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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3화 (13/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3화

2층 - Lv.70 태양 그리폰(2)

대주술사가 대동한 병력은 그다지 대규모는 아니었다.

척후병인 고블린 암살자 두엇과 중무장한 오크 고급 장교 다섯이었다.

수원에 독을 푼 자가 누구이건 간에 그의 의도는 절반 이상 성공했다.

주둔지는 평소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빠듯할 만큼 비전투 손실이 발생했다.

대주술사가 괜히 겁이나 주며 치료해준 이들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독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된 후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자여."

"예, 스승님."

"그 인간들이 하는 양치질인가 하는 그거 말이다."

"말씀하시지요."

"저놈들에게 가르칠 수 있겠느냐?"

제자는 대답 대신 노망난 오크를 보는 표정이 되었다.

대주술사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물어본 내가 멍청했지."

시킨다고 제대로 할 놈들도 아니다.

"그나저나, 거하게도 저질러 놓았군. 솜씨 있는 녀석들이로다."

발굴지는 오크의 기준으로 볼 때 몹시도 처참했다.

전투의 흔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그다지 없다.

초소 하나가 조금 크게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온한 광경이었다.

잠자듯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 오크들만 아니라면 말이다.

정말로 처참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거의 가지고 놀았군. 여기 보내놓은 녀석들은 꽤 쓸만한 것들 아니었나?"

"예, 선봉의 영광을 누릴만한 전사들이었죠."

"그런데 반항한 흔적도 그다지 없다니. 싸움이라기보다는 학살이었겠군. 전쟁과 야성의 신이시여······"

제자 오크는 고개를 들어 스승의 얼굴을 보았다.

늙은 오크의 얼굴은 비탄으로 얼룩져있었다.

참으로 알 수 없다.

오크의 미덕은 언제나 요란한 것이다.

전쟁도 전투도 가능하면 그렇게 치르려한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주 끔찍한 일이라 알려질 것이다.

이렇게 전사라기보단 암살자가 휩쓸고 지나간 듯한 광경이 그러했다.

오크와 그들이 모시는 신에게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참혹한 광경인 모양이다.

차라리 발굴지가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면 대주술사는 껄껄 웃으며 죽은 이들을 기렸으리라.

제자 오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 * *

유적 내부의 벽은 많이 훼손되어 있으나 대체로 많은 기록이 남아있었다.

숨기는 것이 많은 찝찝한 내용들뿐이지만 필요한 정보도 있다.

"이번 미궁의 요정들은 자연과 순결의 신을 섬기는 모양이군."

"자연과 순결이라니 잘 어울리긴 하네요."

"요정은 어지간하면 자연의 신을 섬기긴 해. 중요한건 접미지. 순결의 신은 썩 달갑지 않은데."

이 게임의 신은 랜덤요소의 일환으로서 매번 달라진다.

같은 자연의 신이라 하더라도 접미사가 뭐가 붙냐에 따라 성격이 크게 다르다.

순결이라는 접미는 대체로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을 나타낸다.

신도도, 신 본인도.

그런 신을 섬기는 종족은 여러모로 까다로워진다.

그루터기 요정들이야 그러려니 싶지만 다른 요정들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럼 그린스킨들의 신은 뭔가요?"

"전쟁의 신."

"어째 취미도 특기도 싸움일거 같은 면상들이더라니. 그럼 접미는요?"

"그건 앞으로 알게 되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전쟁의 신의 접미는 파괴나 죽음 혹은 야성 정도로 한정된다.

주술사들이 어떤 종류의 주술을 사용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 걱정을 해야겠는데?"

요정 마을의 설화에서 암시하는 유적 수호자, 말하자면 이 던전의 보스는 맹금류를 암시하는 말이 많았다.

그에 더해 태양, 불.

불 속성의 그리폰 아종이 등장할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고 대책도 준비해왔지만.

"이건 좀 엄청나게 크군."

"이 동상이 살아나서 움직이는 겁니까?"

