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2화
2층 - Lv.70 태양 그리폰(1)
단독으로 다섯을 처리한 소녀의 레벨이 가장 높아졌다.
소녀가 다시 내게 속삭인다.
"요번엔 뭐 찍을까요?"
"[신속]이 몇 스택이더라?"
"3인데요."
"그럼 이번엔 힘 있는 가지를 타고 찍어."
"암살자 클래스면 민첩만 찍지 않아요?"
"너 몰래 숨어 다니며 뒤만 찌를 거야?"
"어······. 아니요."
암습의 보정은 민첩 스탯을 따르지만 그냥 물리 공격력은 힘을 따른다.
그러다보니 체력적인 부분의 문제도 있어서 모든 클래스는 힘에 어느 정도 투자를 한다.
물론 소녀가 의아해하는 부분은 조금 다른 곳이긴 하다.
"생각해봐. 목격자가 남지 않으면 암살이잖아."
"음, 알았어요! 정면 승부에서도 강력한 암살자가 되라는 거군요!"
소위 말하는 힘살자다.
힘, 민첩 비율을 대충 반으로 맞추는 암살자와 전사의 가운데쯤 되는 무언가인데 인게임에 공식 명칭은 없다.
왜냐하면 씹구리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클래스가 아니니 명칭도 없을 수밖에.
암습 판정을 활용하겠다면 어차피 무기는 단검류다.
무기의 리치가 길어질수록 암습 보정은 낮아진다.
암살자는 단검을 써야한다는 게임 상 컨셉의 일환인데, 당연하지만 리치가 짧은 무기는 정면 승부에서 극도로 불리하다.
그러니 보통 힘살자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저열한 성능밖에 발휘할 수 없다.
"그런데 넌 단검 들고도 창이랑 치고 박고 잘하잖아."
"그건 맞아요."
"실력이 되면 애매한 게 아니라 이거도 저거도 다 잘하는 거지."
"과연! 그렇군요."
단검으로 장병기와 합을 나누며 순간적으로 사각을 파고들어 암습 판정도 만들어낸다?
그런 게 가능하면 제일 사기인 게 힘살자다.
뭐 그걸 감안해도 이 소녀의 기초 스탯이 인간을 초월한 수준이라 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이 경우에는 최적의 선택이 된다.
소녀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아직 마인드맵을 불러내는 것이 어색한 모양이다.
"와, 액티브 떴는데요?"
운도 좋은 거 같다.
초반엔 보통 패시브 스택이나 주구장창 쌓이지 두 번째 액티브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데 말이지.
"뭔데?"
"[강격]이라는데요?"
진짜로 운도 좋다.
* * *
그게 어떤 액티브 스킬인지 시연할 기회는 곧바로 찾아왔다.
오크들이 유적 깊숙한 곳까지 발을 들이지 않은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유지보수와는 거리가 먼 세월을 보내온 유적은 군데군데 무너져 지나기 불편한 통로가 많았다.
급기야 지금처럼 완전히 내려앉아 무너진 곳이 있다.
"저기 돌만 치워내면 될 거 같네."
"엄청나게 무거워 보이는데요."
로그라이크는 불합리한 일을 자주 당하는 장르지만 그럼에도 게임이다.
어차피 이건 이미 조우한 랜덤 인카운터라는 시나리오의 틀 안이다.
막다른 길 같아보여도 해결법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건 엄밀한 의미에서는 로그라이크가 아 아니라 로그라이‘트’ 게임이었으니까.
"맨 오른쪽 아래 바위, 45도쯤 각도로 위로 쳐올려. 자 이거 줄게. [강격]쓰면 돼."
"오크가 쓰던 쇠몽둥이네요."
소녀는 큰 의심 없이 다가간다.
처음부터 적응력이 좋았던 소녀지만 미궁의 이상함을 직접 겪으니 점점 의심이 사라져 가는 모양이다.
너무 아무거나 쉽게 믿으면 곤란하니 관리가 필요할 수도 있겠군.
쿵이라기 보단 쾅에 가까운 소리가 나며 막힌 벽이 무너져 내렸다.
