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91화 (91/116)

좋을 때든 나쁠 때든 (3)

21. 좋을 때든 나쁠 때든 Good Times, Bad Times (3)

겨울철 냉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대륙 연합을 휩쓴 국채 열풍.

매일같이 펑펑 내리는 눈으로 인해, 집안에서 수다 떠는 것과 오목, 체스 등등으로 소일하는 것 외에 딱히 할 일이 없는 계절이었기에, 시그리드가 인삼 먹고 얼굴이 폈다는 둥, 사실 그 전부터 몰래 인삼을 먹어왔기에 그 동안이 유지되었다는 둥 온갖 소문이 퍼졌다.

“시그리드 각하가 발표한 계획치고 성공하지 않은 게 없었잖소. 썰매는 제때 올라타야지, 썰매개들이 좋아라 달려나간 다음에는 열심히 뒤따라가봤자 소용 없다오.”

여름항구 촌장 이갈리코는 눈폭풍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따뜻한 벽난로 불기운을 쬐고 있었다.

창고와 마을 회관을 겸하는 널찍한 통나무집은, 온기 찾아 모여든 다른 주민들로 가득했다. 개중에는 내년 농사에 쓸 생선뼈 구하러 왔다가 날씨 탓에 발목 잡힌 – 혹은 그런 핑계로 이갈리코에게 슬쩍 말 거는 – 근처 마을 사람 과부 마사도 있었다.

“과연, 그렇군요.”

“그렇소. 그 국채가 이익을 남기리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지. 얼마나 많은 이문을 남길지야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사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손해 보는 게요.”

인삼은 좋은거래 주변뿐 아니라 세줄기불꽃과 긴집사람들 사는 숲속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워낙 인구가 적었기에, 사람이 인삼을 뽑아 먹는 속도보다 풍요로운 숲속의 그늘진 곳에서 이 신묘한 뿌리가 자라나는 속도가 훨씬 빨랐던 것이다.

그리고 주요 산지가 내륙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교역의 강이나 옥수수 강을 통해 해안가에 인삼을 모으는 것보다 산지에서 바로 대단한 강을 통해 남쪽으로 보내는 쪽이 더 유리했다.

하지만 오지브웨 사람들이 미시시피라 부르는 이 대단한 강 유역은, 남쪽으로 갈수록 인적이 드물고 폐허만 있을 뿐이었다.

오지 않을 미래에 뉴올리언스라 불릴 강 하구에 조그만 마을을 세우고 흩어진 제 겨레들을 막 모으고 있는 차바누샤아 노인, 그리고 큰언덕 호수 근처 너른벌Maughwawame¹에서 출발해 그 강의 수로를 탐사하고 온 기사단원들이 공통으로 증언하는 사실이었다.

태감 정화를 따라왔다가 졸지에 고국에서 삼만 리쯤 떨어진 곳에서 개고생하게 된 명나라 사람들 또한, 주변의 마을들이 죄다 고만고만하여 고용할 일손조차 찾기 어렵다고 하소연하였다.

예로부터 더 남쪽의 대륙을 바닷길로 오가는 상인들이 있기는 했지만, 뗏목 타고 오가는 상인들을 맞이하는 데 그렇게 대단한 항구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아카풀코 근처의 바닷가 마을들은 그 규모에 비하면 부유한 축에 들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사람만 충분히 구할 수 있다면 금세 그 교역로를 뚫을 수 있을 테지. 세상 한쪽에서는 금쪽만큼 비싸게 팔리고 다른 한쪽에는 여름철 이끼마냥 지천으로 널려 있는 물건이라면, 그걸로 이익 못 거두는 게 이상한 일 아니겠소?”

사람이 부족해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어떻게 사람만 충분하면 바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지, 참으로 비약으로 가득한 주장이었다.

허나 논리학을 익힌 학자들은 죄다 근처 담쟁이항구에서 저들 머물 부지를 물색하는 중이었으므로, 이곳 여름항구에서 가장 목소리 큰 사람인 촌장 이갈리코의 말에 딴지 걸 사람은 없었다. (안타깝게도 선거구가 근처 잉글랜드인 마을과 함께 묶이는 바람에, 이번 의원 선거에선 낙선했다.)

