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를 꿈꾸며 (4)
22. 캘리포니아를 꿈꾸며 California Dreamin' (3)
태감 정화를 따라 하서양下西洋에 나섰다가, 보잘것없는 야인 몇 명 죽였다는 ‘죄’로 고향에서 수만 리는 족히 떨어진, 네 바다¹ 너머의 땅까지 끌려와 다섯 번째 대양의 가장자리에 서게 된 화인華人들.
그들이 조선소가 일부 완공되자마자, 실로 개명된 나라 사람답게 철두철미한 태업에 나선 까닭은 다른 게 아니었다.
“저 대비달자大鼻㺚子²들이 과연 우리 모두를 고국으로 돌려보내겠는가?”
오랑캐의 우두머리라는 왕후 서씨는, 그들이 밟고 있는 이 땅이 둥글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유가항劉家港(現 장쑤 성 류허 진)을 떠난 이래 단 한 번도 동쪽으로 향한 바 없건만, 눈앞의 큰 바다만 서쪽으로 마저 건너면 중원을 다시금 눈에 담을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설령 옳다 할지라도, 이곳까지 끌려 천조 대명의 신하 모두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태감 대인께서 경사京師(수도)로 돌아가시면 반드시 새로 하서양에 나서실 테니, 설령 우리 모두가 한번에 귀향하진 못하더라도 다음 번을 기약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언제가 될지 어찌 확언하겠느냐? 차라리 단번에 우리 모두가 건널 수 있을 만큼 배를 만드는 것이 옳으리라.”
군교들쯤만 되어도 다들 알음알음 알고 있었다. 태감 정화가 이토록 무리한 하서양을 진행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황상의 곁에서 크나큰 군공을 세운 덕이요, 다른 환관이라면 아무리 황상의 총애를 받는다 한들 결코 이러한 큰일을 이끌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매번 하서양할 때마다 곱지 않은 시선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하였다.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수천 료料에 달하는 거대한 보선寶船들은 절강 바닷가에 매인 채 썩어갈 것이요, 정화의 하서양은 바닷가 노인들의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갈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아는 이들은, 과연 ‘다음 번 하서양’이 언제가 될지, 애초에 이루어지기나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대인, 하면 저희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우선은 오랑캐 패두牌頭(중하급 관리자의 통칭)의 명을 받들어 이곳에 항구와 선소船所를 세운다. 그래야만 저들로 하여금 우리의 말을 듣게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오랑캐 땅에도 교역의 제도가 있으니, 목재를 나르는 일부터 먹거리 마련하는 일까지 모든 것이 향두香豆(카카오 콩)를 매개로 이루어졌다. 즉, 그들이 만들어야 할 대선大船 역시 누군가가 값을 치러야만 비로소 바다 위에 뜰 수 있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오랑캐들은 굳이 그들 모두를 데려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소위 신대륙 연합의 국력이 얼마나 빈한한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암만 큰 배를 만든다 한들, 고작해야 한두 척 만드는 게 끝일 테다. 그들이 이른바 대서양 건널 적 타고 온 배를 이곳에 그대로 옮겨놓는다 한들, 잘 해봐야 그들 중 절반, 못하면 한 사분의 일 정도나 타고 돌아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오랑캐들이 무엇을 기준으로 배 타고 돌아갈 사람과 여기 남을 사람을 정할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모두가 돌아갈 수 있을 방도를 모색하는 수밖에.
“우리가 당장 무작정 우리 모두가 탈 만큼 배를 만들자고 하면, 저들은 코 풀듯 쉽게 우리의 청을 무시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기반이 갖추어지고, 작은 배 한두 척쯤은 드나들 수 있을 만큼이 되면, 그때는 우리의 청을 차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겠지.”
