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이제 그만 (1)
26. 눈물은 이제 그만 (이만하면 그만) No More Tears (Enough is Enough) (1) -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 도나 서머¹
혼돈의 시대였다.
한때 폴란드 왕 요가일라가 애써 감추려고 했던 그룬발트의 진실, 일당백의 무용과 기개를 자랑하던 튜튼 기사단장 융잉엔의 울리히가 전직 해적의 탄환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이제 입소문으로 퍼질 대로 퍼져 정설이 되어버렸다.
기사 중의 기사로 칭송받던 프랑스의 자랑 부시코 원수도, 같은 기사의 랜스가 아닌 평민 보병대의 머스킷 일제사격 앞에서 차가운 시체가 되어 아쟁쿠르의 진창을 굴렀다.
공포가 모든 군주들을 사로잡았다. 어떻게든 새로운 시대의 군비경쟁을 따라잡지 못한다면, 그들 역시 프랑스 꼴이 날 터였다.
그러나 의외로 유럽 군주들 중 여건이 되는 이들은, 저들의 백성을 쥐어짜기보다는 다른 대안을 찾기를 바랐다. (물론 그렇다고 평민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늘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일요일에 교회의 문턱을 넘을 때 샘솟았다가 도로 밟고 나올 때면 사라지는 애민정신 때문은 아니었다.
‘농민들은 어차피 울타리 안의 양이다. 잡아놓은 가축을 도축하기 전에, 먼저 울타리 밖에서 사냥을 할 궁리를 하는 게 이치에 맞으리라.’
그렇다면 어디서 사냥을 할 것인가? 이미 덴마크 왕 에릭이 답을 보여주었다.
신대륙. 죄악과 부, 이교도와 이단이 가득한 땅.
지금껏 저들이 그것을 원하는지도 몰랐던 상품, 코코아와 담배는 마치 새로운 향신료처럼 유럽 시장을 휩쓸었고, 저렴한 신대륙 모피와 유리는 노브고로드의 모피와 베네치아의 유리를 빠르게 밀어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땅에는 황금이 있었다.
(황금이 많이 나온다는 왁샤칵의 계곡지대조차 사실 그렇게까지 산출량이 대단하지는 않다는 불편한 진실은, 신대륙 삼각동맹과 합스부르크의 프리드리히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영지에 항구와 조선소가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서쪽 대양 너머에 군침을 흘렸다.
도중에 ‘약간의 불미스러운 사고’가 있기는 했지만, 타이간(정화)이라는 물주가 갑자기 동쪽에서 나타나 아낌없이 베푼 투자 덕에 잉글랜드 국왕 헨리와 그의 제노바 후원자들은 신대륙에 두 번째로 손을 뻗칠 수 있었다. 베네치아의 후원을 받는 카스티야의 섭정들 또한 그 뒤를 따랐다.
이미 원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신대륙 연합 공용어 지명도 있던 섬과 바다에 새로운 유럽식 이름이 덧붙여졌다.
헨리타운, 누에바 카스티야, 뉴 브리스톨, 누에바 카르타헤나²...
하필이면 잉글랜드 국왕 헨리와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의 이름이 라틴어로는 둘 다 헨리쿠스Henricus였던지라, 우후죽순으로 헨리카나Henricana가 생기면서 저들끼리 ‘북 헨리카나’, ‘남 헨리카나’, ‘새 헨리카나’ 등을 따지게 되는 촌극도 종종 벌어졌다. 저들의 물주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신대륙을 마냥 바빌로니아라 부를 수는 없었기에, 빈란디아라는 대륙명이 점차 굳혀지는 의외의 현상도 나타났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저 국왕의 대리인 (혹은 대리인과 사기꾼 사이의 애매한 사업가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신대륙으로 넘어온 빈농과 도시 빈민들에게는 그저 머나먼 이야기였다.