“그렇군요. 어째 다들 바리바리 남는 곡식 싸들고 왐품 융통하러 읍내로 가더라니.”

저의 식견 자랑하는 재미에 빠진 이갈리코는, 수다의 달인 마사의 능수능란한 맞장구에 저도 모르게 끌려가고 있었다.

“읍내에서 환전상 하는 안짱다리 하벨이 요새 밤에 잠을 못 잔다더라고요.”

유럽에서는 신대륙 연합 사람들이 죄다 황금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줄 알지만 정작 신대륙 연합 사람들이 일상에서 주로 쓰는 화폐는 조개껍질 갈아 만든 왐품이었다.

황금은 들어오는 족족 바다 건너에서 사람과 물자 들여오는 데 쓰이곤 했고, 더구나 부족한 식량이나 겨울나기에 필요한 모피, 장작, 석탄 따위를 사들이는 데는 원주민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왐품이 훨씬 유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무렵 환영이나 우애 읍내에는, 그 옛날 프라하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하던 가락대로 성업 중인 환전상들이 한둘씩 있었다². 금화와 은화 대신 식량과 왐품을 취급한다는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서, 촌장님께서는 그 국채를 얼마나 사셨나요?”

마당발 마사는 이갈리코의 아픈 구석을 일부러 슬슬 찔렀다.

“그게... 뭐, 재수가 없어서 많이는 못 샀소. 하필 고기잡이로 바쁠 때라.”

물론 실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필 어선 한 척을 추가로 발주하는 바람에 여유자금이 궁색하였던 것이다.

“저런, 안타깝게 되었네요. 저기, 그래서 그러는데... 사업enterprise³ 하나 같이 해보실래요?”

“사업?”

“네. 시그리드 각하도 하는데, 우리라고 못할 건 없잖아요? 사람들 가욋돈을 모아서, 이익이 될 법한 데에 밑천으로 삼는 거지요.”

“이익이 될 만한 거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바로 포도 농사지요.”

포도주는 후스파 보헤미아인들과 롤라드파 잉글랜드인들 사는 곳에서는 늘 수요가 있었다. 허나 아직까지는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훨씬 맛이 떨어지는 숲속의 나무열매로 담근 술이 절찬리에 팔리고 있겠는가.

“여름항구 남동쪽에 농사짓기 좋은 섬이 하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요? 거기에 포도원을 꾸릴까 생각하고 있어요.”

와바나키 연맹과의 요구에 따라, 새 정착촌은 옥수수 강 이남에 꾸리도록 되어 있었다. 허나 신대륙에서 정확하게 위도를 계산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마야와 아스테카, 신대륙 연합을 합쳐 얼마 되지 않았다.

“섬에 농장을 개척한다? 언제는 농사지을 일손이 부족해서 좋은 땅도 그냥 놀리고 있다고 한탄하지 않으셨소?”

“바로 그러니까 이게 사업인 거랍니다. 유럽에서 일손을 모아서 데려오는 거에요. 시그리드 각하께서 저기 폭풍만인지 하는 곳의 불쌍한 원주민들을 고용하겠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뱃삯 대신 내주고 일손을 싸게 부려먹는 거지요.”

왐파노악 사람들 말로는 ‘물돌이 섬Noepe’이라고도 하는 그 섬은, 주변에서도 유독 날씨가 온화하였다. 마당발 마사가 수소문한 바에 따르면, 그냥 온화한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떠나온 유럽과 기후가 비슷하기까지 하다고 했다.

유럽식 과수원과 포도원을 세우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이미 마사는 그 섬 이름이 아예 ‘마사네 포도밭Martha’s Vineyard⁴’으로 바뀌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

“‘우리’라는 게 정확히 누굽니까?”

“제가 괜히 마당발 소리를 듣겠어요? 주변 잉글랜드 사람들 사는 마을은 이미 죄다 돌아다녔지요. 물론 잉글랜드 사람 아닌 이들 중에서는 촌장님이 처음이지만요.”

이갈리코가 가부를 밝히지도 않았는데 능글맞게 동업자 취급을 하는 마사였다.

