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2화
???층 - 심연(2)
이 미궁에서 신이라는 존재는 갑이다.
유배자에게는 특히 절대적인 갑이다.
그러니 신을 상대로 신도가 슈퍼 을이 될 수 있는 상황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경우 신은 신도를 관찰하는 절대자일 뿐이다.
개중 마음에 드는 신도가 있다면 무언가 하사할 때도 있다.
때때로는 공략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기도 한다.
정말 드물게 아주 마음에 든 상대라면, 죽음의 위기에서 권능을 발휘하여 구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 근본적으로는 자기마음대로인 존재들이다.
아득한 옛날 미궁을 정복할 뻔했었다는 유배자들.
모험가로서 최고봉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없는 그들의 사고는 지극히 완고하고 자기중심적이다.
물론.
지금은 그저 미궁에 묶여 누군가가 자신들을 해방해줄 날만 기다리는 죄수들일 뿐이다.
힘만 더럽게 세고 성질 고약한 죄수.
유배자는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뉘앙스가 있다.
그 희망을 포기해버린 것이니 죄수라는 것은 신을 부르기에 아주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내가 알던 게임 설정에서 미궁이 해방될 때 신들이 어떻게 될지에 관해서는 없었다.
스토리 작가한테 아무리 물어봐도 절대 알려주지를 않더라.
그러니 신들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미궁의 모든 것이 해방되더라도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가련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불멸의 존재로 보이는 신은 신도가 없을 때 죽는다.
비석 앞에 무릎을 꿇는다.
신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외며 기도를 바치자 메시지가 떠오른다.
[혼돈의 여신이 당신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메시지 쓰시깁니까?’
[혼돈의 여신이 신은 간접적으로 소통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제가 신도가 될 생각을 철회해도요?’
「살려준다매!」
드디어 육성이 들리는군. 아주 앙칼지다. 그리고 나이대가 좀 어리다. 우리 파티의 여고생씨보다 어리다는 느낌이니 중학생?
뭐 그래봐야 속은 수천 년쯤 묵었겠지.
그럼 아무 의미가 없지 않냐고 하겠지만 의외로 정신은 외형에 끌려가게 되어 있다.
스스로를 영원히 중학생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인격의 성숙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게 혼돈이 진짜로 철없는 중학생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냥 할매인 거 보단 다루기가 쉽다는 정도.
‘신이시여, 협상 테이블에 올릴 물건부터 보여주시죠.’
「혀 협상 테이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는 말 아십니까?’
「개새끼야!」
‘어허, 진짜 개새끼가 뭔지 보여드릴까요?’
「아니 잠깐, 미안해. 살려줘.」
이쯤에서 나는 이번 혼돈이 접미로 자유를 달고 나왔음을 확신했다.
‘자유’는 흠. 뭐랄까. 신의 성격을 좀 더 애새끼로 만들어준다.
혼돈과의 상성은 최악인데. 이게 애새끼 같은 신에게 휘둘릴 수 있어서 그렇다는 게 아니다.
신인 본인 입장에서 최악이다.
보통의 경우 신앙은 그렇게 쉽게 변경할 수 없다. 신이 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신앙을 바꾼 배교자는 다른 신이 잘 받아주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게 자유 접미를 달고 있다면 다르다.
신 본인이 신앙의 자유를 선언한 상태이며, 그런 성격이다.
타신들은 그런 행위에 간섭하지 않는다.
심지어 본인이 원하건 말건 한번 선언한 신명은 미궁에 묶이고 만다.
그 바람에 혼돈은 징벌을 내려 배교자를 붙잡을 수도 없었으리라.
혼돈의 여신이 머뭇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곤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작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조작해줄게.」
"무엇을?"
「권능의 확률.」
혼돈, 그 이름답게 신의 권능으로서 지닌 것은 죄다 확률 투성이다.
좋은 일, 나쁜 일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는 어느 만화의 손가락 흔들기 같은 권능에서부터, 이미 떠버린 스킬의 리롤까지.
극후반에는 맵을 리롤하는 수준의 기적도 보여준다.
그러나 그때쯤 되면 뭐가 떠도 큰 의미가 없다.
어차피 다 빡세서.
그래도 사용하기에 따라 유용할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외면 받는다.
가뜩이나 확률에 고통 받는 게임에서 주사위를 한 번 더 던지고 싶어 하는 자는 적다.
신의 권능은 일반적으로 변수 투성이인 이 게임의 몇 안 되는 상수다.
혼돈의 권능이 나쁜 건 아니다. 그러나 결국 굴릴 주사위가 하나 더 늘어나는 정도일 뿐이다.
그것에 만족하기에는 더 효율 좋은 신들이 많았다.
