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이제 그만 (4)
26. 눈물은 이제 그만 (이만하면 그만) No More Tears (Enough is Enough) (4)
어두운 밤거리를 걸어가는 내내, 토마스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이성의 목소리에 따르면, 두려워할 것은 없었다. 그가 만나본 시그리드는, 정말로 마녀 소리를 들을 만큼 총명한 사람이었고, 그가 제시한 계책은 토마스의 부족한 식견으로는 암만 생각해도 허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두려움은 이성의 관할 바깥에 있는 것. 이끌어주는 손 없이, 오직 저의 미약한 지식과 지혜를 어두컴컴한 등불로 삼아 밤길을 걸어가야 하는 입장에서, 두려움을 면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자유의 대가일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이래서 사람이 생각이라는 걸 하면 안 된다니까.’
허나 생각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무익한 짓도 없으리라. 이미 한 번 저의 운명을 제 손으로 (혹은, 그 손에 들린 총으로) 개척한다는 상상이 머릿속에 파고들었으니, 더 이상 머리를 비워놓고 살던 옛날의 마이클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나타난 것은, 점점 커져가는 좋은희망의 성장세를 반영하듯, 신대륙 연합의 건물 치고 꽤 그럴듯한 외양의 객사. 매번 의회 회기마다 의원들이 창고나 여관, 지인의 집 등을 숙소로 삼는 것은 영 별로였기에 세운 건물이었다.
좋은희망에 남아도는 것이 고래기름이라, 냄새는 매캐할지언정 밝기는 대낮같은 등불이 건물 앞은 물론이요 뒤쪽도 밝히고 있었다. 뒤편 울타리를 뛰어넘자마자 토마스는 예상대로 발각되었고, 그대로 올드캐슬 앞까지 끌려갔다.
“헨리타운의 반역자 아닌가? 무슨 일로 내 휴식을 방해하는 것이냐?”
토마스를 만난 존 올드캐슬의 반응은 당연히 곱지 않았다. 비록 잉글랜드 본토에서는 이단자 취급을 받을지언정, 국왕 헨리를 향한 충정은 굳건한 올드캐슬로서는, 헨리타운에 찾아온 신대륙 연합의 첩자들(추정)과 공모하여 반역을 저지른 범죄자를 도저히 환대할 수 없었다.
“그, 그것이...”
하지만 아무리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잉글랜드에서든 신대륙에서든 옛날 같았으면 눈 마주칠 생각도 못 했을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원한다면 이곳에서 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토마스는 할 말을 해야만 했다.
“헨리 폐하의 신민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뭐라고? 그게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폐하의 은혜를 제 발로 걷어찬 주제에, 이제 그 품으로 돌아오겠다고?”
짐짓 노여워하는 듯한 대꾸 일면에는, 예상치 못한 답변으로 인한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높은 사람 앞에서 고개를 마냥 조아릴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인간적인 반응.
저쪽도 자신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자신과 같이 식사를 하고 변소를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재차 되새기며, 토마스는 말을 이었다.
“각하, 저희가 반기를 들었던 것은, 그저 죽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산 사람이 살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인데, 그것이 짓밟히니 당연히 뭐라도 해보고 싶을 수밖에요.
저희는 이곳 연합의 사람들이 저희의 곤경에 연민하여 뭔가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듣기로저희처럼 굶주림과 핍박을 이기지 못해 신대륙으로 떠나온 사람들이 세웠다고 했으니까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가르쳐준 시그리드가 말하기를, 가장 사람을 잘 속일 수 있는 것은 새빨간거짓말보다는 약간의 참과 거짓을 섞은 거짓말이라 하였다. 부디 그 말이 옳기를 바라면서, 토마스는 저의 솔직한 심경을 약간이나마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곳 연합의 사람들도 말로만 자유니 정의니 외칠 뿐, 막상 저들의 창고를 열어 저희를 도와주려 하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이제 경께서 함대를 이끌고 이렇게 찾아오셨으니, 저치들은 더더욱 저희를 저버리려 하겠지요.
배신을 당할 바에야 먼저 배신하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저들을 보살필 의무를 먼저 소홀히 한 잉글랜드 국왕과 그 정부, 그리고 올드캐슬 자신을 향한 것은 아닌가 의심하기에는 너무나 완고하고 우직한 올드캐슬이었다.
