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88화 (88/116)

빈손에서 빈손만큼 (4)

20. 빈손에서 빈손만큼 Nothing From Nothing (4)

그저 촌부 몇몇이 술집에서 떠드는 것으로 끝났을 1419년 선거운동은, 인지부조화의 함정에 빠진 프랑스와 잉글랜드 학자들 덕에 활활 달아올랐다.

그리고 대망의 1419년 선거 역시 그 인지부조화의 덕을 입게 될 예정이었다.

학자들이 그토록 중요한 순간, 역사적인 하루가 되리라 떠들었던 선거일은, 실제로는 지극히 초라하게 흘러갔던 것이다.

나중에야, 이날 신대륙 연합의 민주주의가 첫발을 내딛었네 뭐네 떠들겠지만, 사실 연합 사람들 본인들도 이날의 의의를 학자들 논쟁 벌이는 것을 곁다리로 듣기 전까지는 딱히 신경쓴 바 없었다.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당연히 사람이 모이면 팅을 열기 마련이라 여겼고, 구경하러 온 원주민들에게도 중의를 모아 추장을 뽑는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였다¹.

나머지 정착민들도, 사실 먹고사는 문제가 으뜸이요, 제 맘에 드는 사람이 의원으로 뽑히는 것이 버금가는 고민이었을 뿐, 제도 자체에 대해서는 딱히 깊게 생각할 이유도, 그럴 겨를도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모이니까 나름 모양새가 그럴듯하지 않나요?”

각 정착촌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어 이곳 공터로 찾아온 이들, 그들이 정말로 각 정착촌 사람들의 총의에 따라 의원으로 선출되었음을 보증할 증인들. 의원의 수만큼 각지에서 모여든, 신대륙 연합 호국경을 결정할 각 정착촌의 선거인들.

그렇게 이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좋은희망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작년에 막 나무 베어내며 생긴 공터에 모였다.

임시의회 정원이 오십 명 조금 넘기는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시그리드 말도 일리가 있었으나, 외부인들, 즉 학자들과 정화 등 곧 열릴 사법재판의 피고들이 보기에는 ‘고작 이백 명’일 뿐이었다. 근처 농장과 숲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구경꾼까지 다 합쳐도 오백 명이나 될까.

“오래 끌 것도 없는 일이다. 얼른 끝내자꾸나.”

팅을 주재해본 관록이 있는 스노리 노인이 시그리드 귓가에 대고 말했다.

시그리드와 지슈카 등등, 중요한 사람들이 모두 눈빛을 주고받고, 곧 스노리 노인이 눈치껏 공터 가운데로 지팡이 짚고 걸어나왔다.

“금일 회합을 시작하겠소. 흔히 늙은이라고도 불리는 토르할의 아들, 본인 스노리가 이 자리에서 사회의 중임을 맡게 된바, 이의 있는 이는 지금 일어나기 바라오.”

물론 스노리 노인도 그린란드 토박이인만큼 당연히 백송고리당 소속이었지만, 이미 임시의회에서 인망을 꽤 얻기도 했거니와, 보헤미아인이나 독일인 (혹은, 최악의 경우를 굳이 생각하자면, 게미스토스 플레톤)이 사회를 맡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더구나 스노리 노인은 이번 선거에 출마를 거부한바, 오늘이 임기 마지막 날이었다. 백송고리당 의원이 사회를 보는데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의가 없다면 이대로 진행토록 하겠소.”

딱 그때, 시그리드 어깨에 앉아 있던 리프가 저의 은인을 알아보았는지, 사람들 부산스레 구경하는 통에 놀라 도망가는 쥐를 바라보았는지 짹짹거리며 푸드득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치 개회를 알리는 듯한 모습에, 위엄과는 영 거리가 먼 이 회합에 약간이나마 분위기라 할 만한 것이 생겼다.

“먼저 의원 선거 결과를 공포하도록 하겠소. 금번 선거에 앞서 임시의회는 총 쉰여섯 개 선거구를 확정하였으며, 지난 한 달 동안 개척민들의 의향을 종합하여 각각 의원을 선출하였소.

