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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8화 (18/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8화

2층 - Lv.185 대주술사(4)

누누이 말하지만 플랜은 하나여서는 안 된다.

내가 유적에 들어서기 전에 생각해둔 플랜은 E까지 있었다.

그러나 실전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죽는 것 또한 계획이다.

그럼 뭐가 남냐고?

플랜에서 파생되는 임기응변이 남는다.

나 대신 죽어줄 계획이 있기에 내가 살아남는 것이다.

시작하자마자 의미가 사라질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계획과 설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뭐, 그렇다하더라도 작금의 사태는 이미 설계의 영역을 많이 초월해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정도 상황은 익숙하다.

여긴 겨우 2층이라는 게 문제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니다.

그저 뭔 시작부터 이러냐 싶은 거지.

궁지에 몰리는 상황 자체는 익숙하다 못해 신물이 난다.

미궁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사람은 경험에서 배우기에 사람이다.

불덩이는 거대했지만 그만큼 느렸다.

덕분에 상황을 정리할 유예는 있다.

여유로울 정도는 아니다. 구체가 아직 식지 않은 대기를 다시 달궈온다.

후끈한 열기에 피부가 익을 것 같다.

저 움직이는 모양새만 봐도 안다. 처음의 번개부터가 나를 직격하는 궤도였다.

늙은 주술사가 경계하는 것은 나다.

[배신당한 성녀]의 인카운터에서 고정 출현하는 네임드 대주술사의 이름은 ‘트동트’.

구면이다 못해 이젠 무슨 소꿉친구로 느껴질 만큼 자주 보던 사이다.

저쪽에서야 전혀 기억 못하겠지.

네임드 몬스터의 외형이 그때그때 변하는 탓도 있지만 오크는 원래도 얼굴로 개체를 식별하기 힘든 종족이다.

좀 더 일찍 눈치 챘으면 좋았을 텐데.

심지어 저렇게까지 나이든 트동트를 보는 게, 또 오랜만이다.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노령으로 스탯은 조금 낮을지 몰라도 머리는 더 잘 돌아간다.

젊은 트동트였다면 눈앞의 그리폰에만 집중했으리라.

좋아. 상황은 알겠고.

그럼 다시 중요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저 친구는 과연 내 클래스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신앙]도 정하지 못한 타이밍에 명확한 클래스가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레벨 200에 육박하는 네임드 몬스터로서 등장한 이상 트동트의 생각은다를 것이다.

누구나 판단의 기준은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

사냥꾼이 아직도 소녀가 뉴비라곤 깨닫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보여준 것이 경계를 사기 충분했다면.

오판을 유도할 수도 있다.

저 오크가 내게서 본 것은, 활의 사용능력과 지극히 유격스러운 위기대처.

다행스럽게도 암살자 계통인 [점멸 단검]은 아직 보여주지 않았다.

지금쯤 대체 셋이서 그리폰을 어떻게 때려 잡았나 어처구니가 없는 와중일 거다.

그러니까 이건 100%다.

트동트는 나를 순수 레인저로 오해하고 있다.

그리고 마력은 이제 정말로 바닥을 보이고 있겠지.

야성 주술사 특유의 전투 지속력은 고려해야겠지만 그건 마법적인 게 아니다.

소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까부터 제법 건방진 발언을 많이 하고 있었다.

사냥꾼을 깨우고 있던 소녀를 먼저 한번 떠보았다.

트동트를 가리키며.

"저거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네?"

자신감이 넘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언제나 이기기만 할 수는 없는 곳이 미궁이다.

지나친 자신감은 결국 언젠가 부딪혀 깨질 계란이라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어······. 아니요. 그냥 도망쳐야 하지 않을까요?"

"오, 좀 사린다?"

오히려 내가 어리둥절할 대답이 돌아왔다.

어딘가 부끄럽다는 듯이 눈을 슬쩍 피하며 고개를 돌린다.

그러면서 손가락은 꼼지락 꼼지락.

흠, 한 번씩 갈궈야 하는데.

그리폰을 잡을 때, 예상 이상의 활약을 했기에 빵빵한 자신감을 바늘로 톡 찌를 적기라고 생각했건만.

이걸 피하네.

