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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4화 (4/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4화

1층 - Lv.2 사냥꾼(3)

하지만 소녀는 회의적이었다.

"이제 머리 내밀면 바로 죽을 걸요?"

"팔만 내밀면?"

"손모가지가 날아가지 않을까요?"

이건 신기한 반응이다.

석궁에 익숙하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영역인데 태연하게 단언한다.

그리고 난 이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내가 기어들어가 숨자마자 볼트를 재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활보다 장력이 강한편인 석궁의 재장전은 실제로 해보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도 없었다. 들고 있는 채로 장전해서 이 속도면 명백하게 달인급의 솜씨다.

한번 피하는 모습까지 보여줬으니 방심도 없다. 다음은 정말로 머리를 내밀자마자 숨진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은 외통수다. 숙련된 사수가 잠복한 일자 통로로 정면 돌파하는 것은 특수한 보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나도 사실 말만 그랬지 조금 간만 볼 생각이었다.

정 안되면 시간에 못 맞추어도 돌아가는 편을 고려하고 있다. 그것 또한 그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는지라.

소녀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소녀가 말했다.

"이렇게 하죠."

"뭘 어떻게 해?"

"제가 한발만 막을게요."

"뭐?"

제법 어처구니없는 계획이었다.

동시에 같은 곳을 사격을 하진 않을 테니 우선 먼저 나서서 소녀가 시선을 끈다.

한 발은 확실히 막을 자신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 그 잠깐의 틈 사이에 내가 적을 쏴 죽여라.

"소총이나 권총도 아니고 그냥 갈기면 맞을 테니 할 수 있죠?"

목숨을 걸었다기엔 지나치게 두근두근해하는 표정이다.

이 녀석 혹시 초회차 아닌가? 종종 그렇게 속이는 녀석들이 있다.

왕국에 도달하기 전까진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긴 하다. 그러다보니 꿍꿍이를 가지고 숨기는 녀석도 왕왕 있다.

나 역시 그렇다. 97년차 쯤 되면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닐 수는 없는 법이다.

그저 상대의 상상을 내버려둘 뿐.

"그럴 자신이 있으면 그냥 네가 들고 쏴."

"저 총은 안 다뤄봐서."

나는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뭔 개소리야 이건."

"아, 집안이 고지식해서요. 화기는 금지였어요."

정씨 집안은 다양한 인간흉기의 배경설정을 가지고 나온다. 화기를 굳이 금지? 이번에는 뭔가 무술계통인건가.

대거 다루는 솜씨에 관절기도 그렇고 범상치 않긴 했지만.

소녀는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저씨 총 많이 쏴봤잖아요."

"어떻게 알아 그건?"

"미필이에요?"

"아니······. 야. 거긴 K-2쏴."

소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군대에서 샷건은 안 줘요?"

"주겠니?"

"어, 하지만 아저씨 들고 다니는 게 너무 익숙하던데. 사실 방금도 조금만 여유 있었으면 하나 쏘고 굴렀을 거잖아요."

쪼끄만 녀석이 꼬치꼬치 지적하는 모습이지만······.

말하는 게 전부 사실이다.

미리 아는 기습이었다면 틀림없이 한 놈 쏴버리고 회피했겠지.

실제로 방아쇠에 걸치고 있던 손가락이 당겨지다 말았다.

순간적인 판단으로 샷건의 존재를 확신시키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여겨서이다.

아슬아슬하게 유효사거리니 아무 피해도 못 줄 수도 있다.

그랬는데 저쪽이 먼저 엄폐하는 건 곤란하다.

100년쯤 온갖 것들과 사투를 벌이다보면 사소한 행동의 짧은 순간에도 온갖 계산이 오간다.

누구나 이렇게 될 것이다.

헌데 이걸 어떻게 안거지?

늘 그렇듯 정씨 집안의 자식 농사는 이번에도 대성공이로군.

"좋아, 네 말대로 하지."

* * *

모든 유배자들에게 그렇겠지만 1층의 환경은 지겹도록 익숙한 것이다.

죽음을 겪을 때마다 다시 1층이다.

지겨운 미로.

년 단위로 구르다보면 짬이 쌓인다.

매복할 위치를 선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삶이 절박해지면 가장 먼저 양심이나 도덕부터 내려놓는 것이 인간이다.

살인을 긍정할 좋은 핑계도 있다.

어차피 죽여 봐야 다른 세계에서 다시 눈을 뜰 인간들 아닌가?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 아니니 죄책감이 들 여지도 없다.

미로의 중심 근방에서 계단 앞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사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일종의 정석적인 초반 스타트이다.

미궁의 모든 생물들은 경험치다.

인간도 경험치다.

이 미궁에서, 2층부터 시작되는 고난이 얼마나 위협적일지 미리 알 수는 없다.

