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96화 (96/116)

22. 캘리포니아를 꿈꾸며 California Dreamin' (4)

22. 캘리포니아를 꿈꾸며 California Dreamin' (4)

태조 홍무제가 황명皇明을 세운 지도 어언 오십여 년이 지났다. 대원 대몽골의 통치 하에서 세상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재보가 오가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은 하나둘씩 사라져 갔고, 그 빈자리는 해금령海禁令 내려지기 전의 일을 알지 못하는 젊은 서생들이 메워나갔다.

상아를 보면 그것을 내다 팔 생각은 못하고 오직 주임금의 상아젓가락 고사만을 떠올리는 고루한 백면서생들. 그들은 암만 공신이라지만 한낱 환관일 뿐인 정화가 황상의 총애를 등에 업고서 국고를 바다에 흩뿌리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았다.

‘이른바 하서양이 어찌 우리 황상의 성덕과 교화를 펼치는 정도正道겠습니까?’

‘당요唐堯가 오복五服을 정함에 해외海外는 논하지 않았고, 중원을 떠난 기자도 조선에 닿으매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이처럼 교화란 가까운 곳에 먼저 달한 뒤에 원방遠方을 논함이 순리일진대, 국고를 어찌 헛되이 낭비한다는 말입니까?’

팔고문八股文으로 저들 팔을 고문하며 익힌 현란하고도 잡스러운 문장을 모조리 제쳐놓고, 오로지 그 뜻만 간추린다면 얼추 이러하였다.

‘하서양? 우리가? 대체 왜?’

조정을 가득 채운 유학자들은 차마 황상의 총애를 등에 업은 정화에게 대놓고 비판을 제기하진 못하였으나, 조용하면서도 사람을 압도하는 냉대와 침묵으로써 정화의 하서양을 억눌렀다.

정화라고 어찌 그런 여론 있음을 모르겠는가. 애시당초 그가 황상의 총애로 부귀영화 누리는 것을 포기하고 십수 년을 배 위에서 보낸 까닭도, 직접 칼 들고 임금을 갈아치워가면서 어떻게든 오랑캐 임금들로 하여금 입조케 만들고자 했던 것도, 모두 그러한 여론을 억누르고 대명의 바닷길을 널리 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시그리드가 알 바는 아니었다.

“입조라고요?”

‘제가요? 왜요?’ 까지 포함하는 반문에, 정화는 어째 익숙함을 느꼈다.

그러나 조정의 고루한 유생들과 달리, 시그리드의 반문은 나름 근거가 있는 셈이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임은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들어보십시오.”

정화의 직감은, 시그리드가 지금껏 보여준 총명함이라면, 어리석은 고관대작과 식견 고루한 유생들 모두를 논파하고 그의 필생의 숙원을 이루어줄 수 있을 것이라 말해주고 있었다.

“무릇 원방에서 입조한 이들은 지극히 후대하여 천조의 위엄과 공덕을 보임이 상례常禮였습니다. 고작 뱃길로 오천 리 떨어진 소록蘇祿(술루)의 술탄조차, 한 번 입조하니 본국의 친왕과 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하물며 지금껏 그 너머에 있는 줄도 몰랐던 땅에서 수만 리 대양을 건너 입조하신다면 그 대우가 어떻겠습니까?”

내전이 한창인 술루 술탄국에서 왕을 자처한 군벌 셋 중 하나였던 파두카 파할라Paduka Pahala는 정화를 따라 입조하였다가 겨울 날씨를 못 이기고 산동성에서 독감으로 죽었는데, 실제로 소록국 공정왕蘇祿國恭定王의 시호를 받고 친왕의 예에 따라 장사지낸 바 있었다.

(정화는 눈치껏, 파두카 파할라가 어쩌다가 그 공정왕 시호를 받았는지는 거론하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이미 루미(동로마)의 작위를 받으셨습니다. 제가 알기로 프랑크 땅에서는 여러 임금에게 봉작 받는 것이 드물지 않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봉작 중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대명 천조의 책봉이야말로 받아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허나 정화가 약속할 수 있는 어지간한 부귀영화로는 시그리드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애시당초 시그리드가 그런 부귀를 탐냈다면 지금쯤 코펜하겐의 왕궁에서 여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으리라.

