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110화 (110/116)

그대와 함께 흔들면서 (3)

25. 그대와 함께 흔들면서 Rock With You (3)

시그리드 대추장과 함께 서쪽의 또 다른 큰바다를 넘어, 가운데사람들中國과 동틀녘사람들朝鮮을 만나고 온 원주민 사절들은, 동틀녁사람들 대추장의 아들이라는 ‘양보하는 편안함讓寧’, 즉 양녕대군과 함께 저들 마을로 돌아갔다.

서쪽의 긴집사람들처럼 새벽땅사람들도 추장sachem 혹은 추장 후보쯤 될 만한 사람들을 외교 사절로 보내는 관행이 있었다. 그들로부터 신원을 보증받는 양녕대군은 숲속 어디를 가든 환영받곤 했다.

“시그리드 대추장의 벗은 나의 벗이요, 나의 벗은 곧 우리 부족 모두의 벗이라오. 차린 것은 없으나 많이 드시길.”

“에휴, 정말로 차린 게 없구만. 이보게, 하산. 저들에게는 이런 진수성찬을 차려줘서 고맙다고 전해주게.”

환영이라는 게 고작해야 오두막 앞에 모닥불 피우고 고기 구워먹는 게 전부라는 데 양녕은 절망하였으나, 여기서 싫다고 발을 빼려 했다가는 서씨가 그 어여쁜 얼굴로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저런. 그러면 어쩔 수 없죠. 황 공이랑 장 선생님이 이곳에 남아 계시는 동안, 먼저 배 타고 아카풀코로 돌아가시면 되겠네요.’

하면서 양녕 저를 홀로 그 무시무시한 족속들 사는 땅에 보내버릴 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러므로 울며 겨자먹기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말타기 시범도 보이고, 저들이 맛있으니 한 번 먹어보라 건네주는 옥수수 죽도 억지 미소와 함께 들이켜고, 중간중간에 서씨가 시킨 대로 합중국인지 신대륙 연합인지에 가입하는 건 어떠하느냐 운도 떼고 하는 수밖에.

(멀리 서쪽에서는 융숭한 대접에 감탄하는 뜻으로 한숨을 쉬곤 한다는 엉뚱한 오해가 퍼지고 있었으나, 양녕대군의 선동이 가져올 후폭풍에 비하면 별것 아닌 변화였다.)

“물론 그냥 지나가며 하는 말이니 크게 귀담아 들을 것은 없소이다. 다만 이 사람 생각에, 저 합중국에 온갖 겨레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그대들이라고 참여치 못할 것은 없을 듯하고, 더구나 이미 그대들 중 합중국 사람들과 교역하거나 품팔이하는 것으로 업을 삼는 자들이 적지 않은 듯하여.,,”

그렇게 할 말만 하고, 그냥 들어가 자고. 가끔 오밤중에 제 천막에 들어오는 여인이 있다면 함께 밤을 지새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 바깥에서 어떤 소란이 있든, 야음을 타고 부족 사람들끼리 무어라 숙덕대든, 양녕이 알 바는 아니었다.

“연합에 가입한다? 우리 부족이?”

“우리 부족만으로는 택도 없지. 새벽땅사람들을 모두 합쳐봐야, 저들 중 보헤미아 사람들과 겨우 머릿수가 비슷할 것 아냐?”

“아예 맨땅에서 시작한다면 무리겠지만, 이미 가을마다 새벽땅사람들 이름을 걸고서 좋은희망에 모이는 게 일상이 되었잖나. 거기서 한 발만 더 나간다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양녕대군이 지나치는 어지간한 부족마다, 밤에 남녀 젊은이들이 뭉쳐서 이런 작당을 벌이곤 했다.

“있잖아요, 이번에 좋은거래 가서 들은 얘긴데, 긴집사람들 다섯 부족이 뭉쳐서 서쪽으로 전사들을 보냈잖아요? 벌써 공물 바치기로 약조한 부족만 수십이라 하더라고요.”

