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6화
2층 - Lv.27 요정과 오크(2)
랜덤 인카운터라는 것이 있다.
판타지 모험 활극에서 길가다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온갖 상황을 게임에서 구현하려고한 노력이다.
출현 여부는 운이지만 출현하기만 한다면 기본 토대가 되는 시나리오를 따르며, 역시 사소한 부분은 랜덤으로 정해진다.
숲에서 출현할 수 있는 랜덤 인카운터 중 가장 피곤한 축에 속하는 것이 요정의 나무, 통칭 세력전이다.
그냥 길가다 요정을 만나는 정도가 아니라 요정 마을이 있다.
거기에 반드시 균형을 맞추는 요정의 적대세력도 있다.
이 랜덤 인카운터의 피곤한 점은 다른 게 아니라 다음 층으로 가는 조건이다.
둘 중 하나가 소탕되어야만 계단이 열린다.
보통 한쪽 편을 들어 다른 쪽을 밀어버리는 방식이 주된 공략이다.
또 하나 골치 아픈 점은 요정과 적대하는 팩션(Faction 세력)이 어떤 것들인지 알 수도 없다는 점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악마나 근미래 군사집단이 기다리고 있기도 한다.
이런 저층에서 그런 팩션이라면 이 판은 글러 처먹었구나 하면 된다.
요정도 나도 평등하게 쓸려나간다. 2층 수준에서 그런 것들을 상대로 대응할 방법은 많지 않다.
그래서 나는 가장 먼저 높은 지대를 찾았다.
샘의 뒤편, 야트막한 동산 위에 제법 큰 나무가 자라있다.
단검을 던져 꼭대기를 맞추고 점멸했다.
거센 바람이 분다. 주변이 한 눈에 들어오진 않더라도 제법 멀리까지 보였다.
사냥꾼이 발견했다는 요정의 나무도 아슬아슬하게 보인다.
하늘은 어떨까?
악마를 상징하는 붉은 뇌운은 보이지 않는다.
악마는 거르고.
궤도 엘리베이터도 보이지 않는다.
천만다행이다.
레일건 따위를 조심해야할 일도 없겠군.
그렇다면 사태는 상당히 간단해진다.
적을 최악으로 잡아도 전투가 성립하는 친구들이다. 온몸을 걸레처럼 비틀지언정 싸워서 이길 수 있다.
다시 점멸로 지상으로 돌아온 나는 손사래를 치며 별거 아니라고 말했다.
소녀는 믿었고 사냥꾼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대놓고 위치까지 알려주는 최상위 팩션이 아니라면 최악으로 잡아도 어떻게든 되니까."
"오우거만 나와도 이번 회차는 끝장 아닙니까?"
"오우거가 왜? 그 정도면 할 만하지."
"어······."
쯧쯧, 이래서 연차 낮은 것들은 말이야.
* * *
우선 팩션과 부딪히기 전에, 샘 근방을 수색하며 파밍을 하기로 했다.
테마가 숲이라고 해서 어떤 숲인가도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
사냥꾼은 조금 그립다는 듯 고향 캘리포니아의 침엽수림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나름대로 삭막하게 생긴 중년의 사내였지만 그랬기에 우수에 잠긴 얼굴이 그 럭저럭 봐줄만 했다.
가는 길에는 조금 신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깥 이야기는 대체로 터부시되기에 미궁에서의 삶에 대한 것이었다.
오우거를 우려하던 사냥꾼이 경험해본 최악의 팩션은 언데드 무리였다고 한다. 한데 얘기를 들어보니 최상위도 아니고 상위 수준이다.
나는 혀를 찼다.
"12년차라면서 겪어본 최악이 겨우 그거야?"
"최상위 언데드 무리였습니다. 리치가 부대 단위로 있다면 충분히 재앙 아닙니까?"
"그거 최상위 아닌데?"
"예?"
최상위 언데드 팩션이라면 리치는 그냥 일반 보병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본 드래곤이 무슨 비둘기 떼처럼 날아다니는 꼴을 설명해주자 사냥꾼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본 드래곤은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 것도 있군요."
"보아하니 왕국까지 가본 적도 없군?"
"······그렇습니다."
왕국 이전이 사실상의 튜토리얼이라고 알려주면 어떤 표정이 될까?
조금 궁금하긴 했으나 기를 더 죽일 필요는 없었다.
미궁에서의 경력과 별개로 중년의 사냥꾼은 확실히 숲에서 노련했다.
굳이 내가 어떤 말을 할 필요가 없이 표식을 남기며 전진한다. 길을 잃을 것을 대비하는 모습이다.
몇 가지 짐승들의 흔적을 찾아내기도 했다.
식량 비축이 목적은 아니었기에 굳이 추적하지는 않았다.
사실 현실에도 존재하는 곰 따위의 맹수는 미궁의 몬스터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초반에는 그리 약한 녀석들이 아니다.
안 건드리는 편이 이롭다.
우리의 이동방향은 요정의 나무와 멀리 떨어진 반대편이었다.