본인이 호명하는 선거구의 당선인과 증인은 각각 앞으로 나오시오.”

너무 넓게 퍼져 있는 인구와 턱없이 부족한 행정력으로 인해, 연합 지도부가 결정하는 것은 딱 선거구를 정하고 납세자에게 선거를 허용한다는 원칙을 전파하는 것까지가 한계였다.

시그리드가 듣기로도 선거 양상은 각양각색이라, 영주가 정해준 대표와 개척민 사이에서 선출된 대표 간에 멱살잡이까지 벌어지며 끝까지 선거전이 벌어진 독일인 정착촌이 있는 반면, 농한기인 여름에 미리 주민들끼리 합의를 하여 지금 있는 대표를 유임케 하기로 결정한 보헤미아인 정착촌도 있었다고 했다.

“북쪽부터 시작해 남쪽으로 내려가겠소. 먼저 남녘정착지 제1구.”

스노리 노인이 따뜻한환영 공방의 따끈따끈한 신제품 ‘안경’을 눈앞에 가져다 대며 명단을 읽어내려갔다.

“헤르욜프스네스 태생이자 아르니의 아들인 빨간코 토르욜프. 백송고리당 의원으로 선출되어 이 자리에 섰소이다.”

“스칼홀트 사람, 헬기의 아들 할도르입니다. 토르욜프가 납세자 남녀 일백십오 명 중 일백십 명의 지지로 의원으로 뽑혔음을 증언합니다.”

“다음, 남녘정착지 제2구.”

“흐발세이 태생, 기수르의 딸 구드룬, 백송고리당 의원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엥?”

의원과 선거인, 청중 중 대략 절반가량이 놀라고, 나머지 절반은 저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놀랐다는 데 놀랐다.

“뭐가 ‘엥’이오?”

“수녀원의 할매들 설득해서 양들을 데려온 게 저 구드룬이오. 구드룬 아지매 없었으면 남녘정착지에서 양모 옷감 구경하긴 어려웠을걸².”

남녘정착지 사내들은, 아예 자리가 하나뿐이라면 모르겠으되, 대표 자리가 둘이라면 그중 하나쯤은 여인이 맡아도 괜찮다고들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추장이 하나 있으면 부족어머니Clan mother도 하나 있는 것 아닌가? 이방인들 법도는 알다가도 모르겠소.”

“그러게. 당장 시그리드 대추장도 여인 아니오? 오늘 지난 뒤에도 대추장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외에도 사람들 구설에 오를 법한 인선은 여럿 나왔다. 어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냐는 그때그때 달랐지만.

좋은희망 교외에 정착한 니놀리노 사람들로 이루어진 좋은희망 제4구에서 술집 주인 애덤이 뽑히자, 저 니놀리노 놈들은 가을철 부족의회에서도 자리 차지하고 있으면서 뭔 욕심을 부리느냐며 미크막 사람들이 흉을 보았다.

좋은희망에 살지도 않을 뿐더러 공용어도 시원찮은 바스크 포경업자 요세바(무소속)가 뽑혔을 때도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다른 바스크인들이 격앙된 목소리로 요세바가 지난해 해난사고로 죽은 바스크 사람들 유족들을 저의 사비를 털어 좋은희망으로 데려오고 일자리까지 마련해주었다고 알린 뒤에야 소란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허나 본격적으로 공터가 시끄러워진 것은 따뜻한환영부터였다.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신문은 물론이요 학자들까지 하나같이 의원 자리가 엄청난 감투라고 떠들고 있는데 사람 마음에 욕심이 안 동할 수가 없지. 이번에 의가 상한 사람들이 꽤 있을 게다.”

오늘은 가재당 중진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한 얀 후스가, 야유가 오가는 것을 보며 절로 머쓱해져 마음에 첨언했다.

저 야유가 독일어 욕설이라면 모르겠으되 – 사실 독일어로 시끄럽게 떠들면 뭐라 말해도 욕설처럼 들리긴 하지만 – 죄다 보헤미아 말이었다.