하지만 제 스스로 분수를 깨닫는 건 당연히 더 좋은 일이지.

내가 아쉬움에 입매를 비틀고 있을 때, 겨우 정신을 차린 사냥꾼이 신음했다.

"저기 리더, 우리 이러고 있을 시간 있는 거 맞습니까?"

이 남자도 폼으로 12년 유배자를 해온 것은 아니다. 저층에선 충분히 파티 리더를 할 만한 짬이다.

상황 자체에 대한 질문은 없다.

그저 날아오고 있는 불덩이를 어떻게 해야 하지 않냐는 단순한 의문을 표할 뿐이다.

"내가 유도하고 올게. 출구 찾아."

결국 해야 할 일은 똑같다.

다만 탐색의 결과가 있기에 좀 더 정확하게 지시할 수 있다.

"저기부터 여기까지 다 눌러봤는데 없으면 충격으로 열어야하는 문이다. 이렇게 생긴 문양 찾으면 열매로 폭파시켜. 방향은 저쪽일거야."

우스운 일이지만 미궁에서는 그림 실력도 늘어난다.

도저히 입으로 형용하기 힘든 것을 어떻게 전달해야할 상황이 많아서다.

문일 것이 분명한 벽과 문양을 모사하는 것은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다.

소녀는 오히려 활솜씨 따위의 것보다 그림 실력이 신경 쓰인 모양이다.

"와, 진짜 못하는 게 뭐예요?"

"미궁 탈출하는 거."

"그건 남들도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문제지."

가뜩이나 그동안은 자꾸 꼬였다.

예상치 못한 일투성이니 나조차도 꽤 어설픈 결과밖에 내지 못했다.

그래도 2층인데 하는 생각을 너무 오래 하고 있었다.

아예 여기가 20층 정도라고 생각하면 문제없다.

다시 모든 것은 상정 범위의 내다.

"난 저기 처리하고 갈 테니 빨리 회복의 샘가서 포션 채워놔."

"채워서 돌아올까요? 20분은 걸릴 텐데."

소녀의 눈이 이리저리 굴러간다. 약간의 불안감이 느껴진다.

그리곤 비장하게 말한다.

"아니다. 10분 만에 해볼게요.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나는 피식 웃었다.

"그냥 거기서 기다려. 알아서 합류한다."

"어······ 완전 멋있어. 그럼 단검은 주고 가는 거죠?"

"점멸 쿨 안돌았다. 그리고 그거 거리 제한 있어."

로그라이크는 대부분의 경우, 충분한 힘이 있다 해도 사려야 한다.

어떤 불합리가 나타나 나를 다음 회차로 날려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지를 대할 때는 소극적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위축되어있었을지도 모른다.

‘잘 모르는 일이란 거도 꽤 신나고 두근두근하지 않아요?’

소녀가 했던 말이다.

맞는 말이야

그럼에도.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에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 더 쩔지 않아?

2층에 중첩된 인카운터,

일어날 수 있는 상황.

약 20층으로 가정하자.

그러면.

이제 모두 파악했다.

탐색은 끝이다.

* * *

대주술사의 판단은 단순했다.

상대는 궁수다.

다른 보조무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긴 하지만 날아온 화살이 엘프의 것이었다.

미미하게 묻어온 마력을 보면 활도 엘프의 것이다.

어떤 식으로건 요정과 관계가 있는 요정의 우군이다.

거기에 놀라울 정도의 정확도, 그리고 속사력.

"그것들은 죽은 모양이군."

상대가 멀쩡히 살아있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고블린들.

번개의 전조를 감지하며, 암살자에 단독으로 대응한다.

그러다 못해 암살자를 이겨내어 버린다.

그런 궁수라면 생각 이상으로 강한 존재다.

얼마나 많이 스택 된 패시브들이 서로 상호작용중일까?

레벨로 치면 100 이상은 될 법 하다.

유배자라는 것은 그런 것들이니까.

잊을만하면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와서 방해를 해댄다.

불쾌한 외래종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주술사는 여유가 있었다.

상대가 예상외로 선전할 뿐.

바깥에서 온 인간 따위에게 질 정도로 평안한 삶을 살아오진 않았다.

모든 것을 떠나.

주문이 완성된 주술사는 강하다.

