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112화 (112/116)

그대와 함께 흔들면서 (5)

유럽의 떠오르는 패자 덴마크의 국왕이자, 그 덴마크가 중심이 된 칼마르 동맹의 수장이자, 플랑드르의 주인이며, 한자 동맹의 가장 가까운 벗이요, 관용과 자비로 이름난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측근이며,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북쪽 빙해氷海의 군주이자 자칭 신대륙 연합의 후원자.

이것이 바로 한때 포메른의 에릭이라 불리던 왕의 길고도 긴 별칭이었다.

“하지만 코펜하겐의 평범한 시민들은 훨씬 짧은 별칭을 선호하더군요. ‘현명왕’ 에릭이라고요.”

나날이 번창하고 있는 도성 코펜하겐 교외에 으리으리하게 새로 지은 왕성. 사치스러움으로 번뜩이는 듯한 복도를 에릭과 함께 걸으며, 교황청 특사 장 제르송 박사가 운을 떼었다.

“현명왕이라! 하!”

“그리 달갑지 않으신가 보군요.”

“달가울 리가 있겠소? 평민들은 맹견과 같소이다. 넙죽 엎드리고 있는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으니, 눈앞에 신선한 고기를 들이미냐, 빈손을 내미냐에 따라 비굴하게 배를 까뒤집기도 하고 갑자기 주인의 목덜미를 노리고 달려들기도 한단 말이지.”

장 제르송이 평범한 농민 출신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은, 에릭이 평민과 귀족을 평등하게 멸시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뒤집어 말하면 내 손에 먹거리가 들려 있는 한 주인을 물지는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지. 소위 귀족이라는 자들 태반은 만족을 모르고 상전을 물어뜯을 궁리만 하니까, 평민들이 그들보다는 현명한 셈이오.”

그리고 아직까지 에릭은 자신이 아군으로 삼은 평민들에게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치세를 베풀고 있었다. 그는 귀족들의 살점을 뜯어 부유하지만 평민일 뿐인 상인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상인들은 기꺼이 국왕의 권력을 위해 저들의 재산 일부를 바쳤으며, 귀족 대신 국왕의 세리와 상인들에게 뜯기게 된 평민들은 국왕 대신 같은 평민인 상인들을 헐뜯었다.

“그러니 현명왕이라는 아첨 섞인 별명은, 딱 그 뜻일 뿐이오.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고기가 저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내 손의 고기가 떨어지면, 바로 그 이튿날부터는 ‘완고한 에릭’, ‘인색한 에릭’, 종국에는 ‘폭군 에릭’이라는 멸칭으로 나를 부르게 되겠지.”

“그리고 계속 ‘현명왕’으로 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이어가셔야 할 테고요.”

기나긴 복도를 지나, 역시 화려하게 꾸며진 응접실에 들 무렵, 제르송이 슬슬 본론을 꺼냈다.

이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까닭은 단 한 가지, 어디선가 계속 부를 끌어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비단 덴마크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낙오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잉글랜드와 덴마크의 뒤를 추격하는 다른 모든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우리의 명백한 운명 아니겠소? 한 번 그 문턱을 넘어선 이상, 돌아갈 수는 없소.”

북해에 종종 들이닥치곤 하는 폭풍처럼 유럽을 휩쓴 시그리드 리프트라사는, 교회와 기사의 시대가 끝났음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피사 공의회로 세워진 교황도, 화약과 불경스러운 지식의 힘을 빌린 마녀 한 사람 앞에 농락당하고야 말았다.

겨우 명맥만 이어가던 옛 시대의 질서는 그렇게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시대의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 에릭은 그것을 결정할 힘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시그리드가 가진 지식, 그것이 곧 답이었다.

기사의 시대를 끝내는 것은 총이었고, 총을 만들고 그것으로 보병대를 무장시키기 위해서는 이전에 비할 수 없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조금 큰 영주가 작은 영주들 여럿을 거느리고 지내던 시절의 주먹구구 재정이 아니라, 짜임새 있는 정부와 관료제 아래서 모든 것이 톱니바퀴 맞물리듯 움직여야만 했다.

