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102화 (102/116)

그려보자꾸나 (5)

23. 그려보자꾸나 Imagine (5)

황제가 어심을 드러냈으므로, 현실은 그에 맞추어 바뀌었다.

이른바 태평양 제이太平洋諸夷, 줄여서 양이洋夷라고도 불리는 오십일 개국 사절단은, 그 크고 작음에 따라 차등을 두어 입조하는 예를 갖추고, 그중 으뜸은 이 오십일개 나라의 패자이자 금번 사행을 주도한 합중국合衆國 여왕 서씨였다.

이들이 우연히 중화의 아름다움을 멀찍이서 접하고 지금껏 누구도 건너온 적 없던 대동양을 건너왔으니, 황상께서 이를 지극히 갸륵하게 여기신바, 그 큰 배를 이끌고 바로 천진으로 오라 명하시었다.

이는 바로 회사품을 그 큰 배에 가득 내려주기 위함이었으니, 해외海外 오랑캐를 가엽게 여기는 황은이 이와 같았다.

서씨와 그 이하 오십개 양이 사신들이 마침내 북경에 닿은즉, 황상께서 크게 기꺼워하시며 친히 이들을 맞이하시었다. 또한 서씨와 함께 바다를 건너온 자는 일개 뱃사람에 이르기까지 크게 포장褒獎하시었다.

또한 서씨가 간곡히 아뢰기를, 그들 나라가 바다 너머 궁벽한 땅에 있어 오직 교역으로써 굶주리기를 면한다 하니, 황상께서 은덕을 내리사 시박사로 하여금 양이의 배는 다른 바다 오랑캐들의 배와 달리 일체의 간섭을 받지 않고 오갈 수 있도록 명하시었다.

그 외에도 중화를 흠모하여 찾아온 양이들을 위하여 숱한 황은을 베푸시니, 온 중원 사람들이 일의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칭송하였다.

이것이 오랑캐 사신들이 바다를 건너 항주에 닿은 이래 벌어진 일들에 관한 유일한 진실이었다.

갸륵한 오랑캐를 무고하여 헛된 명성과 총애를 얻고자 했던 간악한 환관 황엄과, 그와 공모한 수백여 인이 참형을 당하는 일이 있었고, 그 밖에도 이런저런 곁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허나 고작해야 가담항설이요, 망령된 헛소문이니, 그 무엇도 사서史書에 적히지 못하고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연히 사라지리라.

그래야만 할 것이다.

허나 예삿일처럼 황엄과 그 일당이 주륙당하고, 동창이 그 살벌함을 드러내며 북경의 대소신료들을 두렵게 하는 동안에도, 한 번 서왕모의 이야기를 들은 서생들은 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쉰하나 나라 중에서도 유독 야만에 가깝다는 삼염三炎(세줄기불꽃)과 장가長家(긴집사람들) 사신들은 비단이라는, 저들의 소박한 세상에서는 상상도 못하였을 직물을 두 손으로 만져보며 탄성을 멈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가운데사람들中國 대추장이 내리는 선물임을 듣고서, 황상의 은덕에 감탄하지는 않았다. 저들이 가져온 인삼이 참으로 귀한 물건이라 여길 뿐.

또한 아나왁과 그 주변에서 온 사절들은 자금성의 곳곳이 모두 옥으로 치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하였다. 오지 않을 미래에 콩키스타도르들이 궁전과 신전을 그득 채운 황금을 보고 경악한 것과 같은 심정.

허나 이들 역시, 시그리드의 말이 옳았노라 외칠지언정 황제의 권위에 찬탄하지는 않았다.

시그리드의 계획대로 태평하게 바다 건너 세상을 구경하며, 아무 걱정 없이 크나큰 재보를 얻게 되었으니, 고마워한다면 시그리드에게 고마워해야지 영락제에게 고마워할 일은 아니었다.

저들도 모르는 사이 ‘황제의 힘이 내게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帝力于我何有哉’ 하는 격양가擊壤歌¹ 노래를 부른 셈이 되었으니, 서방요순을 따르는 고결한 오랑캐답달까.

그러나 무엇보다 서생들의 머릿속에 남은 일화는 따로 있었다.

“장성長城의 흰매 이야기를 들으셨는지요?”

형부상서 오중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무 일 없던 하루’동안 함께 고초를 겪으며 조금은 친해진 다른 두 상서에게 넌지시 물었다.