“말 잘 했다. 그놈들의 화살이 언제 우리를 노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잖아? 든든하게 이방인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인다면 이 땅 위의 그 누구도 우리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겠지.”

숙덕대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방인들과의 동맹이 저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줄 것처럼, 비단 자신들뿐 아니라 새벽땅사람들 모두를 위하는 길인 것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밝히지 않는 사정도 있었다.

좋은희망에서의 합의에 따라, 옥수수 강이 우애로 흘러드는 곳부터 그 북쪽의 모든 영역에는 더 이상 이방인들이 정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잘만 이주하곤 했는데, 이는 장삿속 밝은 보헤미아인들이 그간 모은 밑천을 현찰로 삼아 토지를 이용할 권리를 사들였건, 수익 일부를 넘겨주는 대가로 부지를 확보했건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계약의 이익을 누리는 것은 바로 추장과 그 추장을 선출하는 부족 어머니들. 말로는 온 부족을 위한다 하고, 적잖은 경우에는 실제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나누어주곤 했지만 - 예컨대 야네크네 철공소에 철제 농기구를 대량주문한다던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멘소리는 계속 나왔다.

‘저들 부족이나 우리 부족이나, 비옥한 땅과 숲을 누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저들은 그저 이방인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

‘공용어도 제대로 못하는 늙은이가, 추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방인들과의 계약을 마음대로 하고, 그 이익도 제멋대로 분배한다고? 이방인들과 교역하면서 우리 부족에 진짜 풍요로움을 가져온 일꾼인 우리들이 추장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가?’

부족 안팎으로 이러한 논란이, 때로는 잔물결처럼, 때로는 노도처럼 일곤 하였으므로, 지난 가을 좋은희망에서 ‘문명인’들의 의회뿐 아니라 부족민들의 모임도 주먹다짐으로 뒤덮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젠장. 우리끼리 이렇게 백날 떠들면 뭐하나. 되는 것도 없는데.”

“그럼 어쩔 겁니까?”

“추장님이든, 어머니들이든 설득해봐야지.”

“피, 그분들이 잘도 우리 말을 들어주겠다.”

“그럼 뭘 어쩌자는 거야? 뒷배가 없는데, 맨땅에 박치기라도 해봐야지.”

“아, 잠깐! 그렇지!”

시그리드 대추장과 함께 가운데사람들 땅을 다녀온 이들은, 추장이든, 추장에 준하는 유력자든, 부족의 힘센 이들 중에서는 가장 바깥 사정에 관심 많고 또 통달한 사람들이었다. 무언가 변화를 원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이만한 후원자도 없을 터였다.

“저 ‘양보하는 편안함’이 한 말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어르신?”

몇몇 경우에는 일언지하에 쫓겨나곤 했지만, 조금 생각이 깊거나, 저 자신도 권력에 욕심이 있는 이들은 젊은이들을 내쫓는 대신 저의 모닥불 앞에 불청객들을 앉히곤 했다.

“자네들의 말이 최선이라고는 확신하기 어렵지만, 우리가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건 분명하네. 세상은 무서울 만큼 넓어.”

새벽땅사람들의 언어에는, ‘대추장’보다 높은 지위의 권력자를 지칭하는 단어가 없었다. 그러나 타고난 현명함이나 행운, 혹은 경험을 통해, 언어가 강요하는 사고의 한계를 뛰어넘은 이들도 분명 있었다.

그런 이들은, 가운데사람들의 대추장이 지닌 진정한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었다.

‘하늘의 아들天子.’ 그가 거느린 마을 하나가 새벽땅사람들 모두를 합한 것보다 인구가 많았고, 저 남쪽 투슈판을 불태운 정화는 하늘의 아들이 거느린 숱한 부하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리고 시그리드는, 그 ‘하늘의 아들’이 그저 조금 강력한 군주라는 것처럼 말하곤 했다. 유럽이라는 땅의 군주들을 모두 합치면, 하늘의 아들보다 약간 더 강력한 세력일 것이라 하였던가.

