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9화
2층 - Lv.25 발굴지 초병(1)
생각해보면 왕국 이전 구간은 게임 시절에는 튜토리얼에 가까운 별 것 아닌 난이도다.
아무리 리얼해져 난이도가 올라갔다한들, 이동과 휴식에 시간을 많이 낭비하게 되었다한들.
십 몇 년씩 건실하게 도전한다면 한 번도 그 문을 두드려보지 못하고 머물러 있기도 힘들다.
완전히 체념하고 스스로를 갈고 닦음을 멈추었다면 모를까, 사냥꾼은 제법 노련한 유배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 경우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인간임을 버리진 못한 사람들이다.
"요정이랑 자주 같이 살았나보네."
사냥꾼은 침묵했다.
그것이 곧 대답이 되었다.
연차가 되는 사람들끼리는 ‘요정의 덫’에 걸렸다고들 표현하곤 했다.
나에게는 이 사냥꾼도, 저 소녀도, 묶여있던 포로들도 전부 NPC에 불과하지만 사냥꾼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바로 이전 회차였습니다. 24층의 그루터기 요정 마을에서 7년을 지냈었군요."
튜토리얼은 길다.
왕국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적당히 NPC들과 함께 살아갈만한 층이 생성되는 경우는 많다.
대부분의 유배자가 왕국행을 포기하는 것이 그래서다.
절박한 이에게 말로만 들어본 낙원과 지금 눈앞에 있는 안락함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사실 왕국이라고 해봐야 그다지 낙원이 아니기도 하지만.
아무튼 그래서 스스로 플레이어라고 인식하고 있는 NPC들은 곧잘 그런 곳에 정착하곤 한다.
정확히는 그런 기억을 가진 채 생성된다.
"흔히 있는 일이군. 그루터기 요정은 정말로 선한 녀석들이니 함께 지내면, 뭐."
행복할 수도 있겠지. 모두 눈부신 미남미녀에 친절하고 선량하며 따뜻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상의 낙원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허나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다.
"그래서 요정은 못 죽이겠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제 동료였고 이웃이었던 자들이니까."
"어차피 다른 요정들이야. 이전의 그 NPC들은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마음이란 게 어디 뜻대로 되는 거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냥꾼의 표정은 일그러져있었다.
스스로의 말이 헛소리라는 것을 아는 자의 모습이다.
같은 세계가 다시 생성되어, 이전의 그 사람들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유배자의 상식이다. NPC에게 정을 주지 마라.
물론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거의 무한히 반복되는 삶에서 정이라도 없으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니까.
"뭐, 그럼 천천히 생각해봐. 오크는 죽일 수 있지?"
"예, 아니. 뭐. 하아."
상태가 안 좋구먼.
"어차피 오크 먼저 칠 생각이었어. 상황에 따라서는 거기서 끝내고 요정은 그냥 둘 수도 있으니까. 그때 생각하자고."
"고맙습니다."
효율적이진 않지만 저런 사람도 한 둘은 필요하다.
보고 있으면 인간이 무엇이었는지를 잊지 않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반면, 당연하게도 소녀는 모두 쓸어버린다는 사실에 놀라지도 않았고 반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재밌을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
나와 이 소녀 쪽이 이상한 것이다.
소녀는 처음부터 이상했고, 나는 97년쯤 미궁을 헤매다보니 이상해졌다.
* * *
사흘이 지났다.
서든데스까지는 아직 시간이 제법 있었다.
파밍 구역의 야생 고블린은 숫자가 제법 많았으나 계획보다 훨씬 빠르게 기본적인 파밍을 끝마쳤다.
유능한 사냥꾼의 존재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고향생각이 많이 난다며 한숨 쉬었다.
제 1의 고향인 캘리포니아와도, 그리고 그가 정착했었던 제 2의 고향 이전 회차의 요정 마을도.
모두 이런 침엽수림이었다는 모양이다.
이런 익숙함은 언제나 일의 능률을 올려준다.
하지만 괜히 달랠 일이 많아지기도 했다.
사냥꾼은 자주 푸념했다.
랜덤으로 생성되는 지형은 종종 기시감을 줄 때가 있다.
사라져버린 과거가 눈앞에 다시 재현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준다.
하지만 몇 번이고 그때와는 다르다고 깨닫고 나면 포기하게 된다.
나는 그랬다.
나는 이곳이 게임 세계라는 증거를 너무 자주 발견한다.
