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4화
2층 - Lv.70 태양 그리폰(3)
샷건이라는 총기는 의외로 대형 맹수에게는 무력한 편이다.
물론 현대 지구에서라면 코끼리나 코뿔소정도는 되어야 무력하니마니를 따진다.
그냥 야생 동물 상대로의 호신용으로는 떡을 치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리폰 같은 집채만 한 괴물들에게는 정말로 별 쓸모가 없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층에서의 총기는 그 자체로 치트키다.
공포.
이 또한 게임이던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던 요소다.
아니, 사실 있긴 했는데 시스템적 상태이상에 가까운 그런 거고.
여기서 말하는 공포는 원초적인 감정 그 자체다.
공포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미지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이다.
이제 더 이상 데이터쪼가리가 아닌 몬스터에게도 똑같이 존재하는 물건 되시겠다.
저층은 총기를 보기가 아주 힘들다.
마법? 당연히 힘들다.
아즈텍인들이 겪은 것과 같다.
그리폰은 난생 처음 천둥번개가 고막 바로 옆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었다.
내 요술막대기에서 울려 퍼지는 천둥을.
* * *
사냥꾼은 독수리의 상체와 사자의 하반신을 가진 거대한 괴물이 고양이처럼 펄쩍 뛰어 물러나는 모습을 보았다.
날개의 깃털이 바짝 곤두선다.
어딘가 익숙한 그 모습에 그리폰은 고양이과였던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 정도다.
물론 그 와중에도 숙달된 손놀림은 멈추지 않았다.
사냥꾼의 역할은 견제사격이다.
[샤프 슈팅]이 아닌 일반 사격으로는 타격다운 타격을 줄 수 없겠지만 이미 크게 데인 괴물은 온 신경을 집중하리라.
물론 그것은 리더의 플랜 B다.
A가 실패했을 때,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석궁 줘봐."
사냥꾼은 군소리 없이 자신의 옆에 점멸로 나타난 파티 리더에게 석궁을 넘겼다.
사격하는 상황에서 누가 더 맞추기 쉬운 요정의 활을 사용할 것이냐는 나름대로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민첩 스탯이 너무 낮아. 동작이 충분히 정밀하지 못하군.]
하지만 저런 소리를 지껄이며 볼트로 3백 미터 떨어져 앉아있는 파리를 맞춰버리니 자존심은 고이 접어 넣어둘 수밖에 없었다.
날개만 떼려고 했는데 실패했단다.
요정 중에서도 저런 궁수는 없다.
조준보정이 걸려있는 활을 씀에 굴욕조차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다.
리더가 당부한다.
"이거 못 맞추면 보스전은 포기하고 그냥 도망친다."
거대한 과녁인 그리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걸 못 맞출 거라 걱정하진 않는다.
사냥꾼 역시 숙련된 사수다.
목표는 그리폰을 깨우기 전, 이미 설치해둔 폭발 열매다.
* * *
성대한 폭발이 일어남과 동시에 소녀는 달려 나갔다.
통상적으로 2층에서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는 수준의 괴물을 상대하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역할이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아저씨는 그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단언했다.
[눈 하나 못쓰게 되는 거도 중요하고 총소리에 발작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전부 사소한 거야.]
그리폰은 최소한도로 잡아도 레벨 50부터 시작하는 몬스터라고 한다.
현 상태에서 유효한 공격 수단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폭발 열매랑 암습 보정 받은 너의 진심 찌르기 정도?]
무기의 문제였다.
그리폰의 깃털과 질긴 가죽은 덩치만큼이나 비현실적인 튼튼함을 자랑한다.
마법조차 걸리지 않은 질 낮은 날붙이는 제대로 박히지도 않는다.
[원래 여기서 만나면 안 되는 몬스터거든. 꼴에 드래곤의 먼 친척이라고 미스릴 쯤 되는 재질이거나 매직 아이템 정도 되어야 딜이 박혀. 아니면 너처럼 그냥 힘으로 밀던가.]
그렇다하더라도 어느 정도 액티브 스킬의 보정이 없으면 셋이서 잡을 엄두도 못내는 대괴수다.
미궁의 특별한 보정 없이는 아무리 용 써봐야 그리폰의 목을 단칼에 벨 수는 없다.
그냥 날 길이가 부족하다.
그 덩치로 보면 인간이 쓰는 검 같은 건 쇠로 만든 이쑤시개나 비슷한 걸 테니까.
[그러니 일단 기동력부터 빼앗고 아무것도 못하게 무력화 시켜야해. 뒷다리 힘줄 끊고, 날개 죽지도 하나 끊어. 날개는 한 짝만 못 쓰게 만들어도 못 날아.]
마법을 구사하는 것이 아닌 몬스터인만큼 육체능력이 전부다.