“그 드넓고도 무정한 세상에서 가장 먼저 우리에게 찾아온 이들이 우리 곁의 이방인들이라는 것은, 우리 조상들과 모든 정령들이 내려준 축복과 다름없네. 그 축복을 당연시하며 드러누운 채로 허송세월하는 것이야말로 벌받아 마땅한 오만이겠지.”

옛날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너무 멀리 와버렸다. 이방인들 중 겨울밀과 옥수수를 함께 기르지 않는 이가 없는 것처럼, 이제 그들 중에도 철로 된 도끼와 보습을 쓰지 않는 이가 드물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으리라.

저들이 이방인들의 큰 마을들을 자주 오간다는 것만으로 넓은 세상을 잘 안다고 자부하던 젊은이들 중에는, 사절로 바다를 건너갔다 온 유력자들의 그런 고민 섞인 답을 가슴 속에 담아두는 이도, 한 귀로 흘리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이들 젊은이들과 사절들이 손을 잡기로 하였다는 점뿐이었다.

“아직 우리의 수는 적고, 우리 목소리는 가을철 숲에 떨어지는 낙엽 소리만도 못하다네. 겨우살이가 큰 나무줄기에 의지하듯, 우리도 의지할 곳을 찾아야지.”

“의지할 곳이라 하시면...”

“아직 시그리드 대추장이 우애에 머물고 계실 걸세. 그분이라면 필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으실 게야.”

콘스탄티노스 황자가 기획하긴 했다지만, 어쨌든 시그리드가 검토하고 보완한 뒤에 승인까지 한 보헤미아 분리독립 방지 계획.

이리하여 그 계획은 발신자에게 그대로 반송되기에 이르렀다.

시그리드는 자신의 임기응변을 덧붙인 콘스탄티노스 황자의 계획이 성과를 거두기를 기다리며 우애에 머물고 있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할 일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간 시켜놓고 간 일도 많았고, 또 호국경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는 사안도 많았다.

“당장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나 버렸으니, 원. 시그리드 자네가 미리 행정부 정비를 지시해두고 갔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더라면 저 야만적인 프랑크식 ‘행정’ 따위에 지금보다도 더 신세를 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네.”

자신이 머무는 우애에 마련된, 내무부 청사를 시그리드에게 안내하며 플레톤이 툴툴거렸다.

내무부 청사라기에, 당연히 좋은희망에 있는 저의 ‘호국경 관저’처럼 통나무집이겠거려니 생각했는데, 의외로 꽤 그럴듯하고 널찍하게 지어진 2층 벽돌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프랑크식 행정이라뇨. 교회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자꾸 그러시면 사표 쓰는 수가 있습니다.”

그 곁에 따라온 수도사 복장을 한 초면의 젊은이가 말했다.

“저기,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아이고, 내 정신 봐. 신대륙의 호국경 전하를 뵙습니다. 이번에 필라델피아 - 이곳 우애의 도시 말입니다 - 주교로 서임된 로젠베르크의 지기스문트Sigismund Pirchan von Rosenberg입니다. 내무부 차관이기도 하고요.”

“주교시라고요?”

“보시다시피, 지금은 아닙니다. 교회 근처에서는 주교, 내무부 청사에서는 차관이랍니다.”

로젠베르크 가문은 보헤미아의 유력한 귀족 집안으로,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 내에서 세력을 모을 무렵 잽싸게 그쪽으로 편을 갈아탄지라 위세와 더불어 적이 많았다. 그 적들 중에는, 한때 부데요비체 근처의 숲에서 도적 노릇을 하던 몰락귀족 얀 지슈카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 로젠베르크 가문 사람을 신대륙 주교로 보낸 것은, 다분히 의도가 보이는 인선이었다. 저의 집안 내력 때문에라도, 후스의 이단들과 타협하는 일 없이, 올바른 신앙을 수호할 수밖에 없는 사람.

