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9화
2층 - Lv.185 대주술사(5)
[대시]를 손에 넣은 것은 화구의 이동 속도가 아무리 그래도 달려서 따돌리긴 힘들어서다.
[점멸 단검]은 놀랍도록 편리하지만.
그렇기에 긴 쿨다운을 패널티로 받았다. 회심의 일격을 노릴 수는 있어도 일상적인 회피기로는 사용할 수 없다.
[대시]는 순간적으로 방향 전환이 불가능한 가속을 걸어준다.
쿨다운은 거의 없는 수준.
다만 체력은 몸에 걸리는 물리력에 합당한 만큼 소모하므로 남발할 수는 없다.
아, 나도 스탯 깡패 하고 싶다.
[대시]로 화구의 궤도를 피해 달리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초기 스탯은 너무 먼 후반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게임 시절엔 안 그랬다.
그때는 게임이 진행되며 수치 인플레이션이 시작되면 쉽게 파묻히는 차이였다.
하지만 현실이 된 지금, 스탯이 가지는 의미는 배율일 뿐이다.
미궁의 스탯 보정이 없는 순정 상태의 육체에서 배수로 튀겨줄 뿐이란 것이다.
심지어 이건 종족이 바뀌어도 유효하다.
종족값만큼의 보정이 들어갈 뿐이다.
그래서 정씨 소녀 같은 NPC는 귀중하다.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검사해보면 유전자 레벨에서 평범한 인간과는 차이가 있지 않을까?
간혹 생각해본다.
나도 좀 태생이 초인이었다면 이미 이 미궁을 벗어나지 않았을까 하고.
물론 여기까지 고여 버린 마당에야 큰 의미 없다.
어차피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특별한 계획이나 혈통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노련함과 그에 기반한 피지컬. 그리고 여길 헤치고 나아가고야 말겠다는 칠흑의 의지, 사냥꾼한테서 뺏은 외투.
계속해서 달린다.
쫓아오는 화구는 페이크를 섞은 기동으로 따돌린다.
약이 꽤나 오를 거다.
나도 브레스 탈취해서 쓰다가 몇 번 당해봤거든.
* * *
트동트는 분노했다.
미꾸라지 같기가 비할 데 없는 몸놀림이다.
심지어 중간중간에 화구에 닿을 듯 말듯하며 가지고 놀기까지 한다.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도 몇 번의 시도가 필요했다.
저 인간 사내가 동료의 탈출을 위해 시간을 끈다는 것은 너무나도 뻔한 사실이긴 하다.
그럼에도 트동트는 저 사내를 먼저 족치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오크는 성질이 급하다.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꾸나."
트동트는 거칠게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쳤다.
* * *
이럴 줄 알았지.
그냥 동그랗게 원기옥처럼 굴리다가 도저히 못 맞추겠다 싶으면 시도하는 게 저거다.
태양같이 빛나던 화구는 좀 더 작은 수십 개의 작은 불덩이로 분열했다.
일일이 조작해야하기 때문에 머리에 쥐가 나겠지만 효율적인 방법이다.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말이지.
* * *
트동트는 굳은 얼굴로 지팡이를 붙잡고 서있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입체적인 움직임을 하는 화구 수십 개를 동시에 통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면 전후좌우를 모두 포위한다.
처음에는 그냥 화구에 닿아 불타죽도록 하려고 했다. 당장 마력이 바닥난 것도 꽤 치명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일전에 제자가 말했듯 그는 적이 많다.
하지만 인간 사내는 그럼에도 그 사이를 쏙쏙 빠져나간다.
기둥과 계단 사이, 잠깐씩 시야가 닿지 않는 곳을 활용하여 조작을 무디게 했다.
약간의, 그리고 잠깐의 틈만 생겨도 빠져나간다.
머리카락 정도는 그을릴 만도 하건만 털끝하나 태우지 못한 느낌이다.
트동트는 기시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읽히고 있다.
