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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7화 (7/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7화

2층 - Lv.27 요정과 오크(3)

고블린들이 움직이던 오솔길은 하루 이틀 만에 생긴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 따라가 보면 야생 고블린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 같은 것이라도 나오리라.

가보니 과연 그랬다.

규모는 2층 수준에 걸맞게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열댓 마리가 더 있는 정도.

부락이라기보단 야영지 수준이다.

정리하는 데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전투가 오래 걸린 것은 아니다. 온전히 내 체력 문제였다.

출발하기 전에 좀 쉬어야 했고, 도착한 뒤에 좀 쉬어야했다.

그리고 처리한 뒤에도 좀 쉬어야 했다.

몇 개의 오두막 사이, 주인들의 피로 젖은 공터에 주저앉아있자 사냥꾼이 말했다.

"힘드시겠습니다."

"뭐가?"

"체력 문제 말입니다."

"이젠 좀 낫겠지."

그 시선에는 거의 경의가 담겨있다.

이 미궁은 로그라이크다.

뒤지면 다 잃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 ‘처음’의 기준은, 내가 이 미궁에 처음 발들인 바로 그 순간이다.

야외활동과는 거리가 멀며, 따로 건강관리를 하지도 않고 살아왔던 내 입장에선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다.

미궁에 들어선 후에 수많은 몸 관리의 노하우를 알게 되었으나 죽음 후의 재시작 때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항상 스킬 하나 찍고는 힘부터 찍지."

그럼에도 스탯이란 것은 현실이 되면 생각보다 그렇게 극적인 효과를 내지 못한다.

자잘하게 레벨 업하여 1이나 2 올라간다고 해서 금방 인간을 초월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그럭저럭 건강한 인간이 될 수는 있다.

"운동도 열심히 해야겠고. 몸 만드는 거도 이제 지겹구먼."

"몸을 만든다니?"

"아, 모르나? 스탯이랑은 별개로 실제 육체도 신체능력에 영향을 줘."

"······."

전혀 몰랐다는 듯한 침묵.

어쩔 수 없다. 목숨이 가벼운 미궁에서 정보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뭔가를 알게 되었다 해도 그것을 쉽게 떠벌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사람은 애초에 뭔가를 알 수도 없다.

이런 환경에서 유배자의 70% 이상이 왕국의 문을 두드린 적도 없다는 것은 과장 없는 사실이다.

대개, 서든 데스가 없는 어딘가의 층에서 적당히 눌러앉아 살아갈 뿐이다.

이 중년의 미국인도 어딘가에서 그렇게 세월을 보내며 지내왔으리라.

그러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죽음을 맞이하면 다시 그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런 게 꼭 본인이 못난 탓은 아니라 생각한다.

나는 그래도 게임으로서 이 세상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재앙일 뿐이며 안주할 땅을 찾게 된다.

하나하나 나약함을 탓하기에는 인간은 약하다.

미궁을 공략할 엄두조차 못내는 유배자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한숨 돌린 후 나는 다시 비척이며 일어섰다.

"죽었다 살아나면 한동안은 근육통에 시달려야한단 말이지. 단백질이 필요해."

전투라는 강도 높은 운동을 체험한 몸은 어찌되었건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영양만 잘 챙겨주면 남부럽지 않은 몸으로 변해가겠지.

"그나저나 2층에서 세력전이 나온 건 의아해도 이런 건 제자리에 있군."

고블린들의 야영지 근처에는 익숙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열려있는 보라색 열매들은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건 시스템에 속해있는 열매다.

보통 이런 소규모 몬스터 집단의 주변에 스폰된다.

섭취 시 다양한 효과를 발휘하며, 그 효과는 매번 랜덤이다.

저번 세상에서 보라색이 독 열매였다고 치더라도 이번 세상에서도 같을지는 모를 일이다.

가속 열매일지, 투명 열매일지, 혹은 그대로 독 열매일지는 먹어보기 전에는 알 방법이 없다.

사냥꾼이 열매를 하나 따왔다. 모 인기 만화 악마의 열매처럼 기묘하게 생긴 보라색이다.

"어떤 열매인지 확인하셔야하지 않습니까? 다행히 방금 제가 [독성 저항]을 얻었습니다."

잠깐 눈을 감더니 스탯을 찍고 돌아온 사냥꾼이 말했다.

방금 전에 4레벨을 달성했다고 알려왔다. 조금 더 많이 사냥했고 사람도 잡은 나는 6레벨이다.

사냥꾼은 뭐라 조언하지 않아도 자신의 성장 방향을 결정한 후였다.

