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92화 (92/116)

좋을 때든 나쁠 때든 (4)

21. 좋을 때든 나쁠 때든 (4)

1420년 봄의 어느 맑게 개인 날.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간 항구에 머물던 배들은 우르르 빠져나갔다.

교회나 군주가 두려워 차마 쓰지 못했던 책들을 펴내기로 작정한 담쟁이항구 대학¹의 학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학자들은 첫 번째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학자들과 교역품 외에도 대서양을 횡단하는 무역선에 탄 사람들이 몇몇 있었으니, 바로 계약직 하인들을 모집할 작정으로 바다 건너가는 개척민들이었다.

독일과 보헤미아 사람들은 사정 딱한 전현직 농노들을 꼬드기려 뤼베크나 단치히로 향하고, 바스크 사람들은 저들 고향에서 흉작만큼이나 고질적으로 벌어지는 내전에 휘말린 동포들을 헐값에 부려먹을 작정으로 빌바오나 베르메오로 향했다². (어쩔 수 없는 잉글랜드 사람이었던) 롤라드파 사람들은 브리스톨의 지인들을 통해 만만한 아일랜드인들을 데려오고자 했다.

겨우내 좋은희망에 붙잡혀 있던 정부 각료들도 곳곳으로 흩어졌다. 땅은 넓고 사람은 아직 한참 부족한 신대륙 연합 특성상, 각료들이 자신의 업무와 유관한 정착지에 주재하며 업무를 처리하고, 호국경은 정착지를 순회하며 그때그때 필요한 방침을 내려준다는 것이 그간 행정부에서 마련한 임시 업무방침이었다.

다른 배들이 남쪽과 동쪽으로 각각 향하는 와중, 교역의 강을 향해 연기 뿜어대며 느릿느릿 나아가는 증기선에 시그리드가 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증기기관 부품을 겨우내 옮겨와 조립한 끝에 마침내 첫 번째 항행에 나선 증기선 도노스티아Donostia 호. 시험 운행인지라 승객인 시그리드와 리프, 그리고 선장인 기푸즈코아의 미콜라스 외에 배에 탄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수심이 가득해 보이는구만.”

“아, 네.”

머리가 좀 희끗희끗해진 기푸즈코아 사람 미콜라스가 물었다. (제발 옛날처럼 편하게 대해달라고 시그리드가 몇 번이나 강조한 끝에, 사석에서나마 이렇게 이전처럼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작년에 역사적인 함선 아마추가 조타 실수로 난파하면서 미콜라스는 허리와 다리를 크게 다쳤다.

허나 한 번 뱃사람은 영원한 뱃사람. 파도로 흔들리는 갑판 위를 오가기가 어려워졌다 한들, 강을 오르내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아예 일가를 거느리고 신대륙에 정착해서는 테오도로스의 증기선 개발사업을 돕고 있었다.

“짐작하셨겠지만, 이번에 계약직 일손 모으겠다고 개척민들 여럿이 바다를 건너갔잖아요. 그것 때문이에요.”

“일손이 늘어나면 좋은 것 아닌가? 게다가 노예로 붙잡아 끌고 오는 것도 아니고, 유럽에서 살기 팍팍한 사람들을 끌어오는 것인데.”

그 옛날, 시그리드에게 정녕 유럽 군주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신대륙을 개척하고자 한다면 유럽에서 곤궁한 지경에 처한 사람들을 긁어모아 한편으로 만들라는 조언을 해준 바 있던 미콜라스였다. 그때의 그 조언을 후회하기는커녕 참 잘하였다 자부하는 미콜라스로서는, 시그리드의 고민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요. 우리 연합의 재정을 쓰지 않고 사람을 모은다는 것도 좋은 일이고요. 조금 께름칙하긴 하지만...”

“께름칙하다고?”

“네. 선의로 시작한 계획이 안 좋은 쪽으로 꼬이는 게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뭐, 그렇기는 하지만... 반대로 이 증기기관처럼 선의로 시작한 일이 좋은 결과로 끝날 때도 많지 않더냐.”

“그랬으면 좋겠네요. 어, 그러고 보니 슬슬 어딘가 고장이 날 때가 되었는데?”

