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111화 (111/116)

그대와 함께 흔들면서 (4)

하필 시그리드가 우애의 도시에 머물고 있을 때 일이 터지면서, 언제고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오겠다는 게미스토스 플레톤의 야심찬 구상은 잠시나마 현실에 가까워졌다.

보헤미아인들과 독일인들이 분리독립해 신대륙 연합이라는 큰 지붕 아래의 별개 영방으로 떨어져나가려 한다는데, 저들도 그런 조건으로 연합에 가입하고자 하니 부디 후원을 해 달라는 원주민 대표들.

사안이 보통 큰 사안이 아니다보니, 대표들이 강 타고 내려와 우애에 닿기도 전에 벌써 옥수수 강 저편의 독일인 정착촌부터 한참 떨어진 따뜻한환영까지 금방 소문이 퍼져버렸다.

환영과 우애 중간 지점에 있는 담쟁이항구에 머물고 있던 얀 후스를 필두로 정부 요인들이 갓 닦인 흙길 위로 마차 타고 후다닥 넘어오고, 마침 옥수수 파종도 끝나고 농사일 망중한을 즐기던 근처 지역구 의원들도 이 날벼락 같은 소식에 말을 타든 배를 구하든 해서 우애로 달려왔다.

그리고 우애의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플레톤이 지은 이 내무부 청사만큼 번듯한 건물이 없는지라, 그렇게 모여든 입법부와 행정부 요인들은 따로 시키지 않았는데도 하나둘씩 청사로 찾아오곤 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시그리드 각하는 그저 제 발상을 받아들여주셨을 뿐이에요.”

그 청사 뒤편의 널찍한 공터. 언제고 플레톤이 이곳에 정부 청사 전체를 옮겨올 작정으로 마련했으나 지금은 그냥 직원들이 일 없을 때 가꾸는 텃밭으로 쓰이고 있는 그곳 한쪽에서, 다른 요인들을 불러낸 콘스탄티노스 황자가 말했다.

청사 안쪽은 새벽땅사람들 사절과 모여든 의원들, 갑자기 찾아온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손이 남아나지 않는 내무부 직원들 등으로 붐볐기에, 한적하게 이야기 나눌 곳을 찾으려면 이곳 뒷뜰밖에 답이 없던 것이다.

우스꽝스럽게 울타리 사이에 두고 국가대사를 논의하는 것보다는 모양새가 (아주 약간) 나았으므로, 플레톤은 이 장소 선정에 대해 할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황자님의 잘못이라니요?”

“그게... 원래는 이렇게 일이 풀리면 안 되는 거였거든요.”

원래대로라면 응당 이렇게 되었어야 했다.

저들의 농장에서 부리는 계약직 하인들에 연합 정부나 의회가 간섭하는 것을 막고, 또 저들에게 직접적인 이익 되지도 않는 사업에 세금 뜯기는 것도 막고자, 분리독립이라는 떡밥을 덥석 문 보헤미아인들.

그리고 보헤미아인들과 원래 심리적으로 거리가 있었을 뿐더러, 저들 나름대로 바라고 있는 소박한 이상이 있었던지라 이왕 이리 된 것 갈라서자는 데 동의하고 나선 독일인들.

그러나 연합에서 갈라서려면 경계를 그어야 하기 마련이요, 한 번 경계를 긋기 시작하면 그 다음 경계선 긋는 것은 훨씬 수월할 터였다.

“... 원래는 그렇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데서 그치려고 했어요.”

만약 계획대로만 되었다면, 보헤미아인이든 독일인이든, ‘어마 뜨거라’ 하면서 분리독립 소리를 도로 마음속으로 집어넣고, 다시 좋은희망 정례 격투대회(제헌의회라고도 불리는)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을 것이었다.

다들 티격태격 다투느니, 그냥 갈라서서 서로 갈 길 가는 쪽이 속 편하다 여기곤 있겠지만, 원래의 땅주인인 원주민들이 그런 선례를 따라서 독립을 선언해버린다면 그건 더더욱 곤란한 일이었다.

기껏 개척해놓은 농장에 갑자기 원주민 추장이 나타나서는,

‘그대들이 연합의 지붕 아래서 분리독립을 한 것처럼, 우리도 연합의 일부로서 권리를 주장하고자 하오. 하여, 이번에 우리 자치의회에서 결정한 올해 세율을 통보하러 왔소이다.