흑사병 이후로 언제는 편할 때가 있었겠냐만, 지난 몇 년 사이 유럽의 평범한 농민들이 체감하는 생활고는 유별나게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신대륙에서 저들의 운을 시험해보라는 말에 넘어갈 수밖에.
“악어습지 반도에 식민지를 세워놓고, 그곳을 무역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는 말이냐? 별다른 준비도 없이 막무가내로?”
스노리 노인 생일도 축하할 겸, 헌법 제정 참관도 할 겸, 나중에 여차하면 그린란드도 주로 편입할 수 있게 밑밥도 깔아놓을 겸 - 암만 덴마크 왕이 노르웨이 국왕도 겸하고 있다지만, 그건 그쪽 사정이고 그린란드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냥 남이었다³ - 찾아온 파울 주교가 시그리드에게 물었다.
“하소연하다 말고 하나둘씩 탈진해버려서 사정을 다 듣지는 못했지만,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스노리 노인의 생일 잔치를 위해, 모처럼 좋은희망에 모인 그때 그시절 동녘정착지 사람들. 그러나 뜻밖의 사태로 온 좋은희망이 뒤숭숭했기에, 기껏 잔치를 열었건만 다들 마냥 들뜰 수만은 없었다.
“스베인 그 녀석 살이 불은 것 가지고서 놀리려고 했는데, 그럴 분위기가 아니겠군그래.”
“스베인 아저씨를 놀린다고요? 교회의 사람이 그래도 되나요?”
“내가 알기로는, 성경에 대머리를 놀리면 큰일난다는 구절은 있어도 배불뚝이 놀리면 안 된다는 구절은 없는데.”
처음에야 앙숙이었지만, 함께 모험을 겪으며, 스베인에게 미운 정이 제법 들었던 파울이었다. 잠깐 옛날 생각에 빠졌던 파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말투를 도로 진중하게 고쳤다.
“몇 년 만에 다들 한 자리에 모이는 자리 아니냐. 원래 회포 푸는 것 말고도 따로 하려던 얘기가 있었는데, 보아하니 다들 그 식민지 얘기만 할 것 같구나..”
비단 그린란드 사람들뿐 아니라, 좋은희망의 거주자들 모두가 당장 열리고 있는 제헌의회나 새벽땅 주(가칭) 편입은 제쳐놓고 헨리타운에 닥친 비극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우리 그린란드 사람들은 자연스레 십오 년 전 동녘정착지를 떠올릴 테니까.”
혹독한 겨울이 가져올 파멸에서 애써 등 돌리던 그린란드와, 오지 않을 미래에 ‘꽃의 땅Florida’이라 불릴 만큼 날씨가 온화한 곳에 세워진 헨리타운에는, 유럽에서 하던 대로 농사와 목축을 하려다가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의 파울의 예상대로 되었다.
그린란드에서 쓰이는 푸사크futhark(룬 문자의 일종)와 공용어 알파벳으로 ‘생신 축하드립니다’가 적힌 능라비단 - 중국 황제의 회사품 세례로 인해 비단이 갑자기 흔해진 탓이었다 - 이 현수막처럼 드리워진 상공회의소에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잉글랜드 개척민 이야기만을 하고 있었다.
중간에 스노리 노인이 손녀딸 잉그리드와 증손주 욘과 함께 들어와, 모두의 축수를 받고, 시그리드가 마련한 비단옷을 필두로 온갖 선물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잔칫상 곳곳에서는 온통 헨리타운 어쩌고저쩌고뿐,
파울의 예상이 빗나간 부분은, 그린란드 사람들뿐 아니라 잔치에 참석한 다른 민족 사람들도 다 그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그리하여 도움을 청하러 뗏목이나 다름없는 그 조악한 배에 몸을 맡기곤 바다로 나왔다는 걸세.
들키지 않으려고 해안에서 멀리 벗어나다 보니, 가뜩이나 뱃일에 익숙지 않은 판에 아예 항로를 벗어나 버렸고. 대책 없이 무작정 북상한 끝에 이곳에 닿았으니, 실로 기적과 같은 일 아니겠는가.”
