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박 아래서 (5)
24. 압박 아래서 Under Pressure (5)
양녕대군 이제李禔는 세자 시절부터 온갖 비행은 골라서 하였는데, 마땅히 저의 것이 될 줄 알았던 왕위가 - 제가 보기엔 그렇게 잘난 것도 없는 - 작은 아우에게 넘어간 이후로도 반성하기는커녕 더욱 그 행패가 심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왕이 어떻게든 아들의 목숨만은 붙여주고자 하였던 것은, 정말로 아들을 아끼는 마음, 그리고 왕위를 두고 벌이는 골육상쟁이 반드시 왕권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냉정한 계산, 이렇게 두 가지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것도 정도가 있지, 어찌 서씨에게 금수와 같은 짓을 하려 하였단 말이냐.”
지끈거리는 미간을 움켜쥐며 이방원이 말하였다.
들킨 뒤 나 살려라 달아나던 와중 서씨가 경고하듯 총통을 한 발 쏘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바지를 뜨뜻하게 적신 채로 잡혔다던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기 전에 발각되어 붙잡혔다는 점이었다. 물론 서씨의 체구와 무예를 볼 때, 설령 푹 잠들었을 적 못된 마음 품고 달려들었다 한들 양녕이 먼저 얻어맞고 붙잡혔을 공산이 훨씬 컸지만.
“아버지! 오해입니다! 오해에요!”
양녕 딴에는 정말로 억울하였다. 그도 사람인지라, 서씨가 대호를 잡는 것을 보고서는 자못 두려움을 알게 된 바, 서씨를 어떻게 힘으로 취해보려는 못된 생각으로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뭣이 오해란 말이냐? 여염집 규수의 규방을 훔쳐보아도 족히 죄가 되거늘, 고작 문지방 넘지 못한 것을 가지고서 억울함을 호소하려느냐?”
물론 처음 경회루에서 대면했을 때부터 서씨의 미모에 취한 것은 사실이었다. 만약 서씨가 조용히 모화관에 머물렀더라면, 그때는 정말로 흉악한 마음을 품고 찾아갔을지도 모른다.
허나 서씨가 아버지 앞에서 대호를 잡는 것을 뻔히 보았으니, 아무리 양녕이 생각 없이 제 욕정에 휘둘리는 작자라지만 대호 이마에 뚫린 구멍이 제 머리통에도 뚫릴 수 있으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수지부모한 신체발부를 어찌 그리 위태롭게 하오리까. 다만 지금껏 알지 못하던 목마름을 알게 되어...”
아우 주상도, 아버지 상왕도, 양녕이 바라는 것은 모두 해주었고, 때때로 꾸짖으면서도 대체로 타일렀으니, 혈육의 정이 대개 이러하였다. 그러므로 양녕이 빼앗고자 하는 재산으로 빼앗지 못함이 없고, 취하고자 하는 여인으로 취하지 못함이 또한 없었다.
그러나 아뿔싸, 그렇게 살아가던 차, 처음으로 도저히 취할 길 없는 미녀를 보았으니, 지금껏 알지 못하였던 갈망이 마음을 불태우고, 그리하여 어떻게 말이라도 한 번 붙여 볼까, 아니면 요행히 뽀얀 속살 한 조각이라도 제 눈에 담을 수 있을까, 그러한 못나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서씨의 숙소 담장을 넘었다는 말이었다.
큰아들이자 한때 세자였던 녀석이 그것을 반성하기는커녕, 목마름이랍시고 에둘러 말하고 있으니, 답답함과 난감함이 경합하듯 아버지 마음을 가득 채웠다.
서씨에게 팔자 좋게 금상의 위세를 더욱 공고히 해줄 길을 찾아달라 청할 계제가 아니었다. 이번 일을 조용히 묻어달라고 당장 찾아가 오체투지하며 애걸복걸해도 모자랄 판.
양녕이 제게 금수 같은 욕정을 품었다고만 밝히고 넘어가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욕정은 핑계에 불과하고, 실은 제 목숨 노린 것이 아니었느냐 서씨가 따지고 든다면, 그때야말로 큰일이 날 테다.
그런데 막상 모자란 아들놈은 근신하라 해두고서 서씨에게 대신 사죄할 작정으로 발걸음 떼려던 차, 서씨가 먼저 찾아오는 것이었다.
