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109화 (109/116)

그대와 함께 흔들면서 (2)

25. 그대와 함께 흔들면서 Rock With You (2)

황제의 무수한 하사품과 그보다 많이 빈약한 조선 쪽의 선물, 그리고 짐덩이 하나와 함께 조선을 출발한 시그리드 일행은, 도중에 태풍을 한 번 마주친 것 외에는 - 그나마 욘이 가르쳐준 기상학 기초 상식 덕에 무사히 피했다- 큰 탈 없이 아카풀코에 닿았다.

곧 저들의 일자리가 그 수레라는 물건에 밀려 사라질 것을 들었던 메시카인 일꾼들은, 어떻게든 끝물 장사로 카카오 콩 하나라도 더 벌 작정으로 열심히 짐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사절단은 처음 출발할 때의 역순으로 길을 돌아가며 하나씩 헤어졌는데, 의외로 그 와중에 끝까지 시그리드 곁에 찰싹 달라붙은 자가 있으니 바로 조선국 폐세자 양녕대군 이제였다.

“조선에서는 천덕꾸러기였던 이 사람이, 이곳 별세상에서는 귀인으로 대접받으니 어찌 좋지 않겠소?”

투슈판을 떠나 북쪽으로 향하는 바닷길. 양녕이 저와 한배를 탄 - 말 그대로 - 황희에게 거들먹거렸다.

양녕은 평소 하라는 글공부는 하지 않고 사냥을 비롯한 유흥만을 즐겼기에 말을 제법 잘 탔다. 물론 작정하고 기마술을 수련한 무관들에 비하는 것은 실례요, 고작해야 시그리드보다 조금 더 잘 타는 정도였지만, 그것만 해도 신대륙에서는 가장 승마에 능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네사왈코요틀로 인해 말타기가 유행하게 된 아나왁이었기에, 귀족들은 하나같이 양녕에게 승마 솜씨를 보여달라 하였고, 마상재까지 할 것도 없이 말 달리다가 등 돌려 활 쏘는 것만 보여줘도 다들 고려 귀인을 칭송하곤 하였다.

“더구나 그 고려, 고려 소리를 듣고서 그 까닭을 궁구하여, 사직에 크나큰 공을 세울 방법까지 찾았으니, 한 번 조선 땅을 다시 밟게 되면 그 누구도 이 사람을 괄목상대하지 않을 수 없을 테요.”

시그리드야 고려와 조선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워낙 ‘Osan, South Korea’를 자주들었다 보니 종종 ‘코리아’라는 말을 섞어 쓰곤 했고, 더구나 정화를 따라왔던 명나라 사람들도 죄다 고려를 고려라고 부르지 조선이라고는 잘 칭하지 않았다.

물정 모르는 오랑캐들이야 그렇다 쳐도, 중국 사람들마저 그러고 있으니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었다. 하여, 한 번은 황희가 정화에게 따져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나오는 답은 기절초풍하기에 족하였다.

‘듣자하니 구라파 땅은 국성國姓이 바뀌어도 나라 이름은 그대로 유지한다 합디다. 그러니 공이 이해하시기 바라오. 더구나 강헌왕(태조 이성계)은 고려 배신陪臣 이인임의 아들이니, 사실 고려나 조선이나 거기서 거기 아니겠소이까?’

이로써 아직도 명나라 내에 그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퍼져 있음을 알았으니, 어떻게든 양녕이 돌아가서 이 사실을 제보할 수만 있다면 사직에 큰 공을 세우는 셈이었다¹.

“헌데 나리께서 그리 여기시는 것과, 지금 이곳까지 저희를 따라오신 것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이 늙은이는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 그야,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니 마땅히 귀하게 여겨야 해서...”

시그리드가 테노치티틀란에서 며칠 머물면서, 그간 쌓인 삼각동맹 관련 사안들을 논의하는 동안, 양녕은 정화에 대한 충심으로 아직껏 그 곁을 지키던 (감시역 겸 통역) 하산과 함께 실컷 호숫가 주변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유흥을 즐겼다.