막 푸른들판이나 남녘정착지에서 찾아왔기에 소식이 조금 어두웠던 이들에게 침 튀기며 떠들고 있는 이는 바로 플레톤이었다.
황희가 기로연에 대해 설명하던 중, 격무에 지쳐 있던 하산이 잠깐 단어 선택에서 실수를 범하는 바람에, 마치 ‘그토록 유서 깊다는 너희 로마에도 이런 전통은 없지 않느냐’ 하며 약올리는 투로 번역이 되어버렸다.
의도치 않은 격장지계激將之計의 효과는 굉장하여, 잔치 주인공인 스노리 노인보다도 먼저 찾아와서는 이렇게 수다를 떨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잉글랜드에는 팅 같은 게 없나 봅니다? 왜 정식으로 사절을 보내지 않고 저렇게 어려운 길을 왔는지 모르겠군요.”
남녘정착지에서 온 그린란드 출신 사람들이 순진하게 물었다.
“저들의 곤경은, 절반 이상은 저들의 상전 노릇 하고 있는 놈들 탓이기 때문이지.”
혹독한 겨울과 거칠어지는 바다, 유럽에 닥친 흑사병 탓이었던 동녘정착지의 곤경과 달리, 헨리타운은 경영 미숙이 곤경의 근본 원인이었다.
물론 이는 식민지 개척을 주도한 존 올드캐슬이나, 그 후원자인 잉글랜드 국왕 헨리가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들이 참고할 수 있는 사례가 신대륙 연합뿐이라는 점이 문제였을 뿐.
‘그곳의 기후는 유럽과는 다르지만, 농경이 어렵다면 목축을, 목축이 어렵다면 고기잡이를 하면 그만이다. 땅은 넓고 사람은 적으니, 식량이 부족할 리 있겠는가?’
윗사람들의 이런 의도를 간파한 이민자 모집책들은, 농경이든 목축이든 딱히 경험이 없는 어중이떠중이 빈민들을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잘 할 수 있는 인재라고 포장해 올드캐슬에게 보냈다.
‘그러고도 식량이 부족하다면, 원주민과 교역하면 될 것이다. 그들은 철기도, 직조술도 없는 야만인이니, 잉글랜드의 시장에서 헐값에 구할 수 있는 잡동사니만으로도 충분히 먹거리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신대륙 개척에 열의를 품은 유럽의 권력자들은, 시그리드가 공용어를 만들고, 칼라알릿과 일라, 니놀리노 부족민들을 시작으로 처음부터 원주민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구축하려 부단히 노력했음을 알지 못하였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아아, 이것은 쇠붙이라는 것이다’라면서 바늘과 도끼, 단검 따위를 내밀기만 하면, 야만인들이 알아서 곡식을 가져다 바치고 이쪽의 언어를 배우며, 참된 신앙을 받아들이고 문명인들의 충실한 종복이 되리라 기대했을 뿐.
그렇게 활짝 펼쳐진 행복과 낙관의 나래가 현실의 풍랑 앞에 꺾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⁴.
겨울은 충분히 춥지 않았고, 여름은 너무나 덥고 습했기에, 농사는 그대로 망해버렸다.
분명 좋은희망 앞바다에는 그물만 드리우면 생선이 그득 잡혔다 하였는데, 없는 솜씨로 겨우 만든 고기잡이배는 고작해야 잡어 약간을 잡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그곳의 얕은 바다나 강가에 용이 살고 있어서 어렵다더군!”
“용이라고요?”
어느새 그 곁에 다가와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스베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어르신, 배우신 분이 그리 말씀하시면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용이 아니라 그냥 악어라는 짐승이래요. 제가 시그리드랑 투슈판 오가면서 몇 번 보기도 했는데, 평범한 짐승일 뿐입니다. 좀 크고 사나와서 그렇지.”
“그거나 그거나, 흉포한 도마뱀이라는 건 똑같지 않나.”
