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박 아래서 (1)
24. 압박 아래서 Under Pressure (1) - 퀸 & 데이비드 보위 (1981)
태어나서부터 날 수 있는 새는 땅에 붙박인 들짐승의 세상을 그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이치로, 날 때부터 총명하였던 조선왕 이도가, 자신에게는 그저 드러나 보이는 것이 남들에게는 한껏 궁구해야 겨우 짐작이나 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기까지는 수 년이 걸렸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뿐.
도가 딱 적당히 총명하였더라면, 그저 다른 이들을 깔보고 말았으리라. 허나 깔보기도 전에 이미 그의 머리는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얼마나 어두울지, 얼마나 혼란스럽고 두려울지를 모두 헤아려버렸으므로, 도저히 깔보는 데서 그칠 수가 없었다.
등불 없이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에게, 그 누가 등불을 마련하여 두 손에 쥐어줄 수 있을까? 누가 그들을 가르칠 것이며, 예악을 바로잡고, 법도를 가다듬으며, 천지 운행의 이치를 대신 밝혀줄 것인가?
그것을 능히 할 수 있는 이를 조선의 말로 임금이라 불렀으므로, 아직 막동莫同이라 불렸을 시절부터 도는 임금 되기를 꿈꾸었다.
허나 도의 위에는, 살아서 상투를 튼 형이 둘이나 있었다.
그리고 한때 도와 정확히 같은 생각에 이끌려 숱하게 피를 흩뿌렸던 아버지는, 도에게서 젊었을 적의 자신을 보았다.
큰형이자 세자였던 제가 향락에 빠져 어리석은 난행을 일삼을 때, 도는 스스로 현명함을 드러냄으로써 아버지에게 저의 뜻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밝혔다.
자신이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을 아들이 이루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형제 간의 골육상쟁은 저의 대에 멎기를 바라면서, 아버지는 끝내 도에게 세자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아버지 방원의 뜻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폐세자되어 왕위를 놓친 대군은, 저의 뜻과 무관하게 언제나 새로운 역모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법. 아픈 손가락과 같은 장남이 끝내 종묘사직을 위하여 목숨 잃는 것을 막기 위해, 이방원은 다시금 칼을 뽑았다.
사리가 어둡고 저의 욕심에 솔직한 장남이 역모에 휘말리지 않게 하려면, 그 귀에 대역의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입에 죽음이라는 재갈을 물리면 그만이리라.
그러므로 세자를 새로 세우자마자 임금이 양위한바 도는 국왕의 보위에 올랐으나, 나라의 주인은 바뀌지 않았으며, 상왕이 된 이방원이 오로지 마음 쓰는 바는 장차 불충不忠 범할 기미가 조금이라도 있는 모든 자를 그 집안까지 멸문시키는 것뿐이었다.
폐세자 양녕의 외척 민문이 가장 먼저 멸족의 화를 입었고, 양녕이 대역을 범하면 가장 이익을 보게 될 금상 도의 처가 심문이 그 다음 차례였다.
이처럼 조정의 서슬은 퍼렇고, 상왕 거하는 수강궁壽康宮이 경복궁을 갈음하여 나라의 법궁法宮 노릇을 한 지도 올해로 삼 년째.
조정에 급보가 날아들었다. 강화부사와 교동喬桐 지현사가 연명하여 치계하기를,
“거대한 이양선 수 척이 서쪽 바다에 나타났는데, 급히 빠른 배를 내어 문정問情한즉 좌찬성 황희가 합중국 왕후 서씨와 태평양 제이를 향도嚮導하여 대국 천진에서 찾아오는 길이라 하였습니다.
황희가 왕후 서씨의 청을 옮겨 전하기를, 교동도에서 상경하는 바닷길이 좁고 위태로우니 작은 배를 따로 내어달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황희가 자신이 북경에서 겪은 일과 서씨 등과 함께 바닷길로 돌아오게 된 전말을 상세히 적은 서계書啓를 함께 올렸는데, 이로 말미암아 조정이 한껏 시끄러워졌다.
사헌부에서 앞장서 상소하기를,
“황희는 일찍이 패역悖逆한 기색을 드러낸바, 공의公義에 따르면 그 죄가 가볍지 않습니다. 다만 상왕께옵서 그 재주를 아끼시어, 형벌을 가벼이 하는 덕으로써 그 벌을 일시 경감하여 주셨는데, 그러한 은혜에 분골쇄신하여 보답하여도 모자랄 것이건만 도리어 국가의 대사를 크게 어그러뜨렸습니다.