‘어, 경치 좋다. 그런데 이 누각의 층계는 왜 이리도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오?’

모든 게 참으로 흥겨웠다. 묻지 말았어야 할 질문을 끝내 묻기 전까지는.

‘아, 그것이...’

자신이 밟고 선 신전에서 벌어졌던 인신공양 얘기를 듣고 경악한 양녕대군에게, 딴에는 변명한답시고 하는 말이 더 살벌했다.

‘허나 틀라콰나틀록의 진리를 깨우친 뒤로는, 그러한 무도한 짓은 하지 않고 오로지 경건하고도 유익한 자해 공양만을 하고 있답니다.’

이미 돼지와 닭은 퍼질 대로 퍼져 있는 아나왁 땅. 그러나 틀라콰나틀록을 따르는 이들은 이 새로운 가축들을 제물로 바치지는 않고 있었다.

멀쩡한 돼지를 제물로 바치느니, 그 맛난 고기를 먹고 힘을 기른 다음 제 피를 바치는 것이 사람도 즐겁고 신도 좋은 일이었다. 종종 시그리드를 따라 아나왁을 들리던 콜그림이 생각해보아도 그럴듯한 논리였고, 아무리 세상의 파멸을 바란다지만 그렇다고 지금껏 해 왔던 모든 의식을 폐하기는 영 심심하고 께름칙했던 이들도 만족할 만한 결론이었다².

그제야 도시 곳곳에서 경건하게 자해 의식을 치르며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양녕이야, 정신이 퍼뜩 들며 온몸을 덜덜 떨게 되었지만. 서씨의 미모고, 이 땅에서의 유흥이고, 일단 제 목숨이 붙어 있어야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양이들이 망령된 무속에 취한 것을 보고 두려운 나머지, 그나마 말 통하는 이들과 함께하고자 하신 게로군요.”

다른 조선 사람들 눈치를 볼 일이 없게 되면서, 황희는 간혹 저도 깜짝 놀랄 만큼 그 깐깐한 성격이 곧이곧대로 나오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그럴 리가 있겠소? 어디까지나 효행에 마음을 두었을 뿐이외다.”

황희가 정확히 제 속마음을 간파한 데 놀란 양녕은 애써 둘러대었다. 그러나 학문이 짧고 덕행은 더욱 짧았으니, 설령 그 입 안에 장의張儀의 세 치 혀가 들어있다 한들 황희를 설득하진 못했으리라.

“어찌 나리께서 소신과 함께하고자 하시는 것까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허나 서씨 말마따나, 이곳 땅은 사람은 적고 할 일은 많으니, 귀인조차도 힘들여 일하지 아니하면 결코 귀하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곳의 제이諸夷를 살피며, 그 풍속 중 교화할 것과 우리가 외려 취해야 할 만한 것을 가리십시오. 대군 나리의 어마馭馬 재주가 실로 양이들을 찬탄케 하고 있으니, 나리께서 작정만 하신다면 그들 사이를 오가며 그 정사와 풍속을 살피기는 용이할 것입니다.”

장영실이 그 증기기관 만드는 재주 배우기를 바라므로, 황희도 신대륙 연합의 사정을 살필 겸 시그리드와 함께 북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시그리드도 딱히 이들을 막을 생각은 없었는지, 투슈판을 떠난 이래 아직껏 그들의 존재나 의도를 문제삼지는 않고 있었다.

‘아마 우리를 경계하기에는 다른 일로 바쁜 것이겠지.’

조금은 풀이 죽은 채 선창으로 돌아가는 양녕대군. 그 반대편 이물 쪽에 선 시그리드는 계속 북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주상께서는 태평양 너머 오랑캐들의 인명과 지명을 최대한 그 음을 따서 기록해두라 하시었다. ‘서씨’가 아니라 ‘시그리드’인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대강大江(미시시피 강)이라 부른다는 큰 강. 그곳의 수운이 통한지라, 자잘하게 사람이나 화물 옮기는 일은 조금씩 그쪽 강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였다. 해운을 모두 대체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몇 년 내로 얘기가 달라지리라.