숲을 구석구석 탐색하는 일이 빠르게 끝났기에 바로 다음날, 오크 주둔지를 털기로 했다.
그것을 위한 사전답사 이전에, 털어먹은 성과를 되짚어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사냥꾼이 지닌 요정의 활.
그의 석궁은 슬슬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애초부터 1층에서 나온 장비인 만큼 만듬새가 조잡했다.
오래 쓰기엔 내구도가 부족하다.
반면 요정제 활은 명품이다. 감정할 능력은 없지만, 직접 쏴본 결과 약간의 조준보정 마법까지 걸려있다.
소위, 매직아이템이라는 물건이다. 게임에선 파란색으로 이름이 표기되겠지.
몇 층 더 쓰기엔 무리 없으리라.
어차피 요정의 마을을 털고 나면 잔뜩 생기겠지만.
포로로 잡혔던 오크와 요정은 그날 바로 소녀의 경험치가 되었다.
소녀의 기술이 좋았기에 고통은 없이 보내주었다.
사냥꾼이 심히 우울해보였기에 요정은 제대로 장례도 치러주었다.
이 또한 효율적인 행동은 아니었으나 누군가 마음이 편해진다면 감수할 수 있는 비효율이다.
냉정하게 말해 저 사냥꾼은 내 클리어 계획에 포함될 정도의 인재는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헤어질 일시적인 동료에 불과하다.
그러니 어떻게 대해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다시 볼 일 없는 NPC니까.
하지만 나도 인간이다.
그 선을 지키기 위해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게 있다.
NPC들을 인간으로 대하기로 한 이상 지켜야할 선이다.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정말로 내가 인간이었는지 무엇이었는지 잊게 되고 싶지는 않다.
미궁에 오래 살다보면 정체성이 희미해질 때가 있다.
나는 인간이다.
아직은.
소녀는 여전히 생기발랄했다.
내 짧은 식견으로도 정신적인 면에서 전혀 평범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아주 뛰어난 인재였다.
멘탈적인 측면에서 따로 관리가 필요 없다. 이보다 편할 수 없다.
살인에 대한 죄책감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 듯했고 어쩌면 처음도 아닌 듯 했다.
현대 의학적으로는 반사회성 성격 장애, 일명 사이코패스라고 해야 할 문제아에 해당한다.
허나 정상이 아닌 세계에서는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법이다.
소녀는 훌륭한 미궁산 정상인으로서, 적어도 내가 그녀에게 제공할 지식이 있는 동안은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어딘가 잘 따르는 강아지처럼 말을 잘 듣는다.
다른 꿍꿍이도 없어 보여 더 무섭다.
순수해서 그런 걸까? 흠. 희대의 살인마는 어떤 면에서는 순수한 사람들이라 고들 하지.
어쨌건 끝까지 데려갈 생각이었기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그다지 보람이 없었다는 말이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무기를 점검하며 남은 샷건 쉘을 센다. 1층에서 쓴 3발을 빼고 7발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난 사흘간 나는 대부분의 전투를 냉병기 선에서 해결했다.
더블 배럴 샷건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기에 내구도에 흠은 없다.
소녀가 샷건을 만지작거린다. 요 며칠 사격에도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사냥꾼은 그런 소녀의 눈치를 흘깃 본다. 호시탐탐 석궁을 노리는 모습을 보여준 탓이다.
별로 놀랍지는 않게도 그녀는 아직 뉴비임을 들키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피바람을 일으키는 여고생을 보며 뉴비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 또한 정신병이리라.
소녀가 사냥꾼 몰래 속삭인다.
"무기는 왜 이렇게 많이 수집하는 거예요?"
야생 고블린들을 털기도 하고 조잡하게나마 직접 만들기도 하며 수북하게 무기를 쌓아두었으니 그런 의문을 가질 만도 하지.
"그 대거 마음에 들어 하지?"
"그럼요."
초기 장비로 주어진 대거는 피를 많이도 먹었다. 아직까지는 주로 고블린과 야생동물들이다.
암습 판정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자 너무 쉽게 능숙해져 무서울 정도다.
야생 고블린은 아무리 덤벼도 야채처럼 썰려나가겠지.
"그거 슬슬 내구도 끝나갈 거야."
"네?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요."
금이 간 것도 아니고 이가 나간 것도 아니다. 소녀 나름대로 열심히 관리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기는 본래 소모품이다. 이 미궁에서는 좀 더 극단적으로 소모품이다.
