나 어떤 연설을 할지, 어떤 글을 실을지에 있어서도 참고할 선례가 전무한 상황.

“좋아. 이제야 말이 조금 통하는구만그래.”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지요?”

“그야, 지금까지 하던 얘기를 조금 더 세게, 더 논리정연하게 해야지.”

“그게 먹힐까요?”

신대륙 연합이 하나로서 뭉쳐야 한다거나, 장차 남쪽과의 교역으로 세수를 증대하고 복지예산을 늘린다던가, 신대륙 연합군을 상설화하여 공동의 안보를 추구한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일반 유권자의 상식선을 벗어난 것이었다.

물론 대부분 그 말뜻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그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가지고도 있었으며, 남의 관심 받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부족한 작문 실력으로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지만, 딱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리고 두 당의 수뇌부도 그 이상으로 깊은 사상적인 논의를 주고받을 여력은 없었다.

애초에 인구가 아직 이만에 불과한 신대륙 연합에서 공화와 민주의 깊은 이치를 운운하는 것도 시기상조였거니와, 지슈카와 시그리드가 투슈판 원정을 떠나고, 후스와 플레톤이 선거제도의 세부사항을 마련하는 것처럼 다들 정치싸움 외에도 바쁜 본업이 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민생 공약을 내거는 게 어떨까요?”

“민생 공약?”

“네. 우리 당을 지지하면 세금은 늘어나지만 그만큼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도 늘어나지 않겠어요? 그런 얘기를 하는 거지요. 증기기관... 흠, 아니, 그것도 대부분의 사람들한테는 너무 먼 얘기고...”

곧 이야기가 새나갔고, 시그리드네 백송고리당 승승장구하는 것은 십분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플레톤 승승장구하는 꼴은 솔직히 말해 썩 보기가 내키지 않던 후스가, 딱 시그리드만큼 권력욕 있는 얀 지슈카를 충동질한 끝에, 민생공약 경쟁이 시작되었다.

신대륙으로 넘어가 고담준론으로써 무지한 백성을 일깨워줄 일만 남았다 여기면서 애써 뱃멀미를 이겨내고 있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파리 대학의 학자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들이 이 땅에서 두어 달간 앵무새처럼 되뇔 메시지는 미리 결정되고 있었다.

연합 최북단 남녘정착지야,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사람들뿐이니 당연히 시그리드에게 몰표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당장 거기서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와도 얘기가 달라졌다.

기벨린과 구엘프, 부르고뉴와 아르마냑의 대립에서 볼 수 있듯, 자신의 삶과 별 관련 없는 당파 싸움에도 목숨 걸고 뛰어드는 것이 당대 유럽의 전통이었다. 하물며 이 정당 정치에 저들의 이권이 직접 얽혀 있다 하니 어찌 수수방관만 할 수 있을까.

좋은희망 근처에서 성업 중인 벌목장에는, 그 옛날 시그리드가 니놀리노 부족들과 일방적으로 평화를 추진했을 때부터 썩 감정이 좋지 않던 독일계 개척자들이 꽤 많이 있었다.

이 땅에서 세금만 내면 모두 투표권을 획득할 수 있다 보니, 일가친척이 모두 바다 건너편 비스카야나 기푸즈코아에 있지만 엄연히 좋은희망에 등록된 유권자인 바스크인들도 많았는데, 이들 중에도 은근히 저들이 본업인 고기잡이보다 무역업에 더 많이 뛰어들게 된 현실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

반면 이미 작년부터 테노치티틀란과의 교역으로 황금의 맛을 보게 된 보헤미아 장인들이나, 내륙의 교역로를 따라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한 마을의 개척민들은 민족과 무관하게 백송고리당을 지지했다. 어떤 깊은 생각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호감 가는 시그리드가 그 당 사람이요, 교역을 중시하는 게 그 당론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파벌을 정해 따르는 것이었지만.

한여름이 지나가고, 학자들은 도착하고, 교역의 강 어귀의 단풍나무들은 하나같이 붉게 물들며 선거철 찾아왔음을 알릴 무렵.

