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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20화 (20/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20화

2층 - Lv.225 (1025-800) 카크리쉬

함께 회복의 샘으로 돌아오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힐링 포션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성능을 보여주는 기적 같은 물질이다.

잃어버린 신체부위도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다면 뚝딱.

하다못해 이발을 했다가 실수로 닿아도 머리카락이 복원 당한다.

HP라기 보단 스테미나라고 해야 할 체력까진 복구가 안 되는 문제가 있긴 하다.

하지만 여벌목숨에다 대고 그런 불만을 말할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힐링 포션이 걸치고 있던 의복마저 복구한다는 점은 아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 대상은 갑옷이 아닌 의복이며.

시간제한도 있다.

소녀의 교복이 갑자기 빛이 되어 흩어진 것은 그 탓이었다.

나는 슬슬 때가 되었겠거니 하고 있었기에 눈을 감고 있었고 사냥꾼은 처음부터 벽을 보며 명상 중이었다.

"으아앗! 하필 지금!"

"괜찮아. 우린 아무것도 못 봤거든."

"저는 명상이나 하고 있겠습니다."

소녀가 서둘러 보관해둔 옷을 꺼내는 소리가 난다.

거 빨리 옷부터 갈아입으라고 했는데도 무기손질부터 하더라. 쯧쯧. 누굴 닮아 저렇게 전투광인지.

나는 이미 청바지와의 이별을 끝마쳤다. 이래서 시작하면 옷부터 만들어둔다.

식물 섬유와 동물 가죽으로 그럴싸한 의복을 만드는 건 일상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예의상 눈을 감고는 있지만 나는 어차피 언젠가 부터는 서지 않는 몸이다.

97년의 세월은 육체에는 각인되지 않았으나 정신을 충분히 풍화시킨다.

이런 건 원래 정신적인 문제가 크다고들 하니까 그러려니 싶다.

"눈뜨면 [강격]으로 때릴 거예요?"

그걸 맞으면 죽을지도 모르겠군.

사락사락하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소리도 전혀 야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게 이미 50년쯤 전이던가.

"다 입었어요. 눈 뜨셔도 돼요."

약간은 부끄러운지 시선이 엉뚱한 곳에 가있다.

교복이 아닌 모습은 처음이다.

하지만 잘 어울린다.

그루터기 요정의 의복은 본디 성인보다는 아이 같은 분위기에 더 알맞다.

발랄함과 싱그러움이 함께하니 교복보다도 낫다.

훌륭한 유품을 남긴 요정 아가씨에게 묵념.

"키 차이가 나서 그런지 좀 크네요."

요정이 170 가까이 되는 모델 기럭지였으니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여긴 생각보다 더 많이 남네요."

"흠, 확실히. 가슴 쪽은 끈으로 좀 묶어둬야겠는데? 허전하군."

"아아아, 말 안 해도 알거든요!"

소녀가 달려와서 때렸다.

아팠다.

* * *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아니, 사실 정리할 것도 없다.

"이거 못 깬다."

2층에 와서 소비한 시간이 벌써 4일이다. 폭탄 열매도 두발, 요정제 화살도다 떨어져 직접 만들어 써야한다.

애초에 석궁과 활 둘 다 슬슬 내구도를 보존할 필요가 있다.

파티에 원거리 무기가 없다는 건 재앙의 다른 말이다.

비장의 수라면 샷건이 있긴 하지만 버드샷 다섯 발로 카크리쉬를 잡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리지. [히어로 유닛]이 괜히 히어로가 아니다.

남은 폭탄 열매 두 발을 다 뱃속에 쑤셔 넣고 터뜨려도 안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지. 잠깐만.

혹시 아닌가? 약화되었으니 그러면 죽을 거 같기도 하고.

잠깐 혹할 뻔 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트동트가 의식을 완전히 생깠는지, 하는 척은 하다가 들어왔는지를 모른다.

후자면 그냥 망한다. 그럼 레벨이 500밖에 안 깎이는데 그래도 500이다.

500렙 마법사면 그나마 이빨은 박힐 건데 카크리쉬는 전사다.

전사는 튼튼하다.

뭐 어떻게 약화된 카크리쉬 하나만 족치라면 모르겠으나, 그게 수지가 맞는지를 떠나서 리스크도 크다. 평범하게 클리어하기는 여러모로 불가능해졌다.

서든데스라도 없는 층이었으면 또 모르긴 한다. 갉아먹다보면 어떻게든 되니까.

하지만 세력전은 서든데스가 달려 나온다.

3일 안에 무슨 짓이건 해서 한쪽을 완전히 밀어버리는 것은 그냥 불가능한 게 맞다.

소녀가 고개를 갸웃 하더니.

"우리 좆됐어요?"

"좆이라니. 고운 말 쓰자."

"음경 되었군요."

"아니, 말을 말자."

사냥꾼이 허허 웃는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2층이었습니다. 다시보지는 못하겠지만 며칠간 즐거웠습니다."