그러니 사소한 곳까지 짜내어 파밍하는 판단은 대부분 옳다.

다른 방향에서 보아도 효율적이다.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보다 초반의 멋모르는 뉴비들을 잡아 죽이는 편이 더 쉽다.

인간은 경험치도 어쭙잖은 몬스터보다 더 많이 준다.

애초에 살인을 권장하는 게 아닐까 싶은 미궁의 시스템이다.

심지어 끝자락에 간신히 들어올 인간 몇몇 죽이는 건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평판에 문제가 생길 리도 없는 것이다.

이 둘이 마주쳐 한 칼 겨룬 직후 노련함을 깨닫고 연합하게 된 이유였다.

서로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번 회차에서는 제법 괜찮은 동료를 구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루팅운도 따라줬다.

웬 멍청한 놈들이 운 좋게 석궁을 두 자루나 구해서 그들을 위협했다.

그냥 쏴버리지 않는 것에서 이미 뉴비였고, 어설픈 자세는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가볍게 제압한 것이 조금 전의 일이다.

볼트는 많지 않았다. 아낄 필요가 있다.

미로가 무너지기 직전까지 매복하며 계단으로 찾아오는 녀석들을 사냥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모은 경험치는 2층에서 큰 어드밴티지가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피한 거 우연일까?"

"아닐 거 같소만."

방심한 것은 사실이다.

고참 유배자들은 애초에 숫자도 적었고, 장비를 선점하기 위해 행동도 빨랐다.

이 시간에야 어기적어기적 계단을 찾아오는 녀석들은 대개 어딘가 화살이라도 박힌 부상자다.

재빨리 다음 층으로 가서 회복의 샘에 몸을 담그지 않으면 생사가 불분명할 정도로.

"우연이 아니라면······, 미리 안다고 저렇게 피할 자신 있어?"

"난 없소."

의식하지 못한 곳에서 날아온 정확한 사격이다.

스킬도 뭣도 없고 스탯조차 빈약한 1층에서 그런 묘기가 가능할 리가 없다.

둘은 찝찝함에 침묵했다.

둘의 유배 년차를 더해도 30년이 채 되지 못한다.

단독으로 30년을 넘은 까마득한 고참 들이 아주 드물게 죽어서 재시작을 하는 경우가 있다.

대개 별로 인간 같지 않은 괴물딱지들이었다.

잘못 건드렸나?

동시에 뇌리를 스친 생각이다.

"아냐, 그래도 지금 뭔가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쉿, 집중하시지."

이 미궁의 초반은 대체로 공평하다. 목을 베면 죽고, 심장이 으깨져도 죽는다.

사실 그냥 동맥만 그어놔도 과다출혈로 곧 죽는다.

둘은 그 사실을 믿기로 했다.

* * *

소녀가 미끄러지듯 모퉁이에서 빠져 나왔다.

빼꼼 따위가 아니다 시선을 끌기 위해 완전히 뛰쳐나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똑바로 보고 있지 않으면 눈치 채기 힘들었다.

마치 유령 같은 동작이다.

나는 바로 직후 몸을 내밀고 달려들었다.

조금이라도 샷건의 유효 사거리 깊숙하게 저 녀석들을 포착해야한다.

둔탁한 사격음.

그리고 거의 동시에 핑하고 울리는 맑은 쇳소리.

매복하고 있던 사수의 볼트가 발사되고 소녀가 그것을 대거로 쳐내는 소리였다.

내가 방아쇠를 당긴 것도 거의 동시다.

요란한 격발음과 함께 두 번째 사격을 준비하던 녀석이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강렬한 반동을 그대로 이용해 팔을 꺾으며 총구를 옮긴다.

다음 격발음.

남은 한 녀석은 쓰러지진 않았다. 얼른 모퉁이 뒤로 몸을 숨긴 탓이다.

하지만 피가 튀었다. 팔이다.

잠깐 동안은 전투 불능이다.

휴, 이게 되네. 솔직히 말하여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잘했다는 의미로 미소 지으며 소녀를 돌아보자 질색하는 표정으로 귀를 만지고 있었다.

"뭐야, 왜 그래?"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나도 귓가에 이명만 울리고 있다.

실제로 듣는 지근거리의 총성은 한동안 청각을 마비시킨다.

하지만 삐이 하는 이명이 진정되길 기다리진 않았다.

얼른 달려가서 확인사살.

복도의 중간에 함정이 얼핏 보였다.

바닥이 꺼지는 종류다.

이건 생각이상으로 완벽한 매복위치였군. 투사무기 없이는 볼트를 몇 번을 막아내도 살아남긴 힘들었다.

저들은 이쪽이 있어봐야 칼이나 좀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함정을 뛰어넘고 달려가며 재장전.

숨이 차지만 멈출 수는 없다.

