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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3화 (3/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화

1층 - Lv.2 사냥꾼(2)

몇 번인가 그런 무력행사를 하고나니 소녀도 자연스럽게 돕는다.

관절기를 자연스레 구사함이 눈에 띈다.

이번에는 정씨 집안이 대체 어떤 설정을 들고 나온 건가 싶다.

단순 반복 작업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후, 잠깐 한숨 돌릴 겸 멈춰 섰다.

"운이 나쁘군."

"무슨 말이에요?"

소녀가 혼잣말에 재빨리 꼬리를 문다.

"지나오면서 무기가 떨어져있을 만한 곳을 몇 군데 보았는데 이미 다 털려있었어."

"무기라면 이게 있잖아요?"

그러며 능숙하게 빼어드는 단검. 미궁의 초기 장비로 모두가 가지고 있다.

단검이라곤 해도 날 길이가 30센티가 넘는 본격적인 전투용 대거(Dagger)지만 내가 찾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못돼 먹은 놈들을 일일이 제압하는 게 효율이 나빠. 딱 보자마자 좆됨을 느끼고 고분고분해질 그런 무기가 필요한데."

다 떠나서 체력의 문제다. 내 저질 체력에 슬슬 숨이 턱 끝까지 닿아있다.

내 초기 스탯으로는 무력행사에도 한계가 있다.

완력보다 기술로 제압하는 것이라곤 해도 체력을 소모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1층에 스폰되는 장비는 대개 질이 나쁘지만 대거보다야 낫다.

누가 봐도 맞으면 죽을 것 같은 철퇴라거나, 찔리면 아플 것 같은 창 정도면 무력시위용으로는 충분하다.

싸우지 않고 이겨야한다.

질 나쁜 녀석들이 내가 든 것을 보자마자 쫄아 버리는 상황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생존자 서른 명 정도를 2층으로 던져 넣었나.

오랜 세월 신경 써서 맞춰온 체내 시계는 이미 눈을 뜬지 40분이 되어가고 있다고 내게 알려온다.

"슬슬 시간이 없는데. 여기서 만족해야할 것 같다."

한 시간이면 미로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천년만년 눌러앉는 플레이를 방지하기 위한 서든데스라는 것이다.

이곳은 1층이니만큼 복잡할 것도 없고 난관도 적다.

게임 시절에는 단순히 매 층마다 구석구석 다 털며 파밍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다.

그러다보니 서든데스 직전의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파밍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현실이 된 지금, 서든데스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많이 뒈지고 죽음에 익숙해지라는 뜻이라 생각한다.

"그런가아."

설명을 들었건만 소녀가 어딘가 납득하지 못한 것처럼 말꼬리를 끈다.

‘현실’에서 조금 전까지 지내다 온 입장이라면 믿기 힘들만도 하지.

어쨌건 1층 파밍은 망했다. 무기를 칼 한 자루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NPC 운은 있다. 옆의 소녀는 초기 스탯 이외의 면에서도 구하기 힘든 종류의 동료다.

교복 차림을 보면 학교에서 끌려온 모양인데 거리낌이 전혀 없다.

걱정, 불안함, 혼란.

으레 우선시 되어야하는 감정들 대신 일상적인 발랄함이 먼저 나온다.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는 태도지만 그렇기에 귀하다.

이미 내 행동에 흥미를 느끼고 따라다니고 있으니 더욱 좋다.

정말로 시작이 아주 괜찮다고 할만 했다.

내 무수한 회차 중에선 거의 시작하자마자 자살해서 다음 세계로 넘어가는 경우도 흔했다.

"그래도 10분만 더 찾아봐야겠다."

무슨 소리인지도 정확히 모를 터인 소녀는 그럼에도 군소리 없이 따랐다.

* * *

스폰 되었을 것이 분명한 무기들이 제자리에 없다는 것은 누군가 이미 루팅했음을 뜻한다.

바로 다음에 마주치게 된 세 명의 무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제대로 된 냉병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이 상황에 낯섦을 느끼지도 않는 것 같았다.

다년차 유배자이되 마음씨가 고운 녀석들은 아니다. 무기에 이미 피가 묻어 흐르고 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작부터 무리지어 인간 사냥하는 녀석들은 어느 회차를 가도 있단 말이지. 안 그래?"

그 말에 상대방이 낡아빠졌지만 날만은 살아있는 할버드를 겨누며 껄껄대었다.

"거기 말라깽이, 몇 년차인지는 몰라도 빨리 꺼져. 살려는 줄게."