문물의 개명됨뿐 아니라 장삿속에 있어서도 천하제일이라 자부하는 명나라 사람다운 판단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뭔가를 요구한다면, 차라리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돌려버릴 수 있겠지만, 이미 어느 정도 진척이 이루어진 상황이라면 그때까지 일궈놓은 기반이 아까워서라도 요구하는 쪽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밖에 없는 이치였다.
“이보시오, 리李 대위, 이곳 조선소 공사가 늦어지면 서로 곤란한 처지 아니오? 왜 이러시는 게요?”
“만이蠻夷 사람들은 뭐든 빨리빨리 하라고 채근하니, 이는 영 좋지 못한 버릇이다. 항상 이렇게, 매사 철두철미하게 두 번 보고 세 번 고쳐보면서 일하는 것이 상국의 법도다. 만만디, 만만디.”
바스크 사람들이 답답하여 채근을 할작시면, 성의는 눈꼽만큼도 없고 중간중간 ‘네가 알아들어야지’ 하는 투로 관화官話 섞어가며 대꾸하곤 하였다. 제갈무후(제갈량)로부터 전해지는 중화의 비기 격장지계激將之計에 바스크 사람들의 억장은 와르르 무너져내리기 십상이었다.
사정을 들은 시그리드는, 곧장 정화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대체 부하들 관리를 어떻게 한 건가요?”
“아니, 본관을 포로로 끌고 간 게 누구인데 그렇게 물으면...”
“농담이에요, 농담. 듣자하니, 한 번 바다를 건너간 배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며 저렇게 태업을 하는 모양인 듯하더군요.”
농담까지 던질 만큼 시그리드는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태평양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푸르고 맑은 바다 덕분일까? 좋은희망 떠날 적부터 품어왔던 고민 대신, 바다 건너에서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땅을 생각하게 된 덕분일까?
“저 사람들은 인삼 이야기를 아직 모르잖아요. 그 얘기만 전해주신다면, 다들 의욕을 되찾고 두 손에 다시 연장을 쥘 거에요.”
한 가지는 분명했다. 유럽에서 그러했듯 신대륙에서도, 기회가 닿자마자 피어난 사람의 욕심이라는 꽃. 그 꽃망울은 저들 명나라 사람들 마음 속에도 있을 것이었다.
한 번 대양을 건넌 배는, 진상하고 판매할 인삼을 구하고자 다시금 아카풀코로 돌아올 것이요, 고국으로 돌아가든, 이곳에 아예 눌러앉든, 조선소에서 열심히 일할수록 정화의 수하들 또한 막대한 이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시그리드의 말을 듣고 자못 그럴듯하게 여겨, 보무도 당당하게 제 수하들을 만나러 갔던 정화는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면목이 없구려.”
태감의 위세가 암만 대단하다 한들, 자칫 이 머나먼 땅에서 여생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한 번 인삼이 바다를 건너게 되면 대양을 횡단하는 배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도, 다들 뜻을 안 굽힌단 말인가요?”
“그렇다오.”
“지난날 지슈카 아저씨한테 패배한 게 컸던 모양이로군요. 이를 어쩐다....”
정화는 시그리드의 잘못된 해석을 굳이 고쳐주지 않았다. 저들이 인삼 얘기에도 끄떡하지 않는 이유, 아니,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저들 모두를 단번에 태우고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대명의 신하로서 오랑캐 수괴 앞에서 이를 밝힐 수는 없었다.
만약 정화가 북경에 돌아가, 황상을 배알하고 그간 겪은 일을 고한다면, 그날부로 황상께서는 이곳 아카풀코에 군현을 설치하고 장차 ‘백성에게 이로운 여러 물산’을 들여오는 문호로 삼으실 것이었다.
굳이 그 땅에 새로 사민徙民할 것도 없이, 이미 그곳에 머물게 된 백성들로 하여금 그 땅을 영세토록 일구며 살아가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개중 관직 있는 자는 품계를 올려 주고, 나머지에게는 상급을 나눠주며, 가족이 있는 자에게는 그 가족을 보내주고 배필 없는 자에게는 여인을 보내주면 그 황은이 실로 망극하리라.