또한 지금껏 우리 해동에 닿은 적 없는 오랑캐의 향도가 되어, 장차 바닷길을 위태롭게 만들었으니 이 또한 크나큰 죄입니다. 일찍이 나주 목사가 흑산도에 이양선이 나타난 일을 치계한 바 있는데, 이제 저들이 그러한 날랜 배로 경사京師(수도)를 노리고자 한다면 방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신 등이 지금 황희의 서계를 보건대, 그 왕후 서씨라는 여인은 바다를 오가는 장사치와 다름없고, 그 속셈으로 말미암아 상국에서도 차마 말할 수 없는 소란을 일으켰다 하였습니다. 그 간교한 말에 이끌려 아국까지 휘말리는 단초를 마련하였으니 이 역시 무거운 죄입니다.”
하였다.
조정의 고관들, 즉 그 옛날 상왕의 정사靖社를 도왔으며 이후 상왕이 가차없이 종사의 안위를 도모할 적에도 늘 함께했던 공신들은 하나같이 그 말이 옳다고 외쳤다.
황희가 누구인가. 바로 끝까지 금상의 건저建儲(세자로 세움)에 반대했던 자다. 그런 자가 아예 ‘이자는 무엄하게 천조의 정사에 간여코자 하였은즉 조선에서 알아서 벌하여라’ 하는 내용의 자문까지 받들고 돌아왔으니, 벌하지 않을 명분은 적고 벌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허나 저들의 토산土産으로 가장 흔한 것이 인삼이라 하는데, 이는 아국에는 좋지 못한 일이다. 황희가 비록 일을 그르치고 정도를 잃었다 하나, 그가 서씨의 입조를 경계한 데도 나름의 연유가 있던 것이다.
이제 서씨가 아국의 곤란함을 깨닫고. 비로소 우리와 더불어 서로 이로운 방도를 찾고자 한다 하였다. 황희의 죄는 추후에 재론하고, 우선 서씨를 국빈으로 받아들임이 어떠하겠는가?”
임금이 이와 같이 하답하니, 유정현, 이원, 정탁 등 공신 출신 정승들은 다시금 통촉을 청하려 하였다.
황희가 고한 대로 서씨의 입조로 말미암아 북경에 풍파가 몰아닥쳤다면, 그러한 풍파를 굳이 한양에 들일 까닭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임금은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있었다. 실권이 아직 없을 뿐이지, 그 지재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서씨의 덕이 요순에 비길 만하다는 말은 허황되어 믿을 수 없으나, 이미 서씨에게서 소위 면사방免死方이 나와, 우리 역시 병들고 다친 자들의 인명을 구하는 비법을 얻게 되었다. 황희에 대한 벌은 후에 재론하고, 우선 서씨 한 사람을 보아서라도 정중히 대함이 마땅할 것이다.
또한 황제께서 서씨를 후대厚待하여 여러 은총을 내리셨다는 것은 거짓이 아닌 듯하다. 우리 동방은 예의지방이요, 또한 상국의 번병으로서 그 맡은 바를 다하는데, 어찌 교린交隣을 소홀히 하겠는가?”
몇몇이 조심스레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를 언급하며, 감히 상국에 입조한 나라의 군주를 사사롭게 맞이할 수 없음을 거론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조기에 진압당하고야 말았다.
“유구(류큐)와 일본 또한 바다 너머에 있어 예를 잘 알지 못하기에, 간혹 참람되이 아국을 상국이라 칭하면서 입조를 청하기도 한다. 우리가 예를 잊지 않는다면, 예를 모르는 이들을 접대함에 어떤 부끄러움이 있겠는가?
경들이 아국이 외방外邦과 사사로이 통교해서는 아니 된다 하니, 내 장차 유구에서 유황과 물소 뿔을 진상하면 경들이 무례를 범하는 것을 막아주도록 하겠다.”
지금 반대한 대신들에게는 일본과 유구의 사신들이 바치는 귀한 물건을 내려주지 않겠다는 상의 뼈 있는 말에, 무작정 반대하던 이들은 조심스레 고개를 내렸다.
그때 이조판서 허조가 한 발 나서며 입을 열었으므로, 그 깐깐함을 잘 아는 다른 중신들은 모두 허조에게 기대를 걸었다.
“전하께서 교린의 이치를 밝히시니, 한 가지 일을 논함에도 도리에 닿지 않는 것이 없어 실로 찬탄할 따름이옵니다.
