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89화 (89/116)

좋을 때든 나쁠 때든 (1)

21. 좋을 때든 나쁠 때든 Good Times, Bad Times (1) - 레드 제펠린 (1969)

1419년 초겨울, 첫 서리가 내릴 무렵.

좋은거래에 교역을 위해 모여들었던 원주민들에게, 서리는 교역철의 끝과 겨울나기의 시작을 알리는 징표였다.

대자연의 신호에 따라, 다들 저들 부족으로 삼삼오오 돌아가고 있었는데, 지금껏 매년 그러했듯 개중 몇몇은 돌아가지 않고 좋은거래에 눌러앉았다.

그중 하나는 긴집사람들 연맹에서도 주술과 의술로 유명한 거짓낯 협회False Face Society¹의 치유술사로, 좋은거래 주변에 정착했거나 주변을 오가는 원주민들에게 의술을 베풀고자 몇 년간 머물기로 작정하였다.

치유술사가 처음으로 이방인 환자를 맞은 것은, 그로부터 보름쯤 뒤였다. 별 생각 없이 강가에 앉아 남쪽에서 찾아오는 나그네들을 구경하던 중, 치유술사에게도 익숙한 마음의 병을 앓는 기색이 확연히 드러나는 젊은이를 발견했던 것이다.

“자네, 상사병을 앓고 있구만!”

억양 강한 공용어로 치유술사가 물었다. 헬라스식 공용어와 프랑스식 공용어, 보헤미아식 공용어, 그린란드식 공용어 등 온갖 괴상한 억양에 모두 익숙해져 있던 젊은이로서는 알아듣는 데 하등 지장이 없었다.

치유술사가 묻자마자 화들짝 놀란 것만 보아도, 얼마나 말이 잘 통했는지를 족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잇몸이 따갑게 부어오르든, 관절이 화끈화끈 욱신거리든, 가슴이 불타는 듯 옥죄이든, 바람과 불이 사람 몸에 들어와 생기는 병은 모두 우리 거짓낯의 소관이라네.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고 상사병 걸린 젊은이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날부로 치유술사 노릇은 관둬야 하겠지. 자, 병 낫기를 바란다면 이 늙은이를 따라오게나.”

젊은이는 나름 오래 상사병을 앓았는지, 금방 치유술사의 말에 넘어가 그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저기, 혹시... 그, 이런 약을 만들어주실 수 있으신지는 모르겠는데...”

급조한 것치곤 꽤 그럴듯하게, 담배 연기와 온갖 향으로 가득 메워지고 말린 약재가 수두룩한 오두막에 도착한 젊은이가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사랑의 묘약을 만들어달라고?”

“헉! 어떻게 아셨습니까?”

“여기 좋은거래에 스베인 추장이 살지 않나. 그 부부를 부러워하는 남녀들이 그새 벌써 수두룩하게 이 사람을 찾아왔다네.”

신대륙 연합의 개척촌들이 점점 마을 모양새를 갖춰가면서, 저들 옆구리 허전하다는 것을 의식할 여유가 생긴 남녀들은 배필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덕에 지난해부터 새 생명이 여기저기 태어나고 있었고, 실패했든 성공했든 온갖 기묘한 연애담이 선거와 더불어 술집의 단골 수다거리가 되어주었다.

귀부인 시그리드의 마음을 얻겠노라 호언장담하던 탐험기사단원이 제 행장 챙겨주던 평범한 농민의 딸과 눈이 맞아, 기사의 명예고 귀부인이고 모른체하고서 눌러앉는 일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합스부르크의 중매쟁이 아돌프가 인스브루크에서 데려온 고아 처녀가 제 정해진 낭군이 싫다고 도망나와서는, 오다와 족 상인과 결혼하고 좋은거래에 눌러앉는 일도 있었다.

“어디 보자... 마음 빼앗아간 상대가 이곳 주변에 사는가?”