어업마저 수포로 돌아가자, 올드캐슬은 마지막으로 교역에 희망을 걸어보았다. 하지만 근처의 티마쿠아Timacua 부족들은 딱히 관심이 없었다.
황금이나 모피는커녕, 남는 곡식도 별로 없었고, 그나마 교역할 만한 재화는 간혹 투슈판과 신대륙 연합을 오가는 교역선이 식수를 보충하러 해안에 정박할 때 그곳으로 찾아가 모조리 교환하곤 했기에, 새로 찾아온 이방인들과는 교역할 이유도, 그럴 여유도 없던 탓이었다.
허나 애초에 이런 상황을 상정한 적이 없던 존 올드캐슬과 그 측근들에게는 그렇게 해석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 이렇게 땅이 넓고 기후가 온난한데, 우리에게 줄 곡식은 없다니? 필시 저 이교도 야만인들이 무언가 앙심을 품고 우리를 적대하려는 것일 테다!’
원주민들이 교역에 관심이 없다면, 힘으로 빼앗는 수밖에.
그러나 정말로 원주민들은 가진 게 딱히 없었고, 가뜩이나 경계를 받던 판에 앙심까지 사게 되었다⁵.
“그리하여 기껏 불 놓아서 개척한 농지는 습격이 두려워 일구지 못하게 되고, 곧 개척민 대부분이 굶주리게 되었다 하네. 그나마 남은 식량은 경비로 쓰려고 데려온 용병들이 독점하고 있고⁶.”
“헌데 그 올드캐슬인가 하는 자는 뭘 하고 있답디까? 일전에 보았을 때는 그리 못된 놈 같진 않던데.”
“내가 괜히 서방 사람들의 행정을 주먹구구라고 비웃는 게 아닐세. 올드캐슬이 식량 원조를 구하러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사정이 더 악화되었다더군.”
올드캐슬은 제 부관인 제노바 사람 란치아 콜롬보Lancia Colombo⁷에게 뒤를 맡기고 떠나곤, 몇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줄어드는 식량 재고, 흉흉해지는 개척지 민심, 그리고 갑자기 제게 떠넘겨진 중임 가운데서 콜롬보는 나름 최선을 다했다. 그는 모든 것을 규정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방침대로 처리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최악의 결과로 향하는 지름길이었다.
‘이제부터 식량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배급제를 시행할 것이다. 모든 식량은 요새의 군량고에 보관할 것이며, 필요할 때만 바깥으로 낼 것이다.’
몇몇 개척민들이 항의해보기도 했으나, 콜롬보는 이 개척지의 규정이자 유일한 법이라 할 수 있는 헨리타운 정착 면허장을 내보일 뿐이었다.
‘배급량은 충분하며, 올드캐슬 경은 곧 돌아오실 것이다!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는 처벌받을 것이다!’
식민지 경비를 맡은 용병들의 임무는, 비단 원주민들의 습격뿐 아니라 계약직 하인들의 탈주나 자유로운 행동을 막는 것도 포괄하고 있었다.
‘제기랄,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단 말이오!’
‘정착지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임무에 따라, 정착지에 필수적인 이들에게 배급 우선순위를 주고 있을 뿐이다!’
‘이대로는 우리 모두 죽게 생겼소! 정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면, 우리가 어디 다른 데로 갈 수 있게 배를 내어주시오!’
‘헨리타운 정착 면허의 22번 조항Catch-22에 따라, 너희들은 허락 없이 이곳 헨리타운을 떠날 수 없다!’
‘우리가 글 못 읽는 것 아시지 않소! 그렇게 말해봤자 못 알아듣는다고!’
‘22번 조항에 따라, 너희들의 계약은 계약이 만료될 때, 혹은 너희가 부득이하게 계약을 이행할 수 없게 되어을 때까지 유효하다.