“어젯밤 소식은 들으셨겠지요?”
“백 번 천 번 사죄드려도 부족할 것입니다.”
헌데 조심스레 서씨 안색을 살핀즉, 딱히 노여워하는 기색은 없고, 도리어 뭔가를 꾸미는 양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것이었다.
“마침 잘 되었지 뭐예요.”
양녕대군 이제의 그 못된 짓거리를 그냥 웃어넘길 만큼 관대한 시그리드는 아니었다.
허나 이제에게도 제 잘못을 고칠 기회를 주고, 이방원이 어제 사냥을 빙자해 제게 청한 일도 해결할 길이 떠올랐으니, 그 옛날 그린란드에서 벼락 불러낼 때부터 시작해 뭔가 계책을 떠올릴 때면 한결같이 짓곤 하는 배시시한 -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마녀스럽게 음험한 - 미소가 절로 함께 지어졌다.
“뭔가 방도가 있을지요?”
“네, 한 번 들어보세요...”
눈앞의 색목인 처자가 떠올릴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계책이 나왔으므로, 상왕은 시그리드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입도 떡 벌리게 되었다.
“아니, 그런 발상을 대체 어떻게...”
“사실은 이게 황희 경 덕분이랍니다.”
“방촌(황희의 호)? 그이가 무엇을 하였기에...”
“북경에서 만났을 적에 가르침을 받았거든요.”
도끼로써 가르침을 청해 반나절 만에 사서삼경을 요결만 쏙쏙 짚어 독파했으니, 그때 주워들은 것이 아직 뇌리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허. 그 고지식한 이가 그런 공을 세웠을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서씨의 계책은 『실록』에 남지 못할 것이므로, 세상 사람들이 황희의 공을 기억할 리도 없을 것이었다. 한양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코 빠뜨린 채 짐 싸고 있는 황희도 아마 자신이 이런 데서 거론되었을 줄은 모르고 있으리라.
조정의 논의가 개국통상으로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황희를 벌주는 이야기도 그쪽으로 매듭이 지어졌다. 즉, 황희를 바다 너머로 보내 그 땅에 조선의 상관을 두고, 그 동정과 특산품을 살피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나라 사람들이 대체로 바다를 두려워해, 제주도 가는 것조차 두렵게 여기곤 하였으므로, 다들 그만하면 족히 죽음을 갈음할 만한 처벌이라 하였다.
그러나 정작 몽골의 관직 받았던 집안 사람들인 주상과 상왕은 모두, 두세 달만에 수만 리 바다를 오갈 수 있는 배라면 오히려 지금 조선의 배로 제주도 오가는 것보다 더 안전하게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만한 계책이라면 불감청일지언정 고소원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양녕대군 이제의 명운은 결정되었다.
전조 고려 말에 회흘(위구르) 사람 설손이 아들들과 함께 귀부하였는데, 그 손자인 설순 또한 대를 이어 조선의 관리로 살아가고 있었다. 설순의 아버지 대까지만 해도, 조선말 대신 한어漢語를 집안에서 더 편하게 쓰곤 하였던지라, 설순도 관화를 조금은 알고 있었다¹.
“그러니 조금 도와주시오. 응? 내 이렇게 청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느닷없이 한양에 몰래 변복하고 찾아온 양녕대군으로부터 곤란한 청탁을 받게 될 줄 어찌 알았으랴.
“대군 나리²,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뭐 엄청나게 국법을 범하는 것도 아니잖소. 내 일이 잘 풀리면 반드시 하례하리다.”
금상께서 노비제 폐지라는 ‘높은 공’을 던짐으로써 본의였던 개국통상을 관철하면서, 군주나 신하가 아닌 공公의 이익을 취한다는 명목으로 신대륙 인삼공사와 함께 무역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제도들이 하나씩 갖추어지고 있었다.
노비제를 없애기 위해서는, 나라에서 농사일이 아닌 다른 것도 이익으로 삼을 길을 열어야 한다는 성상의 하교를 들은 몇몇은, 저들도 어떻게 그 장사일에 편승해볼까 생각하며 종로와 광통교를 돌아다녔고, 우연히 장영실과 마주친 김득경은 그대로 멱살을 잡혔으며, 만악의 근원 김도련은 함길도에서 붙잡혀 도성으로 압송되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이틀 지나다 보니, 어느새 일이 년 사행을 생각하고 바다를 건너온 양이 사절들이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다.