“딱히 관심은 없는데요. 물론 명나라랑 교역하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굳이 제가 갈 필요도 없이 인삼 소문이 나면 알아서 교역에 응하지 않겠어요? 황제 폐하께서 선물로 무엇을 주시든, 교역으로 벌어들일 이익에 비하면 별 것 아닐 테고요.”

빅토리아 여왕이 북경에 입조한 적은 없었건만, 그럼에도 청나라는 아편을 잘만 수입했다. 하물며 아편에 비하는 것이 실례인 귀한 약재 인삼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리오?

그리고 정화에게는 밝히지 않았지만, 벌써 뗏목을 얻어타고 남쪽 땅으로 향하기 시작한 메시카인 상인들이 돌아오면서 안데스 산맥 쪽과 교류가 시작된다면 금과 은 역시 이곳 아카풀코에 쌓이기 시작할 것이었다.

정화가 만일 유학자였다면, ‘어찌 이익부터 말씀하십니까何必曰利’ 소리를 했으련만, 정화의 유학 소양은 사서오경 표지를 몇 번 본 것이 전부였다. 물론 『춘추』와 『좌전』은 물론 『자치통감』까지 모두 훑는다 한들 ‘입조하기 싫은데 에베벱’하는 타국 군주를 달래는 방법은 나와 있지 않을 테니 별 효험은 없었겠지만.

고민하던 정화의 머릿속에 뭔가가 번뜩인 것은 그때였다.

“이익이라... 그렇다면 이건 어떻겠습니까?”

정화는 진솔하게 몇 가지 내막을 털어놓았다.

홍무 연간 내려진 해금령으로, 조공을 목적으로 찾아오지 않은 오랑캐 배들은 항구에서 교역을 할 수 없으며 민간의 사인私人들 또한 오랑캐와 함부로 무역할 수 없다는 것.

그나마 정화가 하서양하면서 다시금 무역이 살짝 살아난 덕에 홍무 연간에 폐지된 시박사市舶司가 다시 항구 곳곳에 세워지는 일이 있었지만, 이것도 정화가 항해를 멈추고 천자의 마음이 바다에서 떠나게 되면 금방 원래대로 돌아갈 일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뻔히 잠상潛商들이 존재하였으므로, 중국 근해의 어느 섬에 거점을 마련하고 밀무역만 해도 충분히 이익을 얻을 수 있기는 할 것이다. 허나 대놓고 항구를 제 것으로 빌려서 쓰는 것보다는 못하리라.

“그러니 입조하신 다음, 황상께 청하여 우리 대국 해안의 항구를 상관商館으로 빌리는 것입니다.

신대륙 연합의 상선을 해금령의 예외로 삼아달라 주청奏請하신다면, 밝으신 황상께서는 이를 받아들이실 것이요, 전하께서는 한 번 입조하시어 영세토록 그 은덕을 입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정화의 하서양에 반신반의하며 조금씩 상인 겸 사절들을 보내고 있을 뿐인 해양 제국諸國들도, 신대륙의 예를 보고 고무되어 더욱 열심히 교역에 나설 것이다.

어느새 정화의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그림.

그러나 시그리드의 딴지에, 벌써부터 번영하는 광주와 항주, 남경 항구의 모습을 그리고 있던 정화는 금방 찬물 맞은 기분이 되었다.

“그런데 황제 폐하의 뜻대로 그런 혜택을 입는다면, 그 은혜가 거두어지는 대로 혜택도 사라지지 않을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중국의 귀족들이 무역을 싫어한다면, 몇 년 안 되어서 그렇게 될 것 같은데요.”

‘너희 황제를 어찌 믿겠느냐’라는 질문. 명나라 사람이 아니기에 던질 수 있는 물음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명나라 사람도 평생 딱 한 번은 던질 수 있는 질문이었다. 대역죄인으로 몰릴 각오만 한다면.)

“그렇다면 제게 마땅한 벌을 주시기 위해 바다를 건너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지난날 그 재판에서, 지몬과 요한뿐 아니라 저 역시 잘못을 범했다고 판결하지 않았습니까? 입조하여 황상을 뵙고, 저의 죄상을 낱낱이 밝혀 고해주십시오.”