“하하! 야네크 그 노인네가 장담하더구나. 이놈은 그리 쉽게 망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지난날 홍역을 치른 끝에 무연탄 제철공정이 완비된 야네크네 철공소에서 뽑아낸 철은 그 전에 숯을 쓸 때보다 훨씬 다루기가 편리했다. 무연탄에 함유된 불순물이 숯보다 훨씬 적기 때문이었지만, 야네크는 물론이요 시그리드조차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했다.

사람 욕심이라는 게 대개 그렇듯, 야네크 노인은 거기 만족하지 못하였다. 이왕 무연탄의 화력과 철공소 옆 강물의 수력을 쓰게 된 김에, 연철, 아니, 강철까지 만들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아, 그 얘기는 들었어요. 뜨거운 김을 어떻게 잘 활용해서 뭘 해본다고 했었는데...”

“나도 쇠 다루는 일은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게 성공한 모양이더라.”

한참 전, 시그리드가 세금을 걷어서 증기기관에 투자할 작정을 할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었다. 시간과 예산이 모두 주어진 덕에, 철공소 주인 야네크는 막 보헤미아에서 새로 넘어온 장인들과 함께 머리를 굴릴 수 있게 되었다.

‘이곳 신대륙은 우리가 떠나온 보헤미아와 다르오. 보헤미아에서는 길드부터 교회까지, 모두의 눈치를 보아야 했지만, 여기서는 오직 전능하신 주님 아래에 우리 자신들만 있을 뿐이지.

다시 말해, 우리가 여기서 올리는 이익은 그대로 우리 것이 된다는 뜻이오. 누구 맘대로 대대로 내려오던 제련법을 바꾸느냐고 딴지 걸 사람도, 어디서 그런 이상한 생각을 가져왔냐며 트집 잡을 사람도 없소.’

우리가 맘껏 욕심 부려도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 있는 재주 없는 재주 다 끌어모아 부자가 되자는 말을 노인의 연륜으로 적당히 포장하며 말하는 야네크였다.

그 덕에 불과 일이 년 사이에, 유럽에서는 수십 년 넘게 걸렸을 진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석탄이라는, 시대에 앞선 연료를 억지로 도입한 덕에, 거기에 적응하려 하다보니 엉겁결에 맞아떨어진 면도 있었지만.

‘우리가 어떻게 얻어온 무연탄인데, 그걸 태워서 얻은 뜨거운 김을 그냥 날려버리긴 좀 아깝지 않소?’

야네크는 왐파노악 젊은이들과 드잡이질하며 얻은 무연탄을 태워 얻은 뜨거운 공기를 철광석 제련하는 데만 쓸 게 아니라, 무쇠를 단련하는 데도 써볼 요량이었다.

연철이나 강철을 얻으려면 선철(무쇠)을 계속 달구면서 꾸준히 두드려야 했다. 허나 뜨거운 공기는 이제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고, 그 두드리는 것도 로마인 테오도로스 덕에 수력으로 때울 수 있게 되었다.

야네크는 물론이요, 철공소에서 예산을 달라며 보낸 설계도면이 그냥 ‘그럴듯하다’ 여기고서 – 당장 사법재판과 선거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던 탓이었다 - 허가를 내린 시그리드도 알지 못하는 사이, 그렇게 삼백여 년 먼저 원시적인 퍼들법Puddling 반사로가 발명되게 되었다³.

맨 처음 증기기관 시연할 적에 증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기관이 몇 번이나 망가졌던 것과 달리, 그렇게 얻어낸 강철로 만들어낸 부품들은 열과 압력을 훨씬 잘 견뎌내었다.

“덕분에 이렇게 잘 움직이게 되었... 어라?”

물론 부품의 내구성이 올라갔다고 해서 기관 자체의 결함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미콜라스가 고장이 줄었다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불길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해도 이를 익히 알 수 있었다.

물론 부품이 열과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아예 망가졌던 시절에 비하면, 현장에서 그럭저럭 복구가 가능한 정도의 고장만 나는 지금이 훨씬 나았지만.

곧 고장난 기관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수차 또한 그에 맞춰 돌아가기 시작했으며, 교역의 강 하구의 잔잔한 바다를 타고 증기선은 다시금 앞으로 나아갔다.

시그리드의 표정도 조금은 밝아졌다.

그러나 신대륙 연합 사람들이 진취적으로 앞날을 향해 나아가게끔 만드는 그 불길은, 나름의 재와 연기를 흩날리곤 했다.

자신이 약간의 아이디어를 던져준 것만으로도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흡족해하며 시그리드가 지었던 미소는, 며칠의 여정 끝에 우애의 도시에 닿자 금방 사라졌다.

