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17화 (17/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7화

2층 - Lv.185 대주술사(3)

"우와아."

소녀는 출구 찾기를 멈추고 약간은 멍하게 중얼거렸다.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나타난 오크 무리와 그리폰이 교전하는 방향이다.

거대한 독수리의 부리에서 대량의 화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마땅히 지금의 장면과 비교할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굳이 떠올리라면 커다란 화재 현장?

불을 어째서 화마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돌도 쇠도 평등하게 화염 속의 그을음이 되어가는 과정.

"저런 걸 어떻게 상대해······."

부리에서 흘러나오는 겁화는 어딘가 유체와도 같은 질감을 가졌다. 끈적하게 흐르는 화염.

불에 탈 물건이 매개가 없음에도 저런 식으로 불이 물처럼 흘러 퍼지는 모습은 생소하다.

소녀는 아저씨의 당부를 떠올렸다.

[브레스에 스치기 만해도 죽는다. 그 불은 끌 수 있는 게 아니야.]

마법이라는 단어에는 환상이 있다.

마법적인 불은 물리 현상으로서의 ‘연소’와는 좀 다른 형태라 아저씨에게 들어 알고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물은 환상이 사라질 만큼 파괴적이다.

불이라기 보단 반투명한 용암이라 해야 할까.

그러나 그 위용에도 불구하고 브레스는 오크무리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늙은 오크 주술사는 지팡이를 치켜들고 있다.

그를 덮치는 화염은 모두 지팡이 끝의 구슬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

남은 여파만이 주변으로 흘러들 뿐이다.

그 여파는 다른 젊은 오크 주술사의 손끝에서 피어난 옅은 막을 뚫지 못했다.

사나운 오크 장교들은 그 속에서 어울리지 않게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소녀의 시력은 오크들의 털이 그을리며 오그라드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곧 들고 있던 병기들도 내던졌다.

나무로 된 자루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저 곳은 지금 몇 도나 될까.

그 아찔한 장면에 소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금 전까지 생각보다 쉬운데 라고 생각한 자신이 멍청한 애송이로 느껴졌다.

이 유적의 수호자는 쉬웠던 게 아니다.

그냥 아저씨의 설계가 완벽했을 뿐이다.

갑자기 자신감이 사라진다.

하물며 저 오크는 뭐지?

주술이란 건 또 뭘까?

봤는데도 잘 모르겠다.

소녀는 입맛을 다시며 기둥 뒤로 숨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도 썩 평안한 곳은 아니었다.

그래도 저런 건 없었다. 있다한들 본 것만으로도 무용담이 될 전설 속의 존재였다.

보스룸 전체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몸에서 땀이 흐른다. 격렬한 전투에도 그다지 없었던 일이다.

피부가 익어버릴 것 같은 열풍이었다.

[이 정도 크기의 보스룸이면 전체가 브레스로 달구어질 거야. 입구로 다시 후퇴하는 게 최선이고, 차선은 최대한 고층의 기둥 뒤다.]

브레스 웨폰의 가능성을 깨달은 아저씨가 반복해서 강조한 ‘공략’의 일부였다.

차선의 경우엔 자신이 브레스의 방향을 유도하겠다고 했다.

대체 무슨 수를 쓸 생각이었던 걸까.

브레스 실물을 보니 그게 가능은 한가 싶다.

아닌가? 저런 걸 쓸 기회도 안 주고 30초 컷했으니 오히려 그 정도는 가능한가 싶기도 하고.

지난 며칠 동안도 충분히 느꼈지만 이번 일은 임팩트가 다르다.

헤실헤실 웃기만 할 일이 아니었다.

아저씨가 점점 뭔가 마법사 같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둥아리에 폭탄 열매까지 밀어 넣으며 자신의 능력에 뿌듯해했다.

거기에 이 쉬운 걸 쓸데없이 설명만 많았다고 생각했다.

외운 보람이 없다고까지 생각했는데.

길게 늘어지던 설명들도 한 치의 불필요함도 없이 눌러 담았던 모양이다.

소녀는 눈가를 불쾌하게 찡그렸다.

우쭐했던 마음을 반성한다.

전투에서 방심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집에서도 늘 강조하던 사실.

[미궁에선 바깥보다 훨씬 쉽게 쉽게 강해지지. 그러다보면 뭔가 착각을 하게 되는 수가 있어.]

심지어 그 우쭐함조차도 미리 경고 받았다.

[명심해라. 여긴 미궁이다. 인간으로서 강해봐야 한계가 있는 땅이야. 내려가면 갈수록 인간 따위는 한 손으로 눌러 죽이는 괴물들이 가득해.]

"아니 진짜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갑자기 멀게 느껴진다. 소녀는 기둥에 기댄 채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짊어지고 온 사냥꾼도 옆에 앉혀놓는다.

이 사람은 아직도 정신을 잃고 있다.

"이게 보통이지."

알고 있다.

소녀는 자신의 특수함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가문은 싸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녀 역시 싸우기 위해 태어났다.