먼 옛날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 또한 더 나이든 주술사의 제자였던 시절이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치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주술사를 상대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 * *
주술이 오크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나도 당연히 손댄 적이 많다.
마법은 디테일한 조작과 다양한 유틸리티를 활용할 수 있어 편리하지만 위력은 주술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그 화끈한 위력이 마음에 들어 어떻게 해보려고 참 열심히도 노력했는데.
좀 그랬다.
아무리 능숙하고 숙련된 술자라도 빌려온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건 아주 힘들다.
태생부터 마법만큼 마이크로 컨트롤을 기대할 수 없는 주문이다.
모든 게임이 그렇다.
고수가 되어갈수록 수치상의 위력보다는 유틸리티를 높게 평가하는 법이다.
여러 개로 분열 시키는 건 나도 종종 하던 짓이었다.
따로 [천리안] 같은 게 없는 이상 시야 플레이에 농락당한다.
그리고 농락을 당하다보면 슬슬 그냥 폭파시키고 싶을 거다.
회수해서 회복하는 걸 신경 쓸 때가 아니게 되는 거지.
* * *
트동트는 상대를 인정하기로 했다.
회복을 염두에 두고 상대할 녀석이 아니다.
저쪽도 필시 그리폰을 상대로 대단한 소모가 있었을 것.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 유적에 묻히는 건 인간이 아니라 오크들이 되었으리라.
"싹을 미리 잘라 둘 수 있어 다행이로다."
언제고 적이 되었을지 모르는 노련한 궁수를 여기서 끊어둔다면 충분한 이득이다.
이 작은 숲에서 추가적으로 당할 수 있었던 봉변이 무엇이었을까.
트동트는 다시 한 번 지팡이를 내리쳤다.
사방에 튀어 다니던 불의 구슬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트동트는 손을 뻗었다.
화구들이 멀찍이 퍼지며 포위망을 형성한다.
인간 사내의 주력으로는 시간 내에 포위망을 탈출할 수 없다.
"여기까지다."
늙은 오크의 내뻗은 손이 주먹을 쥐었다.
* * *
제자 오크는 그리폰을 상대하느라 바빴다.
좀 더 정확하게는 그리폰을 상대하는 오크 장교들의 보조를 하느라다.
그녀에게 주어졌던 수많은 권능들은 종족이 변함으로서, 존재가 다른 것으로 바뀌며 사라졌다.
섬기던 신과의 연결조차 끊어졌다.
하지만 몸에 배어든 마력의 활용방법은 어디가지 않는다.
신성력이나 마력이나 그 본질은 같은 힘이므로.
여전히 그녀는 방어에 능했고 치유에 능했다.
성녀의 지위까지 올라간 것도 재능이 있어서다.
이젠 인간이 아닌 오크가 되었음에도 그 재능 또한 변치 않았음이다.
주술은 방어와 치유에 지극히 효율이 나쁜 주문이지만 그녀의 타고난 재능은 좀 더 효율적인 형태로 마력을 움직였다.
재능이 없는 이들은 눈으로 보고도 따라할 수 없다.
아직 주변이 뜨겁다. 방어막을 완전히 거둘 수는 없었기에 행동에 제약이 생긴다.
스승은 그녀에게 정당한 대가를 약속했다.
지켜야한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오크 장교들이 빨리 그리폰의 명줄을 끊어야만 여유가 생긴다.
죽음 직전의 짐승은 평소의 몇 배로 흉포했다.
원소를 모두 토해내어 생명이 경각에 달했음에도 거대한 육신에서 발해지는 물리력은 아직도 위협적이다.
이럴 땐 공격에 재주가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다.
큰 폭음이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작은 폭음도 들린다.
오크 장교에게 내리꽂히는 부리 공격을 방어막으로 경감하며 흘깃 살펴본다.
큰 폭음은 인간이 죽는 소리다.
[숨결]은 주술로서도 쉬이 감당키 힘든 힘이다.
그런 열량이 한꺼번에 통제에서 풀려났다.