가장 흔하게 심성이 문제 있는 케이스다.

무법자.

힘이 곧 정의인 세계에, 목숨마저 가벼우니 완전히 자기들 마음대로 하겠다는 의지다.

심지어 저런 녀석들은 무리도 잘 짓는다.

일일이 상대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어찌 보면 보스 몬스터보다 피곤한 부류다.

"아참, 여자애는 두고 가라고."

거기에 사내놈들 생각이란 다 거기서 거기다. 힘과 주도권을 가졌다 생각하면 더하다. 척 보기에도 발정 난 모습이다.

옆의 소녀를 흘깃 본다. 타고난 쾌활함에 맞춰진 듯한 상큼하고 싱그러운 외모의 여고생이다.

병신들이 많이 꼬일 수밖에 없다.

미모는 미궁에서 그다지 어드밴티지가 아니다.

아무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꼬마를 내줄 수는 없다.

소녀 본인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이미 대거를 빼들고 있다. 지금은 느슨하게 쥐고 있지만 필요한 순간에만 힘을 넣기 위함일 것이다.

긴장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나도 그랬다.

사실 저런 인간 사냥꾼들은 보통 하수다. 다회차래봐야 왕국까지 가본 적도 없는 조무래기들.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떠보는 의도도 있었다.

"혼자 셋 가능?"

"네? 저 혼자요? 그건 무리죠."

"그냥 한번 물어봤다. 둘만 잡아봐."

"연약한 여고생에게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렇게 대꾸하는 얼굴을 보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연약한 여고생이 칼 들고 그렇게 웃는다고?."

"앗."

입가를 재빨리 가리지만 함박미소를 숨기기엔 늦었다.

살인에 거부감 없음.

밖이라면 인성에 심대한 결함으로 판단할 요소지만 이곳에서는 다르다.

하기 싫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어차피 할 거라면 잘 하는 편이 더 낫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싸움이라고 부를 정도도 못되었다.

건방진 세 명이 쓰러져 움직이지 않게 되기까진 1분 정도 걸린 것 같다.

소녀는 주저 없이 달려들어 한 명의 목 줄기를 끊어버렸다. 당황한 다른 하나는 열심히 저항했으나 결국 심장에 날이 박혔다.

슬프게도 나는 그 정도의 초기 스탯이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몇 번인가 낑낑대며 합을 나누고서야 겨우 숨을 끊어놓았다.

대거로 리치 차이가 심하게 나는 무기를 상대하는 것은 피곤하다.

거기에 근력도 저쪽이 우위였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흘려내도 뼈마디가 쑤셔온다.

혼자였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을 거다.

몸에 밴 기술엔 자신있으나 극초반에 3대1은 리스크가 지나치다 못해 자살행위였다.

어찌되었건 체력이 간당간당하던 나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더 이상 백병전은 피하고 싶구만 그래.

"이런 녀석들이 많아요?"

소녀는 어째서 이들을 죽이는지에 대하여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인간 사냥이라는 내 말이 충분한 답이었을 지도 모른다.

다가오자 피 비린내가 훅 끼친다.

"옷 젖었네. 회복의 샘을 찾으면 좀 빨아야겠는걸."

소녀의 교복을 가리킨다. 상대의 무기는 피했지만 경동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는 피하지 못했다. 어깨가 피에 살짝 젖어 붉게 번지고 있다.

"앗, 피는 빨리 안 빼면 안 지는데."

"학교갈 일 없잖아 이제."

"음, 그건······ 그렇네요."

대답은 어딘가 시무룩했다. 그러며 코를 긁적이는 것이 뭔가 생각하며 아쉬워하는 모양이다.

좋은 징조다.

떠나온 집에 미련이 없는 녀석들이 가끔 있다. 그런 놈들은 보통 돌아가고 싶어 하지도 않고, 파티 내에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목적 자체가 미궁에서의 부귀영화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 세계가 부여할 수 있는 동기는 슬프게도 ‘귀가’ 하나뿐이다.

집에 미련이 있는 편이 내 형편에도 좋다.

"아니, 그런데 대답을 해줘요. 저런 녀석들 많아요?"

그 말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서려있다.

아니, 그렇다고 살인에 희열을 느끼는 건 좀 께름칙한데.

내 표정이 보였는지 소녀가 성을 냈다.

"아! 그런 거 아니에요. 상대하기 피곤할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예요."

"······음, 그래. 엄청 많아."

"흐음."

뭐가 흐음일까.

어쨌든 찾지 못한 장병기를 대신 들고와 준 고마운 녀석들의 시신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주 뜻밖의 물건이 보였다.