구라파든, 중원이든, 말로는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중하다 하였으나,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귀하게 여기진 않았으니, 이것이 곧 천하의 상도常道라.
“정녕 저들이 바라는 대로 단번에 모두를 태워 떠날 수 있을 만큼 배를 건조할 수는 없겠소?”
“우리 사정이 그렇게 여유롭지 못하다는 건 그간 열심히 염탐하셔서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시그리드가 여전히 저를 곱게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잠시 망각한 정화는, 갑자기 훅 들어오는 가시 돋친 말에 잠깐 움찔했다.
(시그리드가 유럽 땅에서 임금 붙잡고 놓아주기를 대수롭게 여긴 걸물임을 알게 되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수만 대군을 이끌던 자신이 고작 처녀 하나에게 움찔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자조하였을 법한 일이었다.)
“부에 대한 욕심으로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했다면, 다른 수를 쓰는 수밖에요.”
“다른 수라?”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한 종류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검은 책 한 구석, 사람의 욕심이 끝을 모르고 달려가기 시작하던 시기의 지식 한 토막을, 약간의 모순과 양심적 가책을 느끼며 꺼내는 시그리드였다.
“저를 조금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몇 가지 여쭤보려고 하는데요...”
그런 시그리드 속마음을 모르는 정화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태평양이라는 이름은 그 옛날/미래의 마젤란이, 신대륙을 남쪽으로 빙 돌아 저의 이름 붙을 해협을 통과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잔잔한 대양을 보며 지은 이름이라고 욘은 말했다.
그러나 지금, 막 동쪽에서 뜨고 있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는 바다는, 꼭 마젤란 해협의 거친 수로를 뚫고 나온 뱃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관찰자의 눈에도 평화로운 대양Pacific Ocean처럼 보였다.
“다 모였습니다.”
명나라 사람들과 마보가 모아온 타이노 일꾼들이 모두 근처 공터에 모였다는 보고, 비로소 시그리드는 바다에서 고개를 돌려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달빛과 곳곳의 횃불 외엔 딱히 빛이랄 게 없었지만, 그럼에도 저를 바라보는 어색한 눈빛은 족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불려나와, 역시 알 수 없는 이유로 이리저리 나뉜 채 줄지어 앉은 명나라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에 삼삼오오 나뉘어 끼어 있는 타이노 사람들 모두, 어색하지 않기가 더 어려울 것이었다.
“다들 제가 누군지는 아시리라 믿습니다.”
하산과 마보가 각각 관화와 타이노 말로 통역해주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곳에서 한 해쯤 바스크 장인들과 합을 맞췄던 명나라 사람들 중에는 공용어 익힌 이도 없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만 통역을 맡겼다가는 의도적이든 실수로든 오해가 생기기 십상이었다.
“제가 이곳에 온 까닭은, 이 아카풀코 조선소와 항구 공사를 빠르게 마무리짓고, 대양을 건널 수 있는 배편을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마련하기 위함이랍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문제가 있더군요.
그 문제가 무엇인지, 아마 명나라에서 오신 분들은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하산의 번역이 끝나자, 살짝 격앙된 목소리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여기서 조금만 먼바다로 나가면 연중 동남풍 부는 곳이 나온다는 것도, 아직은 쉽게 믿기 어려우시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한 번 떠나간 다음 남은 사람들을 태우러 돌아오리라는 보장도 신뢰하긴 어려울 테고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처음 유가항을 떠날 때 그러했듯, 누구 하나 뒤에 남지 않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명나라 군사 중 장교인 듯한 사내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들 중에서 대장 노릇하는 이거나, 다들 품고 있는 생각을 한 발 앞서 입 밖에 낸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여러분의 뜻대로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장교의 뒤를 따라 뭐라고들 떠들려던 자들은, 시그리드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막 열었던 입을 다시 닫았다.