납기일은 다음 보름달이 뜨기 전까지라오. 아, 그리고 계약직 하인이라는 이들한테도 급여를 좀 더 주시오. 그들이 버는 게 있어야 우리네 부족이 모으는 모피를 사들일 것 아니오?’

이렇게 참견을 하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원래대로라면 산골짜기에 닿아 메아리로 돌아와야 했을 뜬소문이, 갑자기 산사태가 되어 돌아와버렸군요.”

얀 후스가 황자의 중언부언하는 변명을 요약해주었다.

“시인 다 되셨소.”

“성경의 아름다운 구절들을 다른 나라 말로 옮기다 보니, 문학적 소양이 계발된 듯합니다.”

늘 그렇듯, 플레톤과 후스가 딴지 걸고 넉살 좋게 맞받아치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진지한 상황에 평소 같은 농담따먹기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나올 답에 따라 장차 이 신대륙 연합이 지향하게 될 미래가 달라지리라는 것을 알아보는 두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해서 잠시나마 압박을 면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문학적 감수성과 거리가 멀었던 실용주의적 인간 지슈카는 단도직입으로 주변에 물었다.

“그래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당장 우리가 저 청사로 돌아가게 되면, 모두가 우리들 입만 바라보게 될 텐데요.”

그러니 새벽땅사람들의 청원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절하거나. 둘 중 하나로 방침을 정해야 할 겁니다.”

다들 청사에 모여 있는데 각 당의 중진이자 행정부 요인을 겸직하고 있는 이들이 함께 자리를 비웠으니, 청사에 남아 있는 의원들과 부족민 대표들은 내각 사람들이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코자 잠시 조용한 곳을 찾아갔으리라 단정하고들 있을 것이었다.

“그건...”

좌중 모두는 여전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시그리드에게 눈길을 돌렸다.

며칠 전, 이곳 뒤뜰의 울타리에서 새벽땅사람들과 근처 정착지 의원들, 콘스탄티노스 황자 등등을 만난 시그리드는, ‘다른 이들과 숙의를 거치고 답변드리겠다’라는 식으로 응답을 유보하였다.

의원들이 모여들고, 증기선이 털털거리며 옥수수 강을 오가고, 강 중류의 농장에서 밀린 급여를 왐품으로 받은 하인들이 장날이라고 우르르 몰려나와 없는 살림에 장을 보고, 그러는 사이에도 시그리드의 고민은 죽 이어졌다.

“후스 선생님과 보헤미아 사람들... 아니, 가재당이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가재당과 우리 백송고리당. 그리고 새벽땅사람들. 그리고 연합의 지도부로 선출된 우리들까지.”

시그리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바라는 것이 다르고 꾸는 꿈이 다른 사람들끼리 얽히고설킨 끝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가 태평양 너머로 떠나기 전부터 싹트고 있던 갈등이, 이제는 제대로 엉켜버리고야 말았지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십수 년 전, 라이플 한 자루를 든 용병단장이었을 때부터 시그리드는 항상 말했다. 신대륙은 모두가 자유롭게 꿈을 꿀 수 있는 땅이 될 것이라고.

그리고 시그리드는 그 약속을 지켰고, 마침내 사람들의 꿈은 이 땅에서 싹을 틔워, 서로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구대륙 유럽에는 상전들이 너무나 많았다. 자신이 기껏 열심히 일해 노동의 성과를 모아본들, 교회가 한 술, 군주가 두 술 뜯어가면 금방 사라져버리고야 말았다. 그것을 한으로 여겼던 이들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신의 재능만큼 부유해질 수 있는 세상을 바랐다.

또한 구대륙에서는 황금만큼이나 평온함 또한 희소한 재보였다. 전쟁과 역병, 기근에 시달려 그 땅을 등진 빈농들은, 모두에게 일정한 부와 안락함을 제공해줄 수 있는 질서가 이 땅에 세워지기를 바랐다.

조금씩 보헤미아인과 독일인이라는 민족 구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게 되어가는, 서로 다른 이상의 충돌. 신대륙 개척이 안정된 궤도에 오르고, 개척민들도 그간 시그리드가 종횡무진 곳곳을 들쑤신 덕에 그간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갔던 저들의 이성과 힘을 깨우치게 되었기에, 나날이 거세질지언정 잦아들 줄은 모르는 갈등.

“그러니, 황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든, 분리독립이라는 발상은 언제고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생존이라는 과제는 일단 극복되었고, 외부의 위협도 뚜렷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우리의 계획이 처음 뜻대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갈등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렇다고 정말로 나라를 쪼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플레톤이 다른 이들을 대신해 물었다.