제 아무리 튼튼하다고 한들 죽을 때까지 때리면 죽는다.
그렇게 샌드백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만약 실패하면 그냥 후퇴.
위험을 감수하며 보스전을 이어나갈 만큼 여유롭지는 않다.
[그걸 다 하고도 그리폰이 정신을 못 차리는 거 같으면 앞다리도 좀 조지고, 가능하면 부리 안에 폭발 열매도 하나 집어넣고 와라.]
아마 마지막 이야기는 아저씨도 크게 기대하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소녀는 모두 해냈다.
* * *
"이야, 이게 왜 되냐?"
"후후. 저는 못하는 게 없거든요."
"이번만큼은 순순히 칭찬해주도록 하지."
"항상 순순히 칭찬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다행이야."
"에이 참. 부끄러워하시긴."
나는 만족했다.
팀워크라는걸 기대할 만큼 오랜 사이는 아니었다.
허나 오랜 호흡을 맞춘 파티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
심지어 그런 파티라고해서 항상 이렇게 깔끔하진 않다 20레벨이 넘는 사람이 없는데도 파티 멤버 그 누구도 생채기 하나 없다.
업적 시스템에 없는 종류의 일이긴 하지만 위업이라 불러도 큰 무리 없지 않을까.
물론 그리폰은 즉사하지 않고 아직 살아있었다. 우리에게 그런 화력은 없다.
하지만 완전히 기절해 움직이지 못한다.
부리는 [익스플로전]급의 폭발이 속에 일어났음에도 금 정도에 그침으로서 이 괴물의 강인함을 증명했다.
불을 뿜는 생물의 내장은 불에 내성이 있다. 화상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폭압만은 어쩌지 못했다.
소녀가 열매를 집어넣은 타이밍을 생각하면 꽤나 식도 안쪽까지 굴러들어갔다.
거기서 쾅 하고 터진다면.
내장까지 단단한 생물은 드물다.
그리폰은 이제 이대로 두어도 곧 죽는다.
"열매 다섯 발 모두 안 써서 다행이군. 두 발은 남겼어."
"사용처가 있기 때문에 나온 거라고 했던가요? 그러면 이거 잡았으면 끝 아닐까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뭐 다음 층에 못 들고 가는 것도 아니니까."
"좋긴 하네요."
그리폰이 혹여 눈을 뜨더라도 이제는 거동을 하기도 힘들다.
소녀가 확실히 끊지 못해 덜렁거리던 힘줄도 기절해 널브러진 후에 확실히 제거했다.
이제 남은 건 경험치 배분의 문제 정도인데, 이런 상황이더라도 진짜로 막타를 친 사람에게 가중치가 붙는 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2층부터 이렇게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 내가 경험치를 챙기기로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 그리폰은 어차피 죽을 것이기에 나는 유효한 수준의 타격을 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의식이 없는지라 암습 보정이 항상 뜬다.
피를 낸 다음 받아둘 생각으로 포션 병을 꺼낸다.
소녀가 관심을 보여 왔다.
"그거 그렇게 받아둬도 되는 거예요?"
"용의 피는 건강에 좋거든. 먼 친척이어도 효과가 없지는 않지."
"그게 아니라 무슨 효과가 있는 거겠죠?"
"눈치 빠른 꼬맹이군."
치유의 샘물은 그 자체로도 여벌 목숨이나 다름없는 뛰어난 효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미궁의 신들이 가호하는 샘물은 그 자체로도 진한 신성과 마력의 수용액 같은 것이다.
회복이 아닌 다른 효능을 가진 포션 재료로 활용할 수 있다.
그리폰 정도의 피라면 섞여 들어갔을 때 쓸만한 올스탯 도핑 효과를 준다.
만약 진짜 용의 피라거나 세계수의 잿가루 따위라면 짧은 시간 불사나 다름없는 재생력과 어마어마한 스탯 도핑에 추가 데미지까지 부여하는 괴이쩍은 물건이 된다.
그렇다한들 소재가 희귀한지라 만들긴 어렵다.
그런 말을 듣자 소녀도 희희낙락하며 그리폰의 피를 받으려고 했다.
"아냐, 넌 하지 마."
"왜요?"
"다른 게 섞이면 회복효과가 사라져. 그 병이 그래서 중요한 거야. 혼입을 막아주거든."
병도 그 자체로 아티펙트 같은 거다.
소녀는 조금 고민한 후 목숨을 보다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어차피 남의 포션을 못 쓰는 것도 아니니 도핑은 하나로 충분하다.
붉게 물들어버린 포션병이 피의 온도 때문에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게임 시절이라면 아이템 이름이 ‘그리폰의 피’로 바뀌었을 것이다.
