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이제 그만 (3)
26. 눈물은 이제 그만 (이만하면 그만) No More Tears (Enough is Enough) (3)
기나긴 논의와 갈등 끝에 마침내 조문이 확정되어, 다음 가을 의회에서 선거를 앞두고 공식으로 반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신대륙 연합 헌법에서는 새로운 주의 가입 절차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었다.
‘새로운 주는 연합 의회의 결의를 거쳐 연합에 가입할 수 있다.’
또한 그 아래에 추가 조항이 달려 있었는데,
‘연합을 구성하는 다른 주의 일부 혹은 여러 주의 합방을 통해 이루어진 주, 혹은 다른 국가의 군주 혹은 정부 관할에 속한 주는 가입할 수 없다.
단, 어떤 군주 혹은 정부가 통치자로서의 의무를 방기하여, 그 주민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행복 추구를 가로막는 경우, 그러한 주의 주민들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연합 가입에 대한 희망을 밝히고, 그 주의 가입이 기존 연합의 국익과 가치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의회에 의해 판단되는 조건 하에서 가입을 허용한다.’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가 노르웨이 왕의 의무 - 교역선 파견 - 불이행으로 생존의 위기에 몰렸던 것을 기억하는 북방 출신 개척민들과, 어쩌다 보니 저들이 기껏 농노, 아니, 하인들까지 모집해 일궈놓은 농장이 다른 주 관할로 넘어가게 된 보헤미아 농장주들의 이익이 합치되며 합의된 조항이었다.
북방 사람들은 만에 하나 훗날에 더욱 가혹한 추위가 들이닥칠 때를 대비할 심산이었고, 졸지에 저들 농장이 원주민 주 정부 관할로 들어가게 생긴 보헤미아 농장주들이야 저들 권리를 주장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조항이라면 무엇이든 찬성하곤 했다.
허나 그런 내막까지는 모르고, 그저 신대륙 연합의 헌법이라는 법전에 그런 말이 있더라는 풍문만 들었던 개척민들은, 저들이 충분히 저 조건을 만족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아예 정착지 이름을 ‘새로운 주New State’로 변경합시다.”
‘새로운 주는 연합에 가입할 수 있다’라는 조항을 곧이곧대로 해석한 헨리타운 사람 몇몇은 이렇게 제안하기까지 했다.
모든 힘을 잃은 콜롬보 부관은 헛되이 노발대발할 뿐이었다.
“이 정착지가 세워진 것은 오직 국왕 헨리 폐하의 허락에 의한 것이며, 국왕 폐하의 재산으로 만들어진 헨리타운을 통째로 타국 군주에게 바치는 것은 반역이자 절도 행위다! 올드캐슬 경께서 돌아오시면 결코 너희를 가만히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야!”
맨 처음 홀쭉이 상인이 건네준 총을 받아든 이래, 어쩌다 보니 요새 습격도 주도하게 되면서 헨리타운 개척자들의 대표 비슷한 게 되어버린 토마스는, 콜롬보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정착지 바깥으로 나가면 되겠군요! 이거,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그러고는, 저들끼리 다시 회의를 열어, 바로 헨리타운 코앞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 그리고 저들의 결정에 대해 해명하고 신대륙 연합의 도움을 청할 대표를 파견하는 것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두 달 보름 뒤, 보급품과 새 개척민들이 가득 실린 선단을 이끌고 헨리타운에 돌아온 존 올드캐슬은 텅텅 빈 헨리타운과 거지꼴이 된 경비대, 그리고 헨리타운 울타리에서 고작 수십 야드 떨어진 곳에 세워진 천막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천막촌 위에 ‘새로운 주’라고 엉터리 영어로 쓴 깃발이 휘날리는 것도.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명목 없습니다, 올드캐슬 경.”
식량은 다 떨어진 지 오래. 기껏 악어 가죽을 식량으로 바꾸려 하여도, 이상하게 신대륙 연합 상인들은 용병들의 가죽은 온갖 트집을 잡아 옥수수 몇 개 정도만 던져주는 반면 개척민들의 가죽은 유별나게 후하게 값을 쳐주곤 했다.
게다가 저쪽은 어째서인지 계속 화약을 공급받고, 이쪽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꾸준히 악어를 사냥해야 하는 판이니 화약이 떨어지기만 하였으므로, 결국 번듯한 요새에 머무는 용병들은 거지꼴이 되고, 허름한 천막촌에 새로 보금자리 꾸린 정착민들은 오히려 얼굴에 윤기가 흐르기에 이르렀다.
