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을 때든 나쁠 때든 (2)
21. 좋을 때든 나쁠 때든 Good Times, Bad Times (2)
소령 시절의 상당 부분을 한국의 오산 기지에서 보낸 존 윌슨은, 그 땅 사람들의 여러 기묘한 풍속을 자의 혹은 타의로 접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인삼이었는데, 차, 술, 치킨 수프(‘삼-계-탕’) 등등 오만 곳에 다 들어가는 이 약초는 한국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온갖 질병을 예방하고 ‘특히 남자에게 이로운 모종의 효능’이 있다는 만병통치약이었다¹.
연신 ‘만세’ 외치는 정화의 모습을 보아하니, 이 시기의 중국에서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궁금해진 콜그림도 슬쩍 다가가, 이 풀뿌리가 어디 그리 좋냐고 물었는데, 죽어가는 사람에게 인삼을 먹이면 바로 살아날 뿐더러, 건강한 사내도 이것을 먹으면 참 크나큰 효험을 볼 수 있다는 답을 들었다.
그 ‘크나큰 효험’이 뭣이냐고 또 콜그림이 정화에게 묻는 바람에, 영영 그런 효험을 볼 수 없는 몸인 정화가 갑자기 정색하는 소동도 있었지만, 이미 타이노 사람 마보와 함께 이 인삼으로 마보의 동포들 구할 방도를 의논하고 있는 시그리드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마보 씨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타이노 사람들한테 다가오는 위험을 곧이곧대로 경고해봤자 별 쓸모는 없을 거에요.”
“그렇습니다.”
신대륙 연합 뱃사람들이 폭풍만이라 이름 붙인 멕시코 만. 그 동편 카리브 해에 점점이 흩어진 섬들에는 타이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².
산 많은 섬 아이티Hayiti, 큼직한 섬 키스케야Kiskeya(쿠바), 위대한 정령의 섬 야마예카Yamahyeka(자메이카) 등등, 바다 곳곳에 불룩 솟은 크고 작은 섬들은 하나같이 비옥했고, 종종 다른 섬의 추장들과 카누 타고 선물 주고받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타이노 사람들은 저들 태어난 섬 바깥의 일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들 자신들 사는 섬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방인들이 들이닥쳐서는 얼른 다른 곳으로 피하라고 하면 누가 그 말을 듣겠습니까?.”
물론 지금쯤이면, 두 차례나 바다 건너에서 괴물들이 나타나 각각 섬 한 곳씩을 불태웠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딱 그뿐. 이방인들의 거대한 배가 곧 섬 하나 빠뜨리지 않고 모든 곳에 닿아, 마을을 모조리 불태우고 모두를 노예로 삼으리라는 것이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타이노 사람들끼리 뭉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³.
“그 쇠붙이라는 것을 많이 넘겨주시면, 우리 힘으로 이방인들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 약초를 팔아서 우리 도울 쇠붙이를 마련하실 생각이십니까?”
철의 힘은 이미 질리도록 경험한 마보였다. 나무 몽둥이나 화살 따위는 가볍게 막아내고, 사람의 살갗은 너무나 쉽게 갈라내던 그 쇠붙이.
그것만 있었더라면 자신이 살던 섬도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시그리드의 대답은 살짝이나마 고개 들던 마보의 희망을 도로 꺼뜨렸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저희도 무턱대고 다른 이들을 지원할 만큼 사정이 넉넉하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섬사람들은 귀한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 와스테카 사람들처럼 값을 내고 쇠붙이 살 수도 없습니다. 저 약초가 어떻게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섬의 비옥한 땅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었지만, 사람에게 없어도 괜찮은 사치품들은 내주지 않았다.
따라서 추장들은 다른 추장들과 귀한 물건을 선물로 주고받음으로써, 정령의 보호를 받고 자신의 위엄을 떨치곤 했다.
종종 먼 땅에서 들어온 선물이라며 추장들이 자랑하던 노랗고 번뜩이는 장신구가 바로 이방인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황금이었음을, 마보는 이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다 위 모든 섬들의 황금을 긁어모아도, 이방인들의 욕심을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도.