보스룸의 외벽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잠깐의 시간만 더 흐른다면 통째로 녹아내려 거대한 용암이 될 것이다.
작은 폭음은 무엇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무언가가 허공으로부터 날아왔다.
어딘가 낯익은······ 많이 본 것 같은 날붙이가.
마구 회전하며 날아온다.
단검? 어째서?
방금 폭발로?
왜?
죽은 인간 사내의 소지품인가?
뇌리에 스쳐지나가는 한 가지 기억.
유배자라 불리는 외지인들이 가끔 사용하곤 했던,
단검의 끝에서 갑작스레 사람이 나타나는.
아!
제자 오크는 그의 스승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늘에서 날아오는 단검에 갑작스럽게 인간 사내가 나타났다.
상태가 멀쩡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반신이 타올라 화상으로 뒤덮였다.
걸친 옷에는 아직도 불티가 흩날리고 있다.
치유가 전문분야다보니 부상의 정도는 한 눈에 알 수 있다.
사내의 왼팔은 곤죽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오른팔은 화상만 입었을 뿐, 근육은 상하지 않았다.
저건 의도된 부상이다. 온전히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알고 최소한의 전투력만을 온존한 상태.
광전사와도 같은 형상에 전율하며 제자가 간신히 스승을 밀치고.
서걱하며 전 성녀의 몸에 날붙이가 파고들었다.
* * *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내가 트동트와 그 제자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 종족 메인스트림이랑 엮여있는 친구들이라 여기서 죽이면 득보다 손해가 크다.
일단은 야성 주술사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전에 죽지 않을 정도로만 눕혀두려고 했다.
암습판정으로 목을 살짝 그어버리면 죽지 않는 선에서 완벽하게 무력화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죽겠지만 튼튼한 오크다보니 버틴다.
딱 그렇게 할 예정이었다.
"이런 젠장."
제자가 뛰어든다. 몸을 날려 스승을 지킨다.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다보니 암습이 아닌데도 정수리에 꽂힌다.
이건 아무래도 죽여 버리게 된다.
온힘을 다해 팔을 꺾었다.
그럼에도 등줄기를 파고들었으나, 즉사하진 않았다.
높은 곳에서의 추락, 턱 끝까지 참았던 숨을 토해낸다.
올라오는 것이 있어 뱉었더니 피가 조금 섞여있다.
아, 이거 포션 채워서 가져오라고 할 걸 그랬나?
도핑이 없었으면 지금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넝마가 된 사냥꾼의 외투를 내던진다.
여자애 옷을 벗길 순 없고 면적도 너무 작아, 이걸로 벗겨왔다.
폭발의 순간 사냥꾼의 외투에 마법적 방호를 순간적으로 걸고 끌 수 없는 마법적 불을 대신 받게 만들었다.
후, 덕분에 속이 개판이군.
내 기초 스탯은 다 별로지만 이거 하나는 좋다.
초기 스탯 지능 15, 하나도 안 찍어도 어거지로 간단한 마법 정도는 구사할 수 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은 고통만 이겨낼 수 있다면 말이다.
마법 클래스가 대기만성일 수밖에 없는 이유.
자기가 직접 배워서 구사해야하기 때문.
마법이 없는 세계 출신 유배자는 아주 돌아버린다.
쓰러진 제자를 보고 트동트가 눈을 부릅떴다.
이 친구도 남은 마력은 거의 없을 거고, 지금 공격해야하는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아직 몸에 충격이 남아있다.
"네 이 녀석! 무슨 짓을!"
아끼는 제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늙은 트동트가 취할 행동은 하나뿐이다.
"전쟁과 야성의 신이시여!"
지팡이를 내던지고 분노에 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늙어서 볼품없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주름진 피부가 팽팽하게 펴지고, 체격이 두 배 가까이 커진다.
눈에 붉은 안광이 켜져 이글이글 타오른다.