거기에 솔직히 혼돈의 여신을 섬기며 마인드맵에 걸리는 보정은 뱀파이어 같은 일부 종족을 제외하면 영 성능이······.
그래서 혼돈의 여신은 대부분의 세계에서 교세가 작은 하꼬다.
이번의 경우에는 아마, 접미가 자유라 정도가 더 심했으리라.
나만해도 임시로 혼돈을 섬기더라도 갈아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겠다.
‘혼돈과 자유의 여신’은 어느 세계에서나 목숨 줄이 간당간당했다.
처음부터 혼돈의 여신이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세계는 아마 그런 식으로 소멸한 후가 아니었을까?
어쨌건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거론 부족하죠.’
「개새끼야!」
‘어허.’
「아무리 그래도 신을 어디까지 등쳐먹으려고?」
‘지금 말하시는 조작 해준다는 거 그거 아닙니까?’
「뭐!」
미궁의 신이란 건 원래 고참 유배자다.
고참 유배자가 어떤 존재던가.
결국 신도를 수천 년 단위로 등쳐먹은 대선배들이라는 뜻이지.
‘신격에 손상 갈까봐 살짝살짝만 확률 올릴 거 다 압니다. 다른 신도가 생길 때까지만 버티자 아닙니까. 요샌 그런 확률 조작 잡혀갑니다.’
「너 몇 년차야?」
어차피 신도가 되면 알게 될 사실이다. 신에게까지 숨길 이유는 없다.
‘97년.’
「이거 미친놈이네.」
‘2975회차.’
「사람새끼도 아니네.」
‘말이 좀 심하신데. 다른 더 좋은 신 알아봐도 됩니까?’
「죄송합니다. 안 까불게요.」
슈퍼 을이라는거 처음이 아니긴 하다. 이거 아주 좋아. 늘 짜릿해. 늘 새로워.
어린애 괴롭히기 같긴 하지만 내가 연하니까 문제없다.
‘자, 그럼 확률 조작 말고.’
「말고 뭐?」
‘확정으로 원하는 거 띄워주기.’
「······.」
애초에 신의 권능은 상수라서 좋은 거다.
혼돈의 권능은 변수인 대신 잘 뜬다면 그 가치 자체는 다른 신을 앞선다.
그렇다면 그걸 상수로 써버릴 수 있다면?
혼돈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살려준다며······.」
‘죽인다고 안했습니다. 신 살해자라니 벌써 오그라드는데.’
「모르는 척 하지 마. 나 그런 짓하면 어차피 소멸하는데.」
노린 거긴 하지만 오해가 있었나 보군.
‘딱 세 번이면 됩니다. 긴 간격으로.’
회복할 시간은 줘야지. 신격에 반하는 행위를 하면 신도 데미지를 입는다.
혼돈은 잠깐 동안 침묵하더니.
「세 번? 진짜?」
급격히 반색했다.
‘신도 없는 거 압니다. 연달아 두 번하면 소멸할 테니까 나눠서 딱 세 번. 어차피 그게 한계치죠?’
「그건 맞는데. 왜 그렇게 잘 알아? 너 신 해봤어?」
경험이 있냐 없냐로 고르라면 있긴 한데. 이건 말하지 말자.
‘그래서 하실 겁니까. 마실 겁니까?’
「할게! 세 번! 진짜 딱 세 번이다!」
‘모시는 신과의 약속을 어기는 신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신을 등쳐먹는 신도도 없어 미친놈아.」
‘신도가 없어서 소멸하는 신은요?’
[혼돈의 여신이 당신에게 ‘개 같은 새끼 ;ㅅ;’ 라고 말합니다.]
‘아이고, 어르신. 이모티콘은 어느 신도한테 배우셨담? 아차차, 이제 그분은 신도도 아니시겠네?’
「개새끼야!」
큰일 났다. 적당히 해야 하는데.
놀리는데 일일이 반응하는 게 너무 재밌어서 못 참겠다.
* * *
심연에서 혼돈의 여신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이곳이 혼돈의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심연의 신은 혼돈의 여신이 무엇을 하건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혼돈을 섬기는 자는 심연에서 길을 인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권능의 영역이 아닌 신 개인의 호의다.
정말로 ‘완전히 자발적으로 베푸는 호의’다.
"이거 정말 마음에 쏙 들어요."
나는 소녀의 새 무기를 찾았다.
무너져 내린 계층의 잔해 속에 2층 수준의 조잡한 물건과는 비교할 수 없이 깔끔한 단검이 있었다.
재질도 제대로 벼려진 강철이다.
아무런 마법적 효과가 없다는 점은 조금 아쉽지만 초기장비보다도 훨씬 오래 쓸 수 있으리라.
사냥꾼은 이미 시체에서 확보한 활을 챙겼기에 아직 형태가 남아있는 화살을 열심히 주우러 다녔다.