“대신 다른 것으로 값을 치르는 수밖에요.”
“다른 것이라뇨?”
“사람으로 값을 치르는 거에요.”
오해하기 딱 좋은 시그리드의 언사에, 마보는 그만 까무러칠 뻔했다. 가뜩이나 처음 경험하는 추위에 몸고생하고, 거기에 그놈의 사법재판 판결 때문에 분통이 터져 마음고생까지 했던 판이었다.
“아니, 그게, 그런 뜻이 아니고요...”
시그리드는 자신의 지나치게 간결했던 대답이 초래한 오해를 해결하려 안간힘을 썼다.
그사이 콜그림은 멋모르고 인삼을 한입 베어물었다가 예상치 못한 씁쓸함에 놀라 퉤퉤 뱉어내고, 정화는 역시 오랑캐답다면서 한심하게 그것을 쳐다보고, 지나가던 행인들은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주목하다가도 시그리드가 있는 것을 보자 으레 그러려니 하며 가던 길 마저 갔다.
그 누구도, 카리브해에 거주하는 수만 명 원주민들의 운명을 뒤바꿀 법한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없을 만한 광경이었다.
시그리드 2기 행정부의 당면 국정과제인 관료제 개편을 마무리짓느라, 시그리드의 신임 ‘내각’ 사람들은 겨울이 다 되도록 좋은희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하였던가.
넓은 영역에 정착지가 점점이 흩어져 있는 신대륙 연합의 상황을 고려하면, 장관이라고 해서 어느 한 곳에 눌러앉아 있는 게 아니라 직접 이곳저곳 누비고 다니면서 실무를 처결해야 할 터였다.
따라서 신임 장관들은 쉴 수 있을 때 쉬자는 마음으로, 바쁜 하루가 끝나면 술집이든 따뜻한 벽난로 앞이든 자리 차지하고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헌데, 큰일 하나 끝났으니 오늘내일은 쉬자는 말 듣고서 편하게 자리 깔고 눕든 앉든 하자마자, 갑자기 긴히 논의할 사안 생겼다며 호국경 본인이 여기저기 비집고 들어와 저들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원래 신대륙 정무라는 게 다 이런 식입니까?”
집결지인 정부청사(호국경 관저 혹은 시그리드네 집으로도 알려진 초가삼간)로 터덜터덜 향하는 길.
본디 아이슬란드에서 그린란드 회사 일을 맡아보다가, 회사 사장인 파울 주교의 추천을 받아 이번에 초대 상무장관직을 맡게 된 게렉의 아들 옌스Jons Gerekesson⁴가 플레톤에게 물었다.
“물론이지. 갑자기 우리 연합 인구가 수백만으로 불어나서, 아랫사람 부려먹으며 편하게 책상에 앉아 일할 수 있게 된다면 모를까, 그러지 않고서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가 이렇게 발로 뛰어야 할 게요.
다시 말해, 그냥 포기하면 편하다는 얘기요. 흐흐.”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레이캬비크에 남아 있을 걸.”
신대륙 연합에 건너온 사람 치고 사연 없는 이가 어디 있겠냐만, 옌스의 이력은 특출나게 화려했으니, 총독 비그푸스의 뒤를 이어 그린란드 회사의 레이캬비크 지부장 노릇을 하기 직전 그의 직함은 무려 웁살라Uppsala 대주교였던 것이다.
마르그레테 여왕의 총신인 로스킬데 주교 페데르 로데하트의 조카인 옌스는, 숙부 잘 둔 덕에 서른도 되기 전 대주교 자리에 올랐으며, 그렇게 출세한 젊은이들이 대개 그렇듯 방탕함을 저의 소명으로 삼았다.
그러나 마르그레테 여왕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칩거에 들어가면서 옌스의 연줄도 끊겼다.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 나름 쾰른 대학을 졸업한 인재기는 했던 옌스는, 저의 목숨도 간당간당하다는 것을 빠르게 눈치 챘고, 후다닥 대주교직을 사임한 다음 아이슬란드로 도망쳤다.