교회의 시대를 끝내는 것은 인쇄술이었다. 인쇄술이 약속하는 새로운 힘,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하는 그 권력을 손에 잡기 위해서는 국왕의 정부가 한 발 앞서 학교를 세우고, 평민들을 교육하며, 그들이 교회 대신 국왕의 말씀을 진리로, 로마나 예루살렘이 아닌 코펜하겐을 그들 마음의 수도로 삼도록 만들어야 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이어질 줄만 알았던 원무圓舞의 시대는 끝났소. 이제는 무한히 앞으로 달려가는 시대. 뒤쳐지는 자는 그대로 뒤쳐지고, 그저 선두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전력을 쥐어짜야만 하는 시대란 말이오.”

그리고 에릭 홀로 알아낸 줄 알았던 정답은, 이미 다른 나라들도 눈치껏 알아채고 있었다. 에릭의 언행과 정책을 베낀 것이든, 아니면 이미 저들도 모르는 사이 일어나고 있던 추세를 비로소 깨닫고 그 흐름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것이든, 중요한 것은 이제 무한한 추격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쥐어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어디선가 꾸준히 부를 끌어오고, 나라를 넓히며, 국고를 확충해나가야만 하는 것이오.”

장 제르송이 이곳 코펜하겐에 파견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공범으로 삼고자 하신 것인지요?”

“공범이라? 말이 지나치시구려. 대체 언제부터 이단을 상대로 십자군을 선포하는 것이 범죄가 되었소?”

“우리 두 사람에게 공통의 지인인 한 여인이 유럽을 훑고 지나간 이래로 그렇게 되었지요. 더구나 동서 교회가 비록 명목뿐이라지만 통합을 이루었는데, 모스크바 대공국을 상대로 북방십자군을 선포하는 것이 가능할 리 없지 않습니까?”

몇 달 전 로마에 전해진 에릭의 친서. 멀리 동쪽, 모스크바 대공국을 정벌코자 하니 이 정당한 전쟁을 십자군으로 선포해달라는 요청.

북방 삼국의 왕들이 그 옛날 북방십자군에 참전하여 노브고로드를 침공한 일이 몇 번 있기는 했지만 - 그린란드산 바다코끼리 상아가 그 군자금을 마련하는 데 요긴하게 쓰인 바 있었다 - 그것도 까마득한 옛일이었다.

이단 개종이라는 명분과 부유한 루스인들의 도시에서 뜯어낼 전리품이라는 실리가 겹치면서 이루어진 북방십자군 원정은, 유럽에 흑사병과 기근이 들이닥치고 - 더 결정적으로 - 타타르의 침공으로 루스 땅의 도시라 할 만한 곳 절반이 불타버리면서 거의 명맥이 끊겼다.

“듣자하니, 로마를 떠나기 전부터 답은 거절로 정해져 있던 듯하군.”

“바로 그렇습니다.”

“헌데, 그저 거절을 통보하는 일이라면 박사 같은 거물급 인사가 찾아올 것도 없었을 텐데, 굳이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가 있소?”

“교회는 덴마크의 정당한 국왕이신 에릭 폐하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이 전쟁을 바라시는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가급적이면 이를 만류하려는 목적도 있었지요.”

“솔직하시구만.”

“로마에 친서를 부치시기 전부터, 이미 교회의 입장이 어떻든 침공을 강행하려 마음을 먹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어떻게 설득하든 폐하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이제 알게 되었으니, 굳이 의도를 감출 이유도 없지요.”

때맞추어 시종들이, 뭔가 김 모락모락 나는 음료가 담긴 잔을 쟁반채로 가져와 두 사람 곁에 내려놓았다.

“아,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카카오로군요.”

