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1화
???층 - 심연(1)
[심연]은 미궁이라는 광대한 누더기 세계에서 쏟아져 내리는 부산물들이 쌓이는 땅이다.
사실 땅이라고 부르는 것도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심연]은 깊은 곳으로 다가갈수록 그 이름에서 오는 이미지대로 어둡고 차가운 공간이 되어간다.
하지만 겉을 살짝 핥고 있는 수준인 지금의 우리에게는 그저 눅눅하고 음습한 땅에 불과하다.
"으으으으······."
소녀가 불안하게 달라붙어 온다.
내 오산이라면 오산이다.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어도 ‘와, 시체가 잔뜩!’ 같은 소리를 지껄일 녀석이라 생각해서 방심했다.
"저 방금 너무 소름끼쳤어요."
흐물흐물하게 지나가는 촉수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소녀가 몸서리친다.
파들파들 떨리는 몸은 연기가 아니다.
"저는 [심연]이 처음입니다만. 절대 두 번은 오고 싶지 않습니다······."
사냥꾼은 안색이 좀 별로긴 해도 큰 문제없이 적응하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소녀였다.
"눈 감고 있을게요. 필요하면 말해요."
달라붙어서 눈을 꼭 감더니 한다는 소리가 저런 거다.
뭔가 좀 생긴 게 끔찍한 것들이 돌아다니는 땅이긴 한데 그런 쪽의 내성이 낮을 줄이야.
게임 시절이라면 진작에 만능의 상태창이 알려줬을 정보였다. 젠장.
대충 혐오스러운 것을 견디지 못함. 이런 말이 적혀있었겠지.
어떻게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소녀를 진정시키고 이동을 시작했다.
필요하면 말하라곤 했지만 아무런 도움도 될 것 같지는 않다.
눈을 꼭 감고 내 옷자락을 붙잡고 더듬더듬 움직이는 모습이 꽤 볼만하다.
바닥이 울퉁불퉁한데 눈을 감고도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은 더 볼만하다.
당장 딱히 주변을 지나다니는 괴물이 보이는 건 아니지만 소녀는 눈을 뜨려고 하지 않았다.
사냥꾼이 우욱 하고 헛구역질을 한다.
"이건 대체 뭡니까?"
"안 돼, 말하지 마요. 상상되니까. 제발."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대충 보니 어딘가의 층이 역할을 다하고 붕괴하며 쏟아져 내린 파편이다.
언데드가 있었나본데 늪지대의 구울 이었는지 아주 흉악하게도 썩어있다.
역겹고 걸쭉한 게 흘러내린다.
사냥꾼도 사람의 팔이었던 것이 흘러내리는 걸 보며 어떻게 알아본 모양이다.
"움직이진 않습니까?"
"[심연]까지 추락하고도 활동할 수 있으려면 진짜로 드래곤 쯤 돼야 할 걸?"
"뭐야, 뭐가 움직인다는 거야. 말하지 마. 으으."
너무 불쌍해보였기 때문에 천조각을 돌돌 말아 귀에 꽂아주었다.
우선 하룻밤을 지낼 거점 같은 곳을 찾아보자.
밤낮을 알기는 힘든 곳이지만 말이다.
* * *
형편 좋게 신을 모시는 제단이라도 발견할 수 있었으면 했지만 역시 그렇게 쉽지는 않다.
쏟아져 내린 무수한 층의 파편들 사이에서 그럭저럭 멀쩡한 것을 찾아내어 들어갔다.
내부는 기대보다 훨씬 멀쩡하다.
사냥꾼은 반파된 그것의 외형을 보고 미심쩍어했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더욱 의아해했다.
"······SF?"
"어딘가의 층에 우주 콜로니 맵이 나왔었나본데. 그 사람들 너무 행복했겠는걸?"
형태로 보아 산소가 제한되는 타입의 맵이었을 거다.
이게 심연으로 떨어진 거 보면······.
"역시 실패한 맵이군."
죽은 유배자들의 시체가 보인다. 생명은 없으나 장비는 있다.
식량도 있으면 좋겠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가 뒤적이기 시작하자 사냥꾼도 따랐다.
만듦새가 조잡한 육포가 약간 발견되었고 그럴싸한 검도 있었다.
더블 배럴 샷건 정도가 아닌 아주 본격적인 소총도 하나 있었는데 파손되어 쓸 수는 없었다.
심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대부분의 물건이 그렇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단순한 물리적 낙하만은 아니겠거니 생각한다.
"전 이런 맵은 본적도 없습니다. 말로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냥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나는 웃었다.
"왕국 이전엔 그런 거 잘 안 나오지. 이 시체들 아마 왕국에 도달한 유배자들일 걸?"