“저기, 정말로 이런 조건으로 일꾼을 모으려는 건 아니시죠?”

“어... 그렇게 모으려는 것 맞습니다. 이미 우리 정착촌 사람들이 모은 밑천으로 일꾼 모집하러 중매쟁이 아돌프 어르신이 바다를 건너가고 계실 텐데요.”

미리 연락을 보내둔 덕에, 이번에 저들 지역구 의원을 통해 인력 모집을 허락받았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대표를 뽑아 마을 회관 – 내무장관 플레톤의 집무실을 겸하고 있었다 – 에 보내두었다.

“하지만 이건...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제가 보기에 이건 노예계약에 더 가까운 걸요.”

기간이 정해져 있기는 했다. 어딘가는 삼 년, 어딘가는 오 년. 어딘가는 칠 년.

그러나 그 계약 종료 조건에 대해서는, 보헤미아인이든 독일인이든 다들 ‘필요에 따라 연장될 수 있다’는 조항을 붙여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계약기간 연장에 있어 계약직 하인들의 의사가 반영될 리는 만무했다.

“어디 그뿐인가요? 처우에 대한 얘기도 없고...”

“그야, 제대로 처우를 해줄 만큼 사정이 넉넉하진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애초에 그러니까 이곳에서 일손을 구하는 대신 바다 건너에서 일손들을 데려오려는 거고요.”

“대신 처벌에 대한 규정은 있네요.”

‘근로의욕 고취를 위해’ 필요시 노동시간 연장, 숙식 제한 등을 가할 수 있다는 내용이 적힌 경우도 있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한 법이니까요. 그 존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동기를 부여하기에 충분할 만한 방법을 찾느라 고생을 좀 했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채찍질 같은 신체형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고 있었다. 그것만 해도 당대 평균 이상이기는 했다.

어디 숲속이나 섬 한가운데 모아다 놓고 ‘얼른 개척하지 않으면 식사는 없다’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동기부여가 될 테니, 굳이 채찍질 같은 형벌을 거론할 필요도 없던 것이겠지만.

“우리가 각하의 영도 하에서 이곳 땅에 넘어온 이래 겪었던 고생에 비하면, 이 정도는 관대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옳소, 옳소! 각하, 부디 깊게 헤아려 주십시오. 저들이 성실하게 일하여 계약된 만큼의 일을 마친다면, 그들은 이 땅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고생하며 개척한 기반을 함께 누리면서요. 그러니 여기 마사 말마따나 관대한 조건이라 할 수 있지요.”

신대륙은, 모두가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이 바라는 꿈을 그려나갈 수 있는 땅. 적어도, 그간 결코 평탄치 않았던 개척 과정을 거치면서 연합 사람들 머릿속에 심어진 생각은 그러했다.

그들이 이 땅에 모인 이유. 그리고 도저히 미덥잖은 이민족들과 이교도들을 같은 나라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이웃으로서 존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 대의는 아직껏 세상에 없던 것. 시그리드가 혜성처럼 나타나 온 유럽을 한바퀴 휩쓴 끝에야 짓밟히지 않고 이 땅 위에 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시그리드와 연합의 대의를 따라 이 땅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딛은 개척자들은,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더 나은 축에 든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고 해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약간 더 존엄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우리는 귀족이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농노로 만들지도 않을 것이고요.”

“하지만 이대로라면 계약이 끝나도 일꾼들은 사실상 농노로 남을 텐데요.”

개간이 마무리되면 농장의 소유권은 일꾼들을 데려온 개척자 모임에게 귀속되며, 전직 계약직 하인들은 자신들이 개척한 농지를 우선적으로 소작할 ‘권리’를 지닌다.

하인 모집 계획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장 개척 계획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내용이었다.

“농노라니요! 각하, 말이 심하십니다.”

“이해해 주세요. 일찍 건너오신 분들은 그린란드가 어떤 곳인지 보셨잖아요. 농노라는 게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모르실 수도 있지요.”

진짜 농노와, 그저 경제적으로 타인에게 예속되었을 뿐인 자유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농노제가 점차 강화되어가는 유럽의 동쪽에서 온 사람들이든, 농노제가 거의 사라졌지만 여전히 일상의 언어와 관습 속에 깊게 흔적을 남기고 있는 서쪽에서 온 사람이든, 다들 이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럽에는 정말로 형편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떠나온 동레미 마을만 해도 그랬지요. 오죽했으면, 그저 별 볼 일 없는 마을 유지가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그 뒤를 따라 우르르 이민 행렬이 생겼겠습니까?”

