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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8화 (8/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8화

2층 - Lv.27 요정과 오크(4)

세력전이라고 통칭되는 랜덤 인카운터는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다.

팩션 우호도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특정 팩션과 얼마나 친하냐를 나타내는 수치다.

구체적인 수치로 확인할 방법은 게임 시절 인게임에도 없었다.

하지만 플레이에는 큰 영향을 미친다.

우호도가 적대까지 내려간 종족은 이후 미궁의 어디에서 마주치더라도 나를 알아보고 꺼리거나 시비를 걸어온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여러 가지 제약이 생기는 골치 아픈 시스템이다.

그런데 세력전이 걸린 층의 계단이 열리는 조건은 스폰된 두 팩션 중 하나의 소탕이다.

당연하지만 척을 지는 팩션이 생긴다.

직접적인 전투는 우호도가 떡락하고, 간접적인 지원은 그나마 낫다.

피하고 싶다면 완전히 정체를 들키지 않고 암약해야한다.

말은 쉽다.

운 좋게 어느 하나가 저절로 이길 때까지 손가락만 빨며 기다릴 생각은 할 수 없다.

방지하기 위해 서든데스가 걸려있으니까.

시간은 약 일주일 정도 주어진다. 어떻게든 개입해서 한쪽을 조져야한다.

이번 회차에서 나는 비교적 안정된 플레이를 지향할 생각이었다.

요정과 반대 팩션을 염탐하고, 더 강한 쪽에 붙는다.

별일이 없다면 그린스킨의 편이었을 터이다.

그린스킨 그룹 내의 팩션은 숫자가 많아 미궁의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지겹도록 마주치게 된다.

그런 녀석들과 당장 우호관계가 된다면 왕국 이전 구간이 세상 편해질 것인데.

"그걸 지금 네가 망친 거 같아."

"에엑, 왜죠?"

"둘 다 공평하게 두들겨 팼잖아. 저거 치료해서 저 꼴인 거지? 벌써 우호도 깎였어."

"아이, 방금은 잘했다면서요!"

어쨌건 비로소 소녀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쭈뼛거리며 회복의 샘물을 뿌리기 전에는 팔 한 짝, 다리 한 짝을 떼어 뒀었다고 말한다.

죽이지 않고 제압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물 뿌리니까 붙더라고요."

"미친."

처음이면서 치유의 샘물을 그렇게까지 신뢰할 수 있다니.

힐링포션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믿음이 가는 말이었던가.

어쩐지 이쪽을 보는 요정은 완전히 겁에 질려있고, 오크는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다.

이 상태로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조금 리스크가 있는 노선으로 틀어야겠군.

소녀를 슬쩍 본다.

솔직히 말이 안 된다.

레벨 2짜리가 혼자서 대거 하나 들고 엘프 레인저와 오크 워리어를 제압한다고?

절대 레벨이 낮은 적이 아니었는데.

리스크를 감수하기에는 최적의 동료다. 아니, 어쩌면 리스크가 없는 거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가 내 말만 잘 듣는다면 말이지.

속내를 감추고 한숨을 쉰다.

"하아. 일단 풀어주자."

"어, 쟤들 센데."

"무기는 돌려주지 마."

"알았어요."

소녀가 총총 달려가서 요정을 묶은 밧줄을 풀기 시작한다.

아니, 조금 다르게 표현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거의 김밥이나 다름없는 상태의 요정을 돌돌돌 굴린다.

겁에 질린 요정은 별 수 없이 소녀가 굴리는 대로 흙바닥을 굴러야했다.

저항은 없었다. 체념이 느껴진다. 대체 뭘 한 걸까?

오크는 내가 다가가서 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투지가 전혀 꺾이지 않은 모습이었기에 도끼를 멀찌감치 치우는 것으로도 부족해보였다.

사냥꾼이 석궁을 머리에 겨누고 있기로 했다.

오크는 얌전해졌다.

한 명에게 둘 모두가 제압당한 상황, 그런데 상대의 동료까지 있으니 무의미한 죽음이라 여긴 모양이다.

나는 일단 둘을 격리하기로 했다.

당장은 저 충격적인 소녀에게 시선이 쏠려있겠지만 일단 요정과 그린스킨은 전쟁 중이다.

"그 오크 좀 잘 보고 있어."

"어, 지키고만 있으면 돼요?"

"그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풀려나 일어서있는 요정을 보니 오들오들 떨고 있다.

"안 잡아먹으니까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할까?"

"나가서······라니요?"

"밀담을 좀 하잔 말인데."

그 말에 오크의 표정이 기묘해진다.

무장 해제당한 장비의 질로 보아 제법 지위가 있는 편인데, 그렇다면 대화란게 무엇인지 아는 오크란 뜻이다.

그럼에도 눈썹을 꿈틀 거리는 것은 감히 자신들의 적인 요정과 대화를 시도하는 내 모습에 불쾌해하는 걸까.

오크는 그런 녀석들이다.

사냥꾼이 걱정을 해왔다.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무기도 없는 요정한테 질까."