“좋다. 허나 반역이라는 죄는 고작 말로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 너희는 어떻게 그 죄를 씻고자 하느냐?”
“저 연합의 사람들이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음모라?”
수상할 정도로 총기와 화약을 많이 싣고서 헨리타운 앞에 나타났던 상인들. 당연히 그 뒤에는 신대륙 연합의 농간이 있었을 것이었다. 헌데 ‘엄청난 음모’라면 그 이상의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뜻일 터.
“그렇습니다. 저 같은 놈이야 어차피 알아들어도 딱히 뭘 할 수 없으리라 여겼는지, 제가 물어보자 별 의심도 안 하고 이것저것 알려주더군요. 혹시 CIA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는지요?”
영어와 공용어, 저지독일어가 서로 비슷한 듯 다르다지만, 어차피 조금이라도 고상하다 싶은 어휘는 죄다 라틴어나 그리스어가 그 어원이었다. 영어로든 공용어로든 CIA는 CIA였다.
“CIA라? 들어본 적 있다고는 못 하겠군.”
“말로는 지도정보국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유럽의 다른 훌륭한 군주들께서 세우신 식민지마다 찾아가 반역을 선동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합니다. 마녀의 수족이라는 거인 스베인이 그 우두머리라고 하더군요.”
좋은거래에서는 애정 담은 별칭으로 ‘오치콰리 아범’로도 불리는 라그나르의 아들 스베인.
그러나 유럽에서는 알음알음 그 악명이 퍼져 있었는데, 투슈판 전투 이후로 잉글랜드와 제노바가 거금을 들여 신대륙 연합 민병대의 전력을 정탐한바 시그리드의 오른팔이라는 스베인은 그 전적이 지슈카나 시그리드에 가려졌을 뿐 실로 엄청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스베인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올드캐슬이 잠깐이나마 놀란 표정을 드러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저는 잘 모르지만, 그들이 말하기를 유럽 사람들이 남쪽 바닷가 곳곳에 세운 개척촌들 사정도 저희 헨리타운과 별반 다르지 않다 했습니다. 그런 곳마다 찾아가, 그들의 빈궁함을 이용해서 반란을 선동할 계획이라더군요.”
“뭐라고? 아니, 그런 간악한...”
이단적 교리를 퍼뜨리는 것도 아니요, 빈곤함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이용하여 반란을 부추긴다니, 실로 치졸하고도 비겁한 짓이었다. 과연 마녀의 오른팔이 수장으로 있는 조직다운 음험함이랄까.
적어도, 이쪽이든 저쪽이든 똑같이 백성들 위에 올라앉아 전쟁놀음과 여타 유흥으로 허송세월하는 유럽 귀족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그러하였다.
“좋다.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꾸나. 허나 그 정도 고변으로는 너희의 죄를 씻기에 부족하다.”
“아니, 잠깐만 더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또 제가 엿들은 게 있습니다.”
“저들은 소위 공용어라는 기묘한 언어로 소통하지 않던가? 그것을 어찌 네가 알아들었다는 말이냐?”
“무슨 뜻인지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저들이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자주 나왔던 단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럴 때 마녀 시그리드와 그 측근들이 각각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 여전히 좋은희망 앞바다에 정박해 있는 잉글랜드 함대를 보며 불안하게 수근대는 사람들을 뚫고 올드캐슬은 호국경 관저로 향했다.
나라의 군주라면서 아무런 위엄도 차리지 않는 그 경박함과 우스꽝스러움을 속으로 은근히 비웃으며, 곧 나타난 시그리드에게 올드캐슬은 당당히 운을 떼었다.
“헨리타운에서 벌어진 일 뒤에 신대륙 연합이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한 사실이오. 다만 심증만 농후하고 물증이 부족할 뿐이지.
따라서, 본인은 이번 일을 불문으로 부치되, 그대들이 우리 헨리 폐하와 그분의 정부의 배후에서 계속 그러한 공작을 벌일 경우 묵과하고만 있지 않을 것임을 밝히고자 했소.”
“‘했소’라고요? 그러면 지금은 뜻이 달라지셨다는 말씀이신가요?”