그리고 그런 수운을 통해 시그리드의 도착 소식이 전해졌듯, 그간 밀린 신대륙 연합 소식도 강을 수시로 오가는 배편을 통해 투슈판으로 전해졌다.

그사이 성경 번역은 알차게 성과를 내고 있었으나, 유럽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 추진하던 헌법 제정은 엉뚱하게도 몇몇 정착지의 분리독립 이야기로 흘러가버리고야 말았다던가.

‘기름과 물은 섞이지 않고, 화이華夷의 구분도 엄정할진대, 그 많은 족속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한 일이 아니었는가.’

비유하자면. 조선 사람과 여진 오랑캐, 달단 말예末裔에 왜인들까지 하나로 묶어 나라를 세우려 한 것과 같은 처사였다. 강을 건너야 할 때는 오월동주吳越同舟도 가한 일이라지만, 강을 다 건넌 판에야 굳이 함께 지낼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아마 서씨, 아니, 시그리드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울타리 바깥의 원주민을 두려워하며 웅크리고 있던 것도, 개척 초기 굶주림에 시달리며 바다 건너오는 배만을 기다리던 것도 이제는 옛일임을.

그러던 와중, 이제 헌법이라는 근본 법도를 세워 모두를 다스리는 이치로 삼겠다 하니, 다투는 것도 당연지사. 화하華夏 없이 오랑캐끼리만 법도를 세우고자 한다면, 당연히 각각의 오랑캐마다 저들의 법도를 따르자며 우격다짐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도성을 떠나 남쪽 바다로 항해하던 때부터 시그리드가 뭔가 깊은 고민에 잠겨 있던 것도 이를 미리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우애다! 우애에 도착했다!”

높다란 돛대 위에서 그 망원경이란 기물로 좌우를 살피던 이의 외침이, 딱 그때를 맞춘 듯 갑판에 울려퍼졌다.

자신의 예산 요청이 이 모든 분열과 대립에 한몫 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오도로스는 기어이 옥수수 강 증기선 운행을 시작했다.

‘아직 재원도 확보되지 않았는데, 석탄 옮겨오는 운임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당분간은 운임으로 충당해야지, 뭐. 타고 싶은 사람은 비싼 돈 내고 탈 테고, 싫은 사람은 안 타겠지. 어느 쪽이든, 수운의 혜택은 혜택대로 보면서 세금 한 푼 안 보태려고 하는 보헤미아 수전노들을 욕할 테고.’

몇몇 로마 사람들은 베네치아 놈들이나 떠올릴 법한 갈라치기 발상이라고 혀를 찼지만, 애초에 그 베네치아가 원래 동로마의 속주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누워서 침 뱉기였다.

그런데 그저 신기한 경험이라 생각하며 왐품 들고 찾아오는 근처 원주민 추장들을 비롯해 승객 수요가 꽤 있었던지라, 아직까지는 의외로 잘 운영되고 있었다.

털털거리며 강을 뽈뽈 거슬러 올라가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쿵’ 소리와 함께 멈춰서곤 하는 증기선. 그것을 구경하는 것도 우애의 도시 꼬마들에겐 나름의 재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강둑에 앉아 뭔가를 골똘히 궁리하는 콘스탄티노스 황자야, 그런 구경하는 재미 따위 알 바 아니었지만.

“헷, 황자님도 결국 마음만은 여전히 어린아이였구나.”

나뭇가지로 뭔가를 그리며 궁리하던 콘스탄티노스 등 뒤에서 익숙한 여자아이 목소리가 났다. 다르크 집안의 말괄량이 잔이었다. 아버지 자크가 ‘귀하신 분께 무슨 무례냐’ 하며 벌벌 떠는 것을 퍽 즐겼던지라, 잔은 콘스탄티노스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뭔 소리야? 내가 증기선 구경하러 온 걸로 보이니?”

콘스탄티노스도 지금은 귀한 핏줄에 어울리는 귀한 대접 받기를 절반 넘게 포기하였으므로, 그런 무례한 잔을 그럭저럭 봐주고 있었다. 어쨌든 자크 아저씨는 중요한 사업 파트너요, 물주 겸 공범이었으니까.