“아닙니다. 여기서 한참 떨어진 좋은희망에 삽니다.”

“저런, 그러면 여기서 약을 만들어봤자 쓸모가 없겠군. 내 용한 약초 여럿을 내줄 테니, 그곳에 닿은 다음 끓는 물에 우려내게나.”

치유술사는 그 모양이 사람을 닮은, 만드라고라Mandragora 뿌리처럼 보이는 약초를 비롯해 몇몇 약재를 건네주었다.

젊은이는 왐품으로 값을 치르고는, 남에게 제 속마음을 일부나마 드러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감사하다 얼버무리면서 후다닥 사라졌다.

어찌나 재빠르게 사라지는지, 치유술사가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묘약과 거짓낯의 약초 처방은 그 사용법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해줄 겨를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변복하고 우애에서 몰래 빠져나온 콘스탄티노스 황자는 올곧은 성정의 젊은이라, 약물 오남용을 범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치유술사에게 약초를 받자마자 도망치듯 달아나, 때마침 강 하구로 향하던 배를 얻어 탄 콘스탄티노스 황자. 선거도 끝났겠다, 저도 이제 성인 행세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겠다, (나름 어른스럽다고 착각하고 있는) 수염도 나왔겠다, 이번에야말로 제 마음을 고백할 작정으로 먼 길을 나선 터였다.

신대륙 연합 사람들 중 황자로 하여금 사랑의 묘약을 구하게끔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들은, 막 우애 남쪽에 도착한 독일인들뿐일 것이다.

중세 유럽인들의 통념과 달리, 콘스탄티노스가 애지중지 싸들고 가고 있는 이 ‘사랑의 묘약’은, 달여 먹인 상대가 저와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달여먹은 뒤 고백을 해야 비로소 효험이 있는 약재였다.

그러나 성급함으로 말미암아 그 복용법까지 듣지는 못한 콘스탄티노스 황자는, 그저 싱글벙글하며 좋은희망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야, 재수가 없으면 승객들끼리 번갈아가며 노를 잡기 마련이지만², 강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그저 물살따라 흘러가기만 하면 그만이므로 몸이 편하였다.

몸 편한 만큼 마음은 오만 잡상에 시달리며 사흘길을 간 끝에, 교역의 강이 넓어지며 슬슬 강이라기보다는 만灣이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리게 되는 지점에 닿았다.

“다들 운이 좋으시군. 오늘내일 중으로 좋은희망에서 배가 도착할 게요.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소.”

뱃삯을 챙기면서 뱃사공이 말했다.

큰여울목, 혹은 미크막 말을 그대로 따와 케베크나 퀘벡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에는 원래 조그만 마을 하나가 있었는데, 좋은희망-좋은거래-옥수수강 교역로 사이의 마을들이 대개 그러하듯 요새는 이방인들도 몇몇 들어와 조그만 여관 겸 교역소를 차려둔 상태였다.

특히 큰여울목은 그런 곳 중에서도 유달리 입지가 좋았다. 배 한 척으로 좋은거래와 좋은희망을 오가는 것보다, 이곳 큰여울목에 한 번 멈춰 강을 거슬러 오르거나 연안 따라 항해하는 데 적합한 배로 갈아타는 쪽이 훨씬 유리했던 것이다.

과연 해질녘에 바다 쪽에서 코그 한 척 – 아마 좋은희망에서 건조한 것일 테다 – 이 입항했다. 내일 해 뜨는 대로 사람들 싣고 바로 출항한다고 하였으니, 뱃사공 말이 틀리지 않은 셈이었다.

“그래, 요새 좋은희망에 뭐 얘깃거리라 할 만한 게 있소?”

“좋은희망에 얘깃거리가 있냐고? 차라리 해가 아직도 동쪽에서 뜨고 있냐고 물어보시지 그러시오?”

