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이제 그만 (2)
26. 눈물은 이제 그만 (이만하면 그만) No More Tears (Enough is Enough) (2)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던가. 이렇게 짝패 노릇 하는 것도 오랜만이구려.”
그때야, 딴에는 동녘정착지를 살린답시고 꾸미던 짓이 죄다 무산되면서 부득불 시그리드와 함께하게 된 것이었지만, 세월은 모든 기억을 추억으로 무르익게 하는 법.
“잘 해보자고요.”
스베인과 파울은 작은 배를 내려, 황희와 하산을 데리고서 부두로 향했다.
잔잔한 바다를 따라 거룻배는 나아가고, 헨리타운의 모습이 두 사람 눈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무 벽을 두른 정착지, 그리고 그 정착지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비록 토루를 쌓고 목책으로 보강한 것이 전부지만 그럼에도 제법 견고해 보이는 경비대 요새.
그리고 부둣가에 나와 기다리는, 멀리서도 무장한 사람임이 잘 보이는 이들과, 그 뒤를 그림자처럼 둘러싼, 깡마른 사람인지 허수아비인지 구별이 쉽지 않은 인영들.
“이곳 헨리타운은 현재 계엄 상태요. 무슨 용무로 오셨소?”
콜롬보 본인은 아닌 듯한 용병 장교가, 배가 충분히 가까이 다가오자 목청 높여 물었다.
“신대륙 연합의 좋은희망에서 찾아온 상인이오! 좋은 거래를 제안하러 왔소!”
파울이 영어로 카랑카랑하게 답했다.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오가는 잉글랜드 어선들이 아직도 많았기에, 그들을 상대하는 그린란드 회사 사장으로서 영어는 필수적이었다.
뜻밖의 답에, 자신이 어떻게 함부로 판단할 문제가 아님을 깨달은 장교는 배가 부두에 접안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시오! 콜롬보 부관께 소식을 전하도록 하겠소!”
그사이 스베인과 파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망쳐 나온 개척민이 술회한 것보다도 헨리타운 사정은 나빠 보였다.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생기가 없었고, 그나마 곡기를 입에 댄 듯한 용병들도 날이 바짝 서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허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굶주린 주민들이 요새를 공격한다 한들, 승산은 없을 듯했다.
“내 지슈카 어르신 따라다니며 보고 들은 바에 비추어보면, 정말로 용병대 병력이 일백은 족히 되는 듯하군.”
“저기, 요새 쪽에 묶여 있는 배들도 보십시오.”
군용 함선인지, 아니면 주민들이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압류한 어선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군사적 충돌 상황에서 요새 사람들이 구원을 요청할 수단이 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지슈카 장관이 대단한 지휘관이라는 말은 누차 들었는데요. 그이라면 어떻게 해볼 수도 있었으려나요.”
“그 어르신이 대단하긴 하지만, 그 비법은 항상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싸우는 거지 무슨 기적이나 신통력이 아니오.”
스베인이 아는 얀 지슈카라면, 어떻게든 묘책을 내어 쉽게 저 요새를 함락시키고 언젠가 찾아올 증원군도 쉽사리 물리칠 수 있겠지만, 그런 지슈카마저도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할 길은 홀로 마련할 수 없었다.
일백 병력이라는, 신대륙 기준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수효. 헨리타운에 여력이 남아 있던 시절 그 힘을 모조리 기울여 지은 듯한 나름 견고한 요새.
고작 배 한 척에 수십 명 선원이 전부인 스베인 일행이 자력으로 요새 병력을 어떻게 해볼 방도는 없었다.
그리고 유사시 구원군을 보내올 수 있는 헨리타운 너머 곳곳에 있는 잉글랜드와 제노바의 전초기지와 개척촌까지 감안하면, 굳이 외교 문제를 거론치 않더라도 신대륙 연합의 아직 미약한 군사력으로 헨리타운을 ‘해방’한다는 선택지는 일찌감치 배제할 수 있었다.
“저기 나오는군.”
“생각보다는 멀쩡한 작자로군요.”
딱 그때쯤, 부관 란치아 콜롬보가 요새에서 몇몇 병사와 함께 나오는 게 보였다.
굶주림과 강압적인 통제에 시달리는, 문명에서 한참 떨어진 외딴 개척지의 폭군을 떠올렸건만, 의외로 콜롬보의 인상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관료에 가까웠다.