“사람 사는 곳에 다툼이 없을 수 없지요. 시그리드가 군소리 나오자마자 이 선거를 입안한 것처럼, 뒤에서 몰래 다투면서 등에 비수 찌르는 것보다, 이렇게 당당하게 갈등을 벌이는 쪽이 더 낫다고 봅니다.”

“허허, 우리 지슈카 대장도 그새 한 당파를 이끄는 사람이 다 되셨소.”

후스는 반박하는 대신 부드럽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슈카 말마따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신대륙 연합은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갈 것이었으므로.

한편, 누구보다 앞장서서 보헤미아인들 흉을 볼 것만 같던 독일인들은 저 구석에서 저들끼리 궁시렁거리고 있었는데, 곧 밝혀진바 저들 의원들을 험담하는 데도 바빠서 보헤미아 의원 흉을 볼 겨를이 없는 것이었다.

한 국가의 향후 사 년 간 운영을 결정할 엄숙한 자리라기보다는, 마치 동네 촌장 뽑는 자리 내지는 마을 인기투표 같은 것 쉰여섯 마당을 하나로 합쳐놓은 것 같은 부산스러움.

그 한쪽에 앉아 수를 세고 있던 파울 주교가 시그리드를 불렀다.

“이거 이러다가 좀 묘하게 되겠는데.”

엄밀히 말해 신대륙 연합의 선거권자는 아니지만, 그린란드 회사 사장 자격으로 참석한 파울 주교 앞에는, 나뭇가지로 그은 금 여럿이 있었다. 아마 두 당의 당선인들을 세고 있던 것이리라.

“아마 어느 한쪽도 확실하게 우세는 못 점할 거예요. 굳이 예측한다면, 아마 가재당이 한두 석쯤 더 많이 가져가지 않을까 싶은데요.”

시그리드가 한 당의 당수치곤 퍽 담담하게 저들 당의 근소한 패배를 거론했다.

사실 이것만 해도 꽤 선방한 셈이기는 했다. 가재당의 공약에 비해 신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교역망을 이루어 이익을 취한다는 백송고리당의 공약은 다소 거창한 면이 있었고, 그만큼 호소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글쎄, 꼭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니?”

“다른 경우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을 텐데요.”

그러나 다른 이들처럼 양당간 대립구도에만 몰두하고 있던 시그리드가 놓친 점이 하나 있었다.

스노리 노인의 젊었을 때와 다름없이 정정한 목소리가, 어느새 따뜻한환영 주변을 모두 훑었다. 철공소 주인 야네크, 여름항구 촌장 이갈리코, 연임에 성공한 잉글랜드 목수 윌리엄 백스터 등등...

우애의 도시 및 교외의 아홉 선거구가 백송고리당 테오도로스의 선출을 끝으로 호명을 마치고, 이어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독일계 정착촌 차례가 되었다.

작명에 재주 없는 것은 유럽 사람 대부분이 공유하는 병폐지만, 독일 사람들은 그 정도가 약간 심한지라, 대개는 ‘새마을’, ‘경치좋음Fairview’, ‘샘벌Springfield’ 등등 공용어로나 독일어로나 따분하기 그지없는 지명을 짓곤 했다³.

“다음으로, 큰 오토의 새마을, 아돌프네 샘벌, 미하엘네 샘벌, 작은 오토의 새마을 선거구.”

“탐험기사단의 기사이자 귀부인 시그리드의 명예를 지키는 본인, 발제Walsee의 알브레히트! 실로 영광입니다. 본인이 교역의 강과 옥수수 강 사이 육로를 개척한 소소한 공로를 세운 것 하나만으로 과분한 자리에 올랐으니, 남은 만큼은 반드시 봉사의 미덕으로써...”

대가 거의 끊긴 발제 가문의 자제 알브레히트가 여기저기 해진 정장을 차려입고 나와 일장연설을 시작하려던 차⁴.