자크 다르크도 논쟁에 끼어들었다. 본인은 읍내에 적을 두었기에 딱히 하인 모집에 발을 걸치진 않았으나, 교외에 농장을 꾸린 프랑스인들을 대신하여 찾아온 그였다.

“그런 사람들을 평생의 비참함에서 구제하고, 더 나아가 이곳 신대륙에서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조심스럽게 말하는 바이지만 선행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자크 다르크뿐 아니라, 투슈판 원정과 선거를 겪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비슷하게 드러나는 생각이었다.

물론 서로 으르렁거리고, 소소하게 이권다툼을 하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대륙 사람들은 이교도와 기독교인, ‘진짜’ 신도와 이단자, 야벳Japhet의 후손과 함Ham의 후손을 막론하고 모두가 그럭저럭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⁴.

그렇다면, 아직도 민족과 종교를 두고 싸우는 사람들, 그리고 그 싸움에 무력하게 휘말려 고통받는 사람들에 비해 자신들은 어떤 식으로든 조금 나은 사람이지 않을까?

지리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별 연관 없던 사람들을 묶어놓은 것에 불과했던 연합에 처음으로 정체성이라는 게 생겨나고 있었지만, 그런 정체성에는 필연적으로 우월감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붙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학교가 세워지고 신문이 발행되면서, 남북으로 수천 마일에 달하는 해안가에 퍼져 살고는 있지만 연합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은 빠르게, 그리고 깊이 퍼져나갔다.

“국채를 발행하신 것은, 저 남쪽 바다의 불우한 원주민들에게도 새 터전을 마련해주기 위함이 아니었던가요? 그렇다면 우리의 고향 땅에 남은 가족과 친척들에게도 똑같은 일을 행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크 다르크가 시그리드를 응시하며 말했다. 시종 공손한 말투였으나, 맨 처음 신대륙에 발을 디디던 시절의 그 비루함 대신 어떤 강단과 자긍심이 배어 있었다.

자크 다르크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과부 마사, 독일 사람 발제의 알브레히트 등등, 다들 할 말 많은 사람들이 시그리드 자신의 행적을 근거로 삼아 저들의 농노, 아니, 계약직 일꾼 모집을 옹호하고 나섰다.

결국 시그리드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계약 조건을 오용하여 일꾼들의 권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는 것뿐이었다.

따뜻한환영에서도 비슷하게 계약직 하인 모집의 실상을 파악하려다가, 주변의 개척 사업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만 확인한 시그리드는, 좋은희망에 돌아오자마자 한숨을 푹 쉬었다.

멋쩍게 제 동포들을 변호한 후스 말마따나, 사실 따뜻한환영 사람들이 우애 주변 사람들과 거의 비슷한 조건을 내걸었다는 것은 그나마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었다.

유럽에 살던 시절 기준으로, 로마인 다음으로 콧대 높은 사람들이 보헤미아인들이었으니, 가뜩이나 높던 자부심에 신대륙 연합에서 자체 생산한 자부심까지 더해진다면 훨씬 악독한 계약 조건이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 정도였다는 말이냐? 아이고, 늙은이 헛소리 뒷수습을 어찌 해야 할꼬.”

자신이 사견을 보탰던 것이 이 사태에 약간이나마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싶던 스노리 노인이 겸허하게 자책을 했다.

“아녜요. 그 사람들 말에도 일리가 있었던 걸요. 그리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도 하고요.”

그간 여기저기서 남아도는 사람을 모아, 노잣돈이라고 푼돈 쥐어주고 신대륙으로 떠밀어 보내던 합스부르크의 프리드리히처럼, 신대륙 이권을 노리고서 저들 아랫사람들을 이민시키려는 이들은 제법 많았다.

그런 이들에게, 저들 돈 한 푼 안 들이고 신대륙에 사람을 심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내 그대들에게 인력을 저렴한 가격에 알선해주도록 하겠소. 우리 영지는 비좁고 매년 흉작이 거듭되어, 영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으니, 어찌 그들의 주군으로서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 있을까?’

그러면서, 사람들을 꼬드겨 바다 건너로 보내고 저는 이익을 챙길 것이다.