헨리타운에 찾아온 난관이, 결코 한두 사람의 악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방증하는 듯한 모습.
“이곳 헨리타운의 경비와 운영을 위임받은 부관 콜롬보요. 신대륙 연합에서 오셨다 들었소만.”
굳이 CIA를 창설한 것도, 어디를 가도 티가 나는 시그리드 대신 그나마 얼굴이 덜 팔린 두 사람이 찾아온 것도,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스베인과 파울은 각각 가명을 대었다. 좋은희망의 상인 아무개와 그 동업자. 그리고 남쪽 투슈판으로 돌아가고자 이들의 배에 얻어 탄 조선국 고관과, 그 고관의 통역 하산.
하산과 그 상관 타이간의 이름은 잉글랜드와 제노바 양쪽에 여전히 회자되고 있었다. 그들이 알기로 타이간의 마지막 모습은 투슈판에서 투항한 것이었으니, 하산이 신대륙에 남아 연합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해도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우리에게 이익이 될 거래를 제안하러 오셨다고 들었소만.”
“그렇습니다. 용병들 사이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문이 바람처럼 퍼지듯, 우리 상인들의 귀는 이익과 손해에 관한 풍문이라면 일만 마일 바깥에서도 들을 수 있지요.”
파울이 먼저 나섰다.
“그런 풍문으로 듣자하니, 이곳 정착지는 어마어마한 보물이 지척에 깔려 있음에도 이를 알지 못하여 빈궁을 면치 못한다더군요. 이를 딱하게 여겨 찾아왔습니다.”
“어마어마한 보물이라니?”
“바로 악어요.”
스베인은 마치 저 멀리 보이는 맹그로브 숲 어딘가의 악어를 가리키듯 손을 뻗었다.
“우리 연합에서는 이곳 헨리타운과 그 주변 반도를 악어습지 반도라고 부릅니다. 이곳에 지천으로 널린 악어의 껍질을 벗겨 잘만 무두질하면, 신대륙은 물론이요 유럽에서 구하기 어려울 만한 품질의 가죽을 얻을 수 있지요.”
곁에서 부가설명을 곁들이는 파울 주교였다.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
“그야 유럽에는 악어가 살지 않으니까 당연한 얘기지. 그러나 유럽인들만 악어의 유용함을 모를 뿐, 나머지 세계에서는 다 악어를 귀하게 여기고 있소.”
하산과 황희를 굳이 데려온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스베인의 눈짓을 받은 황희가 헛기침을 하곤 말했다.
“그렇소. 자고로 타鼉는 용의 일종이니 타룡이라고도 하는데¹, 그 가죽은 보배로 쓰이곤 했다 하며, 지금 장강에서 잡히는 작은 타룡은 그 가죽은 쓰지 못하나 대신 귀한 약재로 쓰인다오.”
무지렁이 개척민들이 ‘용’이라 부르기도 하는 거대하고도 흉포한 도마뱀을 두 눈으로 본 바 있던 콜롬보는, 일면 그럴듯하다 여기면서도 신중한 태도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 말씀대로 악어가 귀하게 쓰일 수 있다 칩시다. 그래서 어떤 거래를 원하시오?”
“우리는 악어가죽을 원하고, 이곳 식민지는 수익을 내는 것이 시급하지. 그리고 날붙이 따위로 어설프게 사냥하는 것보다, 총으로 악어를 잡는 쪽이 더 안전하고 가죽도 성하게 남길 수 있을 테니까.
우리가 타고 온 저 배에는 따뜻한환영의 철공소에서 갓 뽑혀 나온 총과, 최상급 품질을 자랑하는 화약이 가득 실려 있소. 그것을 빌려드릴 테니, 그대들은 우리에게 악어 가죽을 넘겨주시오. 그리하면 예상되는 수익에서 총기 대여료만큼을 제하고 나머지를 지급해드리리다.”
신대륙 연합과 잉글랜드는 엄연히 남이었고, 신대륙의 부를 두고 경합하는 사이였다. 교역을 트는 정도라면 모를까, 본국의 허가 없이 저들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들에게 ‘필요하면 언제든 북쪽의 연합과 거래하여도 좋다’라는 지침이 있었다면, 진작에 식량을 구하러 우애의 도시까지 배를 보냈으리라.