“또한 이 자리를 빌어, 본인의 선거운동을 도와주신 옥스퍼드 대학의 학자분들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충직한 봉신 아돌프 경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어엇, 아직 다 안 끝났는데...”

“당선 소감은 선거구에 돌아가서 밝히시오.”

독일 기사들 망신을 다 시키는 알브레히트를 친히 끌고 나가는 보안관 디폴트였다.

“아까 저 사람, 합스부르크네 아돌프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

“네, 맞아요.”

잠깐 영향력을 발휘하는가 싶다가 금방 묻혀 사라지는 듯했던 NSDAP는, 이번 선거를 계기로 부활하였다.

맨 처음, 온통 무식쟁이와 이교도, 이단 투성이인 신대륙 모습을 대면하고 충격에 빠져 있던 학자들 눈에 그나마 상식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바로 구대륙의 기득권을 대변한다 할 수 있는 아돌프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몇몇 학자들은 독일인 마을에 들릴 때면, 종종 ‘도저히 가재당을 못 뽑겠다 싶으면, 백송고리당보다는 차라리 그 나치당인지 나소당인지 하는 당의 후보를 지지하는 쪽이 나을 것이다’하는 말꼬리를 붙이곤 했다.

독일계 이주민들도 이 땅의 풍토에 적응하면서 점차 영주님이 저들 대장으로 정해준 놈팽이를 끌어내리곤 했지만, 개중에는 그 대장 자리를 체스로 따낸 게 아님을 입증하듯 제법 인망을 얻어 대표나 촌장 자리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니면 저 알브레히트처럼 다른 방식으로 인기를 얻는 경우도 있었고.

하지만 시그리드나 지슈카와 달리, 그저 ‘같은 독일인끼리 서로 잘 챙기고 살자’는 표어가 전부인 NSDAP는 화려하게 부활하지는 못하였고, 독일계 정착지에서 인기 있는 사람 몇몇을 입후보시키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대로 가면...”

“... 라이더Rider 씨가 정당한 선거로 당선되었음을 증언합니다.”

NSDAP당 의원으로 슈베린 사람 요한 라이더 당선. 그렇게 NSDAP당 의원은 딱 두 명이 되었다.

쉰여섯 중 두 명이라면 썩 괄목할 만한 숫자는 아니었다. 보헤미아계 정착지뿐 아니라 우애, 푸른들판 등지에서도 제법 지지를 받은 가재당 의석 수가 하필 딱 스물일곱에 그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얼렐레.”

시그리드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에 얼떨떨하여 할 말을 잃었다. 졸지에 나치당에게 캐스팅 보트가 쥐어졌던 것이다.

이왕이면 앞으로 4년 동안 굳이 다수결로 뭔가를 정해야 할 만큼 의견이 갈리는 일이 없는 쪽이 좋겠지만, 만약 시그리드가 그렇게 다수결에 호소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백송고리당과 무소속 의원들에 이어 저 나치당까지 모셔와야 겨우 과반이 될 터.

가재당은 굳이 나치당 없이 무소속 의원들 두셋만 포섭해도 과반을 만들 수 있으니 조금은 저쪽 눈치를 덜 봐도 될 테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어서 호국경 선거를 시작하겠소. 각 선거구에서 오신 선거인들은 앞으로 나오시오.”

시그리드나 파울과 똑같은 셈을 마친 사람들이 술렁이든 말든, 선거 결과는 계속 발표되어야 했다.

어디서 의자를 가져온 – 철공소에서 못이 쏟아져나면서 갑자기 좋은희망에는 가구가 흔해졌다 – 스노리 노인이 선거 속행을 알렸다.

다시금 사람들 이목이 공터 가운데로 모였다.

식견 있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시그리드가 당선되리라 짐작들은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슈카 또한 보헤미아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고, 지난번 투슈판 원정 이후로 더욱 그 이름을 떨쳤다.

더구나 의원 선거에서 어느 정도 입증된 것처럼, 가재당을 지지하는 민심 또한 탄탄한 상황.