타고난 혈통, 육체부터가 정상에서 벗어나있다.

거기에 혹독한 훈육도 더해진다.

그러니까 그녀가 비정상인 것은 정상이다.

하지만 아저씨는?

기본적인 미궁의 법칙에 대해서는 배웠다.

유배자가 1층에서 부활하면 그 이전의 모든 단련은 제로로 돌아간다.

바깥세상에서 처음 이 미궁으로 끌려 들어온 그 순간의 모습일 뿐이다.

아저씨의 복장은 흰 티에 청바지.

외출할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몸에 단련의 흔적도 없다.

그녀 자신에게도 흔적은 없지만 그것은 특수한 혈통이기에 드러나지 않을 뿐.

그게 아니라면 응당 붙었어야할 근육이나 손바닥의 굳은살이 없다.

사실 굳은살은 있다.

연필이나 펜을 오래 쓰면 생기는 약지 첫 번째 마디의 혹 같은 것.

마우스를 하루 종일 붙잡고 살아야 생기는 손목 아래의 굳은살.

기계식 키보드를 오래 쓰면 생기는 손끝의 굳은살.

타인의 삶을 약간의 단서로도 읽어내는 교육은 받았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정보들.

컴퓨터를 아주 오래 쓰는 사무직 종사자였을 것이다.

그것도 건강 상태로 보아 운동과는 담쌓고 사는 인도어파.

실제로 처음엔 체력도 형편없었다.

사실 지금도 형편없다.

소녀의 기준으로는 이제 겨우 사람 같아졌을 뿐이다.

그게 미궁의 힘 스탯 보정을 받은 수준이다.

바깥이라면 틀림없이 그녀가 지켜야하는 일반인의 모습 그 자체다.

하지만 미궁은 경험을 준다.

그 평범한 육신이 무시무시할 정도의 기술로 모든 것을 극복해낸다.

전투의 전문가로 길러진 소녀로서도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이 평범한 사내의 몸에 배어있다.

소녀는 그래서 너무 놀라웠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얼마나 많은 경험을 쌓아온 것일까?

끝없이 죽고 또 죽는 이 미궁에서 일반인이었던 이가 저런 아득할 지경의 기술을 몸에 익히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단련해봤으니 더 잘 안다.

수십 년으로도 부족하다.

어쩌면 바깥의 평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이상하다.

왜? 가 이상하다.

초로의 사냥꾼이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우나에 가까워져가는 온도는 기절해있기에도 가혹하다.

이게 일반인이다. 보통 사람이다.

끝없는 심연 속에서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

도전은 결코 인간의 의무가 아니다.

안온함과 평화를 추구함은 죄가 아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편이 이 정신 나간 세계에서는 흔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왜?

아저씨는 그 끔찍한 세월을 넘어. 아직도 도전할 수 있는 걸까.

"정말. 정말로. 미쳤어. 나보다 이상해. 우리 집 사람들보다 이상해. 진짜 미친 사람이잖아."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한발 앞서가는 사람. 언제나 달리는 앞에 서있을 것 같은 사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질린 표정으로 보지 않을 사람.

자신감에 드리운 그림자와는 다르게.

소녀는 마침내 완전히 자각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은 더위 때문이 아니다.

입가에 걸린 것은 그 누가 보아도 봄을 예감하고야 말 미소다.

* * *

"후······."

브레스의 여파는 물리적으로도 강력하지만 마력적으로는 더욱 강력하다.

[은신]이 한방에 날아가는 것도 그래서다.

지금의 나는 마력을 감지할 스탯도, 스킬도 없는 상태지만 수없이 다루어본 경험이 그대로 직관이 되어 남아있다.

마력의 흐름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노도와도 같이 닥쳐오는 농밀한 마력에 손가락 끝이 저릿저릿하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볼 시간이다.

직관이라는 것이 어떻게 동작하는가. 그런 것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또한 기를 수 있는 능력이라는 점이다.

나는 원래 전투에 센스가 없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몸치에 가까웠다.

괜히 소울류 게임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게 아니다.

대체 얼마나 많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았는지 셀 수조차도 없다.

그렇게 그냥 지내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냥 인체나 괴물의 골격구조에서 나올 수 있는 움직임을 다 외워버린 암기의 결과긴 하다.

어쨌든 딜레이만 없으면 직관 아니겠나.

그런데 그건 정신적인 면에서도 그랬다.

이 미궁은 은근히 철학적인 곳이다.

지내다보면 대체 왜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나. 삶이란 무엇일까. 죽음 뒤에는 뭐가 있는가. 저들은 왜 고통 받고 있는가.

이 따위의 고찰에 시달리게 된다.

뭐.

까고 말하면 그냥 현자타임에 넋 놓고 있는 것뿐이긴 해.

하지만 답이 없는 질문이라도 사유함으로 얻는 것이 생긴다.

사람이 계속 고민하다보면 결국 무언가 알게 된다.

독심술이라는 건 의외로 사람의 심리를 잘 읽는 재능일 뿐이란 거다.

