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와 함께 흔들면서 (1)
25. 그대와 함께 흔들면서 Rock With You (1) - 마이클 잭슨 (1979)
1421년 늦가을. 호국경 시그리드 리프트라사가 부재한 채로 소집된 의회.
시그리드가 있을 무렵 제기된, 계약직 하인의 인권 문제. 계약직 하인의 유입 폭증으로, 갑자기 인구가 사만 명을 돌파하게 된 신대륙 연합이었기에, 논의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이 논쟁에 걸린 이해관계는 더욱 복잡해져만 가고 있었다¹.
회기가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김없이 난투극이 벌어진바, 얀 지슈카와 디폴트 두 사람은 이번에도 정회를 선언하고 무력으로 이를 관철시켜야만 했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하루가 끝나고, 호국경 대리 겸 국방장관인 얀 지슈카는 내각 사람들과 함께 헤니히네 술집에 들어와 털썩 앉았다.
“처음 이곳 신대륙을 바라보았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지슈카가 외눈안경을 닦으며 한탄했다.
“원래 멀리서 흐릿하게 보이는 건 다 아름다워 보이기 마련일세. 가까이서 또렷하게 보게 되니, 전에는 그저 상상으로 아름답게 채워넣었던 근경近景이 실지로는 꽤 지저분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 게지.”
그 난투극에 책임이 적지 않은 내무장관 플레톤은, 늘 그렇듯 마치 제가 무고한 관찰자인 양 말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는지라, 근 오십여 년간 홀로 주인을 위해 일해온 지슈카의 외눈에도 노안이 찾아왔다. 보헤미아어 성경을 제 눈으로 읽기를 바랐던 지슈카는 ‘시그리드라면 어떻게 했을까’ 고민하다가 망원경을 제 외눈앞에 가져다 대었는데, 이것이 바로 안경의 시작이었다.
테노치티틀란 장인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연기나는거울 공방’이라는 이름까지 붙은 보헤미아-메시카 유리 공방. 저들도 모르는 새 베네치아보다도 더 뛰어난 유리 세공 역량을 갖추게 된 이 공방에 주문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세계 최초의 외눈안경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사는 땅이 바뀐다고 사람마저 바뀔 리는 없잖은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가을철에 함께 좋은희망에 모이곤 하는 부족의회 소속 원주민들도 똑같이 난투극을 벌였기에 자칭 문명인들이 타칭 야만인들보다 못하다는 소리는 안 나오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주문하신 술 나왔소.”
상대가 호국경이든 국방장관이든 똑같이 무뚝뚝하게 대하는 헤니히가, 뒷풀이하는 내각 사람들 앞에 술잔을 턱 내려놓았다.
정말로 ‘마사네 포도밭Martha’s Vineyard’이라 이름 붙은 섬에서 올해부터 담그기 시작한 포도주. 여름항구 어촌계 소속 연락선 편으로 막 좋은희망에 들어온 포도주는, 맥주를 게르만 야만인 풍습이라고 깔보는 플레톤 몫.
“향 좋구만.”
게르만 핏줄인 디폴트와 옌스, 슬라브계인 후스와 지슈카, 이렇게 넷은 똑같은 부데요비체 맥주를 들이켰다. 타고난 피는 달라도 맥주 사랑은 똑같았던 것이다².
“어, 시원타!”
“지슈카 경 덕분에 이런 낙이라도 느낄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그 덕에, 내각 사람들은 잠시나마 머리를 식힐 수 있었다.
“그나저나 큰일이군요. 제가 성경의 일에 몰두하고 있던 사이에 이렇게 일이 동시다발로 터질 줄은 몰랐습니다.”
눈치 없이 잠깐 머리 식히는 사이에도 꼭 일을 꺼내는 이는, 그런 눈치가 퇴화할 만큼 그간 정말로 담쟁이 대학과 롤라드파 사람들과 함께 성경 번역에 빠져 있던 얀 후스였다.
“지금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다툼만 해도 한둘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하루하루 돈벌이하는 낙으로 공직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시그리드 다음으로 ‘현대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해도 무방할 상무장관 옌스가 나서기도 전, 퇴화할 눈치도, 주책도 원래 없던 플레톤이 금방 후스에게 맞장구를 쳤다.
“헌법 가지고 드잡이질 하는 건 더 말할 것도 없고.”