동창에 끌려가 고초를 치를 뻔하였다가 천만다행으로 막 풀려나온 세 명의 상서가 들어 알 정도라면, 이미 북경의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었다.

“점잖지 못한 이야깃거리인즉, 어찌 그런 자질구레한 세설世說을 황은 입은 몸으로 거론하겠소?”

애시당초 그 얘깃거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점잖은지 아닌지도 판별할 수 없는 법. 호부상서 하원길이 ‘점잖지 못한 이야깃거리’라 일축한 것은, 즉 서왕모의 영험한 날짐승 이야기를 이미 들어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언제 어디에 동창의 이목이 있을지 모르기에 에둘러 말하였을 뿐

금상의 대에 이르러 크게 공사를 벌여, 마침내 금성철벽金城鐵壁과 같이 다듬은 만리장성. 정화를 따라 입조했던 다른 오랑캐 사절들과 마찬가지로, 서왕모와 양이들 역시 팔달령八達嶺으로 향하여 장성을 구경하였다².

일행을 이끄는 내관이 자랑스럽게 이 장벽은 그 어떤 생령도 살아서는 넘을 수 없다고 떠드는데, 서왕모가 아끼는 하얀 매가 갑자기 훌쩍 날아오르더니, 북쪽으로 날아갔다가 한참 후에 제 주인 어깨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뜻에 따라 지은 장벽을 일개 금수가 농락한 격이었다.

“실로 그렇습니다.”

“저자의 우스갯소리 따위를 진지하게 논해서야 되겠습니까.”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였다.

“그렇지만 태평양 너머의 일 모두가 그런 우스갯소리는 아니겠지요.”

동쪽 큰바다의 이름을 서왕모가 ‘태평양’이라 지었다 하였으므로, 황상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장차 그 이름을 대명 조정에서 쓸 것을 명하셨다.

대명의 황운皇運이 지극하고 정사의 올바름을 크게 떨쳤으니, 그 덕을 흠모한 오랑캐들이 지금껏 사람이 건넌 적 없다는 바다를 건너와 입조하였다. 참으로 태평太平 두 글자가 어울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허나 무엇이 우스갯소리요 무엇이 가히 기록할 만한 일인지를 어떻게 분별하겠습니까?”

오중의 말을 끝으로, 다시 한 번 침묵이 내리고, 찻잔 들었다 놓는 소리가 홀로 정적 가운데 퍼졌다.

황엄의 그 음모에 그들이 동참한 까닭이 무엇이었던가.

대명의 위세를 떨치겠다는 명분으로, 백성의 고혈로써 마련한 나라의 재정을 바다에 흩뿌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찾아온 오랑캐를 위하여 가까운 땅의 백성을 괴롭게 하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에 찾아온 오랑캐는 예사로운 만이蠻夷의 무리가 아니요, 머나먼 땅에서 스스로 깨우쳐 올바른 정사를 이루고자 애쓰는, 실로 갸륵하면서도 아름다운 이들이라는 것을.

흥분은 식은 지 오래요, 싸늘한 식은땀이 몸을 적시게 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서왕모가 떠벌렸던 서쪽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니天圓地方 소위 합중국은 불랑국의 서쪽에 있을 뿐 중원에 동쪽에 있을 수는 없으리라 – 머나먼 땅의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요순에 비길 만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저 성현의 학문을 익힌 이들이 이곳 대명의 현실에 느꼈던 갑갑함을 물감 삼아, 이역만리에 그들이 바라는 무릉도원을 그려냈을 뿐.

그리고 한때의 단꿈은 서슬 퍼런 동집사창의 손에 금방 흩어져 사라지고야 말았다. 바닷길을 활짝 여는 것과, 완전히 닫고 중원 홀로 서는 것 중 무엇이 올바른지, 더 이치에 맞고 보다 백성을 위하는 것인지 논의할 기회조차 빼앗겼다.

황엄과 그 일당 수백을 참하고, 서씨가 입조한 전후 사정을 새롭게 황상의 뜻대로 규명한 것은, 서씨뿐 아니라 그들 신료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

‘너희가 감히 짐이 알지 못한다 여겨 사사로이 파당을 만들고 공모한 것은 묵과하도록 하겠다. 너희는 귀가 열려 있었다 한들 닫혔다 여길 것이요, 눈이 뜨여 있었다 한들 감겼다고 말해야 하리라.’