대명의 앞날을 위해 바닷길을 다시 열 수만 있다면 목숨쯤은 아깝지 않다 여기는 정화였다.

“솔직히 말하면, 한 번쯤 이 대양 너머에 어떤 땅이 있는지 두 눈으로 보고 싶기는 하답니다.”

시그리드의 핏줄 속에 흐르는 붉은머리 에이릭의 혈통 때문일까? 아니면 그 옛날 빈란드부터 페르시아까지 알려진 세계는 모조리 들쑤시고 다녔던 바이킹들의 전통 때문일까?

맨 처음, 변함없이 잔잔한 푸른 바다를 보았을 때부터 품게 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듣고 잠깐이나마 올라갔던 정화의 입꼬리는 금방 도로 쳐졌다.

“하지만 호국경으로서의 책무가 있잖아요. 바다를 정말로 무사히, 그리고 신속하게 횡단할 수 있는지 검증하는 게 먼저라고 봐요.

더구나 바스크 사람들의 항해 기록을 바탕으로 계산해 보면,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것은 대서양과는 비할 바 없이 험난하고도 기나긴 여정이 될 거에요.

편도로만 최소 서너 달이 걸릴 법한 거리인데, 호국경의 책무를 일이 년 동안 내려놓고 사절로 외국에 나갈 만큼 확실한 국익이, 그것도 단기적인 게 아니라 오래도록 지속될 만한 것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저로서는 쉽게 그 입조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무역풍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작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갔다 온 바스크 사람들은, 시그리드가 고안한 풍속계를 지참하고 있었다. 모래시계로 시간을 재면서, 정해진 시간 동안 얼마나 풍속계가 많이 회전하는지를 확인하고, 범선의 속력을 확인하는 방식이었다³.

욘에게 배운 지구의 반경과 검은 책의 세계지도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태평양 횡단 항로는 대략 9천 마일(약 14,500km)쯤 되는 머나먼 바닷길.

핏줄 속에서 고동치는 바이킹의 방랑벽을 억제하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하지만 정화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잠깐 숙고한 정화는, 마침내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건곤일척의 수를 던졌다.

“잘 알겠습니다. 하면 저와 한 가지 내기를 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내기라고요?”

“불과 오 년 전, 전하께서는 이곳 땅과 교역을 트기 위해, 신대륙 연합을 떠난 후 두 달간 친히 항해하여 투슈판에 닿았다고 들었습니다. 저 대양을 그만큼 빠르고 안전하게 건널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개척하시려 하는 항로. 그 끝에는 우리 대명의 번국인 소록국이 있습니다. 지금은 앞서 말씀드린 소록국왕 공정왕의 아들이 다스리고 있지요.

전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이곳 선소에서 배가 완공되는 즉시 제가 직접 배를 몰고 소록국을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다섯 달, 일백오십일 안에 다녀오도록 하지요.”

마치 사수관에 선 관운장이 술잔의 데운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베고 돌아오겠다 맹세한 것처럼, 할릴이자 정화인 사내는 저의 신과 주군의 이름을 내걸었다.

“그 기한을 맞추든, 그러지 못하든, 전능하신 신과 황상께서 하사하신 정씨 성에 맹세컨대 저는 전하께서 말씀하신 그 ‘장구한 이익’이 황상의 은덕으로써 내려질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만약 그 기한을 맞춘다면, 제가 사절단을 이끌고 입조하길 바라시겠군요.”

“그렇습니다. 또한 제 항해일지를 비롯해, 앞으로도 저 대양을 빠르게 오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넘겨드리도록 하지요. 이만하면 어떻겠습니까?”

시그리드의 눈은 한참 동안 바다와 정화 사이를 오갔다.

시그리드 입장에서는 굳이 정화의 내기에 응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태평양을 가로지를 배도, 그 배를 건조할 조선소도 모두 빠른 귀향이라는 성과급에 눈 돌아간 명나라 사람들 손으로 준공될 것이었다.

“더구나 입조라니, 우리 신대륙 연합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타국 군주에게 고두叩頭, Kowtow하는 건 가당치 않은 일이라고 봐요.”