총을 꺾어 털자 즉시 탄피가 떨어진다. 다시 두 발 쑤셔 박고 사격자세까지 약 1초.

아직 모퉁이 너머로 숨은 녀석도 자세를 바로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즉시 쓰러져있는 녀석에게 한발 쐈다.

쓰러지기만 했지 숨은 붙어있던 상대가 절명한다.

내가 경험치를 계산하는데 따라오던 소녀가 찰싹하고 등을 두드렸다.

샷건과 귀를 가리키는 것이 그만 쏘라는 뜻인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잡는 법을 바꾸었다.

약 3킬로그램의 쇳덩이는 그냥 휘둘러도 충분히 흉기가 될 수 있다.

모퉁이를 돌자 곧바로 악쓰는 듯한 외침이 이명 사이로 들렸다.

"항복! 항복! 살려줘!"

소녀는 개의치 않고 대거를 역수로 바꿔 쥔 후 내리찍으려 했다.

내가 말렸다.

"잠깐만 있어봐."

상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완전히 체념했으나 동시에 희망을 구하는 모순된 얼굴이다.

목숨이 귀한 세계는 아니다. 1층이면 더욱 아쉬울 것이 없다. 그럼에도 저런다는 것은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다.

"몇 년차냐?"

예상대로 상대가 순순히 대답했다.

"12년차요."

"밖에서 하던 일은?"

"캘리포니아에서 사냥꾼을 좀 했었소."

"꾼이라면 단순한 취미는 아니겠네. 해본 클래스는?"

"레인저 클래스는 두루 경험이 있지."

나쁘지 않군. 내 시선이 누그러진 것을 깨달은 모양인지 불안한 얼굴이 살짝 풀린다.

소녀는 의아하게 물었다.

"안 죽여요?"

"넌 사람 죽이는 게 좋니?"

"아니, 저 사람은 아저씨가 죽였잖아요."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서 샷건에 맞은 시체는 썩 보기 좋은 몰골은 아니었다.

항복의 표시로 손을 들고 있던 사내도 움찔한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은 항복한다고 안 했어."

"세상에."

소녀는 입으로만 놀라워하며 무기를 집어넣었다.

지금 깨달았지만 치마 아래 허벅지에 홀스터라니 아주 보기 좋군. 나는 그냥 허리에 찼는데.

"사냥꾼이었으면 숲이나 산은 잘 알겠어?"

"당신이 몇 년차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보다 고참인건 알겠소. 도움이 되리라 약속하지."

"좋아, 합격. 내려가자고."

중년의 미국인은 살아남은 것이 기쁜지 어이없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소녀가 그를 대변하듯 말했다.

"너무 쉽게 받아주는 거 아니에요?"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 동네에서 그나마 안전한 게 저렇게 쫄아서 먼저 굽히는 친구들이야."

"······말이 좀 과격한 면이 있소만. 사실이라 생각하오."

재빨리 피가 철철 흐르는 팔을 지혈하기 시작한 사내가 말한다.

혹여 팽개칠까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소녀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내가 부연했다.

"고참 유배자한테 일행으로 붙어있으면 살아남을 확률이 한없이 올라가지. 원하는 게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배신하기도 힘든 법이야."

"그렇다하더라도 이렇게 쉽게 받아진 것은 또 처음인데."

고통조차 잊은 듯 사내가 투덜거린다.

"난 사소한건 신경 안 쓰는 편이라."

어차피 운이 좀 좋고 나쁜 것만으로 훅갈 수 있는 세계다.

시간을 아끼는 게 목적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꼼꼼했던 보람조차 없이 가버린 게 몇 회차나 될까.

매복지에서 계단까지 함정은 없었다.

사냥꾼은 잠깐 동안 동료였던 자에게 묵념하고 장비를 챙겼다.

안타깝게도 죽은 자의 석궁은 샷건 펠릿에 맞아 부러져 있었다. 버드샷이어도 목제 정도는 가볍게 파손시키는 법이다.

극초반 장비는 어차피 죄다 내구도가 낮기도 하고.

계단을 내려가기 전, 소녀가 내게 속삭였다.

"유배자니 뭐니 하는 거 무슨 소린지 설명 해줄 거죠?"

그러고 보면 이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나를 좋다고 따라다니고 있다.

전투 때만 보여주는 노련함에 잊고 있었다.

하지만 속삭이는 것에는 약간 다른 속셈이 있어 보인다.

나는 그 마음을 읽고 대답해주었다.

"걱정 마. 내 파티에 먼저 합류한건 너니 저 사냥꾼보단 위로 쳐주지."

"어쩜 그리 제 마음을 잘 아신데요."

여고생은 방긋 웃었다.

확실히 파티 내 입지는 아주 중요하지.

온라인 게임에서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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