너희에게 바깥에 나가 도움을 청할 여력이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곳 식민지의 생존을 위해 바칠 힘이 남아있다는 뜻이지. 따라서 배를 내어달라는 청원은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떤 책임도 지고 싶지 않았던 콜롬보는, 제게 주어진 불합리한 규정을 문자 그대로 따랐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저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으니까.
“아, 그래서 그냥 식량을 달라고 한 게 아니라 우리네 연합에 가입하겠다고 한 게로군.”
“그렇지. 식량이 없는 게 아니라, 그 식량의 주인 노릇하는 놈들이 문제였으니까.”
헨리타운이 생겨난 이후로, 투슈판과 우애, 좋은희망을 오가는 무역선은 가끔 헨리타운에 기항하곤 했다. 궁핍하기로는 헨리타운이나 그 울타리 밖의 원주민이나 매한가지였기에, 교역은 언감생심이었지만, 간혹 악천후를 만나게 되면 아무 바닷가에 배를 대는 것보다는야 항구 시늉이라도 내는 정착지에 대는 쪽이 나았던 것이다.
몇 년째 질질 끌고 있던 헌법 이야기가 헨리타운에 흘러들어간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명색이 의원인 구드룬이 물었다.
“그건... 아직 합의가 안 되긴 했지만, 행정부 내에서 논의를 거쳐야 할 일이지.”
그 대화를 조용히 먼발치서 듣고 있던 시그리드 등 뒤에서 익숙한 지팡이 짚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행정부의 논의라. 내 어려운 말은 잘 모르지만, 그 행정부라는 건 결국 시그리드 네 뜻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계속 앉아서 대접만 받다 보니 좀이 쑤신다며, 잉그리드 부축을 받아 잠깐 잔치 자리를 떠났던 스노리 노인이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네, 맞아요. 사실 그렇게 답을 내기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모두가 이견 없이 받아들인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 국민은,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리, 즉 자신의 노력에 따라 소유하고 자신의 영혼에 따라 신앙을 믿으며, 자신의 꿈에 따라 행복을 누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다음과 같은 헌법을 세운다. 이 헌법은 민족과 출신, 언어와 신앙, 태어난 곳과 사는 곳에 따른 그 어떤 차등과 제한을 받지 아니하고 온 연합에 적용된다.’
심심하다면 심심하지만, 해야 할 말은 다 적어놓은 전문.
그리고 그 전문이 담긴 헌법이 완전히 발효되기도 전, 벌써부터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하는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인간이 연합 근처에 있다면, 그 이웃들이 부당한 처지를 벗어나고자 연합의 손길을 바란다면, 이를 위해 연합은 자국민의 이익을 희생해가며 도움에 나서야 하는가?
“이익이 되지 않는다...”
신대륙 연합의 재정을 책임지는 덴마크에서는 칼마르 동맹 소속이라고 주장하고 신대륙에서는 당연히 신대륙 소속이라 여기는 그린란드 회사. 연합의 상무장관 옌스는, 따지고 보면 위에 시그리드 말고도 다른 상전을 모시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린란드 회사가 마르그레테 여왕의 인장이 찍힌 종이 한 장에 불과했을 때부터 사장으로 재직했던 파울에게, 그 정도 손익계산은 여반장이었다.
“엄연히 잉글랜드 국왕의 이름으로 세워진 헨리타운을, 우리가 냉큼 연합 소속으로 선언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 입장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고요.”
이렇다할 특산품도, 자원도, 하다못해 풍요로운 농지도, 어장도 없는 곳에 세워진 헨리타운.
백송고리당 입장에서 보면, 신대륙 교역망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해운이 훗날 대단한 강 수운으로 완전히 대체된다면 더욱 쓸모 없는 땅이 되리라.
가재당 입장에서 보아도, 딱히 연합의 국세를 들여가며 도울 이유가 없었다. 농지가 비옥한 것도 아니요, 그 땅을 지켜주는 만큼 연방 재정이 보충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지난 1419년이나 돌아오는 1423년 벌어질 선거처럼, 비교적 공정한 조건 하에 민의를 반영하여 이루어지는 선거로써 헨리타운 사람들이 편입이라는 결론을 내린다면 신대륙 연합 입장에서는 이를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할 것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선거가 이루어질 수 없는 환경이라면, 연합 차원에서 (아직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국력을 기울여 남을 도우러 나서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쉽사리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였다.