시그리드가 떠나간 사이에도 신대륙의 정세는 여전히, 아니, 나날이 가속이 붙으며 급변하였다.
작년 한 해에 바다를 건너온 이민자 중 신대륙 연합 내에 정착한 이들만 일만 명을 상회했고, 그 중 열에 아홉은 독일과 북프랑스에서 온 계약직 하인이었다.
“옥수수강 쪽 농장 문제도 겹쳤지. 머릿속에 수차랑 석탄밖에 없는 테오도로스 그 작자가 거기에 기름을 부었고.”
따뜻한환영 주변의 개간할 만한 땅들은 이미 죄다 임자가 - 보헤미아인이든, 새벽땅사람들 부족이든 - 정해져 있었으므로, 야심찬 부농들은 새벽땅사람들과 합의한 끝에, 이미 주인 있는 숲과 늪이 가득한 따뜻한환영 주변 대신 옥수수 강 중류 쪽에 농장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계속된 증기선 개량으로 마침내 자신감을 얻은 테오도로스는, 옥수수강에서 증기선 상용운행을 시작하고자 예산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무리 신대륙에 지천으로 널린 게 석탄이라 해도, 그 석탄을 옥수수강 근처까지 가져오는 것은 적잖은 노동력이 필요한 일. 이미 한창 개발되고 있는 따뜻한환영 근처 무연탄 탄전에서 석탄을 옮겨오든, 탐험기사단이 옥수수강 서쪽 산속에서 발견한 역청탄을 가져오든 해야 할 텐데, 어느 쪽이든 원주민들을 고용해야 했다.
그리고 여전히 동네 사정에 따라 제각각으로 세금을 걷고 있는 실정을 감안하면, 그 세금 부담 대부분은 강 중류에 막 개간되고 있는 보헤미아인 농장들이 담당하게 될 터였다. 여름철에 사냥하는 대신 이방인들 아래서 일하는 원주민 사내들은 왐품보다는 식량을 급료로 더 선호했는데, 정작 상공업 중심지로 번영하고 있는 우애의 도시에서는 세금을 왐품으로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저 남쪽에 늘어나고 있는 다른 유럽 놈들 식민지도 계속 관찰할 필요가 있고.”
제노바가 잉글랜드와 손을 잡고 신대륙에 진출을 시도하자, 그간 팔짱 끼고 가만 있던 베네치아도 슬슬 움직이게 되었다. 투슈판 근처에서 몇 번 조우한 카스티야 배의 입 싼 선원들은, 저들이 마음대로 ‘황금반도’라 이름 붙인 유카탄 반도에 곧 식민지가 세워질 것이라 밝히곤 했다.
조금 과장하면, 온 유럽이 부의 약속에 홀려, 신대륙에 사람을 마구 밀어넣고 있는 실정. 스페인이 강력한 국력으로 신대륙을 한동안 독점했던 오지 않을 미래의 역사와 달리, 지금의 현실에서는 유럽 군주들 눈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신대륙 연합 하나만 있을 뿐. 거의 무주공산으로 여기고서 먼저 차지하는 쪽이 임자라며 달려드는 것이었다.
“원주민들도 저들끼리 싸우느라 바쁘고.”
마침내 장식품과 농기구 외 다른 용도로도 철기를 전용할 수 있을 만큼 쇠붙이를 모은 세줄기불꽃과 긴집사람들은, 저들끼리 동맹을 맺곤 서쪽의 사이 나쁜 이웃들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긴집사람들은 대단한강 유역으로, 세줄기불꽃은 위대한 호수들 서쪽의 원수 수Sioux 족이 사는 대평원으로 뻗어나갔다³.
고작해야 부족 하나에 한두 정밖에 없는 총, 서너 필에 불과할 뿐더러 정찰이나 전령 노릇에 쓰는 게 전부인 말.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도 이방인들 닿은 땅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유일한 잘못이었던 부족들을 압도하기는 충분하였다.
“아까 부족민 의회에서 주먹질 오간 것도 그 때문입니까?”
“아니, 그건 아닐 게요. 새벽땅사람들끼리 싸웠던데.”
“싸움 말리러 간 한스 부관이 진술을 받은 바로는, 보헤미아 사람들에게 농장 부지 내주는 것을 가지고 말이 많답니다.”