“그렇소. 활력을 북돋는 음료지. 지금 제노바나 베네치아에서는 부르는 게 값이라고 들었소. 이곳 코펜하겐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니, 마음껏 드시오.”

제르송은 사양하지 않고 그 검고 씁쓸한 음료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에릭의 말마따나, 신대륙의 보화가 가장 저렴하게 들어오는 곳은 바로 이곳 코펜하겐이었다. 물론 항로가 개척되면서 점차 보르도나 런던, 카디스로 유입되는 신대륙 물산도 늘어나고 있었지만, 아직 그린란드 회사와 한자 동맹의 연계만큼 탄탄한 공급망을 마련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교회에서 내게 예의를 갖춰주었으니, 나도 나름대로 그대들을 존중해야겠지. 이대로 축객령을 내린다면, 내가 무슨 전쟁광이라서 갑자기 철 지난 북방십자군을 일으키려 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 않겠소?”

제르송을 따라 저도 한 모금 그 뜨거운 ‘바빌론 불지옥의 음료’를 들이킨 에릭이 말했다.

“일단, 무익한 전쟁은 결코 아님을 짚어두겠소. 실리는 분명히 있소.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가 리투아니아의 비타우타스의 하나뿐인 딸과 결혼하지 않았소이까. 모스크바와 대립하고 있는 노브고로드로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정황이지.

그래서, 노브고로드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소. 튜튼 기사단이 몰락한 지금, 동쪽 바다(발트해)에 남은 세력이라곤 우리 삼국동맹, 그리고 사실상 한통속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이렇게 둘 뿐이니, 선택지가 따로 없던 게지.”

군주들의 세력다툼에는 문외한인 제르송도, 덴마크가 루스 땅에 개입하는 것이 어떤 이익을 가져다줄 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노브고로드와 모스크바의 다툼을 이용해, 루스 땅의 대외교역을 독점한다면, 그 풍요로운 땅에서 나오는 곡식과 모피 수출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나날이 가혹해지는 겨울 덕택에 비싸게 팔리는 모피는, 신대륙 연합과 루스인들이 유럽 시장을 반분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에릭이 두 손으로 양쪽을 꽉 쥐게 된다면, 그 이익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그렇지만 명분은 없지 않습니까?”

“십자군만한 명분은 아닐지라도, 개전을 선언할 만한 그런 명분은 있소.”

에릭이 손뼉을 치자, 이번에는 다른 시종들이 액자 여럿을 들고 들어왔다. 양식은 모두 달라도, 그것이 누구를 묘사하고 있는지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저것은...!”

화가들이 각각 저들이 생각하는 미美를 담아서 그린 여인의 얼굴. 그리고,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은발.

“내 마음이 향하는 이. 신대륙의 여주인. 시그리드 리프트라사의 초상이오. 유럽의 화가라는 작자들이 죄다 교회에 어울리는 성화만 그릴 줄 아는지라, 좀 다른 양식으로 그 미모를 담아낼 수 있는 이들을 널리 구하였다오.

시그리드의 얼굴은 마치 어제 본 것처럼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소. 코펜하겐의 미녀라는 자들 여럿을 모아, 저이의 코, 그 옆 사람의 눈, 또 그 옆 사람의 턱... 이렇게 조합하여 초상을 그리되, 반드시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야 한다고 지시하였소이다.

그렇게 큰돈을 주고 초청한 화공 중, 모스크바 공국의 유명한 화가라는 자도 하나 있었지.”

에릭은 미인도와는 어울리지 않는, 동로마 성화 양식으로 그려진 초상화를 가리켰다.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라는 자의 그림이오. 시그리드를 그려놓으랬더니, 대천사 가브리엘과 성모 마리아가 반반 섞인 모습을 만들어놓았지 뭐요. 더 아름답게 그리라고 지시했더니, 인간의 관능官能에 대한 집착이 탐욕과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식으로 일장 설교를 늘어놓더군.