“먼 옛날, 아직 내 허리가 꼿꼿하고 머리가 노랬을 때, 호콘 국왕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르는구나.”
마치 신의 징벌과 같은, 혹은 오래된 신들의 이야기에 전하는 세상의 종말과도 같은, 가혹한 서릿발과 공포스러운 역병의 시대. 그때 도움을 청하러 노르웨이에 찾아갔던 그린란드인들 또한, 도저히 도울 길이 없다는 답만을 받고 허탈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어느새 그 그린란드에서 시작한 신대륙 연합은, 그 반대 처지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문제겠지. 네 어깨에 실린 무게를 눈과 귀 죄다 어두워진 늙은이가 알면 얼마나 알겠니.”
저도 모르는 새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음을 깨닫는 시그리드였다. 스노리 노인 앞에 서면, 그 옛날 철부지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다.
“피곤하구나. 해도 슬슬 저무는데, 연회도 파하고, 다들 돌아가라 해야겠다.”
그리고 시그리드는, 스노리의 손녀딸 잉그리드가 마치 자신이 옛날에 스노리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떠올렸다.
어깨가 한 번 더 무거워지는 느낌.
‘너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는 말려무나. 네 곁에는 이토록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고, 또 그 떠벌이 젊은이가 남기고 간 책도 있지 않더냐.’
스노리 노인의 목소리였을까? 아니면 마음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였을까?
그제야 시그리드는, 앞서 파울이 뭔가 하려던 말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불가능해 보이는 양자택일 앞에서 방법이 없다고 절망하는 것은, 시그리드의 품성에도, 그 몸에 흐르는 피에도 어울리지 않는 일.
그 옛날 가르다르의 누추한 집에서 함께 세계지도를 보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시그리드는 파울을 찾았다.
파울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스스로 생각하는 이상적인 해법 한 단락 정도는 보태줄 수 있었다.
그리고 스베인이 끼어들고, 참견 하면 어디 가서 지지 않는 플레톤이 끼어들고.
연회는 파했지만 하객들은 그대로 남은 채, 그 자리에서 중의가 모였다.
신대륙 연합의 시찰을 마치고, 그 헌법 조문이 완전히 확정되어, 내년 선거 직전에 정식으로 반포하기로 합의하는 것까지 살핀 황희는, 양녕대군과 함께 아카풀코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영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테오도로스를 졸졸 따라다녔고, 테오도로스도 장영실이 속성으로 대충 배운 헬라스어만으로도 벌써『기하원론』을 떼었다며 어쩌면 저보다 더 천재 같은 제자를 얻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다녔다. (얼자로 태어난 황희 역시 그것을 보며 영 묘한 감정 솟구치는 것을 금치 못했다.)
‘서방요순’이 정말로 검소한 집에서 살아가는 것부터, 공부자의 말씀 외에도 다른 성현의 말씀이 있다는 것, 이 땅에서 새로이 위정爲政의 도리를 갖춰나가는 것까지, 보아야 할 것은 모두 보았으며, 이제는 모두 기록으로 남겨 조선으로 부치는 일이 남았다.
그런데 좋은희망의 항구에서 막 투슈판으로 향하는 범선을 타려던 차, 황희는 자신이 타야 할 바로 그 배에 예정에 없던 화물이 실리는 것을 보았다.
“이 배는 투슈판으로 가는 도중에 근래 다소간 소란이 발생했다는 풍문이 도는 헨리타운을 지나치게 됩니다. 마침 그곳에 볼일이 있어서, 이 배를 잠깐 빌리게 되었지요.”
아직 황희가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그 ‘회사’라는 곳의 사장이라는 상제교上帝敎 주지 파울이 말했다.