잘하는 것을 하는 법이다. 레인저 클래스에 두루 경험이 있다는 것은 민첩 트리에 익숙하다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그거밖에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리 목숨이 가볍다한들, 한번 정착한 층을 버리고 죽음을 겪어 가며까지 탐구하는 이는 드물다.

사냥꾼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고 무기도 석궁이 뜬 마당에 나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폭탄 열매 본적 없어? 그런 걸 먹었다간 죽어."

그러면서 대거로 칼집을 살짝 내보았다.

과즙이 조금 흘러내린다.

"폭탄 열매라니. 금시초문입니다."

"확률이 높진 않거든. 위력은 뭐, [익스플로전] 정도려나."

"마법은 그다지 본 적이 없어서 와 닿지 않습니다."

"지능 트리는 대기만성형이니 그럴 만도 하지."

시작하자마자 지능 트리를 타는 바보도 드물다. 마법사 클래스는 초반에 구리다.

그때, 열매가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진짜잖아."

멀리 던지려다 내 근력을 생각해냈다.

사냥꾼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잽싸게 그에게 열매를 넘겼다.

사냥꾼이 온 힘을 다해 열매를 집어던졌다.

나는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숙여!"

콰앙!

정말로 위험했다.

폭탄 열매는 열매에 손상이 가해지면 곧 달아오르며 터진다.

지연시간은 손상의 정도에 따라 다르기에 깊이 찔렀다면 바로 터졌다.

나는 습관적으로 5초에 맞춘다.

사냥꾼이 던진 열매는 어림잡아 30미터 정도 날아갔다.

어쨌든 열매인지라 그리 무겁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중간에 나무에 걸리는 일도 없었다.

숲 사이로 날아간 열매는 성대한 폭음과 폭염을 내뿜으며 나무를 쓰러뜨렸다.

지축이 뒤흔들린다.

나는 흔들리는 땅에서 한바탕 굴러야했다.

온 몸에 자잘한 생채기가 생긴다.

고블린한테도 긁힌 상처 하나 없었는데. 세상에.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뻔하다니."

"폭탄 열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 아닙니까?"

"아니 그게 2층에 왜 나와. 세력전도 나오더니 별 일이 다 있네. 정말."

투덜거리긴 했지만 생각했어야하는 가능성이다.

미궁의 모든 것이 변수라지만 난이도에 맞는 보상이 주어진다는 점만큼은 상수다.

열매는 보상의 범주에 속해 있는 물건이었다.

이건 내 실수다.

폭압에 가장자리에 있던 오두막 두 채가 주저앉았다.

나무가 쓰러지고 불이 붙어있다.

"산불로 번지려나?"

"날이 건조하긴 하군요."

기온도 높지 않다. 일부 활엽수들은 곱게 단풍도 들었고 아마 늦가을 정도의 계절이다.

하지만 한국의 겨울보다도 건조하다. 불이 크게 번질 것 같은 예감이다.

"빨리 열매나 회수해서 가자고. 어차피 우리가 여기 살 것도 아니니 좀 다 태워먹어도 문제는 없지."

"요정들이 아주 싫어할 텐데 말입니다. 우리를 거의 죽이려 들 겁니다."

"우리가 했다는 증거 있어?"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상관없지. 불도 걔들이 끌 거야."

사냥꾼은 인상을 썼다.

* * *

열매는 모두 5개를 수확했다.

찢으면 원하는 곳에 폭발을 즉시 일으킬 수 있는 [익스플로전] 스크롤에 비하면야 불편하지만, 위력은 꿇릴 것 없다.

"이거 되게 귀한거야. 노 코스트로 마법을 던져대는 거니까. [파이어볼]도 이거보다 약해. 알겠어?"

"수류탄 같은 느낌으로 쓸 물건이 아닌 건 알겠습니다."

수류탄은 순수한 폭발의 위력보다는 장약에 의해 흩뿌려지는 파편이 살상력을 발휘한다.

이건 아니다.

순수한 폭압만으로도 수류탄만큼의 살상반경이 나온다.

운이 조금 더 없었다면, 방금 둘 다 죽었다.

"귀한 경험을 많이 하는군. 여러모로 2층의 수준이 아닌데. 10층 이후라고 해도 믿겠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열매도 꼭 좋은 소식은 아냐. 이런 좋은 걸 줬단 건 쓸 일이 있을 거란 소리기도 하니까."

"그렇습니까······."

움직이며 마인드맵을 띄웠다. 레벨 1당 주어지는 스탯 포인트는 1이다.

