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15화 (15/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5화

2층 - Lv.185 대주술사(1)

번개에 맞아본 적이 있는가?

당연하지만 나는 있다.

몸에 전류가 흐르는 감각은 그렇다 치고 더 화나는 건 그 전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소름이 돋거나 그런 것과는 또 다른 것이다.

어떤 외력에 의해 털이 바짝 잡아당겨지는 그런 느낌.

정전기가 튀듯 피부가 따끔거리고.

지난 세월이 트라우마 속에서 벌떡 일어나 경고를 해대기 시작한다.

번개를 맞는 것 자체보다는 이 전조가 더 싫다.

내가 아주 좆되었음을 한순간 미리 알게 된다는 점.

바로 그 점이 너무 화가 난다.

그러나 우연찮게도 나는 부자연스러운 정전기를 느꼈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서 위를 향해 뻗는 방전 현상이 아직 없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전조가 있음에도 낙뢰지점이 아직 티가 나지 않는다.

전혀 가벼운 전격이 아니다. 아주 큰 거다.

당연하지만 크니까 느리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초를 몇으로 쪼개어야할지 모를 정도로 찰나의 시간뿐이지만.

나는 조건반사에 가깝게 손을 떨쳤다.

[점멸단검]의 사소한 장점 중 하나로는 도구로서의 활용가치다.

점멸의 매개가 되는 기능을 빼고 보더라도 이 단검은 편리하다.

파괴되지 않는다. 파괴되어도 스킬의 일부기에 재생성된다.

내 몸에 닿아있다면 없애는 것 또한 자유롭다.

그리고 다시 생성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떨친 손끝에서 그 힘을 그대로 받은 단검이 생성되어 난다.

이런 번개를 피하기에는 차라리 공중이 좋다.

대체 뭔 놈의 물리 법칙인지 마법적인 번개는 부도체인 바닥도 타고 흐른다.

다시 인지를 초월한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조건 반사적인 점멸.

아직 날아가고 있는 허공의 단검을 붙잡은 채 내 몸이 공중으로 이동하고.

이미 오랜 습관이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눈과 귀를 최대한 보호하는 방향으로.

다음 순간.

눈부신 빛과 함께 뇌격이 작렬했다.

* * *

소녀 또한 이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에서 번개를 맞거나 피하는 훈련을 시킨 것은 아니지만, 총알이 안 박히는 괴물들 중에선 번개를 떨어트리는 괴물도 드물게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피부로 와 닿는 전조보다는 바닥에 생겨난 현상을 보고서야 이상황을 완전히 이해했다.

딱딱 소리가 나는 파란 불꽃.

번개가 떨어지기 전에 미리 나타나는 가장 확실한 전조.

가느다란 팔다리에 어울리지 않는 괴력이 깃든다.

회피를 위한 근육의 수축이 한순간에 끝난다.

이 또한 소녀에게는 자연스런 반사작용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녀에겐 미궁의 보정이 더해진 탁월한 신체능력 덕에 아주 조금은 더 여유가 있었다.

뇌리를 스치는 사고.

아저씨는 어차피 알아서 할 거다.

조금씩 신앙에 가까울 정도가 되어가고 있는 믿음이지만 자각은 없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

그래도 며칠간 나름대로 정든 중년의 사냥꾼.

피할 수 있나?

아니지.

이 사람은 못 피해.

소녀는 결정했다.

방향을 아직 정하지 못했던 힘이 풀려난다.

소녀는 전력을 다해 사냥꾼의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대시].

아저씨는 회피기만큼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끼고 또 아끼는 것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써야한다.

가해지는 폭발적인 물리력에 발밑의 단단한 바닥에서 돌가루가 튄다.

직감하건데 운동화가 전혀 못쓰게 되었을 것이다.

소녀의 자그마한 몸이 한순간 섬광이 되어 사냥꾼의 복부를 강타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금 늦었다.

뇌격이 작렬한다.

* * *

대주술사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미리 준비된 주술은 그 무엇보다도 파괴적이다.

거기에 술자가 자신이다.

번개를 부르는 그 힘은 마법사라고 불리는 족속들의 [라이트닝 볼트]따위와는 비교하기도 미안한 위력을 낸다.

명중한다면 말이다.

허나 명중률은 번개를 다룬다면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 것이었다.

번개는 피할 수 없다.

피한다면 그건 술자의 조준이 잘못된 경우다.

거대한 유적수호자의 시체 옆에 앉은 인간 사내를 정확하게 노렸다.

그 조준에 오차는 없다.

그렇다면 상대가 정말로 피해냈다는 뜻이 된다.

"번개를 미리 느끼고 피한다니."

그게 불가능하지 않은 전사를 알고 있다.

당연히 흔치는 않다.

지팡이로 크게 바닥을 두드린다.

노회한 주술사의 몸에 깃든 마나가 호응하여 요동친다.

"이건 경시할 수 없겠도다."