“헨리타운? 영란, 그러니까 잉글랜드가 꾸렸다는 그 마을 말씀이시오? 거기에 무슨 볼일이 있으시기에...?”
“정확히 말하면 제 볼일은 아닙니다. 여기 이 사람이 맡은 일이고, 저는 그저 자문차 동행할 뿐이지요.”
인부들 사이에 섞여 궤짝 나르던 건장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거한과 구면이던 하산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하산보다 훨씬 섬뜩한 방식으로 거한과 첫 대면을 했던 황희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헌법이 규정한 호국경의 권한과 직무에 따라, 엊그제 새로 창설된 관아의 장을 졸지에 맡게 된 라그나르의 아들 스베인이오.”
그러나 두려움은 사사로운 것이요, 신대륙 사정을 세세히 기록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맡은 공무. 황희는 감정 드러나는 것을 억누르며 스베인에게 물었다.
“이곳 합중국의 율령과 법도 중 기록할 만한 것은 모두 들었다 여겼는데, 그사이 또 새로 관아가 생겼다니 놀라운 일이오. 혹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안 될 것 없지. 지도정보국Cartographical Information Agency이라오.”
줄이면 CIA가 될 텐데, 그 세 글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황희도, 스베인도 알지 못했다.
“언뜻 이름이랑 별 관계 없는 것 같기는 한데 - 아마 그게 본 목적일지도 모르겠소 - 아무튼 연합의 공무를 수행코자 가는 길이오.”
궤짝을 탕탕 두드리는 스베인이었다. 안에 뭔가 묵직한 게 들었는지, 살짝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헨리타운에 민주주의를 배달하러 갈 것이오. 그곳 사람들이 저들 의지로 저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도록.”
“국세 한 푼 안 들이고 말이지요.”
파울이 사족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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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래 제목에 부제인듯 부제 아닌 어정쩡한 무언가가 붙어 있는 사연은 이렇습니다. 1979년 각각 솔로 활동을 하던 도나 서머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함께 부른 이 노래는, 처음부터 각자의 앨범(도나 서머의 온 더 라디오On the Radio와 스트라이샌드의 웨트Wet)에 따로 수록되는 조건으로 녹음이 성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스트라이샌드 쪽에서는 앨범 이름대로 해당 앨범의 모든 곡에 물과 관련된 제목과 가사가 들어갈 것을 요구했고, 그 결과 원래는 ‘이만하면 그만’ 하나뿐이었던 노래 제목에 사족이 붙게 되었지요.
그리고 1970년대 디스코의 전성기가 끝나면서 도나 서머의 인기도 조금씩 시들해진 반면, 스트라이샌드는 80년대는 물론이고 2010년대까지도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할 만큼 활발하게 미국 국민가수로 활동하고 있지요.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노래의 제목은 ‘눈물은 이제 그만’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 스페인 남부의 항구도시 카르타헤나는, 지중해와 대서양 양쪽으로 나아가는 거점 항구로서 예로부터 번영했습니다. 대항해시대 이후에는 중남미 곳곳에도 동명의 도시가 세워지게 되지요. 카르타헤나는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가 세운 식민지를 로마인들이 ‘새 카르타고Carthago Nova’라 부른 것이 어원이고, 그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어 지명 ‘새로운 마을Qart Hadast’를 라틴식으로 읽은 것이니, ‘누에바 카르타헤나’는 그 어원을 따지면 ‘새로운 새로운 새로운 마을’이 되는 셈입니다.