그자는 나를 모욕했고, 시그리드 리프트라사를 모욕했으며, 나아가 우리 덴마크를 모욕했소. 루블료프는 곧 추방될 것이며, 그 편으로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할 최후통첩도 함께 전해질 것이오.”

다른 초상화들은, 그 루블료프만큼 신념이 투철하지 못한 화가의 작품인지, 아니면 루블료프와 달리 덴마크 국왕의 총칼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것인지, 각각의 방식으로 미인을 그려놓았다.

제르송은 그 다른 그림들을 훑어보는 에릭의 눈빛을, 그 갈망과 집착을 못 알아보는 척하였다. 어차피 지금은 중요치 않은 문제였다.

“명분이야, 사실 말씀하신 저 그림보다 한참 못한, 어린아이 트집 같은 명분을 가지고도 수십 년간 전쟁을 벌여 온 유럽의 군주들이니 제가 무어라 말할 수는 없겠지요. 실리 또한 분명하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주님의 종으로서 요청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을 멈출 수는 없겠습니까?”

파리에 돌아가지 못하는 몸이 되어, 로마에 무기한으로 체류하게 된 제르송. 그 귀에 들려오는 소식은 하나같이 우울했다.

신대륙 개척을 위해, 다음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또는 느슨하기만 한 나라의 법도를 재정비하기 위해. 온갖 명목을 내세우며 나날이 높아지는 세금.

도시로 몰려드는 빈민. 그 빈민들을 농노보다도 못하게 부려먹는 상인. 그 상인들과 결탁한 군주들.

지금껏 평민들을 착취하면서도 동시에 보호해주었던 질서가 빠르게 무너지고, 그 뒤에는 날것 그대로의 욕망이, 더 강력한 무력과 부를 향한 갈증만이 남았다.

사색 속에서 잠깐이나마 내렸던 정적은, 곧 에릭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밀려났다.

“신대륙 연합의 헌법 얘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소.”

“비록 파리 대학에는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그곳의 학자들과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곤 합니다.”

지난날 선거 유세에 동원되었던 파리 대학 학자들을 통해 신대륙 이야기를 들었다는 뜻이었다.

“듣자하니, 그 영토를 여러 영지로 쪼개고, 각각의 영지마다 저들 원하는 법과 질서를 세우도록 하겠다더군.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한편으로는 헛된 시도를 하는 연합의 주인을 연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옳았음을 깨닫고 안도하였소.”

에릭은 알고 있었다. 시그리드의 비밀은, 결코 마법이나 주술, 악마와의 계약이 아니라 엄연히 이 땅에 존재하는 출처 불명의 지식에 있음을.

그 지식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에릭은 그 지식이 어떤 세상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알아냈노라 확신하고 있었다.

채울 수 없는 갈등을 채워줄 부의 샘을 찾아 온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유럽. 마른 숲을 불태우는 산불처럼 온 세상을 휩쓸 그 탐욕의 불길.

만약 이 길이, 권력과 무력으로 점철된 이 길 말고 다른 정답이 시그리드의 검은 책 속에 있었더라면, 시그리드는 반드시 신대륙의 모두가 그 길을 택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시그리드 역시 알고 있는 게요.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그러므로, 어떻게든 더 나은 길을, 현실에 없을지도 모르는 그런 길을 찾고자, 나라를 여럿으로 쪼개다시피 한다는 수를 둔 게지.”

그 모험이, 가지 않은 길을 찾아 헤매는 그 여정이 성공할 수 있을까? 에릭이 아는 시그리드라면, 어쩌면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적지에 이르기 전, 이미 시그리드가 뚫은 항로를 따라 뻗어나가는 유럽 군주들의 손길이 먼저 그 앞을 가로막을 공산이 컸다. 시그리드가 무엇을 외치든, 유럽의 군주들이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일 테니.