서씨가 무엇을 말했는지, 그리고 그들 세 상서와 아랫사람들이 어떻게 서씨에게서 요순을 보았는지, 황상께서 모르실 리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꿈에서 깨어야 했다. 다시는 그 꿈을 거론할 엄두도 내지 못하리라.

그것이 안타까워, 결코 동창의 눈에 곱게 보이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세 상서는 이렇게 모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겪었던 것을 말로라도 에둘러 꺼내지 못한다면, 사무치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모인 다음에도 딱히 뾰족한 수가 없어, 그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하고 이렇게 에둘러 한탄하기만 할 뿐.

“비록 함부로 말할 수 없다 하나, 누군가는 기억하고 후대의 교훈으로 남겨야 할 텐데요.”

그러나 말할 수도, 글로 남길 수도 없는데, 어떻게 후일을 기약한다는 말인가?

이대로 한 세대가 지나면 서왕모와 오랑캐 사신들의 입조는 장터 이야기꾼의 각본으로 전락할 것이요, 서생들이 서왕모에게서 보았던, 잠깐 그들 눈앞에 번뜩였던 무언가는 그대로 묻혀 사라지고야 말 터인데.

“아쉽습니다. 조금만 더 이 일을 논의할 수 있었더라면, 가히 경세經世의 이치까지 닿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건만.”

“그 경세의 이치는 대명에 오직 하나만 있을 수 있음을 알지 않소. 다른 이치를 논함은 신자臣子된 도리가 아니외다. 가당치 않은 일에 미련을 버리고, 다시금 본래 걷던 길만을 똑바로 바라보는 수밖에.”

하원길이 다른 두 상서를 단념케 하였다.

하나뿐인 도리. 중원은 중원으로서 홀로 서며, 화이華夷의 구분은 엄정하여 하나의 집안을 칭하면서도 상종치 않는다.

천자 한 사람을 모실 뿐이요, 황상 한 분의 허락에 따라 사대부는 경전의 말씀을 겨우 펼칠 기회를 얻는다.

이것 외에 더 나은 길이 없음을 황상은 깨달았고, 그 길 외에 다른 것을 감히 말할 수 없음을 신료들은 다시금 상기하였다.

“대명에 경세의 이치가 하나만 있을 수 있다면, 바깥에서 펼쳐보이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 상서는 모두 질겁하였다.

곧 목소리 주인이 모습 드러내니, 바로 이번 일을 계기로 공신과 같은 환관 모두를 쳐내기로 작정한 황제에 의해, 태감 직위를 ‘사직’하고서 붕 뜬 몸이 된 정화였다.

“저는 미천한 몸으로 황은을 입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황상을 위한 충심만큼이나, 대명의 앞날이 정녕 바다에 있다는 믿음 또한 여전히 굳건하지요.”

바로 그것 때문에 하원길을 비롯한 문관들의 미움을 사고, 다른 환관들의 질투를 얻지 않았던가.

그러나 반평생을 바쳤던 자신의 하서양을 황제가 어찌하여 윤허했는지 두 귀로 뻔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화의 마음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설령 황상께서 이대로 붕어하시고, 지금까지 하서양을 통해 바다 바깥 오랑캐들을 입조케 했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한들, 정화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다음 번 항해를 준비할 것이었다.

다만, 어심의 편린을 시그리드 덕에 알게 되었으니, 그에 맞추어 앞길을 새로 찾을 뿐.

“무엇을 바라십니까?”

“말씀을 낮추시지요. 이제는 태감도 아니요, 일개 환관일 뿐입니다.”

세 상서는 거의 동시에, 모든 환관이 정화와 같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잠시 품었다가 내려놓았다.

“소관이 지금껏 황상의 은총 덕택에 바다를 오가면서 맺은 인연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지금 이곳 경사에 체류하고 있는 태평양 너머의 오랑캐뿐 아니라, 소록(술루), 만랄가(말라카), 천방국(메카), 불랑국(프랑크) 등등, 실로 허다하지요.

왕후 서씨는 일찍이, 그 태어난 땅이 궁벽하고 겨울이 혹독하여 모두가 굶주림을 면치 못할 것을 깨닫고, 다른 땅으로 나아가고자 회사라는 것을 차렸다 하였습니다. 저 역시 그 예를 따르고자 합니다.”

