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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6화 (16/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6화

2층 - Lv.185 대주술사(2)

본디 2층 수준의 몬스터는 레벨이 높아도 20을 넘지 않는다.

말이 20이지 이것도 원래는 첫 테마인 5층까지의 구간에선 중간보스 수준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번 2층에서 정상적인 레벨로 출현한 것은 야생 고블린 뿐이었다.

당장 발굴지의 오크 전사들도 그렇다. 추측컨대 레벨로 25 가량의 스탯이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레벨링과 파밍을 겸하며 오크 주둔지와 요정 마을에 대한 정탐은 꾸준히 해왔다.

그것으로 내린 결론은 적어도 제 3 테마, 그러니까 테마가 세 번째로 바뀌는 10~15층 구간의 능력치를 가진 NPC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수가 없을 경우 대주술사급이 지휘관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 경우 또한 고려하고 있었다.

거기에 아마 주둔지 자체의 주술사의 개체수도 제법 되리라.

그래도 이렇게 기습받을 것까지는 전혀 예상 못했지만······.

어렵군 어려워.

이런 식으로 맵 난이도 자체가 구간에 어울리지 않게 변하는 랜덤 인카운터는 제법 흔하다.

하지만 역시 이런 다양한 인카운터가 얽히고설키는 것은 겪은 바 없다.

있더라도 왕국 이후 구간에서나 있는 일이다.

대전제로서 이 세계는 게임의 규칙을 따른다.

이런 이상한 일이 있다면 반드시 무언가 트리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하다.

유배 생활 97년은 너무 길었나 싶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그림자 속에서 갑작스레 나타나는 단검을 피한다.

동시에 다른 방향에서 단검이 투척되어 날아왔다.

연계가 아주 제대로 되어있다. 단순한 능력치인 ‘레벨’과는 별개로 잘 훈련된 암살자다.

그렇다고 시스템적인 면에서 빈약한 것도 아니다.

[투명화] 마법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레벨 20이 넘는 고블린 암살자는 예외없이 [은신]을 익히고 있다.

지금 계속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은 [은신]의 효과다.

상대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민첩 혹은 지능 스탯의 격차로 찍어 누르거나 상응하는 감지 스킬이 필요하다.

물론 이제야 겨우 레벨 12인 나에게 그런 방법은 없다.

지금의 회피는 순전히 감이다.

암살자는 급소를 노린다.

노리는 곳이 한정되면 꽤 쉽다. 공격의 순간만 감지하면 된다. 어떻게 회피할 수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데 틈만 나면 이가 없는 게임인지라.

날 맞추지 못한 단검이 기둥에 맞고 떨어지며 땡그랑 소리를 낸다.

나는 멈칫했다.

단검의 생김새가 낯익다.

요즘 내가 자주 던지는 그 단검이다.

[점멸 단검]

즉시 단검을 발로 걷어찬다.

타이밍 맞게 점멸한 고블린이 손목을 걷어차이고 키에엑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스탯 분배상 도핑 후의 힘은 내 쪽이 더 높을 것이다.

단순한 발차기지만 관절을 정확히 맞았으니 잠깐은 그로기.

하지만 이거. [점멸 단검]이라니 그냥 레벨만 높은 게 아니라 엘리트 몬스터속성인가.

대주술사급의 호위라면 그럴 만도 하지.

엘리트 속성은 동 레벨의 다른 것들보다 더 강한 몬스터를 뜻한다.

지금 그리폰과 싸우고 있는 오크 장교들도 마찬가지다. 엘리트 몬스터이기에 장교니까.

동료가 타격을 입었음에도 아랑곳 않고 다른 한 놈의 공세가 계속된다.

회피는 가능해도 당장 내 쪽에서 은신감지를 못하니 확실하게 제압할 수단이 요원한 것도 사실이다.

일단 구르는 도중에 화살을 메겨 시위를 당긴다.

대주술사가 다른 주문을 구축하는 모습이 멀찍이 보였다.

번개를 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런 거에 맞으면 그리폰이 절명한다.

활이나 총이나 정조준을 못하면 정확도가 낮아지긴 한다.

허나 여러 번 쏘면 문제없다.

나는 짧은 그로기에 걸린 녀석이 회복하기 전에 공격 두 번을 피하고, 화살세 발을 발사했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 반복했다.

* * *

"이런 일도 똑바로 못하나!"

대주술사가 노성을 내질렀다.

처음의 번개를 날리기도 전에 암살자들은 그린 스킨의 적을 배제하기 위해 출발해 있었다.

대주술사가 명한 것은 아니다.

전사가 될 수 없는 고블린들은 그린 스킨의 톱니바퀴와도 같다.

그들은 누가 명하지 않더라도.

그저 묵묵히 헌신할 뿐이다.

그들의 적이 죽어 스러질 것이 마땅한 순간에도 그 다음을 보고 움직임이 그것들의 미덕이다.

그러니까 인간 사내가 번개로부터 살아남은 것이 어쨌건, 그것들이 깔끔하게 제거해야 옳다.

그런데 어찌 화살이 끊임없이 날아오는가.