몇 년 전 왐품으로 떼돈 번 어느 미크막 사람이 차린 여관에서는 금방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한쪽은 좋은거래에서 강 하구로 내려오고, 다른 한쪽은 좋은희망에서 거래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으니, 얘깃거리는 차고 넘쳤다. 특히 좋은희망쪽이 더더욱.

“어디 보자, 선거 얘기는 들으셨을 테고.”

“그걸 못 들은 사람은 저기 남쪽 바다 오가는 뱃사람들이 전부겠지. 요새는 좋은거래에도 신문이 닿소.”

좋은거래에서부터 황자와 동행했던 승객이 미크막 ‘전통’ 과실주를 들이켰다. (미크막 사람들이 ‘전통’이니 ‘비법’이니 하는 수식어를 붙인 물건들은, 대체로 진짜 전통이라기보다는 대충 이방인들 입맛에 맞게 꾸며낸 것이 훨씬 많았다.)

“시그리드 각하가 이제 뭐냐, 그, 행정부라는 것을 제대로 차리겠다고, 무슨무슨 장관들을 새로 두고 있다던데, 그 얘긴 들으셨소?”

잠깐 머리 긁적이던 좋은희망쪽 사람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니, 그건 처음 듣는 얘기요.”

“장관까지는 호국경이 의회 동의를 받아 임명하는데, 그래서 지슈카 대장도 이젠 지슈카 국방장관이시오. 후스 선생이랑 플레톤 그 양반도 한 자리씩 꿰어찼고.”

“국방부? 뭔 관공서 이름이 그렇소?³”

“각 부처 이름은 시그리드 각하께서 직접 정하셨다더군.”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시그리드의 총명함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간혹 그 총명함이 순진함에 가려져서 헛똑똑이짓으로 이어지는 걸 걱정할 뿐이지.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이거요. 각 장관 아래에서 일할 사람들을, 글쎄, 시험을 쳐서 뽑는답디다.”

“시험?”

이곳 신대륙에서 사서오경으로 과거를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요, 대신 성경으로 시험을 볼작시면 정부가 후스파나 롤라드파 몇몇을 제외하면 모조리 로마인들로 채워질 판이었다.

“산수랑 논리학, 그리고 공용어. 이렇게 세 개 과목에, 부처별로 각각 한두 과목씩 추가해서 네다섯 개 과목을 통과하면 행정관으로 삼는다더군.”

“뭐 그런 방식이 다 있소?”

“어디 도시나 영지에서 행정관 노릇하는 집안 사람이 이곳까지 올 리가 없잖소? 마땅한 방도가 없으니까 그렇게라도 사람을 뽑는 거지. 그렇다고 장관들이 알아서 뽑으라고 하면 또 어디선가 누군가는 볼멘소리 할 것 아뇨.”

“하기야, 것도 그렇군. 그런데 그런 해괴한 방법은 누가 고안한 게요? 또 시그리드 각하신가?”

“아니, 의외의 인물이라오. 시그리드 각하한테 포로로 잡힌 타이간인가 뭔가 하는 환관이 건의했다고 하더군. 그게 바로 카타이에서 인재 뽑는 방식이랍디다.”

“타이간? 아, 그놈.”

“알고 계시오?”

“알다마다. 내가 이래 봬도 비트코프 언덕부터 투슈판까지 지슈카 대장, 아니, 장관 각하 따라다닌 사람이오. 그나저나 타이간 그놈은 뭔 바람이 불어서 건의를 했는지 모르겠구만.”

“뭐, 보나마나 제 죄가 중한 걸 아니까 어떻게 각하께라도 잘 보여보려고 한 거겠지.”

“죄? 아, 맞다. 재판 치른다고 했었지.”

“맞소. 내가 떠나올 적에는 얼추 결론이 다 나 있었고, 최종 판결만 기다리는 상황이었소. 아마 임자들이 좋은희망에 도착할 무렵에는 모두 끝나 있을 게요.”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죽음을 맞는 것은 오직 아랫것들에게만 해당하는 일. 산 채로 포로로 잡히는 것은 귀족의 당연한 권리였다. 포로의 몸값을 받는 대신 재판에 넘긴다는 것은 조금 생소한 일이었지만, 딱 그 정도.