“그... 음. 생각을 좀 해보겠소.”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랍니다! 물론 국채처럼 매정하게 기간이랑 액수를 정해서 투자자를 모으는 건 아니지만요. 자금 사정 나아지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때마침 눈발은 잦아들고, 겨울철에 보기 어려운 청명한 하늘이 먹구름 한쪽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이갈리코 뒤를 따라 작년 여름에 도착한 처갓집 식구들은, 겨울에도 푸른 하늘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였는지 흥분하여 떠들었다.

그 덕에 마사도 날씨 개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다쟁이가 사라진 덕에 잠깐이나마 조용해진 마을 회관. 그제야 이갈리코 머릿속에 진작 품었어야 할 의문이 떠올랐다.

“아니, 유럽은 살기 좋은 곳 아니었나?”

이갈리코가 이해하기로, 바다 동쪽 유럽은 참으로 살기 좋은 땅, 사람이 많이 사는 땅이었다.

얼마나 삶에 여유가 넘쳤으면, 고작 정령을 믿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소한 이유로 저들끼리 싸움박질을 하였겠는가.

거기서 밀려난 사람들이, 그린란드에서 살기 어려워진 원주민⁵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온 것이 신대륙 연합의 시작이었다.

유럽의 털복숭이 코쟁이들은 황금이라는 묘한 쇠붙이를 사랑했고, 바다 건너편에 황금이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닫자 제발로 건너오는 이들이 생겼다.

그런데 황금을 내미는 것도 아니요, 고작 뱃삯 대신 내줄 테니 몇 년간 하인으로 일하라는 식의 계약만 내걸고서 사람을 구하겠다는 것 아닌가.

유럽 사람들의 놀라운 기술과 재주를 보고 익히면서, 그 땅은 제법 살 만한 곳이라고 단정하고 있던 이갈리코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그러나 이갈리코는, 자신이 굳이 깊게 파고들 필요가 없는 의문이라고 금방 결론을 내렸다.

당장 먹고사는 일이 중요하지, 바다 건너편 사람들 사정까지 신경 쓸 것이 있겠는가?

이방인 욘이 시그리드에게, 시그리드가 파울에게, 그리고 파울이 옌스에게 가르친 아라비아 숫자.

원래대로라면 한참 뒤에나 북유럽에 퍼졌을 복식부기법.

그런 시대를 앞선 지식 덕분에 (그리고 존 윌슨 중령이 그런 회계 지식을 익히게끔 만든 군납 애플 II 개인용 컴퓨터와 회계 프로그램 비지칼크VisiCalc⁶ 덕분에), 시그리드는 스프레드시트 형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국채 판매 기록을 받아볼 수 있었다.

“제가 사흘 밤을 꼬박 지샜다는 것도 잊지 말아주십시오.”

상무부 장관 옌스가 퀭한 눈을 한 채 말했다.

좋은희망은 북대서양 포경업의 중심지였고, 이는 고래기름이 무진장 넘쳐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따라서 좋은희망에서는 서유럽에서 양초를 구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등불을 밝힐 수 있었고, 이는 밤이 되었다거나 날이 흐리다는 핑계로 서류작업을 미루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고맙습니다. 잊지 않을게요.”

“예, 부디 잊지 마십시오. 제가 사흘 밤을 지샜다는 것을...”

긴장이 풀렸는지, 이미 절반쯤 잠에 빠져든 옌스는 중언부언을 그치지 못했다.

그린란드 근해의 어업 및 운송업, 무역업을 전담하는 회사의 이름을 그린란드 회사라고 붙인 것처럼, 신대륙의 인삼을 전매할 국영회사의 이름은 신대륙 인삼공사로 정해졌다.

(‘케이론의 계승자’나 ‘아스클레피오스의 동료들’ 같은 고전적인 사명을 열심히 구상하였던 플레톤은, 내무부 장관은 내무부 일에나 신경 쓰라는 옌스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듣고 단단히 삐졌더랬다.)

덴마크 국왕의 허락을 받아 운영되며, 순수하게 이익을 위해 신대륙 연합에 투자할 뿐인 그린란드 회사 – 명목상으로는 그러했다 – 와 달리, 이 인삼공사는 국영기업이 될 것이요, 그 운영에는 바로 옌스의 입김이 제법 거하게 닿게 될 것이었다.