아직 허울이나마 남아 있는 황제의 총애, 절강과 복건의 선인船人들 사이에 남은 연줄. 앞으로 몇 년간 시그리드를 따라다니며 조금 더 재주를 익힌다면, 반드시 자신도 그 ‘그린란드 회사’ 같은 무언가를 남쪽 바다 위에 띄울 수 있으리라 정화는 믿었다.

“그것을 우리에게 말하는 까닭이 무엇입니... 무엇이오?”

“세 분 상서 대인께서 지금쯤 이러한 모임을 가지고 계실 줄 알고 이와 같이 찾아뵈었지요. 세 분께서는 한 번 염두에 두게 된 것을 도저히 마음 바깥으로 내쫓지 못해 번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찻잔이 그 증좌였다.

“소관이 이루고자 하는 바는, 뛰어난 뱃사람과 슬기로운 장사꾼들로만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곳곳에 마련할 상관을 운영하고, 우리와는 풍속이 다른 오랑캐들과 교섭하며, 마치 하나의 작은 나라에서 벼슬살이하듯 매사를 꼼꼼히 챙길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지요.”

그런 인재라면, 결국 선비들밖에 없었다.

그제야 세 상서도 정화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의 중원에서는 할 수도, 떠올릴 수도 없는 생각. 이 땅에 세워진 것 바깥의 다른 무언가를 꿈꾸고, 소소하게나마 주변에서 실천해보는 것.

정화가 제안하는 그 ‘회사’를 통해서라면, 어쩌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머나먼 서쪽에서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 요순을 본받고자 한 여인도 있었는데, 직방職方(중국과 그 주변) 바깥에서 불가능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세 사람 사이에 의미심장한 눈빛이 오갔다.

그렇게 전직 태감 하나와 상서 셋은 훗날을 기약하며, 말할 수 없는 것을 속으로 삼키고 밝힐 수 없는 뜻을 어둠 속에 감추었다.

조금 더 세속적으로 말한다면, 전직 공무원 하나가 자신이 익힌 직무상 기밀을 가지고서 창업을 하고자 하니 제게 인력을 보내달라 청탁한 것이었지만.

한편, 그사이 시그리드는 영락제와의 대면이 일으킨 마음속 어지러움을 잠시 가라앉히고서, 스베인과 하산 - 이제 슬슬 저의 상관이 정화인지 시그리드인지 헷갈릴 지경이던 – 을 데리고 회동관 맞은편 조선 사신들의 숙소로 향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황희 혼자 한탄하는 것은 아닌지 곡소리와 한숨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북경 다른 구석에서 장차 나라가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고관대작들과 달리, 조선 사신들은 저들이 돌아간 다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쉽사리 떠올릴 수 있던 것이다.

“으아악! 서왕모, 서왕모다!”

고대의 허황된 서적마다 서왕모의 용모를 다르게 적곤 하였는데, 개중 『산해경』에서는 서왕모가 사람의 형상을 하였으나 범의 이빨과 꼬리를 지녔다고 하였다.

시그리드에게 범의 꼬리가 나 있을 리 없건만, 조선 사람들이 시그리드 모습에 질겁하는 것은 마치 진짜 범을 본 듯하였다.

“이놈들, 왜 이런다냐. 설마 내가 그 황희 영감한테 도끼 한 번 들이댔다고 이러는 건가?”

숱하게 마을을 약탈하고 교회도 불태운 바이킹 조상들도 오히려 왕이나 공작의 작위를 받곤 했다는데, 고작 사람 하나 납치했다고 이렇게 두려워들 하니 영 억울한 일이었다.

“그러게요... 뭔가 우리가 모르던 뒷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황 경을 찾아서 물어보는 게 빠르겠는데요.”

그때, 부사인가 서장관인가 확실치 않은 젊은 관리 하나가 황망히 뛰쳐나오더니, 무엄함이고 뭣이고 따질 겨를도 없이 시그리드 앞을 막아섰다.

“바라건대 부디 물러가십시오! 저희 조선국 사람들은 서왕모 전하와 더 이상 엮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허나 관리의 이문吏文(관화) 솜씨가 부족하여, 하산은 통역에 어려움을 겪었다. 고려 시절 몽골 사람들이 쓰던 관화와 태조 홍무제가 나라를 세운 이래 새로운 표준이 된 강회江淮 지방 관화가 달랐던 탓이었다³.