요한이든 지몬이든, 못된 놈들인 것도 맞고, 지나가는 게 보이면 기꺼이 돌이나 오물을 던질 법한 놈들인 것도 맞았지만, 그놈들이 어떤 판결을 받든 당장 신대륙 연합 개척민들의 삶에 직접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 생각하기로는 그랬다.)

선거도 끝났겠다, 그저 저들 손으로 뽑은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잘 처결하리라 믿고 넘길 뿐.

“그보다, 그 시험 얘기나 더 해 주쇼. 누구나 그 시험을 볼 수 있는 게요?”

“왜, 관심 있으쇼?”

“나라고 나리 소리 듣지 말라는 법 있나? 환영이랑 우애 사이 마을에 대학인가도 세운다고 하던데, 이제라도 공부하면 뭐라도 될 수도 있지, 뭐.”

재판 얘기에 더 관심이 있던 황자는, 화제가 그렇게 도로 시험으로 돌아가는 게 썩 마뜩찮았지만, 남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 없었던지라 그저 입 닫고 구석에서 술이나 들이킬 뿐이었다.

그가 아는 시그리드라면, 아마도 어떻게든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힘을 썼을 것이었다. 논리가 궁색하다면 새 논리를 고안했을 것이요, 현실의 벽이 너무 높다면 사다리를 가져왔을 것이었다.

멋들어지게 요한과 지몬, 타이간이라는 세 악당을 단죄하였을 시그리드의 모습을 눈앞에 그리며, 황자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러나 상상은 상상일 뿐.

선거가 끝나며 다소 관심이 식은 가운데 진행된 위트레흐트의 지몬과 팔켄부르크의 요한, 그리고 대명 태감 정화의 사법재판은 다분히 현실에 입각한 판결로 마무리되었다.

세 사람의 죄목은 각각 명백하였으나, 투슈판은 신대륙 연합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일 뿐 신대륙 연합의 영토는 아니었다. 지몬이 불태운 타이노 사람들의 땅 하일란트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신대륙 연합에는 세 사람은 물론이나 그 부하들을 처벌할 권한이 없었다. 세 사람의 신병을 각각 관할하는 정부에 인도하고, 동시에 그 죄목을 소상히 밝혀 각국이 알아서 처벌토록 하는 것이 그나마 현실적으로 정의 비슷한 무언가라도 이룰 수 있는 길이었다.

법적으로 따지면, 어떤 시점부터 국가가 주권을 지니는지, 그 주권의 범위는 어떠한지, 보편인권이라는 개념은 과연 적용될 수 있는지, 어떤 법이 소급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 등등, 수많은 함의를 지닌 판결이었다.

이미 학자들 몇몇은 이 판결을 바탕으로 책 한 권씩 내고 고향에 돌아갈 작정으로, 따뜻한환영과 우애의 도시 사이 길목에 있는 담쟁이항구(뉴 헤이븐)에 머물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들이 부업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 그것이 곧 신대륙 최초의 대학이 될 것이었다.

허나 그런 이면의 사정을 모두 배제하고 판결 그 자체만 바라본다면, 결국 지몬도, 요한도, 정화도 신대륙 연합에서 처벌을 받지는 않게 되었다.

“요한은 몰라도, 지몬 그놈은 뒷배가 너무 짱짱합니다. 일을 그렇게 그르쳤으니 잉글랜드 왕이라고 지몬을 곱게 보진 않겠지만, 암만 그래도 그 헨리 놈의 이름을 등에 업고 그 난장판을 벌이지 않았습니까?”

술집 주인 헤니히가 술잔 닦으며 말했다. 나름 황자라고 대접하여 말투가 공손하긴 했지만, 간간이 거친 말이 섞여나왔다.