“내 이대로 서씨를 돌려보내자니 평생의 한이 될 듯하여 이리 통사정하는 것이오. 아낙네 겁간하려 했다는 누명도 억울한데, 하물며 다른 나라 여주를 건드리려 했다는 오명을 쓰게 되었으니, 어찌 밤에 잠을 이루겠소?”
마치 여인네 방을 훔쳐본 것은 아무 죄가 아니라는 양 뻔뻔하게 말하는 양녕대군이었다.
허나 진지하게 본인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직도 그때 잠깐이나마 훔쳐본 자태가 머릿속에 아른거리고, 또 자신이 풍류 아는 호남아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다면 반드시 서씨의 마음을 훔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은 뿌리깊게 박혀버렸다.
“그러니 어떻게, 양이들 떠나기 전에 내가 서씨를 한 번 더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저 전 태감 정화라는 이의 수족인 하산도 보아하니 보덕(설순의 자) 그대와 같은 색목인인데, 초록은 동색이라고 동포 간의 정이 있지 않겠소?”
즉 하산에게 다가가 어떻게 저쪽 사정을 염탐해달라는 말이었다.
그 청을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이 골칫덩이를 떼어놓기가 난망하였으므로, 끝내 설순은 이제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웬걸, 정말로 설순이 하산을 찾아가니 금방 대어大魚가 낚이는 것이었다.
양녕대군 딴에는 변복을 했다 하였지만, 상왕이 암암리에 부리는 수족 몇몇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설순보다 한 발 앞서 시그리드를 찾아뵙고, 다시 시그리드의 명을 하산에게 전했는데, 그런 사정은 전혀 모른 채 설순은 그대로 돌아와 양녕에게 제가 들은 바를 전하였다.
“저들의 배에 타라? 그게 가한 일이오?”
“예. 소관이 하산에게 듣기로, 아직 강화도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는 저들의 대선大船은 지금 한창 짐을 싣고 내리는 중이랍니다. 황상께서 하사하신 보물 중 저들 땅에서는 소용이 없는 것들을 내다 팔고, 돌아갈 때 먹을 식수와 곡량을 채우고 있다더군요.”
“아! 참으로 잘 되었구나! 그래, 그러면 되겠소, 흐흐...”
강화도에 가서는 일꾼 시늉을 하며 슬쩍 그 배에 올라탄다. 배 위에서 서씨가 어디 도망하지는 못할 것이니, 그때 자신의 풍류 좋아하는 호남아 기질을 드러내어 그 마음을 얻는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일국의 왕자인 자신을 뱃전 너머로 던져버리지는 못할 것이었다. 실컷 서씨 미모를 구경한 다음 적당히 충청도나 전라도 해안에 내려달라 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배라는 것은 당연히 연안을 따라 천천히 오가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던 우물 안 개구리다운 생각이었다.
“저 남쪽에 사시사철 순풍 부는 곳이 있어, 그 힘으로 고작 두세 달 만에 수만 리 뱃길을 주파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 이르기 전까지는 배가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 하니... 아예 불가한 발상도 아니라 하겠습니다만, 정녕 괜찮으시겠습니까?”
“암, 괜찮고말고! 영웅남아로 태어나 어찌 소소한 불편과 위태로움을 두려워할까?”
그렇게 조선국 폐세자 이제는 밀항을 결심하게 되었다.
“크하하! 서시와 같이 고운 서씨여, 이번에야말로 그대의 마음을 얻고야 말 것이오!”
모화관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성대한 작별의 연회가 끝났다.
김도련 사건이 얼추 해결의 기미를 보일 무렵, 진상을 깨닫고 뭔가를 고민하던 장영실은, 시그리드에게 우연히 증기기관 얘기를 듣고는 이레를 내리 고민하다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진서를 더듬더듬 읽기는 하지만 아직 문장으로는 쓰지 못하는지라, 제 상관 이천의 도움을 받아 상소문 올리기를, 서씨를 따라 그 땅으로 가서 증기기관 만드는 재주를 익히고 싶다 하였다.