"뭐야, 샷건이 왜 여기 있어?"

소녀가 가장 먼저 죽인 녀석의 몸 아래에 웬 고풍스런 막대가 깔려있나 했다.

이 녀석이 나름대로 대장 같은 녀석이었을까.

어쩐지 다른 놈들이 이놈 쪽을 계속 흘깃거리더라니.

그런데 이런 게 있으면 왜 처음부터 안 썼지?

그랬다면 우리가 죽었다.

생각하는 동시에 답을 깨달았다.

우리는 겉보기에는 말라깽이 남정네 하나와 여고생이다. 위협적이기 힘들다.

역시 하수로군.

미궁은 그런 식으로 상대의 전력을 판단할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와, 저 그거 뭔지 알아요. 듀얼 배럴 샷건이죠?"

"더블 배럴이겠지."

행운이었다.

샷건은 1층 스폰을 기대하기엔 지나치게 확률이 낮은 무기다.

애초에 극초반에는 본격적인 총기 자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투사무기라고 해봐야 슬링샷이나 활 정도.

가장 좋다고 해봐야 석궁 수준에 불과하다.

1층의 샷건은 향후 몇 층 동안 거의 치트키나 다름없다.

다만 죽은 남자를 털어 확보한 쉘은 열 발로 썩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비장의 무기로 아껴두었나 보군.

혹시 몰라 다른 남자의 몸도 뒤지다보니 서든 데스가 시작되었다.

멀리서 쿠르릉하고 구조물이 가라앉는 소리가 들린다.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미로는 아래층으로 향하지 못한 인간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처음에 다들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죽은 끝에 앞으로 나갈 의지를 얻는다.

가만히 있어봐야 죽을 뿐이라는 것을 강제로 새겨주는 시스템이다.

게임 시절에, 1층은 조작법 튜토리얼이나 다름 없는 저난이도의 스테이지였다.

마찬가지로 지금 또한 튜토리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의 경험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게 만드니까.

유배자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정신은 끊임없는 전진과 모험.

정말로 게임이었던 세계답다.

결국 다들 이렇게 죽음에 익숙해진다.

그 익숙함이 반드시 좋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꼭 필요한 덕목인 것은 사실이었다.

어차피 다시 살아난다는 점에서 이 세계의 목숨은 한없이 가볍다.

그 대신 잃는 게 무엇인지 뉴비들이 배우는 것은 조금 더 나중의 일일 것이다.

* * *

그러나 스러질 목숨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자신들의 초석으로 삼으려는 녀석들도 있다.

좋은 의도라 할 수는 없다.

나는 근방의 계단으로 향하던 중 죽을 뻔 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함정은 아니다.

기나긴 회차 동안 갈고닦은 본능이 의식하기도 전에 몸을 굴려주었다.

호다닥 기어서 다시 모퉁이 너머로 도망치자 다리 옆을 한 발이 더 스치고 지나간다.

화살이라기엔 대가 조금 짧은 볼트다.

소녀는 손을 잽싸게 놀려 볼트 하나를 가져왔다.

"독은 없네요."

왜 그거부터 확인해? 하고 반문하기에는 너무나도 옳은 행동이다.

종아리가 쓰릴 뿐만 아니라 육안으로도 보일만큼 피가 흐르고 있다.

내 청바지 벌써 찢어지고 있네. 새로운 회차를 시작한 직후가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는 귀한 몸이시다.

눈물이 나는군.

"사람이었어요?"

"응, 두 명이더라."

한 명이 먼저 노리고, 그게 빗나갔을 때를 대비하여 다른 하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아마 대비만 했지 진짜로 두 번째를 쏘게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추가 사격이 늦은 덕에 살았다.

"멀어요?"

"30미터 정도?"

아슬아슬하게 샷건의 유효사거리에 걸친다. 그냥 내밀고 갈겨도 되겠지만 상대의 사격 정밀도가 나쁘지 않았다.

"돌아서갈까요? 아저씨 다른 길 알죠?"

"알긴 알지. 하지만 무너지고 있을 걸?"

천천히 무너진다는 것도 사람이 걷는 속도 정도라는 뜻이다. 미로는 직선 통로가 별로 없다.

지금부터 돌아가서 다른 계단을 찾는다고 해도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어, 그럼 정면 돌파해요?"

"아니, 대화로 해결한다."

"네?"

"최고의 대화수단이 있으니."

나는 그러며 샷건을 툭툭 쳤다. 이게 없었으면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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