“하지만 저는 시토회Cistercian 출신이기도 합니다. 다른 시토회도 다 그렇지만, 우리 보헤미아의 시토회 사람들은 스스로 근면성실하게 일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신앙의 기초라고 믿고 있지요. 그래서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그 관료 시험에 응시했는데, 주님의 은총으로 제가 수석을 했지 뭡니까.”

“서방의 소위 성직자들은 대개 집안만 믿고 공부는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예외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지 뭔가.”

“아무튼 아까 그 프랑크식 행정 어쩌고 발언은 철회하십시오, 장관 각하. 우리 교회가 없으면 저 많은 농장의 불우한 신도들을 다 어떻게 관리하겠습니까?”

이제 보니 지기스문트가 ‘청사 근처에서는 차관’이라고 한 것은 절반만 맞는 모양이었다. 행정망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도움을 받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니, 아마 주교 겸 차관으로서 교회와 행정부 사이의 연락도 담당하는 듯했다.

“교회가 벌써 그렇게 많이 세워졌나요?”

“조금 우스운 얘기지만, 유럽에서 ‘선량한 이단’이라는 이율배반적 명칭으로 불리는 후스 선생이 큰일을 했습니다.”

지난 일이 년간 두 배로 늘어난 인구는, 신대륙의 ‘이단’과 정통 교회 양쪽에도 크나큰 도전으로 다가왔다. 당장 계약직 하인들은 매년 수천 명씩 들어오는데, 성직자 수는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부족했던 것이다.

이단이고 뭣이고, 일단 같은 신앙의 지붕 아래 있는 처지에서 신도들이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방치한다면 이는 빼도박도 못하는 직무유기였다. 그리하여 신대륙 연합의 몇 안 되는 성직자와 신학자들은 후스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일단 속성 단기과정으로라도 성직자를 양성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만만한 담쟁이대학 학자들이 저들 의사와 무관하게 차출당하였고, 갓 세워진 강당은 임시 신학교로 탈바꿈했다.

신학 시간만 되면, 같은 강당의 한쪽에서는 후스를 추종하는 프라하 출신 신학자들이 ‘이단적’ 교리를 가르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지기스문트와 함께 파견된 교회 쪽 신학자들이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진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나머지 시간은 공통 교과였는데, 논리학이나 라틴어 문법에는 이단도, 정통도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 끌려나온 담쟁이대학 학자들이 겨우 강의를 마치고 비척비척 걸어나올작시면, 문간을 지키고 있던 후스가 바로 ‘이제 성경을 마저 번역하러 가십시다’하며 대학가의 어두운 모퉁이로 그들을 끌고 사라지곤 했다.

군주와 교회의 검열로부터 자유롭기는 하지만, 정작 그 자유를 누릴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 억압적 상황. 허나 때늦게 ‘속였구나, 후스!’를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랴.

“아무튼 그렇게 육성된 인재들 중에는 의외로 관료 체질인 사람들도 꽤 있었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성직자보다는 이쪽이 더 맞는다 싶으면 바로 시험을 쳐서 이곳 청사로 들어오곤 하지요.”

소식을 들었는지, 우르르 몰려나와 호국경과 내무장관을 맞이하는 관료들. 말단 서기와 심부름꾼까지 합해 서른 명이 조금 넘었는데, 그 생김새와 이력은 이보다 더 제각각이기 어려울 정도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온 우애의 도시 원년 구성원부터, 저의 부족에선 소질에 맞는 일을 찾지 못해 만년 게으름뱅이 소리만 듣다가 이방인들의 도시에서 우연히 자신의 책상물림 기질을 깨우친 레나피 족 사내, 한자 동맹이 부리던 핀Finn족 노예였다가 단치히에 들린 그린란드 회사 사람 눈에 띄어 말단 서기로 취직한 허드레꾼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그리드가 지나갈 때마다 하나씩 저의 이름과 맡은바 직책을 말하는 걸 보니, 나름 짜임새 있게 업무를 분장한 듯했다.