“하, 또 마녀의 술수에 놀아난 것인가!”
도움을 청하러 대서양을 건넜던 올드캐슬이 그토록 늦었던 것도 사실 마녀 탓이었다. 기껏 도움을 청하러 런던으로 향했건만, 국왕 폐하의 수하라는 자들마다 제게 의심어린 눈길을 보냈던 것이다.
‘식량이 필요하다니요? 그린란드의 하얀 마녀는 고작 촌구석 고기잡이배 몇 척만 가지고도 빈란디아에 소굴을 꾸렸다지 않습니까? 게다가 헨리타운 그곳은 겨울이 오지 않는 풍요롭고도 온난한 땅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지금 그러잖아도 투스파니아Tuspania(투슈판) 땅과의 교역에서 적자가 나고 있어, 국왕 폐하께서 심히 불편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폐하께서 아무리 경을 총애하신다 한들, 다른 대신들은 이를 좋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이요, 또 반대로 보면 저쪽 신대륙 연합에서 후발주자 모두를 너무나 확실하게 견제한 탓이었다.
황금이 넘쳐난다는 신대륙이었건만, 정작 투슈판의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금은 유럽보다 아주 약간 더 흔할 뿐으로, 오가는 비용을 근근이 충당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는 쉽게 구할 수 있는 황금 - 예컨대, 귀족과 신관들이 쓰던 금붙이 - 이 이미 진작에 신대륙 연합을 통해 유럽으로 빠져나갔고, 나머지 황금은 이제 막 캐내는 중이거나 테노치티틀란의 금고에 고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었다. (네사왈코요틀과 틀라카엘렐 모두, 신대륙 연합이라면 모를까 다른 유럽인들에게 헐값으로 금을 넘겨줄 의향은 없었다.)
‘그 어리석은 위트레흐트의 지몬 탓이지, 내 잘못은 아니란 말이오! 그자가 그토록 투스파니아에서 인심을 잃지만 않았더라도...’
올드캐슬이 알 리 없는 사정이었지만, 좋은희망에서 아카풀코로 돌아온 황희는 본국 조선에 부치는 서한에 신대륙의 정세를 간략히 정리하면서, 투슈판 전투에서 ‘서왕모’ 서씨가 인의仁義를 사들였노라 기술한 바 있었다.
망신스럽고 치졸한 방법으로 잉글랜드-제노바-명 연합군을 패퇴시킨 탓에, 투슈판과 그 주변 사람들은 신대륙 연합이 바다 서쪽 유럽인들에 비하면 미약한 세력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 혹은, 오히려 그렇기에 - 연합은 훨씬 도덕적이고, 믿을 만한 교역 상대였다.
그토록 거들먹거렸던 타이간이, 피필틴(귀족) 지위를 잃고 시그리드의 노예가 되었음을 많은 이들이 증언한 바 있었다. (물론 시그리드나 정화에게 물어본 것은 아니요, 저들끼리 지레짐작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투슈판 점령의 다른 두 주범이 북쪽으로 끌려간 이래 다시는 나타나지 않은 것도, 엄청난 형벌을 받았기 때문 아니겠는가?
팔켄베르크의 요한은 캔터베리에서 사실상 종신연금에 처해졌고, 지몬은 저의 죗값 갚도록 신대륙 남쪽에서 황금을 찾는 항해에 내몰렸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는 아나왁 사람들은 ‘시와코아틀’ 시그리드의 정의로움을 칭송하곤 했다.
그리고 이는 실질적으로도 이득이 되었으니, 겨우 투슈판에 닿은 제노바나 카스티야 상인들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강철 검으로 황금을 사러 오셨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소? 흠... 이 정도 품질이라면 많이는 못 주겠는데.’
‘이보시오! 이 검은 톨레도산 최고급 강철로 만들었단 말이오! 유럽 본토에서도 최소한 이것보다는 더 비싸게 팔 수 있을 게요! 분명 어제는 강철 축에도 겨우 드는 저급한 신대륙 철기를 두세 배 값으로 사들였지 않소이까?’
‘그건 신대륙 연합이니까 그런 거고. 그들은 우리의 벗이고, 믿을 만한 사람들이니 깎아주는 게요. 당신들은 솔직히 말하면 그 정도는 아니잖소? 이 가격이 마음에 안 들면 유럽으로 돌아가시든가.’