다만 신이 좌찬성의 서계를 어깨 너머로 읽으며, 용렬한 지재로 어리석은 걱정을 품게 된바 이를 감히 고하고자 합니다.
황희가 이르기를, 소위 합중국과 태평양 너머의 오랑캐 나라들은 그 땅의 물산이 궁벽하여 상국과 교역할 마음으로 바다를 건너왔다 하였는데, 이는 곧 말업末業입니다.
무릇 상고商賈(상인)은 이익을 중히 여기고 법도는 가볍게 여기며, 의리는 그저 여름철에 솜옷을 보듯 할 뿐입니다. 『대명률』에 사사로이 명주나 비단, 면포와 곡량을 꺼내어 파는 자를 벌하고, 외인外人과 교역한 자는 간세姦細(첩자)로써 벌하라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감히 생각건대, 서씨와 그 양이 사신들을 맞이하여 교린의 예에 따라 대접함은 참으로 올바르고도 온당하나, 서씨가 황희에게 전하였다는 교역의 안은 도리로서 타이르고 단호하게 거절함이 올바를 것입니다.”
우선 왕후 서씨만은 국빈으로 대접하고, 통상의 제안은 받아들이지 말자는 절충안.
젊은 임금의 뜻을 받아들이되, 정도에서는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 모두가 여겼으므로 금방 조정의 공론이 정해졌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허조가 저의 원칙을 꼿꼿이 지켰기 때문은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그러할지언정, 실제로는 어차피 경복궁에서 무엇을 논의하든 별로 중요치 않기 때문이었다.
“허조가 참으로 온당한 말을 하였습니다. 제게 그러했듯 상께도 크나큰 도움이 될 동량지재이니, 부디 그 말을 앞으로도 귀담아 들으십시오.”
그날 밤, 수강궁에 문안을 간 도에게 상왕 이방원은 나지막히 말했다.
비록 한창때에 비하면 몸이 다소 쇠하였으나, 여전히 나라의 대권은 자신에게 있음을 보이는 듯, 부드러운 말투 뒤에는 양위하기 전 늘 그러했듯 무쇠 같은 뼈가 있고, 도의 온몸을 살피는 시선은 아들을 위하는 마음과 더불어 아들을 구속하는 뜻이 가득했다.
“황희는 그 재주가 지금의 삼정승을 합한 것보다 뛰어나나... 그를 서용敍用하는 일은 몇 년 더 늦춰야 할 듯합니다.”
황희는 나이가 상왕보다도 손위였다. 비록 두 사람 모두 정정하다고는 하지만, 환갑에 이르는 것을 경사로 여기는 세태를 감안하면 몇 년 뒤에 황희가 살아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¹.
상왕 또한 이를 알고서 ‘몇 년 늦추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리라.
“하면 서씨의 일은 어찌함이 옳겠습니까?”
“서씨는 실로 그 재주가 신묘하고, 더구나 바다를 건너온 일은 전례없는 기이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주상께서 그러한 기이함을 궁금하게 여겨 끝내 궁구하지 않고 견디지 못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주상께서 자칫 험로에 접어들어, 비탈지고 넝쿨 드리운 길을 뚫느라 심력心力을 상하시지 않을까, 그것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아버지의 걱정이 무슨 뜻인지 도는 금방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걱정이 모두 숨막힐지언정 따뜻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부정父情에서 나왔다는 것도.
비단 두 사람뿐 아니라, 조선에서 학문을 익힌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새로운 나라가 마땅히 농사짓는 백성들을 위한 나라가 되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이 정도正道를 벗어나는 일이 없지는 않았다. 당장 전조 말만 하더라도, 중원과 서역의 장사치들이 이 땅을 들락거렸으니, 색목인의 후손 설순이나 원나라 뱃사람의 얼자 장영실 같은 이들이 바로 그 산 증거였다.
그러나 이는 모두 저의 욕심을 차리는 권세가들과 오랑캐들이 제멋대로 의리를 무너뜨리고 날뛴 결과였지, 어떤 도의나 학문의 산물은 아니었다. 공맹孔孟이 도리를 밝히고 정주程朱(정씨 형제와 주희)가 이를 다시금 드러낸 이래로, 그 어떤 학자도 농사 외에 다른 천하의 대본大本을 밝히지 못하였다.
아무리 도의 지재가 탁월하다 한들, 아무 밑바탕 없는 곳에서 새로운 학문을 쌓아올려, 어떻게 공상工商이 농사일만큼이나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는지 밝혀낼 수는 없었다.