3. 그린란드의 관점에서 보면 ‘포메른의 에릭’은 정말로 남이 맞습니다. 1380년 호콘 6세가 사망하면서, 맨 처음 그린란드가 노르웨이 치하로 들어갔을 때부터 이어졌던 왕통은 끊어졌고, 그린란드 사람이 마르그레테나 에릭을 군주로 섬기겠노라 맹세한 적도, 노르웨이 국왕의 배가 그린란드에 닿아 충성 서약을 받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4. 작중 헨리타운이 처한 곤경은, 원 역사에서 버지니아에 최초로 세워진 영국 식민지 제임스타운Jamestown이 겪었던 ‘굶주리던 시절Starving Time’에서 유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작중 헨리타운과 마찬가지로, 제임스타운도 신대륙으로 향할 수밖에 없던 빈민들을 덩그러니 신대륙에 던져놓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작중 헨리타운에서와 달리 제임스타운 근처에는 비교적 인구가 많고 사회가 복잡하여 사치품 구매력이 있던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개척자들은 이들 원주민들 중 가장 유력했던 포우하탄 족(사람 빽빽한 땅Tsenacommacah 연맹)을 적으로 돌리는 실책을 저질렀고, 그 결과 교역으로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기는커녕 겨우 꾸린 농지마저 포우하탄 족의 습격으로 유린당하게 되지요. 이로 인해 1609년 겨울 5백 명에 달했던 제임스타운정착민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고, 살아서 이듬해 봄을 맞이한 정착민의 수는 61명에 불과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제임스타운은,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성공한 축에 드는 정착 시도였습니다. 1백여 명의 개척민이 ‘크로아토안CROATOAN’이라는 정체불명의 문구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져버린 로어노크Roanoke 식민지, 북미 최초의 조선소를 세웠으나 - 이전에 작가의 말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 정작 농사는 짓지 못해 실패한 포펌Popham 식민지 등과 달리, 제임스타운은 아사하거나 병사하는 정착민보다 더 많은 수의 이주민을밀어넣음으로써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포카혼타스와의 결혼으로 유명한 상인 존 롤프가 담배의 상업적 재배에 성공한 것도 크게 기여했지만요.)
5. 원 역사에서 작중의 헨리타운이 세워진 플로리다 북동부 해안에 세워진 최초의 유럽인 식민지는 탐험가 장 리보Jean Ribault가 이끈 프랑스 신교도(위그노) 정착지 포르 드 라 카롤린느Fort de la Caroline(“샤를의 요새”)였습니다. 당시 이 지역을 포함해 플로리다 반도 북부에 분포하던 티무쿠아Timucua 인들은 단합된 국가 없이 여러 부족이 난립하는 상태였는데, 위그노 정착민들은 그중 유력했던 사투리와Saturiwa 부족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이 지역에 비교적 순조롭게 정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교도였던 위그노 정착민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구교도였던 스페인 원정대의 침공으로 학살당했고, 사투리와 부족을 포함한 플로리다 원주민들도 18세기가 되기 전 유럽발 전염병으로 전멸하게 됩니다. 그 빈자리는 북미 북동부에서 유럽인 및 유럽인과 연합한 다른 원주민들에게 밀려난 세미놀Seminole 인들이 메꾸게 되지요. 이들은 유럽인들에게 훨씬 적대적이었고, 남북전쟁 직전까지 플로리다의 늪지를 거점으로 삼아 저항을 이어가게 됩니다.
6. 실제로도 북미 개척 초기 식민지들은, 농장보다도 요새 같은 방어시설을 먼저 건설하곤 했습니다. 이는 원주민들뿐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의 습격도 염려했기 때문이었지요. 이전에 언급된 바 있던 뉴욕의 월 스트리트도 이러한 요새화의 흔적입니다.
7. 비둘기Columbus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콜롬보Colombo는 이탈리아에 꽤 흔한 성씨입니다. 14세기 말 제노바로 이주한 콜롬보 집안도 그런 이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작중 등장한 란치아 콜롬보의 손자 크리스토포로 콜롬보가 대학 문턱을 밟을 수 있던 것도, 제노바와 그 주변에 퍼져 있던 친척들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뒷배경 덕에 콜롬보는 자신이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발견할 수 있노라며 군주들의 후원을 구할 수 있게 되었고, 제노바 사람 크리스토포로 콜롬보가 아니라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더 잘 알려지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