“꼭 쪼개지면 안 된다는 법도 없지요?”

사람의 꿈이 서로 부딪힌 끝에, 화룡점정으로 원주민들까지 끼어들며 복잡하게 얽혀버린 꿈과 욕망의 매듭.

“예로부터 그런 매듭은 그냥 칼로 잘라내면 그만이라고 했잖아요.”

욘에게 들었던 고르디아스의 매듭 이야기를 꺼내는 시그리드였다.

한참 뒤, 플레톤이 투덜대며,

“알렉산드로스가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칼로 잘랐다는 건 허구일세, 허구. 니코메디아의 아리아노스가 말하기를...”

하며 소소하게 딴지를 거는 일은 있었으나, 그것 외에는 따로 이견이 없었으니, 시그리드가 며칠간 고민한 보람이 있었던 셈이었다.

“대체 언제쯤 돌어오시려는지...”

“뭔가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계신가 보지.”

그 무렵, 청사 안쪽에 모여든 이들은 세 패로 나뉘어 저들끼리 웅성대고 있었다. 한쪽에는 독일인들이 주를 이루는 백송고리당 사람들. 다른 한쪽에는 환영이나 옥수수 강 중류의 농장에서 달려온 보헤미아인 위주의 가재당 사람들. 그리고 어느 한 쪽에도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새벽땅사람들.

“설마 우리가 옛날에 분리독립 어쩌고 얘기했던 것과 엮으시려는 건 아닐까?”

“쉿! 그 얘기가 거기서 왜 나오는가?”

“저기, 더 말씀하셔도 됩니다.”

환영 한 곳의 인쇄소만으로는 성경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우애에도 인쇄소가 생긴 지 오래였다. 인쇄소가 있다면 신문도 찍어낼 수 있는 법. 인쇄소 도제와 기자를 겸하는 이 한둘도 자연스레 끼어들어, 그렇게 주고받는 대화를 열심히 적어내려가고 있었다.

“엇, 마침내 뭔가를 합의한 모양이로군. 저기 들어오시는구만.”

뒤뜰로 열린 창문 너머를 유심히 바라보던 이 하나가 주변에 알렸다.

“자, 자. 조용히들 하세나.”

뒷뜰로 나갔던 시그리드 이하 내각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자 - 사태의 숨겨진 책임자이긴 했지만 내각의 일원은 아니었던 콘스탄티노스 황자는 조용히 청사를 빠져나갔다 - 쭈뼛쭈뼛 어색하니 청사 응접실을 가득 메운 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이목은 절로 시그리드에게 집중되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제가 호국경으로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새벽땅사람들의 연합 가입 요청에 대한 우리 연합의 공식 입장을 밝히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 이상은, 가을철 정기의회에서 다른 의원분들과 중지를 모은 뒤에야 결정할 수 있겠지요.”

서두를 뗀 시그리드는, 자연스럽게 세 무리로 나뉘어 있는 청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가 내리는 결정이 순수하게 새벽땅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믿는 분들은 없으시겠지요. 어떤 식으로든, 이 결정은 최근 몇 달간 우리 연합을 달구었다는 분리독립 문제와도 얽히게 될 겁니다.”

시그리드가 막대한 재물과 함께 서쪽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사그라들었던 분리독립 이야기. 그러나 사그라들었을 뿐 아예 꺼진 것은 아니었음을 입증하듯, 시그리드가 분리독립을 거론하자마자 금방 두 정당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는 호국경으로서, 각 정착지가 연합에 속한 주State로 재편된다는 전제 하에, 새벽땅사람들이 그러한 주의 하나로 편입되는 것에 동의합니다. 이 안건은 올 가을에 좋은희망에서 의회의 의결을 거치도록 하겠습니다.”

술렁대는 소리가 한층 고조되었다. 호국경에게 질문할 기회를 청하는 이들이 곳곳에서 손을 들었다.

졸지에 교통정리를 맡게 된 내무차관 지기스문트가 애써 순서를 정해준 끝에, 겨우 첫 번째 순번으로 지정된 이가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각하, 그 ‘주’라는 것은, 그러니까... 저희가 처음 주장했던 국가State로의 분리독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물론 시그리드가 말한 것은, 오지 않을 미래의 미합중국의 주 개념이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 ‘연합에 속한 국가의 독립’을 말한다면 신성로마제국 소속 영방국가를 다들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시그리드는 굳이 그 오해를 고쳐줄 생각도, 자신이 그런 오해를 제멋대로 교정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도 하지 않았다.