이처럼 갈갈이 갈린 표심을 움직이고자, 유럽의 학자들은 각각 저들 맡은 구역으로 향해 유세에 나섰다.

처음에는 속으로, 나중에는 대놓고 한탄하면서.

“... 그러므로 잊지 마십시오! 가재! 가재 당을 따르면 세금이 줄어듭니다. 그 줄어든 세금으로 이 마을 앞에 다리를 놓을 수 있습니다!”

“백송고리 당은 약속합니다! 강이 흐르는 모든 마을에 물레방앗간을! 모든 양조장에 탄산수 제조기를!”

대학의 강단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의하던 것이 고작 석 달 전인데, 지금은 나무궤짝 위에 올라가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이 수준이었던 것이다.

“증기기관 만든다고 여러분 삶이 나아집니까? 거기에 지출할 세금으로, 원주민들에게 더 많은 땅을 받아내고 더 많은 농기구와 우마를 들여올 수 있습니다.”

“증기기관 만들면 여러분 삶이 나아집니다! 여러분이 쓸 철제 농기구부터, 스스로 지키는 데 요긴한 머스킷까지, 모든 게 쏟아져 나올 겁니다! 옥수수 강과 교역의 강에 증기선이 다니는 그날까지, 백송고리 당을 지지해 주십시오!”

그렇다고 딴소리를 하자니, 바로 듣는 이들의 관심이 식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문에 싣는 논설이라는 것의 수준을 보았을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다.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런 동네 약장수 노릇을 계속하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물론 보수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간 서유럽 야만인들과 부대끼며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잘 알던 플레톤은, 예상보다 훨씬 많이 – 그래봐야 스무 명 남짓이었지만 – 넘어온 프랑스 학자들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가르침, 즉 헬라스어 속성 강의와 더불어 로마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져온 귀중한 원고 열람권을 약속했다.

이미 착수금에 이어 주급까지 따로 계산해 받고 있던 잉글랜드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맡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한 반복작업이요, 그 보상은 단조롭고 심지어 굴욕적이기까지 한 선거운동을 진행하는 데 비해 영 부족하였다.

그러다 보니, 선거가 한 달 남짓 앞으로 다가올 무렵부터는 하나둘씩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고 별 가치도 없는 듯해보이는 이 모든 연설이, 실제로는 지극히 중요하고도 의미심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정해진 구호, 그것도 그 어떤 철학적인 의미도 없는 말을 무식쟁이들에게 반복할 뿐인 단조로운 작업 속에서, 은근슬쩍 인지부조화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 결국 모든 원리는 현상 앞에서는 개별적인 실체로 체현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물레방앗간 대 감세 정책. 사실 이 뒤에는 엄청난 철학적 논쟁이 숨겨져 있는 듯한데, 자네도 동의하겠지?”

“빌어먹을. 내 살다가 잉글랜드 학자의 말에 동의하게 될 줄이야.”

“우리는 정부가 사람의 손으로 세워지는 역사적인 현장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야. 여기에 대해서는 일찍이 위대한 학자 오컴의 윌리엄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는데...”

“오컴의 윌리엄? 하! 자네야말로 잘 모르고 있군. 정부는 먼저 세워지고 그 다음에 그저 받아들여지는 것일세.”

“그런 그대야말로 무슨 근거를 가지고 그리 떠드는가? 일찍이 멜크 수도원의 아드소 수사를 통해, 로저 베이컨과 오컴의 윌리엄 두 선학先學의 원고를 옥스퍼드로 옮겨온 우리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를...⁴”

고된 일정을 마치고 선거운동원(박사학위 보유)들이 정착지 주점에서 술잔을 주고받을 때면, 이렇게 종종 주먹다짐으로 비화하는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래! 얘기 나온 길에 어디 끝장을 보자고! 우리가 여기 찾아온 것도 결국 그 악한 지몬의 재판 때문 아니었던가! 인간의 자연권이든, 민주적 절차라는 것의 정당성이든, 덤벼 보라고! 내 파리 대학 인문학부의 명예를 걸고 맞서줄 테니!”