야성 주술사는 주술 자체에 대한 보정이 없는 대신, 마력이 바닥나면 광폭화하여 강력한 근접전사가 되어버린다.
원거리 공격을 하는 주술사보다는 낫다.
그럼에도 저건 지금의 나로선 절대 정면 상대할 수 없다.
겨우 다리가 움직인다. 단검을 날리며 물러난다.
트동트는 거칠게 단검을 튕겨내고 나를 향해 돌진하려 했으나.
"얘 아직 살아있다? 알지?"
내가 대거를 뽑아 쓰러진 제자에게 겨누며 소리치자 멈춰 설 수 밖에 없다.
"죽기를 바라진 않겠지?"
"이런 개 같은 자식! 더러운 인간 녀석! 쓰레기 같은 외래종이!"
오우거만해진 오크가 안광이 타오르는 눈으로 노려보는 장면은 그 자체만으로도 박력이다.
자주 봤는데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과 함께 웃음이 나온다.
"언제 봐도 제자를 참 아껴? 안 그래?"
"그 아이의 털끝 하나라도 더 건드렸다간 뼛가루로 만들어주마!"
우스운 일이다. 전사들을 소모품처럼 여기는 대주술사가 작달막한 제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간과 대치한다.
왼팔에 감각이 없군. 빨리 돌아가야겠는데.
슬슬 때가 되었나?
조금 옆에서 그리폰이 마침내 단말마를 내며 쓰러지려고 했다.
제자를 겨누고 있던 대거를 휘두른다.
트동트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제자에게 다시 위해가 가해지기 전에 폭발하듯 달려와 나를 제압하려고 들지만.
[대시]
옆 방향으로 스킬에 의한 강제적 이동.
동시에 [대시]로 내 몸에 가해진 물리력을 고스란히 담아 대거를 집어던졌다.
트동트가 아니다. 그리폰을 향해서.
쏜살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대거는 죽음 직전의 그리폰에게 가 닿았다.
그리고 빛이 되어 폭발한다.
내구를 다한 무기가 빛이 되어 흩어지는 순간은 무조건적인 크리티컬 히트가 발생한다.
이 크리티컬은 심지어 방어력마저 무시한다.
단순하게 보이지만 자그마치 3가지 시스템적 보정이 합쳐진 콤비네이션.
제자가 내 손에서 벗어나자 트동트는 다시 한 번 나를 찢어버리기 위해 달려들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트동트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지?
교활하고도 사악한 인간 녀석이 사라졌다.
어떻게?
나타난 수단은 알 것 같다. 자신이 일으킨 폭발을 이용해 [점멸 단검]을 날려 보냈다.
믿을 수 없지만 이 인간은 순수한 궁수가 아니다.
생각도 못한 수단으로 접근해왔다.
그렇다면 보정 없이 그런 사격술을?
하지만 어이가 없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 사내의 몰골이었다.
응축된 [숨결]의 힘이다.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겁화 속에서 단 한 번의 습격을 노리고 목숨만을 보전했다.
타죽지는 않더라도 지옥 같은 고통이다.
진정한 전사? 아니. 이것은 차라리 그래.
광인이다. 미치광이. 승리만을 바라보는 정신병자.
오크이자 주술사인 트동트마저 순간적으로 그 기백에 질렸을 정도다.
그러나, 이 끔찍한 외래종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등골이 서늘해진다. 무슨 짓을 더 벌이려고.
트동트와 다른 오크들은 깨름칙한 위협에 한참을 더 주변을 경계하며 그렇게 서있었다.
* * *
"후욱, 후욱. 이거 쉽지 않구먼."
거동이 불편해지니 이동속도도 늦어진다. 덜렁거리는 왼팔은 적당히 멀어진 후 그냥 베어서 떼어냈다.
몸이 약간이라도 가벼워지니 좀 낫다.
[대시]를 얻으려고 스탯 세팅을 할 때 이미 맞춰서 준비해뒀다.
[은신]은 대시보다 출현 보정이 걸리는 조건이 조금 더 까다롭다.