“네, 물론이지요. 다수 여론이 분리독립에 동의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연합이 내세우는 원칙에 따라 그 여론을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너희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라는, 도저히 반박이 불가한 논리.

그러나 그 논리대로라면, 기껏 옥수수 강 중류에 세워둔 농장들의 주권이 고스란히 원주민들 손에 도로 넘어가게 될 터였으므로, 보헤미아인 의원들은 마치 비옥한 강가 농장에서 고개 내미는 겨울밀 이삭마냥 손을 마구 들었다.

“꼴 좋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구나.”

독일인 의원들 중에는 목소리 낮춰 이렇게 비웃는 이도 있었으나,

“멍청하기는! 저놈들이 무릎팍에 불똥 떨어진 격이라면 우리는 발등에 떨어진 정도일세! 우리라고 사정이 나은 줄 아는가?”

조금 더 먼 미래를 생각할 여력이나 재능이 있는 이들은 저것이 저들에게도 곧 닥칠 앞날임을 깨달았다.

독일인들이라고 아예 보헤미아인들처럼 대농장 꾸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요, 보헤미아인들보다 그 수가 적을 뿐 벌써 계약직 하인들을 고용해 더 남쪽에 새로 개척지를 꾸리고 있는 이들도 꽤 있었다.

그리고 그 땅에는 ‘삼캐는이들(Skarure. 투스카로라 족)’이라 자칭하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대륙의 거의 반대편에 있는 크리Cree, 호피Hopi 같은 부족들도 이방인 소문을 들은 판에 이들이 유럽인들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다.

유럽인들이 열심히 그들 땅에 농장을 개척하면, 그때를 기다렸다가 헤벌쭉 웃으면서, 이제 저들도 연합의 일원이 되었으니 저들의 법을 따라야 한다며 세금을 고지하리라.

한편, 보헤미아인들은 시그리드가 부디 걸고 넘어지지 않기를 바랐던 문제를 걸고 넘어지자, 그저 당황할 뿐이었다.

“가, 각하! 하지만... 그 말씀대로라면 우리 보헤미아 유권자들이 가꾼 농장 상당수가 저들 새벽땅사람들의 관할로 넘어갈 텐데요.”

“그렇기는 하겠지요. 그런데 보헤미아인들이 하나의 주를 이룰 수 있다면, 당연히 새벽땅사람들도 자신들의 주를 이룰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시그리드와 함께 명과 조선을 다녀왔던 왐파노악 부족 추장 하나도 맞장구를 쳤다.

“내 비록 새벽땅사람들 모두를 대변한다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방인, 아니, 곧 같은 국민이 될 보헤미아 출신 동포들의 재산권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소이다.”

저 멀리 서쪽, 끝없는 평원에 산다는 이들이라면 모를까, 풍요로운 숲과 들에서 (자신들 기준으로는)빽빽하게 모여 살던 원주민들은 숲과 들에 경계를 긋고 주인을 나눈다는 개념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농장 부지의 소유권을 넘겨주었을 뿐이요, 그 부지의 주권은 굳이 따진다면 자신들에게 있다는 관념 역시 금방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 그러한 논리 하에서 저들이 이방인들에게 더 뜯어먹을 게 생긴다는 건 덤이었다.

“설마 세금이 아깝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을 거론하셨던 건 아니시겠지요?”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든, 남들 앞에서 - 특히, 기자 앞에서 - 순전히 세금 덜 내려고 독립 운운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렇습니다만...’ 뒤에 차마 말할 수 없는 불만이 서리고 있는 것을 본 시그리드는, 예상대로의 반응이라는 데 살짝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원주민들의 분리독립에 상응하는 반대급부, 독립을 말했던 이들이 달가워할 만한 이야기를 꺼낼 차례였다.

“각각의 주는, 연합 전체의 헌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리고 헌법이 규정하는 범위 내에서 자치권을 인정받을 것입니다. 새벽땅사람들이 우리 연합의 일원이 된다면, 그들도 예외가 아닐 것이고요.”

그리고 다시 한 번 일어나는 웅성임.

“헌법이라고?”

“아직 플레톤 어르신이 만든 그 거창한 서문 외에는 거의 합의가 안 되지 않았나?”

“멍청하기는! 바로 그러니까 헌법이 중요해진 것 아닌가!”