허나 당장 침대로 향하고픈 마음뿐인 옌스는, 마침내 웁살라 대주교 시절 자신이 누렸던 호사를 조금이나마 되찾을 길이 열려다는 사실에 전혀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나마 야근을 한 덕(?)에 저의 불편한 침대나마 감사히 온몸으로 영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다행이랄까.

그렇게 터덜터덜 옌스가 퇴청하고, 시그리드는 이 인삼공사의 중역이 될 타이노 사람 마보를 맞이했다.

“일이 잘 풀리고 있어요. 이대로라면 내년 중으로 곧 첫 번째 배를 띄울 수 있을 거에요. 그 배에는 마보 씨가 타게 될 테고요.

내년에 지몬과 요한이 거느리고 온 용병들의 몸값과 더불어 아직 투슈판에 매여 있는 맨오브워에 대한 보석금도 들어올 예정인데, 거기서도 일부를 쪼개서 회사 운영에 보탤 생각이랍니다.”

단기적으로야 호재라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풀려난 선원들과 맨오브워 범선들이 보르도로 돌아가는 즉시 새로운 항해를 준비하게 될 것임을 고려하면 결코 낭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신대륙 연합이 자신들의 신대륙 진출을 묵인하기로 하였다고 여기게 된 잉글랜드의 헨리는, 없는 재정을 끌어모아 새로운 원정대를 꾸릴 것이다.

그 새로운 원정대는, 지난 원정의 교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투슈판과 그 주변의 도시들에게는 강력한 우군이 있으며, 반면 항로 도중에 흩어져 있는 섬들의 원주민들은 그렇지 않다는 교훈.

도망쳐온 마보의 경고에 귀를 기울였던 와스테카 사람들도, 새로운 이방인들이 자신들은 건드리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되면, 딱히 개의치 않고 교역에 응할 것이다.

고작 한두 해 사이 수십 년치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원하지 않았던 지식, 섬 바깥의 비정한 세상과 그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갈망에 대하여 잘 알게 된 마보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는, 맨 처음 정화의 뒤통수를 노리고 보잘것없는 나무 몽둥이를 쥐었을 때와는 조금 다른 무언가가 맺혀 있었다.

“감사합니다. 반드시 동포들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들 모두, 꼭 안전한 곳에 새 고향 꾸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전히 어눌한 공용어는, 그것을 구사하는 마보의 마음 속 생각을 십분의 일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마보가 이해하기로 신대륙 연합의 소위 자유와 정의란, 동쪽에서 바다를 건너온 이방인들이 보였던 날것 그대로의 탐욕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곳의 사람들은, 행복과 부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았고, 또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여유로웠을 뿐이었다.

그들이 정의를 내세운 것은, 그렇게 해야만 저들보다 월등히 강력한 경쟁자들에게 맞서면서 저들의 동맹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에게는 동녘 이방인들만큼 거대한 배와 사나운 군사들을 보낼 힘은 없지만, 적어도 남들을 배신하고 노예로 삼으려 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

시그리드가 자유와 정의라는 낯선 개념을 꺼낸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금의 마보에게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이곳 사람들, 투슈판이 불탈 때 도우러 왔습니다. 신대륙 연합이 우리 사람이 위기에 처할 때도 반드시 도우러 오도록, 돕는 것이 그저 지켜보는 것보다 더 이득이 되도록 만들겠습니다.”

적어도 이곳의 사람들과는 대화와 협상이 가능했고, 공동의 이익 또한 추구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족하였다.

의도야 어떻든, 그 덕에 이렇게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속마음이야 어떻든 감사를 표함이 마땅하리라.

섬을 불태우고 저의 친족 모두를 죽이거나 죽는 것만 못한 신세로 만들어버린 자들, 그자들을 키워낸 세상. 이 모든 것에 대한 가장 큰 복수는,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마보는 기꺼이 시그리드의 손을 잡을 것이었다. 설령 저 손이 자신의 원수들을 붙잡고 또 풀어준 그 손이라 할지라도.

한편, 시그리드는 딴생각에 바빠 마보의 단단한 결의에서 뭔가 석연찮음을 느끼지 못했다.

저를 남동생처럼 아낀다는 시그리드의 말을 듣고, 한껏 낙담하여 돌아간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 황자 때문은 아니었다. (그사이 벌써 새로운 구애 작전을 꾀하고 있는, 포기를 모르는 콘스탄티노스 황자가 알게 되면 꽤나 실망스러워할 일이었다.)