투슈판뿐 아니라 해안가 도시들은, 동쪽에서 온 상인들이 미덥잖다는 명목으로, 한 마음 한 뜻으로 이렇게 이방인들을 벗겨먹고 있었다. (사실 그렇다고 신대륙 연합 상인들에게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건 아니요, 정가대로 받아먹을 뿐이었지만.)
“바로 그런 문제 때문에 우리가 이곳에 정착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일세! 저 신대륙 연합의 손길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이익을 내기 위해서 말일세. 그런 판에 저 가증스러운 무리를 받아들이고, 아예 자네 명의로 계약까지 맺었다니...”
비단 헨리타운뿐 아니라, 남쪽 바다 곳곳에 세워지고 있는 식민지들도 대개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만큼 시원치 않은 신대륙 교역. 그 이익을 늘리기 위해서는, 중간 기착지를 마련해 대양을 횡단하는 비용을 줄이고, 나아가 이곳에 세력을 구축함으로써 교역의 장애가 되는 무리를 치워버릴 힘을 마련해야 했으므로.
“하면 제가 어떻게 해야 했단 말씀이십니까? 놈들은 제가 계약에 응하지 않았다면 원주민들에게 총기를 풀겠노라 협박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말이 그렇지, 보나마나 처음부터 저 거렁뱅이들에게 총을 거저 넘길 작정이었을 테고요.”
콜롬보가 억울함을 토로했다.
따지고 보면 이곳 헨리타운에 터를 잡은 올드캐슬 자신의 잘못도 있으니, 결국 올드캐슬도 콜롬보를 뒤늦게 비난하는 무익한 짓은 관두고 대책을 고민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저 바깥에 진을 친 배은망덕한 놈들부터 진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들이 비록 총을 쏘는 법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말 그대로 사격술만 배운 것이지 결코 군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 새로 데려오신 병력과 함께라면 충분히...”
“충분히 진압하고도 남겠지. 하지만 저들을 모조리 진압하고, 개중 주동자들을 처벌한다 한들 저들 모두를 오도한 원인이 북쪽에 남아 있는 이상 달라지는 건 없을 걸세. 일이 년 내로 똑같은 일이 벌어지겠지.”
“하면...”
“다시 저 연합의 땅을 밟는 수밖에.”
만약 신대륙 연합이 굶주린 개척민들을 북쪽으로 데려간 뒤 몸값을 따로 지불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잉글랜드와 올드캐슬 양쪽에 체통을 유지한 채 빠져나갈 길을 마련해주었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할 수 있었으리라.
기껏 바다 너머로 데려온 개척민들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굶주리게 만들었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서 좋을 일은 없었으니까.
허나 연합의 첩자들이 아예 반역을 선동하고, 그 선동에 넘어간 개척민들이 잉글랜드의 품을 벗어나겠노라 공언하는 것은 완전히 선을 넘는 일이었다.
“짐과 개척민들만 내려놓고 바로 북쪽으로 향하겠네. 저들도 바보가 아니니, 내가 직접 선단을 이끌고 북상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도 남겠지.”
신대륙으로 향하는 항로를 찾기는커녕,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선박조차 마련치 못해 쩔쩔매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신대륙에서 엄청난 이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미 그 이익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선발주자가 있다는 것은 이미 온 유럽에 잘 알려진 사실.
결국 어느 시점에서 신대륙 연합은 저들의 국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올드캐슬의 항의성 방문을 겸한 무력시위를 보게 된다면, 연합의 소위 유권자들 또한 이를 깨닫게 되리라.
올드캐슬의 함대가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사실 이미 신대륙 연합의 유권자들은 국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국력이란 결국 국가의 재정에서 나오는 법이요, 그 재정이란 유권자의 세금으로 마련되는 법.
따라서 국력은 너무 적어도 안 되지만, 한계가 있어야만 했다.
헨리타운에서 벌어진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고, 이어서 저들을 연합에 가입시켜 달라는 ‘새로운 주’ 임시 대표 플리머스의 토마스의 절절한 호소를 들은 뒤로, 신대륙 연합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선뜻 그 말에 동감하진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참으로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그러게 말입니다. 사정이 이해는 되지만, 이대로 받아줄 수도 없으니까요.”
좋은희망에 표류하듯 도착한 헨리타운 탈출자들의 비극적인 사연을 신문을 통해 접한 바 있던 어지간한 신대륙 연합 사람들은 이렇게 혀를 차곤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희망과 따뜻한환영, 우애의 주 - 우애의 도시를 주도로 삼는, 그 주변 일대 - 와 새벽땅. 이렇게 네 개 주가 당분간은 연합 구성원의 전부일 것이라고들 여겼다.