그러므로 시그리드와 스베인은 어깨 한 번 으쓱하곤 갈 길을 마저 갔다.

키가 족히 예닐곱 척은 될 법한 건장한 남녀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오니, 결국 누구도 더 막지 못하고 그대로 황희 앞까지 닿았다.

마침 황희는 서안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분주히 붓을 휘두르고 있었다.

“저기요?”

시그리드가 넌지시 말을 거니, 그제야 눈앞의 흰머리를 알아본 황희는 선비답지 못하게 화들짝 놀랐다.

“다들 저희를 엄청나게 꺼리는 듯한데,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가요?”

‘몰라서 묻느냐’ 하고 따지려던 황희는, 정말로 이 오랑캐들은 모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리고 심호흡을 했다.

할 말이 많았으므로, 이번에는 필담 대신 아예 관화 아는 역관을 앉혀다놓곤 저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황희였다.

이른바 조공무역은, 공물을 바치고 받는 회사품 외에도 그들이 사사로이 챙겨온 물산을 회동관 근처 개시開市에서 교환함으로써 이루어지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 태평양 너머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인삼이 단번에 들어와버리면서 인삼 값은 폭락하고야 말았다.

또한 궁금증 넘치는 사람 몇몇이 ‘서왕모삼西王母蔘’과 조선 인삼을 각각 먹어보고, 그 약효가 사뭇 다른 것을 깨닫자, 조선의 인삼보다 바다 건너온 인삼이 더 약효가 좋다는 낭설이 퍼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조선 인삼은 제값의 삼분의 일을 받으면 비싸게 팔았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시그리드의 신비해보이는 모습만을 보고서 당연히 가져온 인삼도 효험 좋으리라 착각하는 것이었으니, 플라시보 효과에 불과했지만.)

“... 역관들은 이곳 개시에서 교역하는 것을 그들의 벌이로 삼고, 또한 벼슬하는 이들도 이를 큰 소득으로 삼소. 그러니 크나큰 손해를 입은 셈이외다.

허나 그뿐만은 아니라오.”

이미 조선으로 돌아가면 크나큰 화란을 당할 지경이요, 살아날 길은 딱히 보이지 않던 황희였기에, 혹시 뭔가 계책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전화위복이 되길 바라며 시그리드에게 통사정을 하였다.

상왕의 대부터 조선국은 어떻게든 명에 바치는 공물을 인삼 등으로 대체하고자 하였다. 명이 요구하는 금은과 군마는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고, 명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조선을 견제하려는 뜻으로 공물의 품목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인삼이 무한정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으니, 이대로라면 금은과 군마를 인삼으로 대체하기는커녕,

‘인삼은 태평양 너머에서 충분히 입공入貢하고 있으니, 너희 조선국에게 인삼을 구하는 노고를 계속 맡긴다면 어찌 이것이 충실한 번국을 아끼는 예라 하겠는가. 마땅히 인삼을 공물의 품목에서 제하고, 그 대신 금은과 군마의 입공을 늘림이 옳으리라.’

따위 자문咨文이 떡하니 한양에 당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차마 대명의 뜻을 꺾을 수 없는 조선 사람들은, 대신 모든 것이 황희가 실기한 탓이라 비난할 것이었다.

그저 가만 있다가 돌아가기만 해도 그런 소리가 나올 판이었는데, 하물며

‘배신陪臣 황희는 감히 천조 대명의 국사에 품어서는 안 되는 뜻을 품고, 관여해선 안 될 일에 간여코자 하였으니, 그 죄가 크다. 천조에서 벌하지 아니하고 이대로 돌려보냄은, 조선의 예약과 법도가 융성하여 가히 중화에 비할 만함을 믿기 때문이다. 너 조선왕 도는 이를 알고 조처할지어다.’

같은 글을 들고서 돌아가게 생긴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차마 서씨 앞에서는 밝힐 수 없지만, 지난날 폐세자에 끝까지 반대하였다가 스스로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어, 겨우 상왕 전하의 은덕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된 자신 아니던가.

이대로 돌아갔다가는, 마음 속에 다른 뜻이 있어 일부러 금상의 치세에 어지러움을 일으키고자 하였다는 고변을 들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하니, 아국 조선을 생각해서라도, 그 인삼을 아니 팔 수는 없겠소? 나라의 수가 쉰 하고도 하나에 이르는데, 그곳에 어찌 인삼 말고 다른 특산품이 없겠소이까.”