장비의 때깔이 다르다. 다 박살나서 쓰지는 못하겠지만.
심연에 떨어지는 모든 것들이 그렇다.
움직이던 것들은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있고, 잘 작동하던 물건들은 그게 뭐였는지 알아만 볼 정도로 아작 나있다.
"이런 거 가지고 가서 모루에서 뭘 만들 수 있으면 좋겠는데. 들고 다니긴 힘들 거 같고."
부서진 장비들을 재활용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심연]에서 탈출할 때까지 재활용하겠다고 폐품을 들고 다니는 것도 웃기다.
"일단 좀 쉬자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오크들 발굴지를 습격하고, 유적을 뒤적이다 그리폰을 쓰러뜨렸으며, 번개도 좀 맞았다.
그게 다 하루가 지나기 전에 일어난 일이니 피로감이 크다.
다들 한번 죽었다가 힐링 포션의 파워로 되살아난 거니 체력은 더욱 떨어져 있으리라.
비교적 멀쩡한 파편이었기에 문짝도 남아는 있다.
심연의 괴물들은 의외로 이런 곳까지 들어오진 않는다.
"자, 물이 얼마나 버티려나?"
2층은 식생이 풍부한 숲이었다. 그런 맵이 시작부터 걸렸는데 식량비축을 참으면 사람이 아니다.
가능한 많이 만들어둔 말린 고기와 과일들로 식사를 한다.
섭취할 칼로리는 크게 부족하진 않다.
하지만 물이 없다.
회복의 샘물, 그러니까 힐링 포션을 물 대신 써야한다.
정규 층이라면 회복의 샘이 있어 식수 걱정이 없는데 [심연]은 그렇게 친절하지가 않다.
한 숨 자려고 적당히 바닥에 모피를 깔고 누웠다. 혼자 쓸 만큼 형편이 좋지 않으니 소녀를 손짓으로 불렀다.
이번에도 내게 꼭 달라붙어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연기다.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우주 콜로니였던 파편은 멀쩡한 방의 형태를 하고 있었고, 소녀가 질색할 만큼 혐오스러운 무언가는 없다.
시체는 아마 혐오의 대상에 포함이 안 되는 것 같고.
대충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아서 안아줬다.
품안에 쏙 들어오는 몸집이다.
옷이 사이즈가 안 맞으니 어른인 척 하는 어린애 같아서 귀엽다.
실제로도 어린 애는 맞지만.
거기에 딴에는 안 보이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 입가가 히죽히죽 웃고 있다.
모르는 상황은 아니다.
연애감정인거 같은데. 왜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순종적이었는지 비밀이 하나 풀렸다.
흔들다리 효과 같은 건가.
별로 깊게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어려우니까.
이런 종류의 호감은 이용······ 이라고는 말하지 말자.
지금의 내가 그런 감정을 제대로 받아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호응해줄 수는 있다.
팔로 등을 살짝 감싸려 했다. 그러자 소녀가 팔을 내밀어 내 손을 붙잡았다.
그대로 끌어당기더니 머리에 올린다.
허허 거참.
쓰다듬어주니 흐흐흥하고 웃는 소리가 아주 낮게 들렸다. 본인은 연기에 열중해 새어 나간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래 뭐, 네가 좋다면야.
* * *
좋지 않은 기척에 눈이 떠졌다.
우르릉 하고 바닥이 진동한다.
뭔가가 근처를 지나가고 있다.
쿵 쿵 하는 발걸음 소리.
다들 일어났나 하고 보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정신력의 문제라고 하면 꼰대 같지만 실제로 그렇다.
몸이 죽을 것 같이 피곤해도 움직이고 눈이 떠지는 건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래도 별일이라고 할 것은 아니었다.
심연의 신의 제단이 지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등에 신전을 지고 있는 거대한 골렘이다.
저게 휴식기라면 위로 올라가서 지낼 생각도 하겠지만 움직이고 있는 거 보니 글렀다.
신앙을 심연의 신으로 삼아 빠져나간다는 선택지는 사라졌다.
그랬으면 카크리쉬를 다시 만났을 때, 상당히 어색한 상황이 되었을지도 몰랐을 텐데.
소녀는 완전히 곯아떨어져있다. 슬쩍 내려놓고 빠져나와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다.
힐링 포션 덕에 몸에 흔적은 없고 기억도 잘 안 나겠지만 거의 몸의 절반이 날아갔다.
체력이 많이 축났을 것이다. 사냥꾼도 눈을 뜨지 못한다.
2층에서 가져온 짐 중에는 모피가 꽤 많았다.