설령 주가 늘어난다 할지라도, 긴집사람들의 힘과 머릿수를 경계하여 이방인들의 개척촌으로 모여들고 있는 원주민들로 점차 그 규모가 커지고 있는 좋은거래나, 타이노 사람 마보가 인삼공사를 위해 일할 저의 겨레들을 실어나르고 있는 멀리 남쪽의 새로운출발, 혹은 옥수수 강을 넘어 남하하고 있는 독일인 정착민들이 새로운 주를 세우리라고 점치곤 했다¹.
그러니 헨리타운에서 ‘친절한 상인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한 잉글랜드 개척민들이 갑자기 주 편입을 희망한다고 밝혔을 때, 다들 놀라면서도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저희는 다시금 무력함을 겪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아무런 힘 없이, 아무런 희망 없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서 무기력하게 허름한 판자집에 드러누워 있던 시절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설령 잉글랜드 땅에서 군대를 보낸다 한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싸우겠습니다! 부디 우리에게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우리의 운명을 개척할 기회를 주십시오!”
토마스를 비롯해 어지간한 헨리타운 개척민들은, 신대륙 연합이 잉글랜드와 비교하는 것이 실례일 만큼 약소한 세력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맨 처음 바다를 건너와 우애의 도시에 기항할 때 몇몇 동행들이 배에서 도망쳤다는 것을 눈치 챈 뒤에도, 그들이 오히려 어리석다고, 잉글랜드 국왕의 후원을 받는 헨리타운 식민지가 실패할 리 있겠느냐고 다들 비웃곤 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결국 중요한 것은 단 하나,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힘이 있느냐였다. 신대륙에서나 구대륙에서나, 그들 모두의 주군이자 통치자인 헨리 폐하가 딱히 신민들의 운명에 관심이 없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차이점이라면, 잉글랜드에서는 기근이 닥쳤을 때 의지할 수 있는 교회나 몇몇 인심 좋은 지주들이 있었고, 하다못해 기근이 덜한 이웃 마을이나 근처 도시로 잠시 떠난다는 선택지가 있었지만, 신대륙에서는 꼼짝없이 야만의 땅 한가운데서 굶어죽는 길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연합 전체에서 나서서 우리를 보호해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민병대를 꾸릴 수 있도록, 딱 그만큼만 우리를 지원해 주십시오! 설령 우리의 마을을 빼앗기고 늪으로 도망쳐 살아야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자유롭고 싶습니다!”
그러나 CIA 사람들과 함께 좋은희망에 도착한 토마스가, 제게 있는 줄도 몰랐던 언변으로 이렇게 암만 역설한다 한들, 가끔 좋은희망에 들리곤 하는 같은 잉글랜드 사람들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했다.
“미안해요.”
좋은희망 근처에서 소집할 수 있던 의원들 - 그사이 의회 회기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 만을 모아, ‘새로운 주’의 연합 가입에 동의해줄 것을 호소하던 자리.
결국 아무리 토마스가 도움을 청해도, 의원들은 안타깝지만 어렵겠다는 반응만을 보이며 자리를 뜰 뿐이었다.
“각하, 각하께서는 이 사람들 전체의 주군이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저희를 도와주실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이 자리를 개최한 입장에서, 그리고 애시당초 토마스가 이곳까지 오게 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으로서 그 곁을 지키고 있던 시그리드가 안타깝게 토마스를 돌아보았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어요. 비단 저뿐 아니라, 내각과 의회, 나아가 모든 국민들이 다 그런 마음이고, 그렇기 때문에 ‘상인’들도 좋은희망을 떠나 ‘우연히 헨리타운 근처를 지나가게’ 된 것이고요.
하지만...”
동석해 있던 지슈카가 시그리드 대신 말을 받아주었다.
“그대들이 원한다면, 예산과 외교 관계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인도적인 지원을 해줄 수는 있소. 하지만, 잉글랜드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현재의 연합 사정상으로는 불가한 일이오.”
토마스의 부족한 식견으로도, 시그리드와 지슈카 두 사람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헨리타운의 사실상 농노로서, 굶어죽을 자유 하나를 빼고 모든 것을 잃었던 토마스와 그 이웃들로서는, 설령 그것이 유일한 길임을 안다 할지라도 도저히 신대륙 연합의 계약직 하인으로서 몸값을 갚는다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때, 창가에 새 그림자가 비치더니, 리프가 후다닥 들어와 시그리드 어깨에 앉았다.