거기서 어떻게든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고자 돈벌이 방법을 모색하다 보니 그린란드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 회사에서 횡령을 했다가는 마녀의 불벼락을 맞게 될 것임을 알았기에 부득불 정직하게 일했더니, 의외로 축재에 재주가 있었던지라 금방 파울의 눈에 들었다.
그리하여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장관이라는 이름이 주는 만족감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바로 곁에 머물고 있는 마녀가 무섭지 않았다면) 진작에 이 초라한 마을을 떠나 레이캬비크로 돌아갔을 것이었다.
“얼추 듣기로, 유럽에서 향신료 비싸게 팔리는 것처럼 카타이에서 비싸게 팔리는 약초가 마침 좋은거래 근처에 지천으로 자란다 하였소. 무역의 일이라면 딱 상무장관 몫이니, 지난 번처럼 몰래 내빼다 걸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게요.”
“그런데 그 약초로 무역을 하려면 먼저 카타이까지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운수장관 디폴트 경의 소관이 아닌지-”
점잖은 보안관 겸 운수장관 디폴트가, 뺀질이 옌스의 뒤통수 후려갈길지 말지를 두고 진지한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플레톤이 시그리드네 집앞을 서성이는 콘스탄티노스 황자 모습을 발견했기에, 옌스의 뒤통수는 저도 모르는 새 구원을 받았다.
자신이 약재상에 넘긴 인삼이 무슨 파란을 일으켰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던 콘스탄티노스 황자로서는 마른 하늘에 벼락 떨어진 격이었지만.
“아니, 황자님께서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왜 우애의 도시에 계시지 않고 여기에...”
용맹한 황자는 비겁하게 도망치는 대신 정정당당하게 거짓부렁을 늘어놓았다.
“흠흠. 빈란디아의 전제군주로서 좋은희망을 시찰코자 이렇게 평복하고 찾아왔습니다.”
“아아, 평범한 백성들의 삶에 이리도 관심이 많으시다니, 참으로 우리 빈란디아의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미담은 꼭 시그리드 각하께도 전해드리지요.”
플레톤의 짓궂은 대답에 금방 얼굴 빨개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지만.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얀 지슈카와 함께 나타난 시그리드는 당장 논의할 사항이 많았던지라 마음이 바빴다.
그저 미소지으며 가볍게 인사하고, 오신 길에 회의에 동석하시라 권할 뿐.
(그것만으로도 황자의 얼굴은 확 밝아졌다.)
“다들 이렇게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게 아니고, 우리 행정부가 추진하는 경제개발 계획에 수정하면 좋겠다 싶은 사항이 있어서 이렇게 급히 부르게 되었어요.”
행정부와 예하 부처 명칭이 정해지고, 점점 욘에게 들었던 미국의 모습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시그리드는 저도 모르게 아직 검은 책 속에만 있는 표현들을 남발하곤 했다.
‘경제개발 계획’ 같은 신조어도 그중 하나였는데, 이미 몇 번 그 말을 들은 적 있던 다른 각료들은 그나마 얼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프랑스의 기옌이나 지브롤터를 거쳐서 아나왁까지 가려면, 중간에 섬 여럿을 거쳐야 한답니다. 이번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한 마보 씨의 부족은 거기에 휘말려서 큰 참화를 겪었고. 아마 그쪽 바다를 지나는 배편이 늘어날수록 비슷한 일이 계속 벌어질 거에요.”
어떤 바다든 항해는 고되기 마련이요, 따라서 뱃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건 거칠기 마련이다.