또한 이미 대세가 개국통상으로 굳혀졌음을 안 대신들도, 어떻게 서씨에게 미리 연줄을 대어두면 훗날 떨어지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얼마 남지 않은 일정에 고개를 들이밀곤 하였다.
그리고 저의 죗값을 신대륙으로의 귀양 아닌 귀양으로 갚게 된 황희도 있었다.
남원에서 몇 년 더 유배 생활을 할 줄 알고서, 경치 좋은 곳에 정자까지 하나 지을 작정으로 광통루廣通樓라는 이름을 생각해두고 있었건만, 이제 그 광통루는 남원이 아닌 이름도 생소한 아까볼꼬인가 아가불고인가 하는 곳에 지어야 하게 생겼다³.
‘아아, 꿈이 실로 영험하였구나!’
환송 연회에서, 자신이 언제고 땀에 흠뻑 젖은 채 깨어났던 날이 바로 정화가 인삼을 발견한 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황희는 뒤늦게 한탄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이제는 뒤로 할 때.
강화도로 돌아가, 친히 배웅을 나온 이도와 이방원 두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뒤, 주변 수영에서 몰고 온 작은 배에 올라 물 깊은 곳에 정박하고 있던 다이슨 범선에 올랐다.
“자, 돌아갑시다!”
시그리드가 명령을 겸하여 외쳤다. 리프가 가장 먼저 찬동하듯 우짖고,
“듣던 중 반가운 말씀이오!”
시그리드가 선물해준 호랑이 가죽으로 새 두건을 마련한 아나왁 사절들이 이어서 환호하였으며,
“하하! 신기한 구경도 실컷 하였겠다, 이제 돌아가서 자랑도 해야지!”
벌써부터 이 모든 일들을 어떻게 노래로 엮어 다음 세대로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긴집사람들과 세줄기불꽃의 추장 겸 사절들도 함께 호응하였다.
오는 길은 고생이 많았고 찾아와서 온갖 기묘한 일도 많이 겪었으나, 얻은 것은 많고 또 한 번 맺은 인연도 쉽사리 끊어지지 않을 터.
황제의 하사품으로 가득 찬 배는 여전히 무거웠으나, 사람들의 마음만은 (밀항자 하나를 포함하여) 가벼웠다.
그로부터 사흘 뒤, 태평양 횡단을 위해 정화가 찾아낸 편서풍 부는 항로로 향하던 다이슨급 범선 위에서는 소소한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밀항을 들킨 것도 들킨 것인데, 알고 보니 시그리드가 처음부터 모든 일을 계획했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러면 제가 이 배에 올라타리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까?”
여인네라고 깔보기에는, 이미 광주에서 뜨거운 맛을 너무 많이 보았던지라 절로 공대하게 되는 양녕대군 이제였다.
“설순 그이에게 얘기를 흘린 게 누구겠어요?”
따지고 보면, 광주에서 그런 일이 터졌는데 제게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던 것부터가 조금 상례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 늘 그랬듯 - 아버지나 아우가 잘 막아주었으려니 하고, 정신 못차린 채 한양으로 무작정 향했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이 역시 이상하였다.
“그러면... 설마 제가 전하의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까? 역시, 그런 것이었군요!”
“그럴 리가요.”
돌아오는 실소. 양녕의 매정한 마음은, 지금이 그럴 계제가 아님을 뻔히 알면서도 와장창 낙담하기를 잊지 않았다.
“공을 데리고 조선을 떠난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답니다. 어차피 공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니, 이 계기를 놓치지 않고 정직한 삶을 살아보는 건 어떨까요?”
시그리드는 갑판 한 구석, 갑판 쓰는 빗자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양녕이 어찌하여 이렇게 아버지와 아우의 속을 썩이는 이가 되었는가. 시그리드 생각에는, 너무 편하게 살았기 때문이었다.
“정직한 노동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찾는 거예요. 조선에서 그랬던 것처럼 남들에게 해코지만 하면서 무위도식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을까요?”
저 눈빛은 어째 익숙했다. 그래, 아우 충녕이 신하들에게 뭔가 일을 시킬 때 저런 눈빛을 지으면서, 상냥한 미소와 함께 엄청나게 막중한 과업을 떠넘기곤 했다.
양녕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하, 하지만... 저는 무위도식이 더 좋습니다. 부디 내려주십시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왔는데요.”