그러니까 나는 고민 끝에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왜 안도했는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요즘 계속 불편하던 마음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경험의 통찰력은 나 자신에게도 발휘될 수 있다.

하도 오랜만에 드는 생각이라 잊고 있었다.

회차가 오래 되지 않을 때, 떠올렸던 가능성.

묻어 둔지 몇 십 년이 지났을지 알 수 없는 한때의 망령이다.

생각해봐.

이 미궁이 게임일 때를 가정하면.

나는 안다.

모든 것을 안다.

일어날 수 있는 일, 일어날 수 없는 일.

모두 확률의 영역에 속해있을 뿐이다.

언제나 내 상정 범위 내.

그것에 사각은 없다.

없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혹시 이곳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가능성을 보게 되어 버린다.

지금 이 상황은 어떨까?

그동안 소녀에 대해서 명확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본 적 없는 설정을 들고 나온 NPC.

처음으로 출현한 게임 지식의 사각.

내 무의식이 혹시? 하는 불안감을 피워 올린 거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가능성이 하나 있다.

이 게임의 총괄 개발자는 가끔 회사 회식에 나를 부를 정도로 별난 놈이었다.

그러다보면 주워듣는 것도 생긴다.

[넌 절대로 못 볼 인카운터가 있어.]

[아, 또 뭐요? 거지같은 거 좀 그만 만들어. 유저 다 도망가.]

[아니, 네가 못 본다고.]

[왜?]

[100년 제한 있잖아. 그거 다 써 갈 때나 나오는 게 있어.]

[······그거 그냥 배경설정 아니야?]

[아직은 그렇지. 아참, 지금 데이터 마이닝 해도 뭔지 모를 거다. 업데이트가 너무 밀려있어서 언제 패치할지 몰라.]

[야발놈아. 더미데이터만 자꾸 늘리지 말고 밸패나 해!]

대충 이런 느낌의 대화였다.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되살아나는 기억.

난 결국 그게 뭔지는 알지 못했다.

예정 딱지가 붙어있는 게 한두 개는 아니었지.

그러니까 나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자식 내가 모르는 새 패치 했구나. 잠수함으로다가. 이 시펄럼이.

아니라기엔 참 흔한 일이긴 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 세계는 역시 게임이 맞다.

내게 안도를 준 것은 그 사실이었고 그 믿음이었다.

나를 지탱하는 것 또한 그것이다.

옳건 그르건.

* * *

"엇끗꺕뺙!"

"뭐냐 그 비명은 대체?"

"점멸 따이밍이 넘모 별로었어오!"

많이 놀랐나 보군.

그런데 그렇다고 저런 비명소리를 낼 수 있나? 어렵군.

발음도 이상해진걸 보니 혀라도 씹었나. 그 정도하지 않고서는 낼 수 없는 입체적인 사운드다.

"그엑, 혀 띱어떠."

맞구먼.

"출구는 찾았냐?"

울상이 된 소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따 누러봤는데 하나도 안 열렸쪄요."

좋지 않군. 빨리 이 둘을 내보내야하는데.

기둥 사이로 흘깃 대주술사의 방향을 바라본다.

당연하지만 타격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도리어 지팡이 끝에 넘실넘실 맺혀있는 불의 마력을 보면 큰일이 났다.

주술사를 상대로 어쭙잖은 브레스 웨폰은 자살행위가 되는 이유가 저거다.

주술사라는 클래스가 원래 다른데서 힘 끌어다 쓰는 걸 전문으로 한다.

숙련된 술자라면 격이 낮은 브레스 정도는 통제권을 빼앗아버린다.

브레스 웨폰이란게 결국 통제하지 않은 순수한 원소의 격류인 만큼 치명적인 일이다.

회복되었다곤 하나 죽었다 살아났던 그리폰.

방금이 마지막 발악이었는지 힘없이 엎드려 색색거리고만 있다.

그렇다한들 딜 안박히는 오크 장교들만으로 처리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아마 흡수한 브레스를 돌려주겠지.

저런 불덩이 작렬에 맞으면 그리폰은 속성 저항이고 뭐고 재가 되어버릴 거고.

아, 막타만 빼먹을 방법이 없나? 경험치가 너무 아까운데.

욕심을 좀 부려볼까 고민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소녀가 소리를 내었다.

"어? 큰일 난 것 같은데요."

"왜?"

"저 방금 저 늙은 주술사랑 눈 마주쳤어요."

"뭐?"

서둘러 다시 돌아본다.

살아남은 오크 장교들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무기를 집어 들고 있다.

제자 오크가 그 뒤를 따른다.

대주술사는······.

마지막 일격을 그리폰을 향해 꽂지 않았다.

응축된 불의 원소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왜 어그로가 튀었지?

아니지.

번개를 감지하는 것도 보여줬고, 주문 방해도 보여줬다.

확실히 어그로 관리에 실패 할만도 하다.

"아 좀. 제발. 진짜."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이 게임이 그렇지 뭐.

이런 일을 대비해 스킬을 찍기 위한 포인트는 늘 남겨두는 편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