소녀의 표정이 아주 시무룩해졌다. 그러다 못해 울먹울먹해진다.

"넌 왜 그러냐?"

"끝이에요? 진짜로?"

코를 훌쩍이며 일어서는데 기백이 두렵다. 왤까. 맹수를 눈앞에 둔 것 같은 이 기분은?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파티원들의 인식을 정정해줘야 한다.

"못 깨니까 스킵할거야. 뭘 끝난 거처럼 말하고 있어."

두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네?"

"네?"

작전개요를 설명하자 듣고 있던 사냥꾼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심연]이란 게 뭡니까 대체."

"기본 레벨 500부터 시작하는 괴물들이 득실득실하고, 빛도 잘 안 들며, 시공간이 자주 뒤틀려서 빠져나갈 기약도 없는 번외 계층."

사냥꾼은 한숨을 쉬곤.

"거길 가는 게 맞는 겁니까?"

걱정스럽게 묻는다.

말로만 들으면 자살하러 가는 것 같긴 하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서든데스는 백 퍼센트 죽는데 거긴 생각보다 피해 다닐 만도 해."

"알겠습니다······."

사냥꾼은 아주 미심쩍게, 아니 사실은 그냥 전혀 안 믿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진실을 말하는데 믿어주지 않는다니. 슬픈 일이군.

"그냥 그거 쓰면 안 됩니까?"

사냥꾼이 말한 그거는 내 허리춤에 흉흉한 보랏빛 기운을 내뿜고 있는 단검이다.

소녀가 보자마자 눈을 빛내었지만 내가 지지라며 쫓아냈다.

이건 너무 위험한 무기다.

"확실히 이걸 쓰면 더 쉽게 [심연]으로 날아갈 수는 있는데."

암습판정으로 찌르면 3번까지 [추방]의 효과가 발동한다.

[추방]은 [심연]이라는 어둡고 축축한 곳으로 상대를 강제 이동 시키는 주문, 혹은 신의 권능이다.

"두 명은 그렇다 치고. 마지막 하나는 대체 누구한테 암습을 맞아?"

암습이란 거 맞으면 엄청 아프다. 권할만한 행위는 아니다.

사냥꾼은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무는 듯 하더니.

"그래도, 지나치게 위험한 계획 아닙니까? 그 오크가 다른 생각이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하하, 내가 그 친구를 몇 년 동안 봐왔는데. 이 사람이 지금 뭘 모르는구먼.

"걱정 마. 나 카크리쉬 팬티 색도 알아."

심연의 신을 섬기는 카크리쉬의 팬티는 보라색이다. 진짜다.

* * *

카크리쉬는 그린스킨 팩션의 전사계열 [히어로 유닛] 중 제일 자주, 그리고 흔하게 등장하는 고정 NPC다.

스펙은 모난 점 없는 무난한 육각형 스탯의 전사 NPC.

힘 좋고, 맷집 좋고, 전투 센스 또한 좋다.

거기에 몹시 신중하다.

사자는 토끼를 잡는 데에도 전력을 다한다고 하던가.

이 격언의 모범사례를 꼽으라면 그게 바로 카크리쉬다.

전투적으로 특별히 강점은 없을지언정 단점도 없다.

체급자체가 밀린다면 가장 곤란해지는 타입이다.

승산이 없다는 것은 그런 사실에 기인한다.

이 평범한 고렙 전사에게, 굳이 특기할 점을 꼽자면 신앙을 소속 팩션에 따르지 않고 그때 그때 랜덤으로 들고 나온다는 점.

그리고 항상 어딘가에 봉인되어있다는 점이다.

설정 상으로는 이 오크는 1천 년 전 요정전쟁의 참가자다.

요정들은 도저히 신중한 카크리쉬를 쓰러트릴 수가 없어 함정을 파서 봉인하는데 그쳤다.

미궁의 배경 설정은 그때그때 달라지는 게 보통이지만 역사라면 고정적인 요소도 많다.

옛 요정제국을 무너뜨린 그린스킨의 침략은 언제나 고정적으로 깔려있는 배경이다.

카크리쉬는 그 시절의 사람, 아니 오크다.

즉, 총이란 걸 본 적이 없다.

요술막대기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에게 언제나 놀라움을 선사한다.

나는 그 사실을 노렸다.

사냥꾼은 긴가민가해한다.

하지만 과거 회차에서 시도해본 적이 있고, 항상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고 하자 겨우 납득해주었다.

작전은 간단했다.

트동트는 당연하게도 동족의 영웅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애초에 장비를 내가 털어갔는데 말하지 않아도 먼저 물으리라.

거기에 트동트는 내가 유배자임을 알고 있다.

"그러면 일단 우리를 찾아다닐 거란 말이지."

회복의 샘은 토착 NPC가 자력으로 발견할 수 없는 공간이다. 시스템적으로 그렇게 설정되어있다.