“아니, 출항한 지 고작 사흘이 지났으니, 빨라봐야 아직 전라도 해안에도 닿지 못하였을 것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다이슨급 범선은 평균적으로 5~8 노트, 그러니까 바스크 사람들의 단위로는 한 시간에 대략 2~3 레구아Legua를 움직이곤 했다.
출항한 지 대략 70시간이 지났으니, 대충 500해리, 욘이 ‘쓸모없이 복잡하고 비직관적인 단위’라고 불렀던 미터법으로는 한 일천 킬로미터쯤 움직였을 것이다⁴.
“그러니까... 대충 계산해보면 조선은 한참 지났고, 가장 가까운 나라는 류큐일 텐데요.”
“뭐, 뭣? 유구국? 유구국이라고요?”
유구국이 어디인가. 바다로 수천리 길은 가야 닿는다는 해중海中의 낙도다. 절로 앞이 깜깜해지는 양녕이었다.
“거기에라도 내려드릴까요? 아니면 그냥 이대로 계속 같이 가실래요?”
양녕은 사리분별이 어둡다기보다는, 충동이 한 번 일어나면 기껏 분별해낸 사리 따위 잊어버리고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성정의 사람. 다행히도 지금 일어나는 충동은 ‘정신 바짝 차려야지, 안 그러면 저 망망대해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라는 생존본능이었다.
“가, 가겠습니다. 계속 따라가겠습니다!”
그리고 살아서 조선 땅을 다시 밟으려면, 적어도 같은 조선 사람들 - 황희, 장영실 등 - 과 붙어있는 쪽이 나을 것이었다.
지난날 김도련의 송사 이후로, 주상에게 더 이상 수강궁으로 문안을 오지 말 것을 청한 상왕은, 이제 자신이 직접 경복궁으로 찾아가 주상을 종종 뵙겠노라 밝혔다.
그 뜻이 무엇인지 누가 모르겠는가. 노비제를 내세워 개국통상을 관철하기까지, 금상이 군주로서 전면에 나선 일에 찬동할 뿐 아니라, 앞으로 자신은 상왕이 아닌 임금의 아버지로서만 지내겠노라는 뜻.
그러나 이를 두고 설왕설래하기에는, 지금 도성 저자에서 떠들 얘깃거리가 너무나 많았다.
전조 고려가 흥성하던 때, 벽란도에 종종 색목인 상인들이 닿기도 하였다지만, 어디 이번만큼이나 색다르고도 기이한 손님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던가.
벌써부터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런 사절들을 맞이한 나라가 온 천하에 단 둘, 대명과 해동 조선국뿐이니, 어찌 칭송하기에 부족함이 있겠는가?
그리고 또한 칭송할 거리가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어느덧 홀연히 사라진 폐세자 양녕이었다.
광주로, 또 양근으로 쫓겨난 폐세자 양녕이, 밀봉된 서한 한 통만을 남기고 갑자기 사저에서 종적을 감추었다는 소식. 그러나 그런 일이 벌써 몇 번이나 있었으므로, 다들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허나 그 서한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이제는 모두가 폐세자 이제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간 광패한 짓으로써 금상과 상왕 두 분을 실로 괴롭게 하였으니, 이 죄는 씻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소자의 광증狂症 탓이니, 불초 소자는 이제 바다 너머로 떠나가고자 합니다.’
미친 사람은 자신이 미쳤다고 하지 않기 마련이다. 자연스러운 반응인지, 아니면 누군가 은근히 바람을 잡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양녕대군의 덕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그 덕이 태백泰伯과 같구나!”
주나라 태왕太王이 조카인 계력季歷에게 성덕聖德이 있음을 깨닫자, 이를 알게 된 태왕의 장자 태백은 스스로 미친 체를 하더니 형월荊越 땅에 은둔하였다.
“아니, 태백도 이에 미치지 못하리라! 태백은 그저 관중에서 형월로 갔을 뿐인데, 우리 양녕대군께서는 대양을 건너 오랑캐 땅으로 가시지 않았던가!”
양녕대군이 태백과 같든, 태백보다 뛰어나든, 어느 쪽이건 이는 금상을 띄우지 않으면서도 그 위엄을 띄우는 일이라.
