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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화 (1/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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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원숭이 정리라는 게 있다.

확률에 관한 이야기다.

원숭이 백 마리가 자기 마음대로 타자를 두들긴다.

무한한 시간 동안.

그렇다면 그 원숭이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전체를 작성할 확률은?

한없이 100%에 수렴한다.

세상은 흘러흘러 갈테고, 확률의 주사위는 끊임없이 구른다.

그러면 아무리 일어날 리 없는 일도 결국 언젠가는 일어나긴 한다.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져있다.

내게 일어난 일도 그랬다.

나는 도처에 깔린 경고를 무시해왔다.

내게 일어난 일은 오랜 클리셰중 하나 였다.

이미 상상력의 영역에서 정복된 지 오래인 흔한 이야기.

어쩌면 그런 이야기였기에 일어날 수 있었을지도, 혹은 적어도 확률이 높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더 일찍 깨달아야했다.

영화 쥬만지를 보았을 때, 깨달았을 수도 있을 것이며.

친구가 하도 보라고 성화여서 어쩔 수 없이 읽었던 웹소설에서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내가 하던 게임의 설정도 그런 것이었다.

그런 일을 대비해야했다.

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 그 어느 누구나.

어느 날 갑자기 즐겨하던 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다.

말도 안 된다고?

사실은 나도 그리 생각했다.

솔직히 누가 쥬만지나 소설을 보고 그런 일을 대비하냐고.

그러니 일이 일어난 이후인 지금, 앞선 모든 말들은 결국 자조적인 농담에 불과하다.

빅뱅 이후, 신은 타자를 두드리는 원숭이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주었다.

기어코 어느 빌어먹을 원숭이가 나를 게임 속에 처넣는 내용을 타이핑하고야 말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게임 속에 들어간다.

그럴 리가 없더라도.

아무튼 씨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대비해야했다.

팔굽혀펴기라도 한 번 더하면서.

* * *

'로그라이크'는 여러 가지 특징으로 정의되는 장르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는 죽으면 캐삭이라는 부분.

두 번째로는 운빨좆망겜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월드를 생성합니다.]

게임에 빨려들어가고난 후, 몇 회차 되지 않았던 뉴비 시절의 나는 내가 '소울라이크'를 즐기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소울라이크'는 지나치게 정직한 실력 장르다.

운빨이 크게 작용하는 '로그라이크'와는 다르다.

반드시 유저가 강해져야만 한다.

[바벨탑이 점점 기울어가는 중······.]

아무리 이런 저런 지식을 알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이루어 내는 것은 순수하게 게이머의 몸이다.

그런 게임의 속으로 들어갔다면, 내가 어떻게 지냈을지는 뻔했다.

나는 내가 육체적인 행위에, 그러니까 주로 물리적 전투에 재주가 있다 여기진 않았다.

게임으로 즐겼어도 줄창 죽어대었을지언데 실제라면 더 비참하고 끔찍해졌으리라.

[아서왕이 멀린의 실험에 휘말리는 중······.]

그러니 나는 장르가 로그라이크라는 점에서 불행 중 다행을 찾았다.

이 장르의 게임이 가지는 주요 특징들로 인해 생겨나는 환경이 있다.

원래는 플레이하던 캐릭터가 죽음을 맞이하면 삭제된다.

영원히 그 캐릭터는 복구할 수 없다. 단 한 번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으로 이어진다.

[대전사 에길 스칼라그림손이 용의 목을 베고 쓰러지는 중······.]

이 요소는 현실화 될 경우 언뜻 치명적으로 보였다.

그 바람에 첫 번째 회차에선 정말로 열심히 몸을 사렸다.

하나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고 다행스럽게도 세상은 ‘게임’이라는 설정에 충실했다.

내가 죽어봐야 그저 다시 시작한다.

심장이 쥐어뜯기건, 산성액에 녹아버리건, 용암에 타버리건.

그저 장비도 레벨도 모두 잃은 채, 게임에 처음 빨려 들어온 그 시점으로 되돌아갈 뿐이다.

캐릭터가 사망했을 뿐이지 플레이어인 내가 죽은 게 아닌 판정으로 작동하는 모양이다.

[코드 네임 ‘블랑쉐’가 총구를 보며 죽음을 예감하는 중······.]

그리고 이 게임은 완전히 운빨좆망겜이다.

지형지물, 아이템과 몬스터 배치, 특정 NPC가 등장 할지 말지.

게임을 구성하는 온갖 요소들이 전부 캐릭터를 생성할 때마다, 혹은 그때그때의 순간마다 랜덤으로 결정된다.

죽음에서 돌아올 때마다, 매번 매번이 완전히 다른 환경이다.

첫 죽음을 경험한 후, 나는 두 번째 요소에 주목했다.

[굶주린 꼬마 흡혈귀가 길을 잃도록 송과체를 공격 중······.]

운이 나쁘면 한도 끝도 없이 나쁘지만 좋다면 의외로 싱겁게 잘 풀리기도 하는 게 로그라이크요 운빨좆망겜이다.

트라이 앤 에러. 아니 에러도 필요 없다. 그냥 박다보면 깬다.

클리어 할 정도로 운이 좋은 판이 한 번 정도는 있지 않겠어?

행운의 여신이 언제나 적에게만 미소를 짓는 법은 없다.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져있다.

[또 신도가 줄어 울먹이는 혼돈의 여신에게 사탕 물려주는 중······.]

거기에 내가 자신감이 넘칠만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고인물이었다.

여가시간의 전부를 게임에 투자하는 하이퍼 겜창 인생이었다.

쉬운 게임에 만족하지 못하여 좆같은 게임을 일부러 찾아서 플레이하는 하드코어 게이머였다.

그리고 내 인생게임이라 할 수 있는 게 바로 이 로그라이크 게임이다.

온라인 서버로 집계하는 타임어택 랭킹에서도 독보적 1위를 오랫동안 고수한 초고수 중의 초고수.

[지구4에서 사랑과 살인에 흥미진진한 꿈 많은 여고생 섭외 중······.]

운이 아무리 중요한 게임이어도 실력은 있는 법이다.

어떤 카드게임에 대하여 말할 때, 흔히 하는 말.

운칠기삼.

운이 7이요 기량이 3이라.

바로 그거다.

운의 비중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주어진 운 내에서 잘 굴려나가는 것은 또한 실력이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2975회차 월드의 구성이 끝났습니다.]

어느 새 미궁 속에서 97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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