“이곳 근처에 있는 왁샤칵의 금광이 운영을 시작하고, 저 남쪽 어딘가에 있을 산맥에서 금은을 들여올 수 있게 되면, 그때는 여러분 모두를 태우고 갈 만큼 많은 배를 건조할 수 있을 거에요. 그 전까지는 재정 상황상 어렵겠지만요.”
“그러려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글쎄요. 최소한 오륙 년은 걸리겠지요?”
그 정도라면 받아들일 만하다 여기는 자들과 너무 늦다고 여기는 자들 사이에 반응이 엇갈렸다.
“반면 여러분이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작업에 임하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답니다. 우리가 싣고 갈 인삼을 비싸게 팔 수도 있고, 또 여러분의 황제께 고해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제 계산대로라면, 명나라에서 온 분들 중 일부는 일찌감치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을 거에요.”
천조 대명에 처음 발을 디딜 사절단을 수 명 정도로 때울 수는 없는 노릇. 더구나 선상 반란 같은 최악의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배가 세 척이면 적어도 그중 한 척은 신대륙 연합 사람으로 채워야 했다.
“일부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러분들이 작업하기에 따라 달려 있지만, 많아도 여러분 중 삼분의 이 정도는 이곳에 조금 더 남아 계셔야 할 거예요.
그렇지만 저 대양을 일 년에 한두 번씩 왕복한다고 치면, 이삼 년 내로 여러분 모두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겠지요. 배를 건조하고 유지할 재정이야, 한 번 바다를 건너기만 하면 충당될 테니까요.”
이삼 년이라면 충분히 기다릴 법하다 여기는 사람들, 오륙 년보다야 훨씬 낫다 보는 이들, 그리고 그 말을 어찌 믿냐며 격앙된 몸짓으로 주변과 언쟁 벌이는 이들이 모두 있었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운데 껴서 두리번거리는 타이노 일꾼들은 덤이었다.)
“그러면 저희 중 누군가는 뒤에 남아야 할 것이요, 누군가는 남들보다 앞서 귀향하게 될 것인데, 대체 그 ‘일부’를 어떻게 정하시렵니까?”
기왕 일어난 김에 끝을 보자는 작정인지, 일전의 그 장교는 도통 앉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물론 시그리드로서는 도리어 환영할 일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용건을 곧장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좋은 질문이네요. 혹시 성과급 제도라고 들어 보셨나요?
여기 정 태감님 말씀하시기로, 중국의 조선소는 베네치아에서 하는 것처럼 짜임새 있게 일감과 일꾼을 나누어서 빠르게 배를 건조한다고 하더라고요. 여러분이 최선을 다한다면, 보르도에서 건조하는 데 일 년은 걸릴 배를 두세 달이면 완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도 하셨지요³.
저는 거기에 약간의 보상을 덧붙일 생각이랍니다. 여러분 좌우를 둘러봐 주시겠어요?”
말이 통하기 시작하자마자, 바스크 사람들은 ‘카타이’ 사람들 중 군인과 선공, 막일꾼을 분간하여 명단을 만들어두었다. 처음 잠깐 동안은 명나라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바스크 장인들과 순순히 협력하였기에, 그렇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그렇게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시그리드는 명나라 사람들을 여러 조로 나눈 다음, 각각의 조에 타이노 일꾼들을 배치했다.
“제가 여기 머무는 동안, 저 자신을 포함한 감독관들은 여러분의 작업 상황을 감독할 거예요. 작업량과 협업 정도를 고려해서 여러분의 실적을 평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양을 처음으로 횡단할 배에 탈 선원을 선발할 예정이랍니다.