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시그리드는 천연덕스레 물었다. 짐짓 경악하는 시늉을 할 준비를 하면서.
“바로 그렇소! 간밤에 심사숙고해 보니, 그저 단호하게 경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듯하더군. 헨리타운에 갑자기 수상한 상인들이 나타난 것과 같은 일이 헨리 폐하의 충직한 신민들이 개척한 다른 식민지에도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소?
그러므로 신대륙에서 헨리 폐하와 잉글랜드의 이익을 대표하는 본인 존 올드캐슬은, 이 자리에서 선포하고자 하오.”
어젯밤, 토마스의 ‘밀고’를 바탕으로 나름대로 올드캐슬이 재구성한 CIA의 음모는 다음과 같았다.
신대륙 연합의 국력은 유럽 기준으로는 고작해야 소국 수준. 그러나 그 우두머리들은 마치 그 옛날 프라하 시 하나만으로 지기스문트를 패퇴시켰던 시절처럼, 저들의 미약한 힘을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쓸 수 있을지를 잘 아는 이들이었다.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신대륙과 그 주변 도서에 쏟아붓고서 식민지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유럽 세력들의 식민지들에 비하면, 신대륙 연합은 가히 신대륙의 잉글랜드나 프랑스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거대한 세력.
그 부유함으로써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다른 식민지들을 뒤흔든다면, 유럽 국가들이 기껏 신대륙에 마련한 전초기지들은 금방 뿌리가 뽑혀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굳이 거창한 함대를 꾸릴 것도 없이, 헨리타운에서 그랬다는 것처럼 교역선 몇 척만 보내도 충분히 반역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애초에 저들의 백성을 신대륙의 해안과 밀림에 내던지다시피 한 다음, 굶어죽든 말든 수익이나 올리라 요구하는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인식에는 도달하지 못한 올드캐슬이었다.)
“앞으로 잉글랜드령 식민지를 오가는 모든 교역품은 오로지 선주와 선장이 모두 잉글랜드인이고 선원 또한 과반이 잉글랜드 국민인 배로만 날라야 하며, 반드시 잉글랜드령 항구에서 출항해야 하오.”
따라서, 자신이 정곡을 찔렀다고 자신하는 올드캐슬의 말투는 점점 득의양양해졌다.
“곧 헨리 폐하께도 글월을 부쳐, 이러한 조치가 본인 명의의 행정명령이 아닌 잉글랜드의 국법으로서 세워지도록 진언할 것이오! 만약 신대륙 연합의 상인들이 어떤 악의를 품고 헨리타운에 찾아간 게 아니었다면,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이 조치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이외다.”
CIA가 식량과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는 잉글랜드령 식민지마다 잔뜩 총기와 식량을 들고 찾아가 비슷한 공작을 벌일 것이라는 토마스의 ‘밀고’를 들은 올드캐슬이, 나름대로 고민한 끝에 내놓은 해법이었다.
‘아아, 외국 선박이 식민지에 찾아오는 일만 막을 수 있었다면 저희 헨리타운 사람들도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요...’
토마스가 이렇게 말꼬리 흘리는 것을 듣고서 이 해법을 떠올렸다는 사실은, 이미 올드캐슬의 머릿속에서는 지워져 있었다. 그런 무식쟁이가 뭘 알고서 그런 말을 했을 리도 없지 않은가.
“자, 어떻소?”
“...”
충격에 빠진 듯 한참을 고민하던 시그리드는, 힘 빠진 목소리로 청했다.
“잠깐만 시간을 주세요. 뭔가 오해가 있었던 듯한데...”
그리고 곧, 다른 장관들이 황망히 달려오더니, 한참 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에야 올드캐슬을 도로 관저에 들라 청하는 것이었다.
그사이 시그리드의 얼굴에는 부쩍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평소 독실한 신앙인을 자처하며 여색을 멀리하던 올드캐슬은, 시그리드가 그새 얼굴에 분칠을 했음을 간파하지 못했다.)
“재고해주실 수는 없으실까요?”