던전을 잘 모르는 듯한 사냥꾼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하지만 유적 수호자도 생물이라면 뭘 먹어야한다.

그러니 보통은 아사하지 않도록 이렇게 석화된 동상인 채로 침입자를 기다리고 있다.

"체고만 10미터에, 몸길이는 20미터는 가뿐하겠군요."

그야말로 물리현실에 존재할 수 있긴 한가 의심스러운 괴물이다.

"공략은 안 변하겠지만 그래도 더 조심은 해야 할 거야. 이 크기면 오래 묵은 놈인데 브레스 정도는 뿜을 걸?"

"용의 숨결인가 하는 그것 말입니까? 본적이 없어서 실감은 안 나는데······

입에서 불을 뿜는다니."

"네 발에 날개 달린 괴수들은 대충 드래곤의 근연종 취급이라."

그 종족이 되지 못하면 가질 수 없는 종류의 스킬.

소위 말하는 고유 스킬 같은 거다.

종족 카드를 손에 넣는다면 사용해볼 수도 있겠다.

물론 유배자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종족 카드에 그리폰 같은 것은 없다.

브레스 웨폰을 보유한 플레이어블 종족이라고 해봐야 드래곤 정도다.

거기에 드래곤 카드는 100번 클리어 할 동안 한 번 보기도 힘들다. 그냥 없는 셈 치는 카드다.

"아직 돌일 때 때려 부수면 안 되나요?"

소녀가 아까 들려준 쇠몽둥이를 만지작대며 말한다.

나는 해보라고 했다.

강격이 발동하고 굉음이 울려 퍼진다.

둔탁한 쇳소리와 함께 쇠몽둥이가 휘어진다.

그러더니 곧이어 빛이 되어 흩어졌다.

중고지만 비교적 양호한 상태라 내구도가 다하기엔 이른데도 무기의 수명이 끝났다.

재질 보정이다.

현실적으로도 바위보다야 살거죽을 치는 편이 무기가 덜 상할 터이다.

"석화중인 유적 수호자는 마법에 걸린 석상이라 그냥 바위보다 훨씬 내구도를 많이 깎아 먹는 재질이지."

"깨워서 잡는 게 더 남는 장사군요."

"나중에는 꼼수도 있긴 한데, 지금은 어림도 없어."

직접 겪은 것보다 더 확실한 설명은 없다.

사냥꾼이 미리 약속 된 위치에 자리 잡고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나도 자리를 잡아야겠군.

점멸의 쿨다운도 한번 기다려야하고.

보스 레이드 시작이다.

* * *

사냥꾼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연차에 비하면 미숙한 축이었다.

밖에서 하던 일이 있어 피를 보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지 개척에 적극적인 유배자는 아닌 탓이다.

요정과 함께 지낸 나날은 나름대로 견식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긴 했다.

허나 미궁 그 자체의 시스템적 이해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높은 연차의 유배자들은 소문으로나 들었다. 대개 뜬소문이겠거니 싶은 비현실적인 내용들이었다.

개중 그럴싸한 소문도 있었다.

연차를 밝히지 않으려고 하는 고참이 진짜다.

만사가 그렇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누구나 슬슬 자신이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면 말이 많아지는 것이다.

사냥꾼이 1층에서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재빨리 항복하고 엎드리는 판단 역시 들어본 소문에 기초했다.

또 다른 소문도 있었다.

진짜 고참들은 왕국 이전 구간에서 텃세 따위 부리지 않는다.

그네들이 보기엔 어차피 다 귀여운 병아리 같은 존재라 데리고 다니거나 무시할 뿐이라고.

실제로 그리 되었다.

사냥꾼은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속한 이 파티의 남녀는 몇 년차일까?

가늠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유적 수호자가 그리폰임을 왜 아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당연하다는 듯 강의마냥 공략법을 늘어놓으며 숙지시킨다.

소녀 쪽은 집채만 한 괴물을 상정하고 있음에도 두려움 한 점 없다.