"미궁의 설정 같은 거야. 여기서는 아무리 열심히 잘 관리해도 어느 정도 쓰면 갑자기 파사삭 하고 박살나거든."
"보기에는 멀쩡해보여도 얼마 안 남았단 건가요?"
힐링 포션의 효능을 쉬이 확신한 만큼 이해도 빨랐다.
미궁에서 물리법칙 따위가 조금씩 어긋나는 일 정도야 늘 있는 일이다.
"무기는 소모품이야."
"그건 저도 알아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극단적인 소모품이야."
예시는 뭐가 좋을까?
"너 엑스칼리버라고하면 뭔지 아니?"
"어, 전설의 검?"
"그건 튼튼하겠지?"
"네."
실제로도 그렇다. 통짜 아다만타이트로 만들어서 더럽게 튼튼하다.
아다만타이트는 현실에 존재했다면 인류의 발전사를 바꾸었을 정도로 더럽게 튼튼하고 단단한 금속이다.
현대지구 계통 세계에서 관련 업계 종사자였던 유배자 하나가 원래 세계에서 하던 일이 전부 무의미해진 것 같다며 한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도 현실과 큰 부분에서는 다름없는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미궁이다.
아다만타이트를 일부러 파손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건 그래서 무기로서 다룬다면 50층 정도는 넉넉히 쓰려나."
하지만 무기로서 수명이 다하면 역시나 최후의 크리티컬 판정과 함께 파사삭하며 산산조각 나버린다.
물론 어디까지나 무기로서 다룬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무기가 아니라 도구로서, 예를 들어 완전히 죽은 드래곤을 손질하는 식칼로만 사용한다거나 하면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날카로우리라.
미궁에 작용하는 무기로서의 내구도는 실제 내구도와는 완전히 별개로 작용한다.
그것은 아주 초현실적인 무언가에 가깝다.
나는 그게 단순한 게임시스템의 구현이라는 것을 알지만 말이다.
"무기로 사용한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쓰러뜨렸을 때 경험치를 주는 대상을 공격하는 행위 정도일거야."
나는 내 몸을 가리킨다.
"날 봐, 이거저거 많이 차고 다니지?"
둘째 날 아침의 끔찍한 근육통 이후, 올라간 스탯의 영향도 있어 체력적으로 많이 나아졌다.
그래서 샷건 이외에도 냉병기를 서너 자루씩 챙기고 다닌다.
투검용 단검은 말할 것도 없다. 고블린들은 그런 걸 많이 가지고 다닌다.
"너도 마음에 드는 걸 몇 개 더 골라놔야 할거야."
소녀가 시무룩해졌다.
이해한다. 초기 장비인 대거는 극초반 기준으로는 내구도가 아주 좋은 편이기는 하다.
짧은 리치인 병종의 문제일 뿐이지 고블린 따위에게 노획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소녀가 뒤적뒤적하며 보조무기들을 챙긴 후, 병을 채운 사냥꾼이 그것을 분배했다.
그냥 병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사실 이것도 ‘병’이라고 따로 강조해야할 이상한 물건이다.
회복의 샘 근처에 항상 인원수만큼 존재하며, 어딜 봐도 유리병인 주제에 직접 집어던지는 게 아니면 파괴불능이다.
기능은 회복의 샘의 물을 담는 것.
다른 방법으론 샘물을 가지고 다닐 수 없다.
쉽게 말해 리필 되는 힐링포션 그 자체다.
미궁에서는 거의 여벌 목숨이나 다름없는 중요한 물건이다.
사냥꾼은 거기에 식량 주머니와 횃불을 묶어서 등에 매달고 그 외에도 온갖 잡다한 물건들을 챙겼다.
바리바리 싸든 것이 짐꾼이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나는 폭탄 열매도 하나 챙겼다. 먼저 식물 섬유를 가늘게 뽑아 만든 솜 비슷한 것을 가득 채워 넣은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 보관해 오폭에 주의했다.
소녀가 다시 속삭인다.
"뭐 잡으러 가는 거예요?"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늘 표정이 밝은 아이지만 전투를 앞두면 더 환해진다.
"그리폰이라고 알아?"
"알아요. 망치 던지는 드워프들이 타고 다는 거죠?"
흠, 의외로 고전게임 취향도 있나. 그리폰을 듣고 그거부터 생각하다니.
"그거 맞아. 아마."
2층에 등장하는 그리폰은 이미 일종의 히든 보스격이다. 층에 비해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잡기 힘들다.
물론 계획은 있다.
마음에 약간 걸리는 부분은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