“모든 일의 원인이 된, 그대들의 그 괴상한 헌법을 이제라도 수정한다면 재고를 검토해 보겠소. 새로운 주가 가입할 수 있다는 그 조항을 삭제한다든가 한다면 말이오. 허나 그러지 않는다면, 헨리 폐하의 충직한 종복으로서 본인 또한 뜻을 거두기 어려움을 양해해주기 바라오.”
자신이 낸 명안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조치가 벌써부터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여기는 올드캐슬은, 앞서보다도 더욱 목소리와 목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헌법은 우리 연합의 국민 모두가 여러 해에 걸쳐 논의하고 또 합의한 결과물입니다. 그렇게 쉽게 수정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말씀드리겠소.”
시그리드가 몇 번이고 더 간곡하게 청해보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이 정말로 마녀와 CIA의 무시무시한 계획을 무산시켰다는 올드캐슬의 확신만 더해질 뿐이었다.
물론 올드캐슬이라고 토마스의 밀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명색이 일국의 군주라는 이가, 고작 나라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체통을 저버려가며 저토록 애걸복걸할 리는 없었다.
그러니 마침내 자신이 저 시그리드에게 한 방 먹였다는 사실에 만족해 하며, 등 돌려 좋은희망의 언덕길을 내려갈 뿐.
그렇게 올드캐슬은 무력시위를 위해 데려온 저의 선단과 함께 떠났다. 토마스도 올드캐슬과 함께 좋은희망을 떠났다. 토마스는 곧 헨리타운으로 복원될 ‘새로운 주’에 돌아가, 자신이 좋은희망에서 받아온 답변과 계책을 주변에 퍼뜨릴 것이었다.
시그리드는 마지막까지 마치 올드캐슬의 발목이라도 잡을 것처럼 정성껏 그를 배웅했다가, 허탈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저놈들한테는 망원경이 없으니, 이제는 연기를 그만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거,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시그리드 곁을 지키던 디폴트가 물었다.
신대륙 연합 각료들 중에는 플레톤이나 게렉의 아들 옌스처럼 능청맞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얀 지슈카처럼 죽어도 연기는 못 할 사람도 있었다.
디폴트도 - 독일인답게 - 지슈카 과科에 속하는 사람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장관급 인사가 둘 이상 빠지게 되면 올드캐슬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챌 공산이 있는지라, 결국 저보다 훨씬 연배도 높고 경력도 탄탄한 지슈카 대신 디폴트가 이 기묘한 연극에 끼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관저로 돌아갈 때까지는 제대로 풀 죽은 척을 하자고요.”
그렇지만 시그리드도 긴장이 풀린지라, 바다에서 등을 돌리자마자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이 조금씩 돋아나는 건 금치 못하였다.
“소득이 적지 않았구려.”
관저로 돌아와 보니, 다른 각료들은 이미 이번 무력시위 대처를 두고 논평을 주고받고 있었다.
“좋은희망 앞바다까지 훤히 뚫린 게 소득입니까?”
성품 삐딱한 옌스가 살짝 비꼬았으나,
“그러면 훤히 안 뚫리게, 정부 재정으로 해군이라도 구축해야 하겠는가? 옌스, 자네가 상무장관인지 국방장관인지 모르겠구만.”
자문역으로 자리에 함께한 파울이 부드럽게 타박을 놓자 바로 입을 다물게 되었다.
여기서야 옌스가 장관이지만, 그린란드 회사 전체로 보면 파울이 옌스의 상관이었던 것이다. (꼭 그렇지 않았더라도, 처세에 능하다 자처하는 이로서 신대륙 연합에서 가장 유력한 시그리드와 동고동락한 파울 앞에서 바짝 기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다.)
“이번처럼 미리 저들의 접근을 알아챌 수 있다면, 해군이 없다 할지라도 적에게 무방비하게 습격당하는 것은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겠지. 정말로 전쟁이 벌어지기 전 조기경보 체제를 갖출 수 있었고, 또 이번에 그것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을 검증할 수 있었으니, 성과는 성과요.”
이 체계를 만든 사람은, 그간 국방장관으로서 묵묵히 신대륙 연합의 방어 체계를 정비하고 있던 지슈카였다. 조기경보라는 발상 자체야 당연히 검은 책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자, 자. 시그리드도 돌아왔으니, 이제 다음 일을 논의해 보십시다들.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지 않소? 사실 아직도 이게 최선의 해법이었는지는 영 확신이 들지 않지만...”