“그럼 뭔데요?”

잔도 그런 심리를 아는지, 이렇게 딱 문제삼기 애매한 선에서 존대와 평대를 섞어 쓰곤 했다.

“그런 게 있다. 어른들만 아는 그런 고민거리야.”

“아, 사고 친 것 수습하려고 고민하는 중이셨구나! 아닌 게 아니라 다들 곧 시그리드 각하께서 돌아오신다고들 하더라고요,. 아아, 사랑의 어려움이란!”

“네가 뭘 안다고.”

“우리 프랑스 사람들만큼 사랑을 잘 아는 사람도 없걸랑요.”

맹랑한 꼬마아이 한 대 때리려다가, 차마 로마의 황자로서 어린 여자아이 때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재차 관두는 콘스탄티노스였다. (저보다 한참 어린 잔이 이미 저와 덩치가 비슷하다던가, 괴력으로 소문이 자자하다던가 하는 것과는 일말의 상관이 없는, 순수한 자제와 관용의 산물이었다. 아무튼 그랬다³.)

“좀 저리 가지 않으련?”

“피. 안 도와줄 거야.”

살짝 짜증이 난 황자가 언성을 조금 높였다고 금방 토라지는 잔이었다.

헌데 그렇게 사라지는 줄 알았던 녀석이, 어지간히 심심했는지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오는 것이었다.

“심숙사고 끝에 황자님을 도와드리기로 했어요. 시그리드 각하는 멋지잖아요. 멋진 사람이 고생하는 건 싫어요.”

그러면서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끄적거리던 곳을 피해 옆에 털썩 앉는 것 아닌가.

“심숙사고가 아니라 심사숙고다. 사고뭉치같으니라고.”

“그거나 그거나. 아무튼 저도 대충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다 알거든요?”

“네가?”

“우리 아버지께서도 맨날 어른들만 아는 고민거리라고 하시다가도, 채근하고 채근하다 보면 결국 제게 다 말씀해주시거든요.”

바닥에 그려진 것은, 신대륙 연합을 어설프게 그려놓은 지도였다.

우애에서 좋은거래까지 대충 정북쪽으로 향하는 옥수수 강. 좋은거래에서 대충 동쪽으로 흘러나가는 교역의 강, 그리고 교역의 강에서 개척만까지 가면 나오는 좋은희망과 그 주변 정착지들. 좋은희망에서 바닷길 따라 우애로 오는 도중에 있는 따뜻한환영.

그리고, 이번 사태의 원인 중 하나인, 따뜻한환영 사람들이 옥수수 강 중류에 세우고 있는 농장들.

새벽땅사람들과의 합의에 따라, 앞으로의 정착지들은 모두 강 남쪽에 세워져야만 했다. 그러나 합의는 연합 국민들이 개별적으로 새벽땅사람들 부족들과 계약을 맺고 소유권을 양도받는 경우까지 금지하고 있지는 않았고, 그 허점을 이용해 야심찬 보헤미아인들은 농장을 꾸렸다.

새벽땅사람들 입장에서도, 그냥 땅을 묵히는 것보다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고 대가를 받아내는 쪽이 이익이었다. 적어도, 보헤미아인들에게 농장 부지를 넘긴 부족 추장들이나 유력자들은 그렇게 주장했다. 이로 말미암아 아직도 부족들 내에서 갈등이 이어지곤 했는데, (아직까진) 연합 차원에서 대응이 필요할 만큼 크게 번지지는 않았더랬다.

“시그리드 각하가 보물을 이만치 싸들고 돌아오신다는 얘기가 나오자마자 갈라서자는 말도 쏙 들어갔잖아요.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보물을 싸들고 오면 되는 것 아닐까요?

남남으로 갈라서는 것도 좋다. 하지만 갈라서게 되면 이런 보물들의 혜택을 옛날만큼 받지 못할 텐데, 그래도 좋겠냐. 이렇게 딱 대놓고 물어보는 거죠.”