욘이 한두 번쯤 ‘고두’라는 말을 쓰는 것을 듣고 유래를 물었던 덕에 매카트니 사절단이 겪은 우여곡절까지 들어 알게 된 시그리드가 말했다⁴.

물론 그 고두라는 말의 뜻을 아는 것은, 가을철 의회가 열리기 전 제트선을 타고서 돌아온 시그리드 혼자뿐이었다.

지금껏 시그리드네 집에서 함께, 이번 회기부터 시작될 헌법 논의를 대하는 백송고리당의 당론을 논하고 있던 플레톤은, 얘기가 어째 계속 정화의 태평양 횡단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며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원래 황제 앞에서는 올바른 의례를 취해야 하는 법이지. 하물며 그 카타이라는 나라가 그토록 강대하다면, 그 군주 또한 존중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플레톤은 그리 딴지를 걸면서, 두터운 종이뭉치를 털썩 내려놓았다. 그간 정착지 곳곳에 회람시켰던 두 종류의 헌법 초안이었다.

아직은 후스가 모은 신학자 두셋으로 이루어진 신학부와, 초빙교수 형식으로 대학에 모인 영불 양국 학자들로 이루어진 인문학부가 전부였지만, 의외로 대학 문턱 밟아보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던지라 교수들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교수들보다도 상위 포식자에 해당하는 내무장관 플레톤이 떡하니 있었으니, 잉글랜드 학자들을 헬라스어 강의라는 미끼로 끌어들여 이번 회기부터 의회에서 논의될 헌법 초안을 절차탁마 다듬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째 털썩 내려놓는 종이뭉치 사이에서 ‘살려달라’ 하는 비명이 슬쩍 들린 듯했다.)

“그래서, 타이간 그 작자가 성공할 거라 예상하고 있는가?”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어차피 누군가가 한 번 항로를 개척해야 한다면, 우리 신대륙 연합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위험을 감수하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을 뿐이랍니다.”

“에이, 그런 것치곤 마음이 벌써 떠나 있는 것 같은데. 자네 조상의 뒤를 따르고픈 게지.”

언제고 여력이 되면 『시그리드 리프트라사 평전』이라도 한 번 써볼까 – 출간만 되면 유럽에서 불티나게 팔릴 것이었다 – 생각하던 플레톤은, 스노리 노인에게서 시그리드의 혈통에 대해 들은 바 있었다. 저주와 축복이 공존한다는 이야기는 헛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그 탐험가 기질은 면면이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만약, 그러니까 만-약 정화 그 사람이 성공한다면, 그때는 약속을 지켜야 하겠지요. 그뿐이랍니다.”

시그리드의 얄팍한 변명에 플레톤은 피식 웃었다.

조선소가 빠르게 완성되어 가고, 그 공사가 끝나기도 전 바다를 가로지를 배의 건조가 시작되는 것까지 본 시그리드는, 체계가 얼추 잡혔다 판단하고는 북쪽으로 귀환했다.

시그리드가 아카풀코에서 무슨 내기를 받아들였는지 들은 후스와 지슈카는 이를 영 달갑잖게 여기고 있었다.

“호국경이자 당수이신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는데, 고작 내무장관인 내가 어찌 감히 토를 달겠나. 그저 다음 선거가 걱정될 뿐이지.

하기야, 애초에 이렇게 마음대로 날뛸 작정으로 선거라는 것을 입안한 것이었지. ‘아니꼬우면 선거로 다른 사람 뽑으십시오! 임기 끝나기 전까지는 내 맘대로 할 테니!’ 이렇게 말일세.”

시그리드가 맨 처음 선거를 제안한 것을 장난삼아 비꼬는 플레톤이었다. 따지고 보면 침소봉대는 했을지언정 아예 뻔뻔한 거짓말도 아니었으니, 시그리드는 그저 입을 꾹 닫았다.

“아니, 우리 모두한테 정말로 도움이 될 거라니까요? 제 계획대로라면...”

“아하! 그럼 그렇지, 역시 타이간이 성공하리라 내심 예상하고서 뭔가 대비를 하고 있었구만!”