이 선거를 처음으로 제안하고 지금까지 연합을 이끌고 온 시그리드가 압승을 거둘지, 아니면 시그리드가 그것을 빌미삼아 다소 독단적이라 해석될 만한 일들을 많이 벌인 것에 대한 불만이 고개를 들며 신승을 거두는 데 그칠지, 사람들의 이목(과 내깃돈)이 쏠렸다.

비록 결과 자체는 거의 정해져 있다지만, 향후 사 년 간 가재당이 지닐 비중에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는 호국경 선거.

“남녘정착지 선거인, 올라프의 아들 마르테인.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 리프트라사가 호국경으로 유임되는 것을 지지합니다.”

쉰여섯 개 선거구에서 나온 쉰여섯 명의 선거인단이, 하나씩 지지하는 후보를 밝히기 시작했다...

“아니, 여기서 끊자고? 그런 게 어디 있소?”

역사적이긴 했지만 썩 장엄하거나 멋들어지진 못했던 신대륙 연합의 첫 선거가 끝나고, 삼삼오오 숙소로 돌아온 학자들 사이에서는 다시 한 번 논쟁이 벌어졌다.

“이미 의원 선거만으로도 우리가 맡은바 할 일을 다했다는 것은 분명히 드러날 것이오. 그간 받은 은화만큼의 몫은 했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 솔직히 말합시다. 지금 그대가 이 호국경 선거 결과를 글로 남기려는 것은, 런던으로 돌아가서 책으로 내기 위함이겠지. 그렇지 않소?”

“정확히 보셨소. 원고료도 원고료지만, 유럽의 사람들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마땅히 알아야 하오. 우리가 무엇을 하였는지, 또 무엇을 목도하였는지, 그 의미를 다들 알고 있지 않소?”

“그러니까 의원 선거까지만 적어서 출판해도 충분할 것이라는 말이외다. 호국경 선거까지 대중에게 알리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오.”

언제부턴가 자신들이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은 뒷전으로 밀어버리고서 사뭇 진지하게 이 선거에 관여하고 또 관찰하게 된 학자들.

비록 겉보기에는 마을 촌장 선출하는 것보다도 더 난잡하고 우스꽝스러울지언정, 그 이면에는 단단하게 뿌리를 박기 시작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모든 학자들은 알고 있었다.

쉰여섯 명 사람들 중 서른여덟. 압승이라 하기에는 지슈카 지지를 천명한 이들이 신경쓰이고, 신승이라 하기에는 과반을 한참 넘긴 득표를 기록하며 호국경 연임에 성공한 시그리드 리프트라사.

그러나 막상 그 선거 이야기를 글로 옮기려 하니, 어떻게 쓰더라도 뒷탈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학자들은 하나둘씩 깨닫게 되었다.

“선거 결과를 책으로 펴낸다고 해 봅시다. 시그리드 각하가 ‘고작’ 서른여덟 표를 얻었으니 정당성이 부족하다고 할 것이오? 아니면 시그리드 각하가 서른여덟 표‘나’ 얻었으니 정당한 군주라고 논평할 것이오? 어느 쪽이든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나오지 않겠소?”

은화나 알량한 자존심에 이끌려 신대륙까지 먼길 올 정도의 학자들은, 그만큼 집안이나 재산이 아닌 실력으로서 학위를 얻은 이들이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지위가 높았고 가멸찬 재산이 있었다면, 어지간해서는 이 땅까지 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므로 모두들 그 총명한 지성으로써 상상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나올 질문은 이러했다.

‘그렇다면 군주는 얼마만큼의 지지를 받아야 비로소 정당하게 군림한다고 일컬을 수 있게 되는가?’

반대로 시그리드가 정당한 군주라고 논평한다면, 매한가지로 곤란한 질문이 꼬리처럼 따라붙으리라.

‘그렇다면 그만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군주는 정당하지 못한 것인가?’