“이게 바로 문명의 힘일세. 프랑크식 주먹구구 행정과는 다른, 진짜 관료제가 바로 이런 것이지.”

지기스문트가 저 대신 떠벌거리는 데 은근히 불만을 품은 플레톤이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다른 부처도 다 이런 식인가요?”

“보통은 그렇지.”

“어휴, 말도 마십시오. 장관님께서 얼마나 다른 부처에 참견질을 많이 하시는지, 이것도 권고하고 저것도 권유하고... 다들 귀에 딱지가 내려앉을 지경이라 손발 다 들고 내무장관님 말씀을 따르게 되었지 뭡니까. 그 직제를 우리가 다 짜준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질세라 끼어드는 지기스문트였다.

“흠흠, 차관은 좀 조용히 하게.

국방부는 지슈카 그이가 호국경 대리로 있느라 챙길 겨를이 없었고, 후스도 성경 번역 때문에 바빴고, 옌스 그 놈팽이는 제 궁둥이를 걷어차는 놈이 없으면 매사를 건성건성 처리하기 십상이고, 디폴트는 사람이야 성실하지만 이런 쪽 일머리는 없단 말일세. 그러니 잘난 내가 나서는 수밖에.

원래 서방 도시에서 행정관이라는 건 귀족 바로 아래쯤 되는 자리 아닌가? 그런 자리에 ‘고작’ 시험 봐서 오를 수 있다고 하니, 적임자라면 몰라도 지원자는 넘쳐났다네. 우리 사정상 급여는 제때 챙겨주기 어려울 뿐더러, 업무의 양도 들쭉날쭉하니 대개는 겸직이지만 말일세.”

비록 제국의 위상이 추락하면서 많은 직위가 유명무실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동로마가 현재 유럽에서 가장 관료제 전통이 잘 발달된 곳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이상적인 관료제를 정착시키기 위한 과도기에, 교회의 도움을 가교 삼아 행정을 정비한다는 방향 자체는 딱히 흠잡을 데가 없었다.

“자, 어떤가. 이만하면 흠잡을 데가 없지?”

로비를 겸하는 응접실. 나름 그럴듯하게 곰 대가리까지 하나 턱 걸어놓은 널찍한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플레톤이 자랑하듯 말했다.

“그렇기는 한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요? 이 불완전한 물질세계에 완전한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흠잡을 데가 있다고? 여기 어디에?”

“일단 이 청사요.”

“테오도로스 그 작자가 바빠 죽겠는데 일 계속 시킨다며 툴툴대면서도 직접 설계한 건물일세. 자재는 이번에 새로 문 연 벽돌 공방에서 들여온 뜨끈뜨끈한 벽돌이고. 흠결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너무 큰데요. 혹시 뭔가 의도가 있지 않으신가 해서요.”

뜨끔해진 플레톤은, 잠깐 고민하다가 이실직고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네는 못 속이겠구만. 예나 지금이나 마냥 순박하게 보이기만 해서, 방심하다가 이렇게 허를 찔린다니까.”

민원인들 앉아서 기다리라고 마련해둔 의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온 장인이 이번에 계약직 하인들과 도제들을 여럿 거느리고서 차린 가구 공방에서 만든 장의자에 주저앉으며 플레톤이 말을 이었다.

“의도가 당연히 있지. 있지 말고. 고작 서른 명 남짓 쓰기에는 지나치게 큰 건물일세.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뒤편에 미리 물색해둔 부지는 더 넓어서 언제든지 확장할 수도 있고. 언제고 행정부 전체가 이리로 옮겨올 것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사전공사를 한 것일세.”

“이리로 수도를 옮기기를 바라시는군요.”