쓰고 남은 아교도 꽤나 있다.
문짝이 찌그러져있어 빈공간이 좀 있다.
심연의 괴물들이 평소에야 이런 좁은 공간에 들어오지 않지만 신전이 지나갈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밟히지 않기 위해서 사방으로 숨어드는데 틈이 있어 작은 것이라도 들어오면 끝이다.
다 죽는 거다.
구석구석 빈틈없이 꼼꼼하게 막아뒀다. 아교를 녹이기 위해 살짝 열을 내는 마법을 썼다가 토할 뻔했다.
나 역시 체력이 많이 바닥났다.
겨우 막아두고 한숨 돌리고 있자니 쿵쿵 거리는 소리가 더 가까워진다.
슈르륵하는 소리도 나기 시작했다.
뱀 같지만 그럴 리는 없고 뭔가 촉수 같은 것들이 온통 뒤엉킨 덩어리 같은 괴물일 것이다.
슬쩍 문짝을 더듬더니 포기하고 다른 은신처를 찾아 떠난다.
스며들 틈이 있었다면 흘러들어왔다.
여기선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당분간은 호러 서바이벌 게임이다.
장르가 휙휙 변하는군.
* * *
"다 뒤섞였네."
"매일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매일인지도 몰라. 그냥 자기 마음대로지. 여기서의 하루가 바깥에서의 며칠 일지는 아무도 모르거든."
빨리 나가는 편이 좋긴 하다. 제한 시간은 주관적으로 흐르기 때문에 손해 보지 않지만 홀수 층에 늦게 도착하는 것은 위험하다.
소녀는 참을성 있게 아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사냥꾼이 못 볼 때, 슬쩍 묻는다.
"홀수 층이 토착 NPC들 말고 다른 유배자들과 만나는 곳이라고 했죠?"
"제대로 기억하고 있네."
이제 그냥 별 부담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소녀는 후후후 하고 웃었다.
간밤에 골렘이 지나갔는데 니들 아무도 안 깨더라,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끔찍한 광경이 사방에 널린 곳이라 알아둬서 멘탈에 좋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더러운 곳에서는 정신력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해진다.
게임 시절에는 까라면 까고 죽으라면 죽던 동료 NPC지만 이젠 사람이야 사람.
심연의 출구를 탐색하러 살금살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깊은 곳이 아니기에 괴물들의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소리에 민감한 녀석들이 적기에 피해 다니기도 어렵지 않다.
흉측한 게 주변에 없자 소녀도 한쪽 눈만 살짝 뜨더니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다만, 잠복하고 있는 녀석들이 있기에.
"거기 가지 마. 바위처럼 보이지만 몬스터다."
"······정말요?"
"근처만 안 가면 안 잡아먹히니까 안전해."
"그걸 안전하다고 말하는 게 맞아요?"
천천히 신중하게 움직인다. 몇 번인가 출구 같아 보이는 문이 나타났다.
하지만 저것들 다 더 깊은 곳으로 통하는 문이다.
출구는 더 좆같은 위치에 나타난다.
많은 뉴비들이 저런 문에 낚여서 깊이깊이 들어가다가 다음 세계로 넘어갈 것이다.
꽤 오랫동안 움직였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좋지 않군. 하고 생각하는데 형형색색의 그라데이션으로 빛나는 비석이 갑자기 눈앞에 출현한다.
뭐야, 혼돈의 여신이잖아.
저리 꺼져.
심연만 오면 장난질이야.
사냥꾼도 혼돈의 악명은 익히 들어 아는 모양인지 슬쩍 쳐다보다가 눈을 돌린다.
소녀는 아는 척하기 위해 나랑 똑같은 태도를 취한다.
계속해서 걷는데 또다시 비석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더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아니, 이거 몬스터들이 유인당하겠는데. 혼돈이시여 일부러 그러는 겁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무시하고 전진했다.
모퉁이를 돌자 다시 비석이 출현했다. 이번엔 눈에 띄는 장식은 다 사라져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린 다음 무시하고 전진했다.
다시 비석이 나타났다.
글귀가 새겨져있다.
[특별 바겐 세일! 지금이라면 기도 한방에 신도로 받아줌!]
장난이 심하시군.
다시 무시하고 전진.
비석이 또 나타난다.
[살려줘.]
······?
혹시 이번 세계의 혼돈은 ‘혼돈과 자유의 여신'인가?
한번만 더 무시해보기로 했다.
비석이 나타났다.
[제발 살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맙소사. 이쯤 되면 장난치는 건 아니다.
이 신, 지금 신도가 0명이다.
소멸 위기로군.
그렇다면, 협상의 시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