우선 스탯 배분적으로는 지능이 하나 있는 파녹녹의 가지 끝.
당연히 암살자 스킬이니 민첩 계통이며 민첩이 높으면 확률이 올라간다.
소지 장비는 갑옷이 없을 것과 대거보다 작은 단검이 보정을 준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보정.
빈사상태.
그리폰의 막타를 내가 쳐서 들어온 포인트를 즉시 투자했다.
이번 확률은 아까보다 높아서 아마 99%도 넘어가지 않았을까 한다.
지금 뒤질 거 같은 거 보니 확실하다.
계획했던 거보다 심하게 빈사상태인 모양이다.
"진짜, 아파 죽겠네."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이는 건 익숙하다. 하지만 고통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입에서 단내가 나기 시작하지만 최대한 빨리 걸었다.
트동트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찾고 있다.
마력을 소진했기에 내 은신을 감지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 채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이다.
잠깐이지만 제자를 인질로도 잡았으니 더욱 주변을 떠나지 못하겠지.
그 틈에 내가 챙겨야 할 것은.
애초 목표였던 그리폰이 지키는 물건이다.
트동트와 제자가 봉인을 따러 온 오크에게 중요한 것.
요정이 봉인한 것.
오크의 [히어로 유닛]인 카크리쉬의 봉인.
트동트는 어떻게 대응이라도 할 수 있지만 히어로 유닛은 레벨이 1000부터 시작한다.
정말 손도 쓸 수 없는 상대지만 아마 괜찮다.
트동트가 진입한 시간을 보면 ‘영웅을 기리는 의식’을 치르지 않았다.
그러면 아주 약화된 상태로 튀어나온다. 할만하다.
그리고 내가 그 녀석의 무기를 챙겨갈 건데. 뭐.
문짝을 몸으로 밀어 소리 나지 않게 열었다.
역시 의식을 치르지 않았다.
아직 제대로 봉인이 풀리지 않은 구체 속의 카크리쉬가 보인다.
지금 죽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저 봉인은 폭탄 열매로도 딜이 안 들어가서 어쩔 수 없다.
이 자식 무기는 어디보자.
"이번 카크리쉬는 심연의 신을 섬기나?"
좋은 소식인데 나쁜 소식이다.
좋은 건 내가 챙겨갈 이 녀석의 장비가 개 쩐다는 거다.
암습으로 찌르면 무조건 [추방]을 발동시키는 3회용 단검. ‘아카샤의 눈’
죽이는 게 아니라 [심연]으로 보내버리는 거라 경험치를 못 먹긴 한다.
하지만 눈앞에서 치워버린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는 즉사나 다름없는 미친 효과다.
나쁜 건 이 녀석이 심연의 신이 가진 권능을 사용한다는 거다.
나를 [추방]해버리겠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이번 회차는 정말 미치겠군.
한숨 쉴 기력도 아껴가며 소녀와 사냥꾼이 이미 탈출했을 출구까지 걸어갔다.
트동트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분노의 괴성을 지르고 있다.
통로를 빠져나왔다. 햇살이 아주 눈부시다.
"후우, 좀 쉬고 싶은데 그러다 다시 눈을 못 뜨나."
죽으면 안 되는데.
이거 좀 위험해지기 시작했어.
부상이 생각보다 너무 컸다.
그리폰의 피 도핑이 빠지면 진짜 죽을 것 같다.
일단 짚을 것을 만들자. 나뭇가지를 꺾으려고 숲으로 걷는데.
"흐아아. 아저씨 그게 허억. 뭐예요 팔도 하나 허억. 없고! 10분 만에 흐억.
와서 다행이다."
드물게 지쳐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의 소녀가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이거 빨리. 빨리."
나는 찰랑찰랑 흔들리는 힐링 포션이 반가웠을까, 달리느라 기진맥진한 소녀가 반가웠을까.
어쩐지 안심되는 그 얼굴을 보며.
"고맙다."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