태백이 양위한 까닭이 주나라 문왕을 위함이니, 양녕대군이 태백을 본받았다 함은 곧 금상이 문왕과 같은 성군의 자질이 있음을 뜻하였다.
제 꾀에 제가 속아서 바다 너머로 사라진 사람은, 더 이상 패악질을 부릴 수 없는 법. 그러므로 사람들 머릿속에는 어느새 그간 양녕의 숱한 악행이 모두 금상을 위한 것이었다고 포장되기 시작했다.
“서씨가 마지막까지 큰 선물을 주고 간 셈입니다.”
달 밝은 밤, 경회루에 아들 주상과 함께 오른 이방원이 말했다.
연못에 비친 얼굴에는 후련한 서글픔뿐. 남동쪽 하늘에 두둥실 뜬 달을 바라보는 상왕의 눈은, 과연 달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달이 있는 곳 그 너머의 바다를 향하고 있는가.
“선물이라 일러도 될 지요.”
“조종의 대업에 이롭고 이 나라 백성에게 이로운 것이니 선물이라 일컬음이 마땅하지요. 부디 그 선물이 되어버린 이가, 바다 건너에서도 건강히 잘 살아가기를 바랄 뿐.”
양녕대군을 조용히 데리고 사라짐으로써, 장차 양녕대군으로 인해 조정에 피바람이 불어닥칠 일을 막았다.
또한 그간 양녕의 패악질을 모두 금상을 위한 것으로 둘러댈 수 있게 되었으니, 금상을 성상聖上이라 칭함에 조금은 진심이 묻어나게 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만에 하나 명이, 자국에만 입조해야 할 양이의 선박이 어찌하여 조선에 들리곤 하느냐 묻는다면, 이 모두 양녕대군을 걱정하여 그 소식을 듣고, 그에게 뭐라도 부쳐주고자 하는 혈육의 정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 있게 되었다.
“저들이 떠나간 후로도 계속 뭔가를 마음에 두고 계심은, 주상 또한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애써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이방원이었다.
“그렇습니다.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울림이 아직도 남아 생각할 거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도 또한 동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이식위천. 백성은 먹거리를 하늘로 여긴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감히 듣기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먹거리가 지금까지는 오로지 땅에서 나왔고, 사람이 사는 땅에는 하나같이 주인이 있었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그 땅의 주인을 하늘의 주인처럼 섬겼다. 그러므로 땅의 크고 작음에 따라, 천자라고도 부르고 왕이라고도 불렀으며, 하나같이 상上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열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주인이 없는 땅을 무진장 얻게 되고, 또 땅 없이도 상공으로써 먹거리를 구할 길이 열린다면 어찌 될까.
떠나기 전 며칠간, 시그리드와 몇 번 더 이야기를 나누면서, 도는 시그리드가 지금껏 품고 있는 고민을 들었다.
시그리드가 세우고자 하는 나라와, 닮지 않으려 노력하는 세상의 이야기들.
시그리드가 말한, 앞으로 생길 수도 있는 한 가지 세상은 이러하였다. 부를 지닌 자들이 스스로 하늘 되기를 바라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들이 하늘을 노린 까닭이 무엇인지를 잊고서 그저 권세로써 부를 늘리기만을 바란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화식貨殖 향한 욕심에 매몰되고, 소강小康마저 옛말이 되어 도심道心은 새벽 별빛마냥 희미해질 뿐.
이에 도는 자신이 생각하는 다른 세상을 말했다. 천하가 공公을 위한 것이니, 상공의 이익 또한 모두의 것으로 삼아, 나라가 백성을 보살피고 백성이 나라를 나누어 가지는 것과 같이 되는 세상.
시그리드가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그러한 세상과 자신이 말한 세상은 양립할 수 없으니, 필히 다툼이 생기리라 하였다. 또한 그런 세상에서는 거짓 공公이 판치며, 가짜 선비와 가짜 명신名臣들이 도의의 이름을 훔쳐 제 잇속만을 차리면서 백성의 부를 갉아먹을 것이라 하였다.
허나, 마치 음양과 같이 두 세상은 각각 하나가 다른 하나를 낳기 마련이니, 한쪽은 사私의 극한이요 다른 하나는 공公의 극한이라.
“하여, 어찌 답하셨습니까.”