시그리드가 집에 없기에, 우선 때를 기다리며 기회를 엿보자는 생각으로 주점에 들어왔건만, 헤니히의 눈썰미는 나이 먹어도 그대로였기에 금방 정체가 들통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다행히, 헤니히는 황자가 이곳에 온 까닭을 그리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저 그간 좋은희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묻는 황자에게, 화를 삭이며 담담히 그 사법재판 이야기를 전해줄 뿐.

“그걸 가지고 지몬의 목을 친다면, 헨리 얼굴에도 피가 튈 겁니다. 제 체면이 걸린 이상 가만 있지는 않을 테고.

헨리가 다스리는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학자들은 물론이고, 우리 연합에 있어서도 그게 최선의 판결이긴 합니다.”

“결국 현실의 벽이 너무 높은 것이로군요.”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그 지몬 놈 빳빳한 모가지를 부러뜨리고 싶긴 하지만...”

급양형제단의 해적들은 모두가 형제요, 그 형제 중 하나이자 고틀란드에서 헤니히와도 몇 번 마주쳤던 말술 클라우스와 고데케 미헬스를 잡아 죽였노라 떠벌리고 다니는 지몬은 곧 헤니히의 원수였다.

그러나 사정이 이와 같으니, 해적 시절의 모든 원한은 그룬발트에서 튜튼 기사단장 융잉엔의 울리히를 쏘아 죽인 것 하나로써 묻어버리고 넘어가는 수밖에.

“마보Mabo 그 녀석은 원통하다고 울부짖더이다. 아마 시그리드 아씨는 녀석을 달래러 갔을 겁니다.”

“마보라고요?”

“지몬이 모조리 불태웠다는 그 ‘구원자’ 섬인가 하는 곳의 생존자입니다. 투슈판 전투 끝난 다음에 아씨와 함께 이곳 좋은희망으로 왔지요. 그 재판에서 증인으로 참석도 했고요.”

목숨을 걸고 지몬의 배에서 도망쳐, 와스테카 사람들에게 이방인들의 위험을 경고했던 타이노 사람 마보는, 세 사람 모두 멀쩡히 신대륙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데 절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저의 잘못이라곤 그저 유럽인들이 조금 일찍 바다를 건너오게끔 만들었다는 것뿐인 시그리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혹하고 비정한 현실을 대신해 마보를 달래주려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주워들은 미래 지식 덕에, 시그리드가 없었더라도 불과 몇십 년 뒤에 훨씬 잔혹한 일이 타이노 원주민들을 덮쳤을 것을 알고 있던 황자는, 시그리드와 마보 두 사람 모두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시그리드에게 사랑의 묘약 따위를 먹이려고 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도 들이닥쳤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어차피 영업 준비할 때라 딱히 할 일도 없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황자에게 헤니히가 물었다.

“헌데 어디로 가시렵니까?”

“시그리드 각하를 만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자신이 좋은거래에서 받아온 약재. 버리기엔 아까운 그것을 필요한 사람 누군가에게 넘겨줄 작정이었다.

이제야 조선소와 철공소 운영이 본 궤도에 올라, 보는 각도에 따라 약간이나마 도시 모양새를 갖추게 된 좋은희망.

일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다치는 사람도 늘어났고, 병드는 사람도 생겼다. 시그리드의 ‘생명의 물’ 처방으로 외상이 곪는 것은 그럭저럭 막을 수 있게 되었지만, 몸 안의 질병은 시그리드의 검은 책으로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자칭 연금술사인 라츠의 요한Johannes von Laaz은 본디 보헤미아 도적으로 운 좋게 연금술을 독학하게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신대륙까지 흘러들어와 이곳 좋은희망에 닿았다⁴. 생명의 물을 정제하는 것은 딱 연금술사가 하기 좋은 일이라, 이곳에서는 그 재주를 살려 병원 겸 약재상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약재상에 귀빈이 촌각의 차이로 두 명이나 방문했으니, 한 사람은 명목상의 전제군주 콘스탄티노스요, 그 뒤에 찾아온 것은 바로 파비륜국 오랑캐들에게 졸지에 죄인 취급을 받게 된 대명의 태감 정화였다.