“연합의 수장으로서 모든 경우에 대비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 대비를 어떻게 하든,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걸세. 안 그랬다가는 가재당 사람들한테 무책임하다는 둥, 직무유기라는 둥 싫은소리 듣기 딱 좋으니까. 하여튼 누가 그런 말들을 가르쳐줬는지, 참.”

신문 출판과 학자들의 선거유세를 겪으면서 발생한 한 가지 예상치 못한 현상은, 바로 어휘가 다소 조악했던 공용어에 갑자기 고급 어휘들이 추가되었다는 점이었다.

아마 지금의 공용어는, 어지간한 유럽의 속어 – 즉, 라틴어가 아닌 모든 언어 – 들보다는 훨씬 표현력 좋고 고상한 언어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자네야 훌쩍 떠나면 그만이지만, 나는 저 보헤미아 촌놈들이 지금보다 더 의석을 차지해서 만사를 제멋대로 하는 꼴은 보기 싫단 말일세.

그러니까 좀 알려주게나. 응? 노인네 말년 적적한데 궁금증이라도 제때 풀고 살아야지.”

“지슈카 아저씨랑 동갑이시면서 무슨 노인네예요.”

“그 지슈카도 벌써 반백을 넘어 자네 같은 흰머리가 되어가고 있잖나. 그만하면 노인 맞지. 더구나 나는 수염도 이렇게 허옇다고.”

제 덥수룩한 흰수염⁵까지 들어보이며 늘어놓는 너스레에, 결국 시그리드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알겠어요. 사실 짜놓은 계획이 있기는 하답니다.”

“내게만 알려줄 수 있겠나? 나는 자네나 그 이방인 욘과는 달리 입이 무겁다네.”

사실 플레톤도 딱히 입이 무거운 축에는 들지 않았다. 그 장광설이 워낙 일반인 듣기에는 버겁다 보니 사람들이 귀를 잘 기울이지 않을 뿐.

하지만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리프가 흰 새라면 시그리드는 촉새였으므로, 결국 플레톤의 말에 넘어가 저의 무시무시한 계획을 발설하기에 이르렀다.

“뭐, 어차피 이번 가을에 와바나키 사람들 찾아오면 제안할 생각이긴 했으니까요,..”

어떻게 하면 시그리드 자신과 신대륙 연합의 자존심을 저버리지 않고, 또 연합의 기둥이자 으뜸가는 해결사인 자신이 최소 한두 해 자리를 비우는 것 이상의 국익을 얻어낼 수 있으며, 나아가 그런 국익을 장기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중국 황제의 궁궐에 들어가면서, 그쪽 예법은 가볍게 무시하고, 아예 그쪽에서 단단히 호구를 잡아 거하게 하사품을 뜯어낼 작정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걸 그렇게 표현하시니까 굉장히 악독하게 들리긴 하는데요.”

“이미 유럽에선 마녀 소리 듣는 자네 아닌가. 어차피 더 떨어질 평판도 없으니 걱정 말게.”

정화가 말하기를, 천조 대명은 스스로 천하의 중심을 자처하는 만큼, 멀리서 오는 사절들에게 후왕박래厚往薄來의 예로 대한다 하였다.

즉 암만 물산이 보잘것없는 오랑캐라 할지라도, 한 번 조공하는 예를 갖추면 그 공물의 몇 곱절은 되는 양의 하사품을 내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일개 상인이 사절을 자처할 때조차, 그것이 사칭임을 알면서도 조공을 내려줄 때가 있다 하니, 얼마나 대명이 천조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지, 그리고 얼마나 풍요로운 땅인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결국 명나라의 재정에도 한계가 있지요. 정화 그 사람의 항해만 하더라도, 이미 수십만 대군을 내어서 몽골과 싸우고 있는 통이라 국가재정에 꽤 부담이 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래서, 그 부담을 더욱 늘려볼 생각이에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나타난 사절에게는 결코 박하게 대할 수 없는 법이다.

허나 시그리드가 홀로 북경에 입조한다면, 호국경의 지위도, 신대륙 연합이라는 이름도 자금성의 위용 앞에서는 한없이 가볍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대륙 연합 하나가 아니라, 우리 연합과 친한 다른 나라들까지 우르르 한 번에 몰려간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요.”