그러므로 콜롬보는 정중하면서도 사무적인 말투로 거절을 표했다.
“우리로서는 지금과 같은 때 굳이 그런 거래를 성급히 받아들일 필요가 없소. 양해를 바라오,”
“정말 그렇소? 사정이 썩 좋아보이진 않는데, 물불 가릴 여력이 남아 있던 모양이구만.
좋소. 그러면 우리는 다른 곳을 알아보는 수밖에. 습지는 넓고, 우리 대신 악어 잡아줄 사람도 많으니.”
여차하면 근처 원주민들과 거래하겠다는 은근한 협박. 그들에게 총이 넘어가게 된다면 그 다음은 감당할 수 없을 것임을 알았기에, 콜롬보도 결국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저 거래를 받아들여서 딱히 손해볼 것도 없지 않은가? 악어를 잡아서 그 고기라도 모은다면, 매일같이 죽겠다며 - 요새는 기력이 없는지 조금 드물어지긴 했다 - 배급량 늘려달라 하는 무지렁이 놈들도 달랠 수 있을지 모르는 일.
“단순히 거래를 승인하는 정도라면, 거기까지는 해 드릴 수 있소. 허나 악어 사냥은 그대들의 도움을 빌리는 일 없이 우리 경비대가 알아서 하겠소이다. 더구나 총이라면 우리도 충분히 지니고 있소. 화약 재고도 넉넉하고.”
“뭐, 그러시겠다면야.”
상인인지 아닌지 살짝 의심스러운 거한이 강짜를 부리는 대신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자, 콜롬보는 살짝 안도하였다.
“그리고, 우리 쪽에서도 조건을 걸겠소. 본인은 어디까지나 올드캐슬 경의 부재중 대리에 불과하니, 이 계약의 기간이 올드캐슬 경이 복귀할 때까지임을 명시해야 하오.”
그리고 그대들이 본디 우리에게 빌려주려 했으나 그대로 남게 된 총과 화약을 근처 원주민들에게 팔아서는 안 되오. 그들은 잉글랜드 국왕 폐하와 우리 정착지의 적이오. 이 조항도 계약서에 명시하기 바라오. 대신 우리는 얻게 된 악어 가죽을 모조리 그대들에게 넘겨주겠소.”
다행히도 두 상인들은 선뜻 콜롬보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굶주린 채 축 늘어진 정착민들이 문간에 쓰러지듯 기대어 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부두의 텅 빈 궤짝을 탁자 삼아 계약서가 작성되었다.
“이곳 사정에 가죽 무두질까지 할 수는 없겠지. 악어를 잡는 대로 빨리 배를 몰아 투슈판까지 가야 할 게요. 배에 실린 식량이 허락하는 만큼, 며칠간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때까지 최대한 악어를 많이 잡아오시오. 투슈판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익을 나눠드리리다.”
“좋소. 그리하겠소.”
상인들은 북방인 아니랄까봐 콜롬보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기에, 콜롬보는 서명을 마치고 악수까지 하는 와중에도 두 사람의 눈길이 굶주린 개척민들을 훑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마이클은 그냥 마이클이었다. 생각이라는 것을 해보아야 딱히 떨어지는 것도 없고, 도리어 얻어맞거나 비명횡사할 일만 많았기에, 플리머스 근처의 어느 한적한 농촌에서 태어나 슬슬 결혼할 나이가 될 때까지도 딱히 생각 없이 살았다.
허나 배가 고픈 것은 싫었고, 가끔은 ‘그냥 마이클’ 대신 앞에 재봉사든 목수든, 뭔가 다른 이름이 붙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랬기 때문에, 플리머스에 장을 보러 갔을 때 어떤 멀쑥하게 차려입은 신사 - 마이클 눈에는 그리 보였다 -가 제 귀에 그럴듯한 생각을 불어넣자, 그만 마이클은 그것이 처음부터 제 생각이었던 양 착각하고야 말았다.
‘바다 건너 땅으로 가면, 농장주든 장인이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네! 풍요로운 땅에서 원하는 대로 먹고 원하는 대로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더군.’