노력하면 그 문턱에 닿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을 뚫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이 나라가 나아갈 길을 두고 숱한 사대부들과 홀로 다투다 보면, 결국 무언가 실기하는 것이 생기리라.
한 순간의 실수가 또 다른 골육상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방원이 가장 두려워하고 어떻게든 막고자 하는 일이었다.
“가르침을 깊게 새기겠습니다.”
아직 실권이 없는 임금은, 아버지의 걱정을 덜어낼 길도, 아버지의 부담스러운 관심을 떨쳐내고 제 길을 갈 방도도 찾지 못하였다.
수강궁을 나서, 경복궁으로 환궁하는 길.
구름에 가렸던 보름달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 사람들은 저 달에 토끼가 있다고 말했는데, 소싯적부터 눈병을 달고 살았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아등바등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도의 눈에는 그저 어슴푸레한 얼룩이 보일 뿐이었다.
또한 보름달 주변에 밝고 어두운 별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미 흐려지기 시작한 임금의 눈에는 깜빡깜빡, 보였다 말았다를 반복했다.
그 아른거리는 모습이 어째 오늘따라 답답하게 여겨져, 도는 조심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의 큰 근본은 어디까지나 백성이요, 백성의 근본은 농삿일에 있고, 따라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일도 농사를 진흥하는 일이었다. 공상은 여기에 들지 않으므로, 이를 말업이라 불렀다.
‘허나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잖은가?’
어떤 술기術技는 단순한 잔재주를 넘어,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요순은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창제하여 천문을 살폈고, 희주姬周는 규표圭表를 세워 역법을 만들었다.
백성에게 이익이 된다면, 아무리 하찮은 재주일지라도 사실은 하찮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역이라고 해서 반드시 백성에게 도움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를 입증할 길은 없고, 굳이 증험코자 하는 사람도 임금 하나뿐이니, 실로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
‘고장난명이라, 잠깐, 그렇지!’
혼자서는 손뼉을 칠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손을 찾으면 그만 아니겠는가?
지금껏 그 어떤 서적에서도 밝히지 못한 - 조선에 존재하는 모든 의학 서적을 섭렵한 도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 처방을 고안하였다는 서씨가, 지금 강화도에 머물고 있지 않던가?
그렇지만 금방 반론이 떠오른다.
‘허나 서씨와는 말이 통하지 않고, 더구나 더불어 의논을 주고받기에도 어려운 처지다.’
두 임금이 한 곳에 모여 뭔가 궁리를 한다면, 결코 좋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두 사람이서 다른 모든 신료들이 싫어할 법한 궁리를 한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더더욱 그렇게 되리라.
수행하는 이들이 보기에는 그저 촌음 동안 잠깐 밤하늘을 보는 듯하였으나, 임금의 머릿속에서는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반론을 내놓는 일이 수십 번 거듭되고 있었다.
‘하면 서씨로 하여금 방책을 내게 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마침내 결론을 얻었다.
황희가 전한 서씨의 교역 제안은, 도가 보기에는 영 허술하고 어설펐다. 그것이 서씨 본인의 지재가 의외로 부족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말을 받아적은 황희가 서씨의 제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서씨의 지재가 부족하다면, 어차피 함께 더불어 큰일을 논하기에는 미덥잖을 것이다.
반면 서씨의 지재가 충분하다면, 그때는 자신의 재주를 발휘하여 도의 의도를 읽고 그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경복궁으로 돌아가던 조선 국왕 이도는, 그렇게 시그리드 리프트라사를 시험할 방법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꽤 까다로운 고민거리였던지라, 수강궁을 나서서 광화문에 들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남들이 알았다면, 그 모든 고민이 고작 한 각(15분) 안에 시작되어 끝났음을 깨닫고 경탄하겠지만, 임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이도, 헤아리고자 하는 이도 아직 도성에 그리 많지 않았다.
존 M. 윌슨 중령이 소령 시절 오산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역사와 전통에 크나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두 유 노우 킴-치?’나 ‘두 유 노우 킹 세종?’ 같은 질문을 툭하면 던지곤 하였으므로, 기나긴 세월 너머 시그리드도 세종이라는 대단한 군주가 한국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황희 왈, 이제 갓 세워진 조선에서 묘호를 받은 이는 태조 한 분 뿐이라².
그리고 그 묘호라는 것은 임금이 죽은 뒤에야 바치는 것이라 하니, 결과적으로 지금의 조선 국왕이 ‘킹 세종’인지 아닌지 알 길은 전혀 없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이 나라는 왠지 마음에 드는걸. 적어도 저 명나라인가 하는 곳보다는 더.”