* * *

3도 화상 정도는 힐링 포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공기가 타오르며 얼굴을 가린 팔이 끔찍한 꼴이 되었지만 구르다시피 달려 소녀와 사냥꾼의 허리춤의 병을 낚아챘다.

팔이 쇼크로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억지로 통제한다.

포션의 내용물을 부을 시간도 없다.

쨍깡하는 소리와 함께 내던진 병이 박살나 내용물을 쏟아낸다.

응급조치를 하면서도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둘은 살아있다.

어떻게? 소녀의 초인적인 반사신경?

그러나 몸의 일부는 증발했고 남아있는 부분도 탄화되었다.

4도 화상은 구워지다 못해 숯이 된 상태다.

포션이 아니었다면 이건 약간의 시간 후에 죽었다. 이미 신체가 삶을 포기하기 직전이다.

옆에 쓰러져있는 그리폰이 차라리 건강할 지경.

증기 같은 것이 자욱할 정도로 피어오른다. 정상적으로 치유되고 있다는 뜻이다.

숯덩이를 살려낼 수 있는 위대한 치유의 샘물이여.

지체 없이 나 또한 뿌려진 샘물에 몸을 굴린다.

잘 구워진 팔에 회복의 권능이 스며들고 다시 새살이 차오름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큰 문제없이 몸이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온다.

뇌격은 나를 노렸다.

소녀와 사냥꾼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것도 일단은 그 덕일 터다.

일어나기 전에 남은 한 병을 더 챙기고, ‘그리폰의 피’를 입에 털어 넣는다.

워낙 급해서 제대로 삼켜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몸에 끼얹는 것으로도 효과를 낸다.

그리고 뇌격을 날린 상대를 직시한다.

동작과 사고에 오차나 낭비는 일절 없다.

뇌격의 직후부터 여기까지 불과 3초 정도 소비했을 뿐이다.

늙은 오크 주술사 하나와 젊은 주술사 하나.

그리고 오크 장교 다섯이 보였다.

또 대체 뭔가 싶지만, 명백한 현실이다.

가장 큰 문제는 늙은 주술사가 말 한 마디 붙이지 않고 곧바로 주문을 짜 올리기 시작한 점이었다.

기나긴 경험이 이 순간 어떻게 해야 살아나갈 수 있을지를 찾아낸다.

판단은 순간적이며 행동은 즉각적이다.

남은 한 병의 포션을 옆에서 골골 거리고 있는 그리폰의 주둥이 속으로 집어던졌다.

부서져라 던진 것이기에 실제로 박살이 난다.

곧이어 불을 뿜는 생물의 주둥이 속에서 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회복 중인 소녀와 사냥꾼을 짊어지고 오크를 보며 씨익 웃어주었다.

* * *

대주술사는 어떤 주문을 끌어낼지 서둘러 고민해야했다.

인간 사내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그들이 입은 치명적인 타격을 회복해내었다.

그뿐 만이면 괜찮다.

다음 공격에 대응할 수단은 없을 테니.

하지만 그리폰의 입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증기는 다르다.

늙은 오크는 저것이 무엇인지 안다.

유배자라고 불리는 족속들이 가지고 다니는 기적의 샘물이다.

이미 시체인 것에는 아무런 반응도하지 못하며 살아있는 시체에게는 도리어 치명적인 물질.

증기가 피어오른다는 것은 유적수호자가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기나긴 삶의 경험이 지금 이 순간 적절한 수단을 떠올릴 수 있게 했다.

유적의 바닥은 아주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져있다.

쿠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의 일부가 솟구친다.

그리고 땅에서 솟아난 덩굴이 바위를 엮어간다.

그것이 형태를 갖춘 골렘이 되기까지는 몇초 걸리지 않았다.

비로소 집중을 마친 대주술사는 곧바로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폰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다.

그 정면에는 자신과 자신의 병력만이 있을 뿐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괴수에게 자신들의 무리는 어떻게 보일까?

인간 사내는 이미 그리폰이 보지 못하는 사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 * *

보스룸 벽면의 회랑 2층까지 힘겹게 올라가자 소녀가 눈을 떴다.

"으갹, 으끄악. 꺄악."

감전의 여파가 몸에 남아있는 탓인지 경련을 일으킨다.

나는 가차 없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려 했다기보다는 그냥 힘이 후달려서다.

사람 둘을 짊어지고 전력질주를 하는 것은 도핑으로 스탯을 튀겨놓아도 굉장히 힘들다.

"일어났으면 빨리 그 아저씨 짊어지고 꼭대기에서 출구 찾아봐."

소녀는 바깥에서도 전투가 생업이었던 고성능 NPC답게 상황 파악이 빨랐다.

"어떻게 살아있······. 힐링 포션인가? 그래서 그 출구라는 건 뭐죠?"

생각해보니 굳이 던전의 구조에 대해서 설명하진 않았다. 어차피 내가 찾아서 나갈 생각이었으니까.