방긋 방긋 웃는 얼굴이 어찌나 어여쁜지 이제 볼 수 없는 딸아이가 생각날 정도다.

이것은 전의를 불태우는 투지와도 전혀 다르다.

그저 일상의 한 페이지를 보는 것과도 다를 바 없다.

아니 애초에 이런 거대괴수를 보고 전의를 불태우는 것도 보통 사람의 범주는 아니리라.

그야말로 광기다.

모두 미쳐있다.

하지만 사실 미궁이란 본디 그런 자들을 위한 곳일지도 모른다.

사냥꾼은 어딘가 뒤떨어진 사람이 된 기분을 느꼈다.

한숨을 쉬며 요정의 활을 든다.

일반적으로 강한 활은 그만큼 당기기 힘들다. 요정의 활은 놀랄 만큼 쉽고 부드럽게 당겨진다.

허나 그 위력은 기계식으로 시위를 당기는 석궁 못지않다.

유적의 마지막 시련은 퍽이나 거대한 석실에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폰이 그 현실감 없이 거대한 몸을 움직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넓이다.

그리고 마치 그 장대한 크기의 괴물과 눈높이를 맞춰주려는 듯 석실의 벽에도 회랑이 늘어서있다.

일견 거대한 오페라 하우스를 연상케 하는 형태.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발코니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구조는 인공적인 흔적이 가득했다.

낡아빠져 군데군데 주저앉아있지만 친절하게도 계단마저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함정 투성이었던 들어오는 길부터 이어져온 장식적인 문양의 부조들이 장엄함을 배가한다.

파티 리더의 말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고대 요정이 이룩했던 마도문명의 흔적이라는 모양이다.

사냥꾼이 지냈던 그야말로 촌락이라는 느낌의 마을과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다.

요정들도 그 나름대로 쇠락의 역사를 겪어온 모양이었다.

아무튼 뭐 어떤가. 요정 마을의 주민이었던 사냥꾼 또한 이전 세계의 일이다.

이제 없었던 일이 되었는데.

사냥꾼은 잡다한 상념을 접어 넣고 조준에 집중했다.

그의 리더는 점멸로 천장에 밧줄을 매달더니 그대로 매달려있다.

어떻게 매달린 건지 봤는데도 잘 모르겠다.

곧, 쿨다운을 기다린 리더가 거대한 그리폰 석상의 뒤편으로 단검을 던졌다.

* * *

로그라이크는 대체로 초심자가 부조리하다고 느낄만한 기믹이 산재해있다.

대표적으로 이런 보스전의 시작이다.

모니터 너머로 보아도 느껴질 만큼 장엄한 보스룸을 디자인해두고, 한눈에도 위엄 넘치는 괴물이 동상의 모습으로 도전자를 기다린다.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면 대개의 초심자는 생각하기 마련이다.

웅장한 컷씬이 재생되며 보스가 박력 넘치게 포효 한번 박아주고 시작할거라고.

그럴 리가 없다.

보스가 지키는 물건을 건드리는 즉시.

콰과광!

연출 한 점 없이 필살의 앞발 후리기부터 나온다.

히든 보스인 만큼 2층이어도 레벨로 치면 50이상.

이건 게임이어도 현실이어도 맞으면 죽는다.

발톱이 사람 몸뚱이만하니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다.

이렇듯 대체로 히든 보스들은 노히트 클리어를 요구한다.

"우와아아아아?!"

미리 경고를 해줘서 알고 있음에도 당황한 소녀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고풍스럽게 낡아있던 유적의 귀퉁이가 살짝 무너져 내렸다.

소녀는 화려하게 백덤블링 해 착지했지만 어딘가 식은땀이 매달려있는 듯해 보인다.

그리고 소리쳤다.

"집에서 잡던 거 보다 센 거 같은데요?"

그 퇴마인지 뭐시긴지하는 그거 얘긴가 보군. 총알이 안 박힌 댔던가.

"야 그래도 얘는 총알은 박혀. 걔들보다 약할 거야."