같은 새벽땅사람들 안에서도 이방인들과 교역하는 일에 대해서는 분명 온도차가 있었다. 부족 간에도 관점이 다르고, 또 부족 내에서도 조금씩 갈등이 드러나고 있었는데, 누군가는 이방인들에게 저들이 물든다 여기고, 누군가는 케케묵은 전통과 관습이 이방인들과의 교역으로 보다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것을 방해한다 여기기 때문이었다.
“온 세상이 갈등투성이로군. 디폴트 경이 고생이 많겠구려.”
후스가 디폴트를 걱정해주었다.
국방장관 지슈카가 호국경 대리로서 온 연합을 쏘다니는 데도 정신이 없는지라, 우애와 환영, 거래 쪽의 치안을 정비하고 보안관과 부관, 민병대를 설치하는 일은 모두 디폴트 몫이었다.
그나마 이번 행정부 들어서, 관료제라는 영 낯선 - 플레톤은 예외였다 - 제도를 정비하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옛날 저의 고향 영지에서처럼 주먹구구 행정을 고수했더라면 몸이 둘이라도 부족했으리라.
“그래도 아직껏 뭔가 큰일은 터지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않소? 헌법 제정이야, 어차피 이 사람이든 시그리드든 하루이틀 사이 될 것이라곤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고, 그리고 이런저런 진통을 겪곤 있지만 어쨌든 인구가 거의 두 배로 늘어나는 와중에도 큰 싸움까지 나진 않았잖소이까.
포도주 향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플레톤이 웬일로 희망적인 얘기를 꺼냈다.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직 시그리드라는 구심점 없이 유지될 수 있을 만큼 결속력이 탄탄한 연합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열심히 통합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 덕에 인구가 거의 두 배로 늘어나는 와중에도 아직까지 엄청난 사달이 나지는 않았으니까.
“선생께서 그렇게 낙천적인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만큼 세상을 밝게 바라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더 왈가왈부할 것도 없이 다른 안건으로 얘기가 넘어가 버리는 바람에, 누구도 플레톤의 그 말이 부정 타기 딱 좋은 소리라는 것을 지적하지 못했다.
계약직 하인 대부분은 보다 남쪽에 있는 환영이나 우애 근처의 농장으로 향했지만, 이런저런 일꾼으로 부리고자 좋은희망의 사업가 본능 그득한 이들이 데려온 일꾼도 꽤 많았다.
갈수록 혹독해지는 듯한 겨울에 지친 니놀리노 사람들이, 숲속에서 굶주리는 삶을 견디지 못하고 좋은희망에 합류하곤 했지만, 그들만으로는 인력 소요를 모두 감당할 수 없던 것이다.
그 덕에 좋은희망도 어느새 인구가 이천을 훌쩍 넘겨 삼천에 육박하고 있었고, 그만큼 정착지 규모도 커졌다. 니놀리노 사람 애덤스네 술집 근처에, 좋은희망의 세 번째 주점인 새뮤얼네 술집이 개업한 것도 그런 기반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간혹 시그리드의 측근들 눈에 띄지 않고 좋은희망에 들리기를 바라는 이들에게도 좋은 소식이었다. 애덤스네 술집을 오가는 이들 중에는 스노리 노인의 회의소 단골들이 적지 않았고, 헤니히네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여기 오신 것을 알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백송고리당 의원으로 의회에 참석했다가, 운 좋게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하루를 마친 자크 다르크. 그러나 우애의 도시를 떠날 때부터 찰싹 달라붙은 귀한 짐덩이가 한 분 계셨으니 편할 겨를이 없었다.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 알아보는 사람이 설마 있으려고요.”
콘스탄티노스 ‘짐덩이’ 드라가시스 황자가 제 수염을 쓰다듬었다. 조금이라도 어른스러워 보일 작정으로 매일같이 신경 쓰고 있는 수염이었는데, 이제는 제법 텁수룩하여 - 진짜로 수염 텁수룩한 지슈카가 보면 껄껄 웃겠지만 - 딴에는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가을은 콘스탄티노스에게는 가출의 계절. 부담스러운 플레톤도 자리를 비우고, 의원을 겸직하고 있는 로마 사람들도 함께 좋은희망으로 가기 마련이라, 그만큼 저를 만류할 사람도 없어지는 것이었다.