* * *
대주술사는 제자에게 말했다.
"들어가는 길이 아주 깨끗하구나."
함정이 있었던 흔적은 있다.
아주 정교한 솜씨로 남김없이 철거되어있다. 심지어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대주술사는 함정 전문가를 가정했다. 민첩 계통의 클래스가 하나는 있으리라.
암습에 주의해야한다.
반면 규모는 생각 외로 적다. 발자국으로 보아 세 명.
제자 오크는 스승의 고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인간이 있었나봅니다."
부정하기엔 바깥의 참상이 요정답지 않았다. 그루터기 요정이라면 좀 더 깨끗하게 정리해뒀으리라.
그들에게 이 숲은 삶 그 자체나 다름없다.
오크 발굴지는 그대로 내버려두기 힘든 숲의 상처다.
"내 그렇다 하지 않더냐. 오크가 되었으면 늙은 주술사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 예."
"쯧쯔."
대주술사는 혀를 찼다.
그저 어린 오크라면 따끔하게 혼을 내겠건만.
오크로 다시 태어났다한들 인간의 위대한 성직자이던 녀석이다.
이제는 지녔던 힘도, 연결되어있던 신성도 모두 잃었지만 그 신앙과 고결한 의지만은 남아있다.
오히려 그래서 반대를 무릅쓰고 제자로 들이기도 하였으니 이 태도를 나무라기도 힘들다.
그래도 조금쯤은 오크로서의 삶에 익숙해졌으면 하는데. 도통 나아질 생각을 않으니 걱정만 늘어간다.
대주술사는 한숨을 내쉰 후 다른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인간이 보이면 죽일 것이다."
"그러시지요."
제자 오크는 차갑게 웃었다.
인간에게 배신당한 성녀는 더 이상 자애롭지 않았다.
대주술사 역시 신경 쓰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원한이라면 그도 못지않게 많다.
앞에 있을 인간을 어떻게 처리할지나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때, 멀리서 무시무시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늙은 오크는 그것이 그리폰의 비명임을 알았다.
"그 녀석들이 유적 수호자도 처리해준 것 같구나. 수고를 덜었도다."
발굴지의 병력들도 나름대로 정예였다. 그러니 그 정도 실력은 될 것이다.
대주술사는 만족스럽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왼손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파직 하고 푸른 전격이 맺히기 시작한다.
제자 오크는 무심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약간의 오판이 있었다.
그리폰의 생명력이 상상이상으로 끈질기다.
이미 내장이 조각나 더 이상 가망이 없음애도 거대한 육신은 끊임없이 피를 뿜어냈다.
혈액 포션을 만들기 위해 조금 낸 피가 웅덩이가 될 정도로 많아졌다.
조금씩 숨이 잦아들고는 있지만 이러다가 의식을 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라레를 풀어둔 오크 야영지를 습격하려면 슬슬 지금이 때다.
이동시간을 생각하면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냥 처리하자."
"좋아요! 하지만 생각보다 쉽던데 경험치를 많이 줄까요?"
소녀는 의아해하면서도 반색했다.
미궁의 시스템에 재미가 들기 시작한 소녀는 얼른 다음 스탯을 찍기 위해 레벨 업하고 싶어 한다.
나는 다시 생각한 끝에 소녀에게 주기로 했다.
시간 내에 제대로 숨통을 끊으려면 얘가 쳐야 한다. 열매를 하나 더 쓰기는 아깝다.
문제는 있다.
정석대로면 파티원 한명이 과하게 강해지는 것은 좋지 않다.
게임 시절에도 관리를 소홀히 하면 배신하는 동료 같은 게 나온다.
하지만 뭐.
그래봐야 이 소녀는 아직 미궁의 뉴비다. 내가 신경 좀 쓴다면 제압 못할 것도 없고.
차라리 지금부터 이 녀석을 데리고 갈 왕국 이후를 대비하자.
거기서부터는 좀 스펙 좋은 뉴비 정도로는 살아남기 힘들다.
미궁 특유의 시스템을 이용한 전투에 익숙해지려면 빨리 레벨업을 시키는 편이 좋다.
거기에 이 꼬마는 신기할 정도로 딴 마음을 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꿍꿍이를 숨기는 바가 있어도 나는 대강 안다.
97년간 치열하게 뒤통수를 맞아보면 그 경험 자체가 빅 데이터라 눈빛만 봐도 눈치 채는 게 딴 마음이다.
말똥말똥한 눈망울에는 언제나 다른 생각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다.
좀 이상하긴 해.
내가 그렇게 믿음이 가는 인상이었나?
괜히 얼굴을 한번 비춰보려고 검날을 닦았다.
그때,
타닥하고 정전기가 튀었다.
아주 오싹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