차라리 시그리드가 그들을 포함한 다른 모두의 예상대로 – 지슈카를 지지한 선거인들도, 당연히 시그리드가 당선되리라 믿고서 소신껏 저들 의견을 밝힌 것이리라 – 만장일치에 가까운 압승을 거두었더라면, 유럽에 돌아가서도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전능하신 주님의 섭리에 따라 시그리드는 – 비록 이단자 마녀지만 – 신대륙 연합의 군주로서 우뚝 섰고, 얀 지슈카의 ‘찬탈’ 시도가 실패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렇게 둘러댈 수 있었으리라.

허나 이대로라면...

케임브리지든, 옥스퍼드든, 파리든, 모두 인자하다고는 빈말로라도 말하기 어려운 헨리 왕의 통치 하에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밤만큼은 그간 가재니 백송고리니 으르렁대던 것을 잊고서 모두가 머리 맞대고 지식인들의 공용어 라틴어로 심각한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

“잠깐, 밖에서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나?”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창문을 슬쩍 열어보니, 보이는 것은 익숙한 은발.

그리고 그 곁에서 라틴어 옮겨주고 있는 얀 후스.

“하하, 미안해요. 찾아뵈려고 하고 있었는데, 뭔가 두런두런 말씀을 나누고 계시길래 궁금해서 그만 엿들어 버렸어요.”

호국경이 멋쩍게 웃었다.

“저희에게 어떤 용무가 있으시기에...”

“이제 선거도 끝났으니, 투슈판을 불태운 주범들에 대한 재판을 준비해야지요.”

“아...”

원래는 선거가 겉치레요 재판이 본래 목적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그게 뒤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듣자하니 다른 고민이 있으신 것 같더라고요.”

후스가 창문에 고개를 들이밀며 말을 받았다.

“이 사람이 그 고민을 해결해드릴 수 있소이다.”

악명 높은 이단자인 동시에,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온 유럽의 교회와 대학을 뜨겁게 달군 존 위클리프의 계승자 중 하나인 얀 후스. 그러므로 학자들 또한 허튼소리라고 치부하는 대신 반신반의라도 하면서 귀를 열었다.

“어떻게 해결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제 선거도 끝났고, 학교에 나눠줄 교과서 인쇄도 끝났소. 마침 이렇게 된 것, 당분간 여기 남아 계시는 게 어떻겠소? 여러분이 출판하고 싶지만 유럽 군주들의 눈치가 보여서 도저히 출간할 수 없는 원고들이 있다면, 모두 여기서 인쇄한 다음 유럽에 넘기도록 하겠소.”

“허나 우리에겐 생업이 있는데...”

“그 생업이라 해봐야, 박봉 받으면서 강사 노릇하는 것뿐이지 않소이까. 이곳에 남아서, 소소하게 사람들 가르치는 일, 그리고 우리가 연구를 요청하는 사안에 대해 탐구하는 일만 맡아주신다면, 급여는 충분히 챙겨드리겠소이다.”

“여기에 대학을 차리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대학을 설립하는 것은...”

“어,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흠흠, 호국경의 이름으로 대학 설립을 허가합니다.”

그러나 곁에서 무슨 얘기인지 물어보던 시그리드가 반색하며 시그리드 행정부 2기의 첫 번째 행정명령을 내림에 따라, 이의 제기하려던 학자들은 금방 할말을 잃었다.

그렇게, 곧 진행될 재판에 대해 논의하기도 전에 신대륙 최초의 대학 설립이 결정되었다.

한편, 합스부르크의 아돌프처럼 학자의 양심이나 식견과는 거리가 꽤 있는 속물도 분명 존재했다. 저의 주군인 프리드리히 앞으로 바친 서신에서, 아돌프는 자신의 NSDAP당이 어떻게 신대륙 정국의 주도권을 획득했는지를 철자 종종 틀린 미사여구를 동원해가며 과장된 말투로 밝혔다.

아첨과 과장으로 가득한 서신의 행간을 읽지 못한다면, 마치 맨 처음 시그리드가 구혼자들을 돌려보내면서 독일 제후들에게 내밀었던 달콤한 미끼, 신대륙에 이민자들을 보내면 연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 마치 참인 것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내 뜻대로 되었구나!”