비단 리프 주인인 시그리드뿐 아니라, 시그리드 주변의 어지간한 사람들이라면 익숙하게 여길 법한 일이었으나, 어째 리프가 연신 푸다닥대며 우짖는 것이 범상치 않았다.
“비상! 비상!”
뒤이어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우애에서 출발한 제트 선을 통해 들어온 급보입니다. 남쪽에서 정체불명의 함대가 접근 중이며, 우애 앞바다를 사흘 전 지나쳤다고 합니다. 수는 최소 다섯 척이며, 그 중 최소 두 대는 잉글랜드의 맨오브워로 추정된답니다.”
어느새 달려온 쾨커리츠의 디폴트가 좋은희망 보안관으로서 보고했다. 리프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으로 보아, 이미 저자에 파다하게 소문이 퍼진 것이리라.
신대륙 연합 소속이 아닌 배들이 좋은희망에 입항하는 경우야, 유럽에서 사람을 모아 신대륙으로 옮기는 일이 돈이 된다는 것을 뱃사람들이 깨닫게 되면서 꽤 흔한 일이 되었다.
허나 그만한 규모의 함대가 무리를 지어 다가오는 것은 얘기가 달랐다.
“본격적인 침공이라기에는 수가 부족하고, 무력시위 목적이겠군. 잉글랜드 쪽에서 헨리타운 소식을 들은 모양입니다.”
심사숙고하던 지슈카가 결론을 내렸다.
그로부터 이틀 뒤, 지슈카의 말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지슈카는 지슈카대로, 시그리드는 시그리드대로 대책을 마련하기에는, 빠듯하게나마 충분한 시간이었다.
몇 년 사이에 신대륙 연합의 규모는 몰라볼 만큼 커졌고, 프랑스 대부분- 명실상부한 국왕령이든, 섭정으로서 다스리는 프랑스 국왕의 땅이든 - 을 삼킨 잉글랜드 국왕 헨리가 심혈을 기울여 육성하고 있는 함대 또한 빠르게 그 덩치를 불렸다.
그러므로 좋은희망 앞바다에 정박한 잉글랜드 함대와, 그와 대치하듯 좋은희망 근처로 모인 신대륙 연합의 ‘해군’ - 실제로는 허세를 위해 소집된 바스크 뱃사람들의 포경선이었다 - 은 서로 놀라고 있었다.
반면 육지에서는 주로 올드캐슬 쪽이 놀라는 쪽이었는데, 그것도 그럴 것이, 얀 지슈카가 호국경 대리로서 꾸려놓고 있던 방위 계획에 따라 소집된 민병대 대부분은, 조금씩 배가 나오고 머리가 희멀건해졌다지만 여전히 그때 그 그린란드 연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총 든 민간인처럼 보일지라도, 실전을 거친 군대에서만 느껴지는 그 예리함은 세월 앞에서도 둔해지지 않았기에, 올드캐슬은 마치 신대륙 연합의 저력을 언뜻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무력시위가 저들을 꽤 동요시킨 듯하니 그나마 다행이로군.’
아무리 신대륙 연합 민병대가 정예하다 한들, 주민들 입장에서는 타국 함대가 저들의 삶의 터전 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만으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무역업과 조선업이 주력이라는 좋은희망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올드캐슬은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헨리타운의 독립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밝혔다. 그리고 ‘수상쩍은 상인’들의 존재는 없던 것으로 눈감아줄 테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물러나라는 의사를 은근슬쩍 전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헨리타운의 연합 가입이 아무런 실익 없는 일임을 잘 아는 연합 사람들이라면, 곧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으리라.
그날 밤. 시그리드가 올드캐슬에게 내어준 처소에 조심스레 찾아오는 객이 있었다.
나름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는 시늉을 하고 있다지만,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헨리타운에서 무력하게 굶어죽기를 기다리던 빈농 출신 개척민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토마스 저 친구가 잘 해줘야 할 텐데.”
“쉿, 조용히 하세요!”
올드캐슬의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 집주인 이름가르트 - 술집 주인 헤니히와 정분 난 걸로 유명한 그 이름가르트 - 허락을 받고 지붕 위에 올라간 시그리드가 스베인에게 주의를 주었다.
“잘 해줄 겁니다. 그렇게 어려운 이치는 아니니까요.”