한 나라의 사절도 아니고, 수십 개 나라에서 동시에 사절들이 찾아온다면, 그만큼 하사하는 품목도 늘어날 것이요, 재정의 부담도 더더욱 무거워질 터.

“그렇게 우리 쪽이 감수해야 할 위험부담도 줄이고, 우리 쪽 자존심도 지키고, 제가 신대륙 연합을 비우는 것 그 이상으로 톡톡히 보상을 받아오는 거지요.”

폭풍처럼 자금성 금고를 휩쓸고 사절들이 돌아가면, 그것이 아까워서라도 다들 이런 생각을 품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저 바다 건너온 오랑캐들과 교역을 해서라도 손해를 메꿔야 한다!’

정복하자니 너무 멀고, 아예 없던 일로 취급하자니 사절 접대에 흩뿌린 재물이 너무나 아까울 것이다.

“그런데 우리와 친한 다른 나라라니?”

시그리드에게 홀랑 넘어갔다는 덴마크 국왕 얘기를 꺼내려던 플레톤은, 그 에릭이라는 놈을 시그리드가 어떻게 여기는지를 떠올리곤 입을 금방 닫았다.

“사실 나라라는 게, 그렇게까지 엄밀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베네치아도 가장 존엄한 나라고, 제노바도 가장 고귀한 나라고, 신성로마제국을 이루는 어지간한 영지들도 왕국이나 공국, 백국이나 주교령을 칭하고... 하다못해 기사단국도 아직 폴란드 봉신국으로 남아 있잔항요.”

“그래서?”

“신대륙 연합은 신대륙 연합이지만... 새벽땅사람들(와바나키) 연맹만 해도 우리 가을 의회에 참여하지 않는 부족들도 여럿 끼어 있지요. 그리고 긴집사람들 다섯 부족들도 있고, 어차피 오다와 상인들이 올해도 구경을 올 테니까 세불기불꽃 사람들도 끼워주지요.

그리고 남쪽으로 가면, 어지간한 도시들은 도시국가altepetl로 자처하곤 한답니다. 와스테카 도시들이랑, 테노치티틀란이랑, 테츠코코랑, 메시카 상인들이 오가는 데 있는 어지간한 도시들이랑, 죄다 상인 겸 사절들을 보내라고 하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지라 거절하지 않을 거에요.”

장담컨대, 지금까지 정화가 대항해를 하면서 입조케 한 나라들을 모두 합쳐도 시그리드와 함께 바다를 건너갈 ‘나라들’ 수보다는 적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결국 제가 가야 하겠지요. 신대륙 연합의 수장이 사절단을 이끈다고 하면, 그만큼 우리와 연이 없던 곳에서도 선뜻 우리를 믿고 사절을 보낼 테니까요.”

“그렇게 해서 카타이 재정을 거덜내겠다... 거 봐, 악독한 계획 맞네그려.”

플레톤이 낄낄대며 시그리드를 놀렸다.

그해 겨울, 정말로 정화가 아카풀코에 148일만에 돌아와 시그리드에게 내기의 조건을 이행하라는 연통을 보내오리라고는 시그리드 외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⁶.

--- *** ---

1. 명은 철저한 전제군주정을 지향하였고, 영락제의 『성리대전』(1415) 편찬에서도 볼 수 있듯 학문 역시 그러한 전제정치의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지식인들은 관료 후보군이었지만 동시에 철저한 통제와 탄압의 대상이었고, 팔고문과 같은 경직된 과거시험 양식 역시 이러한 통제의 수단이었습니다.

그 결과 명대 초기의 유학은 주자학을 교조적으로 따르는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이를 벗어나 실용적인 경세학이나 독창적인 성리학 견해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나마 싹트던 새로운 학풍은 영락제의 정변에 휘말려 모조리 싹이 뽑혀버렸지요. 명대 성리학이 다시금 발전하게 되는 것은, 국가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면서 양명학 같은 새로운 조류가 나타나 성리학에 도전을 제기한 15세기 후기부터였습니다.