허나 바다 건너 헨리타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될 수 없었으며, 그 누구도 마이클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지도, 그것을 위해 뭔가를 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생각이라는 것을 잠깐이나마 했던 - 혹은 했다고 착각했던 - 자기 자신을 탓하며, 굶주린 배 움켜쥐고서 이제는 사흘 간격으로 벌어진 배급만을 기다릴 뿐.
그 배급한다는 식량 태반이 본디 개척민들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아등바등 노력하여 그러모은 것을 억지로 빼앗은 것이라는 점은 딱히 마이클에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생각이라는 것은 백해무익했다. 특히나 그 대상이, 악마의 불꽃을 뿜는다는 무서운 쇠 대롱과 몽둥이 따위로 백날 후려쳐도 흠 하나 안 날 법한 번뜩이는 갑옷을 입은 용병들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또 하루를, 무기력하게 문간에 기대어 보내려던 차.
엊그제 나타났던 기이한 방문객들이, 무언가 짐을 열심히 나르고 있는 게 보였다. 부두에 닿아 있는 작은 배로 미뤄보건대, 그새 헨리타운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저들 배에서 꺼내온 화물이리라.
상인을 자처하던 뚱보 거한과 홀쭉이가, 일꾼들과 함께 궤짝을 들쳐메곤 죽은 듯 조용한 - 실제로 이럴 때면 한두 명씩 굶어죽곤 했다 - 마을 한가운데로 나아왔다.
부관 콜롬보는 악어 잡는다며 요새의 병력 절반을 데리고 인근 늪으로 떠났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를 상대하러 이렇게 정착지 한복판으로 걸어오는 것일까?
마치 저를 향하는 힘없는 시선을 느낀 듯, 호리호리한 사내는 무슨 고깔을 입에 가져다 대곤 외쳤다.
“헨리타운 주민 여러분! 배가 고프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의 허기와 갈증을 채워줄 도구가 여기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수도사나 꽤 높은 성직자인 것 같기도 했는데, 몸소 궂은 일도 하고 저들 같은 상것들에게 직접 말을 거는 모습을 보아서는 또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리 와서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총이라는 무기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여러분이 용이라고 부르는 악어를 잡을 수도 있고, 그 고기로 허기를 달래고 가죽으로 빈 호주머니를 채울 수 있습니다.”
‘고기’라는 말에 이끌린 개척민들은 비척비척 걸어나왔다. 몸에 남은 힘을 모두 끌어모으면 겨우 들 수 있을 법한 묵직한 쇠대롱. 바로 저 용병들이 들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이 무기와 화약, 탄환을 지급받으신 분들은, 악어 가죽으로써 그 값을 치르셔야 합니다.
계약에 동의하시는 분들께는 즉시 이 총을 드릴 것이며, 어떻게 쏘는 물건인지도 가르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우리와 함께하려는 자들은 나오시오.”
무엇에 이끌렸을까? 배고픔을 벗어날 수 있다는 약속? 용병들과 같은 힘, 누가 굶주리고 누가 배불리 먹을지 결정하는 힘을 쥘 수 있다는 욕심? 정신을 차려보니 마이클의 품에는 어느새 그 총이라는 대롱이 안겨져 있었다.
“저, 정말로 이걸로 용을 잡을 수 있습니까?”
“그리 어렵지 않소. 보시오들. 여기 이 대롱에 화약을 넣고, 탄환을 구겨넣은 다음, 여기 화승에 불만 붙이면...”
벼락 소리와 함께, 거한이 대롱을 겨누고 있던 쪽 목책 일부가 박살났다.
두려워하며, 이러한 물건은 저들 따위가 만져서는 안 된다 여기면서 도로 누추한 집으로 들어가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개는 마이클의 뒤를 이어 쇠대롱을 구경하고, 조심스레 들어보기도 하였으며, 어설프게 앞서 거한이 보여준 동작을 따라하려 해보기도 했다.
또한 바다로 떠났던 저들 가족의 운명을 조심스레 귓속말로 묻고는, ‘실은 우리와 함께 배를 타고 왔소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서 배에서 기다리고 있다오’라는 답변에 한결 안도하여 얼마만에 짓는지 모를 웃음을 짓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사격 연습하는 총성이 한 번도 아니요 재차삼차 이어지자, 마침내 요새에 남아 있던 용병들도 달려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요새에 잔류한 용병들을 이끄는 부사관이 물었다. 그나마 제 소임을 다하려 노력하는 - 그로 인해 더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곤 했지만 - 콜롬보와 달리, 제 알량한 권력을 믿고 개척민들을 거칠게 다루는 평판 나쁜 사내였기에, 마이클과 다른 정착민들은 저들 발이 뒷걸음질치는 것을 금치 못했다.