그린란드 회사의 노블을 모는 바스크 뱃사람들은 대체로 신사적이고 정중한 태도를 견지하곤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 고객들이 저들의 바이킹 조상들처럼 불편사항을 호소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달 항해 끝에 대서양을 건너온 뱃사람들, 그리고 출세를 위해 그 뱃사람들과 함께 먼길을 온 유럽의 ‘탐험가’들에게는 카리브해의 원주민들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당장 물자를 보충하고, 긴 항해 동안 지친 선원들의 짜증과 불만을 어떻게든 해소해야 할 텐데, 고작해야 이교도 야만인인 원주민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를 것까지야 없지 않겠는가?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아예 그 원주민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끔 돕는 거에요.”
이미 대서양을 건너고 있는 위트레흐트의 지몬이 듣는다면, 신대륙 항로의 중간 기착지를 초토화시키겠다는 무지막지한 선언이라고 평가할 만한 발언이었다.
“다른 곳이라고요?”
“대단한 강 하구, 그리고 아카풀코 쪽 항구. 두 곳 모두 빠르게 개발하려면 그만큼 인력이 필요하니까요.”
미시시피 강 수운과 태평양 무역을 개척하려는 시그리드 행정부 입장에서, 호수에서 나룻배 타고 다니는 것 외에는 딱히 배와 인연이 없는 아나왁 사람들보다, 작은 통나무배에 의지해 온 카리브해를 누비고 다니는 타이노 사람들이 훨씬 쓸만한 인력이라는 것은 명확했다.
“인력이라면, 노예 말씀이십니까?”
당대 지성인의 평균적인 양심과 상식을 바탕으로 옌스가 물었다.
“당연히 아니지요. 인력을 고용하는 것이지, 붙잡아오는 게 아닙니다.”
꼭 윤리와 도덕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예를 잡아다 부리는 것도 관리자측 인구가 어느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일. 노예를 가두고 감시하느니 차라리 임노동자로 부리는 쪽이 훨씬 수지타산이 맞았다.
“말하자면, 계약직 노동자로 부리는 것이지요. 일정 기간 동안 의무적으로 우리가 개척하는 거점에서 일하도록 요구하고, 대신 해당 기간 동안 급료를 보장하는 거에요. 가운데서 중개해준 부족에도 보수를 제공하고요.
그리고 기간이 만료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든 계약을 연장하든 각자의 의사에 맡기는 거지요.”
물론 타이노 원주민들이 곧이곧대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생김새로는 바다 동쪽에서 온 이방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북쪽 이방인’들. 그런 이방인들이 내세우는 보증을 냉큼 믿는 원주민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심쩍은 일이었다.
더구나 급료라는 개념도, 바다 너머의 끝없이 펼쳐진 대륙이라는 개념도 생소한 것은 매한가지. 아무리 마보가 앞장서서 동포들을 구하겠다며 나선다 한들, 대부분의 타이노 추장들과 부족민들은 썩 열의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관은 없었다. 개중 정말 모험심 넘치거나 저의 부족이 정말 싫었던 이들 몇몇이 나서든, 조금 약삭빠른 추장 하나가 사이 나쁜 다른 부족에 쳐들어가 포로를 자원자랍시고 내밀든, 처음 몇 명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훨씬 쉬울 것이다.
한 번 머나먼 땅으로 떠났던 이들로부터 연락(과 급료로 받은 보물들)이 돌아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타이노 사람들도 이 이방인들은 일전의 무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믿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린란드 회사 입장에서 보면, 썩 환영할 만한 제안은 아닙니다. 우리 정부 재정으로 진행하기도 곤란할 테고요.”
옌스가 다시 한 번 딴지를 걸었다. 그린란드 회사를 통한 교역이 여전히 국가재정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합 사정상, 상무장관은 재무 역시 총괄하고 있었던 것이다.
탐험기사단원들은 부단히 대단한 강 유역을 탐사하고 있었고, 테노치티틀란 사람들의 안내를 받은 정화의 명나라 군사들과 티롤 광부들은 태평양 연안에 도달하였지만, 그 진전은 꾸준할지언정 빠르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예산이었다. 태평양 쪽 항구가 완공된다 한들 당장 더 남쪽, 시그리드가 잉카 제국이라고 알고 있는 안데스 산맥 주변 원주민들로부터 금방 황금을 뜯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거기서도 새로 접촉을 하고, 교역을 트고, 좌우지간 밑천 들어갈 일이 한동안 이어질 것이었다.