대서양을 오가는 에릭의 첩자들이 알려 온 바가 정확하다면, 그런 충돌 - 이미 투슈판이라는 바다 건너 도시에서 한 번 벌어진 바 있는 - 은 곧 더욱 심각한 형태로 신대륙 연합을 엄습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충돌과 대립이 이어지고, 팽창에 사활을 건 유럽 군주들과 자신의 이루어질 수 없는 원칙을 굽힐 생각이 없는 시그리드가 생사결단을 벌이게 되는 날.

그날이 오기를 바라며, 그리고 그날이 닥쳐올 것에 대비하며, 에릭은 부국강병의 뜻을 단 한 번도 꺾지 않았다.

“그러한 나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확신하시는군요.”

제르송이 말하는 ‘그러한 나날’이, 시그리드가 실패하는 날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온 유럽이 지금의 덴마크처럼, 훨씬 차갑고 가혹하며, 항상 굶주린 야수처럼 화하는 날을 뜻하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어느 쪽이든 에릭의 답변은 정해져 있었으므로.

“그렇소.”

1422년 가을, 늘 그렇듯 제헌의회가 좋은희망에 소집되었다.

시그리드의 사실상 연방제 선언과, 새벽땅사람들의 연합 가입. 그리고 이 모든 변화를 주재할 헌법 제정 문제까지. 고민거리는 산적해 있었지만, 가재당이든 백송고리당이든 ‘이렇게 된 것 한 번 해보자’ 하는 결론에 도달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이미 헌법 전문前文은 플레톤과 후스의 손을 거치고, 의원들 손에 무자비하게 깎여나간 끝에 볼품없지만 간결한 형태로 윤곽이 잡혀 있었고, 남은 문제는 어떤 조항을 담아두고 어떤 조항을 뺄 것이냐, 각각의 조항이 적용되는 범위는 어떻게 정할 것이냐에 불과했다.

그간 이를 두고 대립하던 두 당 사람들이, 모처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중도를 택하기로 척척 합의를 보아나갔던지라, 의회는 근래 보기 드물게 평화롭고도 진취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후손들에게 부끄러울 것 같아 두렵구만. 우리가 무슨 무식쟁이들 모임이었던 줄 알 거 아냐.”

미사여구 가득한 헌법 조항들이 무미건조한 계약서 문구처럼 변해나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플레톤의 촌평이었다.

기나긴 전문을 ‘우리 국민들은We the people’으로 시작하는 딱 한 문단으로 줄여버리고, 그 다음부터 바로 연합 의회의 입법 권한을 무미건조하게 적어 내려가고 있었으니, 최소한 『바실리카Basilika』나 그 원전이 된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문헌들보다 나은 문장을 남기고자 했던 플레톤으로서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후손들은 문장을 쉽게 써줬다고 감사해하지 않을까요? 헌법을 공부해야 하는데 무슨 난해한 문학 작품이 떡하니 나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자네 말이 옳기를 바라는 수밖에.”

오늘의 모임에서는, 각각의 주에 자치권을 인정하되, 외교권과 군 통수권, 그리고 대외교역은 연합정부의 몫으로 인정하기로 하는 부분까지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사이 좋은희망 맞은편에서는, 새벽땅사람들끼리 연합 가입을 두고 여전히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 부족 대표들이 야영하는 공터 한복판의 모닥불 연기가 아직도 기둥을 이루며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는데, 저쪽에도 저쪽 나름대로 논쟁거리가 많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적어도 이 헌법의 한 가지 목표는 달성된 셈이군그래. 무식쟁이들이나 쓸 법한 문장으로 헌법을 써내려갔으니, 유럽의 진짜 무식쟁이들도 능히 읽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저들의 벌여놓은 사업의 미래가 걸린 문제다 보니, 의원들은 이 헌법이 본디 연합의 국민 자신들뿐 아니라 유럽의 동포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깜빡 잊고 있었다.

신대륙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유럽의 혼란. 유럽의 군주와 유력자들이 그 혼란을 다스리도록 하고자, 유럽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감수하고 준비하고 있는 성경 번역본과 헌법.