그리고 시그리드가 맨 처음 개척한 아이슬란드-그린란드 항로로 계약직 하인들을 나르는 업자들도 나타날 것이다.

그쪽 항로는 훨씬 느리고 위험했지만, 대신 아직도 유럽의 주력 무역선인 조그만 코그선으로도 – 그 옛날 처음 코그선을 보았을 때 엄청나게 크다고 놀랐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들었다 - 오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언제까지 그린란드 회사 재정으로 이민선을 운영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벌어질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수밖에요.”

한숨 푹 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새로운 궁리를 시작하는 시그리드였다.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마냥 낙담하여 주저앉아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시그리드 천성에 맞지 않았다.

“뭔가 일이 잘 안 풀렸다고 들었소. 내 딱히 할 줄 아는 건 없지만, 그런 고민에 무엇이 특효약인지는 알고 있지.”

교역철이 지난지라 한산한 상공회의소 문을 열고서, 때마침 술집 주인 헤니히가 들어왔다. 들고 온 나무통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큼한 술 냄새가 풍겨오기도 했고.

고맙다고 인사한 뒤, 스노리 노인에 이어 시그리드도 술잔을 기울였다.

“여기 희망에 그 뺀질이 옌스 장관도 있고, 쓸모 있는 궁리 해낼 만한 사람이 또 찾아보면 몇몇 있을 게요. 말씀만 하시면 모조리 데려오리다.

만약 누구 마음에 안 드는 놈 있으면 말씀 해주시고. 원조 뺀질이 한스 녀석이, 자리가 사람 만든다고 부관 감투 쓰더니 꽤 듬직해졌걸랑. 코펜하겐 시절부터 좀 그렇게 살았으면 팔자가 피었을 텐데... 아무튼 아씨 맘에 안 드는 놈이 있다고 하면, 나랑 한스 둘이서도 족히 민병대 사람 수십은 모을 수 있을 게요.”

과묵하고 쌀쌀맞은 독일 사람의 전형을 보여주는 헤니히치곤 꽤 강렬한 응원의 표현이었다.

“사람을 모은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누굴 손봐주면 되겠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하인들끼리 뭉치도록 조합을 만들게끔 하는 거에요.”

“길드?”

“길드가 아니라, 노동조합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

자신이 노조 설립이라는 꽤 그럴듯한 방책을 내놓았다고 자부하던 시그리드는, 곧 의욕을 되찾고 호국경 업무를 재개했다.

노조도 세우고, 노사갈등도 방지할 겸 이 기회에 평시에는 헌병 노릇할 상비군도 좀 만들고... 그 외에도 신경쓸 일은 많이 있었다.

잉글랜드 왕 헨리가 보내온 보석금을 확인하고, 그에 맞춰서 아직 억류되어 있던 제노아와 잉글랜드 용병들을 풀어주고 – 아마 그 보석금은 용병들 줄 급료에서 나왔을 것이다 – 돌려줘야 할 맨오브워 중 한 척은 ‘사고로 침몰’한 것으로 처리하고, 야무지게 해체하여 역설계할 준비를 하고...

그런데 막 그런 업무를 돌보기 시작하자마자,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배 들어와요!”

교역이 주력산업인 좋은희망에는, 헤르욜프스네스의 등대를 본따 만든 고래기름 등불 등대가 세워져 있었다.

맨 처음 좋은희망이 개척될 때 태어난 아이들은 벌써 예닐곱살씩은 족히 되었는데, 그런 꼬마아이들은 툭하면 등대에 올라가서 바다를 구경하곤 했다.

배가 들어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리는 역할도 했기에, 어른들도 그것을 딱히 막지는 않았다. 그냥 등대 주변에 난간만 세워두고, 올라가서 장난 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선에서 그칠 뿐.

“엥? 다음주 쯤이나 되어야 돌아올 줄 알았는데?”

노블 무역선이 대서양 횡단하는 주기와는 맞지 않는 도착 소식에, 부두 근처에 있던 이들은 다들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곧 나타난 배는 작은 코그선이었다.

“일단 시그리드 각하를 모셔와라!”

시그리드가 저 계약직 하인들 도착하면 꼭 저를 부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던 전직 민병대원 – 헤니히와 한스 덕에 미리 연통이 싹 돌았다 – 하나가 외쳤다.

그 덕에 업무에 허덕이던 시그리드도 늦지 않게 후다닥 달려올 수 있었는데, 암만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다.