그리고 나머지 분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다음 순위로 배를 탈 사람들을 정할 것이고요. 만약 모종의 사유로 여러분이 배를 타지 못하게 된다면, 대신 그 성과만큼 보수를 따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렁이는 불빛과 달빛 아래, 그제야 저들이 무엇을 기준으로 여러 조로 나뉘었는지 깨달은 명나라 사람들의 황망한 낯빛이 드러났다.
현지에서 배를 보수하고 필요시 새로 건조하기 위해 정화가 데려온 선공들은 각각의 직책에 따라 나뉘었지만, 나머지 군사와 뱃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비율로 각각의 조에 분산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한두 조만 선발되어 배에 타더라도 문제 없이 항해를 할 수 있을 만큼.
“이것은 불의한 처사입니다!”
금방 항의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웅성대는 좌중 가운데서 그에 동조하는 듯한 관화도 들려왔다.
그러나 조용한 표정으로 저들끼리 수군대거나, 숫제 눈을 번뜩이며 제 동료가 된 이들을 돌아보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선발해야 할까요? 아니면 아예 선발을 포기하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재정이 충족될 때까지 오륙 년을 마냥 기다려야 할까요?”
“암만 그래도 의리가 있지, 차라리 기다리는 것이...”
“하지만 다른 분들도 동의하실까요? 여러분들 모두가 열심히 일하신다면, 비단 맨 처음 바다를 건널 인원으로 선정되는 사람들뿐 아니라 이곳에 남아서 다음 배편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도 훨씬 일찍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텐데요.”
사사건건 항의하던 장교뿐 아니라, 비슷한 목적으로 일어났던 이들도, 시그리드의 반문을 듣자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저의 마음이 흔들렸듯, 제 주변의 다른 동포들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잘 알았던 것이다.
정화의 수하들 대부분은, 태감 정화라는 그 위명과 권세에 이끌려 모여든 절강과 복건의 가장 뛰어난 뱃사람과 수군들.
다시 말해, 같은 중화의 사람이라는 자각과 태감 정화라는 한 사람 외에는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요인은 없었다.
이제 그 모두가 깨져나가고, 저들이 성공해보았자 관인官人들의 비정하고도 무관심한 처사로 이 머나먼 땅에서 평생을 보내는 처지를 면치 못하리라는 걱정도 잦아들었다. 설령 조정의 명으로 남은 이들이 여기서 썩어야 하는 신세가 된다 한들, 황금을 두둑이 들고 바다를 몰래 건넌다면 안 될 일도 되게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 오랑캐 여왕을 무턱대고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도 있었지만, 그런 눈초리보다 먼저 성과를 거두어 첫 번째 배에 타고 돌아가겠노라 하는 열망 가득한 눈빛이 갑절은 더 거세었다.
여전히 달빛 받은 태평양은 잔잔한 파도만 일고 있었건만, 여러 조로 갈려 앉은 명나라 사람들 마음 속에서는 새로운 격랑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물론 기적처럼 다음날 아침부터 조선소 앞바다에 대선단이 이루어지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허나 기껏 주변 마을 사람들을 부려 모아놓은 목재에 이끼가 끼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시절에 비하면, 작업하는 속도가 최소 몇 곱절은 올라갔으므로, 시그리드에게 어려움을 하소연한 바스크 사람들은 시그리드를 우러러볼 따름이었다.
고작해야 작은 배 한 척을 만들 수 있었을 작은 간이 선거船渠는 빠르게 해체되고, 그 자리에 훨씬 거대한, 맨오브워는 물론이요 그보다 더 큰 배도 건조할 수 있을 법한 새 선거가 빠르게 터를 잡아갔다.
“욕심이라. 결국 그게 비결이었구려.”
자신의 수하들이 시그리드보다도 대명 조정을 더 못 믿었기에, 인삼 얘기가 나온 이후 외려 더욱 결연히 태업에 임하겠다 다짐하였음을 잘 아는 정화는 씁쓸하게 말했다.