허나 거한은 태연하게 대꾸할 뿐.
“무슨 일이기는. 장사를 하고 있지.”
“하, 하지만 이런 짓은...”
뚱보와 홀쭉이는 번갈아가며, 마치 이런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능수능란히 답변했다.
“우리 계약에 따르면, 우리는 근처 원주민들에게 이 총기와 화약을 빌려주어서는 안 되오. 허나 이곳 개척민들에게도 주면 안 된다는 그런 조항은 없었거든.”
“우리는 상인입니다. 상인답게 이윤을 극대화하려 할 뿐이지요. 고작 수십 명 병력으로 늪지를 뒤지는 것보다, 이곳의 오백 남짓한 주민들 중에서도 따로 지원을 받아 악어 사냥에 나서는 쪽이 훨씬 수익이 높을 겝니다.”
“그리고 잊지 마시오. 우리는 본래 그대들 경비대에게 무기를 빌려주려 했었소. 그걸 먼저 거절한 건 당신네들 우두머리 콜롬보고. 계약서에 뻔히 적혀 있으니 발뺌할 생각일랑 마시오.”
그리고 놀랍게도,
“코, 콜롬보 님께서 돌아오시면, 결코 이 일을 묵과하지 않으실 겁니다.”
개척민들을 그토록 가혹하게 괴롭히던 부사관은, 이렇게 공허한 위협만 가하곤 물러나는 것이었다.
어찌 된 영문일까? 아무리 봐도 잉글랜드의 상인들처럼 생기지는 않은 거한과 홀쭉이, 그리고 저쪽 일꾼들이 두려워서일까?
그제야 마이클은 깨달았다. 용병들은 총을 든 자신들을, 그저 양떼와 불과했으나 이제는 송곳니를 얻게 된 그들 개척민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아직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무기였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개척민들의 수는 요새에 남은 용병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마이클은 덜컥 겁을 먹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걸 왜 우리에게 물어보시오?”
“그, 그야...”
갑자기 제 손에 들린 총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 참. 그나저나 저쪽 요새가 지금 절반 넘게 비었습디다. 다들 악어를 잡으러 간 게지요. 남은 병사들만 경계 서느라 고생이지.”
홀쭉한 상인이 싱긋 웃으며, 지나가듯 흘린 말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요새 안쪽에는 군량고가 있었고, 그 군량고 안에는 바로 지금 모든 개척민들이 바라마지않는 것, 먹거리가 있었으니까.
두려움보다도 훨씬 강력한 배고픔이, 새로이 총을 받은 모두를 한껏 휩쌌다.
한 명이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두려운 후환이지만, 여럿이 힘을 합한다면 그만큼 뒤탈을 헤쳐나가는 것도 수월하리라.
생각이라는 것을 멈추고 살았던 마이클의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그런 셈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².
“식량이... 식량이!”
요새에서 급히 보낸 전령을 만나자마자 급히 돌아온 부관 란치아 콜롬보는 텅 빈 군량고를 보곤, 무지렁이들 사는 개척촌보다도 더 엉망이 되어버린 요새 한복판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며, 면목 없습니다. 농노 놈들이 너무 수가 많아서... 저희 머릿수 전체보다 무지렁이들이 들고 있는 총의 수가 더 많았습니다.”
나름 근거가 있는 변명이었다. 이른 저녁, 마이클 이하 아직 걸을 여력이 있는 개척민들이 모두 모여, 사방에서 총을 쏘며 요새를 습격하니, 결국 교전이라 할 것도 없이 잔류대는 백기를 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는 콜롬보가 유사시 신대륙 연합의 상선이 갑자기 요새를 공격할 경우 이를 방어할 수 있는 만큼의 병력만을 남기고 악어 사냥에 나선 탓이었다.
그리하여 잔류대는 이미 굶주린 정착민들이 허술한 경계를 단숨에 돌파하고 요새 안쪽까지 돌입한 것을 보자마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밤사이 뭔가 엄청난 게 터졌다 싶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군. 그러게 마음을 잘 쓰지 그러셨소.”