한 번 꺼낸 분리독립 이야기를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너무나 다른 생각과 꿈으로 인해 계속 다투느니, 차라리 연합이라는 큼직한 울타리 내에 따로 금을 긋고 저들끼리 살아가자는 그 발상 자체를 지워버릴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 마음은 간교하여, 저들은 제멋대로 살기를 바라지만, 남들은 이왕이면 제 말을 듣고 그에 따랐으면 하기 마련.

“이대로 우리네 농장이 다른 주로 넘어가게 생겼지 않은가? 어떻게든 헌법으로 저 원주민 놈들이 우리 농장에 수작을 못 부리도록 막아야지!”

“잠깐, 잘만 하면 오히려 큰 이익이 되겠는걸?”

잘만 하면, 보헤미아인이든 독일인이든 저들의 주 안에서는 저들 법대로 살고, 주 밖에 있는 저들의 재산과 사업도 연합 차원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는 최상의 결과를 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속은 속대로 편하고, 이익은 이익대로 보고.

점점 시그리드가 발표하는 행정부의 공식 입장을 솔깃하게 듣는 눈빛이 늘어나는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끝나고, 멀찍이 바다 위에서 허연 반달이 모습을 드러내는 어슬녘.

아직 박명이 사라지려면 꽤 멀었던지라, 우애의 거리 곳곳에서는 오늘 낮에 청사에서 벌어진 시그리드의 폭탄선언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이들이 꽤 눈에 띄었다.

그 설왕설래가 금방 갑론을박이 되고, 우애에 신설된 민병대가 이러다 누구 하나 다치겠다는 신고를 받고 후다닥 달려가는 일도 꽤 벌어졌다.

“폭탄선언이라니, 하여튼 요즘 젊은이들은 막 단어를 만들어 붙인다니까.”

시그리드가 언제 말을 꺼냈다고, 벌써 신문 호외가 찍혀 나왔는데, 그 제호 아래에 떡하니 ‘시그리드 각하의 폭탄선언’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좋은희망과 따뜻한환영, 우애 세 곳 외에, 좋은거래나 막 세워진 너른벌(피츠버그), 푸른들판, 남녘정착지 등등이 하나의 주로 독립해나갈 가능성이 있을지 등등. 반나절 만에 급조된 것 치고는 나름 세세한 분석이 들어간 기사였다.

“그러게요.”

“다 자네 때문일세.”

“폭탄bomb이라는 말을 제가 맨 처음 쓰긴 했지요.”

지금껏 신대륙 연합 사람들이 ‘천둥 막대’, 즉 머스킷을 마음껏 쓸 수 있던 까닭은, 따뜻한환영 인근의 철공소에서 총열이 양산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안에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산마다 넘쳐나는 게 석회암 동굴이요, 동굴이 있다면 박쥐가 있고, 박쥐가 있다면 생리현상의 결과물이 그 바닥에 쌓이기 마련.

매번 유럽에서 화약을 수입해오기는 뭣하였던 시그리드가, 탐험기사단이 동굴 소문을 듣고 돌아오자마자 지시를 내려둔 덕에, 지금은 꾸준히 박쥐가 남긴 세월의 흔적들이 고대로 우애와 환영으로 들어와 화약으로 바뀌곤 했다.

화약무기 운용에 있어서는 시그리드보다도 더 관심이 많은 지슈카는, 바쁜 와중에서 시그리드가 남기고 간 검은 책의 지식을 활용해 폭발하는 대포알을 만들도록 한 바 있었는데, 이 신무기의 이름을 시그리드가 검은 책 주해본에 ‘폭탄bomb’이라고 적어두었던지라 그대로 이름이 정해졌던 것이다.

“그 얘기가 아니잖은가.”

신문을 내려놓으며, 시그리드가 아직도 빌려 쓰고 있는 콘스탄티노스 황자네 집의 푹신한 의자에 앉는 플레톤이었다.

“덕분에 올 가을 제헌의회는 아주 진지하게 잘 이루어지겠더군.”

“그러게요.”

청사에서 회견을 마친 뒤, 시그리드와 플레톤, 지슈카와 후스는 각각 도시를 한 바퀴 돌며, 저들 정당 사람들의 의중을 들었다.

주 경계 바깥에서의 권리를 인정받고, 다른 주에 참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헌법이 재조명되면서, 본디 헌법으로 최대한 많은 것들을 규정하자는 쪽이었던 백송고리당과 헌법은 최소한의 원리원칙만을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가재당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뒤바뀌게 되었다.