뱃사람은 아니지만 지난 십여 년 중 배 위에서 보낸 시간이 거의 일 년 정도는 될 시그리드는 금방 계산을 마쳤다.

“뭔가 날짜가 안 맞는데요?”

“그렇습니까? 어디... 얼레, 그렇네?”

아무리 순풍이 분다고 해도, 대서양 횡단 항로는 족히 몇 주는 걸리는 먼길이다.

이렇게 빨리 첫 번째 민간 이민선이 도착했다는 것은, 계약직 하인 모집 소식이 들리자마자 바로 함부르크나 단치히를 출발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쉽게 모일 리가 없는데...”

“이민선이 아니라 다른 배일지도요.”

그러나 포구에 들어서는 배의 갑판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 배의 정체가 이민선이 아니라는 가설을 단번에 일축하였다.

“아아! 살았다!”

“만세! 마침내! 마침내 도착했다!”

“십 년! 앞으로 십 년이면 된다!”

그리고 배가 막 접안하자마자 우르르 몰려나오는 농노들.

“세상에...”

“그...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몰려나오는 농노들 뒤에 멋쩍게 따라나온 합스부르크 하수인 아돌프의 말이었다.

“우리가 하인을 모집한다는 말이 돌자마자, 근처 천막촌의 모든 도망나온 농노들이 항구로 달려왔지 뭡니까. 함부르크 시 의회에서, 도시가 빈민으로 가득할 판이니 일단 가용한 배를 몰고 저 농노들을 데려가라는 집행명령을 내린 통에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지요.”

신대륙 연합의 평범한 개척민들. 시그리드와 그린란드인들이 소빙기의 추위를 견뎌내는 동안 붕괴하는 중세의 질서를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던 이들의 통찰이 옳았던 것으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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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미 최초의 대학인 하버드 대학은 1636년 청교도 성직자 교육을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인구가 2만이 채 안 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작중 시점의 ‘담쟁이항구 대학’은 너무 이르거나 늦지 않게 시의적절하게 세워진 셈이지요. (참고로 하버드대의 원래 이름은 그냥 ‘새 대학교New College’였습니다. 개척자들의 형편없는 작명 실력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2, 대략 14세기 말부터 15세기 말까지, 나바라 왕국의 바스크 귀족들 사이에서는 ‘파벌 전쟁War of the Bands/Bando gerrak’이라 통칭되는 사전私戰이 끊임없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분쟁 이면에는, 원양어업과 조선업의 부흥으로 새롭게 부상하는 도시의 부유층과 전통적인 토지귀족들 사이의 갈등이 있었지요.

여기서 패배한 바스크 귀족들은 때마침 통일된 에스파냐의 해외 팽창이라는 시류에 올라탔고, 그 덕에 오늘날까지도 이름이 알려진 위인들이 여럿 나타나게 됩니다. 기푸즈코아와 비스카야의 수호성인인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도 그중 하나지요.

3. 원 역사에서 퍼들법 반사로는 18세기 말, 코크스를 이용해서 제련한 철을 상용화할 방법을 찾던 중 개발되었습니다. 순도가 높은 무연탄이 먼저 쓰이게 된 작중과 달리, 원 역사에서는 훨씬 화력이 높지만 대신 불순물이 많은 역청탄이 먼저 제철에 쓰였지요. 그러나 이렇게 얻은 철은 불순물 함량이 높아 기존의 주철 가공 방식으로는 다루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고, 불순물과 주철 내의 탄소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꾸준히 열을 가하면서 녹은 쇳물을 젓는 퍼들링 반사로(교반식 반사로라고도 합니다)가 개발되게 되지요. 반면 작중에서는 신대륙의 무한한 석탄으로 이익을 극대화할 방법을 찾는 도중 퍼들법이 개발되게 되었습니다.

4. 노아의 세 아들인 야벳과 셈, 함이 각각 다른 인종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아브라함계 종교들이 공유하는 전승입니다. 특히 중세~근세 유럽인들은 자신이 야벳의 후손이라고 여겼고, 원시적 민족주의 중 하나인 폴란드의 사르마티즘 사조에서는 ‘조금 더 야벳에 가까운’ 폴란드 귀족들이 폴란드 민중이나 다른 유럽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은 노아의 저주를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흑인을 노예로 부려먹었던 유럽인들과 아랍인들로 하여금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함의 후손으로 노예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억지 주장을 펼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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