마치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인 양 구경하듯 두리번거리는 거한. 마음 같아서야 그 멱살을 잡고 싶었으나, 콜롬보와 상인의 덩치 차이를 감안하면, 어디서 의자라도 가져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대신 콜롬보는, 원망하는 마음을 모조리 말로 털어놓았다.
“이제 우리는 끝났소! 식량은 충분했단 말이오! 조금만 더 견디면 되었을 텐데, 이 꼴이 나 버렸소! 이제는 우리 모두가 함께 굶어죽게 되었다고!
저 무지렁이들을 보시오! 보나마나 곡식을 아껴서 조금씩 먹기는커녕, 조금 굶주렸답시고 무절제하게 마구 입에 쑤셔 넣었겠지! 몇 달은 더 버틸 수 있었는데, 이제는 모두 글러버렸소!”
“헛소리. 창고에 남아 있던 곡식의 양은 -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 고작해야 그대들 용병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에 불과했소. 이대로 두어 달만 지났더라도, 개척민들은 서서히 굶어 죽어가는 수밖에 없었겠지.”
“성토는 이만 하고, 이제 슬슬 대안을 마련해주는 게 어떨까요.”
거한과 함께 찾아온 호리호리한 상인이 말했다.
“그래야겠군. 이보쇼, 걱정은 관두시오. 옥수수와 밀이 그득 쌓인 우애의 도시가 저 북쪽에 있지 않소?”
“내 다시 말하지만, 본관의 권한은 어디까지나...”
“경쟁자인 신대륙 연합과 함부로 교섭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기억하고 있다마다. 그럼 그 잘난 원칙 잘 지켜 보시든가.”
결국 콜롬보는 두 손 두 발 다 드는 수밖에 없었다.
“뭘 원하시오?”
즉석에서 작성했다기에는 너무나 말끔한 계약서가 호리호리한 사내의 소매에서 나왔다.
“자, 여기 새로 서명하시오. 계약서 변경안이오. 그대들이 모아온 악어가죽을 수매하되, 그 대금은 식량으로 지불하겠소. 그대들이 악어고기로 연명하는 동안, 얼른 북쪽에 연락을 취해 곡식을 옮겨오도록 하지.”
헐값에 사들인 악어 가죽은 그런 질 좋은 가죽을 접한 적 없는 유럽과 아나왁 양쪽에 꽤 비싸게 팔릴 것이었다.
용선비, 개척민들에게 빌려준 총과 화약을 마련하는 비용, 그리고 식량을 사들이는 값까지, 모두 합하면, 악어 가죽 값을 아주 약간 하회할 터.
이렇게 CIA의 비밀 공작 덕에, 헨리타운에 닥친 인도적 위기는 국고에서 왐품 한 줄 쓰지 않은 채 해결되는 듯하였다.
“미쳤군, 미쳤어. 정녕 올드캐슬 경과 헨리 폐하께서 이 일을 가만 두고 보시리라 믿는 것이오?”
“대체 무엇을 두고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구만. 우리가 뭘 했다고? 우리는 상인일 뿐이고, 이익을 위해 찾아와 이익을 올리고 갈 뿐이라오.”
“무지렁이들을 무장시키지 않았소! 그것도 무슨 창이나 도끼 따위가 아니라 총으로!”
“그것도 이익을 위해서였지. 그럼 기껏 환영에서부터 총기를 가져왔는데, 그걸로 돈벌이를 할 길을 내버려두고 그냥 선창에서 녹슬게끔 내버려두는 게 마땅하겠소? 그리고 애시당초 정착지 관리를 제대로 했더라면, 그 총을 받자마자 주민들이 곧장 요새로 향하는 일도 없었을 것 아니오?
잊지 마시오, 콜롬보. 당신이 고집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저 많은 총이 개척민들에게 풀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오.”
처음부터 어떻게든 콜롬보로 하여금 총기 대여를 거절하도록 유도할 작정이었음은 쏙 빼놓는 스베인이었다.
콜롬보는 홀로 실컷 분통 터뜨리라 내버려두고, 파울과 스베인은 요새에서 마을로 돌아갔다. 마을 한가운데서는, 무슨 모임이 한창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맹해 보이던 마이클을 비롯해, 간만에 포식한 이들의 눈에는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허나 그 생기는, 비단 그들의 배가 오랜만에 차올랐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곧 결정이 나겠구만.”