[점멸 단검]정도면 당장 쓰기에 충분했기에 나는 가지 하나를 완전히 이어 스킬을 뽑지 않고 힘만 나눠 찍었다.

스킬 없이 몸에 밴 기술만으로도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할 자신이 있다.

중요한건 그걸 실행할 체력이다.

체감하기 힘들다 하더라도 돌아가는 길에 쉬는 간격이 조금은 줄었다.

자고 일어나면 찾아올 근육통은 어쩔 수 없겠지만 나아지긴 했다.

사냥꾼은 자신이 남긴 표식을 따라 쉽게 길을 되돌아갔다.

나 역시 어느 정도는 그런 재주가 있지만 미궁 바깥에서 이미 익히고 온 기술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느 회차에서 건 추적할 때, 스킬에 의지한 바가 더 크다.

쉬이 초인이 되어버리니 뭔가 새로운 걸 배우기엔 적절치 않은 세계다.

낯익은 샘의 지형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가서 드러누울 생각뿐이었다.

오늘은 그만 쉬자. 온몸 삐거덕 거린다.

키보드와 마우스 이외에는 도통 만지지 않았던 내 손목은 가녀릴 지경이었다.

아마 그 여고생이랑 비교해도 큰 차이 없으리라.

하지만 샘 입구에 눈에 띄는 전투의 흔적을 발견하자 그런 생각이 싹 가셨다.

사냥꾼이 소리죽여 말했다.

"핏자국도 있습니다."

"저기 나무에는 화살도 박혀있군."

"그린 스킨이라기엔 섬세한 화살입니다. 요정에게 발각당한 것 같습니다."

"요정이 쓰지 않는 무기도 있어. 저 나무의 상처는 도끼자국 같아. 오크나 오우거일텐데 사이즈로 봐서는 오크야."

모든 정황이 가리키는 사실은 분명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샘이 습격당했다.

2층에 도착한지 몇 시간이나 되었지? 네 시간?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눈앞에 일어난 사실이니까.

나는 샷건을 옆구리에 붙이고 달렸다. 사냥꾼도 메이스를 집어넣고 석궁을 꺼낸다.

아낄 때가 아니다.

아직 샘 안에 적이 남아있다면 급습으로 처리한다.

소녀의 생사는 알 수 없지만 격렬한 저항이 있었음은 분명했다.

어쩌면 부상을 입은 채 따돌리고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회복을 위해서라도 샘을 다시 확보하는 일은 필수였다.

안쪽에서 돌아올 소녀를 노리고 매복 중이라면 투사 무기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고 있을 거다.

다행스럽게도 샷건은 아무렇게나 쏴도 맞아죽는 무기였다.

샘의 입구를 가리던 무성한 풀숲도 베어져있다. 나는 좁은 샘의 입구로 슬라 이딩하며 미끄러져 들어갔다.

낮은 자세에서 보이면 즉시 조준하고 갈긴다.

사냥꾼은 엄호하듯 약간 뒤에서 따라왔다.

인기척이 있었다. 한 호흡 만에 총구를 겨누고 격발······.

"어라? 아저씨 왜 그렇게 들어와요?"

할 뻔 했다.

"이건 또 무슨 경우야?"

"허어."

나는 슬라이딩한 자세 그대로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뒤따라 들어온 사냥꾼도 기가 막힌 듯 신음했다.

샘 안에는 요정 하나와 오크 하나가 밧줄로 꽁꽁 묶여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내가 꼬아둔 밧줄을 알뜰살뜰하게도 다 썼다.

얼마나 바리바리 묶어뒀는지 둘 다 무슨 포장된 선물 같다.

"아, 포박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그냥 빙빙 감았어요. 히히."

내 아연한 눈빛을 어찌 해석하였는지 소녀가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지금은 멀쩡한 모습이지만 교복 여기저기가 베이거나 찢어져 나름대로 격한 전투를 치렀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쟤들이 왜 여기 묶여 있는지 설명해봐."

소녀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요 앞을 지나가 길래 뭔가 싶어 구경하는데 덤비더라고요."

"그래서 둘 다 패서 제압했다고?"

"상스럽게 팼다니요. 칼침 좀 놔줬죠."

미친 소리를 하는 소녀를 외면한 채 나는 고개를 돌려 사냥꾼을 보았다.

눈가가 아련한 것이 어디 먼 곳을 보고 있는 듯 했다.

아마 나도 비슷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고개를 바로하자 소녀가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아무튼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잡혀간 것보단 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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