“하, 본관의 처지가 딱하게 되었구나.”

이 땅에 정녕 불로불사의 비방이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 정화였지만, 적어도 뭔가 장생에 도움이 되는 비법 정도는 시그리드에게 배울 수 있을 줄 알았다. 불로불사는 아니어도, 수명을 늘릴 수는 있는 처방 정도는 챙겨 가야, 이제는 완공되었을 자금성에서 그의 주군과 재회할 때 내세울 치적이 생기는 것이었다.

허나 돌아가는 형세로 보아서는, 시그리드가 설령 진짜 뭔가 비법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제게 알려줄 것 같지는 않았다.

과거제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슬쩍 제가 이 어설픈 나라에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음을 알려주었건만, 왕후 서씨는 저를 진심으로 미워하는지,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건지, 도통 반응이 없었다. (구중궁궐의 암투에 익숙했던 정화와, 음모보다는 정직하게 총으로 협박하는 것에 더 익숙하던 시그리드 사이에 발생한 오해였다.)

그러니 어떻게든 제 힘으로, 내세울 만한 무언가를 찾는 수밖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서 이곳 원주願州 (좋은희망)의 보잘것없는 시정을 거닐다가 이 약재상에 찾아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찌 하오리까?”

정화처럼 거지꼴 가깝게 되었으나 아직도 두마음 품지 않고 그 곁을 지키는 하산이 물었다.

“저 상인에게 청하여, 각각의 약재가 무슨 효능을 지니고 있는지 물어보아라. 어쩌면 중원에는 없는 약재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약재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통에, 하산이나 라츠의 요한은 물론이요, 평소에는 감이 예리한 정화조차 그 뒤에 추적하는 그림자 하나 있음을 알지 못했다.

어울리지 않는 겨울철 가죽옷을 입은 채, 이 춥디추운 북녘의 땅에 혼자 덩그러니 서게 된 타이노 사람 마보였다.

“이 땅의 사람들이 하지 못한다면, 내 손으로라도 원수를 갚겠다.”

앙다문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타이노 말소리 가운데, 뿌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함께 나왔다.

손에 들린 것은, 보잘것없는 나무 몽둥이 하나.

당장 무언가라도 하지 않는다면 원통함에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세 죄인 중 가장 뒷배 멀리 있다는 저 괴물 같은 사내라도, 몽둥이 부러질 때까지 힘껏 때리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평화롭던 섬을 불태운 원수들에 대한 원한을, 아직도 눈을 감으면 보이는 원혼들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어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마보는 고개 돌리지 않고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말리지 마십시오. 저놈 하나라도 쳐죽여서 원한 갚습니다.”

투슈판과 좋은희망에 머물면서 조금씩 익힌 공용어로 마보는 대꾸했다.

“이건 답이 아니에요.”

“그러면 뭐가 답입니까? 각하는 정의를 말했습니다. 저놈 갈 길 가게 내버려두는 게 정의입니까?”

씩씩대는 콧김 사이로 분노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솟구쳤다. 관제를 개편하면서 호국경 경호를 맡게 된 국방부 공무원 – 말이 그럴듯하지, 실제로는 그냥 콜그림과 그 패거리 몇몇이었다 – 들이 도끼자루에 손을 올렸다가, 시그리드의 제지를 받고 손을 도로 내렸다.

“죽은 고향 사람들, 돌아오지 않습니다. 저기 저놈이 지몬과 함께 찾아왔을 때도 아마 다른 섬이 똑같이 불탔을 것입니다. 그들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꼭 눈에는 눈으로 앙갚음하지 않더라도, 다른 방법,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거에요.”