목숨을 걸고 좋은희망까지 항해하였던 이들은, 요새가 함락된 다음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헨리타운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그간 있던 일에 엄청나게 놀란 것처럼 한바탕 경탄을 하고는,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 물었다. 문득 떠오르는 선택지들이 있다고 첨언하면서.
어젯밤의 열기가 살짝 식은 개척민들은, 뒷감당 어찌 할지를 두고 한동안 논쟁을 벌이게 되리라.
“아마 우리 뜻대로 되겠지요.”
“그러기를 바라야지.”
두 사람은 저들이 성공적으로 배달한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기를 바랐으나, 그와 별개로 저들 개척민들이 두 사람 원하는 대로 합의에 도달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저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셋.
첫째, 식량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악어 사냥이나 마저 하면서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양 새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그러나 이는 올드캐슬이나 국왕 헨리가 자비를 베풀어 눈을 감아주어야만 한다는 치명적인 위험이 있었다.
둘째, 이대로 맨 처음 요청한 것처럼, 잉글랜드 본국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신대륙 연합의 한 주가 되길 바란다며 공식으로 청원하는 것. 이는 신대륙 연합에 있어서는 잉글랜드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결과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고, 더구나 명-제노바-잉글랜드 연합군에 허망하게 함락당한 투슈판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저 멀리 북쪽에서 한참 남쪽을 일일이 지켜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셋째, 스베인과 파울이 미리 준비했다가, 오는 길에 헨리타운 탈주자들에게 넌지시 흘린 절충안. 신대륙 연합으로 이주하여, 연합 정부 소속 계약직 하인으로 수 년간 일한다. 그렇게 마련된 재정으로, 훗날 잉글랜드 쪽에서 불만을 제기할 때 배상금을 지불하여 이를 무마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저들이 지핀 불길이 어디까지 타오를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수로 의사를 확인하려는 모양인데... 어디 보자.”
“엥.”
“얼레.”
아무리 보아도, 개척민들과 신대륙 연합에 가장 위험한 두 번째 방안의 득표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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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옥편에는 ‘자라/악어 타’라고도 새겨져 있는 이 한자는, 수천 년 전 중원이 지금과 달리 밀림과 늪지가 우거진 땅이었음을 방증하는 흔적 중 하나입니다. 갑골문에는 악어의 모습이 보다 선명하게 남아 있고, 더구나 이 ‘타’의 가죽으로 전고戰敲를 만들었다는 전승도 있지요. 이후 중화 문명의 영역이 동아시아 전역으로 뻗어나가면서, 타는 신화적 생물과 실재하는 악어(양쯔강 악어, 류큐의 바다악어, 메콩강 악어 등등)의 통칭으로 쓰이게 됩니다.
작중 등장한 미시시피악어는 앨리게이터Allegator 속에 속한 대형 악어로, 원 역사에서도 원주민들과 미 남부 정착민들에게 가죽뿐 아니라 고기를 위해서도 사냥된 바 있습니다.
2. 원 역사의 제임스타운 식민지 정착민들은, 1609년 겨울의 기근을 겪은 끝에 식민지에서 도망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임스타운에 진작 도착했어야 했던 보급선이 허리케인을 만나 좌초되는 바람에, 1609년 겨울 동안 정착민들은 개와 말, 마지막에는 아사자의 인육까지 먹어야 했지요. (이는 훗날 고고학 조사를 통해 사실임이 확인되었습니다.)
1610년, 버뮤다까지 떠내려갔던 보급선의 생존자들은, 현지에서 배를 해체해 만든 소형 범선 두 척에 나눠 타고 겨우 제임스타운에 닿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남아 있다가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느니, 제임스타운 생존자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잉글랜드로 돌아간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지요. 역시 극한의 상황에 몰린 작중 헨리타운 사람들이 극단적인 행동에 나선 것은 이러한 유례를 참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막 북미 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도중, 이들은 잉글랜드에서 새로이 보낸 개척 선단과 마주치게 됩니다. 선단을 이끌던 델라웨어 남작은, 개척민 모두를 강제로 제임스타운으로 돌려보냈고, 그렇게 제임스타운의 명맥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