제거하기는커녕 찾지도 못한 것인가.

혹은······,

사실은 인간이 더 있나?

그런 생각이 들 지경이다.

오래 묵은 그리폰은 그만큼 위협적이었고 무시무시한 괴수다.

오크 장교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앞발에 맞아 굴러왔다.

비명 대신 괴성인 것도 답다면 다운 모습이다.

제자 오크가 얼른 달려가서 치유하기 시작한다.

"허어, 이런 녀석을 셋이서······."

있기 힘든 일임은 분명하다.

대주술사는 신경질적으로 왼팔의 상처를 치유했다.

주술은 마법과 다르다.

마법이 한 바가지의 강물을 퍼 올려 쓰는 것이라면 주술은 지류를 파낸다.

만약 그 지역에 이미 충만한 원소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비유하자면 강 옆에 마른 물길이 이미 있는 것과도 같다.

술자는 단지 가로막은 둑만 허물면 된다.

하지만 이 거대한 괴수의 거처에 번개의 흔적은 없다.

원소가 없는 곳에서의 주술은 극심한 소모를 요구한다.

처음엔 단숨에 끝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감수한 소모였다.

당시에는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늘.

거듭된 방해로 주문은 번번이 실패한다.

아주 절묘한 순간에만 날아드는 화살은 대주술사씩이나 되는 그의 주문마저 어그러뜨린다.

흩어진 주문은 술자와 주변에 영향을 끼친다.

술자로서의 높은 기량 덕에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반동은 없다.

고작해야 작은 폭발 정도.

애송이였다면 최악의 경우 흩어지는 주문의 반동으로 [심연]까지 추방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복하기 위해 또다시 마력이 소모된다.

같은 일이 몇 번 반복되었을 뿐인데 남은 마력은 이미 만전의 2할에 훨씬 못미쳤다.

앞에서 싸우고 있는 오크 장교들만으로는 힘들다.

되살아난 유적 수호자가 아직 온전한 상태는 아니기에 버텨질 뿐이다.

그가 소환한 임시방편의 골렘도 한계에 가깝다.

"허나, 저 괴물은 불의 기운을 띄고 있으니."

속성 변종은 그 자체로 강대한 원소의 덩어리이며 원소의 흔적이다.

지팡이를 바닥에 크게 내려친다.

대주술사의 지팡이 끝에 번개 대신 불꽃이 피어올랐다.

주술은 주변의 원소를 끌어들인다.

마력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태양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불타오르는 정순한 불의 마력이 그에게 흘러들어온다.

물론 대주술사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그리폰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썩어도 준치라. 유적수호자 씩이나 된다면 그 나름 비장의 수 정도는 있다.

상대가 그 수를 앗아가려고 한다면 참고 있을 리 없다.

괴물은 도끼 몇 대를 허용하며 날개를 광폭하게 휘둘렀다.

밀폐된 공간에서 발생한 소용돌이가 잠깐 동안 전사들을 주춤하게 한다.

짧은 시간의 여유였으나 그리폰은 다음 행동을 개시했다.

무시무시한 양의 공기가 벌어진 부리 사이로 빨려 들어간다.

대주술사의 눈에는 보였다.

괴물의 몸속에서 끔찍한 파괴의 권화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용의 근연종들만이 가지는 교유한 무기.

[숨결].

"제자야. 전사들을 지켜라."

어쩐 일인지 제자 오크가 조금 걱정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면 스승님은 괜찮으십니까?"

"나를 지키라고 하면 값을 치르라할 것이지 않나."

"그것은 그렇습니다만."

맹랑한 제자는 또 그 말을 부정은 하지 않았다.

성녀였던 것의 자애는 약자에게만 미친다.

저 전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약자로 생각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렇기에 기꺼이 손을 내밀 테니 형편에는 좋다.

제자야. 네 녀석은 오크냐 인간이냐.

언젠가는 그 마음을 결정해야할 때가 올 것이다.

* * *

미궁에는 물리현실과는 미묘하게 다른 마법적인 원소가 여러 가지 존재한다.

개중에서도 단순 파괴력으로 으뜸을 고르라면 불과 번개가 박빙이다.

대주술사가 번개를 거두는 것을 보고 나도 활을 거두었다.

더 이상 방해할 필요가 없다.

불 속성 아종인 그리폰은 동일 속성의 주문엔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거기에 브레스 웨폰은 상대적 고레벨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낸다.

여기까지 오면 저들은 이제 서로에게 묶였다.

주술사로서는 번개로 일격에 끝장낼 생각이었을 테니 벌써 단단히 꼬인 셈이다.

"그렇다 해도 좀 이상한데."

소리 없이 나타나는 단검을 고개만 까딱해 피하며 턱을 긁적인다.

"마력이 이상하게 여유로운데."

대주술사인건 알겠다.

하지만 번개의 흔적 하나 없는 유적에서 저렇게 큰 주문을 남발하고도 아직 여력이 있어 보인다.

셀 수 없는 주문 취소로 인한 추가 소모를 감안하면 너무 남아돈다.