명색이 그린란드 회사 사장이자 가르다르 주교지만, 동시에 CIA 자문역으로서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이번 일 수습을 함께하기로 한 파울 주교가 끼어들었다.
“검은 책에 밤중에 훤히 볼 수 있는 망원경 같은 건 안 나오더냐? 보름달에만 의지해서 보려니 영 침침한데.”
“조용히 좀 하시라니까요.”
“저기서 우리 떠드는 소리가 들리진 않을 것 아니냐.”
스베인이 망원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무튼 잘 들어간 것 같으니 다행이다.”
그사이 토마스는 무사히 올드캐슬이 머무는 객관 - 불과 몇 달 전에 준공된 새 건물이었다 - 뒷문에 닿았다. 시그리드의 허락을 받아 올드캐슬이 상륙시킨 용병들이 수하를 하더니, 약간의 실랑이 뒤에 토마스를 들여보냈다.
“그나저나 어려운 이치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그린란드 회사 사장으로 있다 보니, 깨닫게 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 조상들도 이미 비슷한 이치를 깨닫고 실천한 바 있더라고요². 레이캬비크를 자주 오가면서 그곳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깨닫게 되었습니다.”
파울이 설명하였다. 애초에 스노리 노인의 생일을 축하하러 좋은희망에 찾아왔을 때부터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이야기.
따뜻한환영이 농장주들의 천국을 표방하고, 우애의 도시가 평등한 자영농들의 이상사회를 추구한다면, 좋은희망은 무엇을 향해야 하는가?
“사실 그 옛날 시그리드가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설파했던 것과 같은 이치지요. 자유시장경제는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 말입니다.”
저들의 운명을 남들의 손에 맡기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아, 차라리 반역이라는 오명을 감수하면서까지 독립을 원하던 헨리타운 사람들.
그리고 어떻게든 신대륙에 발을 붙임으로써, 유럽에 열리고 있는 새로운 혼란상 속에서 살아남기를 바랐던 잉글랜드.
양쪽 모두에게, 단기적으로나마 이익이 될 만한 방도. 헨리타운이 잉글랜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억압받던 옛날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길.
저쪽 숙소에 불이 켜진 것을 보니, 아마 지금쯤이면 토마스가 올드캐슬을 만나, 그 방도를 마치 자신의 생각인 양 귀띔해주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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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의 역사에서도, 세인트로렌스강 유역의 원주민들은 오대호 주변의 다른 원주민들에게 정복당하느니 차라리 유럽인들 휘하로 들어가는 쪽을 선택하곤 했습니다. 17세기 초 세인트로렌스 이로쿼이계 부족들이 모두 이로쿼이 연맹에게 밀려나거나 흡수당한 뒤, 그 다음 차례가 된 알공킨 족은 프랑스 개척자들과 긴밀한 연합을 형성했고, 단순히 교역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넘어 선교사들이 꾸린 마을에 정착하거나 개척민들과 통혼하기도 했습니다. 그 덕에 이로쿼이 연맹(긴집사람들)의 모호크 족(부싯돌사람들/카니엔케하카)의 맹공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지요.
2. 1262년 ‘오래된 약조Gamli Sattmali’를 통해 노르웨이에 복속되기 이전 아이슬란드는, 놀랍게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분류하면 무정부주의적 자본주의(아나코-캐피탈리즘)와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세 아이슬란드의 이러한 면모를 조명한 경제학자 데이비드 프리드먼(밀튼 프리드먼의 아들)은, 중세 아이슬란드가 ‘마치 미치광이 경제학자가 시장경제 메커니즘으로 어디까지 정부를 대체할 수 있는지를 실험한 결과’처럼 보인다고 주장하기도 했지요. 실제로 인명의 가치부터 알팅그에서의 발언권까지 사실상 모든 것이 자유롭게 거래되었던 중세 아이슬란드는, 중앙정부가 부재하고 사회공동체의 거의 모든 요소가 재화를 매개로 한 계약을 통해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면모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체제가 정말로 본토 유럽보다 더 나은 삶의 질을 보장했는지, 아이슬란드의 희박한 인구밀도와 중세 온난기 같은 다른 변인의 영향이 더 크지는 않았는지 등등, 이러한 주장에는 이론의 여지가 매우 많지만, 어쨌든 북유럽이 ‘문명화’되는 동안 바이킹 본연의 전통을 유지했던 아이슬란드가 나머지 유럽과는 상이한 체제를 구축하였다는 점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