하여, 이번에는 자크 다르크와 함께 배 타고 좋은희망으로 왔다. 고귀한 로마의 황자이자 명목상 전제군주께서 사업 하나 같이 하자 말씀 건네시니 그만 홀랑 넘어가버린 자크 다르크는 저의 얇은 귀를 탓할 뿐이었다.
“아까 그 구드룬인가 하던 의원님은 잘만 알아보던데요.”
“흠흠, 그건 구연舊緣이 깊으니까 그런 거고... 그린란드에 머물 때 안면이 있었거든요.”
‘시그리드 누나’의 눈에 들겠다는 야심만만한 계획. 매년 수정을 거듭하는 그 계획의 최신판은, 바로 지금 우애와 환영에 불고 있는 치부致富 열풍에 올라타는 것이었다.
원주민들의 전통 염료와 그린란드의 바드말 모직물을 결합해, 언제고 시그리드가 지나가듯 언급했던- 아마 그 ‘오지 않을 미래’의 의복이리라 - 무늬가 있는 스웨터를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뭔가 그럴듯한 것을 이뤄낸다면, 시그리드도 저를 한 사람의 어엿한 성인으로 대접하지 않겠는가 하는 희망의 산물이었다.
하여, 미리 남녘정착지 모직업의 큰손인 구드룬과 연락까지 주고받으며, 지난 한 해 동안 우애의 시장에서 원주민들의 염료를 (부족한 솜씨로 손수 그린) 스웨터 도안과 함께 북쪽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온 시제품을 전달받고자, 이곳 술집 앞에서 구드룬을 만났는데, 딴에는 제법 어른스러워졌으니 누구도 쉽게 알아보지 못하리라 자신했건만,
‘앗, 황자 전하! 많이 장성하셨군요! 그래도 그때 귀여웠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다행이에요.’
자기소개를 하기도 전 구드룬이 저를 바로 알아보았던 것이다. 누가 시그리드와 동향 사람 아니랄까봐, 로마의 황제 자리 계승권을 쥔 이를 ‘귀엽다’고 부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자, 자. 그 얘기는 그만하고, 성공을 위해 한 잔 하자고요. 아저씨께서도 밑천을 보태주셨으니, 나름 같이 협력하는 사이잖아요.”
허나 어쨌든 계획의 초기 단계는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구드룬이 건네준 시제품은, 염색된 실로 어설프게나마 백송고리 모습을 구현한 ‘스웨터’. 백송고리당 당원이 아니더라도 제법 탐낼 만큼 따뜻하면서도 멋들어진 옷이었다.
“저기, 전하...”
“쉿, 여기서는 전하가 아니라 그냥 콘스탄티노스라니까요.”
“술을 드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제가 이제 나이가 몇인데요.”
가장 저렴한 녀석으로 술을 주문했다가, 그 시큼한 맛에 켁켁대는 모습을 보면 썩 설득력이 있지는 않은 주장이었다.
그때, 옆자리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이맘때 술집을 전세 내는 이들은, 새벽땅사람들이든 연합 쪽 의원들이든 가을철 의회를 위해 모여든 사람들.
자크와 콘스탄티노스가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다를까 방금 전까지 주먹다짐하던 의원들이었다. 한쪽은 백송고리당, 한쪽은 가재당.
그런데 못 잡아먹어 안달일 줄 알았건만, 시퍼렇게 멍든 눈에 피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대고 있을지언정 분위기가 썩 나쁘지는 않았다.
“아까는 미안했소. 내가 너무 흥분한 탓이오.”
“아니, 주먹 먼저 휘두른 건 이쪽이었지 않소이까.”
“의원 노릇이라는 게 쉽지 않구만.”
“그러게 말이오. 프라하 살던 때는 시의회가 하는 것 없이 거들먹거리기만 한다고 불평도 했었는데, 이럴 줄은 몰랐구려. 책임감이라는 게 참 무섭소.”
점점 신대륙에 일군 기반이 늘어나면서, 그것에 얽힌 이해관계는 나날이 두텁게 쌓여갔다.
맨 처음 임시의회가 소집될 때만 해도, 그냥 적당히 가서 높으신 분들 말씀 듣고, 저들 생각이나 마을 사람들 떠드는 말을 슬쩍 전하면 된다고 여겼지만, 그 이후로 벌써 몇 년이 흘렀던가.