공격이건 방어건 짜 올리는 동안 무방비로 노출되어야하는 마법 클래스다.

반대급부로 주문을 발동한 후 약할 리가 없다.

비록 체내의 통제 가능한 마력은 바닥을 드러내려 하나 주술은 본디 남의 것을 빌려 쓰는 것.

그리폰은 그 덩치만큼이나 막대한 원소를 내뿜었다.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있는 이상 위험은 없다.

천천히 날아가는 태양과도 같은 구체는 가장 완전한 공격이면서 동시에 방어였다.

순수한 궁수의 화살은 이런 열량을 뚫어낼 방법이 없다.

허나 그렇다고 순순히 피해낼 수도 없을 것이다.

그 자신이 직접 유도하고 있기에.

이는 서서히 옥죄어가는 죽음과도 같다.

주술사란 이런 것이다.

압도적인 힘.

저항할 수 없는 파괴력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승리의 청부사.

이미 이긴 상황에서 싸움을 하는 것이 진정한 주술사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기에.

"제자야."

"말씀하시지요."

"나를 지켜라."

"값은······?"

"돌아가서 치르도록 하지."

인간이 아니게 된 지금도 규율과 금전의 신의 교리를 따르는 제자.

전직 성녀는 기꺼이 그 거래에 응했다.

약자에게 자비를. 강자에겐 대가를.

오로지 그들의 신과 금전만을 따르는 신앙의 용병이여.

* * *

[점멸 단검]을 공격적으로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이 맞긴 하다.

성능적인 문제보다는 리스크의 문제다.

너무 훌륭한 도주 수단이기에 공격에 이걸 빼는 게 부담스러워지는 것이다.

모 온라인 게임의 앞 비전과도 같은 이치인데.

그것과 고스란히 같은 이유로 자신이 있다면 최고의 수단 중 하나다.

목숨이 가볍다고 한들, 그때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잃는다.

그래서 다들 쉽게 시도하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 겜을 못하는 애들이나 그러는 거다.

소녀에게 굳이 단검을 맡기지 않은 이유다.

이겨야 한다.

이번에는 치고 빠질 생각이 없다.

마력이 온전한 대주술사급 매직 캐스터라면, 심지어 전쟁과 야성의 신을 신앙하는 주술사라면.

정면승부는 객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법 클래스가 다 그렇다.

마력이 없으면 그냥 빈 깡통이다.

강 상류의 쿠라레부터가 이런 일을 대비해서다. 적대 마법 클래스의 마력은 낭비시킬수록 좋다.

미궁은 강력한 개인이 군대보다 더 무서울 수도 있는 땅이니까.

그리고 주술사의 치유는 꽤나 마력을 비싸게 먹는다. 주술 자체가 가성비는 개나 줘버린 주문이라 그렇다.

그래서 극적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생겨난다.

아껴둔 포인트를 투자한다.

조건을 맞춰보자. 필요한 것은 이동기.

우선 활과 샷건은 바닥에 내려놓고.

로그라이크의 운빨은 언뜻 불합리하기만 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르다.

통제 불가능한 변수로만 이루어진 게임은 스트레스만 준다.

그건 결코 좋은 게임 설계라 할 수 없다.

나름대로 갓겜이었던 이 게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변수는 통제 가능한 변수다.

언뜻 랜덤으로만 뜨는 것 같은 스킬들은 전부 조건에 맞춰 확률이 변동한다.

내가 보유한 장비. 현재 내 스탯 상황, 거기에 각종 숨겨진 변수들.

그러다보니 원하는 스킬을 뽑아내는 족보도 있다.

그 중 [대시]를 거의 확정으로 뽑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다른 이동기가 없을 것, 원거리 공격 수단을 보유하지 않았을 것.

이 원거리 공격 수단에는 투척 가능한 단검도 포함되기 때문에 우선 내려놓는다.

[점멸 단검]은 분명 이동기지만 이게 웃긴 게, 쿨다운인 동안은 없는 취급이 된다.

초반부 스킬은 대개 그렇다.

어차피 시간 좀 지나고 나면 안 쓸 스킬이다.

[망각]을 사용하기도 아깝다.

이런 것만은 또 이 잔혹한 세계에 존재하는 게임 적 편의라고 봐야할까.