“내 나이가 내일모레면 일흔일세. 여기 황 선생이 말하기를, 일흔이라는 나이는 동양에서도 ‘예로부터 드물다古稀’라고 부른다더구만. 이 나이 먹고서 매년 가을마다 좋은희망 오가도록 시키는 건 가혹한 처사 아닌가?”

플레톤은 농담 툭 던지곤, 도로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떠나기 전부터 했던 고민이 있었지. 이제 우리는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때는 지났고, 이대로라면 이 늙은 눈이 영영 감기기 전에 우리 연합이 진짜 나라 하나쯤 되는 덩치로 크는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게야.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자네도 그렇고, 나나 후스, 그리고 저 바깥의 수많은 어중이떠중이들도 그렇고, 하나같이 우리의 앞날이 어찌 되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 옛날,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모레아 땅에 이상사회를 만들자며 마누일에게 상소하였던 늙은 철학자.

평생을 괴짜로 살아왔으나, 더 나은 세상과 진리를 향한 열망만은 누구보다 올곧았던 사내가 시그리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새로 시작할 기회를 얻었네.”

“그리고 그 기회를, 이곳 우애에서 붙잡고자 하시는 것이군요.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면, 그만큼 이곳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커질 테니까요.”

“그렇지. 헬라스의 현인들이 이천 년 전부터 치열하고도 처절하게 고민하며 밝혀낸 지혜와 진리. 그것을 백지 위에 구현할 수 있는 다시 없을 기회일세. 그리고 그 백지는 이미 빠르게 색칠이 되어가고 있고.”

그 색칠이 무엇인지, 그리고 플레톤이 대신 칠하고자 하는 색이 무엇인지는 시그리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보헤미아인들이 바라는 세상. 모든 이들이 자유롭게 치부하며, 농장을 꾸려서 대지주로 도약하든, 공방을 꾸려서 큰 돈을 만지든, 누구의 간섭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

플레톤과 독일인 소농들이 바라는 세상.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밭을 갈 권리를 누리며, 완벽하지는 않을지언정 완벽해지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질서 하에서 모두가 협력하며 공존하는 사회.

“내 헬라스인 조상들이 신이라 불렀던 우주의 열두 원리에 맹세코, 나는 신대륙 연합의 내무장관으로서 권한을 결코 오용하지 않았네. 이곳 청사를 짓는 비용도, 지혜를 짜내어 모두 적절한 재정 내에서 충당하였지.

그러나 다른 백송고리당 사람들이 내게 찾아와 내 견해를 물을 때면, 결코 이러한 생각을 숨기지 않고 남김없이 알려주었다네. 그것이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권리이자 의무이기 때문이지.”

아마 후스나 지슈카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지금의 갈등에 한몫 하였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시그리드가 맨 처음 내려놓은 초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땅. 그것을 만들기 위해 아이슬란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유럽을 뒤엎고, 나아가 지구를 절반 넘게 횡단했다. 그리고 그렇게 비옥해진 토양 위에서, 마침내 새싹을 내민 꿈들은 저들끼리 경합하기 시작했다.

가재당과 백송고리당. 두 당이 선거를 하면서 내세웠던 공약.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의 일상에 가까운 언어로 표현되었던 강령과, 마침내 그 정치라는 것이 높으신 분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저들 모두의 삶에 얽힌 것임을 깨닫고 지금껏 있는 줄도 몰랐던 목소리를 내었던 사람들.

설령 시그리드의 계책이 성과를 거두어, 분리독립 이야기가 잦아든다 할지라도, 갈등 자체는 끊어지지 않으리라.

“자네가 저 보헤미아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려고 한 것도, 결국 우리 쪽에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 아니었는가?”

잠시 플레톤을 따라 나름의 고민에 빠져들었던 시그리드는, 플레톤의 헛발질에 퍼뜩 깨어났다.

“어... 그건 아니었는데요?”

“엥? 그러면?”