제 앞에 전술과 전략의 귀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볼 리 없는 황자는, 어린아이 생각이라고 - 저도 사실 그렇게 머리 굵진 않았으면서 -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고 하였다.

“시그리드 각하한테, 지금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도 더 분발해서 황금을 많이 가져다 주십시오. 이렇게 말씀드리라고? 퍽이나 도움이 되겠다.”

“그럼 반대로 하면 되죠. 갈라서는 건 좋은데, 그러려면 지금까지 우리한테 받은 개척 밑천을 죄다 뱉어내라. 이렇게요.”

어린아이의 서투른 표현 이면을 살피면, 독립으로 인해 발생할 경제적 이득 혹은 손실을 강조하여 독립 여론을 억누른다는, 원론적으로는 제법 그럴듯한 생각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걸 우리 입으로 꺼내면, 싸우자는 소리밖에 더 되겠냐.”

“그런가?”

남의 속이 타건 말건 고개 갸우뚱하며 태평하게 ‘그런가’ 소리를 하고 있으니, 어지간하면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잔과 대화하던 중 뭔가가 떠오른 황자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잠깐, 그러면 우리가 직접 그 얘기를 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어디... 흠...”

“뭔데요? 저도 알려줘요.”

허나 잔네 아버지와 함께 좋은희망 술집에서 입 함부로 놀렸다가 이 사달이 났다는 것을 또렷이 기억하는 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함부로 이런 얘기 했다가 곤경 처하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한 걸.”

“흥.”

“대신 장날에 팝콘이라도 한 사발 사 줄게.”

“그걸론 부족한데요.”

“네 도움 받았다고 꼭 시그리드 각하한테도 전해드릴게.”

그러자 언제 퉁명스레 콧방귀 뀌었냐는 듯, 반색하는 잔이었다.

“정말요? 약속한 거예요?”

이번에도 자신이 어떤 풍파를 일으킬 지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콘스탄티노스는 시그리드 앞에서 궁색한 변명 대신 할 말이 생겼다는 데만 기뻐하였다.

시그리드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얀 지슈카 이하 내각 사람들은 모두 우애의 도시로 모여들었다.

의원들도 어지간히 바쁜 일이 없는 한은 다들 먼길 다녀온 호국경을 맞이하는 자리에 참석했는데, 언제 그토록 갈라서자 역설했냐는 듯, 배에서 끝없이 나오는 금은보화를 보며 눈 초롱초롱한 채 ‘우리는 하나’를 온몸으로 외쳤다.

그런가 하면, 엄연히 이 도시의 공동 전제군주인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도 환영회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각하.”

“장관께서도 고생하셨어요. 외눈안경 멋지네요.”

공식 석상인지라 정중하게 시그리드를 맞이한 얀 지슈카가, 내각 사람들을 대표하여 인사를 건네었다.

물론 말이 공식 석상이지, 의전이고 뭣이고 챙길 사람도 없고 지킬 체통도 딱히 없던 환영회라, 오래지 않아 ‘연회장’ - 자줏빛 대로와 장벽 거리가 교차하는 광장 - 은 돌아온 사람들과 그들 기다렸던 사람들끼리 회포 푸는 자유로운 자리로 변하였다.

정화가 신대륙 연합에 포로로 잡혀 있던 시절, ‘콘퓨셔스’를 따르는 철학자들 이야기를 들었던 플레톤은 시그리드에게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곤 금방 황희를 찾아갔고, 황자는 이때다 싶어서 시그리드를 찾아갔다.

맥주잔 기울이는 지슈카와 스베인, 콜그림. 그 곁에는, 옌스(연회 비용 정산 담당)에게 조선 왕자가 술 많이 먹지 못하게 유의해 달라고 귀띔하고 있는 시그리드가 있었다.

“그,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앗, 황자님. 오랜만이에요. 많이 어른스러워지셨네요.”

올라가는 입꼬리를 부여잡으며, 황자는 한숨을 크게 들이켰다.

“실은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저의 잘못을 이실직고하고, 어떻게든 그 수습을 하려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잔의 도움으로 뭔가 그럴듯한 대책을 떠올렸노라 밝혔다.