성경 번역본이 그러하듯, 헌법 또한 쉬운 언어로 쓰일수록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헌법 번역할 사람이나 찾으러 가 보겠네. 문장이 조야할 만큼 단순하니, 번역할 사람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겠지.”

헌법은 당연히 공용어로 쓰이고 있었지만, 정작 신대륙 연합 인구의 절반 남짓은 - 대부분은 막 도착한 계약직 하인들이었다 - 공용어를 알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왕 헌법을 여기저기 공표할 바에, 조금 더 예산을 써서 영어(그러니까, 현대 영어와 저지독일어가 섞인 공용어 말고, 지금 쓰이고 있는 영어)와 저지독일어, 고지독일어, 그리고 프랑스어로 옮긴 글을 퍼뜨릴 예정이었다.

하인들을 거느린 공방이나 농장 주인들은, 하인들이 제게 헌법상으로 보장되는 권리에 대해 아는 것을 썩 환영하진 않았으나, 반대할 명분도 마땅치 않았고, 또한 진심으로 저들이 구대륙에서 농노 부리는 영주보다는 훨씬 도덕적이라 믿고 있기도 했던지라, 순순히 헌법 번역에 찬동해주었다.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아니, 다행히 그 담쟁이대학의 속성 교육 덕분에 문자를 아는 사람은 지천으로 널렸다네. 뺀질이 옌스 붙잡고, 저의 상무부에서 일하는 서기들을 민족별로 하나씩 차출하라 하면 그만이겠지.

그리고 의외로 하인들도 제법 빠릿빠릿한 자들이 많아서, 대충 발로 번역해도 야무지게 다 이해할 것 같긴 하더구만.”

“그런가요?”

“그 누구냐, 마사인가? 그 포도밭 주인 노릇하는 과부 있잖은가. 언제고 우애에 포도주 광고하러 왔었는데, 사람들 앞에서 하소연을 하더군. 요즘 일꾼들은 툭하면 권리, 권리 외치는지라 일 시키는 입장에서 곤란한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문득 시그리드는, 어쩌면 이 대륙에 ‘남이 시키는 것은 무조건 반대하고 싶어지는 저주’ 비슷한 무언가라도 걸려있지 않은가 하는 실없는 상상을 했다.

“아무튼 나는 일 보러 가 보겠네.”

“네, 내일 뵐 게요.”

플레톤과 작별한 시그리드는, 저의 집이 세워진 언덕에서 읍내로 걸어 내려갔다. 오늘은 의회 일 말고도 준비할 것이 따로 있었다.

그사이 제 몫의 할 일을 다한 황희와 양녕대군은, 가을 의회 구경한다고 남아 있었는데, 좋은희망의 몇 안 되는 명사들과 이야기 나누던 중 - 당연히 이는 양녕대군이 아닌 황희의 몫이었다 - 스노리 노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직도 나이 무색하게 정정한 스노리 노인은 올해로 나이가 여든다섯이었는데, 그가 원 지원至元 연간(1435~1340)에 태어났다는 것을 들은 황희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그대들의 동촌東村(동녘정착지) 고을이 빈궁하였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소이다. 허나 바다를 건너와 정착한 이래로 사정이 훨씬 나아졌는데, 미수米壽가 다 되도록 기로연耆老宴 한 번 열지 않는다면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소이까?’

‘법을 말하는 사람’을 얼추 대사헌 정도 되는 관직이라 지레짐작한 황희로서는, 신대륙의 검약이 도를 지나쳐서 거의 묵가墨家에 가까워졌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간은 생일을 축하한다고 해 봤자 딱히 뭔가 잔치랄 것을 치르지도 않았더랬다. 겨울이 가혹해진 이후로는 잔치고 뭐고 열 여력도 남지 않았으니, 설령 그런 전통이 붉은머리 에이릭과 행운아 레이프의 시대에 있었다 할지라도 수십 년 전부터는 끊어졌을 것이었다.