황희가 생각해도,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 황희 자신이 주범은 아니었지만 – 서씨를 계책으로 옭아매어 곤란케 만들고자 했던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다.

허나 그만큼 옹색한 지경에 처했으니, 일시의 민망함을 감수하고서도 간청하는 것이었다.

“실은, 바로 그 인삼 때문에 찾아왔는데요.”

잠시나마 지쳐 힘을 잃었던 황희의 눈에 총기가 돌아오는 듯했다.

“제가 알기로, 이 인삼이 많이 나는 곳은 우리 신대륙 연합과 긴집사람들의 땅을 제하면 조선이랑 만주뿐이라 하더라고요.”

‘만주Manchuria’라는 말이 아직 세상에 없어, 잠깐 혼동이 있기는 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우리끼리 경쟁을 벌인다면, 결국 상대보다 헐값에 파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면 조공무역이든 그냥 통상을 하든 이익을 많이 거두지 못할 테고요.

하지만 우리가 손을 잡는다면 어떨까요?”

물론 인삼공사와 조선의 협업이, 마치 욘의 세상에 있었다는 그 OPEC처럼 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몇 개 있었다.

그렇지만 시그리드 생각에, 조선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인삼을 특산물로 삼아 왔다면 충분히 그들의 도움을 받아 해결할 수 있을 법했다.

조선은 인삼값 폭락을 막을 수 있고, 신대륙 연합은 인삼 무역의 수익성을 담보하면서도 든든한 대명교역 파트너를 얻을 수 있으니, 서로 좋은 일 아니겠는가?

잠시 황희의 머릿속에 오만 생각이 교차하였으나, 암만 골똘히 궁리해보아도 지금 서씨가 내민 손길을 내치고 홀로 계속 고민해본들 솟아날 구멍은 없었다.

비단 자신뿐 아니라, 새 나라 조선을 성현의 말씀 앞에 한점 부끄럼 없는 정학正學의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모든 대소신료들이 공상工商의 일을 썩 좋게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겨를도 없었다.

그리고, 이미 수 년 전부터 해동요순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듣곤 하던 금상 전하와 그러한 대소신료들 사이가, 결코 요임금과 고요皐陶의 사이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 나름의 이상과 대의를 가지고서 아직 다 채워지지 않은 조선이라는 백지를 자신의 색깔로 채우고자 조용히 겨루고 있음을 따지지도 못하였다.

그저, 회사품 그득 쌓인 천진으로 시그리드 일행과 함께 돌아가, 조선의 교동도로 향하는 배에 오를 뿐.

⁴ ⁵ ⁶ ⁷ 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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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격양가는 동아시아 전통 사상에서 태평성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요임금 시대에 백성들이 불렀다고 전해지는 노래입니다. 즉 훌륭한 정치가 이루어진 덕에 백성들이 정치는커녕 임금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저 정직하게 일하여 먹고사는 데만 주력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노래지요.

2. 팔달령(바다링) 장성은 북경에서 가깝기에, 만리장성 전 구간 중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곳으로 꼽힙니다. 마오쩌둥이 ‘만리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라는 친필을 남긴 곳도 이곳이지요. (만약 영락제가 만리장성을 내몽골 한복판에 지었더라도 똑같은 말을 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세월의 풍상을 맞으며 많이 훼손된 다른 만리장성 구간과 달리, 팔달령 일대는 영락제의 북경 천도를 즈음하여 중건되었기에 위풍당당한 모습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언급된 술루의 술탄(소록국 공정왕)이 북경을 방문했을 때 영락제의 허가를 받아 올랐다는 만리장성 구간 역시 이 부근이었을 것입니다.

3. 명대의 표준이 된 강회 지방의 관화와 원대에 하북~요동에서 통용되던 관화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전하는 유명한 일화로, 소싯적 심양에서 벼슬살이를 하기까지 했던 목은 이색이 조선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주원장을 만났을 적에 통역을 거치지 않고 직접 관화로 답했더니, 주원장이 알아듣지 못하여 서로 민망한 상황을 연출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 강회 관화는 이후 청대를 거쳐 오늘날의 표준 중국어(보통화)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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