“나은 방법,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하지만 없을 겁니다. 저라고 생각 안 해본 줄 아십니까?”

“앞으로도 계속 유럽 사람들은 아나왁으로 배를 보낼 거에요. 불운하게도 마보 씨의 사람들이 사는 섬은 그 길목에 있고요.

이미 약탈당하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슬프지만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을 구할 수는 있을 거에요.”

“못 구합니다. 우리 사람들, 착하고 멋집니다. 하지만 아나왁이나 이곳 사람들만큼 지혜롭진 못합니다. 아니, ‘우리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없습니다. 바다 건너 남쪽 땅(유카탄 반도) 다녀온 적 있는 사람들 몇몇을 빼면, 다들 저들 사는 섬이 세상 전부라고만 압니다.

그 사람들에게 이방인 올 것이니 피하라고 하면 들을 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구할 길 없다고요.”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마보의 가슴 속에 피어나던 울화도 조금씩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러나 울화가 가라앉는다 하여 그 아래에 있는 차가운 분노와 절망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어차피 할 수 있는 건 없잖습니까. 대신 제 손을 붙잡지도 마십시오.”

라츠의 요한네 약재상 안쪽에서, 격앙된 관화官話 외침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하하! 실로 궁즉통窮則通이로다! 만세! 만세!”

콘스탄티노스 황자가 진짜로 아픈 사람들에게 주라면서, 공짜로 넘기고 간 약재.

사정 모르는 가게 주인 요한은, 공짜로 뿌린 약재가 귀하면 얼마나 귀하겠는가 생각하며, 그 약재의 값을 아주 헐하게 책정하였다.

그 약초가 정말로 좋은거래 인근에 넘쳐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요한은 코끼리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격으로 공정한 가격을 매긴 셈이었다.

조금 뒤에 찾아온 정화와 하산이 그 약초의 가격을 물으니, 요한은 거의 거저나 다름없는 값을 불렀다.

“이 귀한 것이 어찌 이리도 싸다는 말인가? 아아, 이것이면 족하다! 족하고도 남는 장사다!”

웬 소란인가 싶어, 콜그림에게 마보를 잘 감시하라 해두고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시그리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화만큼은 아니지만) 한결 밝아진 얼굴로 돌아왔다.

“마보 씨,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요.”

“뭐라고요?”

“저 약초 말예요. 저걸 미끼로 사람들을 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시그리드의 머릿속에서는 벌써 그럴듯한 계획이 떠오르고 있었다. 탐욕에 가득 차 바다 건너를 약탈하려 하는 이들의 손길을 미리 틀어막으면서, 사람 목숨도 구하고, 신대륙 연합의 덩치와 힘도 키울 방법.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된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 황자는, 자신이 가져온 인삼⁵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짐작도 못한 채 시그리드네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 *** ---

1. 알공킨계 부족들과 이로쿼이계 부족들에는 공통적으로 주술사와 의사, 역사가를 겸하는 치유술사Medicine Man들이 있었습니다. 비교적 고도화된 정치체제를 이룩한 알공킨계 세줄기불꽃 의회와 이로쿼이 연맹에는, 이런 치유술사들끼리 세운 협회가 여럿 존재했고, 이 협회를 통해 치료법과 의례, 그리고 의례에 얽힌 역사가 구전으로 전승될 수 있었습니다. 문자가 없던 미 동부 원주민들의 역사가 다른 원주민들에 비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될 수 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치유술사 협회를 통해 구전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거짓낯 협회는 독특한 나무 가면을 쓰고 의례를 치르는 것으로 유명한 이로쿼이 연맹 내의 치유술사 협회입니다. 작중 서술된 것처럼, 이들은 사람을 병들게 하는 돌풍에서 부족을 보호하는 의례부터, 단순한 코피나 관절통 치료까지 다양한 직능을 수행했습니다.