시그리드뿐 아니라 다른 그린란드 사람들도, 이번에라도 거하게 잔치를 열어주자는 황희의 제안에 동의하여, 다가오는 스노리 노인의 생일날 그린란드 출신 사람들끼리 연회를 열기로 하였던 것이다.

영락제가 제게 하사한 비단 중, 제 몫으로 챙겨둔 일부 - 나머지는 모두 바다 건너 유럽에 팔아 신대륙 재정에 보탤 작정이었다 - 를 꺼내, 옷을 만들어 스노리 노인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물론 좋은희망에 비단이라는 옷감을 만져본 사람이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호사스러운 옷도 아니요, 그저 노인이 편하게 입을 일상복 만드는 정도.

옷 만들어줄 사람을 찾아, 시그리드는 리프를 어깨에 올려두곤 부둣가까지 산책 겸해 걸어 내려갔다.

좋은희망에서 옷을 만든다 하면, 대개는 겨울을 나기 위한 가죽옷이었다. 배편으로 들어오는 모피를 가공해야 했고, 가죽 다듬는 과정에서 냄새도 꽤 많이 나기 마련이라, 피혁을 다듬는 이들과 재봉사, 갖바치 등등은 비슷하게 냄새 많이 나는 시설인 생선 창고들 근처에 모여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 따라 내려가는 길, 여기저기서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잘 지내시냐 안부도 묻고.

“배 들어온다!”

그리고 들어오는 배도 맞이하고-

“엥?”

눈 밝은 리프가 아니라, 그냥 사람인 시그리드의 눈으로 봐도 어째 이상한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다 낡은 코그선. 아니, 낡은 게 아니라 그냥 허술하게 만든 것이었다.

코그선이 오가는 항로는 보통 레이캬비크와 동녘정착지를 경유하는 북방 항로. 따라서 들어오더라도 개척만을 가로지르는 게 아니라, 좋은희망 동쪽의 수로를 통해 와야만 했다.

그런데 언제라도 침몰할 것처럼 기우뚱기우뚱하며 느릿느릿 다가오는 배는, 이민자 태운 코그 선도 아닌 듯하였다.

“어디서 오는 배지?”

“그, 우리 연합 배는 아닌 듯한데.”

“다른 바스크 사람들 배도 아니오.”

시그리드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게 아닌지, 시그리드가 부두에 닿을 무렵에는 벌써 구경꾼 여럿이 모여서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접안한다!”

“야! 야! 거기, 비켜!”

“닻줄 잡아줘라!”

“거기, 배에 탄 자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딴 식으로 접안하면 큰일 나네!”

항구에서 일하는 바스크 사람들과 그 하인들이 저들 말로 외치면서, 평소 하던 대로 하역을 준비하던 차. 저쪽 배의 답답한 일처리에 짜증을 느낀 누군가가 따져물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나더니, 피골 상접한 사람이 겨우 몸을 내보였다.

“뭐라고?”

“물, 물 좀 주십시오...”

공용어가 아니라, 그냥 영어. 그러나 시그리드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알아듣기는 충분했다.

그와 거의 비슷한 처지인 다른 사람들을 구조하고, 물과 옥수수 죽을 먹인 끝에, 겨우 그들의 정체를 들을 수 있었다.

“저희는 시그리드 님을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들키지 않으려고 몰래 빠져나오다 보니, 그만 먼 바다로 나와버렸지 뭡니까. 그때 이후로 하염없이 북쪽으로 향하면서, 이 배가 좋은희망이든 어디든 닿기만을 기도했습니다.”

“몰래 빠져나왔다고요?”

“예. 헨리타운에서 오는 길입니다.”

헨리타운이라면, 저 남쪽, 악어습지 반도(플로리다) 근처에 세워진 잉글랜드 정착지였다.

“헌법 얘기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부디 저희를 연합의 한 주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이대로는 못 살겠습니다.”

어설픈 식민지 운영과 기근에 시달리던 헨리타운에서, 이런 식으로 구조요청이 들어올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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