“... 그러니까, 우리가 갈라섰을 때 발생할 비용에 대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자는 거지요. 이걸 어떻게 할지는 아직 확실히 감을 잡지 못했는데요...”

“잠깐만요.”

표정이 바뀐 시그리드는, 금방 지슈카와 플레톤을 불러오고, 옌스와 디폴트까지 끌고 왔다.

황자는 즉석에서 열린 내각 회의에 당황하면서도, 앞서 시그리드에게 건네었던 말을 다시금 풀어놓았다.

“어, 그러니까... 지금은 잠깐 갈라서자는 여론이 잦아들긴 했지만, 다들 마음속에는 그 생각을 계속 품고 있는 상태잖아요.”

한 번 떠올린 생각은 쉽게 잊을 수 없는 법. 지금은 보헤미아 사람들이나 독일 사람들이나, 다 엇비슷하게 분리독립을 괜찮은 발상이라 여기고 있었다.

물론 정말로 남남이 되기를 바란다기보다는, 신성로마제국 아래의 영방들이 분할되는 것처럼, 몇 가지 원리원칙 하에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쪽에 가까웠다.

“다른 나라와 교역을 한다던가, 무력을 쓴다던가 하는 것 정도까지는 연합 전체의 몫으로 남겨놓되, 그 이하의 모든 법령이나 제도, 재정 등등은 알아서 하기를 원한다는 게 중론인 것 같더라고요. 제가 제 입으로 말하기는 무엇하지만요.”

분리독립 타령의 근원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던 - 암만 좋은희망의 인구가 늘어났다고 하지만, 그래봐야 유럽 기준으로는 아직 소도시 수준 아니던가 - 장관들이 저를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애써 견뎌내며 황자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주장을 펼치려면 당연히 대가를 감수해야겠지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그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제도와 법률의 구애를 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갈라서기를 바란다면, 그만큼 불편을 감수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자는 게 제 대책의 대강이랍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이루시렵니까?”

황자의 교육 담당이기도 한 플레톤이 앞장서서 물었다.

“이 사태가 불거지게 된 한 가지 원인은, 보헤미아 사람들의 농장이 곳곳에 생긴 탓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 농장을 건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보헤미아의 야심찬 농부들이, 지주가 되어보겠노라며 하인들을 부려 꾸리고 있는 농장. 보헤미아인들은 그것이 저들의 권리라 여기고, 독일인들은 그들이 권리만큼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여기곤 했으므로, 콘스탄티노스 황자가 아니었더라도 언제고 갈라서자는 말은 나왔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 농장 대부분은 보헤미아 사람들이 새벽땅사람들 영역에 꾸린 농장이란 말이지요.”

“그렇지요. 당장 옥수수 강 유역만 하더라도 그렇고요.”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연합을 드나들 수 있다면, 꼭 유럽 출신들만 거기 해당하리라는 법은 없지 않겠어요?”

당연히 따뜻한환영 사람들은, 저들이 환영 주州로 떨어져 나간다면 그들이 꾸린 농장도 함께 따라오리라 여기고 있겠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껏 딱히 구획 없이 잘 지내고 있던 연합에, 그저 그 땅의 주민들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구획을 그을 수 있다면, 환영 사람들보다 먼저 이곳에 살던 새벽땅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새벽땅사람들이 우리 연합에 가입해서, 저들 또한 하나의 주로서 권리를 주장하며 보헤미아인 농장에 대한 주권을 주장할 수도 있다는 풍문을 흘리는 거예요. 다들 그런 가능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딱히 생각하려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 풍문을 누가 흘린다는 말씀이십니까?”

“사실 거기서 막혀 있긴 한데요...”

점점 자신이 붙어가며 열띄게 제 구상을 설명하던 황자의 목소리가, 플레톤의 딴지 한 번에 도로 힘을 잃었다.

잠깐 멈춰 있던 논의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은, 들으면서 가만히 생각하던 시그리드의 말 한 마디 덕분이었다.