인삼공사가 교역로 정비에 필요한 인력을 타이노 사람들로 채우기로 한 것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비슷한 방식, 즉 계약직 하인Indentured servants 제도를 원용해 근처 농지를 개발하겠다는 신청이 빗발친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가운데 낀 사람들 여럿이 고생을 하게 되었다.

“그새 한 통 더 왔단다.”

상공회의소 주인 스노리 노인이, 시그리드가 들어오자마자 아는체를 대신해 말했다.

“또요? 이번엔 어디서 왔나요?”

“발제의 알브레히트 경이라고 되어 있구나.”

그린란드 바깥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그냥 ‘그린란드에서 온 영감’이라고도 불리는 스노리의 상공회의소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처음 그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까닭은, 쉴새 없이 먼길을 오가는 원주민 상인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꼭 원주민들만 상공회의소 덕을 보라는 법은 없었다.

문자도 익혔겠다, 제지소에서 종이도 양산되기 시작했겠다, 신대륙 연합의 정착촌 곳곳을 오가는 어선이나 행상들을 통해 편지를 부치는 사람들이 근래 부쩍 늘었는데, 명색이 본업이 따로 있는 어부나 상인들에게 편지를 직접 전달해달라고까지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몇몇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린 생각이, 바로 상공회의소나 주점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어느 정착촌에 살든 일 년에 몇 번씩은 가까운 읍내에 들리기 마련이요, 읍내에 들릴 때면 가는 곳은 정해져 있었으니, 그때 편지가 전해지도록 하면 되었던 것이다.

스노리 노인의 상공회의소가 우체국 비슷하게 된 까닭은 이러하였다.

“어디, 볼까요... 윽, 역시 똑같은 얘기네요.”

“유럽에서 일손을 모아와 하인으로 부린다는 것 말이냐?”

“네. 맞아요.”

드넓은 신대륙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정착촌. 그 정착촌을 둘러싸고 있는 숲과 늪지를 본 유럽의 농민이라면, 죄다 엇비슷한 생각을 품기 마련이었다.

‘저 땅을 그냥 놀리기에는 너무 아깝다. 개간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나 일손은 부족하고, 막 태어난 아들딸이 장성하기까지는 적어도 십여 년은 걸릴 것이었으며, 그린란드 회사의 배편으로 들어오는 이주민들은 대개 저들끼리 새 마을을 꾸리지, 이미 정착한 사람들 아래에 들어가 일손으로 지내려 하진 않았다.

선거를 거치면서 정치의식이 제고된 주민들은, 직접 시그리드를 찾아가 허가를 요청하는 대신 막 좋은희망에서 돌아온 저들의 신임 의원들 옆구리를 찌르곤 했다. 바로 이럴 때를 위해 유권자의 대표를 뽑아놓은 것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의원들이 쓴 편지 – 철자법은 엉성했지만, 적어도 그럭저럭 뜻은 통했다 – 가 시그리드 앞으로 전해지기도 벌써 며칠째였다.

신대륙 연합 사람들에게 그런 발상의 씨앗을 흩뿌린 것은, 인삼 시식 퍼포먼스까지 하면서 타이노 사람들을 계약직 일꾼으로 부리겠다는 사업 계획을 홍보한 시그리드 자신이었으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이제 의원도 아닌 입장에서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좋은 삶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딱히 나쁜 생각이라고 여겨지지는 않는구나.”

스노리 노인이 저의 사견을 밝혔다. 슬슬 어두워지는 귀지만, 그래도 들려오는 바는 적지 않았다.

“시그리드 네가 늙고 눈 어두운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유럽에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허다하지 않으냐. 그들에게 당장 그 고된 삶을 벗어날 길을 주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지 않겠느냐?

당장 우리 동녘정착지도 그런 신세였지. 내가 자비를 갈구하며 우리의 왕을 찾아갔을 때는, 냉대만을 받았다. 노르웨이의 사정은 그때의 그린란드보다도 더 열악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지금 우리 사정은 그때에 비하기가 미안할 만큼 넉넉하지 않니?”