그런 시스템 하에, 이 게임의 모든 스킬들은 각 계열에 따라 등장률에 보정을 받는다.

활 계통은 민첩이 높을수록 잘 뜨고 근접 전투 계열은 힘이 높을수록 잘 나타난다.

스탯 자체가 높으면 점점 더 급이 높은 스킬이 등장할 확률이 높아진다.

만약 초기 스탯이 좋으면 당연히 그만큼 보정도 더 들어간다.

이래서 이 게임은 초기 스탯이 깡패다.

스노우볼링이 아주 크게 구른다.

스킬의 열매는 마인드 맵의 가지 끝마다 달려있다.

민첩을 뜻하는 녹색 점 3개가 이어진 가지가 하나 보인다.

이게 또 가지에 무슨 색 점이 3개 박혀있냐에 따라서도 드랍 테이블이 달라진다.

민민민, 녹색 점 3개짜리 가지.

그 끝의 열매라면 민첩 계통이 아닌 스킬의 등장률이 극도로 낮다.

이건 특정 스킬 저격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래도 재수가 없으면 이상한 게 나오니 저걸 까기 전에 최대한 민첩을 땡겨두자.

나는 포인트를 사정없이 민첩에 몰아넣었다.

잡다한 패시브는 필요 없다.

가지의 끝까지 포인트를 투자하지 않는다.

민첩의 녹색점만 콕콕 찍고 다른 가지에서도 반복한다.

대충 암산해보면 이렇게 설계하고 [대시]가 뜰 확률은 98%에 약간 못 미친다.

이제 내 인생이 망할 확률은 약 2%.

고블린 암살자들이 쥐어준 경험치가 아니었다면 1% 정도 더 위험해졌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볼까?

모바일 가챠겜에서 뽑기 한방에 5성 혹은 SSR이 뜰 확률이 2% 남짓이다.

봐두었던 민첩 3점짜리 가지를 열매까지 연결한다.

번쩍하고 빛이 깃들고.

[대시]

그래.

이게 게임이지.

* * *

소녀는 아저씨가 마인드맵을 열고 스탯을 분배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아주 짧은 순간 멈칫했다 정도로 밖에 생각했을 뿐이다.

그녀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죽는 거 아니죠?"

솔직히 말해보자.

소녀는 일단 자신이 없었다.

이 막강한 보호자가 혹여 여기서 목숨을 잃고 다음 세계로 날아가 버린다면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

이 아저씨는 죽으면서 배우는 거라고 껄껄대긴 했는데.

안 죽어봐서 모르겠다. 가능하면 죽어보고 싶지는 않다.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아저씨를 바라보는 사냥꾼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엔 그러려니 하는 체념도 담겨있다.

죽어 본 사람이라 그리 생각할 수 있나보다.

소녀는 그럴 수 없었다.

말로만 들어서는 모르겠다.

그녀의 감각에서는 아직 죽음은 ‘끝’이었다.

어느 날인가의 전투에서 결국 돌아오지 못했던 친언니가 생각난다.

거기에.

재시작이라곤 하나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평행세계라면.

그건 평범한 죽음과 다른 것인가?

관계의 완전한 단절.

그건 부활이나 회귀라고 불러도 되는 게 아니다.

전생이나 환생이라고 불러야 한다.

결국 다시는 보지 못하는 사이가 된다는 점에서 평범한 죽음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소녀는 그 사실이.

맹렬하게도 싫었다.

"죽으면 안 돼요?"

드디어 깨달았는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평소처럼 방긋방긋 웃으려고 노력하며 말하고 있으나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무심하게도 뭐냐는 눈으로 슬쩍 바라보고 있다.

그러며 손을 뻗더니.

"가서 옷이나 갈아입어. 힐링 포션으로 복구된 옷은 좀 있으면 바스러져."

"앗."

뚱하게 그거 나름대로 중요한 정보를 알려줬다.

그리고 쓰다듬을 듯이 다가오더니 허공에서 부자연스레 멈추는 손.

"아참, 여자들 머리 만지는 거 싫어했지. 미안, 위치가 딱 좋더라고."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

소녀는 아닌데요. 괜찮은데요. 쌉가능인데요. 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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