강남 선공들이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대동한 선공들과 군사들이 각각 어떤 재주를 가지고 있는지, 시그리드의 물음에 상세히 답하면서도, 이런 해법이 나올 줄은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그 덕에 시그리드는 단순히 성과급 비슷한 무언가를 도입하는 것을 넘어, 과학적 경영이라는 것의 선례를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비결이라고 할 수만은 없지요. 단점도 명확하고, 항상 여기에만 의존할 수도 없으니까요.”
신대륙 사람들의 개척에 대한 열망,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이, 유럽의 동포들을 사실상의 농노로 삼는 결과로 이어졌듯, 그리고 그저 난세 속에서 살아남기를 바랐던 유럽 군주들의 발버둥이 유럽의 농노와 빈농들에게 한없는 고통을 불러왔듯, 시그리드가 도입한 어설픈 테일러주의Taylorism 또한 후유증을 남길 것이었다.
당장 지금까지 형제들처럼 낯선 땅에서 버텨왔던 명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눈치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정화도, 시그리드도 잘 알고 있었다.
저들끼리 호형호제하던 의리는 빠르게 사라졌다. 이대로라면 주먹다짐도, ‘대비달자’들 눈에 잘 띄기 위한 암투도 곧 벌어지리라.
그러나 시그리드는 그 어떤 거짓도 말하지 않았으니, 욕심 가득한 사람들의 발버둥 덕에 모두가 마냥 태업하고 있을 때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편이 완공될 것이요, 나머지 사람들도 명나라 조정의 의사와 무관하게 저들의 뜻대로 그 명운을 좌우할 수 있을 것이었다.
“바다가 언젠가 끝나고 새로운 대륙이 펼쳐진다는 것을 아는 입장에서는, 마냥 이 배에만 의존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렇다고 이 배가 최고의 선박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겠지만요.”
시그리드의 눈은 여전히 태평양을 향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어느새 북쪽 좋은희망을 향하고 있었다.
어쨌든 신대륙 사람들의 욕망 덕분에 연합의 인구는 그린란드 회사가 이주민 나르던 시절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늘게 될 것이요, 계약직 하인들 또한 그 삶이 곤궁하고 괴로울지언정 기근과 전란의 위협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좋은 배라... 그렇지... 그렇고 말고...”
그러나 시그리드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도, 앞서 말한 바다와 대륙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별 관심도 없던 정화는 다른 궁리에 빠져 있었다.
왕후 서씨가 불사의 약을 고안했다는 소문은 거짓이었다. 그러나 정화가 직접 두 눈으로 본 서씨의 재간은, 그런 허황된 소문 따위로는 다 담기 어려울 만큼 뛰어났다.
그리고 이곳 바닷가에서 선보인 책략까지.
욕심을 북돋는다. 그것이야말로 정화가 하고픈 일이었다. 그 욕심을 이룰 길이 오직 바다에만 있음을 그의 주군과 주군을 둘러싼 한인 고관대작들에게 널리 알리고 깨우치는 것.
한 번 생각이 그에 미치니, 고개 숙이고 무릎 꿇는 나머지 일들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 화和, 전하의 품은 뜻을 모두 헤아린다고는 말할 수 없겠습니다. 어디까지 보고 있는지 짐작할 요량도, 그리할 처지도 되지 않습니다.”
이 재주라면, 어쩌면 정화가 남은 평생을 안락하게 총애 받는 환관으로 보내는 대신 험한 바다를 쏘다니는 신세를 자처하게끔 만든 그 열망을, 천조 대명의 앞날을 바다에 아로새기는 그 일을 해낼 길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갑자기 저를 공대하는 정화를 놀란 눈으로 돌아보는 시그리드. 그 맑은 두 눈을 응시하던 정화는 고개를 숙였다.
“다만 이 자리에서 무리한 청 하나를 올리고자 하니, 삼가 전하께서 숙고해 주시기를 바라마지않을 따름입니다.