“그런 상황이니만큼, 더 많은 밑천을 투입해서 작업을 서두를 여력은 없습니다.”
웁살라와 스톡홀름의 난봉꾼으로 유명했던 사내치곤 제법 진중하게 말하는 옌스였다. 몰래 횡령을 하는 게 불가능해진 이상, 연합의 재정이 고갈되어 자신이 이 땅의 보잘것없는 사치나마 누리지 못하게 되는 일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기에 나름 진심이었다.
“어떻게든 이 인삼을 싣고 태평양 – 아, 여기에도 언젠가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하겠네요 – 을 건너기만 하면 그대로 엄청난 이익을 챙길 수 있을 텐데... 어디서 더 밑천 마련할 방법은 없을까요?”
오지 않을 미래,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고 인도양을 건너, 인도네시아에서 향료를 들여오던 포르투갈 배들은, 열 척 중 한 척만 돌아와도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하였다.
향료만큼 수익성 좋은 상품을, 유럽과 비교를 불허하는 거대한 시장에 팔 수 있다면, 그 이익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현재로서 떠오르는 방법은 딱 하나뿐입니다. 이민자 수를 제한하는 것이지요.”
함부르크와 좋은희망을 오가는 이민선들은, 무역선과 포경선을 겸하는 그린란드 회사 소속 배들이 대부분이었다.
교역품을 싣고 유럽으로 간 다음, 신대륙으로 돌아가는 김에 이민자들까지 태우고 오는 것이었는데, 지금껏 신대륙 무역과 어업이 워낙 수익을 많이 남겼기에 딱히 문제시되지 않았을 뿐 이런 이민선단 운영도 나름대로 큰 지출을 요하고 있었다.
“만약 그쪽 지출을 줄인다면, 그만큼 많은 이민자들이 함부르크에서 배편을 구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아니면 잉글랜드 왕 헨리의 모집에 응해, 우리 연합과 경쟁하는 새로운 식민지를 꾸리는 데 참가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시그리드 일행이 떠난 뒤에도 유럽에 남아, 악화일로 걷는 유럽의 민생을 제 외눈으로 직접 보았던 지슈카가 끼어들었다.
“그냥 세금을 더 걷는 것이 어떻겠소? 내 누누이 말하지만 가장 적절한 세율은 소득의 3분의 1이라니까.”
누가 내놓은 의견인지는 굳이 고개 돌릴 것도 없이 알 수 있었다.
“어르신,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니, 뭐가 안 된다고? 우애든 환영이든 정착촌 가보쇼. 어딜 가든 매년 풍년이라 먹고살기 아무런 걱정이 없다는데, 그러면 공익을 위해 좀 더 내놓아도 되는 것 아닌가?
선거도 끝났잖소. 지지율 떨어지면 뭐, 남은 4년 동안 만회하면 그만이고.”
누가 헬라스인 후손 자처하는 사람 아니랄까 봐, 페리클레스도 이마를 탁 치고 갈 법한 얘기를 태연히 꺼내는 플레톤이었다.
그렇게 뭔가 언쟁이 촉발되려는 찰나, 시그리드가 손뼉을 쳤다.
“아!”
“무슨 ‘아’인가?”
“선생님. 공식 석상에선 예의를 좀 지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간 살짝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있던 콘스탄티노스가, 플레톤이 시그리드에게 평소처럼 평대하자 재깍 반응했다.
“통나무집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데 무슨 공식 석상입니까.”
“자, 자. 진정하시고요. 들어보세요. 일전에 파울 주교님이 했던 것 있잖아요. 그걸 제대로 다시 해보는 거에요. 더 짜임새 있게, 더 본격적으로요.”
“파울 주교가 했던 일? 이민자들한테 쇠로 된 연장을 싹싹 긁어모았다는 그 일 말씀이십니까?”
옌스가 물었다.