마침내 입항 허가가 떨어져, 강화도 앞바다에서 내려 황희와 함께 작은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사절단.
그중 한 사람인 스베인의 반응이었다.
“깔끔한 것 때문에 그런가요³?”
“그것도 있지만, 그 뭐냐,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고 해야 할까.”
이는 시그리드도 동감하는 바였다.
거리의 질서정연함이나 건물의 화려함, 도시의 번영 등으로 따지면, 한양은 북경은커녕 항주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도시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약간 좋은희망 같지 않냐?”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자금성에 비하면 훨씬 단출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정돈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는 경복궁을 둘러보며 시그리드가 말했다.
어렵고 힘들었던 옛날을 이겨내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열망.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기대. 그리고 그 미래를 자신들의 힘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희망.
한양 저자는 물론이요. 육조 아문을 오가는 벼슬아치들, 그리고 경복궁 안쪽을 오가는 관원들까지, 시그리드 일행을 맞이하는 조선 관료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물론 그들이 바라는 미래라는 게, 썩 시그리드에게 유리한 건 아니었지만.
“이곳 사람들은 전조 고려보다 더 나은 나라를, 성현의 말씀에 따라 만들겠노라 장담하고 있지요. 스베인 공이 느꼈다는 것은 아마 그러한 마음가짐의 발로일 겁니다.”
북경에서 저의 포부를 밝히고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그리드를 따라 한양까지 온 정화가 말했다.
정화는 다른 이들을 통해 황제께 주청하기를, 아직 아카풀코에 남아 있는 명나라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오겠노라 하였고, 황제 또한 이를 윤허하였던 것이다.
“성현이라면 그 누구냐, 콘퓨셔스인가 하는 사람 아니오? 대충 플레톤 영감 같은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말인가?”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요. 그들이 우리 대명의 문관들처럼, 상공업에 썩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이 문제지만요.”
북경에서 느껴졌던 억압과는 대비되는, 자유로운 기풍. 그러나 이는 뒤집어 말하면, 시그리드가 이곳에서 저의 제안을 관철시키기 위해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다는 것을 뜻했다.
“쉽지 않겠는걸요.”
그들이 모화관慕華館⁴에 짐을 풀자마자, 사색이 되어 나타난 황희도 비슷한 말을 했더랬다.
“그래도 우선은 부딪혀 봐야지 뭐.”
스베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좌충우돌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지금까지의 편력을 생각하면,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사세가 불리해 보인다 하여 물러나는 것이 더 이상하긴 했다.
그렇게 일행은 광화문을 지나, 연회가 열리는 경회루로 향했다.
여름이 한창이라, 마치 투슈판이나 아카풀코처럼 무더운 날씨.
허나 큼직한 누각을 에워싼 연못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마구 흐르던 땀을 닦아주었다.
화려한 부조가 두드러지는 돌기둥 위에 세워진, 높이가 족히 몇 피트는 될 법한 높은 누각 경회루.
그 위에 오르니, 이미 기다리고 있던 임금과 상왕, 그리고 임금의 두 형 또한 시그리드를 맞이하였다. 뒤이어 문무백관이 일제히 예를 취하니, 흥겨운 연회의 시작이라.
허나 자금성처럼 공기 자체가 사람을 억누르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이곳 경복궁도 결국 일국의 임금이 거하는 곳이었다. 권력자 주변이라면 항상 암투가 있기 마련이니, 연회 자리 곳곳에서 조금씩 날 선 기미가 드러났다.
바늘방석 앉은 듯한 황희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그리드 저를 바라보는 이들도, 한편으로는 저들 기준으로 기이한 용모를 놀랍게 쳐다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슬쩍슬쩍 못마땅해 하는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예 잔치의 흥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다. 신대륙 사람들 취향은 아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흥겨운 듯한 풍악 소리가 누각 너머 연못 위로 퍼져나가고, 뒤이어 여악女樂들이 춤추고 노래하니 비로소 그 맵시에 사절(중 남정네)들은 취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잔치를 위해 간만에 한양에 들어온 양녕대군 이제는, 아버지와 아우의 눈길이 다른 데로 옮겨가기만 하면 즉시 왕후 서씨에게 저의 모든 시선을 쏟아붙곤 했다.)
“북경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는 걸까?”
그 와중 스베인이 그린란드 말로 물었다.
“그것보다는, 아까 정화 씨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통상 얘기를 꺼낸 것을 썩 좋지 않게 여기는 듯한데요.”