바라건대, 이곳 아카풀코에서 배가 완공되면, 소관과 함께 바다를 건너 주십시오.
대명에 입조入朝하신다면, 이 화는 혼신을 다하여 신대륙 연합이 필요로 하는 모든 부귀를, 말씀하신 그 욕심 너머의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시그리드 리프트라사가 북경행을 제의받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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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전에 정화의 하서양을 소개하면서, 전통적인 중국의 지리 인식에서 말라카 이동의 남중국해와 말라카 이서의 인도양을 별도의 바다로 구분하였음을 함께 언급한 바 있습니다. 또한 명대 중국인들은 동지중해 무역망과 인도양 무역망의 중계지인 호르무즈와 아덴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럽인들과도 교류하게 되었는데, 정화와 그 이후의 명나라 사람들은 이러한 문물이 ‘불랑佛朗’, 즉 프랑크인들의 나라에서 바다를 건너온 것이라고 인식하곤 했습니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되는 흑인 노예병에 대해 명나라 장수 팽신고는 ‘파랑국’에서 ‘세 개의 바다’를 건너온 이들이라 언급하였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졸지에 아카풀코까지 끌려온 명나라 군사들은 동중국해(동양), 인도양(서양), 지중해(더 서양), 대서양(더 더 서양)까지 네 개의 바다를 건너온 셈입니다.
2. 원 역사의 ‘대비달자’는 한참 뒤인 17세기에 동시베리아로 진출한 코사크 개척자들과 조우한 청대 사람들이 ‘코 큰 타타르인’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표현입니다. 타타르/달단은 몽골과 중국, 유럽에서 공히 야만인의 대명사로 썼던 명칭이였지요.
중세 온난기에 북시베리아에서 이주한 이누이트계 민족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현재의 동아시아인들과는 유전적으로 거리가 먼, 고대 북유라시아인들의 후손으로 추정됩니다. 즉 명나라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머리가 노랗건 검건, 신대륙 연합과 메소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모두 털 많고 코 큰 오랑캐인 셈입니다.
3.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선박들은 거대화되었고, 그에 따라 조선에 소요되는 비용과 시간 역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목재의 가용성이나 날씨 등, 여러 변인들이 있기는 했지만, 배수량이 최대 2천 톤에 달했던 거대한 갈레온선들은 건조에 2년 가까운 시일이 소요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에는 전근대 조선업의 체계적이지 못한 작업 방식도 한몫했습니다. 14세기경부터 운영된 베네치아의 ‘신 조병창Arsenale Nuovo’에서는 소형 갤리선 한 척이 하루 안에 완성될 만큼 빠르게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모든 부품을 규격화하고 최대한 많은 공정에 체계적인 분업을 도입한 덕분이라고 합니다. 즉, 뒤집어 생각하면 베네치아의 조병창이 특이하게 여겨질 만큼 당대의 다른 조선소에서는 이러한 체계화가 미진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예컨대 작중 시점 영국의 경우에는 아직 배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인 톤(당시는 tun)조차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상황입니다.)
조선 기술은 차치하고 순수하게 조선업의 체계화 정도로만 따지면, 해금령 이전의 명은 이베리아 반도보다는 상술한 베네치아의 경우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남중국 해안의 조선업은, 료料라는 단위로 배의 크기와 중량, 건조비용이 모두 규격화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중국의 조선소에서는 도료장都料匠이라 불리는, 이러한 규격화 업무만을 담당하는 전문장인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사용하는 전문 매뉴얼(『요례문책料例文策』) 또한 존재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론상 동일한 조선소에서 동일한 목적으로 건조한 같은 료의 배는 그 크기와 적화중량, 건조 비용이 모두 동일했습니다. (물론 전근대 단위답게, 배의 종류가 달라지면 료의 정의 역시 달라지곤 했습니다. 같은 2백료급 함선이라도 연안 순찰선과 원양 무역선 크기 및 건조 비용은 상이했던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