“네, 맞아요. 다만 이번에는 확실하게, 누가 얼마만큼 빌리는지, 그리고 언제까지 갚을지를 명시하는 거지요. 인쇄소도 차려졌겠다, 멋들어지게 장식도 하고요. 이왕이면 이자도 붙이고...”
“굉장히 복잡한 일이로군요.”
언뜻 생각해도, 지난날 이민자들 식칼이며 냄비며 긁어모았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일. 주먹구구로 추진했다가는 주먹이 날아올 법한 계획이었다.
“그렇지요. 고생 많으시겠어요.”
“네? 누가요?”
시그리드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옌스는 불길한 느낌을 떨치려 애쓰면서 실낱같은 희망 담아 물었다.
“그야, 상무장관님이시지요?”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 황자의 풋사과 첫사랑은, 그렇게 신대륙 연합의 정식 국채 발행으로 이어지기에 이르렀다.
물론 시그리드 성격에는 무책임하게 ‘네가 알아서 잘 해라’하고 매정하게 돌아서는 것보다는 병 주고 약 주는 쪽이 훨씬 더 맞았다.
“으, 쓰다, 써.”
궁금하기도 하고, 또 남들한테 세일즈를 하려면 먼저 본인이 상품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인삼을 한 입 베어문 시그리드는, 곧 방금 전 콜그림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곧장 뱉는 대신 마저 씹어먹었으니 콜그림보다 더 자연을 공경하는 셈이었는데, 저 인삼이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지 그 사연의 전모를 아는 콘스탄티노스 황자로서는 심장 콩닥거릴 일이었다.
“이게, 그러니까 강심제 같은 효과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디기탈리스Digitalis처럼요?”
약방 겸 병원 주인 라츠의 요한이 물었다.
“그렇다고 하네요. 자, 이제 조용히 하세요.”
숨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시그리드는 소매를 겉어붙이고 제 손목에 반대편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인삼이 소화되는 시간을 고려하면 아마 분위기 탓이겠지만, 어쨌든 맥박이 더 강해진 게 느껴졌다.
“보셨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며칠 뒤 나올 신문에, 인삼의 효험이 있다는 것을 라츠의 요한이 보증했다고 적어도 괜찮으시겠지요?”
“어... 물론입니다?”
시그리드의 의도를 잘 알지 못하는 요한이 주춤거리며 답했다.
이 문답은 얼마 뒤 나온 신문에는 적절히 편집된 형태로 실렸고, 곧 이런 광고가 신대륙 연합 곳곳에 퍼지게 되었다.
‘공전절후의 신비로운 약초 인삼, 무료 시식행사 진행! 활력을 북돋는 것 외에 기타 수많은 효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음. 호국경 시그리드 각하 또한 복용 후 즉시 효험을 보았으며, 이는 라츠의 요한이 증언하는 바임.
- 인삼의 효능을 체험하길 바라는 이들, 그리고 본 약초 판매업에 투자하기를 바라는 이들은 우애, 환영, 희망 등지의 관청에 문의하십시오.’
반신반의하는 이들도 공짜라는 말에는 다들 혹하여, 시식행사에 참가했는데 – 인삼이야 워낙 흔한 약초다 보니, 구하기는 개울가에서 조약돌 줍는 것보다 쉬웠다 – 광고와 인삼 양쪽의 효능 덕에 호평이 이어졌다.
“이건 팔린다! 정말로 향료만큼 비싸게 받더라도 팔리겠는걸?”
“아직 그 국채라는 것 안 산 미련퉁이는 없겠지?”
겨울 내내 이어진 인삼 열풍 덕에, 국채 판매는 그렇게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 마음에 여유가 생긴 – 그리고 곳간의 빈자리가 눈에 들어온 – 사람들의 생각은 다른 쪽으로도 향하기 시작했다.
“폭풍만인가, 그 남쪽 바다의 원주민들을 인력으로 고용해서 이 인삼을 카타이에 팔겠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는군. 그러면 혹시 우리 마을에도?”