정화의 대항해가 고작 이야기책 몇 권만을 남기고 허망하게 끝난 까닭은 이러한 학풍과도 관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 어떤 유학 경전에도 나오지 않는 오랑캐 나라의 사정은, 흥미거리 이야기책 외에는 있을 자리가 없던 것이지요.

2. 오늘날의 필리핀 서남부 제도에 해당하는 술루 술탄국은 정화의 대항해 시점에서 셋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로 동왕東王이라 불리던 파두카 파할라는 대규모 사절단을 거느리고서 정화를 따라 북경에 입조했고, 영락제을 접견하고 만리장성 관광을 하는 등 후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귀국하던 도중 음력 9월의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독감이라는 북방의 풍토병에 걸려 사망하고야 말지요. 파두카 파할라의 중국식 묘는 아직도 산동성 덕주(더저우)에 남아 있습니다.

3. 원 역사에서 풍속계를 처음으로 고안한 것은 1450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레온 알베르티에 의해서였다고 전해집니다. 알베르티의 풍속계는 오늘날 사용되는 것과 거의 유사한 형태(회전하는 반구 여럿을 달아놓고 회전 횟수를 계산하는 방식)를 갖추고 있었고, 후대에 알베르티의 발명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풍속계를 고안한 로버트 후크 역시 거의 같은 형태를 따랐습니다.

4.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인 고두례는, 보통 다른 예법과 조합되어 황제를 배알하는 의례의 필수요소로 쓰였습니다. 명대의 오배삼고두례, 청대의 삼궤구고두례 등이 여기에 해당하지요.

그런데 이 고두례에서 유래한 영단어 kowtow는 ‘굴종적인 태도를 보이다’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이는 1792년 영국에서 최초로 청에 파견한 사절단인 맥카트니 사절단을 둘러싼 예법 논쟁에서 기원하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유럽 본토의 정세 불안과 미국 독립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시장을 찾고 있었고, 이에 따라 조지 매카트니 경이 이끄는 사절단을 청에 파견합니다.

그러나 건륭제를 알현한 매카트니는 삼궤구고두례가 곧 중국과 영국의 상하관계를 인정하는 의미임을 인식하고 이 예에 응하는 것을 한사코 거절했고, 애초에 영국과의 교역에 별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오랑캐 사절과의 예법 논쟁 자체가 체면에 어긋난다 여겼던 건륭제의 의지에 따라 매카트니는 한쪽 무릎만 꿇고 허리만 살짝 굽히는 것으로 타협을 보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지만 삼궤구고두례를 청이 강요할 뻔했다는 사실 자체는 영국 본국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켰고, ‘kowtow’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5. 후대의 상상화가 전부인 얀 후스나 얀 지슈카와 달리, 플레톤은 의외로 그 생김새가 지금까지 잘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피렌체에 머물던 시절 잠깐 면식이 있었던 화가 베노초 고촐리(c.1421~1497)가 남긴 프레스코화에 플레톤으로 추정되는 얼굴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지요. 이 프레스코화에 등장하는 플레톤의 초상은, 거의 100세 가깝게 장수한 사람답게 흰수염은 덥수룩하지만 딱히 잔주름은 없는 정정한 모습입니다.

6. 전작 『임꺽정은 살아있다』에서도 몇 번 소개했던 것처럼, 전근대 중국의 항해술과 조선술은 근세 유럽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습니다. 1847~48년 사이 800톤급 정크선(복선福船) 기영耆英 함이 광주에서 출항해 114일만에 희망봉을 돌고, 보스턴-런던 항로는 21일만에 주파했던 것이 그 한 가지 사례가 되겠습니다.

참고로, 원 역사에서 고작 사나흘이면 중국에 닿을 수 있으리라 예상한 채로 마젤란 해협을 통과한 마젤란의 탐험대가 필리핀에 이르기까지는 약 110일이 소요되었습니다. 무역풍을 타기에 훨씬 유리한 입지에 있는 아카풀코에서 출발했다는 점, 그리고 술루 술탄국이라는 현지 협력자가 있어 안정적으로 물자를 보충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작중의 정화가 자신이 제안한 내기에서 승리한 것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고 자평해볼 수 있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