신대륙 사정은 구대륙의 사람들에게 무료로 자비를 베풀 만큼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몇 년 하인으로 일하는 대가로 새 세상에서의 삶을 보장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웠다.

“그렇지요. 그렇기는 한데...”

뭔가 께름칙하다 여긴 시그리드였지만, 자신이 만난 다른 장관들도 – 침대에 누워 있는 옌스를 뺀 나머지 사람들 – 비슷한 반응을 보이자 결국 신대륙 이주의 민영화 – 말하자면 그랬다 –를 허락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 옛날, 코펜하겐의 성벽 밖에서 농노 사냥꾼들에게 붙들리던 도망친 농노들, 그리고 그린란드 연대원들이 퍼뜨린 신대륙 이주 이야기 한두 마디에 이끌려 무작정 단치히로 향했던 기사단국의 농민들 사정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처 닿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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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전에 잠깐 언급한 피츠버그는, 머논가힐라 강과 앨러게니 강이 합류해 오하이오 강을 이루는 지점에 있습니다. 피츠버그 탄전이 일찍부터 발견되어 널리 쓰일 수 있던 것은 바로 이들 강의 침식 덕이었지요.

이러한 입지 덕에,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피츠버그에는 원주민들의 교역소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18세기 초 알공킨계 부족인 쇼니족이 세운 이 마을은, 1754년 프렌치-인디언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기 직전에는 정주인구가 오백이 넘고 이로쿼이 연맹의 외교관이 상주하는 꽤 큰 교역촌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너른벌’은 쇼니족 주민들이 피츠버그 일대를 부르던 명칭으로 알려져 있지요.

2. 중세 유럽의 화폐는 각국 군주와 자유도시들이 중구난방으로 주조하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이들은 (옛 로마의 지혜를 살려) 금은의 함량을 제멋대로 바꾸며 주조차익을 챙기곤 했습니다. 따라서 어지간한 도시에는 꼭 환전상이 있기 마련이었지요.

유럽의 상업이 발달하면서 이런 환전상들이 다루는 금액의 양도 늘어났고, 이들 환전상들은 점차 다른 금융 서비스도 제공하게 됩니다. 은행banca/banque/bank이라는 명칭도 이들이 쓰던 책상banca에서 비롯한 것이지요.

3. 누군가에게는 항공모함 이름으로, 누군가에게는 우주선 이름으로 익숙할 ‘엔터프라이즈’는 본디 ‘착수하다entreprendre’라는 중세 프랑스어에서 기원했습니다. 15세기를 거치며 이 단어가, ‘무언가 모험적인 일에 착수하다’, ‘사업에 착수하다’라는 뜻으로 파생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사업’, ‘모험’이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4. 마사스비니어드, 즉 ‘마사네 포도밭’ 섬은 실제로 해류의 영향을 받아, 뉴잉글랜드에서 보기 드물게 북프랑스~잉글랜드와 유사한 기후를 보입니다. 이 점으로 인해, 매사추세츠에 정착한 잉글랜드 개척자들은 금방 이 섬에도 눈길을 두었고, 1642년 최초의 정착지가 섬에 세워지게 됩니다.

여담으로, 18세기만 하더라도 섬의 이름은 ‘마사네 포도밭’이 아니라 ‘마틴네 포도밭’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마틴은 누구고 마사는 누구였는지, 그리도 어떤 계기로 섬의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불명확합니다.

5. 12세기 말~13세기 초에나 그린란드로 넘어오기 시작한 툴레 인들 입장에서 보면, 그린란드 바이킹들은 도싯 인들과 더불어 그린란드의 원주민인 셈입니다. 작중에서 계속 그린란드 바이킹들을 ‘그린란드인’이라고 지칭한 것도 이를 반영한 표현입니다.

6. 비지칼크는 1979년 개발된 최초의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으로, 막 등장하기 시작한 개인용 컴퓨터가 값비싼 장난감에서 필수불가결한 업무용 도구로 변하게끔 만든 계기 중 하나였습니다. 개인용 컴퓨터의 유용성이 주목받으면서, 미군 역시 보안성 검토 끝에 1980년 애플 II 컴퓨터를 정식으로 도입하게 되지요. 즉 그린란드 회사의 성공 이면에는 스티브 잡스의 영향도 일부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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