이제는 다들 잃을 게 많아졌고, 그러므로 사석에서야 형님 아우 하더라도 공식 석상에서는 논쟁을 벌이고 주먹다짐까지 하기도 했다.
“사실 후스 선생님이나 지슈카 장관 같은 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목소리를 내주셔야 하는데... 뭐, 요새 눈코뜰 새 없이 바쁘시니 이해는 하지만.”
“우리 당도 마찬가지요. 물론 시그리드 아씨야 훌륭한 분이고, 플레톤 선생도 - 나야 잘 모르지만 - 배운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위대한 지성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 뜻에 귀를 기울여주느냐 하면 그건 좀...”
“그분들이라고 모든 일을 다 관할할 수는 없잖소. 우리가 목소리를 내야지. 이 헌법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소이까? 응원을 할 거면 확실하게 응원을 하고, 반대를 하려면 확실하게 대안을 내세워야지.”
어설프게 만든 나무잔 한쪽에서 술만 새는 게 아니라, 이야기도 다른 쪽으로 새기 시작했다.
“반대를 위한 대안이라? 반대 자체가 대안이었단 말이오. 애초에 헌법이라는 게 무어요? 유럽에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인데.”
결국 누군가가 다시 떡밥을 던지고,
“아니, 이런 데서까지 정치 얘기를 해야 하나...”
살짝 질린 듯한 목소리는 금방 묻히고,
“그래. 말 잘 했소! 그때그때 합의해서 서로 조율하면 그만이지. 그러려고 시그리드 각하께서 의회랑 행정부를 만든 것 아니오? 헌법을 세운다면서 사사건건 우리네 사정에 참견하려고 하니 아직껏 싸움이 이어지는 것 아니오.”
“거 아까 하던 헛소리를 이렇게 이어갈 작정이시오? 그 ‘그때그때 합의한다’라는 게 말이 그럴듯하지, 우리 신대륙 사정에 어떻게 그때그때 모인다는 말이오? 딱 큰 원칙을 정해 놓아야, 누구도 볼멘소리 하지 않고 잘 다스릴 수 있는 것이지.”
“다스린다? 누가 누굴 다스린다는 말인가? 우리 모두를 다스리는 법은, 성경 딱 하나면 충분하다!”
“암, 그게 바로 자유지. 우리 모두는 자유롭게 태어났고, 자유롭게 이 땅을 일구면서 살아갈 권리가 있단 말이오.”
그사이 신대륙 언중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된 단어 몇몇을 짜깁기하여, 술에 취한 것치곤 나름 그럴듯한 논리를 개진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재산을 축적할 자유를 포함하는 보헤미아인들의 자유와, 보헤미아인들을 뜯어먹을 공정을 포함한 독일인들의 평등은, 취중진담으로 토론 벌이기에는 너무나 감정싸움으로 치닫기 좋은 주제였다.
“플레톤 선생 말씀하시기를, 농사짓는 자는 모두 땅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하셨소. 자유를 말하는 댁은 그 많은 농노들을 거느리고서 열심히 자유를 전파하고 계시오? 옥수수강 주변 농장 태반이 댁이랑 댁 이웃들 것이라는 걸, 저 아나왁 사람들도 알 게요!”
따뜻한환영의 보헤미아인들 중에는, 저들이 독일인을 사실상 농노로 부리고 있다는 데 대하여 차마 말할 수 없는 저열한 만족감을 느끼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비판한다지만, 실제로는 그저 저들보다 더 많은 농노를 거느리고 있는 것을 질투하는 독일인 개척민들도 많았다.
“어이고, 마치 저들은 안 하는 것처럼 말하는구만?”
“우리 독일인들은 댁들 보헤미아 사람들만큼은 안 해먹지. 암.”
“말 똑바로 하시오. 그대들은 우리보다 덜 부지런해서 농노, 아차, 하인을 우리만큼 못 부리는 것뿐이오.”
“뭐? 잘한 것이라곤 시그리드 그이 덕을 먼저 본 것 하나뿐인 주제에?”
이대로라면 또 주먹질이 오갈 듯하였다. 아니, 주먹질만 오가면 다행이지, 다들 술이 들어간 상태에서는 더 심한 일도 터질 수 있으리라.
정의감에 불타는 콘스탄티노스 황자가, 참지 못하고 중재에 나선 것은 그때였다.
“그만들 하시지요.”