“거 참, 사람 생각이라는 게 묘하구만. 어쩜 나랑 똑같은 생각을 다 했담?”
마침 바다 건너편 유럽에도 사람은 남아돌지 않던가? 자영농으로 그치지 않고, 농장주로 발돋움할 욕심을 품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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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아시아와 북미 동부에서 인삼이 약재로 쓰인 가장 큰 까닭은, 의학적 지식이나 정밀한 검진 없이도 체감할 수 있는 강력한 혈압 상승 효과에 있을 것입니다. 전근대의 의학 지식으로는, 인삼 섭취 후 맥박이 강해지는 것을 ‘활력’이 증진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십상이었고, 이는 비단 동아시아뿐 아니라 명~청대에 처음으로 인삼을 접한 유럽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를 린네가 인삼속에 ‘만병통치약’이라는 뜻의 Panax라는 학명을 부여한 것은 이런 인식이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아메리카 인삼Panax quinquifolius은 고려인삼(Panax ginseng의 일종)의 근연종으로, 실제로 교배가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작중 시점에서 서인도 제도에는 타이노 인들이 거주하고 있고, ‘카리브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카리브(칼리나) 인들은 막 오리노코 강 유역에서 배를 타고 트리니다드-토바고 일대의 섬에 정착하고 있는 중입니다.
원 역사에서 타이노 인들은 가혹한 스페인의 통치와 전염병으로 인해 반 세기만에 전멸해버렸고, 서인도 제도의 섬들이 딱히 이렇다할 천연자원은 없지만 농업에 지극히 유리한 기후와 토양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 스페인 정복자들은 농장의 노동력으로 쓰기 위해 서아프리카 노예들을 데려오기 시작하지요.
3. 카리브해의 타이노 인들은, 추장(카시케)을 중심으로 짜인 부족 사회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이들은 느슨한 부족 연맹을 이루고 있었고, 섬 안팎의 다른 부족들과 선물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교류하고 있었지요. 이들이 주고받았던 선물 중에는 멀리 유카탄 반도나 과테말라에서 기원한 터키석·옥 장신구 등도 있었습니다.
스페인인들이 몇몇 섬에 만족하지 않고 카리브해와 그 너머를 완전히 장악하려 한다는 사실이 점점 명백해지면서, 타이노인들 또한 저항에 나섰습니다. 1511년, 스페인 정복자들이 ‘용맹공El Bravo’이라 부른 푸에르토리코(보리칸)의 대추장 아구에이바나 2세가 이끈 반反 스페인 전쟁은, 푸에리토리코 섬에서만 수천 명의 병력이 소집되고 심지어 한참 떨어진 토바고 섬에서도 원군을 보내올 만큼 그 규모가 대단했지요. 그러나 이미 스페인은 카리브해에 확실한 거점을 마련한 상태였고, 7년에 걸친 전쟁은 타이노인들의 마지막 대규모 저항으로 기록되게 됩니다.
4. 옌스 게렉손의 생년은 불명확하지만, 그가 1408년 웁살라 대주교로 서임되었을 때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는 마르그레테 1세의 총신인 삼촌을 믿고 방탕한 생활을 벌였고, 스톡홀름에서 자신의 정부를 불러와 동거하면서 아이 둘을 두기도 했지요. 그 외에도 여러 방식으로 너무나 당당하게 부정부패를 저지른 탓에, 결국 참다 못한 교구 성직자들이 교황 마르티노 5세에게 탄원하면서 옌스는 1421년에 대주교직에서 해임되기에 이릅니다.
그러자 옌스는 이번에는 에릭이라는 새 연줄을 잡았고, 마침 친잉글랜드파와 친노르웨이파의 갈등이 격화되던 아이슬란드의 스칼홀트 교구에 주교로 부임하게 됩니다. 거기서도 제 버릇 못 버리고 지역 유지들을 갈취하고 행인들을 납치해 하인으로 부리는 등, 온갖 못된 짓을 하다가 결국 1430년 총독 비그푸스의 딸 마르그레트의 사주로 암살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