그리폰이 돌진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포효한다.

상체는 독수리다보니 흔히 생각하는 독수리의 퓌예에에에 하는 사자후 그 자체다.

하지만 덩치가 덩치다보니 음파병기나 다름없다. 오금이 저리는 초고주파가 석실을 쩌렁쩌렁 울린다.

아무리 담담하던 소녀라도 기가 질린 듯 앓는 소리를 냈다.

"히에엑. 아닌거 같은데요오오!?"

"아 그냥 그런갑다 해!"

"저, 시간을 생각보단 오래 못 끌 것 같아졌어요!"

단검을 고쳐쥐는 모습이 멀리서도 보인다.

늘 보여주던 자신만만한 기색 대신 신중함이 깃든다.

뭐 그래봐야 저 돌진은 소녀가 자력으로는 못 피한다.

포효 소리 사이에 은밀한 파공음이 들린다. 픽하는 소리와 함께 그리폰이 부리를 다물었다.

크와아악

대신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아무리 거대한 괴물이어도 눈에 화살을 맞으면 고통스러워한다.

화살이래 봐야 사이즈를 생각하면 발바닥에 박힌 마룻바닥의 가시 같은 건데.

흠, 말하고 보니 발에 박혀도 끔찍한데 그게 눈에 박히면 난리가 나겠군.

그리폰은 실제로 난리를 피웠다.

게임 적으로는 돌진 패턴을 캔슬한 상황에 해당한다.

그것도 [샤프 슈팅]을 약점에 때려 박은 크리티컬로.

게임이 현실이 되어서 좆같아진 건 사실이지만 마냥 불리한 요소만 늘어난 것은 또 아니다.

0과 1로 이루어져 고통을 모르는 살육머신이던 몬스터들은 이제 없다.

오우거 같은 무지막지한 녀석들도 거목에 새끼발가락을 찧으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군다.

고통.

게임에 없던 요소이며, 써먹기 아주 좋은 요소다.

그리폰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전에 더 큰 고통을 선사해주자.

천장의 밧줄에 매달린 채로 레펠 강하하듯 낙하했다.

독수리의 앞발은 가시를 뽑지 못한다. 바닥을 아작내고 있는 괴물의 위치는 정확히 내가 매달린 밧줄의 바로 아래다.

애초부터 혼자 지상에 남아 어그로를 끄는게 소녀의 역할이다.

초인적인 기초 스탯을 바탕으로 한 이동 속도는 아슬아슬하게 그리폰의 공격을 피해 유인할 정도는 되었다.

사전에 조율된 소녀의 보스 드리블과, 사냥꾼의 급소 공격은 정확한 위치에서 그로기를 이끌어냈다.

그렇다면 내가 그걸 연장할 차례다.

밧줄에서 손을 떼고, 거꾸로 낙하하면 사격 자세를 취한다.

천장에서 거꾸로 떨어지며 보는 괴물의 모습은 자못 장엄하다.

강철과도 같은 깃털, 그리고 그 이상으로 단단한 부리.

정말 미칠듯한 방어력이다.

지금으로선 급소가 아니면 흠집 내기도 힘들다.

하지만 원래 히든보스는 정공법으로 잡는 게 아니다. 그게 되면 히든이겠냐고.

그리폰의 대가리는 독수리.

독수리는 귀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청력이 강조되는 생물도 아니다.

하지만 의외로 시력 못지않게 청각 또한 예민한 포식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게 또 취약점이다.

속으로 박자를 센다. 실패하면 안 된다. 기회는 한번 뿐.

집중하고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슬로우 모션처럼 거대한 머리통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손을 놓은 것이 맞다.

조류의 골격은 사람처럼 헤드뱅잉을 할 수 없게 만들어져있다.

고통에 겹더라도 어느 정도 궤도가 정해진다.

괴물의 관자놀이가 사선에 들어온다.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맹금류의 귓구멍에 최고의 대화수단, 샷건을 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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