플레톤이 주의를 환기하며 손뼉을 쳤다.
“선생님, 솔직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여기 파울 주교가 떠올린 생각을 먼저 떠올리지 못한 것을 두고 여전히 분하게 여기시는 것 아닙니까?”
후스가 그새를 놓치지 않고 트집을 잡았다.
“흠흠. 그런 과거지사를 왜 이제 와서...”
“다들 추구하는 이상이 다르기에, 떠올릴 수 있는 해법도 다를 뿐입니다. 제가 어찌 두 분에 비하겠습니까?”
자유무역의 힘으로 신대륙 연합의 이상에 한 발 다가간다는 발상을 내놓은 파울이 겸손하게 말하니, 후스도, 플레톤도 더 군말을 덧붙이기 무엇해졌다.
원래대로였다면 한참 뒤에나 도입되었을 잉글랜드의 항해조례Navigation Act¹. 골자만 두고 보면 무역장벽을 세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실제로 올드캐슬도, 그리고 그의 진언을 들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도 그렇게 여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신대륙 정세를 감안하면 오히려 반대가 될 터였다.
“그나저나 토마스라고 했던가? 그 녀석 어째 영 맹해보이던데. 실수나 안 했으면 좋겠군.”
“그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요. 그렇게 의심부터 하시면 섭한걸요.”
시그리드가 당분간 볼 일 없을 토마스를 옹호하고 나섰다. 아직 너무나 부족한 식견과 지식으로 계획을 최대한 이해하고, 올드캐슬에게 늘어놓을 진실과 거짓을 모두 암기하느라 그가 밤을 지샜다는 것을 시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감당이 안 되었으리라고들 하니 나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그래도 우리 연합의 우수한 제도에 탄복하여 가입을 희망한 이들을 겉으로나마 내친 꼴이 되었으니 약간 아쉽기는 하다네. 그래서 이렇게 투덜거리는 것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는 말게나.”
플레톤이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 옆의 후스는 ‘이렇게 진솔해질 수도 있는 양반이 평소엔 왜 그런다냐’하는 불평을 삼켰다.)
무역 거점으로서도, 정착촌으로서도 입지가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헨리타운. 그러나 항해조례가 발효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항해조례는 잉글랜드인이 소유한 배가 잉글랜드 식민지를 출항해, 다른 잉글랜드 식민지에서 교역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올드캐슬이 식민지의 궁핍함이 신대륙 연합의 ‘마수’가 뻗쳐올 원인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그런 교역을 장려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즉 항해조례는 잉글랜드와 신대륙 연합 사이에 무역장벽을 세울 뿐, 같은 식민지 사이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던 장벽들은 모조리 없앤 셈이었다.
그리고 헨리타운은, 신대륙 연합이 폭풍만 근처 식민지들을 새로운 시장으로 삼을 수 있는 교두보가 되어줄 것이었다.
헨리타운 주변에서 나는 악어 가죽을 수출한다는 명목으로 헨리타운 사람들이 탄 배가 우애의 도시로 향할 것이요, 그곳에서 가죽 판매 대금으로 받아온 신대륙 연합산 식량과 생필품은 그대로 남쪽으로 향할 것이었다.
또한 남쪽 식민지들도, 자연스럽게 그 땅에서 굳이 식량을 재배하거나 제철을 하려고 시도하는 대신, 가장 이익이 남는 방향으로 각각 특화하게 될 것이다².
“그런데 저들이 바보도 아니고, 그걸 좌시하고 있을까요?”
옌스가 시그리드에게 물었다.
“여차하면 관세를 내면 그만이지요. 시장이 있는 이상, 우리 쪽의 제조원가는 꾸준히 낮아질 수밖에 없거든요.”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라는 검은 책의 지혜. 오지 않을 미래의 에딘버러 사람 애덤 스미스가 듣는다면, 자신의 경제학 이론이 잉글랜드를 물 먹이는 데 쓰인다는 사실에 점잖게 웃음지을 법한 일이었다.
“그리고... 테오도로스와 장영실 두 분 선생님이 좀 더 노력해서, 증기기관을 다른 쪽으로도 상용화하는 데 성공한다면 직물이나 제철 쪽으로 더욱 큰 이익을 낼 수 있을 테고요.”