백송고리당을 지지하는 독일인들 입장에서는, 너무 헌법 규정이 세세해지게 되면 저들의 자치권이 침해당할 수 있음을 걱정하게 되었고, 반대로 가재당을 지지하는 보헤미아인들은 지금처럼 최소한의 규정만 담은 형태로 헌법이 통과될 경우 주의 경계 바깥에서 저들의 권리를 보호할 수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후스 선생님께서 아까 들렸다 가셨는데, 그쪽 사람들도 대체로 걱정하면서도 동시에 들뜬 분위기라고 하더라고요.”

비록 단서조항이 거하게 붙기는 했지만, 어쨌든 보헤미아인들이 여전히 주를 이루고 있는 따뜻한환영이 하나의 주로 떨어져나간다면, 그 안에 농장주들이 마음껏 치부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를 꾸릴 수도 있을 터였다.

시그리드와 플레톤이 만났던 백송고리당 사람들 중에도 - 저들 본인이 보헤미아인들처럼 대농장주가 되기를 바랐던 이들은 영 떨떠름한 눈치였지만 - 모든 사람이 제 몫의 부를 누리는 아름다운 우애의 도시를 만들자며 열광적으로 떠드는 이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헌법만으로는 이들 모두를 하나로 묶기 어렵겠지. 환영은 환영대로, 우애는 우애대로, 희망은 희망대로, 각각 바라는 사회를 만들어나간다면, 본디 유대랄 만한 게 없던 우리 연합의 구성원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져갈 테고.”

이왕이면 온 신대륙 연합이 (자신이 내세우는) 하나의 질서 하에 이상사회로 거듭나기를 바랐던 플레톤으로서는 마냥 만족할 수만은 없는 결과였다.

물론 그렇다고 시그리드의 제안, 오지 않을 미래에 미합중국이 세운 제도를 본떠, 각각의 주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사회를 꾸릴 수 있도록 하자는 그 제안보다 더 나은 대안을 마련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기에, 지금껏 툴툴댈지언정 진지하게 시그리드에게 반대하고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렇기는 하겠지요.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간극은 점점 벌어질 테고, 맨 처음 다 함께 이민선을 타고 왔을 때의 기억이 사라진다면 그때는 더욱 심하게 될 테지요.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각각의 답을 찾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잖아요.”

“기회라?”

시그리드가 제 옆에 놓여 있던 묵직하고도 낡은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바로 검은 책이었다.

“오지 않을 미래에는, 우승열패와 약육강식의 결과 속에서 결국 한 가지 답만이 승리하였지요. 그리고 그 답마저 완전한 정답은 아니었기에, 또 다른 답을 말하는 이들이 나타났고, 둘이 겨루고 겨룬 끝에 이방인 욘이 동녘정착지의 설원에 나타나게 되었고요.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그때의 사람들이 겪었던 갈등과 고통을 피하면서 그 산물로 얻은 미래의 답들을 미리 볼 수 있게 되었어요.”

“미래의 지식과 기술이라.”

“이미 절반쯤은 이루어졌지요. 태평양과 대서양을 아우르는 무역망. 화약과 증기기관. 이 모든 것들을 계속 이어나간다면, 서로 다른 꿈을 꾸는 이들이 같은 발걸음을 걸어나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요?”

미래의 기술을 지금 이곳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기술로써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결국 신대륙 연합의 모든 이들이 힘을 합쳐야만 했다.

그리고 미래의 지식과 기술이 가져다줄 진보, 그 진보에 함께하며 이익을 나누고자 하는 욕망은, 세월의 원심력 가운데서 멀어지는 연합이 스스로 단합케끔 유도하는 원동력이 되리라.

“하, 이 누추한 곳에서 듣기에는 너무나 심원한 구상이군그래.”

플레톤이 웃으며 평했다.

“나는 저 보헤미아 촌놈들의 실험이 성공하리라 믿지 않네. 하지만 그 자부심 가득한 친구들이 저들이 틀렸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할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 이곳 우애의 도시에 먼저 이상향을 세워보도록 하지. 다른 주들이 우리의 성과와 진보를 보고 감탄하여, 스스로 배우고자 찾아올 수밖에 없게끔.”

“아마 지금쯤 후스 선생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겠지요.”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결국에는 내가 이길 텐데.”

“아마 후스 선생님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을 거예요.”

“다시 말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농담 따먹기와 미래에 대한 진중한 고민을 오가면서.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자크 다르크가 놀러 나갔다가 저녁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딸을 찾아 온 동네를 뒤지고 다닐 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오늘의 담화가 대서특필된 신문이, 곧 저 남쪽의 잉글랜드인 정착지를 포함해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리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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