소녀는 가볍게 뒤로 몸을 날리며 무너지는 바위를 피해내었다.
강격은 발동 후 1회의 근접 공격의 물리력을 두 배로 튀겨주는 스킬이다.
단순하고도 강력하다. 심플 이즈 베스트라고, 초반에 얻을 수 있는 것 중 고르라고 한다면 1등상이다.
순수 이동기인 [대시]에 [강격].
극 초반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액티브 구성이다.
원래 인간흉기나 다름없는 소녀의 본판을 생각하면 든든하기 짝이 없다.
소녀가 손을 만지작거리며 신기해하는 동안 바람이 불었다.
오랜 세월 밀폐되어있던 공간의 공기가 풀려난다. 바깥과는 사뭇 다른 공기.
사냥꾼이 인상을 찌푸렸다.
"불길한 냄새입니다."
"여기부터가 진짜 입구란 거지."
게임 설정으로 유적이란 것은 결국 시스템적으로는 미니 던전이다.
미궁이라는 거대한 던전 속에 무수히 존재하는 작은 이세계.
지금 바로 그 현관에 발을 디딘 셈이다.
게임 적으로 말하면 다른 구역에 들어온 것인데, 공기가 달라진다는 식으로 구현되어있다.
"내가 앞장서지."
"피지컬로 보면 제가 먼저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모든 함정과 트릭을 알아볼 자신이 있다면야."
"어······, 저는 후방을 책임질게요."
따라서 중년의 미국인은 가운데서 호위 받는 묘한 입장이 되었다.
표정이 조금 떨떠름해 보인다.
나는 진행하며 벽면을 살폈다.
게임 시절엔 아주 디테일한 부분은 시스템적으로 구현되어있지 않았기에 알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현실이 되고 나서는 사소한 곳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더 많았다.
오래 살다보면 유적에서나 보이는 오래된 문자나 암호 따위도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이상한데."
"무엇이 말입니까?"
"이것들 요정 문자야."
"요정의 숲이니 그럴 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문제다.
"이걸 왜 오크들이 파고 있지? 의미부여까지 하면서까지 말이야."
요정과 오크는 서로 닮은 점을 찾기 힘든 종족이다.
요정의 유적에서 나오는 물건은 오크에게 과시용 전리품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일반적이라면 말이다.
"이상한 게 너무 많은데."
장장 97년의 유배 생활, 이젠 아예 낯설다는 느낌 자체가 낯설어진 시점이었다.
* * *
고블린은 발이 빠르다. 잘 훈련된 녀석들은 더욱 그렇다.
대주술사는 한 시간 이내에 발굴지가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흠, 교묘한 녀석들이로다. 요정은 아닐 것이고. 인간인가?"
비겁하고 간교하기로는 그 어느 종족보다 뛰어난 것들이다.
수원에 독을 푼다는 발상도 그것들이 할 법 했다.
"요 며칠 근방의 야만한 고블린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지."
그리고 동쪽에 일어난 산불.
"허나, 인간의 군대가 움직였다면 몰랐을 리가 없거늘."
척후병이 그 정도로 자신의 주제를 모를 리는 없다.
일을 똑바로 하지 않으면 죽는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제자 오크가 뚱한 얼굴로 말한다.
"산불은 건조한 날씨에 언제 건 있을 법 한 일이요, 야생의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고블린 마을이 사라지는 일 또한 드문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럼 독은 어찌 생각하느냐?"
"스승님은 적이 많으시지요."
대주술사는 웃었다.
"그것은 맞도다. 주술사씩이나 되어버린 늙은이들도 독하기로는 누구 못지않지. 허면 유적을 발굴하던 녀석들은 어찌 다 죽었을꼬?"
"요정 유격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멍청해도 마을에 처박혀있는 걸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깨달을 때가 되었죠."
대주술사는 껄껄 웃었다.
"그래 이치에는 맞다만, 내 생각에는 인간의 냄새가 난다."
"물론 그러시겠죠."
"내 직접 병력을 이끌고 가보아야겠다. 유적 안에 들어간 쥐새끼들이 있는 것 같으니."