그렇게 한창 흥이 무르익던 와중, 조선 국왕이 한 마디 물음을 역관에게 전하고, 역관은 다시 그 말을 정화에게 전하였다.
“조선왕이 말하기를, 소독법과 말비욤을 고안한 시그리드 전하라면 반드시 백성을 이롭게 할 만한 다른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을 것인데, 그중 혹시 이곳 조선에도 전해줄 바가 있는가 물었다는군요.
또한 말하기를, 그것을 위해 장인이나 물자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알려달라고 하였답니다.”
연회 자리에서 별 생각 없이 던지기에는 어째 조금 이상한 물음이었다.
정말로 시그리드에게 어떤 기술적 도움을 바랐다면, 무엇이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물었을 것이요, 또한 대가가 무엇인지도 미리 밝혔을 테니까.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던 시그리드는, 잠시 스베인과 정화와 함께 자리를 비웠다.
“왠지 뭔가 숨은 뜻이 있는 것 같지 않나요?”
“눈치를 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이곳 조선은 아직 상왕 이방원이 사실상 정사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듯합니다. 연회 자리에 상왕이 앉아 있는 것도 그렇고, 왕이 그 아비의 눈치를 보는 것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따로 저와 독대할 만한 명분을 만들어달라는 말이겠군요?”
그렇지만 대체 무엇을 선보여야, 시그리드를 썩 달갑게 보지 않는 다른 관리들을 떼어놓고 조선왕과 독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뭐 떠오르는 것 있느냐?”
“잘 모르겠는데요.”
시그리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모르는 건 물어보면 그만 아닐까요?”
조선왕의 기대만큼 총명하지는 못했던 시그리드는, 그러나 다른 조선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때마침 이때 도성에 물건 만드는 재주로 입신양명한 이가 있으니, 일찍이 서씨의 불사 비방에 효험이 있음을 밝혀내는 데 큰 공을 세워 호군 벼슬을 받은 천인賤人 장영실이라.
그날 연회가 끝나고 하루쯤 수소문한 끝에, 의외로 종종 궁궐에 불려다닌다는 그 장영실의 이름을 들은 시그리드가, 같은 나라 벼슬아치들도 딱히 대단하게 보지 않는 장영실네 집 앞에 나타난 사연은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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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종 이방원은 원 역사에서 1418년 양위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후에도 1422년 갑자기 사망할 때까지 모든 실권을 쥐고 아들 세종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미리 쳐내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 결과 세종은 즉위 초부터 사실상 태종의 신하들인 왕자의 난 공신들로 가득 찬 조정을 물려받은 셈이 되었습니다. 세종이 이들 모두를 제압하고 마침내 우리에게 세종대 명신으로 잘 알려진 이들로 조정을 채우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는데, 이 과정에 대해서는 후에 더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 엄밀히 따지면 조선의 2대 국왕인 정종은, 실제로는 그저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기 전 명분 확보를 위해 내세웠을 뿐인지라, 명으로부터 조선국왕으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정왕이라는, 명에서 내려준 시호만 있을 뿐, 묘호는 조선 후기 숙종 연간에 이르기까지 받지 못했지요. 정종이 사망한 지 2년이 지난 작중 시점에서 묘호를 받은 조선 국왕이 태조 한 사람뿐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3. 그린란드를 비롯해, 중세 바이킹들이 당대 유럽인들 중 가장 청결에 신경쓰는 축에 들었다는 것은 일전에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와 조선 역시 당대 중국에 비해 유달리 청결을 따지는 편이었지요,
일례로 16세기에 문관 출신으로는 최초로 정사로서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나라 사대부 공용경은, 사행길에서 조선인들과 교류하며 조선에 대해 큰 호감을 품게 되었는데, 이에 북경으로 돌아가 지시하기를 반드시 조선 사신들이 회동관에 들기 전 방을 청소해줄 것을 명하였습니다.
즉 당시 중국 기준으로, 몇 주쯤 쓰지 않은 먼지 쌓인 방에 그냥 들어가 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조선 기준으로는 참기 어려운 불결함이었던 것이지요.
4. 모화관은 본디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기 위한 숙소였지만, 조선 초에는 다른 나라의 사신들을 접대하는 용도로도 쓰였습니다. 예컨대 15세기에 종종 조선을 방문하던 류큐 사신단 또한 모화관에서 유숙한 바 있고, 조선 국왕들도 모화관까지 친히 거둥하여 사신들과 연회를 벌이곤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