게다가 주술사라는 역할 상 주둔지의 치유에 어느 정도는 마력을 낭비하기도 했을 터.

통상적인 ‘오크 대주술사’ 카테고리의 NPC가 가진 마력은 많긴 하되 한계가 있다.

그래봐야 레벨 100 언저리.

허나 지금까지의 소모를 대강 때려 맞춰 계산해보아도 평범한 대주술사의 수준은 초월했다.

"대뜸 원소를 다루는걸 보면 이번 오크는 야성의 신을 모신단 말이지."

전쟁신이 죽음 접미라면 마력 쪽에 보너스가 있다. 야성 접미에는 그런 게 없다.

원소와 골렘. 전형적인 전쟁과 야성의 신을 모시는 주술사의 스킬셋이다.

줄이면 야성 주술사.

결국 나는 마음 한구석에 떠오르고 있던 가정.

본래라면 있을 수 없었던 가능성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냥 대주술사가 아니라 네임드로군."

이 넉넉한 마력통. 레벨 200에 근접한다는 뜻이다.

이 경우엔 네임드의 확률이 낮다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게임 시절의 데이터에 따르자면 아예 가능성조차 없다.

네임드 대주술사는 왕국 이전에는 출현하지 않는다.

확률의 문제가 아니다.

코딩이 그렇게 되어있다.

존재하는 모든 오크 대주술사 네임드는 중요하고도 스케일이 큰 랜덤 인카운터와 관련이 있다.

초반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더 떠오른다.

대주술사 뒤에 좀 젊어 보이는 다른 주술사가 하나 있었지?

깨닫는 순간 머리가 아파 옴을 느꼈다.

일반 대주술사가 제자를 달고 다니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네임드라면 정해진 시나리오의 속이다.

네임드가 제자를 달고 다니는 경우는 하나뿐이다.

왕국 이후 등장하는 랜덤 인카운터.

[배신당한 인간의 성녀]

[히어로 유닛]과 [종족 메인스트림]이 엮여있는 중반 인카운터다.

정확히는 단순한 랜덤 인카운터라기보다도 서브 스토리에 더 가까울 정도로 큰 시나리오인데.

"너무한 건 알았는데 이젠 굉장히 많이 너무한데."

게임 하는데 이러면 꼬와서 리트한다.

기초 스탯 좀 오지는 소녀 NPC 던져줬다고 이런 걸 해결하라고 하면 선을 넘어도 지나치게 많이 넘었지.

이걸 어쩌지?

아찔한 일이다. 이번 회차는 포기해야하나?

······아니 잠깐.

그렇군.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미쳐 날뛰는 확률, 거기에 이젠 아예 원래는 나타나서는 안 될 인카운터.

게임이었던 미궁의 세계는 항상 게임의 법칙을 따른다.

모두 설계된 프로그래밍의 산물일 뿐이다.

이건 그거군.

이 개 난장판인 상황을 발동시킨 트리거.

그게······.

정씨 소녀로군.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몸을 휘감았다.

어딘가 안도감과도 닮아있는 무언가였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의외였기에.

그리고 놀라웠기에 나는 멈칫했고.

하마터면 날아온 단검에 맞을 뻔 했다.

"어이쿠. 큰일 날 뻔."

쿠라레는 고블린의 기본 장비다. 저거에 스치기만 해도 여기서 죽는다.

일촉즉발의 순간을 큰 구르기로 수습했다.

동작이 컸던 만큼 후상황이 나빠진다.

명백한 실수였지만 당장 죽음의 위기는 아니다.

도핑이 만들어준 스탯 격차 덕분에 버틸 뿐이라면 아직 꽤나 여유가 있다.

끊어진 사고에 불쾌해하며 회피에 집중하기를 몇 초간 더.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것이 왔다.

보스룸의 중앙에서 후끈한 열기가 뻗쳐온다.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안다.

재빨리 기둥 사이로 몸을 숨겼다.

열기는 점차 폭풍이 되어간다.

거세게 몰아치는 열풍은 짙은 마력을 머금고 있다.

또다시 기회를 노리던 고블린 암살자 둘의 은신이 통째로 날아간다.

감지 능력이 없다면 보이게 만들면 된다.

이제는 쉽다.

암살자는 기습을 못하면 약하니까 암살자다.

노출된 암살자만큼 무력한 게 또 있을까.

허리춤의 단검이 한 호흡의 동작으로 허공을 가른다.

비행의 궤적이 폭풍에 떠밀리지만 이미 계산했다.

남루한 차림의 고블린 둘은 갑작스런 폭풍에 당황하여 반응하지 못했다.

두 그린스킨의 이마에 단검이 하나씩 박힌다.

암살자답게 최후까지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갔다.

나는 한숨을 돌리며 잠시 끊겼던 사고를 잇는다.

왜지? 갑자기 왜 안도했던 거지?

감정의 흐름을 찬찬히 거슬러 올라가보자.

브레스의 여파가 보스룸을 통째로 달구고 있는 와중이다.

어차피 기둥의 뒤에서 나갈 수 없으니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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