제자 오크가 고개를 저었다.
"영웅을 기리는 의식은 어찌하시고 말입니까?"
"그 안의 늙은이가 완전한 상태로 깨어나 내가 득 볼 것이 있더냐?"
"후우, 마음대로 하시지요."
제자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 * *
이상하군 이상해. 정말로 이상해.
"왜 그렇게 표정이 죽상이에요?"
소녀가 내가 방금 해체한 함정의 화살을 집어 들며 발랄하게도 묻는다.
살짝 혀를 대어 보는 것이 독을 확인하는 모양이다.
"뭔가 생각날 것 같다가도 마는 느낌이란 말이지."
"으, 쓰다. 이거 독이네. 근데 그래서 이상한 게 뭔데요?"
"함정의 위치말이야."
방향이 이상하다.
해체하기 너무나도 쉽다.
밖에서 들어오는 침입자들에게 그다지 함정을 숨길 생각 따위는 없어 보인다.
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오히려 안쪽에서 밖으로 나가는 걸 막는 느낌이란 말이지."
"그리폰을 가둬두는 걸까요?"
"그런 대따시만한 걸 어떻게 이런 걸로 가둬. 애초에 이 통로로 지날 수도 없을 건데."
벽면의 고대 요정 문자들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요정 특유의 은유는 진실을 감추는 것에도 흔히 활용된다.
지금 벽면의 복잡한 문양들이 바로 그런 형태다.
숨기는 것이 있다면 안에 있는 보상도 더욱 커지긴 한다.
보통은 그렇다.
"헌데 그루터기 요정은 그런 짓을 안 한단 말이지. 잎사귀 요정들이 자주 하는 짓들이야."
"요정도 종류가 많나 봐요?"
"많을 정도는 아닌데. 하여간 이상하다. 되게 찝찝해 지금."
이런 형태의 유적이라면 전리품은 보스 그 자체거나, 보스가 지키고 있는 물건이다.
그런데 침입자보단 오히려 내부에서 밖으로 나가는 걸 막고 있다.
거기에 그루터기 요정의 영역까지 다른 분파의 요정들이 찾아와 무언가를 은닉한다?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봉인.
뭔가 안 좋은 게 안에 있다는 뜻.
요정에게는 안 좋고 그린 스킨에게는 좋은 것이라.
어려운 문제다.
그런 게 너무 많아서 그렇다.
원래라면 겨우 2층이라는 걸 감안하면 확률의 문제로 어느 정도 좁혀지긴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상하다.
세력전을 테마로 끼워 넣어서 그런 유적이 나온다면 몇 가지 없다.
그런데 그 몇 가지들은 전부 이런 규모의 이야기가 엮여 나오지는 않는다.
미궁의 심연은 깊을수록 짙어져야 정상이다.
겪은 바만 해도 이미 충분히 희박한 확률이 뚫렸다.
그런데 여기서 더?
지나치게 부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무언가 원인이 있을 터.
그런데 그걸 전혀 모르겠다. 짚이는 바조차도 없다.
이게 너무 이상하다.
이럴 수가 없다.
100년쯤 여기서 살았는데 어떻게 감도 안 잡힐 수가 있어.
문득 오른손에 [점멸 단검]을 만들어냈다.
이 스킬의 가장 쉬운 활용방법은 어딘가 숨겨두고 도주용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어딘가에 꽂아놓을까?
"아저씨."
소녀가 갑자기 불렀다. 평소의 통통 튀는 듯한 성조가 조금 잦아든 목소리.
"뭐."
"잘 모르는 일이란 거도 꽤 신나고 두근두근하지 않아요?"
그러며 생긋 미소.
나는 맥이 탁 풀려 쓴웃음 지었다.
"그래."
사실 고작해야 2층이다. 최악의 경우에도 며칠 낭비한 정도에 불과하다.
그 며칠도 아까울 수는 있지만······.
게임이라는 건 그렇게 쫄보처럼 하는 게 아니다.
내가 그런 게이머였던 것 또한 아니다.
어딘가의 찝찝함을 죽여두고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