“처음부터 모든 예법과 제도를 새로 세우는 합중국과 달리, 아국은 이미 걸어온 길이 있지요. 이미 나라의 토지가 실지로 어찌 되었건 명분상으로는 임금의 것 아님이 없으니, 굳이 따진다면 이미 공의 길에 가까운 셈입니다.
그러나 서씨의 사정은 다르고, 이미 그 땅은 임금 없이 나라를 세우는 도를 만들었습니다. 불씨의 말을 빌리면, 업보 없이 맑은 마음으로 앞날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두 가지 답 사이에 참으로 옳은 정답은 없고, 꼭 답이 그 둘만 있으리라는 법도 없었다.
중한 것은, 지금껏 그래왔듯 중지를 모으면서, 어떤 일이 닥쳐와도 잃지 않을 대의를 세우는 것 아니겠는가.
“윤집기중允執其中이라, 좋은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그 문답 중에 저 역시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조선이 공의 극한으로 향하든, 권신들의 손에 사의 극한으로 향하든, 전조 고려 말엽처럼 이도저도 아닌 채 모두가 괴로운 지경에 빠지든.
조선은 신대륙 연합과 달리, 자유롭게 앞날을 고를 수 없었다. 나라에 임금이 있고, 이미 지키고자 하는 도가 있으며, 또한 위로는 대명이, 옆으로는 왜국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널리 가르쳐, 언제고 군민君民이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여도 모자람이 없도록 만들 수는 있겠지요.”
“그것이 가하겠습니까?”
지금껏 남의 은덕으로써 출세해왔던 장영실이, 스스로 저의 운명을 개척코자 하였을 때 상소문 하나를 쓰지 못해 끙끙대던 것을 임금은 들었다.
“문자. 그것을 만들면 됩니다. 어리석은 이도 하루면 익힐 수 있는 그러한 문자로써, 서로 뜻을 통할 수 있게 한다면 불가한 일도 아니겠지요.”
상왕은 그 뜻을 알지 못하고, 국왕은 그 뜻을 어찌 이룰지 아직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함께 동남쪽 달을 바라보는 부자의 입가에는 아련하면서도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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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전에 지나가듯 언급된 설순은, 위구르의 쿠차(고창국) 출신으로 대도(북경)에서 관직생활을 하던 중 원말의 혼란상을 피해 고려로 귀순한 설손의 손자입니다. 비록 출신은 서역이지만, 이미 그 무렵 상당히 한화漢化되어 있던 원의 엘리트답게 관화를 더 편하게 썼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설손의 백부인 설장수는 당대에 한문 서예와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설순 역시 외교관이 아닌 문관으로서 세종의 명에 따라 다양한 저술을 남겼지요.
2. 흔히 대군의 존칭으로 자가自家를 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직 왕실 예법이 완전히 자리잡지 못했던 조선 초기에는 이야기가 달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컨대 조선 후기의 서적 『이재난고頤齋亂藁』에서는, 조선 초만 해도 대군과 다른 왕자군들을 그저 ‘나으리進賜’라 호칭하였다고 적고 있지요.
3. 지금도 남원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남아 있는 광한루는 본디 황희가 세웠을 때는 광통루라 불렸습니다. 이후 1434년 정인지가 고쳐 세우면서 도교 설화에 나오는 항아의 궁전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에서 따와 광한루라는 이름을 새로 붙였지요. 이후 정유재란때 남원성 전투로 한 번 불탄 다음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4. 미 육군은 미터법을, 미 해군과 공군은 야드-파운드법을 쓴다는 통념은 절반만 맞습니다. 정확하게는 야드-파운드법‘도’ 쓰고 다른 것도 같이 섞어 쓴다는 표현이 올바를 것입니다. 예컨대 해리Nautical mile(1NM=약 6076.12피트)는 미 공군에서도 거리의 단위로 자주 쓰지요. 같이 등장한 레구아Legua는 대항해시대에 유럽 각국에서 쓰였던 리그League의 이베리아 반도식 명칭인데, 전근대 단위가 다 그렇듯 같은 나라 안에서도 정의가 제각각이었습니다. 15세기 기준으로 스페인의 1레구아는 4마일에 해당했는데, 정작 마일의 정의 자체가 지역마다 달랐던지라 실제 길이는 중구난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