이건 좀 실책이군. 2층의 상태가 갈수록 심상치 않은 만큼 틈이 나는 대로 지식을 쑤셔 박아 둬야겠다.

"게임에서 던전에 들어가면 어디로 나오니?"

"어, 출구겠죠?"

"그래. 입구로 다시 나오진 않잖아."

소녀의 눈이 이리저리 빙글빙글한다. 약간의 텀이 있었지만 결론에 도달했다.

"출구가 꼭대기에 있다고요?"

"난 알아볼 수 있지만 넌 잘 모를 테니 그냥 아무 벽이나 막 문질러봐. 열리는 곳이 있을 거야."

숏컷이 없는 게임은 똥겜이다. 나는 갓겜을 했다.

······아마도 그랬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말로 빠르게 출구가 있을 확률이 높은 지형 구조를 나열했다.

몇 개 정도는 얻어걸릴 거라 믿자.

소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지도 못할지언데, 눈에서 빛나는 결의만은 굳건하다.

노력하는 꼬마는 귀엽지.

"그런데 아저씨는 그럼 뭘 하려고요?"

"아까 뭐 맞았는지 알아?"

"번개요?"

"주술이야."

"어, 아니. 음. 그럼 오크 주술사?"

"그것도 대주술사급이야. 그리폰을 살려서 상대하게 만들긴 했는데, 내버려두면 질 거야. 원호해야지."

소녀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멍해진 표정으로 묻는다.

"그리폰이랑 편먹고 싸운단 거죠?"

"그래. 경험치 먹기는 글렀으니 일단 탈출할 시간은 벌어야 되거든."

까고 말해서 일반 주술사도 2층에선 과하다.

대주술사급이 여기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중대장의 계급이 대령인 것만큼이나 있기 힘든 일이다.

그러니 그리폰은 죽다 살아난게 아니라 멀쩡한 상태였어도 박살난다.

대주술사급이면 레벨 100은 가벼운 존재다.

소녀는 잘 모르겠지만 시키는 대로 해야겠다는 느낌으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출구를 찾으면 어떡하죠?"

"이거 가지고 있어."

단검을 생성해서 쥐어준다.

[점멸 단검]임을 깨달은 소녀가 얼른 받아들고 위층으로 뛰어갔다.

나 대신 사냥꾼을 짊어진 채다.

그 모습을 일별하고, 나는 화살통을 들었다. 열 발 남짓 밖에 남지 않았다.

볼트는 더 적다.

주무기가 소모품이란 것은 확실히 골치 아프다. 요정살이 있으면 좋겠군.

무한 화살통이란 건 성능 외적으로도 로망이 넘치는데.

괴성과 함께 괴수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주술사가 소환한 골렘이 그리폰의 공격을 받아내며 역공하고 있었다.

동시에 달려든 오크 장교들의 무기가 그리폰의 거죽을 긁는다.

괴수는 날개를 펼쳐 크게 물러났다.

풍압에 늙은 주술사 뒤편의 젊은 오크가 밀려나는 게 보인다.

늙은 오크의 주변에 요동치는 마력이 빛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후우, 좋아. 어림도 없지."

늙은 주술사가 다른 주문을 끌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손끝에 맺히는 번갯불.

뭔지 알 것 같다. 아까 그 번개다.

활시위를 당기고 가만히 기다렸다.

지능 트리의 클래스들은 대체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완성된 마법이나 주술은 끔찍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주문이 완성되기 전에 타 의에 의하여 취소된다거나 하면 그냥 취소만 되는 게 아니다.

캐스팅 실패의 반동이 온다.

번갯불이 점점 형체를 이룬다.

나도 써본 적이 있는 주술이니 완성되는 타이밍은 알고 있다.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까지 계산하여 한계까지 기다린 다음.

시위를 놓는다.

요정이 만든 세련된 화살이 픽하고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결과를 확인할 수 없다.

서늘한 감각이 덮쳐온다.

곧바로 몸을 숙였다.

날카로운 찌르기가 머리카락을 몇가닥 베어냈다.

그대로 뒤돌며 다리 후리기.

도핑으로 강화된 스탯이 레벨의 격차를 메우다 못해 뒤집는다. 이게 용종의 피다.

상대는 균형을 잃어 다음 공격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물러났다.

복면을 두른 녹색 피부의 작달막한 생물이다.

그리고 다시 보는 앞에서 그림자 속에 녹아들듯 스르르 사라졌다.

[은신]이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초반의 고블린 암살자는 오크 전사보다 위험하다.

아무리 나라해도 지금의 레벨에선 보이지 않고 기척도 없는 것들을 상대하면 리스크가 크다.

처리하려면 다른 것의 손을 빌릴 필요가 있다.

어디보자. 원소를 다루는 거 보면 야성 주술사니까······ 그리폰이 브레스를 쏘게 만들 수 있겠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