왕국 이전 미궁의 한 계층은 하나의 세계나 다름없는 스케일을 자랑하지만 정말로 그렇게까지 넓지는 않았다.
당장 이 숲 만해도 사방이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수준의 절벽으로 둘러 쌓여있다.
억지로 올라가보아야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요정이 아닌 다른 하나의 무리가 어디 있는지 대강의 위치는 지정되어있다.
경험은 중요하다.
이 경우엔 요정의 나무와 회복의 샘, 그리고 또 하나의 팩션이 삼각형을 배치 된다.
그러니 회복의 샘 뒤편으로는 나름대로 여백이 있다.
두 세력과 멀리 떨어진 이쪽은 어느 적과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파밍 공간이 되는 셈이다.
위험할지도 모르는 팩션들과 일찍부터 마주칠 필요는 없다.
모름지기 RPG는 파밍인 것이다.
그러나 소녀는 샘에 남겨두고 왔다.
마인드맵을 빠르게 열고 닫는 연습을 시켜둔 참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초회차인만큼 휴식은 필요하리라. 낯선 환경은 상상 이상으로 체력, 혹은 정신력을 갉아먹는다.
분명히 게임이지만 마냥 게임처럼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 미궁의 좆같은 점이다.
시간이 조금 걸릴 테니 그러다 낮잠이라도 자라고 말해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잠이 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쿨쿨 잘만 잘 것 같은데.
소리 죽인 잡담을 나누며 한동안 더 전진했다.
약간 앞서가던 사냥꾼이 뭔가 눈치 챈 듯 수신호를 보냈다.
슬프게도 여고생에 이어 중년의 미국인도 나보다 기초 스탯은 좋은 모양이었다.
청력도 타고나는 거려나.
사냥꾼이 몸을 숙였다. 나도 숙이며 다가갔다.
오솔길이 보였다.
근방에 뭔가 사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인간형 몬스터들이 저편에서 걸어온다.
초등학생 정도의 작은 체구에 초록색 피부.
미궁에서 가장 흔한 피부색이다. 대충 뭉뚱그려 그린 스킨 그룹이라고 묶이는 족속들.
판타지의 단골손님 고블린이다.
특별히 절도 있는 모습은 아닌 것이 팩션과 무관하게 흩뿌려진 야생 몬스터다.
사냥꾼이 속삭여왔다.
"요정의 반대편 세력이 고블린일까요?"
야생 몬스터는 어느 정도 그 층에 스폰된 팩션의 영향을 받는다.
나는 단정 짓지 않았다.
"그린스킨이잖아. 오크나 오우거, 어쩌면 트롤일지도 모르지."
"트롤은 굉장히 끔찍하군요."
그럴 경우 보통 고블린은 하급 전투원이다.
오크를 위시한 덩치들 사이에서 자그마한 고블린들은 보통은 큰 위협이 아니다.
하지만 미궁이 그렇게 쉬운 곳이 아니다.
고블린은 원래 전면전보다는 기습에 능한 몬스터다.
고레벨 고블린 암살자라도 섞여있으면 차라리 오우거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다.
물론 지금 오솔길을 따라 걷는 녀석들은 전혀 고레벨 같지는 않았다.
숫자는 넷. 사냥꾼도 석궁을 거두고 메이스를 들었다. 1층에서 죽은 녀석들 것을 챙겨온 것이다.
샷건도 너무 과하니 아낀다.
전투는 한 호흡에 끝났다.
내가 던진 단검이 가장 멀리 떨어진 놈의 목에 꽂혔다.
녀석이 그대로 꼬꾸라진다.
여러 개의 동작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전투의 기본이다.
처음 단검에 맞은 녀석의 몸이 쓰러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미 다른 단검으로 눈앞에 있는 고블린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두 마리가 절명하고.
가운데서 사냥감인 듯한 다람쥐를 들고 있던 녀석이 캬악 하며 소리를 지르며 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녀석의 시야에는 내가 없다.
던진 단검이 점멸 단검이다.
점멸하는 동시에 대거로 목을 노린다. 상대 입장에서는 완벽한 뒤편에서의 암습.
아무 저항 없이 몸통과 분리되는 머리.
아무리 야생 고블린이어도 몬스터다.
본래라면 일격에 이렇게 깔끔하게 죽이진 못한다.
하지만 보통보다 훨씬 날이 잘 드는 이 느낌.
모든 공격이 암습 보정을 받은 탓이다.
게임 시절 추가데미지로 구현되던 암습보정은 현실이 된 후에는 뚫리지 말아야할 것이 뚫린다거나, 베이지 않아야할 것이 베이는 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니 두부처럼 베인 것은 기술 이전에 시스템의 보정이다.
사냥꾼도 노린 한 녀석의 머리를 으깼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떻게 한 겁니까?"
"뭘?"
"제가 메이스 한번 휘두를 시간에 셋이 죽어나자빠진 것 말입니다."
"다시 보여줄까?"
점멸 단검을 활용한 암습 판정을 다시 한 번 재현해줬다.
사냥꾼의 턱이 빠질 듯이 벌어진다.
"그거, 그렇게도 쓸 수 있는 거였습니까?"