샷건을 툭툭 두드리자 납득하는 모양이다. 풀어줬다곤 해도 팔은 여전히 등뒤로 묶여있다.

나는 샷건의 총구로 요정을 밀었다. 요정이 걷기 시작했다.

샷건이 뭔지는 모르고 있겠지만 생사여탈권이 내 손에 있음은 알 것이다.

그리고 조금 대화를 해본 결과.

요정은 겁을 먹긴 하되 상황 판단이 안 될 정도로 패닉에 빠지진 않았다.

그녀는 이 숲에 대대로 살아온 그루터기 요정의 일족이며 어느 날 침공해온 오크 군대와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오크들의 목적은 요정도 잘 알지 못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희망이 깃든다.

조금 전에 김밥처럼 말려있었던 일은 벌써 잊은 모양이다.

"저희의 편이 되어주실 건가요?"

순진하기도 해라.

요정이라는 그룹 아래에도 꽤 많은 하위 팩션이 존재하지만 개중에서도 그루터기 요정은 고리타분 요정이라고 불리는 멍청이들이다.

그들은 전통을 숭상하며 뿌리내린 고향을 떠나지 않는다.

자신들만의 우물에 처박혀 지내는 개구리들이다.

속여먹기는 가장 쉽고 이용하기엔 최고다.

물론 선의로 가득한 착실한 종족이긴 하다. 하지만 남을 너무 잘 믿는다. 자신들이 선량한 만큼 세상의 모두가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한다.

요정이란 이름답게 머릿속이 꽃밭이다.

"글쎄? 내가 왜?"

요정은 잠깐 동안 버퍼링에 걸려있었다. 어째서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다.

바보 같은 모습이지만 비하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루터기 요정들에게 대가 없는 선행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니까.

삶의 일부가 된 것을 분리하고 생각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나는 도움을 좀 주기로 했다.

"뭔가 이득이 될 일 있다면 내가 좀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까?"

요정의 얼굴이 밝아진다. 비로소 거래라는 단어를 떠올린 모양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백여 년은 사용한 적 없는 단어겠지.

"그, 그래요. 거래! 거래를 제안하겠어요. 저희를 도와주면······. 어······."

하지만 다시 버퍼링.

그렇게 서툴다 못해 눈물이 절로 나는 협상의 과정 끝에 나는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요정 마을의 규모와 보유한 장비 및 자원.

추정되는 그린스킨 군대의 숫자와 구성.

마지막으로 이 숲에 떠도는 각종 사소한 전설이나 설화까지.

뜬금없어 보이지만 이건 필요해서 들은 것이 맞다.

대부분은 그냥 헛소리지만 간혹 숨겨진 아이템이나 보스가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게임이라면 대충 때려 맞춰서 찾아낼 수 있겠지만, 현실이 된 세계에서 지도한 장 없이 그런 노력을 하기엔 수지가 안 맞는다.

마지막으로 요정은 다시 한 번 내게 물었다.

"그럼 이제 저희 편이신가요?"

"아니."

요정이 실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제시한 조건은 썩 나쁘지는 않았다.

요정제 장비들은 하나같이 고성능에 마법이 걸려있고, 요정의 나무에서 나오는 각종 자원들은 다양한 효과를 가진 소모품의 재료다.

마법과 정령에 능한 요정들의 특성상 우호도를 올려둔다면 미궁의 후반부로 갈수록 모험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할 거다.

"그럼, 저쪽의 편을 들 건가요? 어째서 그런 야만스런 오크들에게······."

"이봐, 한쪽말만 들으면 오크가 얼마나 섭섭하겠어? 단지, 그쪽 이야기도 들어보겠다는 거지."

그러며 눈을 찡긋하자 요정의 얼굴에 다시 희망이 핀다.

나는 웃으며 다시 샘으로 들어갔다. 소녀와 사냥꾼이 험상궂은 표정의 오크를 지키고 있다.

소녀는 따분한 모양인지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요정을 사냥꾼에게 넘기고 오크를 보았다.

그는 으르렁대며 말했다.

"저 연놈들에게 붙을 생각이면 후회하게 될 거다. 폭풍울음 여단의 이름으로 네놈을 저주하리라."

"여단? 도시냐? 아니면 왕국?"

오크는 조금 아차하는 표정이 되었지만 곧바로 으르렁거렸다.

"내가 그걸 말해줄 것 같으냐."

저런 발언은 아래층 어딘가에서 출현할 팩션을 예고하는 정보이기도 하다.

도시 이하의 규모였다면 조직된 군대가 아니니 군 편제가 아니라 폭풍울음 부족같은 식으로 말했을 터.

아무래도 숲을 침공한 오크들에게는 배후가 있는 모양이다.

그게 도시라면 괜찮지만 오크 왕국이면 꽤 피곤해진다. 규모가 전혀 다르니까.

2층에서 세력전이 뜬 게 차라리 다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 정보 없이 왕국 규모의 팩션과 맞닥뜨리게 되는 수도 있다.

물론 그건 운이 없는 경우지만 그때 가서 불평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운명 또한 미리 알고 준비하는 자의 편이다.