그 옛날 상왕 전하의 눈에 들었을 때보다도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장영실이 듣는다면 기뻐할 일이었다. 장영실을 가르칠 때마다, 장영실이 천재인지 자신이 둔재인지 알 수 없어 골머리를 앓는 테오도로스의 사정은 조금 다르겠지만.
“그리고 남쪽 식민지 시장과 우리 신대륙 연합이 긴밀해지면 긴밀해질수록, 결국 그 식민지를 운영하는 유럽의 정부들도 깨닫게 되겠지요.
자유무역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만약 조금이라도 실기해서, 개척민들에 대한 의무를 방기하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그들이 개척한 식민지들이 우리 연합의 일원으로 가입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요.”
굶주림과 압제를 두려워하며, 다른 대안이 없기에 신대륙 연합에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그간의 교류를 통해 연합을 제대로 알게 된 다음 합리적으로 내리는 의사결정.
그때가 되면, 신대륙 연합 또한 중요한 시장으로 부상한 남쪽 식민지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연합이 아무리 유럽보다 더 값싸게 생필품을 공급할 수 있다 하더라도, 유럽 군주들이 이걸 좌시하고만 있을까요? 결국 어떤 시점에서는 뭔가 제재를 가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번 무력 시위보다 훨씬 엄중한 조치를...”
머릿속으로 계속 계산을 하고 있던 옌스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만약 저들이 나름대로 식민지 개척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잘 보장하면서 그런 제재를 가한다면야, 감수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시그리드가 태연자약하게 답하였는데, 그 옆에서 훨씬 태연하면서도 맑은 눈으로 대꾸하는 후스에게 묻히고야 말았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곧 유럽에 보낼 성경 번역본과 헌법 번역본을 받아본다면, 몇 년 내로 저쪽이 우리를 제재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우리를 이해하고 함께 공존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테니까요. 무역 문제 때문에 발생할 제재를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는 뜻이지요.”
해맑은 후스의 답변 속에 어린 광기에, 옌스는 몸서리를 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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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 역사의 항해조례는 - 물론 1381년의 항해조례도 있기는 했지만 - 보통 1651년 이후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이 식민지 무역과 동방무역에서 네덜란드를 견제하기 위해 선포한 조례를 뜻합니다. 영국 식민지에서 교역할 수 있는 배를 영국인이 소유하고 영국인이 운행하는 무역선으로 제한하며, 선원의 75%가 영국인이어야 한다고 규정한 이 조례는, 이후 후속 입법을 통해 계속 강화되었지요. 이는 영국-네덜란드 전쟁으로 영국이 네덜란드를 꺾고 해상패권을 장악한 뒤에도 이어졌고, 이러한 보호무역 기조는 훗날 미국 독립전쟁의 한 가지 원인이 됩니다.
2. 원 역사에서도 카리브해의 영국령 서인도제도 식민지들은 북미 대륙과의 교역을 통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서인도제도 식민지에서는 오직 사탕수수 플렌테이션에만 집중하고, 그 외 모든 필요 물자들, 즉 식량(염장 생선, 건어물 등 단백질 공급원), 목재 등은 모조리 영국령 북미 식민지에서 조달하는 식이었지요. 이러한 선택과 집중 덕택에 영국령 서인도제도는 값싼 열량 공급원(설탕)의 원천이 될 수 있었고, 이는 다시 산업혁명의 숨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이 독립해버리면서 노동력(노예)을 제외한 모든 원자재를 북미에서 수입하던 영국령 서인도제도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수익성 악화는 가격경쟁력 상실로 이어졌고, 서인도 제도의 다른 국가 소속 식민지들 - 프랑스, 네덜란드 등 - 은 재빨리 추격에 나섰지요. 이에 약삭빠른 플렌테이션 업자들은 자신들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면 경쟁자들의 생산성도 떨어뜨리면 그만이라는 판단 하에 노예해방의 기치를 들게 되고, 그간 종교계와 계몽주의자 등 소수의 움직임에 불과했던 영국 내 노예해방운동은 빠르게 성장하여 1807년 노예무역 금지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