“갈등과 경쟁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지켜야 할 선은 있는 거잖아요. 정말로 여러 나라로 쪼개진다든가, 이름만 한 나라인 채로 갈기갈기 찢어진다든가 해서는 안 될 테니까요. 그런 생각에 황자님이 마련한 계획에 힘을 실어줬을 뿐이었는데...”

때마침 밖에서 우렁찬 여자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름이라고 활짝 창문을 열어놓은 덕에, 그 소리가 시그리드는 물론이요 늙은 플레톤 귀에도 아주 잘 들렸다.

“여기예요! 시그리드 각하가 아까 이쪽으로 시찰을 오셨어요!”

나름 정부 청사라고, 울타리까지 쳐 놓은 청사 뒤편.

“여기 개구멍이 있어요! 이리로 들어오시면 돼요!”

“지금 나더러 개구멍으로 기어들어가라는 거니? 이 옷에 흙 다 묻혀가면서?”

저 목소리는 콘스탄티노스 황자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딴에는 변성기가 와서 크게 달라졌다고 여기는 듯하지만, 황자와 함께 한 세월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던 시그리드가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싫음 말고요. 저기 정문 쪽으로 빙 돌아서 오시든가.”

내무장관 플레톤은 공유재산 보호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황자님! 울타리 망가지면 변상해주셔야 합니다!”

플레톤이 외치자, ‘엑 들켰다’ 소리와 함께 후다닥 사라지는 여자아이 목소리. 아마 저 아이가 우애에 이름난 말괄량이요 다르크 집안의 걱정거리라는 잔일 것이다.

몸 일으켜 뒤뜰로 나가니, 남정네 가슴팍까지 오는 울타리 위로 쏙 올라와 있는 황자의 얼굴만 보였다.

“그, 다른 게 아니고... 급히 알려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시그리드가 플레톤과 함께 나타나자, 우물쭈물하면서도 용건을 꺼내는 황자였다.

“저기, 그, 새벽땅사람들이 우리 연합에 가입하기를 원한다고 하는데요...”

“잘 되었네요. 벌써 그런 소문이 들려오다니.”

곧 보헤미아 사람들도, 또 거기 편승하려던 몇몇 독일 사람들도 정신을 차릴 것이었다. 연합의 앞날을 두고 다투는 것은 좋지만, 그것도 선을 넘어서는 안 되는 법임을 깨달으리라.

... 라고 생각하던 시그리드는, 이어지는 말에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아니, 소문이 아니고, 정말로 새벽땅사람들 부족의 대표라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서 찾아왔어요. 말하기로는, 시그리드 각하의 후원을 받아서 새벽땅사람들이 연합에 가입하는 안건을 진지하게 추진하려고 한다던데요.”

“확실한가요?”

“찾아오는 길에 동네방네 저들의 생각을 떠들고 다녔다는 모양인데요...”

그러기가 무섭게, 저쪽에서 달려오는 이들이 있었다.

시그리드의 흰 머리는 멀리서도 알아보기 쉬운지라, 다들 멀쩡한 정문 쪽은 내버려두고 이쪽 뒤뜰로 달려오고 있던 것이다.

“대추장! 대추장 아씨! 부디 우리의 청원을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뒤따르는 이들은, 각각 옥수수 강 중류에서 찾아온 보헤미아인 농장주들과 강 하류와 그 너머에 정착촌 꾸리고 있는 독일인 의원들.

“각하! 안 됩니다! 저들을 받아주시면 안 됩니다!”

“이놈아! 비켜라! 내가 먼저 말씀드릴 게다. 각하! 여기 이놈 말마따나, 저들을 받아주시면 안 됩니다!”

오지 않을 미래, 툭하면 원주민들 사는 땅을 준주territory로 만들어 합병하곤 했던 미국인들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람들아! 정문으로 오게! 정문으로!”

기껏 지어놓은 멋들어진 청사의 정문 내버려두고 뒤쪽 울타리로 오는 이 상황에 답답함을 토로하는 플레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