‘뭐? 어디서 굴러들어온 녀석이...’ 같은 반응을 기대한 콘스탄티노스는 미리 소개 아닌 자기소개를 했다.
“흠흠, 지나가던 길손인데, 차마 가만 있지 못하여 이렇게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아니, 황자님께서 여기는 무슨 일로...”
“예? 황자라뇨? 어디요?”
“전하, 포기하십시오. 이미 들통은 다 난 것 같습니다.”
애써 둘러대려던 콘스탄티노스는, 자크 다르크의 충언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번 뽑아든 칼을 그대로 자루에 집어넣을 수는 없는 법. 잠깐의 머쓱함을 흘려보내곤, 지금껏 배운 수사학과 논리학, 그리고 수사학과 논리학을 공부해야 할 시간에 딴청 피우며 한 생각들을 담아 황자는 입을 열었다.
“헌법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두를 위한 자유도, 모두를 위한 평등도 결국 달성할 수 없는 목표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중 최대한 다수에게 공정하고도 행복한 삶을 보장하려는 노력에 가치가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상공인들과 농민들. 대지주와 자영농.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지요. 환영의 보헤미아인들과 우애의 독일인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수는, 아예 갈라서는 것 외에는 없을 겁니다.”
언제고 시그리드가 들려주었던 링컨이라는 황제의 명언을 떠올리며, 황자는 말을 이었다.
“‘분열된 집은 설 수 없는 법’이라고도 하지요. 우리가 서로 갈라설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화합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열심히 내전을 벌인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 딱 하나만 남아버린 제국의 후예로서, 절절이 마음에 닿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저기, 황자님...”
“엥?”
그러던 중 자크 다르크가 소매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콘스탄티노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보니, 의원들은 콘스탄티노스의 발언 앞부분만 싹 잘라서 듣고 뒤이은 얘기는 한 귀로 흘린 모양이었다.
“거 옳은 말씀이십니다!”
“맞아! 그냥 갈라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군!”
“이제 각각 기반도 충분히 마련했겠다, 굳이 하나로 뭉쳐서 모든 것을 함께할 필요도 없지. 보헤미아인들은 보헤미아인대로, 독일인들은 독일인대로, 서로 동맹만 유지한 채 따로 살면 그만 아니겠는가?”
“그렇지. 암. 어디 영주님들만 영지를 가를 수 있다는 법이 있나. 이 신대륙에서는 우리 하나하나가 다 영주님과 같은데 말이야.”
동로마에서는 내전이라 부르는 것을, 신성로마제국과 여타 서유럽에서는 평범한 상속이라 부르곤 했다. (둘 다 혈육간에 일상적으로 벌어진다는 점에서는 똑같았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둘 다 로마의 이름값을 하고는 있는 셈이었다.)
영주들도 형제들 싸움을 막기 위해 영지를 분할상속하는데, 애초에 생판 다른 민족끼리 넘어온 입장에서 굳이 한 나라 안에 묶여 있겠다고 이렇게 복닥복닥 다툴 것도 없지 않겠는가?
어쨌든 술집 안이 다시금 화해와 통합(아님)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으므로, 몇 번 화제를 돌려보려던 콘스탄티노스 황자는 결국 포기하고야 말았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술자리에서 오간 이야기가 술집 문지방을 넘겠습니까?”
자크 다르크가 저도 딱히 그리 되리라 믿지는 않는 위안을 건네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나는 끝났다. 끝났어...”
또 한 번 가출을 들킨 탓에, 수염 텁수룩하니 길러놓고서 ‘황궁’에서 꼼짝없이 보충수업을 받고 있던 황자는 절망에 고개를 떨구었다.
“다툴 바에야 갈라서자!”
“우애는 우애대로, 환영은 환영대로, 희망은 희망대로!”
콘스탄티노스 황자의 ‘취중진담’과 그 속에 어린 지혜는, 행정부 사람들이 손 쓸 사이도 없이 연합 전역에 퍼져버렸다.
물론 아예 떨어져나가 버린다면, 그린란드 회사를 통한 교역의 이익을 예전만큼 받지는 못할 것이었다. 허나 이미 이쪽 신대륙 해안에 기반도 충분히 잡았겠다, 자급자족도 거의 가능하게 되었겠다, 굳이 한 나라로 묶여 있기보다는 따로 평화롭게 이웃처럼 지내는 쪽이 더 속은 편하지 않겠는가?