그저 잉글랜드 국왕의 입맛대로 재판을 농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바다를 건너온 학자들이, 어느새 신대륙 연합의 민주주의를 두고 날것 그대로의 학문적 논쟁을 벌이는 상황.

“이대로라면 재판도 나름 공정하게 잘 진행되겠는걸. 저들 호승심을 만족시키기도 부족한 판에 고작 유럽 군주의 입장 따위를 고려할 여유는 없을 테니.”

가을을 맞이해 하나둘씩 좋은희망에 신대륙 연합의 요인들이 모일 무렵, 얀 지슈카가 웃으며 말했다.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였나?”

“네?”

정말로 선거운동을 벌이는 데만 뜻이 있었던 시그리드의 얼떨떨한 대꾸였다.

검은 책 한 구석, 심리학 부분에 인지부조화와 레온 페스팅어(1957)의 실험 이야기가 적혀 있음을 떠올린 시그리드도, 정말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이런 계획을 세웠는지 슬쩍 헷갈리기 시작했다.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옛날에 배웠던 지식이 무의식 속에서 떠올라 시그리드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인지, 시그리드 스스로도 확실히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어... 그냥 그렇다고 치지요, 뭐.”

그렇게 시그리드의 마녀 전설에는 또 한 단락이 추가되고, 이 기묘한 요지경에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정화는 다시금 선녀에 대한 환상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민생 공약과 민주주의에 관한 진지한 정치철학 토론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모두에게 생각할 거리와 구경거리를 한움큼씩 주는 가운데, 신대륙 연합 최초의 선거는 그렇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민주주의 선거라면 있어야 할 내실을 거의 모두 갖춘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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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설립된 유럽의 대학들은, 비슷한 시기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 같은 이슬람 학자들을 거쳐 유럽에 소개되기 시작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재발굴을 주도했습니다. 특히 당시 이미 서유럽 세속 학계의 중심이나 다름없던 파리 대학은 – 실제로 ‘철학자들의 도성civitas philosophorum’을 자처하기도 했습니다 – 그 중심이었지요. 이러한 세속적 학문 연구의 부흥은, 교회 자체적인 연구와 시너지를 일으키며 중세 스콜라철학의 전성기를 이끌게 됩니다.

여담으로, 당시 파리 대학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수용 양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료는 재미있게도 대학교 시험 ‘족보’입니다. 제목부터 정직하게 『시험 대비 문제집Compendium Pro Examina』인 이 자료는, 13세기 중반에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몇몇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수준을 넘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보여주지요.

2. 원 역사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유럽 국제정치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북유럽 국가 스웨덴은, 국력뿐 아니라 학문에 있어서도 유럽 본토에 비해 낙후된 현실을 인지하고 서유럽의 학자들을 초빙하려 노력했습니다. 명재상 악셀 옥센셰르나의 초대를 받아 스웨덴에서 관직생활을 한 국제법학자 휘호 흐로티위스(휴고 그로티우스)나,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빙을 받아 스톡홀름으로 향했다가 소빙기 스칸디나비아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 르네 데카르트 등이 대표적인 ‘헤드헌팅’ 사례지요.

3. 미국 헌법 2조 1항 3절에 규정된 선거인단제는, 현대 미국의 대통령 선거와 다소 상이한 면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당연히 해당 주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은 후보에게 그 주의 모든 선거인들이 표를 던지는 승자독식제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맨 처음 헌법이 제정될 때 선거인단을 둔 의도는, 외국의 개입이나 중우정치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국내 기성 정당들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현명한 개인이, 후보의 자질과 각 주의 민심을 종합적·독립적으로 판단하여 투표하게끔 하는 데 있었습니다.

실제로 19세기 초까지도 선거인들이 해당 주에서 패배한 대선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후 점차 선거인들이 해당 주의 대선 투표 결과에 승복하기로 서약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이것이 관례화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지만요.

4. 로저 베이컨은 실존인물이지만, 그 제자라는 배스커빌의 윌리엄, 그리고 윌리엄의 제자인 멜크의 아드소는 가공인물입니다. 물론 진실은 故 움베르토 에코만이 알고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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