옆에서 사냥꾼이 불안하게 물었다.

"왕국? 오크가 말입니까?"

이건 또 잘 모르나보군.

"그린 스킨 팩션은 최대 규모로 만나본 게 어느 정도야?"

"도시였습니다만······."

"그럼 왕국이 뭐겠어?"

"하, 미궁은 정말 빌어먹을 곳입니다."

경험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을 텐데 그 이상이 있다는 게 끊임없이 새로 드러나니 괴로워 보인다.

사냥꾼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위에는 제국도 있어. 그리고 제국 보다 위에는······."

"아니, 되었습니다. 그냥 모르고 살겠습니다."

이미 중년 미국인의 표정은 코스믹 호러에 가까웠다.

하긴, 오크 우주 연방 정도가 되면 아무리 나라도 그 층을 최대한 빨리 통과하는 것 이상으로는 손 쓸 수가 없게 되긴 한다.

알 필요가 없는 것도 맞는 말이다.

왕국 이전 구간에서 이족보행 병기를 타고 다니는 오크를 대체 어떻게 상대 하냐고.

이제 오크에게서 정보를 좀 뽑아내려고 하는데 소녀가 슬쩍 다가왔다.

"고문 좀 도와줄까요?"

"뭔 개소리야. 그런 거 안 해."

"어라, 안 해요?"

사슴처럼 순진한 눈망울로 지껄이는 소리가 고문 같은 거라니.

"그럼 설마, 저 요정 가슴도 안 주물렀어요?"

"흠, 네가 어떤 사고과정을 거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전혀 짐작이 안가는데 좀 알려줄 수 있을까?"

"크잖아요. 남자들은 저런 거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만져 볼 이유는?"

소녀가 의심스레 중얼거린다.

"이상하다. 오라버니라면······."

보통 정씨 가문 설정의 NPC는 적이어도 아군이어도 냉혹한 전사의 이미지였다.

이번 세계에서는 어딘가 나사가 단단히 빠진 모양이다.

헛소리를 하는 소녀의 머리를 콩하고 때렸다.

"아, 왜요."

"말 같은 소리를 좀 해. 넌 왜 입으로 방귀를 뀌냐?"

"어머, 어떻게 여고생에게 그런 말을."

"얼씨구······."

"절씨구."

소녀를 한방 더 때려주고 묶인 포로를 잡아끈다. 오크는 의외로 순순히 따라왔다.

그는 어처구니없어했다.

"나를 제압한 전사가 저런······. 음, 저런 이상한 인간이라니."

"그러게나 말이다."

우습게도 소녀의 행동은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다.

오크들의 감정은 휘발성이 높다. 조금 전까지 내게 으르렁대던 녀석은 간데없고 힘이 쭉 빠진 오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대화하기에는 좀 더 편한 조건이었다.

요정처럼 멍청하진 않기에 알아서 다 털어놓지는 않았고 과정이 필요했다.

오크는 마침 부대에서 지위가 꽤 있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협상이 가능한 정도의 지능이 있었다.

내가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내비치자 그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납득했다.

"우리와 대적하지 않겠다는 그 뜻은 현명하군."

반쯤은 자기들에 대한 자부심 덕이었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나는 살살 구슬리기도하고 아부를 털기도 하면서 캐낼 것을 최대한 캐내었다.

오크들이 비록 멍청하진 않더라도, 똑똑한 것은 또 아니라 이게 아주 힘들지는 않다.

일련의 대화가 끝난 후, 오크는 나를 나름대로 괜찮은 전사로 여기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같은 편이 된 내가 요정의 마을을 함락시키는 선봉으로서 유용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진짜로 우호적인 생각은 없을 거고 사용해주겠다 정도의 자기중심적인 생각이겠지.

아무리 감정이 쉽게 휘발된다 해도 팔이 떨어진 건 결국 다시 떠올릴만한 굴욕일 것이다.

두 포로를 다시 꽁꽁 묶어 구석으로 치워두고 나는 소녀와 사냥꾼을 불렀다.

"파티 리더가 독선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게 꼭 좋다고 할 수는 없지. 의견 있으면 받아줄게."

사냥꾼은 기뻐하며 말했다.

"그럼 이제 저 오크를 쏴버려도 되는 겁니까?"

나는 의아하게 반문했고.

"응?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편을 들기로 했으면 요정이 보는 앞에서 신뢰를 얻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저······ 아가씨가 한 게 있으니 말입니다."

뭔가 오해가 있군. 나는 그 오해를 풀어주었다.

"아냐, 난 양쪽 다 쓸어버릴 생각인데?"

사냥꾼이 망연해졌다.

하지만 쟤들 다 경험치 인걸. 시작부터 지위 있는 오크의 팔을 떼어 놓은 이상 우호도 작업은 이미 비효율이다.

지금은 차라리 압도적인 전투력을 증명한 정씨 소녀와 함께 다 쓸어 담고 파밍하는게 옳다.

이게 어려워서 그렇지 팩션 우호도 따위보다 훨씬 이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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