2. 전근대에 걸쳐 육상 운송을 압도하는 효율을 자랑했던 수운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가 어렵다는 뻔한 단점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연중 강의 유량이 일정해 동아시아보다도 수운이 더 유리했던 유럽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고안되었지요.

그중 하나는 풍력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순풍이 불 때는 돛을 펼치면 그만이고, 역풍이 불더라도 강폭이 넓은 경우에는 지그재그로 강의 양안을 오가는 방식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지요. 그러나 강폭이 일정치 않고 유속이 센 경우에는, 속절없이 노를 젓거나 강바닥을 막대로 밀어내는 식으로 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전쟁이라는 말에 딱히 큰 거부감이 없던 전근대 기준으로는, 전쟁을 관할하는 부처에 굳이 ‘국방’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쓴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동아시아 율령제의 병부兵部/병조兵曹, 19세기 초 근대적 관료제가 완비될 때 구미 각국이 설치한 전쟁성 Ministry of War 등등이 먼저 존재했고, 세계대전을 거친 뒤에야 ‘전쟁’보다는 ‘국방’이 더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4. 라츠의 요한은 실존인물로, 보헤미아 여행 중 실종된 연금술사 피렌체의 안토니우스의 제자를 자칭했습니다. 또한 연금술에 관심이 많았던 헝가리 왕비 바르바라(지기스문트의 아내)와 몇 번 서신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운 좋게 연금술을 독학한 보헤미아 도적이라는 것은 작중의 창작이지만, 그가 떳떳지 못한 경로로 연금술을 배운 다음 여기저기 허풍을 떨고 다녔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5. 애팔래치아 산맥 주변에 자생하는 인삼은, 일찍부터 이로쿼이계 부족들에게 널리 약용으로 쓰였습니다. 한반도나 만주보다도 인구밀도가 희박하였던 덕에, 이로쿼이 연맹의 치유술사들은 큰 어려움 없이 필요할 때마다 인삼을 채취하여 약으로 쓸 수 있었지요.

북미에 자생하는 인삼의 존재를 알자마자 교역할 생각을 품은 것은, 사실 원 역사의 유럽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709년 북경에 머물던 예수회 선교사 자르투Jartoux 신부는 우연히 산삼을 찾아 태항산맥을 뒤지는 심마니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들에게 인삼의 효능을 들은 자르투는 동아시아와 기후가 비슷한 북아메리카 동부에도 인삼이 있을 것이라는 추론을 했습니다.

몇 년 뒤, 몬트리올(당시는 프랑스령 몽레알)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 라피토Lafitau 신부는, 자르투 신부의 추론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르투가 묘사한 산삼의 모습을 주변 이로쿼이계 부족들에게 전달했는데, 자르투의 글솜씨와 라피토의 통역 중 어느 쪽이 시원찮았는지는 몰라도 처음에는 허탕을 쳤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몽레알 근처에 집을 짓던 중 인삼을 발견했는데, 실물 인삼을 들고 라피토가 다시 한 번 수소문을 하자 대체 왜 이런 흔한 약초를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아무튼 라피토는 자신이 찾은 인삼을 지구 반대편으로 보냈고, 그렇게 아메리카 대륙의 인삼이 1718년에 처음으로 중국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1750년 시세로, 퀘벡에서 매입한 인삼은 약 25배 넘는 가격으로 광저우에서 팔리곤 했지요. 그러나 이후 7년전쟁으로 퀘벡은 영국령으로 편입되었고, 영국에게는 인삼보다 훨씬 수익률 높은 다른 교역품이 많이 있었습니다. 막 독립한 미국도 중국까지 인삼을 수출할 여력은 되지 않았지요. 한편, 영국이 인삼 수출은 포기하는 대신 아편을 수출함으로써, 중국 내에서 아편 중독에 특효약으로 알려진 인삼의 수요는 폭등하게 되는데, 그 덕에 엉뚱하게 조선이 특수를 누리게 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