"그럼 어떻게 썼는데?"
딱히 귀한 스킬은 아니다. 12년차나 되었으면 익힌 적도 많았겠지.
"안전한 곳에 놓아두거나 급하게 던져서 도주용으로나 썼습니다."
"공격에 응용할 생각이 없었구먼."
"생각을 했어도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만."
보고도 따라할 엄두는 안 든다며 사냥꾼이 고개를 흔든다.
하긴 단검 투척부터 익숙해져야 따라할 수 있다. 단검 마스터리류의 패시브없이는 아무나 못하긴 하지.
* * *
회복의 샘 주변 공터는 조용했다.
아저씨가 사냥꾼을 데리고 떠난 탓이다.
소녀는 마인드맵 구석에 떠있는 시간을 본다.
[남은 시간 : 99년 364일 15시간 22분]
이 시간이 전부 소모되면 그녀 또한 ‘주민’이 되어버린다고 한다.
정말로 이곳에 원래 살던 토착 NPC가 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이 땅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에서는 ‘미궁의 주민’.
유배자들이 아주 싫어하는 호칭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곳을 떠나고 싶어하기에.
태어날 때부터 NPC인 이들은 어떤 느낌일까?
유배자가 아닌 그들은 바깥세상을 모를 것이다.
‘미궁’이라 불리는 이곳만이 전부겠지.
뭐,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소녀는 정신을 집중해 마인드맵을 껐다.
남겨진 소녀는 처음에는 시키는 대로 마인드맵을 켜고 끄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왜 이럴 필요가 있는가 묻자 아저씨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포인트는 아껴둘 필요가 있어.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만 나오는 스킬도 있거든. 그게 필요하다면 조건을 만족한 후에 찍어야겠지?]
[어, 그건 그런데.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지 않나요?]
[대답 맞아. 경우에 따라서는 몸을 날려 조건을 만족한 다음에 기도하는 심정으로 스킬을 찍기도 하거든. 딱 원하는 게 뜨면 살아남는 거지. 그 과정이 1초 안에 이루어져야 해.]
[의외로 피지컬 게임이네요.]
친절하긴 했으나 너무 태연한 태도에 비해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소녀는 이 미궁이라는 세계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미쳐있다고 깨달았다.
하지만 소녀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살던 세상도 별로 정상은 아니었다.
그녀의 집안도 그랬으며, 그녀의 나라도 그랬고, 하다못해 그녀의 학교도 그랬다.
그래서 지금 있는 이곳이 썩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적어도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는 있잖아.
대거를 뽑아들었다. 그녀는 그저 좀 긴 단검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저씨는 꿋꿋이 대거라는 명칭을 고수했다.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드는 부분이다.
설명은 모두 들었다. 이 미궁의 엄청난 고참 유배자라고.
하지만 뭐랄까, 묘하게 현실에 대한 인식이 어긋난 그런 느낌?
혼자만 붕 떠있는 듯한 그런 위화감.
얼마나 오래 이 미궁에 머물렀는지 차마 물어볼 수가 없다. 어떤 숫자가 나올지 두려워서.
마인드맵 켜기 연습을 적당히 하고 나서는 대충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
왜일까?
하지만 보통의 여고생들은 딱히 그런 고민을 오래하지 않는다.
애초에 만나지 몇 시간 되지도 않은 사람이다.
같이 지내다보면 알게 되겠지.
그런 거 보다 중요한 게 있다.
얼굴이 소녀의 취향이었다.
아저씨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렇게 나이 들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이십대 중반?
질색하며 오빠라고 부르라고 할 법도 한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까지도 좋다.
또래보다는 어른스러운 연상에게 끌릴 나이다.
그런 모습조차 포용력으로 생각되었다.
"히어로는 히로인이 있어야지. 후후후."
만약 날붙이를 만지작거리며 혼잣말하는 모습을 그 아저씨가 보았다면 약간의 위기감을 느꼈으리라.
소녀는 그렇게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놓칠 수 없는 소음이 들려왔다.
회복의 샘은 좁은 입구를 제외하고는 바위와 나무로 잘 숨겨져 있다.
살짝 나가봐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소녀는 살금살금 입구 쪽으로 나가서 풀숲에 숨었다.
화살이 날아가는 날카로운 파공음, 그리고 전투의 함성 같은 우렁찬 외침.
소녀가 숨은 풀숲 바로 앞을 어떤 여자가 지나갔다.
순식간이었지만 소녀의 동체시력은 놓치지 않았다.
금발의 날씬한 여자는 귀가 뾰족했다.
활을 들고 뒤쪽으로 쏘며 끊임없이 물러나고 있는 모양새였다.
곧이어 누군가 커다란 도끼로 화살을 쳐내며 뒤를 쫓아왔다.
그 거한은 근육으로 꽉 들어찬 우락부락한 육신을 지녔으며, 피부가 녹색이었다.
어라, 이게 뭐람? 어쩌지?
소녀는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넌 뭐지?"
도끼를 들고 지나칠 것 같았던 녹색 거한이 풀숲을 한 손으로 벌리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