“그, 양녕대군 그이가 이 주변을 구경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긴 했는데요. 그 편으로 이야기를 흘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양녕대군 이제의 신나는 마상재 공연 일정이 새벽땅사람들 마을 곳곳에서 잡히게 되었다.

이왕 돌아다니는 김에, 아무 생각 없이 흘리는 것처럼,

‘그런데 그대들은 이렇게도 연합 사람들과 교류를 많이 하는데, 아예 연합의 일원이 될 생각은 아니 해보셨소?’

라는 말을 여기저기 하고 다니라는 시그리드의 지시와 함께.

양녕대군은 별 생각 없이 사는 게 오래토록 버릇이 되었던지라, 그렇게 어렵지 않게 그 지시에 따르게 되었다. 제가 흘리는 말을 들은 원주민들의 눈빛이 달라지곤 했지만, 양녕대군이 알 바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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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말, 이성계와 대립하던 윤이와 이초라는 두 고려 사람이 명으로 망명하여 이성계를 모함한 일이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권신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가 고려의 왕 네 명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말도 있었는데, 이것이 그대로 명의 법전 겸 행정백서인『대명회전』에 들어가 버리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미 조선은 태종 초부터 이 문제를 인지하고 지속적으로 수정을 요구했는데, 하필 사신을 파견할 때 쿠데타가 일어나고 있었다던가, 황제가 도교 방술에 빠져 수정안 결재를 깜빡했다던가 하는 등 조선과 명 양쪽이 꾸준히 의도적이거나 비의도적인 헛발질을 계속하게 되면서 200여 년간 문제가 해결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가 겨우 선조 연간에 해결되는데, 이것이 바로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입니다.

한편, 중공 성립 이전까지만 해도 대다수 중국인들은 고구려=고려=조선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흔적은 지금도 현대 중국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현대 한국에서도 노인층 중 무의식적으로 러시아를 ‘소련’이라 칭하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 그보다도 더 외국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에는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2. 이전에 종종 언급된 것처럼, 식인을 (알려진 바로는) 하지 않았을 뿐 고대 바이킹 종교에서도 인신공양은 열심히 하곤 했습니다. 기독교가 퍼지기 시작한 시점에 인신공양은 거의 퇴출되었지만, 자해 의식은 한동안 남아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붉은머리 에이릭의 사가』에는 에이릭의 대부터 그 집안 사람들의 탐험에 함께하곤 했던 고참 사냥꾼 토르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완가 토르핀과 함께 빈란드로 향한 토르할은, 식량이 떨어지자 조용히 빈란드의 한 절벽으로 향해 자해 의식을 치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식이 끝난 뒤 돌아오는 길에 해안에 떠밀려온 고래 사체를 발견했고, 그 덕에 - 식중독으로 추정되는 배탈을 앓긴 했지만 - 다들 배를 채울 수 있었다고 하지요. 이런 상세한 서술은 사가가 편찬되던 시기까지도 자해 공양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었음을 방증합니다.

3. 잔 다르크에 대한 기록들은, 공통적으로 그가 체구가 좋고 외모도 평균 이상이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와 함께 종군한 남성들은 하나같이 잔에 대해 욕정을 품지 못했다고 하지요. 심지어, 욕정을 품었다가도 잔이 나타나면 금방 그 욕정이 달아났다고도 합니다. 즉 잔은 외모만큼이나 완력도 어지간한 남성 이상이었기에, 남자들이 함부로 집적거리지 못했다는 것을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잔의 경이로운 신체적 능력에 대한 기록도 여럿 존재합니다. 공성전 중 머리에 돌을 맞고 떨어졌지만 멀쩡히 일어나 다시 성벽을 기어올랐다던가, 영국 장궁수의 저격에 당해 목과 어깨를 관통당했지만 금방 다시 전장에 뛰어들었다던가, 포로로 잡힌 뒤 탈출하고자 높은 탑에서 뛰어내렸는데도 상처 없이 기절만 한 채 붙잡혔다는 것 등등이 그 예시지요. 백년전쟁과 내전의 혼란을 겪지 않고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 작중의 잔은 아마 원 역사보다도 더 체구가 장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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