하지만 기적 같은 성능의 힐링 포션만은 저들도 안다.

유배자를 겪어보았다면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여벌 목숨에 대하여 모를 수가 없으니까.

토착 NPC들은 대부분 유배자를 싫어하지만 그들의 소지품까지 싫어하지는 않는다.

사용할 틈도 없이 죽은 유배자의 품에서 발견되곤 하는 기적의 샘물은 엄청나게 귀한 것이다.

소녀가 그 발상에 놀라워한다.

"그 친구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로또 당첨급 보상을 주는 몬스터일 수 있단 거 네요?"

"거 왜 그런 말 있잖아. 죽이려는 자는 죽을 각오도 되어 있어야한다는 거."

"전 언제나 각오되어있어요."

"그런 거지 뭐."

층의 분위기마다 다른 거다.

여기만 해도 그린 스킨은 기꺼이 유배자 사냥을 하겠지만 그루터기 요정들은 아무 생각도 없으리라.

소녀가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그런데 그러면 팔아버리는 유배자도 있지 않나요?"

"있지. 그래서 좀 더 가면 힐포 들고 다니는 토착 NPC를 보게 될 수도 있어."

예리한 지적이다.

1인당 한 병, 병 자체가 아티펙트.

이런 조건이 아니었다면 더 이상한 일이 벌어졌으리라.

유배자 중에 물장사하는 김선달 같은 놈이 생겼겠지.

어찌되었건 충분히 호전적인 NPC들에게 유배자란 귀찮은 외래종이긴 하지만 동시에 이득이 짭짤할 수도 있는 사냥감이다.

"그러니 유인하기는 쉬워."

나타나서 엉덩이 몇 번 흔들어주면 잡겠다고 쫓아와 수색을 시작하겠지.

그리고 미지의 공포를 보여주자.

요술막대기 빵야빵야!

우습지만 저층의 총기는 항상 이런 의미에서 고성능이다.

늙은 트동트도 총에 관해서는 잘 모를 거다.

카크리쉬는 알 리가 없다.

그럼 신중하기로 이름 높은 전사는 미지의 무기를 든 상대와 조우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할까?

"저기 왔군."

유적을 까버린 이상 요정 마을이야 어찌되어도 상관없을 테니 회복의 샘 주변을 맴돌 것이다.

지금 앞에 나타난 중후한 존재감은 틀림없이 [히어로 유닛]이다.

사냥꾼과 소녀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둘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어려울 건 없지만 타이밍 자체는 한번 뿐이다.

"거기 누구냐!"

카크리쉬의 예민한 감각이 숨어있는 우리를 포착했다.

걸걸한 목소리가 십년지기마냥 친숙하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바로 뛰쳐나갔다.

그대로 샷건을 갈긴다.

연속된 격발음.

틀딱 오크에게는 너무나도 낯설고 위협적으로 느껴질.

카크리쉬가 미간을 찌푸린다. 모르는 것을 보았을 때의 습관이다.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샷건을 퍼부었다.

얼마 남지 않은 탄이 금세 다 떨어진다.

조준이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강철처럼 단단한 고레벨 전사의 육체에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는 없다. 생채기 정도나 낸다.

카크리쉬는 실제로 입은 별 것 아닌 피해와 알 수 없는 상대의 공격 수단 중 무엇을 우선순위로 둘까 고민하는 듯 하더니.

"심연의 신이시여!"

[추방]을 시전 한다.

가장 확실하게 상대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

신중한 자에게는 분명 옳은 선택으로 보였으리라.

유배자도 아닌 입장에서 당장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하하하, 이 쫄보 녀석 믿고 있었다. 다음에 보자!"

공간이 일그러지며 나를 심연으로 추방하려는 구멍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전에 계획한대로 소녀와 사냥꾼이 얼른 몸을 날려 나를 붙잡는다.

"뭣? 무슨 짓이냐!"

오히려 카크리쉬가 당황한다.

아니 거의 황당해한다.

아주 위험한 곳으로 추방해버리는 주문인데 그 속으로 뛰어든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눈앞의 시야가 흐려진다.

세상이 뒤틀리고 온통 무너져 내린다.

다음 층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주변이 어둠으로 가득 찼다.

[TIP : 심연은 아주 위험한 생물 혹은 생물 아닌 것들의 소굴입니다. 이 음습하고 축축한 혼돈의 땅에서 살아 돌아가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심지어 이곳은 시간의 흐름마저 이상합니다!]

시스템상의 문제인데.

본래라면 심연에서 탈출해도 2층으로 돌아오고 만다.

하지만 서든데스가 일어나는 3일이 지나고 탈출하면 어떻게 될까?

돌아갈 이정표가 없다.

그냥 3층에 스폰 된다.

이게 계층 스킵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대체 이 짓을 왜 2층부터 하고 있나 조금 회의가 드는군.

이런 게임이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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