“시그리드가 돌아오면 어쩌지요?”
“스스로 성인이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른답게 책임을 지시지요.”
플레톤이 쓴웃음을 지으며 제 제자를 놀렸다.
“그 전까지 이 열풍이 스스로 가라앉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딱 그때, 열린 창문으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속보! 속보입니다! 호국경 시그리드 각하께서 사절들과 함께 아카풀코에 도착! 카타이 황제가 내린 귀한 선물과 함께 귀국했답니다!
리옹이나 밀라노의 비단은 헝겊처럼 보이게 하는 비단이 산더미에,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금은보화는 목록이 책 한 권을 족히 이룰 법하답니다!”
막 들어온 배편으로 전해진 뜨끈뜨끈한 소식이었다.
“아니, 잠깐. 정말로 카타이가 서쪽에 있었다고?”
“비단에, 금은보화까지?”
“그, 일단은 같은 신대륙 연합으로서 시그리드 각하의 귀환을 환영하는 쪽이 좋지 않을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시적으로나마 연합에 남아 있을 때의 이익이 떠났을 때의 속편함을 추월함으로써, 잠시나마 갈라서자는 말이 쏙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 머릿속에 한 번 들어간 생각이 지워질 리는 없었으므로, 콘스탄티노스의 한숨 소리가 우애의 거리를 메우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또 코레아라는 나라의 왕자 한 명과 그 나라 사절단도 데리고 귀환하셨답니다!”
‘왕자’ 소리에 한층 더 깊어지는 한숨이었다.
1422년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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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 역사에서 17세기 중반에 절정에 달했던 사회적 혼란은, 싸게 굴릴 수 있는 노동력이 필요했던 잉글랜드인 식민지 개척자들에게는 큰 기회로 작용했습니다. 예컨대 1655년 한 해 동안 영국 제도 전체에서 바베이도스Barbados 섬으로 이주한 - 대부분은 계약직 하인 신분 - 백인 인구는 2만 3천명에 달했지요. 반면 그런 혼란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을 뿐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노동력을 충당할 수 있었던 스페인령 중남미의 경우 인구 유입이 더뎠는데, 16세기 기준으로 1년에 평균 2~3천명 정도가 유입되었던 것으로 추산됩니다.
작중의 신대륙 연합은, 여러 사유로 유럽에서 자발적으로 넘어온 이들이 이민의 주축을 이루었던 시기에서, 계약직 하인 유입이 시작되는 시기로 이행하는 중입니다. 작중의 인구 폭등도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겠습니다.
2. ‘독일’이라는 국가가 생기기 한참 전부터 독일인이라는 민족의식이 원시적 형태로나마 공유되고 있었듯, 슬라브인이라는 인식 역시 민족주의가 대두되기 한참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게르만인들과 꾸준히 접촉하며 자의식을 가지지 않기가 어려웠던 체코, 폴란드 등 서슬라브계 민족들은 더욱 그러했지요. 실제로 후스 전쟁 말기, 후스파 용병들이 폴란드 국왕 요가일라의 편에 참전하여 북독일을 불태웠을 때,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모두 이를 같은 민족끼리의 동질의식으로 인한 것이라고 서술하곤 했습니다.
3. 이전에 잠깐 지나가듯 언급된 수 족은, 다코타 족과 라코타 족 등 여러 부족의 연합입니다. 오대호 남서쪽 대평원에서 유목민으로 살아가던 이들은, 반농반목의 생활을 영위하던 포타와토미 족과 오지브웨 족과는 원수 사이였지요. ‘수’라는 명칭은 오지브웨어 멸칭 ‘새끼 뱀 같은 놈들Nadowessiwag’이 프랑스어를 거치면서 축약된 것일 가능성이 유력합니다.
수 족은 대략 14세기 초엽에 세줄기불꽃과 유사한 부족 연맹인 일곱모닥불 연맹Ochethi Sakowing을 구축했고, 18세기 초에는 오대호까지 진출한 프랑스인들과 교역하며 말과 총기를 습득합니다. 대평원에서 유목 및 수렵 생활을 하던 이들에게 말과 총은 날개를 달아준 것과 같은 격이었고, 이는 훗날 수 족이 1876년 리틀 빅 혼 전투에서 미군을 전멸시키는 등 격렬하게 저항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