온갖 곳에서 잡동사니가 쏟아지는 심연이다 보니 범상치 않은 화살도 몇 개인가 발견된다.
더 고급진 물건도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것들은 심연의 깊숙한 곳으로 점점 가라앉는다.
당연한 레벨 디자인이라 뭐라 불만가지기도 좀 그렇다.
혼돈의 여신은 ‘자발적으로’ 내 시야에 괴물들의 위치와 비교적 멀쩡한 장비들이 남은 곳을 표시해주고 있었다.
증강현실 맵핵이 따로 없다.
별로 멀쩡한 게 남아있지 않은 땅이지만 이렇게 누군가가 모조리 다 보여준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리스크도 사실상 없는 거나 다름없다.
붉은 기운이 서린 무언가가 무너진 잔해의 건너편에 표시되기 시작한다.
형태를 보아하니 부정형의 슬라임이다.
심연의 슬라임은 닿는 것을 다 녹이며 뚫고 다니는 녀석이다. 레벨은 무려 700.
도망가자.
원래라면 미리 알고 피하기 힘든 종류라 당당하게 심연 사망률 1위에 빛나는 친구다.
하지만 신의 가호 덕분에 안전하지.
무기만 챙기진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의복으로서 걸치고만 다녔던 거적떼기 위에 좀 갑옷 같은 갑옷도 챙겼다.
가죽 갑옷은 역시 민첩 계열 클래스의 기본이다.
세상에 판금 암살자 같은 게 어디 있나.
소녀의 경우에는 요정의 옷이 충분히 의복이자 갑옷이기에 굳이 바꾸지 않았다.
그렇게 여신님의 인도에 따라 이것저것 주워 입는다. 그러다 보니 좀 거시기한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우리 3민첩 클래스로군."
[혼돈의 여신이 당신의 안이한 파티 구성을 비웃습니다.]
"아이, 신이시여. 2층에서 왔는데 무슨 파티 구성을 따집니까. 지금부터 아니겠습니까."
[혼돈의 여신이 믿을 수 없어합니다.]
나도 내가 2층에서 심연으로 올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저기요, 아저씨."
"왜?"
소녀는 상당히 회복되어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이 깎여나갈 것 같은 기괴한 것들로부터는 최대한 멀어져 다녔기 때문이다.
심연의 가장 바깥은 괴물의 개체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 다행이다.
시야에 끔찍한 것들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복 학습한 소녀는 간신히 눈을 떴다.
나에게 달라붙어 있는 느낌인 것은 변함이 없다.
지금도 팔을 꼭 붙잡고 따라다니고 있으니까.
"저는 어떤 신님을 모시는 게 좋을까요?"
호기심도 다시 되살아났다. 내가 누군가와 자꾸 대화하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혼돈은 좀 아깝지."
[혼돈의 여신이 토라집니다.]
신도를 셋으로 안 만들어줘서 삐졌다.
혼돈을 신앙으로 삼은 것은 나뿐이다.
소녀나 사냥꾼에게는 좀 더 어울리는 다른 신이 있을 테니.
사냥꾼은 화살통이 가득차자 안색이 밝아졌다.
레인저에게 장탄 수는 언제나 스트레스인 법이다.
소녀가 밝아진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기는 했다.
빠져나갈 확실한 수단이 생겨서다.
출구가 어디있는지 여신께서 알려주시기만 하면 된다.
"진짜, 여기. 다시는 안 오고 싶어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뭐 나중엔 자주 오게 되긴 하는데 지금 미리 말해주지는 말자.
그나저나 바깥에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본래라면 우리 여신님께서 확인 해주셨겠으나.
[혼돈의 여신이 심연 바깥에 시야가 닿지 않는다고 미안해합니다.]
신도가 나 뿐이어서 알 수가 없으시단다.
[혼돈의 여신이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청합니다.]
메시지로 저런 거 띄우면 기분이 어떨까 싶군.
좀 잘해줘야겠다.
어쨋건 시간을 잘 알 수가 없었기에 너무 일찍 나가 2층으로 돌아가는 리스크를 피해야한다.
그야말로 넉넉하게 주관적인 시간으로 5일을 채운 후, 심연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잠깐만. 대체 며칠이 지난거야."
----- 작가의말 -----
혼돈의 권능 중, 리롤이라는건 랜덤으로 뜬걸 한번 더 랜덤으로 돌릴 수 있게 해준다는 말입니다.
어느 게임의 다른 혼돈걸과는 다르게 이 동네 혼돈은 나름대로 성능이 나오는 신앙입니다. 좀 애매한데다, 불안정하고, 특정 상황에서만 좋다는 단점이 있을 뿐이지요.