저의 뜻도, 아돌프의 뜻도 아니요, 그저 시그리드가 던진 미끼에 낚인 것에 불과했으나, 야심 가득한 합스부르크의 무일푼공 프리드리히는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지금 아마 유럽에서 지기스문트 다음으로 위세등등하다 할 수 있을 잉글랜드의 헨리조차 실패한 신대륙 진출. 그것을 자신은 약간의 계교와 별 가치 없는 영민 몇몇을 이용해 해내지 않았던가?

“이주민을 더 보내야겠군. 티롤에 사람을 보내, 슬슬 고갈되어가는 금광과 은광은 과감히 정리하고 광부들과 그 가족까지 모두 이민을 준비토록 하게나.”

그렇게 기회의 땅 빈란디아로 향하는 배편에 다시 한 번 이주민들이 가득 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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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긴집사람들, 즉 이로쿼이 연맹 부족들은 원 역사에서도 뉴잉글랜드 개척민들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등장한 민주적 의사결정 제도가 자신들의 정치적 제도와 유사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1744년 펜실베이니아의 랭커스터에서 뉴잉글랜드 개척민 대표들과 이로쿼이 대표들이 토지 할양 문제 및 프랑스-알공킨 연합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문제를 두고 회담을 열었을 때, 이로쿼이 연맹측 대표이자 회담의 공동주최자였던 오논다가족 추장 카나사테고는 뉴잉글랜드 개척민들이 ‘우리의 현명한 조상들이 세운 법도를 따르기로’ 한 것을 칭찬하면서 덕담을 남기기도 했지요.

이로쿼이 연맹의 추장들의 이러한 발언은, 훗날 이로쿼이 연맹의 ‘위대한 평화의 법’이 미국 헌법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보다는 이미 중세부터 유럽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던 사회계약론 사상과 그 근간이 된 로마법 전통 등의 영향이 더 컸겠지만, 새로운 정체를 꾸리기 위한 고민을 하던 18세기 후반 식민지인들이 이로쿼이 연맹의 정치제도를 의식하면서, ‘적어도 저 야만인들보다는 더 나은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품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2. 본작 초반에 잠깐 언급된 것처럼, 중세 후반까지도 북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당대 유럽 본토에 비해 상당히 높았습니다. 이는 딱히 북구 사회가 ‘문명화’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여성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었지요. 역시 이전에 작가의 말에서 잠깐 소개했듯, 중세 후기까지 화폐로 기능했던 양모 옷감 바드말을 직조하는 일은 순수하게 여성의 몫이었고, 남성은 바드말을 다루는 곳에 출입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습니다.

이로쿼이 연맹을 비롯해 많은 북미 원주민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것도, 남녀 간에 유기적인 분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부족의 생존 자체가 어려웠던 환경적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통념과 달리 미국에서 가장 흔한 지명은 페어뷰도, 스프링필드도 아닌 워싱턴과 프랭클린, 매디슨 등 건국의 아버지들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인명을 제외하더라도 클린턴, 알링턴처럼 이미 영국에 흔했던 지명을 그대로 가져온 경우가 더 많고, 그 외에도 창립자의 성을 그대로 붙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심슨가족』의 스프링필드도 여기에 속합니다.) 다시 말해, 고향 마을 이름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굳이 ‘새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인 정도로도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 창의적인 작명이라 하겠습니다.

4. 발제 가문은 14세기 중후반 유럽에 닥친 사회경제적 위기의 피해자입니다. 본디 슈바벤의 하급기사 출신이던 발제 가문은 13세기 말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원을 받아 빠르게 가세를 키웠고, 후사가 단절된 중소 영주들의 영지를 낼름 삼키는 방식으로 오스트리아와 체코, 크로아티아 곳곳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나 14세기 말 흑사병과 잦은 전란을 겪으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었고, 중유럽 각지에 퍼졌던 분파들은 하나씩 대가 끊기고 몰락하게 되지요. 마지막까지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던 본가도 15세기 말 대가 끊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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